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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슈테판 3세 | 카롤 1세 | 미하이 에미네스쿠 | 미하이 2세 | 리하르트 부름브란트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이온 안토네스쿠 | 미르체아 엘리아데 |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 콘스탄틴 브랑쿠시 | 나디아 코마네치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 블라드 3세 | 조지 비칼리 | 헨리 코안더 | 게오르게 하지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이온 루카 카라지알레 | 니콜라에 이오르가 |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 제오르제 에네스쿠 | 그레고리안 비볼라루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미렐 러도이 |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 니콜라에 티툴레스쿠 | 페르디난드 1세 | 미하이 1세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데케발루스 | 트라이안 버세스쿠 | 게오르그 뮤레산 | 이온 I. C. 브라티아누 | 러즈반 루체스쿠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니콜라에 파울레스쿠 | 이울리우 마니우 | 이울리우 호수 | 에밀 시오랑 | 아브람 이안쿠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부레비스타 |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 페트레 투테아 | 코르넬리우 코포수 | 아우렐 블라이쿠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이오시프 트리파 | 니키타 스터네스쿠 | 이온 크레안거 | 마델리나 마놀 |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트라이안 부이아 | 루치안 블라가 | 조지 에밀 퍼레이드 | 아나 아슬란 | 아드리안 무투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플로린 피에르시크 | 미하일 코갈리차누 | 야노스 코뢰시 | 디미트리에 칸테미르 | 일리에 너스타세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게오르그 잠피르 | 기카 페트레스쿠 | 엘리사베타 리제아 | 불라 | 암자 펠라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마차시 1세 | 미르체아 1세 | 티투 마이오레스쿠 | 토마 카라지우 | 미하이 트라이스타리우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안드레아 마린 | 에밀 라코비차 | 빅터 바베슈 | 니콜라에 발체스쿠 | 호리아로만 파타피에비치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이온 일리에스쿠 | 마린 프레다 | 외젠 이오네스코 | 두미트루 스타닐로아 | 알렉산드루 토데아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투도르 게오르게 | 이온 티리아크 | 일리에 클레오파 | 아르세니 보카 | 바넬 니콜리타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두미트루 코르닐레스쿠 | 그리고레 모이실 | 클라우디우 니쿨레스 | 플로렌틴 페트레 | 마리우스 모가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니콜라에 스타인하트 | 로라 스토이카 | 커털린 흘단 | 안겔 살리그니 | 이반 피차이진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마리아 터나세 |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 | 옥타비안 팔러 | 무명용사 | 치프리안 포룸베스쿠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니쿠 코바시 | 두미트루 프루나리우 | 후녀디 야노시 | 콘스탄틴 노이카 | 바데아 카르탕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558년 | ||
왈라키아 공국 플로치 | |||
사망 | 1601년 8월 9일 또는 8월 19일 (향년 42~43세) | ||
트란실바니아 공국 투르다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593년 9월 ~ 1600년 9월 | |||
트란실바니아 공 | |||
1599년 10월 ~ 1600년 9월 |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600년 6월 ~ 1600년 9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파트라스쿠 첼 분? 어머니: 테오도라 칸타쿠지노 | |
배우자 | 스탠카 | ||
자녀 | 니콜라에 파트라스쿠, 플로리카 | ||
가문 | 드라쿨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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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48대 보이보드, 트란실바니아 공국 5대 공, 몰다비아 제42대 보이보드. 주권자인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반기를 들어 여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끝에 사실상의 독립을 이뤘고, 1599년부터 1600년까지 트란실바니아 공, 1600년에는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겸임해, 역사상 처음으로 루마니아인 군주 한 사람이 현재의 루마니아 전체를 통합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등 외세의 간섭, 그리고 급격한 통합에 반발한 내부 저항세력의 분규 등으로 얼마 안가 허물어졌고, 권좌를 되찾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군 장성으로 발탁되어 제국군이 트란실바니아를 손아귀에 넣는 데 기여했으나, 그를 경계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밀명으로 암살당했다. 오늘날 루마니아인들은 그를 외세를 물리치고 루마니아의 통일을 이룩한 선구자로서 높이 평가하며, '비테아줄(Viteazul: 용감한 자)'이라는 경칭을 붙였다.
