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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 카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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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cd806> '''''' | ||||
출생 | 1820년 3월 20일 | |||
몰다비아 공국 브를라드 | ||||
사망 | 1873년 5월 15일 (향년 53세) | |||
독일 제국 하이델베르크 | ||||
재위기간 |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보이보드 | |||
1859년 1월 24일 ~ 1862년 2월 5일 | ||||
루마니아 연합공국의 돔니토르 | ||||
1862년 2월 5일 ~ 1866년 2월 23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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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엘레나 로세티 | |||
자녀 | 알렉산드루 A. 이오안 쿠자, 드미트레 쿠자 | |||
가문 | 쿠자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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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마니아 연합공국 초대 돔니토르(Domnitor, 군주 또는 통치자).2. 생애
2.1. 초년기
1820년 3월 20일 몰다비아 공국 브를라드에서 팔치우 주의 보야르이자 이스프라브닉(Ispravnic: 청지기)인 이오안 쿠자와 파나리오테스에 속한 코자디니 가문의 일원인 술타나 코자디니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미래의 협력자인 미하이 코갈시네아누, 바실레 알렉산드리와 함께 이아시에서 빅토르 쿠에님의 프랑스 학교에서 교육받았고, 파리로 유학가서 1835년 소르본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법학부에서 2년간 공부한 뒤 귀국 후 몰다비아 최초의 현대식 고등 교육 기관인 미하일레아나 대학에서 공부를 이어갔다.1837년 11월 파리로 다시 가서 1839년 4월까지 전쟁 및 과학과 법학에 관한 연구를 이어갔다. 이때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의 젊은 혁명가들과 교류했고, 자유주의를 신념으로 삼았다. 이후 몰다비아로 돌아가서 군대에 입대해 진급을 거듭한 끝에 대령에 올랐다. 1848년 몰다비아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일으킨 혁명을 주동했지만 러시아 제국 차르 니콜라이 1세가 파견한 러시아 제국군에게 진압된 뒤 생포된 후 빈으로 이송되었다가, 영국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854년경 몰다비아로 돌아온 알렉산드루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그리고레 알렉산드루 기카에게 발탁되어 전쟁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856년 7월 그리고레 알렉산드루 기카가 퇴위한 뒤 결성된 이아시의 임시 의회에서 갈라치 시를 대표했다. 그는 정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연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 결과 1857년 임시 의회의 주관하에 시행된 투표에서 두 나라의 통합안이 압도적인 득표로 가결되었다. 이후 1858년 8월 7일에 체결된 파리 협약에서는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프랑스 왕국, 대영제국, 프로이센 왕국, 사르데냐 왕국 등 유럽의 열강들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연합 공국이 오스만 제국 파디샤 종주권 아래 통합하는 것을 용인하기로 했다.
1858년 10월 18일 왈라키아 공국의 권력을 임시로 잡은 세 귀족 이오안 마누, 에마누일 발라누, 이오안 알렉산드루 필리페스쿠는 몰다비아 임시 의회와 함께 양국의 통합을 논의했다. 많은 인사들은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오스만 제국의 간섭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인 군주를 모셔와서 두 공국을 통합한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1859년 1월 17일에 열린 선거에서, 루마니아인이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는 다수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몰다비아 출신의 알렉산드루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출되었다.
한편 왈라키아에서는 몰다비아와의 통합을 꺼리는 보수주의자들이 정계를 장악했지만, 각자 후보를 내세우며 분열했기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에 양국의 통합을 강력히 원하는 국민당이 알렉산드루를 적극 지원하면서, 알렉산드루는 1859년 2월 5일 선거에서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출되었다. 1862년 2월 5일, 알렉산드루는 연합주의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두 나라의 의회와 정부를 통합하여 정치적 연합을 달성하고, 스스로 돔니토르(Domnitor, 군주 또는 통치자)를 칭했으며, 국호를 '루마니아 연합공국'으로 정했다.
