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에서는 중세 정치·사회·경제사 개념어로서의 영주를 설명합니다. 작위로서의 영주에 대한 내용은 작위/유럽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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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
영주(領主, feudal lord)는 영지(領地)를 소유한 주인을 말한다.본 항목에서는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에서 영지를 보유한 영역제후 내지 호족들을 설명한다.
7~10세기 유럽에서 게르만족의 관습인 종사제에 따라 지역의 유력자들이 지역 사회 주민을 장악하며 이를 주요 권력기반으로 하여 나타난 호족이 그 근원이나, 왕과 황제 등 군주가 이들을 공식적인 정부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함으로써 봉건 사회가 성립된다.
흔히 영주는 공, 후, 백, 자, 남 등의 5개의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오등작 항목에서도 언급하다시피 오등작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에는 적어도 중세 말까지는 없었으며, 그렇게 번역되는 지위는 옛 로마-프랑크 전통 하 존재하였던 역직(職役)과 결합된 일부 사례여서 실제로는 이들보다 크고 작은 영주들이 다양하게 존재하였다. 특히 동양의 오등작에 비추어 번역하는 작위를 보유한 귀족은 옛 넓디 넓은 행정관구나 부족권역을 사유화한 영지를 보유하는 영역제후가 되었고, 그들의 가신으로 종사하여 흔히 '봉신의 봉신'이나 '배신(陪臣)'이라 불리던 이들은 기사, 영주(herr), 성주(castellan; chatelain) 등 소규모 영주가 되었는데, 지역에 따라서 편차는 있지만, 소영주라도 착실히 세력을 키운 경우에는 기회를 포착하여 영역제후로 발전하기도 하였고, 혹은 다수 배신이 단합하여 영역제후나 군주에 맞서기도 하였다.
2. 발생
서유럽이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래 수백 년간 혼란스럽다가, 8세기부터는 프랑크 왕국의 통일로 좀 안정되나 싶었는데, 프랑크 왕국의 빠른 통일은 각지 유력자를 힘으로 완전히 파괴해 정복한 것이 아니라 회유와 포섭을 병행하여 굴복시킨 것이었으므로, 그러한 각지 유력자의 권리를 전부 뺏지는 못하고 일종의 계약관계로 존재했다. 이들 대부분이 중세 내내 제후 중 제일 독립성이 높은 세력들인 공작이다. 그 까닭에 프랑크 왕국의 중앙 행정력은 높지 않았고, 더군다나 프랑크 왕국의 분할상속 전통 탓에 왕의 후계자들이 서로 땅을 갈라먹는데만 몰두하면 외세(사라센, 마자르족, 바이킹 등)의 공격을 각 현지에서 알아서 방어를 해야했다.[1]이런 상황에서 발달한 전략이, 망치와 모루 전술을 응용하여 요새화한 마을을 모루로 삼고 기병대를 망치로 삼는 방어 전술이었다. 그래서 요새화한 각지 마을 근처에 기동성과 충격력이 뛰어난 예비대를 배치할 필요가 있었고, 각지 방위책임자들은 자연스레 옛 프랑크 왕국의 보병 군사문화 대신 기병 군사문화를 적극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병을 양성할 경제적 기반이 필요했다.[2]
이 기병을 양성할 경제적 기반이 바로 장원이었는데, 이것은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어졌던 빌라(Villa) 혹은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 변화한 것이었다. 이러한 장원을 소유한 현지의 유력자들은 자신의 가솔들을 사병으로 부려서[3] 현지의 방위를 담당하였고, 이것은 곧 현지의 지방권력으로 이어졌다. 중앙은 그냥 이들에게 현지 관료직을 맡기는 식으로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는 했고, 반대로 토호들이 스스로 관료직을 자칭하고 사후 승인을 받기도 했다.
또한, 프랑크 왕국-신성로마제국 시대 동안 행정관 개념으로써 파견되었던 백작들 역시 그 지위를 세습하는 경향이 있어서, 지방행정관 개념이던 백작은 자연히 해당 지역의 경제적 기반들과 결합하여 영주로 발전한다.
그 외에 공작에 미치지는 못해도 나름대로의 대토지를 세습해왔던 자유민들이 별도로 존재했고, 그들이 자칭하거나 그들에게 붙여줬던 명예 칭호가 남작이다.