2. 생애
2.1. 기원과 초년기
1601년 프라하에 머물렀을 때, 미하이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궁정 화가 에기디우스 사델러에게 자기 초상화를 그리도록 의뢰했다. 사델러는 그의 초상화 측면에 '그의 생애 43세'를 의미하는 'aetatis XLIII'라는 문구를 적었다. 이는 미하이 2세가 1558년에 태어났음을 암시한다. 당대의 대다수 연대기에는 그가 왈라키아 공국 제40대 보이보드 파트라스쿠 첼 분의 사생아라고 기술되었으며, 이는 오랫동안 학계에서 정설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루마니아 역사가이자 총리인 니콜라에 이오르가(Nicolae Iorga, 1871 ~ 1940)를 비롯한 현대의 여러 루마니아 역사가들은 파트라스쿠는 사망한 해인 1557년에 시비우에서 오랜 투병 끝에 사망했기 때문에 정부와 성관계를 맺어서 그를 낳았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미하이 2세가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파트라스쿠를 아버지로 내세웠을 거라고 추정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인이라고 한다.어머니 테오도라 칸타쿠지노는 일부 기록에 따르면 동로마 제국 황실 가문인 '칸타쿠지노스 가문'의 일원이라고 하며, 다른 기록에 따르면 플로치 출신의 브랜디 상인이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그녀가 칸타쿠지노스 가문의 일원인지는 불분명하나, 적어도 한낱 상인 가문 출신일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코스탄티니예의 고위 지사이자 크라이오바의 반(Ban)이었던 이안 칸타쿠지노가 그녀의 사촌이라는 기록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한편, 미하이 2세는 올타니아의 발체아 지역에 있는 브레조이에서 스탠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스탠카의 아버지는 스탠 지역의 보야르였고, 어머니는 마리아라는 이름의 수녀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카르스티에네슈티와 포아이나 마을을 상속받았다. 미하이 2세는 이 결혼을 통해 올테니아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미네아 2세 통치 시기인 1588년 메헤딘치의 반이 되었고, 그해 말에는 왈라키아 궁정의 스톨니치(Stolnic: 보이보드의 식탁 관리를 담당한 궁정 고위 관원)로 발탁되었고, 1593년 알렉산드루 3세 첼 라우 통치 기간 동안 크라이오바의 반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알렉산드루 3세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긴급 체포된 뒤 처형되기 직전에 몰렸지만, 보야르 12명 앞에서 자기가 드라쿨레슈티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고 맹세하는 대가로 풀려났다고 한다. 그 후 라두, 프레다, 스트로에 부제스쿠 3형제 및 다른 보야르들과 함께 트란실바니아로 도주해 바토리 이슈트반의 궁정에서 2주를 머문 뒤 코스탄티니예로 떠났다.
이후 콘스탄티니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 트라노스 및 어머니의 친족들의 도움을 받아 오스만 제국 궁정에 접근했다. 그는 잉글랜드 대사 에드워드 브래튼으로부터 200,000플로린의 대출을 받은 뒤, 궁정 관리들에게 뇌물을 뿌리면서 알렉산드루 3세의 폭정을 성토하고, 자기가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된다면 혼란을 수습하고 그들이 왈라키아 보이보드들에게 빌려준 돈을 받아내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파디샤 무라트 3세는 1593년 9월 관원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미하이 2세를 새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알렉산드루 3세는 그동안의 행적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코스탄티니예로 향했다가 곧바로 체포된 후 가신 조항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어 4년간 구금되었다가 1597년 3월 20일에 코스탄티니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리하여 미하이 2세는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2.2.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무라트 3세의 지명으로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된 미하이 2세는 1593년 10월 15일 부쿠레슈티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보이보드가 되자마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대로 헝가리 전선에서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속국인 도나우 공국(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과 트란실바니아 공국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치게 했다. 해당 지역 통치자들은 지시에 따르기 위해 주민들을 수탈해야 했고,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갈수록 커졌다. 전임 보이보드인 알렉산드루 3세 역시 막대한 공물을 바치기 위해 주민들을 수탈해야 했고, 즉위 전에 오스만 관원들이 보이보드들에게 빚진 돈을 받아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특별세를 악착같이 징수하다가 주민들의 반감을 사 폭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관리 소홀 혐의로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가서 목숨을 잃었다. 미하이 2세는 이 상황에서 권력을 유지하려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밖엔 방도가 없다고 판단했다.1594년 11월 13일, 미하이 2세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주도로 설립된 기독교 신성 동맹에 가담했다. 처음에 신성 동맹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교황령, 스페인, 페라라 공국, 만토바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이 가담했고, 그 다음으로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가담했으며, 1594년 9월 16일 몰다비아 보이보드 아론 트리아눌이 뒤이어 참가했다. 미하이 2세는 이웃한 두 공국이 신성 동맹에 가담하자 자기도 가담하기로 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그는 빚진 돈을 받아내기 위해 부쿠레슈티에 방문했던 채권자들과 그곳에 주둔한 오스만 수비대 전체를 학살했다.