2.2. 4년 개혁
루마니아 연합공국 초대 돔니토르에 선임된 알렉산드루는 1848년 몰다비아 혁명 때부터 뜻을 함께한 동지 마하이 코갈시네아누를 총리로 삼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첫번째 개혁은 수도원 재산 국유화였다. 당시 루마니아 농지의 1/4 이상이 세금이 부과되지 않은 정교회 수도원에 의해 통제되었기에 국가 수입에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그는 이를 대거 회수해 국가의 부를 늘리기로 했다. 일부 수도원과 암자가 완전히 폐지되거나 축소되었고, 남은 수도원, 교회, 신학교, 사회 지원 센터 등의 순이익에 대해 10%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이에 몰다비아 대주교 소프로니 미클레스쿠가 몇 차례 강력히 항의했지만 묵살되었고, 나중에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이에 대한 정교회의 반발이 거세지자, 알렉산드루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 3세에게 상당한 보상을 해줄 테니 개혁을 용인하라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1863년 12월 25일 세속화법이 통과되면서, 아토스에 속한 일부 수도원이 오래 전에 슈테판 3세 등 여러 통치자들로부터 수여받었던 영지들이 대거 몰수되었다. 알렉산드루의 치세 동안,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내 교회 조직이 소유했던 농업 및 임업 면적의 약 25%가 정부에 몰수되었다.
알렉산드루는 모든 성인 남성에게 일반화된 개인세 와 도로 기여금을 제정했고, 새로운 특허법을 반포했으며, 토지세 및 기타 규제를 반포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재정 안정을 꾀했다. 그는 여기에 더해 보야르들에게 집중된 토지를 일반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농지 개혁을 단행하려 했지만, 제한적인 선거제도로 인해 의회의 과반수 의석을 장악한 보수파의 반대에 직면했기에, 농지 개혁안은 번번이 승인되지 않았다. 급기야 의회는 총리 미하이 코갈시네아누 등 내각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통과했지만, 알렉산드루는 총리의 사임을 거부했다.
결국 개혁을 훼방놓는 의회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알렉산드루는 1864년 5월 2일 군대를 동원해 의회 건물을 장악하고 의원들을 축출한 뒤 의회 해산령을 반포했다. 이후 그해 8월 7일, 일명 '쿠자 법령(Statutul lui Cuza)'으로 알려진 <파리협약 제정법(Statutul Dezvoltător al Convenției de la Paris)>이 반포되었다. 이 법령은 의원과 유권자 수를 상당히 늘린 새로운 선거법이 제정되어 농민, 노동자, 기업가 일부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이후 2차 의회 선거 결과, 알렉산드루의 개혁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의원으로 대거 발탁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 프랑스 , 프로이센이 이를 쿠데타로 간주하고 비난을 퍼부으면서, 루마니아의 정세가 위험해졌다. 이에 알렉산드루는 7월 28일 코스탄티니예로 가서 오스만 파디샤 압뒬아지즈와 협상한 끝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더 큰 자치권을 인정받는 대신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표하고 보호를 받기로 했다.
의회를 개편한 뒤, 알렉산드루는 1864년 8월 14일 농업법을 바포했다. 그 결과 400,000명 이상의 농민 가족에게 농경지가 제공되었으며, 거의 60,000명의 마을 사람들이 집과 정원 부지를 받았다. 보야르에 예속되었던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되면서, 과세 대상자가 대폭 늘어났다. 토지의 단편화와 현대적인 농업 기계의 부족으로 인해, 이듬해 농업 생산량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토지 분배는 상당히 공평해졌다. 이렇듯 1864년에 실시된 개혁은 1865년에 대부분 완료되었고, 토지에 대한 농민의 욕구를 부분적으로 충족시켰고, 농노제와 봉건 관계를 폐지해 루마니아에 자본주의가 본격화하는 데 큰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그가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강제 점거한 결과, 모든 정당의 지지를 잃고 몇몇 측근과 매관매직을 통해 관직에 오른 부패한 관리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이로 인해 공공 자금의 부패와 횡령이 횡행해 정부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었다.
