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 근위대 러시아 제국 육군 | 러시아 제국 해군 | 러시아 제국 공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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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군 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Armed Forces of the Russian Empire | |||
러시아 제국군 군기 | |||
창설 | 1721년 11월 2일 | ||
해체 | 1917년 3월 12일(11월 7일) | ||
국가 | 러시아 제국 | ||
편성 | 러시아 제국 육군 러시아 제국 해군 러시아 제국 공군 러시아 제국 근위대[1] | ||
총참모부 | 스타브카 | ||
사령관 | 전러시아의 황제[2] | ||
전신 | 루스 차르국군 | ||
후신 | 러시아 백군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 | ||
육군력 | |||
병력 | 800,000여 명[3] 2,500,000여 명[4] (1889년) 1,284,155여 명[5] 5,460,955여 명[6] (제1차 세계 대전} | ||
해군력 | |||
병력 | 129,081여 명 (1855년) 91,000여 명 (크림 전쟁} 59,500여 명 (제1차 세계 대전} | ||
함선 건조량 | 500~700척[7] | ||
공군력 | |||
기체 | 263기 (제1차 세계 대전) 1,039기 (19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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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군(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는 1721년 11월 2일부터 1917년 3월 12일(11월 7일)까지 존속했던 러시아 제국의 군대이다.1850년대 초 러시아 제국군은 90만 명의 상비군과 카자크와 같은 25만 명의 비정규 병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008년, 마지막으로 생존한 러시아 제국군 출신이었던 우크라이나의 미하일로 크라체우스키가 사망했다.
복무기간은 처음 창립된 18세기 초중반에는 종신이었으나 1793년에 25년으로 단축되었고, 1834년에는 20년+예비군 5년, 1855년에는 12년+예비군 3년으로 축소되었다.
2. 역사
2.1. 재편성기(17세기)
러시아군은 17세기 이후로 본격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이반 뇌제가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상비군인 스트렐치를 창설하게 된 것. 스트렐치는 유럽 열강들의 머스킷병과 마찬가지로 머스킷 사수들이었으며 창설된 이후 규모가 날로 성장해갔다. 스트렐치는 러시아 제국군의 질적능력 향상에 이바지했고 러시아 사회의 권력층으로 등극했으나 전투력의 저하와 충성심의 결여가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스트렐치 문서 참고.그 외에도 유럽 열강들의 드라군 연대와 라이터 연대를 본 따 서유럽식 편제를 갖춘 정규 연대들을 창설하게 되는데 이러한 러시아 제국군의 재편은 이웃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몰락을 초래하는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보병 위주의 러시아가 기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였다는 점이다.
2.2. 표트르 대제 전성기(18세기)
표트르 대제는 군사강국이자 북유럽의 패자였던 이웃나라 스웨덴의 군대를 카피하여 중앙집권적인 상비군 장교단을 창설해 장교단의 질적 향상을 도모했으며 징병제를 실시해 상비군을 확대해나갔다. 이어 전문적인 장교를 육성하기 위해 서구식 항행학교, 포병학교, 공학학교 등의 사관학교들을 설립했다. 군사 관련 업무 기관들을 군무성으로 통합했고 상비 해군을 본격적으로 창설한 것도 이 인물. 러시아 황실과 유착관계가 있었던 러시아 정교회도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가차없이 희생시켰다. 군대를 현대화하는데 교회로부터 세금을 걷어내 신형 머스킷총들을 도입했으며 교회 종들을 징발해 녹여내어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군대를 현대화하는데 굳는 열의와 의지를 보이던 표트르 대제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을 격파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발트해의 동부영토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해양 진출로를 확보한 러시아 제국은 동유럽의 떠오르는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표트르 대제 집권 말기 러시아 제국군 병력은 22만에 달했으며 그 중 상비병력은 10만에 달했다.