미하이 2세는 뒤이어 8,000 장병을 이끌고 왈라키아 남쪽의 도나우강 일대에 설치된 오스만 요새들(지우르지우, 투르누, 하르쇼바, 실리스트라)를 연이어 공격해 심한 파괴를 자행했다. 오스만 측은 이를 응징하기 위해 왈라키아에 가까운 현지군을 급파하는 한편, 크림 타타르 용병대를 고용해 왈라키아를 급습하게 했다. 그러나 크림 타타르 용병대는 왈라키아로 진입했다가 푸티네이우에서 기습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고, 오스만 제국군 역시 스타네슈티 마을 인근의 파디나[1] 세르파테스티에서 궤멸되었다.
미하이 2세는 여세를 이어가 루세를 습격해 파괴를 자행했다. 한편, 몰다비아 보이보드 아론 역시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루마니아인과 함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해 이아시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군은 헝가리 전선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붙이고 있던 터라 왈라키아,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갑작스러운 반란에 대처할 병력을 제때에 보낼 수 없었다. 미하이 2세는 이때를 틈타 발칸 반도 깊숙이 공세를 개시해 니볼루, 리프니치, 킬리 요새를 점령하고 여러 농촌과 도시를 심하게 약탈했다. 급기야 오스만 제국의 옛 수도이며 코스탄티니예와 지척인 에디르네까지 진출해 주변 지역을 약탈한 뒤 왈라키아로 귀환했다.
1595년, 몰다비아 보이보드 아론이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의 음모로 체포된 뒤 트란실바니아의 수도인 줄러페헤르바르로 이송된 후 독살당했다. 그 후 왈라키아 보야르들은 미하이 2세를 대신해 바토리 지그몬드와 협상한 끝에 줄러페헤르바르 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12명의 대 보야르로 구성된 위원회는 보이보드와 함께 국가의 행정 통치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보야르들은 트란실바니아 공의 승인 없이는 보이보드에게 처형될 수 없고,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았다. 미하이 2세는 사절들이 협상한 조약 내용이 자기에게 지극히 불리하고 보야르들에게 유리한 걸 보고 불만을 품었지만,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보야르들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그 후 미하이 2세는 보야르들의 지지를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 그들의 영지에 소속된 농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곳을 떠날 수 없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부유한 농노들은 뇌물을 바쳐서 법망을 빠져나갔고, 군자금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미하이 2세는 이를 눈감아줬다. 한편, 줄러페헤르바르 조약에서는 트란실바니아의 모든 루마니아 정교회가 트르고비슈테 대주교의 반할권에 속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무렵, 오스만 제국은 미하이 2세를 응징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했다. 헝가리 전선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했던 오스만 대재상 시난 파샤가 85,000 ~ 1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루세로 집결시켰다. 이에 맞서는 미하이 2세는 15,000명의 왈라키아군과 트란실바니아의 세케이인 분견대, 일부 용병대, 그리고 대형 야전포 12문을 갖췄다. 미하이 2세는 적의 임박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 장소를 물색한 끝에, 칼니슈테아 강과 네일로브 강의 교차점인 칼루가레니 마을 부근에 군대를 배치했다. 그곳의 지형은 숲으로 두러싸인 습지였기에, 오스만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전투력을 약화할 수 있었다. 10,000 병력과 대포 10문이 네일로프 강 북쪽과 마을 남쪽에 배치되었고, 세켈러 용병대장 알베르트 키랄리는 세케이 분견대와 왈라키아 예비군 6,000명을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평원에 배치했다.
