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bbd2d, #ffcd30 20%, #ffcd30 80%, #ebbd2d); color: #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로마노프 왕조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표트르 1세 | 예카테리나 1세 | 표트르 2세 | 안나 이바노브나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이반 6세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 표트르 3세 | 예카테리나 2세 | |
제9대 | 제10대 | 임시 | 제11대 | |
파벨 1세 | 알렉산드르 1세 |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 니콜라이 1세 |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
알렉산드르 2세 | 알렉산드르 3세 | 니콜라이 2세 | }}} }}}}}} |
표트르 1세 관련 틀 | |||||||||||||||||||||||||||||||||||||||||||||||||||||||||||||||||||||||||
|
<colbgcolor=#ffcd30><colcolor=#000> | |||
| |||
출생 | 1672년 6월 9일 | ||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 |||
사망 | 1725년 2월 8일 (향년 52세)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묘소 |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 ||
재위기간 | 루스 차르 | ||
1682년 5월 7일 ~ 1721년 11월 2일 | |||
전러시아의 황제 | |||
1721년 11월 2일 ~ 1725년 2월 8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cd30><colcolor=#000> 가문 | 로마노프 가문 | |
이름 |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 (Пётръ Алексѣ́евичъ Рома́новъ[1]) | ||
아버지 |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 ||
어머니 | 나탈리야 키릴로브나 나리시키나 | ||
형제자매 | 드미트리, 예브도키야, 마르파, 알렉세이,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예카테리나, 마리야, 표도르 3세, 표도시아, 시메온, 이반 5세, 나탈리야 | ||
배우자 | 예브도키야 로푸히나 (1689년 결혼 / 1698년 이혼) | ||
예카테리나 1세 (1712년 결혼) | |||
자녀 |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 안나 페트로브나[2],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나탈리야 페트로브나[3]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신체 | 203cm | }}}}}}}}} |
1. 개요2. 생애
2.1. 즉위 초기까지2.2. 오스만 제국과의 대립2.3. 서유럽 사절단2.4. 대북방전쟁2.5. 서구화 개혁
3. 평가4. 가족관계2.5.1. 군제개혁
2.6. 후계자 문제2.7. 죽음과 후계2.5.1.1. 군제 개혁의 부작용
2.5.2. 근대적 관료 체제2.5.3. 사법 개혁2.5.3.1. 사법개혁의 한계
2.5.4. 조세 개혁2.5.4.1. 조세 개혁의 한계
2.5.5. 생활 문화2.5.6. 화폐개혁2.5.7. 인지 제도, 우체국 실행, 훈장 도입2.5.8. 의료 개혁2.5.9.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2.5.10. 1721, 황제 등극4.1. 자녀
5. 대중매체에서6. 여담1. 개요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급진적인 서구화 개혁을 통해 러시아 제국을 개편한 황제로, 이러한 개혁과 더불어 대외적으로는 북유럽의 강국이었던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러시아를 북방의 확고한 패자로 만들었으며, 아조프해와 발트해를 장악하고 발트함대를 창설하여 러시아 해군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표트르는 베드로에서 따온 이름이므로 문화권에 따라 '피터 대제'(Peter the Great[4], 영어권), '페터 대제'(Peter der Große[5], 독일어권), '피에르 대제'(Pierre le Grand[6], 프랑스어권), '페드루 대제'(Pedro o Grande[7], 포르투갈어권)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2.1. 즉위 초기까지
로마노프 왕조의 2대 차르인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와 두 번째 황후 나탈리야 키릴로브나의 맏아들로 1672년에 태어났다. 표트르가 4살 때에 아버지가 승하하자 이복형 표도르 3세가 차르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표도르는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6년 만에 사망했다. 이에 표트르가 차기 황제로 낙점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이복누나 소피야 알렉세예브나가 스트렐치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일단 이복형 이반[8]과 표트르가 공동 황제에 오르고 소피야가 섭정을 맡는 것으로 문제가 일단락되었다.이때 소피야 공주의 집권은 그야말로 피의 권력투쟁으로 당시 황후의 친인척들은 황궁에서 근위대, 스트렐치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표트르 또한 이를 목도한다.
소피야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탈리야는 표트르를 시골 마을로 보내서 키우게 했다. 그런데 이 마을이 마침 러시아에 일하러 온 유럽 상인들과 기술자들[9]의 정착촌과[10] 가까웠기 때문에, 어린 표트르는 그들과 가까이 지내며 당시 최신의 기술들을 배울 수 있었다.[11] 특히 표트르가 흥미있어한 것은 서구식 군대 전술, 항해술, 조선술, 포술 등이었으며, 배운 것을 실천해보기 위해 또래의 귀족 자제들을 모아 '놀이 군대(Потешные войска)'를 만들어 놀면서 자연스럽게 최신 군사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12] 그런데 말이 놀이 군대지 실탄까지 쏘며 훈련을 해 첫 전투에서 20여 명이 살상되기도 했다. 다만 이 '놀이 군대'는 단순한 전쟁놀이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실제로 어느 정도 무력을 가진 군사집단이었으며, 이를 증명하듯 1683년 놀이 군대는 러시아 최초의 근대식 부대이자 황실 친위대인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로 발전하여 소피야의 반란 진압이나 훗날의 대북방전쟁 등지에 투입되었다.
1689년 이복누나 소피야와 애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표트르는 이를 신속하게 진압하고 소피야를 수녀원에 가두었다. 이는 반란이라기보다는 당시 청나라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한 그녀에 대한 귀족들의 여론이 나빠지자, 국면 전환용으로 벌인 사건이 커진 것이다. 또한 표트르가 소피야의 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있었던 데는, 서유럽 출신자들로 만든 용병대의 대장인 고든과 표트르의 두터운 친분 덕분에 최정예부대인 용병대가 표트르 편을 든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반은 표트르와 관계가 우호적이어서 실권은 표트르에게 넘겨주었으나 쫒겨나지 않고 명목상의 차르 자리를 계속 유지한 채 살다가 곧 병사했다.
사실 이런 일 때문에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즉 황제가 결정이 아니고 섭정이자 제위 찬탈자인 소피야의 결정이었으므로 무효라는 논리였다. 이반이 1696년에 죽자 그 때부터 표트르는 단독 황제로 러시아를 다스렸다.
2.2. 오스만 제국과의 대립
러시아의 남쪽 진출을 위해 오스만 제국의 봉신 크림 칸국이 지배하는 아조프를 공격하나 해군이 없던 러시아가 아조프를 완전히 포위한다는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결국 해군의 지원을 받은 튀르크(오스만 제국 - 크림 칸국)에게 패배한다.패배로 인해 해군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해군을 편성, 이후 해군과 함께 아조프를 공략하여 승리한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졌으며 현재 러시아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방에 눈을 돌리게 된다.
2.3. 서유럽 사절단
1698년, 표트르는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서유럽으로 대규모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서유럽에서 기술이나 사회정책도 배워오라는 뜻으로 젊은 귀족들도 대거 포함시켰는데, 표트르 자신도 황제의 신분을 숨기고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으로 슬쩍 끼어들었다.프로이센 왕국에서는 포병 부사관 코스프레를 하고 대포 조작 기술을 배웠고,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는 목수 코스프레를 하고 손수 배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잉글랜드에서는 수학, 기하학을 배우고 해군 체험도 하면서 명예 제독의 지위도 얻었다. 그리니치 천문대도 방문하고 뉴턴의 연구에 대하여 듣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의학이나 해부학까지 수강했는데, 수강 중 시체를 보고 토한 자들을 크게 문책하며 시체를 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13] 거기다 시체 해부하는 것까지 참관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사실 사절단이건 방문국 사람들이건 다들 '표트르' 미하일로프가 코스프레 중인 표트르 1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단 키부터가 2m를 넘는 거인이기 때문에 무척 눈에 띄었을 것이다. 단지 당사자가 열심히 코스프레를 하니 장단을 맞춰줬을 뿐. 또 아무리 코스프레에 맞춰줘도 일국의 군주를 포병 부사관이나 목수처럼 굴릴 수는 없으니 일반 귀족의 예로 대우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자국을 방문 중인 외국 군주의 신변에 위협이 가거나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정말 난리가 날 테니 표트르가 방문하는 나라의 군주들은 다들 노심초사하며 호위를 겹겹이 붙였다. 거기에 표트르 또한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악동이라[14] 각 나라에서는 제발 차르가 자기 나라에 오지 말아주십사 했다고 한다.
유학 동안에 표트르 1세는 러시아가 유럽 열강들에 비해 심각하게 뒤떨어진다는 것을 실감했으며 정치, 제도, 군사, 문화 등 러시아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음을 체감하며 러시아를 서유럽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동시에 해운의 중요성을 체감하며 바다에 집착하게 되었다.