2.3. 1차, 2차 군사개혁
러시아군의 포병 화력이 본격적으로 개선되던 시기였다. 1757년, 러시아의 귀족이자 장군인 표트르 슈발로프(Петр Иванович Шувалов)는 리코른(유니콘) 대포를 개발한다. 리코른은 당대의 대포들보다 더 긴 포신을 지니고 있었으며 원뿔형 약실은 장전하는데 용이하게 했다. 사정거리가 당대 서구 열강들의 대포와 비교했을 때도 길고 명중률도 정확한 선진적인 곡사포 체계였으며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에서 프로이센 왕국군 기병대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었다. 슈발로프가 개발한 또 다른 무기체계인 "비밀" 대포는 통상적인 대포와 달리 타원형의 포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는 수십~100여발의 포도탄을 한 번에 넓은 범위로 발사해 돌진해오는 적 기병대나 적 보병 진영을 싹 쓸어버리기 위해서이다. 당대에는 러시아군의 전략무기중 하나였던지라 말그대로 "비밀"이었고 평시에는 덮개로 포구를 덮어 이를 숨겼다. 이러한 기밀을 유출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그러나 장전속도가 느린 것이 약점이었으며 그 덕에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에서 일부가 프로이센군에 의해 노획되면서 결국 그 "비밀"이 유출되어버렸다. 해당 대포들은 러시아 육군 연대에 야전배치되었다.알렉산드르 수보로프는 이 때 당시 뺄 수 없었던 러시아군의 명장이었다. 플린트락 소총이 러시아 제국군에 도입되면서 러시아군의 화력이 향상되었으며 군대의 훈련 시스템도 개선되었다. 1763년에는 참모단도 창설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러시아 귀족에 대해 부과한 병역의 의무가 면제되면서 점점 러시아 귀족들은 병역을 기피하고 힘없는 농노들이 징집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어찌되었든 당시 러시아 제국군은 두 차례나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면서 그 위용을 자랑한다.
1805년 당시의 러시아군은 약화된 상태였다. 일단 황제들이 쿠데타로 등극하고 폐위되던 시절이라 뭔가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었다.하급 장교들과 보병들은 숙련되지 않았고 복잡한 기동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 덕에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대육군에 참패하고 만다. 이후 러시아 원정에서 러시아군은 특유의 넓은 국토를 이용한 프랑스군의 보급 약화와 대규모 병력 동원능력을 이용해 나폴레옹을 괴롭힌다. 극심한 보급난과 식량난에 수 많은 프랑스군 병사들이 탈영하거나 약탈에 몰두하느라 전선을 이탈했으며 심지어 휘하 장군들이 자기 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게다가 찾아온 겨울의 추위는 안그래도 추위에 취약한 프랑스군을 제대로 갉아먹었다. 러시아 원정에서 막대한 병력을 손실한 나폴레옹은 결국 패배하게 되었고 러시아 제국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빈 체제의 중요한 일원이자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 왕국과 신성 동맹을 체결하고 유럽의 경찰 국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100만이 넘는 대병력을 지닌 러시아 제국군을 막아낼 유럽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만 같았고 실제로 적지 않은 유럽인들은 러시아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2.4. 러시아 제국군의 말년
1853년 부터 발발한 크림 전쟁에서 유럽 최강 육군국이라던 러시아군의 명성은 무참히 깨지고 만다. 산업혁명의 선두주자였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지휘관들의 삽질에도 질적으로 막강한 전력을 통해 러시아군을 격파했으며 결국 세바스토폴까지 내주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은 굴욕적인 패전과 양보를 거듭해야 했다. 자세한 내용은 그레이트 게임 참고.이후 알렉산드르 2세가 대규모 군제개혁을 통해 러시아군을 개혁한다. 군관구 제도의 수립을 통해 넓은 영토에서의 작전에 부합하게 러시아군을 개혁한 것은 물론이고 모든 계층에 대한 병역의 의무를 부활시켜 병력의 질적 능력을 향상시켰다. 근대식 사관학교들을 설립해 장교단의 질적 향상을 도모했고 낙후된 복무환경과 전투준비시스템도 크게 개선했다. 오스트리아제 신형 강선 머스킷 크른카와 미국제 신형 볼트액션 베르단 소총을 도입하고 서구식 강철 대포도 도입하여 군대의 화력도 크게 개선되었다. 이후 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해 크림 전쟁 패배를 설욕했고 청나라의 의화단 운동에도 개입하여 러시아 제국군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모신나강 소총이 도입되기에 이른다. 