1595년 8월 23일 오전, 미하이 2세가 급파한 왈라키아 기병대가 칼루가레니로 접근하던 오스만 선봉대를 기습 공격해 타격을 입힌 뒤, 그들이 반격을 시도하자 네일로프 강으로 후퇴했다. 한창 행군하던 중 선봉대가 적을 추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시난 파샤는 적군이 선봉대를 포위 섬멸하려 들 것을 우려해 12,000명을 추가로 파견했다. 오스만군은 적이 네일로프 강위에 설치된 좁은 다리를 건너는 걸 보고 즉시 따라가서 다리를 건넜지만, 그걸 기다리던 미하이 2세가 포병대를 시켜 포격을 퍼부은 후 맹렬히 공격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고 강 건너로 밀려났다.
그날 정오, 35,000 ~ 40,000 가량의 병력을 집결한 시난 파샤는 총공세를 감행하기로 했다. 예니체리가 다리를 건너 정면 공격을 가하는 동안, 메흐메트 시타르기 파샤가 기병대를 이끌고 동쪽의 습지대를 지나 강을 건너 적의 배후를 치고, 루엘리아의 베일러베이 하산 파샤가 분견대를 이끌고 서쪽의 숲으로 이동해 역시 강을 건너 적의 배후를 치도록 했다. 예니체리들은 좁은 다리를 통한 공세가 격퇴되자, 통나무와 판자를 깔아서 다리 외의 건널목을 확보한 뒤 다시 공세를 개시했다. 왈라키아군은 굳건히 버텼지만, 동쪽으로 이동했던 오스만 기병대가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너 왈라키아군의 좌익을 위협하자 미하이 2세의 명령에 따라 후퇴하면서 모든 대포를 버렸다. 그 후 미하이 2세는 마을 북쪽에 군대를 집결한 뒤 상황을 살폈다.
그날 오후, 짙은 안개가 끼면서 시야가 불량해졌다. 미하이 2세는 대병력인 적군이 강을 아직 다 건너지 못했고, 자신들이 재차 반격할 거라 예상하지 못하리라고 판단하고, 안개를 틈타 강을 건넌 적군을 기습하기로 했다. 여기에 정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코체아 대위의 기병 400기를 측면 기동에 사용했다. 오스만군은 적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예상하지 못해 속절없이 밀려나 네일로프 다리로 밀려났고, 왈라키아군은 야전 대포 12문을 탈환한 뒤 다리 쪽으로 몰린 적을 향해 발포해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시난 파샤는 호위대와 함께 최전선으로 달려가 상황을 회복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코체아 대위의 기병대가 오스만군의 후방을 강타하자, 오스만군은 혼란에 빠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왈라키아군은 추격했는데, 전승에 따르면 미하이 2세는 전투 도끼를 들고 시난 파샤를 공격해 습지대에 낙마하게 했지만, 노예 한 명이 시난 파샤를 구해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때까지 숲을 헤매던 하산 파샤의 군대가 나타나 아군의 오른쪽 측면을 위협하자, 미하이 2세는 추격을 중단하게 한 뒤 모든 병력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해 궤멸시켰다.
칼루가레니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미하이 2세는 시난 파샤에게 여전히 대규모 병력이 있으며 자신이 가진 병력으로는 이들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는 적군이 부쿠레슈티를 향해 행진하는 걸 허용하고 산악 지대로 후퇴해 바토리 지그몬드의 지원을 기다렸다. 시난 파샤는 부쿠레슈티에 도착하여 그곳에 메흐메트 파샤와 10,000명의 수비대를 배치하고 교회를 모스크로 바꾼 뒤, 트르고비슈테를 추가로 점령하고 1,500명의 병력과 대포 30문을 남겨뒀다. 오스만군 대부분은 스토에네슈티로 진군해 미하이 2세의 군대 앞에 진영을 세웠지만, 험준한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시난 파샤는 왈라키아 각지에 분견대를 파견해 여러 곳을 장악하고 오스만 관리들을 임명해 왈라키아를 제국의 직할령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스만군의 가혹한 수탈과 약탈에 분노한 왈라키아인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키면서, 점차 입지가 불안해졌다.