유학 중간에 소피아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표트르는 급히 귀국하여 손수 처리했다. 진짜 반란이라는 설부터 반대파를 처단할 음모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백여 명의 사형수들을 속옷 차림으로 줄세운 다음 하나 하나 직접 목을 도끼로 쳤다고 한다.[15]
2.4. 대북방전쟁
1697년, 이웃 강국 스웨덴에서는 칼 11세가 병사하고 16살의 칼 12세가 즉위했다. 당연한 일로서 당시 팽창중이던 스웨덴과의 대립은 결국 21년간의 대북방전쟁의 시작을 알렸다.[16]1700년 루스 차르국군은 나르바 전투에서 패하였다. 스웨덴군은 약 1만~1만 2천 명, 루스 차르국군은 약 3만 7천 명이었는데, 스웨덴은 질적으로 크게 우세했고 사령관인 표트르 1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공격했다. 거기다 눈보라가 스웨덴 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불자 그를 이용해 기동을 은폐하고, 루스 차르국 군을 세 토막낸 다음 각개격파하였으며, 패주하던 루스 차르국 군이 강가에 몰렸는데 다리가 무너지는 등의 요소들이 작용해 스웨덴군은 6백여 명이 전사했지만 루스 차르국군은 9천여 명이 전사하고 2만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당했다. 거기다 대포 2백여 문과 수만 정의 머스킷 등 막대한 양의 장비를 빼앗겼다. 스웨덴군은 나르바 요새에서 루스 차르국군에 포위당했을 때, 루스 차르국군이 준비가 미흡하고 포병이 약하고 탄약이 부족한 것을 알아챘기에 질적 우세를 확신했고 전투 도중에 루스 차르국군에게 고용된 외국인 장교들이 총사령관 드 크로아 공작과 함께 항복까지 해버렸다. 이때 칼 12세가 모스크바로 진격했다면 혼란 시대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로 군을 돌려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후,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전역 교회의 종 1/3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교회와 상인들로부터 고율의 세금을 거둬들여 서유럽제 신형 머스켓 수만 정을 사들이는 등 철저히 복수의 칼을 갈았고 칼 1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작센 선제후국을 유린하는 사이 스웨덴령 잉에르만란드와 스웨덴령 리보니아의 도르파트, 나르바를 공격해 점령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승리를 거두고 아우구스트 2세를 폐위시킨 칼 12세는 곧바로 표트르 1세를 위협했다. 표트르 1세는 그로드노[17]에서 칼 12세와 소규모 병력끼리 맞붙었으나 쪽도 못쓰고 발려 점령한 잉에르만란드를 되돌려주고 나르바와 도르파트도 배상금을 받으면 돌려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칼 12세는 새로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엄포를 놓았고 스웨덴군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정면으로 스웨덴군과 붙어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표트르 1세는 청야전술로 최대한 시간을 끌었고 칼 12세도 스몰렌스크를 통해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전통적인 최단 침공경로를 포기하고 우크라이나로 남하했다. 표트르 1세는 길어진 스웨덴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고립시켰고, 결국 칼 12세가 부상당한 틈을 타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표트르 1세는 무리하게 몰다비아 공국 원정을 계획하다가 1710년 프루트강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패하였고 추격해온 오스만 제국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결국 병력을 보전하는 조건으로 물러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얻은 아조프를 반환했다. 이때 표트르는 임신한 자신의 정부(情婦)인 예카테리나 1세와 같이 있었기에 하마터면 러시아 황제 부부가 나란히 동물원 우리에 갇힐 뻔했다. 거기다 당시 오스만 제국 궁정에 칼 12세가 망명해 있던 것을 생각하면 만약 표트르가 포로로 잡혔다면 결코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만이 아조프를 되찾은 것에 만족하고 대북방전쟁에서 빠지자 기회를 놓치지 않은 표트르는 연합군과 함께 계속해서 스웨덴을 밀어붙여 발트해 지역의 스웨덴령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를 점령하고 핀란드 전역을 유린했다.[18] 노르웨이 침공 중 전사한 칼 12세의 뒤를 이은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남편 프레드리크 1세와 협상한 끝에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스웨덴령 잉에르만란드,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 발트해 연안 지역과 핀란드의 비보리와 켁스홀름을 포함한 카리알라 일부 지역을 얻으면서 발트해로 향하는 출구를 얻어냈다.
스웨덴과의 일전과 승리는 표트르 1세의 대표적 업적이다. 본인도 이를 평생동안 자랑스러워했으며 승리를 기념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페테르고프의 여름궁전 중심부에 삼손이 숫사자를 죽이는 모습을 조각한 분수를 만들어놓았다. 죽는 대상으로 숫사자를 선정한 이유는 스웨덴의 국장이 숫사자이기 때문이다.
2.5. 서구화 개혁
당시 러시아는 심각한 상황이였는데 경제는 낙후된 수공업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 비효율적인 산업들이 여전하여 활력을 잃었으며 사회는 그때 당시 기준으로도 미신과 편견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러시아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 포보보노프에 의하면 마을에 외국인이 오면 주인이 옷을 벗어 불태우고 집안의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정교회 사제를 모셔다 축복을 받을 정도였다.직접 서유럽의 여러 나라를 관찰한 표트르 1세는 서구화를 개혁의 근간으로 삼고 러시아의 사회, 정치, 문화, 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친 개혁과 변화를 추구한다. 운이 좋게도 17세기 표트르 1세가 서유럽에 갈 시기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전제군주제, 영국에서는 의회제도가 생기고 실제로 이미 자본주의의 개념이 생겨났으며, 시민 사회를 기반으로 공업과 사유재산이 생겨나던 시기였다. 반면 러시아는 15세기에 벌써 중앙 집권 국가가 탄생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발전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러시아는 전방위적 개혁이 필요했던 시기였고, 서유럽에서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러시아는 군사 기술과 교육의 후진성을 체감하며 서유럽에 비해 심각하게 뒤떨어짐을 체감하고 있었다.
2.5.1. 군제개혁
군제를 서구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는 표트르 1세의 아버지인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 시대부터 있어왔다. 알렉세이 황제는 서유럽의 군사 전문가들을 대거 고용해 군사훈련을 혁신하고, 외국의 병제를 받아들여 용기병대와 경기병대를 창설하고 독일식 흉갑기병을 받아들이는 등의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모스크바에 주둔한 수도 근위대에 한정된 제한적인 개혁이어서, 전면적인 개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황제는 1699년 아버지에 이어 29개의 서구식 보병 연대와 2개의 용기병대를 새로 창설했고, 1705년에는 전국민을 20가구 단위로 편제하고 한 가구 단위당 일정한 수의 성인 남성을 차출해 의무적으로 복무하게 했다. 이 의무 복무는 육군뿐 아니라 황제가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투자한 해군도 해당 대상이었다.
또 황제는 군수품 생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대북방전쟁 와중 군수물자가 부족해지자 황제는 군수물자의 자체 생산을 위해 툴라와 올로네츠에 새 군수공장을 창설했고, 보급제도를 혁신했다.
군 기강 확립도 개혁 대상이었다. 황제는 제국 최초로 군에 통일된 군복을 도입해 보병은 녹색 카프탄(튀르키예에서 유래한 남성용 긴 정장)과 검은색 모자를, 기병은 파란색 카프탄에 검은색 모자를 쓰게 했다. 또 장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귀족들을 전문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해 각종 장교용 군사학교를 설치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해군사관학교를 열었다.
1716년에 군법을 개정하여 군인의 복무 날짜 및 규칙을 공식화했고, 식량 배급을 실시했다.
이러한 개혁의 결과 러시아군은 서유럽 못지 않은 강력한 규율과 훈련을 지닌 정규군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표트르 1세 말기 러시아 육군 정규군은 21만명, 비정규군은 11만명에 달했고 해군은 800척이 넘는 함선을 가지게 되었다.
2.5.1.1. 군제 개혁의 부작용
표트르 1세의 군제개혁은 그가 행한 개혁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러시아를 서구 국가들에 못지 않은 강국으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혁 역시 부작용과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가장 큰 문제는, 군의 규율을 강조함에 따라 황제도 정부도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긴 것이다. 강력한 규율과 통일성을 강조한 것은 좋은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이 규율을 강요하는 장교들이 전횡을 부릴 때 병사들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 러시아 특유의 봉건적 전통, 그리고 장교의 대부분을 귀족들이 차지한다는 특징이 겹쳐져, 러시아군은 특히 수도로부터 먼 지방에 주둔한 군대일수록 마치 장교는 지방 영주처럼, 병사들은 그 영주에 소속된 농노처럼 변하는 경우도 잦아졌다. 특히 장기간에 걸쳐 한 지역에 주둔하는 군단의 경우 단순히 병력뿐 아니라 그 가족들도 같이 가서 그곳에서 삶을 꾸려야 했기에, 이는 군단의 군벌화를 부추길 수 있는 요인이 될수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표트르 1세의 생전에는 그다지 대두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후 후계 문제가 대두되고 귀족들에 의해 황위가 이리저리 넘어가는 정치적 혼란기가 발생하며 중앙의 감시가 느슨해지자, 군은 급속도로 장교들의 사유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또 러시아는 당시까지 전통적인 인맥과 혈연에 의한 장사가 행정 처리에 크게 작용하던 국가라, 귀족들이 군 내의 상층부에 군에 장교로 입대한 자기 자식을 자신 혹은 자기 가문이 연고가 있는 어느 특정 지역으로 보내달라고 청탁을 해 대대로 장교생활을 하며 세습 영주처럼 행세하거나, 심지어는 군적에 이름만 올려놓고 실제로 군 생활은 하지고 않는 경우도 빈번했다.[19]
이러한 문제는 18세기 후반 파벨 1세의 개혁으로 어느정도 해결되었으나 중앙의 힘이 약해지면 장교가 군단을 사유물화할 수 있는 폐단은 제정 멸망 시까지 이어졌고, 적백내전 당시 백군의 극심한 분열과 소련시대 적군의 파벌주의의 발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5.2. 근대적 관료 체제
2.5.2.1. 중앙 행정제도 개편
한편 행정면으로는 귀족의회인 보야르 두마를 폐지했다. 16세기까지 서구 의회와 거의 동일한 기능을 수행했던 보야르 두마는 동란의 시대를 거치며 거의 허울뿐인 기관으로 전락한 뒤였으며, 황제는 두마가 자신의 개혁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대신 그는 황제의 부재 중에 대신 국가 사무를 처리할 수 있는 측근 중심 기관인 원로원을 만들었다. 이후 원로원은 상설화되어 국가 재정을 감독하고 관료들을 감찰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다음 개혁 대상은 관료제 그 자체였다.1722년에는 14관등 제도를 만들어 체계적인 관료 체계를 확립했고, 비슷한 시기 그때까지 러시아에서 행정 부처 비스무리한 역할을 맡던 프리카즈[20]들을 개혁해 스웨덴식 모델을 도입, 각각 외교, 국방, 해군, 토지, 조세, 재무, 감사, 상업, 광업, 제조업, 사법, 교회, 우크라이나 업무를 관장하는 12개의 콜레기야(Коллегия)로 통폐합했다. 황제는 이로서 러시아에 근대적 관료 체계를 정립할 수 있었다. 또 황제는 그때까지 각 부처에서 개별적으로 기록을 보존하던 시스템을 개혁하여 중앙정부 단위의 단일 기록 보존 및 관리 체계를 도입했다.