해군도 구시대적인 범선들을 일선에서 퇴역시키고 대신 서구식 철갑선과 전함, 장갑순양함들을 도입해 크게 향상된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영국의 일본에 대한 지원과 러시아의 낙후된 체제의 한계로 인해 세계 몇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막강했던 발트 함대를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만주 지역을 일본군에게 내주면서 패배를 거듭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지상전에서 입은 피해도 매우 컸지만 당시 러시아군은 노동개선을 평화적으로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무참하게 학살해버리고 군함에서 반란까지 터져 내홍이 컸던 상황이라 그 충격은 배가 되었다. 러일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군은 미처 이러한 피해를 수습하기도 전에 전 세계를 휩쓴 대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2.4.1. 제1차 세계 대전과 혁명
영국, 프랑스와 삼국 협상을 체결해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주도의 삼국 동맹과 갈등을 빚던 러시아 제국은 사라예보 사건을 통해 전쟁의 참화에 뛰어들게 되었다. 러시아는 야심차게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한 오헝 제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동맹국과의 교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수뇌부의 안일한 인식과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막장스러운 국정농단으로 인해[8] 러시아군은 제대로 싸울 수 없었으며 게다가 장성들의 무능함으로 인해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후 독일과의 소모전에 빠져들게 되었다.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러시아군이 승리하긴 했으나 러시아군의 전쟁 수행 능력도 급감하고 지지부진한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민중들의 불만은 폭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니콜라이 2세가 직접 야전에서 총사령관의 일을 하느라 러시아인들의 성난 민심을 읽을 시간이 없었고 내부에선 반란과 폭동이 폭등하게 되었다. 결국 1917년, 러시아 황실이 붕괴돼 러시아 공화국이 들어서고 이후 10월 혁명으로 인해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으면서 러시아 제국군도 급속도로 무너져 내려갔다. 그 빈자리를 차지한 볼셰비키의 적군은 공산주의의 이념에는 충실했지만 군사적인 전문성은 결여되었고 물량도 적었다. 결국 독일 제국군의 공세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려갔고 치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2.4.2. 러시아 내전
이후 러시아 제국군의 실질적 후신인 백군은 공산주의 혁명을 두려워하는 수 많은 열강들의 도움을 받아 적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귀족, 지주, 자본가로 이루어진 지도층에 대한 러시아 민중들의 불신과, 대병력을 지휘할 지휘관이 부재하다는 점은 백군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결국 내전에서 백군이 패배하고 소련이 설립되면서 러시아 제국군은 그 흔적마저도 완전히 해체되고 만다.3. 계급
계급 목록4. 편제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군/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4.1. 육군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제국 육군 문서 참고하십시오.4.2. 해군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제국 해군 문서 참고하십시오.4.3. 공군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제국 공군 문서 참고하십시오.[1] Русская гвардия/Лейб-гвардия, 차르의 근위대이자 정예 야전군 편제중 하나. 본래 차르의 개인 경호만을 담당하는 부대였지만, 개편되면서 정예 야전군 겸 차르의 근위대로 편성되었다.[2] 제국본부(Императорская Главная квартира)라는 차르의 개인 군사 명령을 군에 하달하는 조직이 따로 있었다.[3] 평시[4] 전시[5] 평시[6] 전시[7] 전열함(범선형), 이중 250척~300척은 근현대식.[8] 다만 라스푸틴은 실제로 국정에 악영향을 끼쳤는지는 의문이라는 학설이 최근에는 힘을 얻고 있다. 물론 존재 자체만으로 황실의 위신을 깎아먹긴 했지만 애당초 국정에 대한 영향력은 약했기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할 수준까지는 결코 아니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