1595년 9월 6일,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가 용병 13,200명, 세케이인 8,000명을 이끌고 미하이 2세와 합류했다. 여기에 10월 초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가 파견한 정예병 1,500명과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온 실비오 피콜로미니 휘하 포병 300명이 도착했다. 미하이 2세는 총 23,000명에 달하는 연합군의 선봉에 서서 반격 작전을 개시해 10월 5~8일 트르고비슈테 공방전을 벌인 끝에 탈환했고, 뒤이어 부쿠레슈티로 진군해 1595년 10월 12일 치열한 공병전을 치른 끝에 탈환했다. 여기에 왈라키아인들이 대거 합세하면서 적의 군세가 갈수록 불어나자, 시난 파샤는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10,000마리 이상의 짐승과 포로 수천 명을 끌고 가느라 철군 속도가 매우 느렸고, 결국 10월 15일 도나우 강변의 지우르지우에서 철수 작전을 수행하던 중 연합군에게 따라잡혔다. 시난 파샤 본인은 강을 건넜지만, 10,000명 가량의 병사들과 포로, 짐승들은 강을 미처 건너지 못했다. 이어진 지우르지우 전투에서, 미처 건너지 못한 오스만군 대부분이 궤멸되었다. 생존한 병사들은 지우르지우 성채로 들어가서 며칠 동안 처절하게 항전했지만, 끝내 궤멸되었다. 특히 오랜 세월 정찰 및 적지 약탈 임무를 수행했던 아킨지(Akinji) 부대는 이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시난 파샤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실각했고, 미하이 2세는 승리의 여세를 이어가 도나우 강 남쪽으로 진군해 이사카아, 마신, 체르나보다, 라즈그라드, 바바다그, 실리스트라, 루시우츠, 시슈토바, 니볼루, 비딘 요새와 도시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그리하여 도나우 강변에 포진해 왈라키아를 옥죄었던 오스만 제국의 거의 모든 요새가 파괴되었으며, 도나우 강 남쪽의 많은 영토가 황폐해졌다. 1595년 1월에는 도나우 강의 외쪽 기슭 전체가 왈라키아의 손아귀에 넘어갔으며, 도나우 강 동쪽의 요충지인 투르누 요새 역시 미하이 2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왈라키아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이에 미하이 2세는 왈라키아 출신의 모든 토지 없는 농민을 보야르들의 영지에 강제 정착시키고 그들의 후손까지 영구적으로 보야르들의 농노로 귀속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공표했고, 이를 통해 큰 이득을 얻은 보야르들로부터 돈을 받아냄으로써 재정을 충당하고자 노력했다.
1596년 10월 26일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와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가 이끄는 40,000 ~ 50,000 가량의 신성 동맹군이 오스만 파디샤 메흐메트 3세와 다맛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군 80,000 ~ 10,000명을 상대로 패배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 공국과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자신을 도와줄 여력이 없어지면서 오스만 제국의 반격이 가시화되자, 미하이 2세는 오스만 제국에 화해를 청했다. 때마침 오스만 제국 역시 오랜 전쟁으로 지쳤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양자는 1597년 12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미하이 2세는 오스만 제국을 주권자로 받아들이고 공물을 바쳐야 했지만, 도나우 강변의 요새들을 그대로 가지는 걸 허락받았으며, 오스만 제국은 그가 평생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통치하는 걸 받아들이고 통치자의 깃발을 선물했다. 1598년 6월 9일, 미하이 2세는 딜루 수도원에서 루돌프 2세의 사절단과 조약을 체결했다. 루돌프 2세는 그에게 군대 유지를 위한 보조금을 제공하기로 약속했으며, 미하이 2세가 자신을 주권자로 섬기는 대가로 자손 대대로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세습하는 걸 받아들였다.