한편 차르 직속의 비밀경찰이 창설된 것도 표트르 1세 시대이다.
2.5.2.2. 지방행정제도 개혁
표트르 1세 이전 시대의 지방행정 제도는 도시에는 포드고로드니예 스타니(подгородние станы)가, 도시 이외 지역에는 우예즈드(уезд, 군)라는 행정구역이 동급으로 병존해 있었으며 이 우예즈드는 다시 여러 개의 볼로스트(волость, 읍)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도시와 우예즈드에 대한 상위 관리 및 감찰은 보이보드(Воевода )들이 임시 행정부를 구성해 맡았다. 그 이전에는 국가가 파견한 행정 관리들이 지방을 다스리고 그 댓가로 공물(이후에는 금전)을 징수하는 형태였는데, 이 관리들에 의한 부패와 전횡 등 문제가 나타나자 이반 4세 시대에 이 관리직을 폐지하고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선출한 선출 관료들에게 행정권과 조세권을 부여해 직접세를 걷게 했다.그러나 그 직후 찾아온 동란의 시대에서 지방에 큰 권력을 준 것이 역날의 검으로 돌아오자, 로마노프 왕조 수립 이후 이 제도는 다시 개혁되어 변경 군사 지도자인 보이보드를 전국에 임명하여 지역 관리들을 감독하게 했다. 국방과 행정 기능을 일원화한 것이다.
표트르 1세는 이 제도를 개혁하여 전국을 8개의 주로 나누고, 이 주에 주로 장교 출신으로 구성된 주지사(Губерна́тор)들이 임명되도록 했다. 기존에 도시 및 군의 상위 감찰 역할을 하던 보이보드들의 지위는 폐지되었다. 이후 지방 자체단체를 개혁해 이반 4세 시대에 도입된 기존의 젬스키 및 구브노이 기관들을 폐지하고 독일식 란드라트(Landrat)[21] 를 도입해 지역 귀족들이 주지사의 보좌 역할을 맡도록 했다. 동시에 란드라트가 너무 큰 권한을 가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원로원에게 란드라트의 결정에 대한 최종 승인권을 가지도록 하고, 원로원 의원이 란드라트 의원으로 임명될 수 있도록 했으며 1716년에는 퇴역 장교를 란드라트 의원으로 임명되도록 했다. 지방 유력자들에 의한 행정권 행사를 크게 제약한 것이다.
그러다 대북방전쟁 말기이던 1718년, 황제는 지방 행정제도를 다시 체계적으로 개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8개이던 주를 10개로 쪼갰고, 스웨덴식 행정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다. 스웨덴의 행정제도는 주(landshövdingdöme)-군(geärad)-교구(kyrkospil)로 이루어져 있었고 러시아와는 달리 행정권과 사법권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러시아는 농촌사회 발달이 느리므로 3단계 행정구역 도입은 무리이고[22], 주와 군만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군 역시 관할하는 인구수가 스웨덴의 최대 2배로 늘어났으며, 이름도 지방(провинция)과 지구(дистрикт)로 바뀌었다. 지방은 군사적 업무를 주로 담당하는 행정구역으로서 일전에 폐지되었던 보이보드(이후 사령관(Коменда́нт)으로 명칭 변경)가 통솔하게끔 했고, 사법적 업무에서만 주지사의 감독을 받도록 했다. 또 세금 징수와 재정 업무를 담당하기 위한 관료직을 설치했다.
이러한 개혁으로 인해 기존에는 포드고로드니예 스타니·우예즈드-볼로스트의 느슨한 이원체제에 보이보드들이 정확히 범위가 규정되지 않은 감찰 업무를 수행해야 했던 것이 주-지방-지구로 위계화되었고 그 밑에 농촌을 구성하는 볼로스트들이 위치하도록 개편되었다. 또한 행정관들이 권한과 업무 또한 명확히 규정되었고 이로서 행정적 효율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지구 단위는 젬스트보 체제가 시행되었다. 젬스트보 체제는 지역 주민들이 선출한 행정 관리가 중심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실제로도 구는 행정 관료인 젬스키 코미사르와 지역에서 선출된 코미사르 행정관이 병존했다.
2.5.2.3. 관료제 개혁의 한계
이렇듯 표트르 1세 하에서 러시아의 행정 제도는 스웨덴을 모델로 표면상 서구화를 이뤄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황제의 바람만큼 일이 착착 진행되지는 못했다. 어느 지방에서는 관료 수가 부족해 대부분의 직위가 공석인 지역도 있었고, 권한 외를 벗어난 관료들의 '관습'에 의거한 탈선도 잦았다. 중앙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라서, 무질서한 신설과 통폐합, 복설을 막고자 스웨덴식 제도를 도입했으나 러시아의 중앙 관료제는 이후 오랫동안 프리카즈 시대의 관습에 근거한 관행들이 이어졌다.또 황제는 고질적인 관료들의 부패를 막고자 원로원에 감찰위원회를 설치했고 지방에도 농민들이 관료들의 비행을 신고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으나, 실제로는 관료들의 부패와 비행은 근절되지 못했다.
2.5.3. 사법 개혁
표트르 1세 시대 러시아는 스웨덴식 사법제도를 도입해 행정권과 사법권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우선 3심제가 도입되었고, 이를 위해 대법원을 설치해 원로원과 사법 콜레기야에 역할을 위임했으며, 1심과 2심을 맡도록 하기 위해 대도시를 중심으로 스웨덴식 항소법원(Надво́рный суд)[23] 제도를 도입해 이전까지 지방 행정관들이 행사하던 사법권을 분리하여 1심 및 항소심을 사법 교육을 받은 전문적인 관료들이 맡도록 했다. [24]대도시 이외의 지방에는 판사와 전통적으로 행정 관료와 배심원에 의한 합의제로 운영되는 하급 법원을 그대로 존치했는데, 1722년 이것도 개혁하여 보이보드가 수장을 맡고 지방 행정부로부터 분리된 지방 법원을 설치했다.
2.5.3.1. 사법개혁의 한계
하지만, 보이보드가 지방법원의 수장을 맡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행정부와 사법부의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농민들에 대한 사건을 담당하는 지방법원 판사들은 주로 선출되었기에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당연히 사적인 원한에 의한 보복성 판결이 잦았다.또 한가지 문제는 바로 절차였다. 러시아의 사법 절차는 매우 길고 상세하며 지루한 것으로 악명높았다. 여기에 국가는 농민, 상인, 귀족 등 대상자의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법률적 절차를 적용하도록 강요함으로서 판사들의 자유를 옥죄었고, 3심제를 도입했지만 '제대로' 도입한 것은 아니라서 상급법원이 하급법원의 판결을 자신들이 원하는 판결이 나올때까지 무한정 파기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사법개혁으로 해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소법원이 두개로 쪼개지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한술 더떠 19세기 초반에는 상인들에 대한 사건 담당을 위해 상업재판소(коммерческие суды)를, 더 작은 행정단위에서 국가 농민들에 대한 사건 심리들을 위해 읍재판소(волостная расправа)와 촌락재판소(сельская распра- ва )를, 성직자들에 대한 사건 심리를 위해 성직자재판소를 설치하는 등의 법원 쪼개기를 통해 더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19세기 중반 알렉산드르 2세 때는 되어야 해결된다.
2.5.4. 조세 개혁
본래 러시아의 조세 제도는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세금을 관장하는 통일된 기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프리카즈들이 자기 부처의 1년치 예산에 필요한 세금을 '알아서' 걷었다. 여기에 각 프리카즈들은 위에서 말했다시피 복설과 통폐합이 매우 자주 이루어져, 당연히 정부의 세금수입도 상당히 들쭉날쭉했다.지방 단위로 내려가도 문제는 심했다. 로마노프 왕조는 지역의 선출 행정관들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보이보드를 임명해 이를 감시하게 했는데, 이는 오히려 조선시대에 수령들이 세금을 떼어먹는 것처럼 보이보드들이 세금을 횡령하게 만드는 결과만 초래했다.
