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574년 5월 (향년 ?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574년 4월 ~ 5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파트라스쿠 첼 분? 어머니: 미상 | |
가문 | 드라쿨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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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43대 보이보드.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제40대 보이보드 파트라스쿠 첼 분의 아들을 자처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1574년 4월, 왈라키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2세 미르체아는 형제인 페트루 6세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된 걸 기리기 위해 페트루 6세와 자기들을 추종하는 보야르들과 함께 포크사니 인근의 사파세니에서 축하 행사를 개최했다. 그 때, 공물을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던 몰다비아 보야르 군대의 수장인 덤브라바가 페트루 6세에 맞서던 몰다비아 보이보드 이오안 3세 첼 비테아즈와 합류한 뒤 사파세니로 쳐들어갔다. 알렉산드루 2세와 동생 페트루 6세는 급히 이에 맞섰지만, 미처 많은 병력을 모집하지 못해 람니쿠 사라트 인근 질리슈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알렉산드루 2세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도주한 틈을 타, 빈틸라가 이오안 3세와 보야르들의 추대로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1574년 5월, 추종자들을 결집한 알렉산드루 2세가 공세를 개시해 이오안 보다의 몰다비아군을 격파하고 부쿠레슈티를 탈환했다. 빈틸라는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그의 수급은 왕궁 문에 못 박혔다. 폴란드 역사가, 작가, 시인인 마치에이 스트리코프스키(Maciej Stryjkowski, 1547 ~ 1593)는 저서에 루마니아 여행 중에 빈틸라의 해골이 성문에 여전히 박힌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고 기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