1865년 9월, 알렉산드루는 영국 회사 바클리-스타니스포스가 부쿠레슈티-필라레-지우르지우 철도 노선을 건설하는 걸 허락했다. 노선 길이는 70km였으며, 건설 비용은 킬로미터당 196,500프랑이었다. 이 루마니아 최초의 철도 노선은 1869년 10월 19일에 개통되었고, 1870년에 스마르다까지 2.6km 더 연장되었다. 또한 1865년 1월 1일 전신우편법을 제정해 현대식 우편 서비스와 전신 서비스를 루마니아에 도입했으며, 우편 서비스에 그레고리력을 채택하는 법령도 통과했다. 그리고 루마니아 우체국 직원들이 유니폼을 입고 출근하도록 했으며, 국내외 언론에 대한 우편 구독 서비스와 지방 자치 단체 간의 연결을 보장하는 농촌 우편 서비스 조직을 도입했다. 또한 'Poşta Română'라는 문구가 적힌 최초의 우표가 발행되었다.
알렉산드루는 이밖에도 나폴레옹 법전에 근거한 형법과 민법, 교육법의 채택, 초등학교의 무상 의무 공교육 실시 등 여러 조치를 내렸으며, 이아시 대학교와 부쿠레슈티 대학교를 설립했다. 다만 교육부에 할당된 자금이 심각하게 부족했기에, 이 일련의 조치는 문맹 해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한 프랑스의 협력하에 유럽식 루마니아군 개발에 힘을 기울였으며, 루마니아 해군을 창립했다.
2.3. 퇴위와 추방
알렉산드루의 급격한 개혁은 정교회 수도자 및 보수주의자들의 강한 불만을 샀고,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강제 점거하고 자기를 따르는 측근들만으로 정부를 구성한 행위는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의 반감을 샀다. 결국 두 세력은 서로 힘을 합쳐 알렉산드루를 타도할 음모를 꾸몄다. 게다가 급격한 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재정이 과도하게 쓰이면서 국정 운영이 갈수록 힘겨워졌고, 그의 정부인 마리아 카타르지우를 둘러싼 스캔들로 인해 그의 권위는 손상입었다. 결국 1866년 2월 11일 오전 4시, 군부 내 공모자들이 정변을 일으켜 이아시 궁전으로 난입해 알렉산드루에게 아래의 내용이 적힌 퇴위서에 서명하도록 했다."나, 알렉산드루 이오안 1세는 온 국민의 염원과 권좌에 오르기 위한 약속에 따라 오늘, 1866년 2월 11일 정부의 수장을 국민이 선출한 공위 중위와 장관에게 이양한다."
이틀 후 알렉산드루는 아내 엘레나 로세티, 정부 마리아 카타르지우, 두 아들 알렉산드루, 드미트리와 함께 부쿠레슈티를 떠나 브라쇼프로 망명했다. 그 후 1866년 4월 14일에서 20일까지 열린 선거 결과,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문 출신의 카롤 1세가 새 돔니토르(Domnitor, 군주 또는 통치자)로 선출되었다. 그 후 알렉산드루는 파리, 빈, 비스바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한때는 루마니아에 귀국하고 싶어서 카롤 1세에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각료회의에서 거부당했다.
1873년 5월 15일 하이델베르크의 에우로파 호텔에서 53세의 나이에 심한 천식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이후 유언에 따라 루지노아사의 왕궁 근처 왕립교회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농민 30,000명 이상이 참석해 자기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눠줬던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의 유해는 이아시에 있는 삼위일체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
3. 가족
3.1. 아내 엘레나 로세티
Elena Rosetti.
