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인(Romani people)에 대한 내용은 집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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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로마시의 시민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지만 이 경우는 그냥 "로마 시민"이라고 하는 경우가 더 많다.2. 로마 문명의 시민
로마 시민권자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로마가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건국 초기에는 1번 항목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는 과정에서 로마 시민권을 피정복민에게 개방하면서, 더이상 로마인은 로마시의 주민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게 되었고, 초기의 주류 민족이었던 라틴족과는 전혀 다른 이민족이라도 로마 시민권을 얻으면 법적으로 로마인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그리스 출신으로 로마 시민권자가 된 폴리비오스나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는 유대인이었던 사도 바울로 등이 있다. 그리고 3세기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에 의해 피정복민이 로마 시민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만 했던 제약이 사라짐으로써, 로마 제국의 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자유민이 로마인이 되었다.즉, 로마인이라는 단어는 로마가 특정 민족의 국가가 아닌 다민족 보편제국임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그래서 군인 황제 시대에는 트라키아인 황제, 아랍인 황제 등 라틴족과 거리가 먼 인물들이 황제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고, 서로마 제국 멸망으로 인해 제국 내에서 라틴인의 존재감이 줄었으며 또한 로마라는 '도시'(및 이탈리아)와 로마라는 '나라'(즉 동로마 제국)가 점차 다른 역사적 경로를 밟게 된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로마라는 국가 정체성은 1453년에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물론 근현대의 국민국가처럼 수도 혹은 중심부든 변방이든 그 나라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의 정도에서 완전히 같지는 않았고, 중심부에 속할수록 정체성이 더 강하고 변방으로 갈 수록 정체성이 다소 약해지기는 했다고 한다.[1] 동쪽 끝이었던 시리아(레반트) 지역의 자료에서는 로마인이 마치 제3자처럼 3인칭화해서 다루어졌다고 하며, 서로마 멸망 이후에는 확실하게 로마 세계의 중심지에서 내려온 이탈리아에서도 스스로를 로마인이라고 자칭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2] 그 연장선상에서 시리아어로 '로마인'(R(h)ūmāyē)은 군인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술했듯이 이 자체가 3인칭화임은 물론, 제국의 동쪽 끝이라 그 너머 파르티아-페르시아와의 주 전선으로써 시리아 지역에 배치된 로마인은 대부분이 군인 혹은 군 관련 인사들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구 비중이 상당해서 제국의 언어 지도를 그릴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던 시리아어권 같은 제국 전체에 걸친 비중은 없더라도, 소지역 단위에서 소수민족 비슷하게 독자정체성을 유지했던 집단들 또한 존재했는데, 제국의 한쪽 끄트머리에 있지는 않았지만(소아시아 중남부) 타우루스 산맥의 산악민족이었던 이사우리아인이 타 종족집단에 비해 동로마 지역에서 상당히 오랫동안[3] 일반 제국민과는 구별되는 소수민족 비슷한 독자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하며,[4][5] 제국의 서북쪽 끝이었던 아르모리카(現 브르타뉴 반도)와 그 주변 북·서부 갈리아 지역의 바가우다이(Bagaudae) 또한 대동소이한 케이스이다.[6] 공교롭게도 각각 시리아와 갈리아를 중심으로 짧은 기간이나마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이 로마 본국으로부터 독자세력화를 시도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기준으로 위치가 워낙 구석의 섬이라 심각성과 파장 면에서는 갈리아 및 팔미라보다는 확연히 덜하다고 평가되지만[7], 280~290년대 로만 브리튼에서도 카라우시우스 및 알렉투스가 독자세력화를 기도했었다. 이들은 철저하게 로마라는 테두리 안에서 땅따먹기를 했던 사두정치 말의 혼란기 혹은, 반란으로 인한 년 단위의 영토 참절(마그넨티우스, 마그누스 막시무스 등)과는 차원이 다르다.