2.1. 자유 영주
자유 영주들은 게르만족의 전통인 종사제를 중심으로 해서 밑에서부터 자연 발생한 이들이다.게르만족 자유민은 토지를 가지고 스스로 무장할 재력을 가졌으며, 주군에게 종사로 신종하여 군사적 복무를 하는 대신 주군에게 법적인 보호를 받고 전리품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신분 아래에는 토지가 없거나 불충분하여도 뛰어난 전투술과 무장을 지닌채 그들에 준하는 지위를 차지하였던, 자유민 혹은 반자유민 전사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종사제에서 나타난 전사 계층이 있다. '(주군의) 집에 사는 자유민'이라는 뜻으로, 마르크 블로크 저 <봉건사회>(한정숙 옮김, 한길그레이트북스)에서는 이 단어를 집에 머무르는 가신이라는 의미의 솔거가신(率去家臣)으로 옮겼다. 나이트(Knight)나 크네히트(Knecht)가 가신 내지 종사를 가리키는 개념의 단어다.[4] 마을의 유력자나 부족장 정도 계층이었던 이들은, 이러한 종사들을 자기 저택에 거느리며 지역의 유력자, 호족으로서 군림했다. 이런 유력자, 호족들은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을 통일하면서 전부 프랑크 왕국 군주(왕, 혹은 샤를마뉴 이후로는 황제)의 가신이 되었다.
이러한 마을의 유력자 계층들은 중세를 거치면서 자유영주로 발전한다. 군주(프랑크 왕이나 황제)가 게르만 전통에 따라 자유민 군대(hird; fyrd)를 소집하면, 군주의 가신인 영주들은 군주가 파견한 지방관의 깃발 아래, 혹은 군주 직속의 깃발 아래에 군인으로서 봉사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중세 성기에 군주나 유력 제후의 권력이 회복되기 전까지 그 아래에 있던 각지 유력자가 성을 축조하고 일대의 지배권을 탈취하는 일이 빈번하여서, 이 현상을 설명하고자 성주령 체제(castellany)라는 용어가 탄생하기도 하였다.[5]
이 자유영주라는 지위는 후대에 그 자체로 작위화 되어서 남작[6] 등의 하급 작위가 된다. 이는 특히 독일어 'freiherr'에서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조어 방식이 '자유(frei)'+'영주(herr)'이기 때문이다.[7] 또한 저 자유영주들 밑에 있던 가신들인 '자유민이자 스스로 무장하여 싸우는 전사 계급'은 기사(역사)가 된다.
이러한 자유영주나 기사는 특정한 업무를 맡은 직위라기보다는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공작이나 백작 등 역직에서 유래한 작위와 별도로 동시에 가지는 일이 가능했다. 즉, 정식 호칭은 '가스코뉴 공작'이면서 프랑스 왕 앞에서는 일개 '자유영주'이기도 하므로 '바론'이라는 호칭도 사용할 수 있고, 또한 일개 가신이기도 하니 '기사'일 수도 있는 식이다. 반대로 군주에게 지위 하나 못 받은 마을 왕초라면 남작 말고는 칭할 칭호가 없는 듣보잡(...)인 것이다.[8]
2.2. 영역제후
군장제와 종사제를 기반으로 지역에서 자연발생한 자유영주와 별개로, 프랑크 왕국에서 행정관 개념으로써 파견한 이들이 영주로 발전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백작은 샤를마뉴 시대에는 한 구역의 행정관이자, 판사이자, 군사령관인 개념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동시에 이들에게는 은대지(beneficium)라고 하여, 배정된 행정 구역의 일부 땅에서 조세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봉급 개념으로 주어졌다. 말하자면 조선의 과전법과 유사한 것이다.봉급 개념으로 나눠준 은대지는 과부나 고아를 위한 상속재산이라는 식의 명목으로 세습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게르만의 전통 상 작위 자체가 원래 세습이었던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은대지와 행정관 직위가 동시에 상속이 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은대지와 행정관구와 직위가 점점 일체화하는 상황 속에서, 영역제후들은 상기한 종사제를 결합하여, 자기 은대지를 중심으로 행정 관구의 다른 자유민 토지들도 병합해서 하나의 영지, 장원으로 만들어버렸다. 행정관구에서 출발한 것이 사유재산인 영지가 되어버리고, 봉급에서 출발한 은대지가 사유재산인 장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9]
다만 이 영역제후령이 행정관구 내의 모든 자유민을 농노로 흡수하거나 자유 토지를 장원으로 흡수한 것은 결코 아니다. 지역에 따라 편차가 좀 커도 10~40%의 인구는 어느 영주와도 가신 계약을 맺지 않고 자유민으로 남았으며, 이들에 관해서는 왕국 및 왕국에서 권위를 빌어다가 행사하는 영역제후령의 공공법령이 적용되었다.