표트르 1세는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조세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가 개혁을 위해 모델로 삼은 나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였는데, 폴리투는 지역, 특히 도시에서 자체적으로 징수관을 선출한 후 지역 행정관의 간섭 없이 스스로 세금을 징수해서 중앙으로 직접 올려보내는 시스템이었다. 이러니 당연히 국가가 중간에서 관료들의 농간 없이 안정적으로 직접세를 거둘 수 있었다. 황제는 이 제도를 도입하여 지방에 지방 부르마이스터(земские бурмистры)를 설치해 자체적으로 징세하여 중앙에 올려보내도록 했으며 전국의 부르마이스터들을 관리하는 부르마이스터 팔라타(Бурмистерская палата)라는 기구를 모스크바에 설치했다.
조세 통일도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러시아는 재무 및 조세를 관할하는 부처만 5개가 넘었기 때문에, 황제는 기존 재무 부처들을 모두 대체할 조세 부처를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1699년 부르마이스터 팔라타를 라투샤(Ратуша)로 개칭하고 조세 업무를 담당하게 함으로서 해결되었다. 라투샤를 설치한 결과 전통적으로 루스 차르국 시대부터 재무 업무를 관할하던 우스튜즈카야, 코스트롬스카야, 블라디미르스카야, 갈리츠카야는 폐지되었고 지방 세금과 관세 업무를 담당하던 대재무부(Большая казна)는 권한이 축소되어 화폐 주조 업무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부르마이스터는 단순히 징세관 역할에서 벗어나 그 지역의 행정과 사법 업무도 맡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라슈타의 역할도 단순 조세 업무에서 행정과 사법, 특히 조세와 관련된 사법적 업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황제는 1724년 각 지방마다 부르마이스터들과 란드라트를 구성하는 라트만(Ратман)들로 구성된 시 참사회(Городовые магистраты)를 만들어 도시의 행정, 조세, 사법 업무를 이 참사회에 종속시키고,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최고 참사회(Главный магистрат )를 만들어 각각의 참사회들을 감독하게 했다.
2.5.4.1. 조세 개혁의 한계
그러나 이 개혁 역시 한계가 뚜렷했다. 개혁의 결과 조세가 일원화되어 국가는 안정적으로 직접세를 거둘 수 있게 되었지만, 황제가 목표로 했던 새로운 세수 창출에는 실패했다. 게다가 행정력 부족이라는 현실적 이슈로 인해 완전한 조세 통일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여전히 몇개의 프리카즈(콜레기야)들은 자체적으로 징수권을 행사했다.마찬가지로 지방 단위에서도 행정력 부족이라는 현실적 이슈로 인해 옛날 제도가 잔존한 지역들이 많았으며,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행정관들이 행정관에 의한 징세 금지라는 원칙을 씹고 자체적으로 세금을 더 부과해 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이중과세가 부여되는 일도 있었다.
또, 행정관들의 세수 전횡을 막기 위해 부르마이스터 제도를 시행했음에도 세수 전횡의 폐단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국가가 직접세를 거두게 되면서 사람들이 체감하는 세율은 이전의 배 가까이로 늘었고, 여기에 세금을 거두게 된 부르마이스터들이 보이보드들을 대신해 전횡을 부리는 경우도 잦았다. 황제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수입 감시관을 지방에 배치했지만 폐단은 계속 이어졌다.
표트르 1세가 사망한 이후에는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차기 황제인 예카테리나 1세는 국정에는 관심이 없어 국정은 귀족들에게 맡기고 노는 데에만 집중했고, 그 다음 황제인 표트르 2세는 매우 어려 국정을 스스로 돌볼 수 없었다. 이렇듯 권력이 귀족들에게 집중되면서 자연히 지방에서도 귀족들로 구성된 기성 관료들의 힘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지역 행정관들이 규칙을 깨고 부르마이스터와 참사회에 개입하고 일부는 심지어 참사회를 자신의 산하에 종속시키는 폐단이 일어난다.
이렇듯 참사회가 반쯤 무력화되자 정부에는 아예 이를 공식화하기 위해 참사회 폐지를 시도하지만 강한 반발에 부딪히자,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최고참사회를 1727년 전격적으로 폐지하고 라투샤로 대체했다. 그 결과 중복징세와 절차에 드는 금전적 비효율성이 시정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기는 했으나, 반대로 도시민들을 위한 항소법원을 폐지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조세권을 도로 귀족들로 구성된 지방 행정관에게로 종속시키고 사법개혁까지 무력화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인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개악은 6대 황제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대에는 되서어야 시정되었고, 참사회는 다시 독립성을 되찾았으며 수석참사회도 부활하여 강력한 권한을 얻게 되었다.
2.5.5. 생활 문화
유럽의 식문화, 복장 양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생활 문화의 개혁도 단행한다.표트르 1세는 새로운 인쇄소들을 설치하고 이를 통해 책의 보급률을 늘리고 문맹도 줄이고자 했다. 그 결과 1700년부터 20년 사이 이전까지 인쇄된 책 양의 2배에 달하는 1300권이 인쇄되었다. 덕분에 러시아의 종이 소비는 이전의 5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황제는 동시에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하고, 서양에서 자주 쓰이는 기호들을 사용하게 하여 단순하게 내용을 표현하도록 했으며 문자 개혁을 시행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러시아어에 서양에서 들어온 차용어가 매우 많이 유입되게 되었다.
또한 표트르 1세는 귀족[25]들의 정교회 문화권 특유의 긴 턱수염을 자르게 하고, 수염을 계속 기르고 싶으면 “수염세”를 내게 했다. 대신 서유럽에서 보편화된 콧수염을 장려했다. 위의 초상화에서 보듯 표트르 본인도 서유럽식 콧수염을 길러서 솔선수범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개혁은 서유럽을 따라잡고 싶은 조급함에서 나온 것이라 거의 강압과 폭력에 의존한 정책들이어서, 그만큼 반감도 대단했다.
또한 귀족의 모든 재산을 장자가 상속하도록 하는 상속령을 제정한다. 결국 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귀족 자제들은 수입이 크게 줄어들어 어쩔 수 없이 군대에 가거나 공부를 하거나 사업을 벌여야 했다.
또한 귀족들이 반강제적으로 공부를 하도록, 의무교육 규정을 만들어 귀족 자제들이 일정 이상의 교육을 해야만 결혼이 가능했고 귀족 신분을 지킬 수 있게 개편한다.
그외에도 박물관 도서관 사용의 장려 및 러시아 과학원의 설립, 독일 등에서 외국인 과학자 초청이 이루어졌다. 수학, 과학부터 공학, 산업, 군사학 등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들이 건설되었고, 대학과 김나지움을 설립했다.
표트르의 서구화 정책으로 러시아의 음식 문화에 변화가 생겼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근대화된 새로운 식습관이 들어선다. 나이프, 포크 및 스푼의 세 세트를 식탁에 앉은 모두에게 나누어 주어 음식을 먹게 하는 식습관이 대표적. 그외에도 유럽 요리사들이 들어와 서구의 식음료를 전파하면서 새로운 음식들과 요리법들의 도입됐다. 독일의 영향으로 양배추를 소금에 절여 먹거나 육류 소시지를 양배추와 함께 쪄서 먹기 시작했으며, 귀족은 포도주를 마시고 커피를 마실 것이 장려됐다. 야채 샐러드도 독일의 영향이다.
유럽의 복장들이 적극 도입됐다. 러시아의 전통 복장을 비실용적이라 생각[26]한 표트르는 러시아의 전통 복장을 유럽식으로 변경할 것을 장려했다.[27] 이를 위해 독일풍의 외투를 지급하며 러시아의 전통 복장을 포기할 것을 장려하고 남자는 조끼, 바지와 모자를 여자는 스커트, 셔츠, 유럽식 구두를 신을 것을 명하고, 아예 새로운 복장 양식을 성문에 전시해 사람들에게 홍보하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의 전통 복장으로 오가면 옷을 서구식에 맞게 자르고 벌금을 내게 했다. 때문에 이 시기에 유럽식 복장이 러시아로 대거 들어오게 된다.
역법도 개혁을 단행해 그 이전까지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러시아력이라는 독자적인 달력을 써왔던 것을 율리우스력으로 개편하였고, 새해를 축하하는 날을 9월 1일에서 1월 14일로 변경하였다.
2.5.6. 화폐개혁
2.5.6.1. 배경
표트르 1세의 재임 시점 러시아의 화폐제도도 큰 문제에 처해 있었다. 가장 큰 난관은 러시아의 자체 발행 화폐인 루블화가 유럽의 여타 표준 화폐와 비교해 질적 면에서도 양적 면에서도 크게 이질적이고 뒤떨어졌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부친이자 선선대 황제인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에서 제조된 라이히슈탈러를 모델로 새로운 루블화를 제조하라고 명령했다.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새로 제조한 루블의 무게가 원래 탈러의 평균 무게의 절반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부가 탈러를 구매한 가격은 보통 50코페이카였고, 1루블은 당시 기준 100코페이카였기에, 신루블화 제조로 인해 정부는 막대한 시뇨리지 차익을 얻게 되었고, 반대로 물가에는 악영향을 미쳤다.