반면 구 서로마 제국 지역에서는 여러 정치체들이 난립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며 현지의 구 서로마 선주민들과 각국 지배층들이 점점 융화하게 됨에 따라, 또한 시간이 지나며 남아있는 로마 제국, 즉 동로마 제국에 대한 동질감과 연고의식이 엷어짐에 따라 '로마인'이라는 개념은 점점 보편적인 의미를 잃게 되어 예전 공화정 때처럼 다시 로마 시로 수축하거나 혹은 종교적인(가톨릭) 의미를 갖게 되었다.[8] 가톨릭 신자 및 그 전신인 로마 교회 신자에게 '로마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6세기 때부터 보였다고도 한다.[9] 다른 곳도 아닌 구 서로마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에서의 개념 변화만 봐도 6세기 초·중반의 카시오도루스는 '로마인'이라는 용어로 ('고트인', '게르만인' 등과 대조되는) 동고트 왕국 치하의 구 서로마 선주민을 지칭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고트 전쟁을 거치고 나서인 6세기 말의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로마인'이라는 용어로 로마 시의 거주민을[10] 거의 한정적으로 지칭했다고 한다.[11]
이렇게 구 서로마 지역에서의 로마적 정체성이 퇴조해버린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역설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가 큰 몫을 했다.(...)
서로마 멸망 후 로마 시 원로원(즉 구 서로마 원로원)도 어느 정도 돌아갔고, 구 서로마 시절의 지방행정 체제(Praetorian prefecture나 Diocese 등)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며, 동로마 황제로부터 명예시민, 집정관, 파트리키우스 등 명목상의 관작을 받아서 활동하던 게르만 각국의 군주들의 모습에서 엿보이듯이, 구 서로마 지역은 느슨하게나마 로마 세계 안에 있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유스티니아누스가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받아왔던 종래의 정책을 폐기하고서는 아예 대놓고 직접적인 전쟁에 나섬으로써, 그렇게 새로 그어진 국경 밖은 역설적으로 완전히 로마에서 벗어난, 달리 말하면 (동)로마 제국이 수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이 인증되어 버려서[12] 그 지역에서의 구(舊) 로마적 정체성은 급격히 퇴조하게 되었다는 관점도 있다.[13]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이 전쟁으로 구 서로마 엘리트층이 친 동고트 파와 친 제국 파로, 랑고바르드 왕국의 성립 이후로는 랑고바르드 치하에 순응하는 이들과 제국령으로 랑고바르드를 피해서 들어간 이들로 나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이들을 로마라는 공통의 옛 정체성으로는 더 이상 묶기 힘들게 되었다.[14] 여기에 원로원의 쇠퇴도 한 몫 했다. 구 로마 원로원의 소멸은 곧 무엇이 로마(인)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늘 정해왔으며 그 모범으로 여겨지던 엘리트 집단의 소멸을 뜻한다고도 한다.[15]
이렇게 되자 중세 초기 서유럽에서의 로마성은 가장 영광스러운 과거였지만, 서로마의 멸망으로 이미 지나간 것이 되어, 미래를 약속해주지는 못했다고 하며,[16] 그래서인지 그 이후 세비야의 이시도르[17]가 쓴 '고트족의 역사'의 책 초반에는 로마인(Romani)이라는 용어를 구 서로마 제국의 주민(이시도르 본인 등 서고트 치하의 이베리아계들도 포함)까지 포함해서 지칭하다가 그 이후에는 동로마인 및 스페인의 동로마군[18]에 한정해서만 지칭하고, 구 서로마의 주민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로마인'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다고 한다.[19] 즉 이시도르는 고전 교육을 잘 받은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의 구 서로마인 집안 출신으로서, 로마 교회(가톨릭)의 수호자였지만, 정작 당대 서고트 왕국의 주요인물로서 동시대의 로마인(동로마)에게는 적이었던, 이렇게 여러 로마적 정체성들이 서로 충돌하는 사례가 되겠다.[20]
시일이 지나 카롤루스 대제는 800년 '로마 황제'[21] 대관을 받은 후 '로마인의 제국'이 함의하는 종족적인 인식을 억누르고자 했는데, 이는 마치 프랑크인의 왕은 당연히 프랑크인이 세우는 것처럼, 로마의 황제 칭호 또한 마땅히 로마 시민이 수여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은 취하고 싶으면서도, 그 권위가 당대(중세)의 로마 시에서 발원한다는 인식의 형성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나아가, 알맹이는 엄연히 카롤루스 본인의 프랑크 왕국이며, 이 '로마'는 프랑크 왕국을 좀 더 빛나게 하는 포장이라서 그 포장을 요청하러 오면 그저 포장해 주는 답정너 거수기일 뿐, 다른 엉뚱한 사람을 황제로 추대하려 하거나 혹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선언하려는 시도 등을 막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22]