이런 영역제후들은 위에서 말한 '밑에서부터 자연발생한' 자유영주와 다르게 위에서부터 주어졌지만 중앙권력의 혼란으로 인해 지방권력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아주 단순화하자면 공작, 백작들이 영주로 군림한 경우는 거의 이것이라고 보면 된다.
3. 권리와 의무
중세 초기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일원적인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였다. 게르만족의 부족적 관습법, 로마 제국에서 계승된 보편법, 가톨릭 교회에서 행사하는 교회법이 동시에 존재했다. 이 중에 지역화된 권력을 가진 영주들은 게르만의 부족 관습법을 통해서 자기 영지에서 예속민에 대해서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애초에 지방 영주 자체가 게르만족의 관습법인 종사제 덕분에 형성된 것이니.[10]봉건사회의 특성 상 영주의 권리는 지역마다 크게 달랐다. 크게 지역을 나누자면 프랑크 왕국의 법제가 느슨하게나마 계속 이어진 독일, 왕의 손이 닿은 북프랑스, 대다수가 자유토지인 상태를 유지한 저지대, 자치도시들이 형성된 이탈리아 북부, 난세가 이어진 남프랑스 등으로 나눌 수 있겠다. 특히 남프랑스의 영주들은 지역 유력자들이 불법적으로 특정 지역을 점유하여 영주를 사칭하고 일대의 재판권/군사권/조세권을 장악한 결과물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영역제후들조차 새로이 부상하는 성주층의 도전에 맞서야 했다. 물론 저 권리들을 중앙의 왕을 위해 납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사용한 것은 당연했다.
영주의 권리 중에서는 자기 소유의 방앗간, 화덕, 포도압착기 등의 사용을 농노들에게 강제했다는 권리가 잘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재판권을 바탕으로 사용 금령(ban)을 내림을 통한 착취였다. 이 독특한 착취권은 타지역보다는 왕권이 개판이었던 프랑스에서 많이 행해졌고, 그나마도 특히 유력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권리였다. 독일 지역에서는 백작 정도의 영주가 드물게 행했고, 노르만 잉글랜드에서는 시도되다가 흐지부지되었다.
영주들이 가장 만만하게 툭하면 착취한 곳은 다름 아닌 가톨릭 교회였다. 영지 내의 지역 본당에 대해서 영주들은 소유권 혹은 보호권[11]을 가졌고, 프랑크 왕국 이래로 세속 군주들은 교회의 행정력을 활용해 세금을 걷기 위해서 교회에게 십일조를 걷도록 강요했다. 교회가 걷은 십일조는 고스란히 세속 영주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런가 하면 프랑크 왕국 군주들은 교회에 토지를 기증하기도 하였으나, 때때로 기사에게 봉토를 지급하고자 교회 재산을 임의로 조정하여 토지를 앗아가거나 다른 토지와 바꾸기도 하였고, 자칭 성주(chatelain)가 교회 토지를 강탈하거나 아예 속인으로서 교회 토지를 관리하였던 vicar(vicarius)나 vogt 등이 자기 관할구를 탈점하여 독립적 세속영주로 행세하기도 하였다. 노르만 잉글랜드 역시 이 사유교회제를 벤치마킹했다.[12]
4. 종류
4.1. 지배형태적
4.1.1. 고전장원영주
영주는 고전장원영주, 재판영주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고전장원영주는 농민의 강제적 노동인 노동지대의 착취, 봉건적 농업과 토지소유의 기본적 형태의 장원을 가진 영주를 뜻하며 7세기에서 8세기 사이부터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걸쳐 존재하였으나 분산된 영토에서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였기에 조직적인 지역방위 권력이 되지 못하였다.4.1.2. 재판영주
재판영주의 경우 봉건영주의 전형으로 12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집단부락의 일반적 성립과 농업상의 기술혁신, 농사법의 보급에 따른 농업생산의 비약적 발전으로 프랑스 북부지역과 서부 독일에 나타나 교통의 요충지에 성을 쌓고 그 주변 일원에 있는 여러 마을을 지역적으로 방위함과 동시에, 그 지역 내에 사는 모든 주민, 즉 농민을 영민으로 삼아 그의 보호 지배 아래에 두었다.4.2. 지역적
4.2.1. 서유럽
4.2.1.1. 독일: 구츠헤르
독일에서는 12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독일 영주들에 의해 엘베강 동쪽을 개척하기 위한 대규모적인 '동부 독일 식민운동'이 전개되었고,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이르러 재판영주의 일종인 구츠헤르로 성장했다. 이들은 영민으로부터 조세징수에 의한 지역방위에 만족하지 않고, 그 권력으로 영주 자신의 직영지를 확대, 영민에게 부역을 시켰고, 생산된 곡물은 여러 도시에서 매각하면서 보다 많은 이득을 취했다. 구츠헤르는 후진적 농업지대에 늦게 출현한 재판영주가 당시의 도시경제에 대응하면서 농민지배를 강화하고 상품생산자적인 성격까지 장악한 예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전사와 위정자, 상인의 세가지 면모를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융커 문서도 참조.
