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556년 | ||
사망 | 1590년 3월 (향년 34~35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583년 7월 ~ 1585년 4월 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파트라스쿠 첼 분 어머니: 보이카 | |
가문 | 드라쿨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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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45대 보이보드.2. 생애
1556년경 왈라키아 공국 제40대 보이보드 파트라스쿠 첼 분과 보이카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1557년 12월 24일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미르체아 5세가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 의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되었다. 그 후 페트루 2세는 로도스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트레비존트로 추방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튀르크인, 그리스인, 서방인과 두루 교류하다가 서방 세계의 도움을 받아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확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575년 빈으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황제가 1576년 10월 12일에 사망하면서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자 오스트리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 제노바, 로마에 잇따라 들리며 지원을 호소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1579년, 파리로 향한 페트루 2세는 1580년 프랑스 궁정에 방문해 프랑스 국왕 앙리 3세와 섭정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호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1581년 파리를 떠나 토리노로 갔다가 페라라와 베네치아를 거쳐 코스탄티니예에 도착한 그는 2년간 프랑스 대사로부터 80,000 두카트에 달하는 지원을 받아낸 뒤, 이 자금을 토대로 오스만 제국 궁정에 어려서 보야르들의 복종을 얻지 못하는 미네아 2세를 페위하고 자기를 보이보드로 삼아달라고 청원했다. 그 결과, 파디샤 무라트 3세는 1583년 7월 미네아 2세를 트리폴리로 보내고 페트루 2세를 새 보이보드로 삼기로 했다.
이이리하여 목표로 삼았던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된 그는 1584년에 왈라키아의 수도를 부쿠레슈티에서 트르고비슈테로 옮겼고, 트르고비슈테의 왕궁을 재건축하고 확장했으며, 왕립 교회를 세웠으며, 청동 대포 주조소를 설립했다. 또한 프랑스에 빚진 돈을 갚기 위해 백성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렸다. 그러나 그의 재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네아 2세의 어머니 에카테리나는 코스탄티니예에서 탄탄한 기반을 갖춘 이탈리아 대상인 집안 출신으로, 가문의 도움에 힘입어 억류 생활에서 풀려난 뒤 700,000 스쿠디에 달하는 돈을 마련해 파디샤 궁정에 바침으로써 아들 역시 풀려나도록 했다. 그 후 에카테리나와 그녀의 가문의 지속적인 로비 끝에, 무라트 3세는 1585년 4월 6일 미네아 2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위하기로 했다.
페트루 2세는 오스만 제국군의 체포를 피해 열린 창문에 밧줄을 타고 내려가 탈출한 뒤 바르샤바로 피신한 후, 유럽 각지를 돌며 자기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589년 7월 코스탄티니예로 돌아왔다. 이후 미네아 2세를 축출하기 위해 파디샤 궁정에 로비 활동을 벌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네아 2세는 대재상 시난 파샤에게 600마리의 말이 운반할 수 있는 금화를 줄 테니 무라트 3세에게 페트루 2세를 처형해달라고 청원해달라고 부탁했다. 시난 파샤는 이를 받아들이고 무라트 3세에게 페트루 2세 처형을 건의했고, 무라트 3세는 이에 따르기로 했다. 이후 무라트 3세의 지시를 받은 무사들이 1590년 3월 페트루 2세를 로도스로 추방한다는 칙령을 보여주고 그를 배에 태운 뒤, 에게 해상에서 바다에 던져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