이라클리오스의 공용어 전환 조치로 인해 라틴어가 동로마 제국의 공용어에서 배제되고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어, 동로마가 '그리스 제국'으로 변질됐다는 오해가 대중적으로 퍼져있지만 이것은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폐기된 학설이다. 그리스가 기원전 2세기에 로마에게 정복당한 이래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고, 위에서 서술한 안토니누스 칙령에 의해 모든 그리스인이 로마인이 되었고, 이라클리오스 시대 이전에 이미 그리스인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스스로를 로마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23] 한편 서방에서는 서로마 멸망 후 얼마 되지 않고서부터 동로마 제국을 로마가 아니라 '그리스'로 지칭하고 있는 것도 발견된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는 508년에 정통파 로마 교회(가톨릭의 전신)으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이 건에 대해서 한 주교가 클로비스에게 개종을 촉구했던 서신에는[24] 동로마가 그리스로 지칭되어 있다.[25] 이후 반 세기 정도 지나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이 끝맺고 동고트 왕국을 완전히 정복한 나르세스는 초대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전후처리 및 재건사업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런데 흑사병으로 납세자들이 많이 죽었고 또한 원 계획대로라면 540년대 초 쯤에 끝났을 만한 전쟁이 10년 이상 장기화되자, 원래보다 재정 수입은 줄었는데 지출이 커져서 그 중 일부를 이탈리아에 추가수취를 하게 되었다.[26] 이렇게 되자, 로마 시에서 나르세스에게 가혹한 통치에 대해서 탄원하러 보낸 대표단이 차라리 그리스인[27] 당신들보다 동고트인을 모시는 게 낫겠다고 했다고도 한다.[28]
한 학술서적에 따르면 독일어로 고대 로마 및 서로마 제국 시대의 로마인에 대해서는 'Römer'라고, 한편 그 이후에 대해서는 'Romanen'이라고 구별해서 부른다고 한다. [29] 한편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가 직접 저술한 '제국 행정론'에 따르면 그리스어를 로마자로 썼을 때 자국민(동로마인)을 'Rhōmaioi'라고, 슬라브족의 이동 이후로 동로마 본국에서 고립되었지만 슬라브인에 흡수되지 않고 정체성을 지켜 온 달마티아의 로마계 주민을 'Rhōmanoi'라고 구별해서 불렀으며, 한편 동로마령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어로 쓰인 문서에서는 로마 시와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Rhōmanos'라고 지칭했다고 한다.[30] 960년대의 니키포로스 2세 때에는, 독일 왕국에서 새롭게 런칭한(...) 신성 로마 제국이 세워졌는데 그냥 황제면 모를까 '로마 황제'가 둘인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동로마의 입장 때문에 외교분쟁이 생겼다. 그 사절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방문한 크레모나의 주교 리우트프란트에게 니키포로스 2세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으며 압박을 넣었는데, 리우트프란트가 당한 박대 때문인지 그가 남긴 기록 중에는 '우리 게르만인에게 '로마인'이라고 상대를 부르는 것은 최악의 모욕 중 하나로 여겨진다'고도 했는데, 이 '로마인'은 동로마인 및 로마 시의 주민 둘 다를 중의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31] 한편 의외로, '로마인'을 제대로 폄하의 뜻으로 줄기차게 쓴 경우가 바로 이슬람측의 비잔틴인에 대한 규정이었다. 비잔틴인들은 고대 그리스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지무식하니 절대 그리스인은 아닌 '로마인'임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물론 이런 폄하의 뜻을 비잔틴인들이 모를리 없어 본인들은 그리스인의 후손이고 그리스인이기도 하다고 강변했으나 무슬림들은 그런 주장에 쉽게 설득되지 않았다. 물론 무슬림들은 로마 제국에 대해선 나름 경외했던 게 사실이었으나 '로마인'에 대해선 그렇지 않았다. 군사과학과 손으로 뭘 만드는 것 외엔 별볼일 없는, 과거의 영광만 남은 족속으로 여겼고, '로마인'들이 고대 그리스 학문도 거의 모르는 주제에 고대 그리스인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건 근거가 없는 얘기라고 언급했던 것이다. 앞서 서구인들과 비잔틴인들의 로마성을 두고 벌어진 일화들과는 완전히 뒤바뀐 구도다.[32]