2.3. 트란실바니아와 몰다비아 공략
1595년 8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원에 힘입어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된 이에레미아 모빌라는 형제인 시미온 모빌라를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다. 여기에 1598년 3월 23일 바토리 지그몬드가 퇴위한 뒤 트란실바니아의 새 공이 된 바토리 언드라시도 자기 동생 이슈트반을 왈라키아의 보이보드로 앉히려 했다. 미하이 2세는 1598년 6월 26일 바토리 언드라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자리를 보전하려 했지만, 언드라시의 사절단은 7월 3일에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찾아가서 협정을 맺었다. 언드라시는 여기에 더해 오스만 제국과 협상해 자신이 왈라키아에 대한 종주권을 가지는 걸 인정받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바치겠다고 제안했고, 오스만 제국은 위험 인물인 미하이 2세보다는 언드라시 쪽이 상대하기 편할 거라 여기고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1598년 8월, 트란실바니아 전임 공 바토리 지그몬드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사촌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결혼이 무효로 선언되었다. 언드라시는 마리아와 결혼하면 루돌프 2세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여기고 그녀와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루돌프 2세는 언드라시가 트란실바니아에서 통치하는 걸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언드라시의 요청을 기각했다. 미하이 2세는 루돌프 2세의 마음을 읽고, 1599년 7월 프라하에 있던 루돌프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기가 트란실바니아를 차지하는 것에 동의하는지 물었다. 루돌프 2세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같은 해 말 루마니아인과 트란실바니아 출신의 헝가리인과 세케이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등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25,000명 가량의 병력을 동원해 부자우 고개를 통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했다.
1599년 10월 28일, 미하이 2세는 셀림바르 전투에서 바토리 언드라시가 이끄는 16,000명 가량의 트란실바니아군을 격파했다. 언드라시는 몰다비아로 도망쳐서 이에레미아 모빌라와 합세해 재기를 도모하려 했지만, 도중에 산지에서 세케이인들에게 생포된 뒤 10월 31일에 참수된 후 수급이 미하이 2세에게 전달되었다. 그 후 미하이 2세는 1599년 11월 1일 트란실바니아의 중심지인 줄러페헤르바르에 입성한 후 주교 데메트리우스 나프라기로부터 요새의 열쇠를 받았다. 이후 언드라시의 수급을 줄러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정중히 묻었다. 전승에 따르면, 미하이 2세는 루마니아 관습에 따라 언드라시의 수급이 담긴 관을 양초를 손에 든 채 따라갔다고 한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소집한 뒤 귀족들로부터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추대된 후 스스로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의 통치자"를 칭했다. 또한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법률, 제도 및 관습을 준수했고, 모든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을 확인했다. 또한 바토리 지그몬드와 바토리 언드라시 치세 때 박해받았던 세케이인의 자치권을 인정했으며,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작센인들이 루터교를 믿는 걸 허용했다.
트란실바니아를 공략한 뒤, 미하이 2세의 눈길은 몰다비아로 향했다. 1600년 4월 14일, 미하이 2세는 줄러페헤르바르를 떠나 왈라키아로 돌아가면서 미할카 반이 자신을 대신해 트란실바니아를 통치하도록 했다. 1600년 5월 1일 브러쇼 인근에 숙영지를 세운 그는 장병들에게 지난날 자기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던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추방하기 위해 몰다비아로 쳐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5월 6일, 미하이 2세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등반했다. 이때 그는 적군이 산길을 막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통행이 가장 어려워서 경계가 허술한 산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지만, 그의 군대는 몰다비아에 도착한 뒤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레미아 모빌라는 미처 이를 막을 병력을 모으지 못하고 바커우로 도주했지만, 적군이 그곳까지 이르자 가족과 함께 호틴으로 피신했다.
1600년 6월 1일, 미하이는 몰다비아 공국의 중심지인 이아시에 도착한 뒤 몰다비아 보야르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후 루돌프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이에레미아 모빌라가 오스만 제국, 크림 칸국와 연합해 왈라키아를 침공하려 했다고 주장하면서,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 왈라키아에 대한 자신의 영구 통치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해 7월 6일자 공식 문서엔 "루마니아 땅과 트란실바니아 및 몰다비아 전체의 군주"를 칭했다. 그 후 미하이 2세는 몰다비아에 대리인을 앉혀놓은 뒤 트란실바니아로 이동했다.