1825년 6월 17일 몰다비아 공국의 중심지 이아시에서 몰다비아 포스텔닉(Postelnic, 내각 의장) 이오르다케 로세티와 에카테리나 스투르자의 딸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유지에서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익혔고, 삼촌 콘스탄틴 스트루자의 셰이아 사유지에서 개인 공부를 이어갔다. 15살 때 이아시에 정착하여 상류 사회에 소개되었고, 1844년 4월 30일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와 결혼한 뒤 남편의 정계 활동에 전력으로 헌신했다. 1848년 몰다비아 혁명 실패 후 남편이 국외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남편이 돔니토르로 집권한 뒤 부쿠레슈티 코트로체니구에 엘레나 도암나 정신병원을 건설하고 고아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는 등 자선활동을 벌였으며, 농지 개혁을 정력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온유하고 내성적이며, 수줍음이 많고 말이 서툴렀던 그녀는 매사에 정력적이던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했고, 나중엔 남편이 정부 마리아 카타르지우오브레노비치와 대놓고 사랑을 나누자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마리아가 낳은 두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키웠고, 퇴위한 뒤 해외로 망명한 남편을 따라가서 그와 함께 지냈다. 남편이 사망한 후에는 사람들에게 남편의 탁월했던 면모를 서슴없이 밝히면서도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이후 루마니아로 귀국하는 걸 용인받고 피아트라님트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09년 4월 2일에 사망했다.
3.2. 정부 엘레나 마리아 카타르지우
Elena Maria Catargiu.
1835년경 몰다비아 공국의 중심지 이아시에서 보야르 콘스탄틴 카타르지우와 스마라그다 발슈의 딸로 출생했다. 사춘기부터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팜 파탈적인 매력 때문에 수많은 남성과 가까이 지냈다고 전해진다. 첫번째 남편은 어느 세르비아 장군으로, 그녀는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루디를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고, 여동생 무누 카타르지우에게 루디를 맡겼다. 루디는 친어머니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가 1876년 엘레나의 장례식이 열릴 때에야 비로소 그녀가 자신의 친어머니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첫번째 남편과 이혼한 뒤, 엘레나는 세르비아 공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은 나중에 세르비아 왕국 초대 국왕 밀란 1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결혼 역시 조기에 파탄났고, 그녀는 여러 애인을 두루 사귀었다. 그러다가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의 정부가 되었고, 그와의 사이에서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와 드미트리에 쿠자를 낳았다. 알렉산드루는 그녀를 무척 사랑했고, 그녀에게 돈과 보석 등 수많은 선물을 퍼부었다. 엘레나는 그의 호의를 이용해 자신만의 비밀 기관을 설립하고, 루마니아의 각종 이권을 챙기고 관료들이 저지르던 부정부패에 깊이 관여했다. 게다가 온갖 사치품을 구입해 집을 장식하고, 알렉산드루와 자신의 관계를 과시하기 위한 공식 행사를 여러 차례 여는 등의 행보를 보여 세간의 지탄을 받았다.
알렉산드루는 1866년 2월 11일 오전 4시 쿠데타로 실각하던 당시에 엘레나의 저택에서 카드 게임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 후 엘레나는 알렉산드루와 함께 망명했고, 드레스덴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876년 7월 16일 암에 걸린 것에 비관해 41세의 나이에 자살했다. 그의 유해는 이아시의 성 스피리돈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1908년에 이아시의 '영원' 묘지에 있는 가족의 무덤으로 이장되었다.
3.3. 사생아들
- 알렉산드루 A. 이오안 쿠자(1862/1864 ~ 1890):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와 엘레나 마리아 카타르지우의 장남. 일찍이 엘레나 로세티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아버지 사후 루마니아로 돌아와 의원으로서 정계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면서, 카롤 1세를 축출하고 자기가 정권을 잡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1888년 농민 폭동 선동자로 비난받자 정계에서 물러난 뒤 각지를 전전하다가 1890년 4월 4일 스페인 왕국의 수도 마드리드에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급사했다.
- 드미트리에 쿠자(1865 ~ 1888):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와 엘레나 마리아 카타르지우의 차남. 일찍이 엘레나 로세티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한 뒤 루마니아로 돌아와 루기노아사 궁전에 정착했다. 그러나 궁전 하녀 중 한 명과 사랑에 빠졌다가 엘레나 로세티에게 발각되어 하녀가 추방되자, 양어머니와 다투다가 불안정한 성격으로 인해 1888년 러스티 궁전에 있는 자기 방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