또 정부는 서양식 동전을 본딴 구리 주화도 만들기 시작했다. 50코페이카 가치에 해당하는 폴티니크, 6 코페이카 가치에 해당하는 알틴, 4덴가에 해당하는 그로셰비크 등을 주조했는데, 문제는 여기서도 정부가 주조차익을 위해 시장가랑 심각하게 괴리된 정부 지정 고정환율을 쓸 것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시장에서 이 화폐를 믿고 쓸려고 할 리가 없었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루블화 제조 여력이 부족하자 그냥 기존 탈러에 표식만 다르게 찍어 루블화라고 내보내기도 했으며, 농민들에게 익숙해 그나마 자주 사용된 새로운 구리 주화는 외부와의 거래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러시아 지역 내에서만 사용하도록 했으며 정작 조세는 은화로 내도록 했다. 이런 행동들 모두가 화폐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행동들이었다.
결국 농민들은 화폐를 불신하기 시작했고, 시뇨리지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생활비가 오르고 기근이 닥쳤으며,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모스크바에서도 폭동이 일어날 지경이 되었다.
2.5.6.2. 개혁 추진
표트르 1세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새로 주조하는 화폐에 대해 농민들에게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뇨리지에 집착하다가 닥친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신루블화는 유럽 표준 탈러와 비슷한 무게와 함량을 지니도록 주조되었고, 새로운 화폐를 발행할 때는 미리 국민들에게 충분히 고지하도록 했다. 또한 새로운 화폐를 강요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오래된 화폐를 장기적으로 새로운 화폐로 대체하도록 했다.초반에 새로운 화폐는 기존의 탈러를 재주조하는 방식으로 주조되었다. 그러다가 1704년 정식으로 신루블화와 코페이카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오랫동안 기존의 은화 코페이카가 발행되다, 1718년에야 발행이 중단되고 신규 루블화와 구리 코페이카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표트르 1세의 통화개혁은 이전과는 달리 주조차익과 당장의 조세 벌충에 집착하지 않고 충분히 국민들에게 새로운 화폐에 익숙해지도록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함으로서 안착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발전하는 상업과 산업에 걸맞게 다른 나라와의 무역에도 용이한 새로운 화폐를 얻게 되었다. 또 유럽의 표준적인 동전 주조 기술을 도입함으로서 러시아의 금속 세공 기술이 혁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5.6.3. 한계
1711년까지 신규 발행 화폐의 순도는 유럽산 탈러 기준으로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대북방전쟁이 격화되면서 증가하는 전비 부담을 메꾸기 위해 정부는 다시 한번 시뇨리지를 감행한다. 1711년에는 거스름돈용 소액 화폐의 순도를 크게 낮추어 순도 70짜리 조로트니크라는 동전을 도입했고, 1718년에는 은화 루블도 순도를 떨어뜨렸다. 그 결과 당장의 급한 조세 구멍은 메꾸었지만 그 대가로 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물가는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또 새로 주조된 구리 코페이카의 실질가치는 명목가치에 비해 매우 높았다. 1718년 기준 구리 1푸드 동전의 시장가치는 5루블이었지만, 실제 유통되는 가치는 무려 그것의 8배인 40루블에 달했다. 표트르 1세 생전에는 이에 따른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러시아의 국내외 정세가 크게 요동치면서 명목가치보다 훨씬 높게 교환되는 구리 주화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예카테리나 2세가 구리 주화를 은화로 교환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비로소 해결되었다.
2.5.7. 인지 제도, 우체국 실행, 훈장 도입
익명의 편지를 받아 인지(印紙) 제도를 실행하는데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음을 깨닫고 이후 편지를 보낸 사람을 찾도록 해 포상을 내린다. 또한 우체국을 설립, 정부의 공식 우편물을 배달을 하도록 하고 이후 모든 사람이 서신을 보낼 수 있도록 우편 출장소를 일부 개설하기도 한다.전통적으로 러시아는 보상할 일이 있다면 토지, 농노, 현금을 하사했는데 서유럽에서는 훈장을 주는 것을 본 표트르는 이게 국가의 재정을 절약한다는 걸 깨달아 이를 도입한다.
2.5.8. 의료 개혁
표트르 1세 통치기에 의사와 약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들이 창설된다. 1700년에는 모든 군병원에 약국이 설립된다. 1701년에 모스크바에 8개의 사립약국을 개설하는 칙령이 발표되었고 이후로 모스크바를 제외한 다른 도시들에도 약국이 문을 연다. 또한 약초 재배를 위한 종자들이 수입되었으며, 이를 재배하기 위한 전문 정원들도 창설된다.2.5.9.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1703년 스웨덴령 잉에르만란드를 점령한 표트르 1세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발트해 연안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네바강 하구 삼각주에 있는 섬에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지었고, 그 도시의 이름을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지었다. 1712년 이 도시는 결국 완공되어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는데, 이 도시가 바로 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후 러시아의 귀족들과 백성들을 강제로 여기에다 이주시켰다. 그러나 늪지대 위에 도시를 만드는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폐렴과 결핵 등 전염병으로 죽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평했다.다만 '뼈 위에 세운 도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애당초 '뼈 위에 세운 도시'가 진실이면 땅을 파서 뼈를 찾는 것으로 간단하게 증명 가능한데, 소련 시대에 표트르 1세 격하를 목적으로 발굴 탐사가 이루어졌지만 증거가 없었다.
무엇보다 극초기 1년의 동원이나 전쟁 포로들을 제외하면 임금도 주고, 1~3달 주기로 교대로 시켰고, 전염병 돌면 최소한의 의약품도 지급해주거나[28] 공사에서 면제시켜 줬다.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는 당대의 기록과 증언이 있고 초기 역사가들은 이것을 그대로 차용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공식적인 기록이나 구체적인 수치자료는 없다. 단순히 모호하게 많이 죽었다는 증언을 제외하고 수치를 제시한 걸 보면 당시 러시아를 여행한 영국 귀족 프랜시스 대시우드는 공사 초기에만 30만 명이 죽었다고 러시아인들로부터 들었다고 기록했고 이런 식의 기록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10만~100만 정도로 나오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치다. 정말 수백, 수십만의 인력을 동원할 능력이 있고 그만한 손실이 나도 끄떡없다면 애당초 러시아가 스웨덴, 오스만을 가볍게 즈려밟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 내부의 공식 보고서로 1712년에 2,210명의 기술자 중에서 365명이 도망갔고 61명 사망했다, 1717년에 32,000명의 노동자들 중에서 1,000명이 전염병에 걸렸다는 식의 단편적인 공식 수치는 해당 내용과는 오히려 상반되는 내용이다.
어쨌든 정확히 얼마나 동원되고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게 정설이다. 그러나 수십 만이 죽었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고 정황 증거상 최대치를 잡아도 동원자 수는 대략 30만[29], 사망자 수는 수만 정도인 것으로 예측된다. 전근대의 대규모 공사이니만큼 분명 많은 사람이 죽었긴 하겠지만, 정 반대로 그 전근대 대규모 공사의 평균치를 넘어서는 건 아니었다는 소리. 엄밀히 도시를 세우려던 게 아니라 적의 영토를 점령하고 최전선에서 방어거점을 구축하는 거였기에 순수하게 건설보다는 전투나 비전투손실 등의 여러 요인들이 복잡하게 작용했다 보니 애매한 면이 있다. 물론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게 구체적인 수치를 드러내지 않는 문학적 표현이기에 큰 상관은 없긴 하다.
표트르 1세의 서구화 개혁 의지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도시의 이름 그 자체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어가 아니다. 러시아어로는 "페트로그라드"[30]가 되어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스웨덴어 '상트(Санкт/Sankt)'와 독일어 '페테르부르크(Петербург/Petersburg)'가 합쳐진 이름으로 당시에 독일어권이 선진화된 지역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새로 짓는 수도 이름에 외국어 발음을 붙였다.
러시아 과학원 역사연구소 측 연구원(대국굴기, 강대국의 조건 러시아편. p40)에 의하면 초기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부근에 건설할 것이 검토되기도 했지만 오스만 제국, 크림 타타르족의 저지로 인해 최종적으로 오늘날 위치에 건설하기로 정해졌다고 한다.[31] 이 점을 밝히며 표트르 1세가 꿈꾸던 발트해 해군은 안타깝지만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러시아의 수도도 결국 모스크바로 다시 옮겨졌다고 표트르의 발트해 해군의 꿈은 실패했다고 평했다.
