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라티푼디움(latifundium)은 고대 로마의 장원 제도이다. 라틴어로 'latus'(넓은)와 'fundus'(농장)가 결합한 단어로, 말 그대로 큰 땅, 큰 농장이란 뜻이다. 'fundus'는 영어 'fund'의 어원이기도 하다.2. 역사
본래 도시국가에서 시작한 로마는 대부분의 농민이 자영농민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농업은 지력의 보존이 어려워 한 농지에서 경작을 하고 나면 2~3년 동안 그 농지는 묵혀두어야 했다. 이 시기를 휴한기라고 한다. 때문에 자영농민은 농사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포에니 전쟁을 겪기 전까지 로마에서는 2~3년간의 휴한기에는 주로 전쟁을 통해 생계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고 자연히 전쟁을 하기 위한 병력은 휴한기에 농사를 짓지 않던 자영농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주로 휴한기에 전쟁으로 물자와 식량을 확보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농번기가 되기 전에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 농사를 짓는 식이었다. 문제는 이게 가까운 곳에서 전쟁을 벌일 수 있던 도시국가 때는 수월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장거리 원정이 많아지면서 점점 힘들어져 갔다. 원정이 잦아지고, 그 때문에 시민병이 휴한기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농지를 떠난 뒤 돌아오게 되니, 관리가 안 된 농지는 잡목과 잡초가 무성하여 농사를 지으려면 개간을 새로 해야 할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반도 자체가 북부 포강 유역 정도를 제외하면 답 없는 산악지대라 개별 농지들의 생산성 자체가 높지 않았고, 특히나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관개농업지대들이 식민지로 편입되면서부터는 아예 상대가 되지 못했다.
포에니 전쟁 이후 고대 카르타고가 멸망하면서 카르타고에서 운영하던 라티푼디움 경영이 로마에 도입되었다. 카르타고 합병 후에는 수많은 정복전쟁으로 노예는 많아지고 땅은 넓어지자 다수의 노예를 이용하여 농장을 경영하는 라티푼디움 제도가 카르타고로 부터 도입되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장원주들의 부는 점점 늘어만 갔지만, 반대로 자영농민들은 잦은 전쟁으로 농지를 관리하지 못했으며 농사를 지어 봤자 장원에서 노예를 동원해 대규모로 생산한 곡물과 가격경쟁도 되지않아 생계가 점차 곤궁해져갔다. 결국 몰락한 자영농이 땅을 헐값에 장원에 넘기거나 심하면 그냥 바치고 고용인이 되어 장원의 세는 더욱 커져갔다. 그리하여 빈곤한 자영농민과 풍족한 장원영주로 로마사회가 양극화되어 큰 갈등거리가 되었다.
농지법 개혁을 중심으로 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대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골자는 몰락한 무산자계급에게 다시 경작에 적합한 농지를 국유지 가운데서 골라 무상으로 나눠주자는 것. 그런 원로원에 의석이 있는 대부분의 귀족이 라티푼디움을 형성하여 부를 쌓은 대농장주라서 입안에 차질을 빚었다.[1] 정작 농지법 실시전에도 법으로 개인이 소유가능한 토지를 500유게룸(약 125헥타르) 이하로 제한했었다. 그러나 대리 신고를 하거나, 공유지를 무상으로 또는 매우 낮은 임차료를 내고 임차하여 사실상 소유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2] 이를 공공연히 피해가거나 위반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로마시대 노예장원의 경제적 입지와 노예장원을 둔 농장주들의 사회적·정치적 입지는 매우 커 그라쿠스 형제는 개혁을 실시하기도 전에 둘 다 암살되었고,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군제개혁의 일환으로 퇴직장병에게 국유농토를 나누어주는 제도를 제기했다가 입안되기도 전에 기각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권하면서 농지법을 통과시키지만, 그 역시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러다 노예농과 라티푼디움은 장기간 성행했고 농지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에 물론 자영농도 계속 존재하였지만, 대규모 곡창지대인 이집트와 아프리카가 로마로 병합되자 값싼 이집트/아프리카산 곡물의 유입에 이탈리아 본토의 자영농민과 라티푼디움은 경제적 타격을 받는다.[3] 게다가 영토 확장도 한계에 다다르면서 로마 장원의 노동력인 노예의 공급도 힘들어졌다.
그러나 노예제 하에서의 장원 경영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갔다. 노예를 활용하는 것은 생산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노예의 주요 공급책은 전쟁이었는데,[4] 노예 대부분이 고된 노동에 대개 일찍 죽었고, 성비조차 남자가 훨씬 더 많았다.[5] 게다가 노예제도는 인신을 구속하고 자유를 빼앗아 억압하는 것이기에 숙식비용이 나가는 것에 비하여 노동욕구가 없으니 생산효율이 떨어졌고, 노예들이 불만을 품고 도망치거나 종종 극단적으로는 스파르타쿠스의 난처럼 노예반란을 일으켰다. 이렇듯 노예란 기본 효율이 떨어지면서도 그 숫자가 늘기는커녕 지속적인 감소로 숫자가 유지조차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미 로마 공화국시대의 여러 농업서에서도 장원 경영에 최적화한 토지와 노예의 규모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노예 수를 가급적 줄이고 노예해방 등 인센티브를 주도록 권장하였는데, 장원 경영에서 노예의 기여분을 제외한 나머지 노동력 수요는 인근의 평민 자유농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중앙정부도 장원의 붕괴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노예들이 해방되어 자유민이 증가한다면, 세수도 증가할뿐더러 군사적으로는 보병 모집에 도움이 되고 이는 국방력의 증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고대 로마 시대 노예장원이었던 라티푼디움은 노동력 수급의 문제로 크게 해체되거나 쇠퇴하게 되고 뒤이어 콜로나투스(콜로누스), 즉 초기 농노 제도가 들어선다.
[1] 무상으로 나눠주는 땅을 자기가 불하받아서 라티푼디움을 늘리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2] 빌린 토지는 '소유'한 것이 아니란 논리로 법망을 교묘하게 피한 것.[3] 이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영토는 나중에 로마가 제정이 되는 과정에서 황제 직할지가 되었고 여기에서 나온 수익을 가지고 로마 병사들의 봉급과 퇴직금을 지급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농지법 문제는 결국 정리가 된다.[4] 채무노예나 인신매매 등도 있었으나, 이들만으로는 한정된 공급 탓에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어서 전쟁포로가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였다.[5] 이와 대조적으로 노예무역 금지 이후의 근대 미국을 살펴보면, 여성 노예인구를 다수 확보하였던 남부에서는 노예의 "생산 및 다른 주로의 수출"이 산업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