2.4. 몰락
미하이 2세가 1599년부터 1600년까지 불과 1년만에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를 석권하자, 주변 열강들은 긴장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루돌프 2세는 충실한 봉신이라 여겼던 미하이 2세가 너무 강해져서 트란실바니아를 영향권에 두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고 여겼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몰다비아가 미하이 2세에게 넘어가면서 통제권을 잃게 생기자 불만을 품었다. 오스만 제국 역시 미하이 2세의 급격한 성공으로 인해 봉신으로 두기 힘들어졌다고 여겼다. 여기에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귀족들은 미하이 2세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으며, 작센인들은 미하이 2세의 군대가 여러 마을에서 약탈을 저지르자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미하이 2세는 자기에게 공공연히 적대하는 헝가리 귀족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그러던 중 조르조 바스타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18,000명이 헝가리 귀족들을 돕기 위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하이 2세는 이에 맞서려 했다. 1600년 9월 18일에 벌어진 미라슬라우 전투에서, 미하이 2세는 무레슈 강, 언덕, 로파데아 강 및 도랑으로 둘러싸인 요새화된 지형에 10,000 ~ 12,000명을 배치하고 오스트리아군과 맞서 싸웠다. 조르조 바스타는 미하이 2세의 군대가 강력한 방어 진형을 구축한 걸 보고, 그들을 유인하기로 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군이 적진을 공격했다가 강력한 저항에 못 이겨 후퇴하자, 미하이 2세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로 마음먹고 기병대를 이끌고 추격했다. 그러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총사대가 왈라키아 기병대를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고, 뒤이어 독일 흉갑 기병대가 출격해 믹대한 피해를 입혔다. 결국 미하이 2세는 4,000명을 잃고 패주했고, 트란실바니아는 순식간에 오스트리아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미하이 2세는 산지에 사는 주민의 도움으로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한 뒤 몰다비아로 돌아갔다.
그 사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원수 얀 자모이스키가 윙드 후사르를 앞세워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미하이 2세는 군대를 새로 모집한 뒤에 이에 대항하려 했지만, 1600년 10월 20일 부코프 전투에서 참패하고 왈라키아로 도주했다. 얀 자모이스키는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한 뒤, 여세를 이어가 왈라키아로 쳐들어갔다. 이에 왈라키아 보야르들은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미하이 2세를 배신하고 이에레미아 모빌라의 형제인 시미온 모빌라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이제 미하이 2세를 따르는 지역은 오직 왈라키아 서부의 올테니아만 남았다.
2.5. 최후
미하이 2세는 해외로 피신한 뒤 루돌프 2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기나긴 여정을 떠났다. 도중에 트란실바니아 일대를 지나다가 여러 차례 공격받는 등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1601년 1월 2일 동료 40인과 함께 기어이 빈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오스트리아 대공 마티아스의 영접을 받았다. 3월 14일, 미하이 2세는 마티아스의 인도하에 황제 루돌프 2세를 알현했다. 루돌프 2세는 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시키는 대신 자기에게 반기를 든 바토리 지그몬드를 트란실바니아 공에서 축출하는 것을 권유했고, 미하이 2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그 후 미하이 2세는 지난날 미라슬라우 전투에서 자신을 격파하고 트란실바니아를 빼앗아갔던 조르조 바스타와 함께 트란실바니아로 쳐들어갔고, 1601년 8월 3일 구루스라우 전투에서 바토리 지그몬드를 격파하고 조르조 바스타가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 군림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여세를 이어가 왈라키아로 진군해 시미온 모빌라를 축출하고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루돌프 2세는 1년 전에 루마니아 전역을 석권했던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조르조 바스타에게 그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1601년 8월 9일 또는 8월 19일, 미하이 2세는 투르다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평원에서, 조르조 바스타의 왈롱인 용병대장 자크 드 보우리가 이끄는 용병들의 습격을 받았다. 미하이 2세는 자기 천막을 습격한 그들에 맞서 검을 뽑아 용병 한 명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다른 용병이 내지른 창에 배를 찔러 땅바닥에 쓰러진 뒤 머리가 베어졌다. 그의 유해는 크리스티슐루이 평야에 던져졌고, 수급은 나중에 미하이 2세의 부하인 투르투레아 파하르니쿨이 수습해 왈라키아로 가져와 달루 수도원에 있는 그의 아버지로 간주된 파트라스쿠 첼 분의 유해 옆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지 석판에는 아래의 문구가 기술되었다.
"루마니아 땅과 트란실바니아 및 몰다비아의 영주였던 대 보이보드이자 기독교인 미하이가 여기에 누워 있다."