2.5.10. 1721, 황제 등극
1721년 11월 2일,[32] 표트르 1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귀족들로부터 "전 러시아의 황제(Императоръ Всероссійскій: 임페라토르 프세로시스키)"[33] 칭호를 받았고, 그와 동시에 옛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제국(Pоссiйская Имперiя)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네덜란드 공화국과 프로이센 왕국이 가장 먼저 이를 승인했고 1723년 스웨덴이, 1739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1742년에는 영국과 신성 로마 제국이, 1745년에는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왕국이, 마지막으로 1764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승인을 하면서 러시아는 이로서 완전한 황제국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2.6. 후계자 문제
2.6.1. 아들에게 사형 선고
표트르 1세는 후계 관련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특히 표트르 1세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는데 황태자 알렉세이는 아버지 표트르 1세에게 큰 불만을 가졌다. 특히 그의 개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또 표트르가 귀족의 딸인 어머니 예브도키야를 소박놓고 하녀 출신인 정부(情婦) 마르타 헬레나 스코브론스카[34]와 놀아난 것도 한 원인이다.러시아 국내에서는 아들(알렉세이)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 흘러나왔다. 결국 알렉세이는 이 소문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추궁을 받게 되자 정부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피난했다. 이에 표트르 1세는 정부를 구슬려서 알렉세이에게 편지를 보내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고 했으나 알렉세이가 돌아오자마자 오히려 체포한 다음 법원에 알렉세이의 처분을 맡겼다. 이때 실질적인 납치 음모를 꾸민 주인공이 톨스토이 백작[35]으로, 납치 사건의 실질적 가담자인 정부는 다른 귀족과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한다.
1718년, 결국 재판소는 알렉세이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알렉세이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표트르가 손수 고문치사를 시켰다거나 사형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신빙성은 없다. 표트르는 비록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아비로서의 정은 어쩔 수 없었는지 몸소 아들의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장례 당일에는 눈물을 쏟아내며 애통함을 숨기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표트르 1세가 알렉세이 황태자[36]를 계속 살려뒀다면 표트르 2세 말고도 또 다른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표트르 2세가 자녀를 못 얻고 죽더라도 다른 자녀들이 계승하여 로마노프 왕조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로마노프 왕조는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실의 방계 가문이자 스웨덴 왕실의 혈통을 받은 이어받은 독일 귀족, 카를 페터 울리히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을 통해 이어졌다.
2.7. 죽음과 후계
1725년 표트르 1세는 자신이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후를 맞았는데, 사인은 요로결석이었다. 평소에 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37]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도시 건설 공사장을 순시 중 인부들이 네바 강에 빠진 것을 보고 친히 물에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린 것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지만, 이는 일종의 설화일 뿐 신빙성은 희박하다.이 당시 후계자인 황태손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정부(情婦)였다가 두 번째 황후가 된 예카테리나 1세가 차기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녀도 몇 년 뒤 공식 행사에서 속옷 차림으로 오래 서 있는 바람에 고열로 사망하고,[38] 황태손인 표트르 2세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지만 표트르 2세마저도 천연두에 걸려 일찍 사망하면서 러시아는 혼란을 겪는다.
그 후 예카테리나 1세의 차녀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정국을 안정시켰다.
3. 평가
3.1. 업적
러시아에서는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를 발전시킨 위대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문물들을 모두 표트르 대제가 도입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 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발견하고 러시아에 들여왔던 문물이다.또한 대륙 국가이던 러시아에 해양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한 것도 큰 업적이다. 1703년 발트함대를 창설해 대북방전쟁 후반부에 스웨덴 해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고, 17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아드미랄티 조선소를 만들어 이후 강구트급 전함 중 두 척(= 강구트와 폴타바)이 아드미랄티 조선소에서 건조되는 등[39] 수많은 함선들을 생산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닷가에는 바다를 향해 달리는 모습의 표트르 1세 기마상이 있고,[40] 현재 러시아 해군의 주력함이자 세계 최대의 수상 전투함인 키로프급 4번함의 함명이 표트르 벨리키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한 후 이전에 비해 러시아의 교역량은 수십배로 늘었으며, 바르샤바에만 있던 대사관도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 당시 쓰인《차르 표트르 1세 폐하가 1700년 스웨덴 국왕 칼 12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게 된 정당한 법적 근거에 대한 강론》[41]을 보면 당시까지 국제 무대의 구석에 있던 러시아가 유럽의 공식적 외교 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외교적 부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강대한 군대, 세련된 외교,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외국 문물[42]은 표트르 대제 즉위 30년간 러시아를 일변시켰다.
3.2. 한계
중요한 점은 다른 누구도 아닌 표트르의 후손인 이후 러시아 황제들과 차르주의자들이 표트르 1세를 폭군이자 계몽자로서의 양면성이 존재하는 복잡한 인물로 평가했다[43]는 점이다. 오히려 반체제적 성향이 짙었던 사회주의자, 서구주의자들이 표트르 1세를 칭송하거나 고평가했을 정도다. 즉, 바로 그 제정 시대에서부터 평가가 극도로 갈리는 인물이었다.표트르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왕권을 제약하는 보야르들을 타도하고 표트르 1세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지 백성들을 위하지는 않았다. 개혁을 시행하는 와중에 벌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사업, 근대화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드는데 이 당시 러시아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표트르 1세는 귀족과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여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려 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귀족과 백성들의 개혁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무엇보다도 표트르는 유럽의 선진적인 정치 체제를 도입하는데 매우 소극적이였다. 유럽 국가의 놀라운 발전의 근원은 사유 재산의 보호와 같은 시민의 권리와 자유, 군주의 권력 제한 자치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표트르와 러시아 제국이 범한 중대한 실수였고 크나큰 비극이 된다.[44] 괜히 표트르의 죽음 이후 러시아의 사회 개혁 움직임이 크게 후퇴한 게 아니다. 제국 내 농노, 이민족 뿐 아니라 귀족, 성직자들도 그야말로 강압 속에서 시달릴 대로 시달려서 지쳤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와 관련해서 전반적으로 복잡한 평가다. 표트르 1세는 대북방전쟁 당시 칼 12세와 손잡고 대항했던 카자크 헤트만 이반 마제파를 제압하고 카자크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사에 동원하거나 카자크 자치권을 제한했다. 그러나 당시의 카자크들은 동일 집단이거나 우크라이나인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는 아니었고 오히려 같은 카자크끼리 혹은 농민들과 싸우는 경우도 많았다. 단적으로 마제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표트르 편을 든 충성파 카자크 지도자들 중에서도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위인으로 존경받는 이들이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역사가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는 표트르 1세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가혹하게 통치했으며 개혁에도 많은 한계가 있었고 여러 실책과 악행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표트르에게도 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며 국가를 위함이었지 사익을 위함은 아니었다고 선을 그었고 또한 우크라이나의 계몽과 발전을 이끌고 특히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차별을 막은 것은 호평하는 등 나름대로의 복잡한 역할과 명암이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45]
사실 표트르 1세의 우크라이나 정책은 모순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전제군주정을 추구하면서 가장 강력한 봉건세력인 자포리제 카자크들의 자치권을 철폐한 반면 서구화 정책을 추구하고 전통적인 러시아 대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옛 소러시아인, 폴란드인을 적극적으로 등용해야 했다. 즉 차별한 것도 있고 탄압한 것도 있지만 민족주의적인 이유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표트르 1세 시기에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영토에 거주하는 카자크들을 비롯한 루스인들은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없었다. 이 당시에는 우크라이나 지역은 소러시아라고 불렸고 우크라이나란 개념이나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은 19세기에 와서야 형성되었다.