4.2.2. 동유럽: 보야르
5. 쇠퇴
하지만 왕권이 점차 신장되어 중앙집권화(절대주의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영주권은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나 근대 국가가 성립될 때까지는 영주가 존속하였고 오늘날에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 것 같지만, 흔적 정도는 남아있다. 모나코, 리히텐슈타인, 룩셈부르크 같은 나라들이 그 예. 이 나라들은 왕국도 공화국도 아닌 공국이다.[13] 영국 채널 제도의 사크(Sark) 섬은 인구 600명의 작은 섬인데, 유럽 최후의 봉건 영지라 불린다.사크섬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된 것은 2008년으로, 그전까지 영주와 지주들로 이루어진 의회에서 봉건정치가 실시되고 있었다. 유럽연합의 기준에 의해 민주주의를 실시해야 했기 때문. 주민투표로 지역의회를 뽑도록 했는데, 165명만이 찬성했을 뿐, 나머지 주민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평화로운 섬이기에 섬의 개혁은 원하지만 혁명은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나.# 이는 한국으로 치면 섬 자체가 너무도 작아 지주라고 해도 동네에서 목소리 큰 어르신이고 영주도 동네 이장에 가까운 위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회가 설치되면서 외부 부호들에 의한 금권정치가 일어나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현실에 맞지 않는 시스템을 가져왔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예시다.
6. 같이보기
[1] 일례로 플란데런 백국은 이렇게 혼란하던 시기에 군주들이 한미한 출신의 실력자들을 대충 지방 백작 등으로 임명해놓고 막아보라며 떠미는 와중에 성공적으로 과업을 달성하면서 부상하였고, 조금씩 차이는 있어도 다른 영역제후들 역시 상당수 이런 식으로 형성되거나 세력을 불렸다.[2] 기사(역사) 문서에서 보듯, 이러한 경향성 자체는 메로빙 왕조 프랑크 말기나 카롤링 프랑크 시대에도 이미 진행되었으며, 이밖에도 기병으로의 전환에는 몇 가지 사유가 더 꼽히기도 하지만, 11세기 즈음에야 일단락되었던 여러 이교도 이민족의 침략은 그 추세를 확실히 가속화하였다.[3] 가솔이라고 하면 핵가족이 기본인 현대인은 잘해봤자 조선 시대를 기준으로 해서 수십명 규모를 상상하게 되지만, 중세 시대에는 수백명 단위가 기본이고, 다른 일족과 관계를 맺어서 수천명까지 가는 일도 흔했다.[4] 다만 대륙에서는 일반적으로 말을 타고 싸운다는 심상적 요소가 강렬하게 인식되었기에, 말 탄 자를 의미하는 용어가 쓰였다. 흔히 기사로 옮겨지는 프랑스의 chevalier나 독일의 ritter는 어원 상 말과 관련되었으나, 영어의 knight는 어원 상 말과 무관하다. 이는 노르만 정복에 앞서 독자적 봉건제를 형성해가던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는 기마문화 없이 전사집단이 발생하였던 점과 관련이 있으며, 어원 상 섬기는 자를 의미한다. 반면 독일어 knecht는 knight와 어원이 동일하지만, 이미 ritter가 전사계급을 가리키고 있었기에 그보다는 더 격이 낮은 사용인이나 한시적 용병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는 하였다. 한편 라틴어의 경우는 eques(말 탄 자)도 사용되었지만, 중세 전반에는 miles(군인, 전사)란 표현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당대 외침이 잦은 환경 상 그들이 유력자로 발흥하게 된 기원이 싸우는 자였던 바, 법률 용어로서 가장 근본적인 역할에 비추어 기록한 것이다. 이들 군사적 봉신에 비하여, 사법·행정·경영이나 기타 잡무를 수행하였던 ministerialis나 sergeant 등이 득세하게 된 것은 사회가 안정된 더 후대의 일이다.