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본명 | 바사라브 3세 라이오타 Basarab III Laiotă | |||
이명 | 셀 바트란(cel Bătrân)[1] | |||
출생 | 미상 | |||
사망 | 1480년 12월 22일 (향년 ?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473년 11월 ~ 1473년 12월 | |||
2차 | 1474년 3월 | |||
3차 | 1474년 여름 ~ 1474년 10월 | |||
4차 | 1475년 1월 ~ 1476년 11월 | |||
5차 | 1476년 12월 또는 1477년 1월 ~ 1477년 11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단 2세 어머니: 미상 | ||
형제 | 바사라브 2세, 블라디슬라프 2세, 단 3세 | |||
가문 | 다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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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18대 보이보드.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제9대 보이보드 단 2세의 아들이다. 형제로 바사라브 2세, 블라디슬라프 2세, 단 3세[2]가 있었다. 1472년 라두 3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에서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준비하던 몰다비아 공국의 공 슈테판 3세에게 가담했다. 1473년 11월,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과 바사라브 3세가 고용한 용병대가 밀코프 강을 건너 왈라키아로 진격했다. 그 해 11월 18일에서 20일 사이, 라두 3세는 프라호바의 게르기차 인근에서 침략군과 맞섰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부쿠레슈티 성채로 피신했다. 이후 한동안 농성하던 그는 보이보드들이 대거 침략군에 가담했다는 걸 알게 되자, 11월 23일 밤에 다뉴브 강변 오스만 제국 요새인 지우르지우 요새로 피신했다.1473년 11월 28일, 라두 3세는 13,000명의 오스만군과 함께 왈라키아를 탈환하려 했지만 몰다비아군과 6,000가량의 왈라키아군이 연합한 바사라브 3세 휘하 군대에게 격파되었다. 12월 23일, 라두 3세는 다시 30,000 가량의 오스만군의 선두에서 다뉴브 강을 건넜다.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지 못한 바사라브 3세는 몰다비아로 피신했다. 오스만군은 여세를 이어가 몰다비아로 진군했지만, 바라드에서 슈테판 3세에게 완패했다. 1474년 3월,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은 바사라브 3세가 라두 3세를 일시적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라두 3세는 몰다비아군이 철수하자마자 반격해 바사라브 3세를 도로 몰아냈다. 1474년 여름,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은 바사라브 3세가 라두 3세를 재차 몰아냈다.
바사라브 3세는 라두 3세가 재차 공격할 것을 우려해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이슈트반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재빨리 왈라키아로 진군했지만, 바사라브 3세가 아닌 그의 사촌 바사라브 4세를 옹립하려 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바사라브 3세와 2차례 맞붙었는데,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두 번째 전투에서는 격파했다. 한편,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은 라두 3세를 지지하던 텔레아젠 요새를 며칠만에 함락하고 수비대를 학살하고 성채를 불태웠다. 1474년 10월 20일, 라두 3세는 오스만군의 지원을 토대로 바사라브 3세와 바사라브 4세를 몰아내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 후 오스만군은 바사라브 3세가 망명한 몰다비아로 진군했지만, 1475년 1월 10일 바슬루이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라두 3세도 이 원정에 참여했는데, 이후 기록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은 걸 볼 때 이때를 전후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라두 3세 사후, 바사라브 3세는 왈라키아 보야르들의 추대로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 후 바슬루이 전투에서 참패한 뒤 귀환하던 오스만 제국군 8,000명이 왈라키아로 진입할 때 습격해 격파했다. 하지만 그 직후에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고 반 오스만 연합에서 이탈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슈테판 3세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그때까지 블라드 3세를 감금 중이던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블라드 3세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차시 1세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트란실바니아 남부의 수비를 블라드 3세에게 맡겼다. 바사라브 3세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고, 1476년 2월 22일 시비우와 브라쇼브의 색슨족에게 자신은 더 이상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할 수 없다며, 왈라키아와의 우정을 이어가고 싶으면 블라드 3세를 축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별다른 응답이 없자, 바사라브 3세는 오스만 제국 편에 가담했다.
1476년 7월 26일,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30,000 오스만 제국군이 왈라키아를 경유하여 몰다비아를 침공해 발레아 알바 전투에서 슈테판 3세가 지휘하는 몰다비아-헝가리-리투아니아 연합군 20,000명과 격돌했다. 그 결과 메흐메트 2세가 큰 손실을 무릅쓰고 승리를 거두고 몰다비아 상당 부분을 점령했지만, 수체아바, 네암츠, 호틴 등 주요 몰도바 거점을 공략하지 못했다. 여기에 몰다비아인들의 유격 전술에 시달려 기아에 직면했고, 급기야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그러던 중 바토리 이슈트반이 지휘하는 반란군이 트란실바니아에 집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메흐메트 3세는 어쩔수 없이 그해 8월 몰다비아에서 철수했다.
오스만 제국군이 철수한 뒤, 헝가리군과 몰다비아군은 블라드 3세를 앞세워 왈라키아 원정을 감행하기로 했다. 1476년 11월, 25,000명에 달하는 헝가리-몰다비아 연합군이 트르고비슈테로 진군했다. 바사라브 3세는 이에 대항해 18,000명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트르고비슈테 인근에서 저항을 시도했지만, 격전 끝에 패배를 면치 못하고 부쿠레슈티 성채에 갇혔다. 15일 간의 공방전 끝에 11월 16일 함락을 면치 못하게 되자, 바사라브 3세는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1476년 12월 또는 1477년 1월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왈라키아로 복귀했다. 이때 블라드 3세는 사망했는데, 오스만 제국군에게 살해되었다는 설, 사냥 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설, 한 보야르에게 암살당했다는 설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바사라브 3세는 블라드 3세가 사망한 뒤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위했지만, 1477년 11월 몰다비아 공 슈테판 3세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또다시 해외로 망명했다. 그 후 사촌인 바사라브 4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으며, 바사라브 3세는 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에서 여생을 보냈다. 1479년,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의 지시를 받은 알리 코차 베이가 트란실바니아 원정에 착수했다. 이때 바사라브 4세도 5,000 병력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군에 가세했고, 바사라브 3세는 이에 맞서 2,000 병력을 이끌고 헝가리군에 가담했다. 1479년 10월 13일 오라슈티에 전투에서 헝가리-바사라브 3세 연합군이 승리했다. 1480년 12월 22일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