3.3. 논란
러시아의 서구화나 중앙집권화라 하면 대개 표트르 1세를 떠올리지만 표트르 1세의 개혁이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그렇지 "과연 본질적인 변화가 있었나?"에 대해서는 제정 시대 학자들부터 논란이 분분했고 실제로는 부황 알렉세이 1세가 기반을 마련한 플랜의 급진적인 진행에 불과하다거나 시대의 흐름을 잘 탔을 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표트르 1세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파벨 밀류코프의 경우 "개혁은 러시아 국가 발전 양상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표트르 1세는 단지 그것을 촉진하면서 흐름을 잘 탔을 뿐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지는 않았다."고 평했다.모스크바 대공국 시절에 이반 3세가 바로 그 신성 로마 제국의 카이저한테조차 대등한 황제임을 내세웠고[46]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인정받았다. 또한 이반 4세 시대부터 군사 및 정치 제도에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모방한 서구화 개혁이 시작되었으며, 보리스 고두노프 때는 서구식 예술 작품이 유행했다. 미하일 1세 재위기에 모스크바 총대주교 필라렛[47]의 주도로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스웨덴군을 모방한 군사 분야의 서구화가 진행되었으며 스웨덴 및 네덜란드와 활발한 국제 무역이 시행되고 있었다. 고로 이 분야에서 딱히 표트르 1세가 특출난 존재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는 당대인들이 표트르 1세 본인과 지지자들이 그의 계몽자로서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그 이전 시대를 후진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왜곡한 경향이 있다는게 밝혀짐으로서 더더욱 복잡해졌다. 즉, 표트르 1세 이전과 이후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주장은 오히려 정치적, 이념적으로 만들어진 표트르 전설(Петровская Легенд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표트르 1세가 주목받는 것은 군사, 정치, 기술, 행정 등의 분야에서 전례 없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수염을 자른다든가, 서유럽식 의복을 입다든가 하는 일반 평민들의 생활 관습, 종교 전례 등을 포함한 문화적, 정신적 분야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4. 가족관계
4.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예브도키야 로푸히나 (Eudoxia Lopukhina) | ||||
1남 | 러시아의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Alexei Petrovich, Tsarevich of Russia) | 1690년 2월 18일 | 1718년 6월 26일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샤를로테 크리스티네[48] 슬하 1남 1녀[49] |
2남 |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Alexander Petrovich) | 1691년 10월 13일 | 1692년 5월 14일 | |
3남 | 파벨 페트로비치 (Paul Petrovich) | 1693년 | 1693년 | |
예카테리나 1세 (Catherine I) | ||||
4남 | 표트르 페트로비치 (Peter Petrovich) | 1704년 | 1707년 | |
5남 | 파벨 페트로비치 (Paul Petrovich) | 1705년 10월 | 1707년 | |
1녀 | 예카테리나 페트로브나 (Catherine Petrovna) | 1707년 2월 7일 | 1708년 8월 7일 | |
2녀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부인 안나 페트로브나 (Anna Petrovna, Duchess of Holstein-Gottorp) | 1708년 1월 27일 | 1728년 3월 4일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슬하 1남[50] |
3녀 | 러시아의 여제 옐리자베타 (Elizabeth, Empress of Russia) | 1709년 12월 29일 | 1762년 1월 5일 | |
4녀 | 마리야 페트로브나 (Maria Petrovna) | 1713년 3월 20일 | 1715년 5월 27일 | |
6남 | 러시아의 황태자 표트르 페트로비치 (Peter Petrovich, Tsarevich of Russia) | 1715년 11월 15일 | 1719년 4월 19일 | |
7남 | 파벨 페트로비치 (Paul Petrovich) | 1717년 1월 13일 | 1717년 1월 14일 | |
5녀 | 나탈리야 페트로브나 (Natalia Petrovna) | 1718년 8월 31일 | 1725년 3월 15일 | |
8남 | 표트르 페트로비치 (Peter Petrovich) | 1723년 10월 7일 | 1723년 10월 7일 |
5. 대중매체에서
5.1. 드라마
- 스위스의 배우 막시밀리안 셸[51]이 주연하고 양지운이 더빙한 미국의 4부작 미니 시리즈《Peter the Great(1986)》가 꽤 유명하다. 노엄 촘스키의 친척인 마빈 J. 촘스키가 공동 감독하고, 한국에서는 1988년 8월 6일부터 9일까지 밤 9시 50분에 MBC 심야특선 외화 드라마《피터 대제》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오마 샤리프나 멜 페러 등 배우진은 화려하고 제작비도 많이 들여 볼거리도 많다. 다만 이 작품은 고증이나 연대기는 엉망이다. 만나지도 않은 아이작 뉴턴이 나오거나, 폴타바 전투 10년 전에 죽은 영국인 용병 장교 패트릭 고든[52]이 버젓히 폴타바에서 나온다. 1990년대 러시아에서 만든 전기 영화로서는 완벽한 작품이다.
5.2. 게임
- 문명: 연맹의 시대에도 등장한다.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표트르 대제(문명: 연맹의 시대)#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표트르 대제(문명: 연맹의 시대)#|]][[표트르 대제(문명: 연맹의 시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행정, 외교, 군사 순으로 6, 6, 6 능력치를 지닌 군주로 등장한다. 이 게임에서 6, 6, 6은 풀스탯 능력치이다.[54] 뿐만 아니라 모든 이전 시리즈에서 그의 능력치는 최고치를 찍는다.
- 엠파이어: 토탈 워에서도 러시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5.3. 소설
- 대한민국의 대체역사 소설 폴란드 여왕 키우기에 등장한다. 트립한 계기나 주인공인 정훈과 대립한다는 점을 들어 본 작품의 최종보스로 추정된다.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표트르 1세(폴란드 여왕 키우기)#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표트르 1세(폴란드 여왕 키우기)#|]][[표트르 1세(폴란드 여왕 키우기)#|]] 부분을
참고하십시오.6. 여담
- 누가 러시아인 아니랄까봐 술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술고래였다. 문제는 술에 취했다 하면 그렇잖아도 다혈질인 성격이 더욱 더러워져 완전 개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이때 누구든 표트르의 비위를 거슬렀다가는 가차없이 두들겨맞기 일쑤였다. 과음으로 인해 말년에 이르러서는 요로결석을 심하게 앓았는데, 의사들이 수술로 제거한 결석들의 양이 4파운드(약 1.8kg)나 되었다. 죽기 얼마 전에는 요독증에 걸려 오줌을 못 눠서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불구하고 술을 계속 퍼마셨다. 방광에 구멍을 뚫어서 오줌을 빼내기도 했지만 결국 요로결석과 요독증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게다가 사후 부검에서 표트르 1세는 방광이 심각하게 썩어있었다.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왕 아우구스트 2세는 동유럽의 운명을 건 대북방전쟁에서 도발을 일삼아,[55] 스웨덴의 소년왕 칼 12세에게 바르샤바가 점령당해 왕위에서 쫒겨났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에 빌붙어서 전쟁에서 승리한 뒤 겨우겨우 다시 왕위에 올랐다. 아우구스트 2세는 이때 표트르 대제에게 받은 은혜에 어찌나 감사했는지 즉위 기념 선물로, 생명의 은인인 표트르 대제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는 포르노 그림을 선물로 보내며 유럽 제일의 난봉꾼다운 기행을 벌였다. 웃긴 건 표트르 대제도 성격이 별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고 기행이라면 동유럽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인물이어서, 포르노 선물에 대해 기껏 살려줬더니 모욕했다고 화를 내기는커녕 "이 녀석 완전 내 스타일"이라며 오히려 좋아했다. 이후 아우구스트 2세는 표트르 대제라는 매우 든든한 큰형님이[56] 생겨서 거칠 것 없이 막 행동했으며 러시아의 뒷배만 믿는 경향이 강해졌다. 아우구스트 2세는 아예 강약약강이란 게 없었던 건지 자신의 나라보다 국력이 강력한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는 옷을 안 입은 여성의 초상화를 선물했다. 이 선물을 받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당연히 표면상 화를 냈지만, 이후 표트르 대제처럼 아우구스트 2세의 선물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 훗날 러시아의 장군이 되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을 등용했다. 이때 표트르 1세는 간니발에게 고급 교육을 받게 했으며, 간니발이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자 간니발의 대부가 되었다. 성씨 간니발은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인 한니발 바르카의 이름을 딴 것으로 간니발은 한니발의 러시아어 표기. 미들네임의 '페트로비치'도 표트르가 간니발의 대부를 서줬기 때문에 표트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간니발은 오랫동안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오늘날의 연구 결과로는 실제 에티오피아가 아니라 현대의 카메룬 북동쪽 차드 호 인근 출신이란 추측이 나오고 있다. 간니발은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외증조부다. 후손인 푸시킨은 자신의 외증조부 혈통과 이국적인 외모를 자랑스러워 했다.