[5] 주로 북프랑스로 갈수록 영역제후의 통제력이 강하고, 남프랑스로 갈수록 영역제후의 통제력이 미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노르망디나 플랑드르처럼 통치자의 권력이 강하게 유지된 곳에서는 임의의 축성 자체가 억제되었으며 성주를 갈아치우거나 호출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는데,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성주(castellan) 등을 자칭하면서 불법적으로 성을 쌓거나 버려지거나 관리가 잘 안 되는 성을 탈취하여 독립 영주로 군림하는 일이 만연하였다.[6] 이름에서 보듯, 어원 상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다. 중세 초기에는 백작으로서 주로 성채의 방어 목적으로 임명되었으나, 차츰 일대 지배권을 획득하여 독립 영주가 되기도 하였으며, 혹은 새로이 축성하고는 성주를 자칭하기도 하였다. 성주에게 종속된 기사나 독일의 burgmann 등은 가택이 딸린 약간의 토지를 받고 수비대를 구성하였다.[7] 이들 외에도 교구의 일부를 관할하여 주교의 세속적 의무를 대행하였던 vicar(vicarius)나 백작의 관리로서 백작령 일부를 담당하였던 viscount(vidame) 중에서도 약삭빠른 자들은 자기 관할구역을 슬쩍 가산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백작 등을 자칭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여전히 주군에게 봉사하면서 영역제후나 자유영주보다 한정적인 특권만을 누렸다. 프랑스를 비롯하여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경험하였던 지역에서는 백작으로 올라서지 못했어도 가산화는 이루어져서 자작령(viscounty)을 보유한 경우도 보이지만, 노르만 정복으로 대륙식 봉건제를 취사 선택하여 도입하였던 잉글랜드에서는 그러한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자리는 집사(steward)나 bailiff, reeve 등의 하급 관리로 채워졌다.[8] 특히 이 "누구를 섬기는가?"라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하여서, 똑같은 지위를 부여받더라도 그것이 군주에게 받은 것이라면 격이 다르게 취급되었다. 같은 남작이라도 왕의 남작(king's baron)이라면 군주의 직속 봉신으로서 명예를 누리고 궁중직 등 권력에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며, 재판을 받더라도 왕을 섬기는 다른 공작이나 백작과 같은 재판소에서 그들의 배심 하에 진행되었다.[9] 조선의 경우는 과거제와 같은 공적 인사체계의 존재가 이런 현상을 완화하였으나, 중세 유럽에서는 군주 개인의 인적 관계를 매개로 인재를 뽑고 충성을 유지하였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가문 간 유대는 깊어졌고 가산화도 촉진되어 버렸다.[10] 심지어 부족적 관습법도 어느 하나가 일률적으로 적용된다는 보장이 없었는데, 지역별로 우세한 법률은 있더라도, 실제로는 그 구성원의 출신성분에 따라 여러 법률의 피적용자가 혼재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한 지붕 아래에서도 누구는 작센인의 법, 다른 누구는 살리인의 법, 또 다른 누군가는 프리지아인이나 로마인의 법이 적용되는 식.[11] 이 둘은 같은 것이었으나 그레고리우스 1세의 개혁 이후로 이름이 바뀐다.[12] 세속영주로서는 교회 및 교회법도 왕국과 보편법 못지않게 눈엣가시였다. 비록 많은 경우 교회나 수도원이 지역 내 귀족의 후원을 받거나 설립되었기에 유착도 많았으나, 기본적으로 기독교 교리 상 영주나 농노나 같은 교인이었고, 그래서 농노의 신분상승에 관한 소송에서 농노에게 더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등, 영주의 이익에 반하는 조치도 많았는데, 그나마 농노들이 도시민이 되고자 돈을 치르고 자신의 법적 보호자를 교회로 바꾸는 일은 비교적 영주와 교회 간 합의가 잘 이루어진 케이스였다.[13] 모나코는 프랑스계 Prince로 대공을 의미하며 리히텐슈타인은 Fürst로 공작에 해당하는 Herzog와 백작에 해당하는 Graf 사이에 위치한 작위이기에 공작 혹은 후작으로 번역하며 룩셈부르크는 이 셋 중 가장 격이 높은 Grand Duk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