3. 가족
- 스탠카(? ~ 1603): 스탠 지역의 보야르와 마리아라는 이름의 수녀의 딸이라고 전해지며, 아버지로부터 카르스티에네슈티와 포아이나 마을을 상속받았다. 1600년 남편으로부터 파기라슈 성채와 영지를 부여받았지만, 9월 미하이 2세가 미라슬라우 전투에서 패배한 뒤 두 자녀와 함께 파기라슈 시에서 인질로 잡혔고, 1601년 8월 미하이 2세가 투르다에서 살해된 뒤 노예로 지내다가 1603년 12월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1938년 루마니아 여성 단체의 파가라슈 지부는 루마니아 역사가이자 정치인 니콜라에 이오르가(Nicolae Iorga)의 제안에 따라 스탠카의 흉상을 건립했다.
- 니콜라에 파트라스쿠(1584 ~ 1627): 1599년 11월 왈라키아의 공동 보이보드로 선임되어, 트란실바니아에서 통치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왈라키아를 다스렸다. 1600년 9월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공세로 왈라키아에서 쫓겨난 뒤 아버지와 함께 루돌프 2세의 궁정으로 갔고, 그곳에서 황제를 섬기다가 1608년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하려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가보르에게 체포된 뒤 왈라키아로 보내져서 라두 10세에 의해 코가 베어졌다. 이후 추방된 뒤 빈에서 가난에 시달리다 1627년 통풍으로 사망했다.
- 플로리카(1585 ~ ?): 보야르 프레다의 부인. 아버지가 살해된 후 가족과 함께 방황하다가 미하이 2세의 어머니 테오도라가 수녀로 지내던 코지아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모종의 시기에 사망한 뒤 그곳에 묻혔다.
4. 평가
미하이 2세는 사후에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몰다비아 연대기 작가 미론 코스틴(Miron Costin, 1633 ~ 1691)은 그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많은 피를 흘리게 한 원흉이라고 비판했으며, 그를 따랐던 왈라키아인들도 미하이의 호전적인 통치에 지쳐서 폴란드군에게 쉽게 항복했다고 밝혔다. 왈라키아의 연대기 작가 라두 포페스쿠(Radu Popescu, 1655 ~ 1729)는 저서 <왈라키아 군주들의 역사>에서 미하이가 튀르크인, 몰다비아인, 헝가리인을 마치 자신의 당나귀인 양 지배했다며, 그의 모든 적을 구별 없이 하나로 묶었을 뿐, 그의 통치를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민족주의 열풍이 루마니아에 퍼지면서, 미하이 2세는 민족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루마니아 역사가이자 혁명가 니콜라에 발체스쿠(Nicolae Bălcescu, 1819 ~ 1852)는 자신의 저서에서 미하이 2세가 오스만 제국의 박해로부터 루마니아인을 구원했으며, 중세 루마니아 3개 국가를 최초로 통합한 영웅으로 칭송했다. 1881년 루마니아 왕국이 정식으로 출범한 뒤, 미하이 2세는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현재 루마니아엔 그의 이름을 딴 9개 지역이 있으며, 거의 모든 도시에는 "Mihai Viteazul"또는 "Mihai Bravul"이라는 거리가 있으며, 부쿠레슈티의 미하이 브라부 대로 역시 그의 이름을 땄다.
또한 수많은 루마니아 고등학교와 국립대학에 "Mihai Viteazul"이라는 이름이 있으며, 여러 군사 고등 교육 기관도 그의 이름을 땄다. 제30근위여단 "미하이 비테아줄"은 루마니아군의 정예 부대로 취급된다. 1916년 9월 26일 페르디난드 1세가 제정한 전쟁 훈장 "미하이 비테아줄"은 루마니아군 최고의 훈장으로 취급된다. 미하이 2세를 기리는 수많은 기념물도 세워졌다. 가장 오래된 조각상은 1874년 프랑스 조각가 알베르트-에르네스트 캐리어-벨뢰즈(Albert-Ernest Carrier-Belleuse, 1824 ~ 1887)가 부쿠레슈티 대학 광장에 세운 미하이 2세의 승마 동상이며, 그가 살해된 장소인 투르다에 오벨리스크가 세워졌고, 그의 머리가 담긴 관은 조각가 프레데릭 스토르크가 1913년에 만든 대리석 석관에 보관되었다.
5. 대중매체
Mihai Viteazul (1970): 루마니아에서 만든 미하이 2세에 관한 영화, 감독은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
[1] Padina(지붕)는 일반적으로 언덕 꼭대기에서 땅이 침하되면서 형성된 원형 또는 길쭉한 함몰 모양의 구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