|
표트르 대제와 역대 러시아 제국 황제들의 키.[57] |
- 키가 엄청나게 컸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장신이다 못해 거인인 203cm였다. 당시에는 영양상태가 영 좋지 못해서 서양인이라고 해도 평균 키가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으며, 인류 역사상 200cm 이상인 군주는 드물다.[58] 게다가 얼굴도 꽤 훤칠하게 잘생겼는데 이 둘이 맞물려서 어딜 가도 눈에 띄었다. 현재까지도 역대 러시아의 역대 지도자 중 최장신이다.[59]
[1] 1919년 이후의 맞춤법으로는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Романов.[2] 표트르 3세의 어머니.[3] 원래는 14명이나 되는 자녀를 뒀으나 위의 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나마 위의 4명에 포함된 막내딸 나탈리야 페트로브나 역시 6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4] 피터 더 그레이트.[5] 페터 데어 그로세.[6] 피에르 르 그랑.[7] 페드루 오 그란데.[8] 당뇨로 추정되는 병으로 거의 죽기 직전이었고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저하되었다. 누나 소피야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제위에 오르기도 힘든 상태.[9] 주로 스코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독일 출신들이었다.[10] 쿠쿠이(KyKyй)라고 부르는 서유럽 이주민들의 마을이었다. 당시에 러시아인들은 유럽 이주민들을 모두 독일인이라고 불렀다.[11] 네덜란드인에게서는 산수와 기하학, 축성술, 항해술을 배웠고 스코틀랜드인과 스웨덴인에게선 전술을 배울 수 있었다.[12] 이때 표트르가 이러한 병정놀이에 빠져 교육받기를 등한시한다고 여겨 실권을 잡은 이복누나 소피야는 표트르의 부탁에 진짜 창, 폭약, 대포까지 보내주면서 놀이를 부추긴다.[13] 정확히는 시체의 조직을 입으로 절단하라고 지시한 것 같다.[14] 머무르는 집마다 총탄 자국이 가득하고 바닥은 엉망이었다고 한다. 영국에 갔을 때는 겉옷만 걸치고 윌리엄 3세를 만나러 가기도 하고 고급 식기를 사용하는 데에 서투르기도 하여 영국인들은 표트르 대제를 부정적으로 보았다.[15] 키가 2m가 넘는 거구에다가 힘도 엄청난 장사여서 은쟁반을 손으로 구기고 말편자도 펼 수 있을 정도였기에 가능한 퍼포먼스였다. 물론 아무리 장사라도 백명이 넘는 사형수의 목을 다 치는건 힘든 일인지라 사형 후반에는 표트르파 귀족들이 도와줬다고 한다.[16] 이 때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서 재미있는 법안을 만들었다. 그 전까지 러시아인들이 가정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던 보드카를 앞으로는 국가에서만 제조와 판매를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표트르 대제가 사망하기 직전, 러시아 정부가 벌어들이는 세금의 40%는 보드카 판매에서 나올 정도였다. 물론 표트르 대제는 민심을 얻기 위해서 전쟁에 참가하는 병사들이나 노동자들에게는 매일 무료로 보드카를 지급해주었다고 한다. 덤으로 병사들에게 보드카를 지급한다고 홍보하자 군 지원율이 상당히 높아졌다고도 한다.[17] 현 벨라루스 흐로드나.[18] 이때 루스 차르국군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한 핀란드는 때마침 기근과 역병까지 덮치면서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사망하였다.[19] 이런 폐단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대문호 푸시킨의 <대위의 딸>을 볼 수 있다. 작품속 주인공은 성인이 되기도 이전에 이미 아버지 빽으로 장교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성인이 되어 장교로 부임할 때에는 아버지가 군 내 상층부에 청탁해 특정 지역으로 보내버린다. 그리고 그 부임한 요새를 관할하는 장교는 마치 가족들과 함께 그 지역 영주처럼 군림하고 있다[20] 행정 부처이지만 해당 부처가 관할하는 영역에 대한 사법권도 행사하는 기관이었으며, 신설과 복설, 통폐합이 매우 자주 이루어져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21] 란드탁(Landtag)이 주의회라면 란드라트는 주 행정위원회이다. 지역 유력자들 중에서 선발된 행정관들이 행정 사무를 수행하며 주지사 혹은 총독을 돕는 기구로, 몇몇 신성로마제국 소국들과 발트의 튜튼 기사단국, 리보니아 연맹에서 운용되었고 이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프로이센 왕국으로도 이어졌다[22] 참고로 이때 좌절된 농촌 자치 행정구 도입은 100년이 넘게 지나서 알렉산드르 2세 때가 되어서야 볼로스트 산하에 미르라는 농촌 공동체가 도입되면서 비로소 실현되었다.[23] 단어자체는 직역하면 궁정 법원이라는 뜻이다[24] 이후 이 항소법원은 예카테리나 여제가 상급 항소법원과 하급 항소법원으로 분리해 1심과 항소심을 각각 맡도록 개편했다[25] 농노와 성직자에게는 면도가 면제되었다. 즉 수염세는 명백히 귀족들의 재산권을 약화시켜 기를 꺾기 위한 목적이 다분했던 정책이었다.[26] 비실용적으로 생각한 것도 있고 서유럽에서 러시아의 전통 복장에 대해 멸시하는 풍조에 대한 대책이기도 했다. 본인이 일행을 이끌고 서유럽을 여행하던 도중 러시아의 전통 복장에 대해 조소를 받기도 했다.[27] 긴 소맷자락이 대표적. 아예 연회에서 귀족들의 옷의 소매를 자르기도 한다.[28] 물론 전근대의 열악한 의학수준을 감안하면 의약품을 지급해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29] 한꺼번에 30만 명을 동원 했다는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동원 소집과 해제를 반복한 것의 총 누적 수치다. 반복적인 소집과 해제 사이에서 분명히 중복되는 인원들이 상당수 있었기에 말 그대로 최대치고 실제로는 훨씬 적었다고 봐야 한다.[30] 여담으로 페트로그라드라는 이름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과 사이가 안 좋아졌을 때 본래 이름 대신 사용되었던 이름이기도 하다. 이후 소련 시절 내내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을 따다 붙인 레닌그라드로 불리다가 소련 해체 후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환원되었다.[31] 어차피 오데사가 러시아 제국 영토가 된 것은 1792년 이아시 조약 이후이다. 그 전까지 오데사는 오스만 제국 실리스트레 에얄레트(Eyālet-i Silistre)에 속했다.[32] 당시 러시아가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0일.[33] 러시아가 제국을 칭한 것은 전 러시아의 차르를 자칭한 이반 4세가 최초이지만 서구식 황제 개념인 임페라토르 칭호를 받은 군주는 표트르 1세가 최초이다.[34] 전시 억류자로 노예로 팔려와서 표트르의 신하의 집의 가정부로 있다가 헌납된 여자다. 나중에 표트르의 정부로 살았는데, 표트르가 황후를 폐위한 뒤에 정식으로 결혼했다.[35] 작가 톨스토이의 직계 조상이다.[36]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와는 다르다.[37] 실제로 요로결석의 원인 중 하나가 알코올 중독이다. 지금이야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이지만 파석술이 개발되기 전까지의 요로결석은 난치병이었다.[38] 이때 강추위가 심했는데 이로 인해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된 것이다.[39] 나머지 두 척은 네바강을 끼고 마주하고 있는 발트 조선소(여기는 1856년 민간 조선소로 설립되었다.)에서 건조했다.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로 남아 꾸준히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40] 이 기마상을 보고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청동기마상》이라는 시를 남겼다.[41] 《표트르 대제 ~러시아를 일으킨 리더십~》번역본 참고.[42] 표트르 대제 이후 가라앉을 때도 있었으며, 농민들에게는 그다지 많이 퍼지지 않은 면도 있다.[43] 니콜라이 2세의 경우는 표트르 1세를 자신이 가장 덜 좋아하는 선조라고 언급했다[44] 다만 이는 너무 현대적 기준을 적용한 결과론적인 평가인데 이 당시에는 베네치아, 네덜란드, 제노바 등의 공화국들은 여럿 존재했지만 이들 공화국들도 참정권은 귀족 내지 상류층이나 가질 수 있었던 현대 기준에서 과두정이었고, 보통 선거 개념은 생소한 것이었다. 따라서 시민권과 자유, 사유재산권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건 귀족 계층밖에 없었다. 표트르 1세가 저걸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전제군주로서 봉건귀족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 훗날 차르나 보수주의자들이 전제권력에 집착한 이유도 비슷하다. 왕권이 약화되면 귀족이 자유를 얻게 되고, 이 귀족들은 농노를 마음대로 착취하고, 분노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켜서 국가가 망하게 되니, 이러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 실제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이 쇠퇴의 길을 걸은 것도 귀족들의 권한이 너무 세져서 국왕도 제대로 견제를 못했기 때문이었다.[45] 이러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평가는 당시 표트르의 대척점으로 올려진 이반 마제파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제대로 된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사관으로 너무 이상화되거나 일부 예외적인 인물들이 띄워져서 그렇지 오히려 당시 카자크들은 대부분은 마적단, 지방군벌에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었고 적지 않은 농노를 착취하는 폴란드 슐라흐타와 별 차이 없이 카자크 지도자들은 당대 우크라이나인들로부터도 증오의 대상이었다. 단적으로 표트르 1세가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사에 동원했다고 하지만 우크라이나 내 정적들을 숙청하고 차르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이걸 적극적으로 이용한 인물이 바로 마제파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주도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어도 이는 러시아령 우크라이나의 가장 강력한 봉건영주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했으며 마제파가 표트르 1세의 가장 적극적인 동조자이자 수혜자였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때문에 마제파는 소련 해체 이후 민족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지만 생전에는 친러와 반러를 막론하고 우크라이나인에게도 평이 좋은 인물은 아니었다. 코스토마로프는 사실상 폴란드인인 마제파는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도 진심으로 조국이라 생각치 않았으며 자신의 사익만을 위해 차르에게 충성하며 소러시아인들을 착취했고 자신의 사익이 위협받자 차르를 배신하고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구실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철저한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때문에 마제파의 봉기는 후대의 민족주의적 사관에 의해 러시아 지배에 대항하는 우크라이나의 저항이라는 이미지가 덧붙여졌을뿐 실제로는 전제군주와 봉건영주의 충돌 정도로 여겨진다.[46] 즉, 애당초 차르-임페라토르를 동양적인 왕-황제 개념으로 보는 게 잘못되었다.[47] 당시 차르와 함께 공동 통치자였다.[48]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의 딸로 마리아 테레지아, 율리아네 마리의 이모다.[49] 표트르 2세 등[50] 표트르 3세[51] 그 유명한 샘 페킨파 감독의 영화 <철십자 훈장>에서 악덕 지휘관 스트란스키 대위 역으로 열연한 배우다.[52] 배우는 나치 장군 역을 자주 맡았던 영국의 배우 '제레미 켐프'다.[53] 다만 표트르가 세다기보다, 그가 이끄는 러시아 문명. 특히 러시아의 고유 지구인 라브라가 너프를 받았음에도 너무 강력하다는 게 문제다. 정작 표트르 자신의 지도자 특성은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지도자들 중에서 최하위권이다.[54] 이 게임에서 6, 6, 6 능력치를 지닌 군주는 표트르 1세를 포함해 악바르 대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프리드리히 대왕, 이 4명 밖에 없다.[55] 러시아 빽과 인구 3배 차이라는 체급 차이만 믿고 먼저 공격했다가 역으로 지도에서 지워졌다.[56] 실제로는 아우구스트 2세가 표트르 대제보다 두 살 많은 형이다.[57] 기타 황족까지 합치면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1856 ~ 1929)이 198cm로 가장 크다.[58]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200cm),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201cm)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59] 두 번째로 키가 큰 사람은 190cm의 알렉산드르 3세, 세 번째는 189cm의 안나 이바노브나와 니콜라이 1세, 네 번째는 187cm의 보리스 옐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