한편 현대에는 민족주의와 국민국가 개념이 강하고 국적과 민족을 혼동하는 사람이 많아 로마인은 곧 라틴인이고, 게르만인이나 그리스인 등은 로마인이 아니라는 오해가 대중적으로 퍼져있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미국인"이라면 앵글로색슨 백인만 떠올리고 한국계 미국인을 미국인이라고 취급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그리스어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서아시아와 이집트에서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로마의 정복 이후로도 그 상태가 유지되었기에 동로마의 영토는 동서 분열 이전에 이미 그리스어권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로마 제국 동부에서는 그리스인이든 아니든 그리스어를 썼다. 라틴어를 썼다고 해서 꼭 라틴인이 아니었듯이 그리스어를 썼다고 해서 꼭 그리스인인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라클리오스의 공용어 전환 조치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군사 용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꾼 것일 뿐 라틴어를 완전히 배제하고자 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7세기에 안팎으로 투쟁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및 테살로니카, 니케아, 니코메디아 등 수도 및 수도에서 가까운 몇몇 주요 도시를 제외하면 한 번이라도 함락당하지 않은 도시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33] 이렇게 되자 도시문화와 교육이 쇠퇴하며 우선순위에서 그리스어에 밀리기 시작한 라틴어의 교육 또한 확 쇠퇴해버려서 그 이후로 라틴어가 동로마 제국에게도 거의 생소하게 느껴지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은 황제들의 출신만 봐도 라틴인 또는 그리스인만의 국가는 아니었다. 우선 그리스어 공용어 전환 조치를 했다는 이라클리오스부터가 아르메니아인이었고, 그 밖에도 별명부터 대놓고 트라키아인인 레오 1세 트라키안, 이사우리아인인 제노, 아랍인 혈통인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니키포로스 1세, 시리아인인 레온 3세, 이라클리오스와 같은 아르메니아 혈통인 레온 5세와 바실리오스 1세 등 여러 비라틴/그리스 혈통 황제가 있었다. 심지어 고트족 황제인 티베리오스 3세도 있었다. 의외로 혈통적으로 그리스인이라고 할 수 있는 황제들이 제위를 독점하게 된 것은 콤니노스 왕조의 이사키오스 1세 이후이다.[34]
그리스인들이 로마라는 이름에서 탈피한 것의 효시는 그리스 독립 전쟁이라고 한다. 그리스가 독립한 과정이 처음에는 자력으로 독립하려다가 오스만으로부터 반독립 상태였던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가 보낸 군대에게 거의 진압되었다가 결국 서유럽[35]의 힘을 빌려서 독립한 것이기 때문에 그 대가로 서유럽계 왕족을 왕으로 세워야 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지만 로마라는 국호로 독립하기에는 서유럽과 가톨릭 교회를 자극할 우려가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전히 오스만의 수도였으며 로마 시절부터 면면히 이어오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좌는 (그리스인들이 보기에는) 오스만의 충실한 어용이 되었기 때문에, 차마 로마라는 국호를 쓰기 어려웠다. 영어 위키백과 Roman people(로마인)에도 로마인(Romioi)이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이들보다는 여전히 오스만 치하에 있는 이들을 더 연상케 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스만 치하에서 게으른 노예로 있던 로마인과 대립되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용감한 자유의 투사인 그리스인(Hellene) 상이 형성되었다는 대목이 있다.[36] 물론 그리스인들이 자국(민)에 대해서 로마(인)이라고 부르는 용례는, 한국인들이 서울을 한양, 한국을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돌려부르거나 혹은 문학적인 용도로 쓰이는 옛 이름으로는 여전히 간혹 쓰인다고 한다.
2.1. 로마인은 금발벽안 백인들뿐인가?
영미권을 포함한 서양에서 제작된 대중매체에서 로마인 특히 로마 귀족들을 금발벽안이거나 갈발, 녹안으로 북서유럽인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드래곤 블레이드: 천장웅사처럼 동양에서 제작된 대중매체에서조차 로마인을 금발벽안으로 묘사할 정도이다.로마 제국 시민 중에는 금발벽안도 많았지만, 로마 제국 건국 이전 서유럽, 남유럽 역시 바스크인, 미노아인, 에트루리아인의 조상인 Vasconic, Eteocretan , Tyrsenian들이 주류로 거주해왔고 아나톨리아에는 인도유럽어족이 아닌 Hatti, Hurro-Urartian이 청동기 말기까지 언어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북아프리카, 레반트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이 현대까지도 주류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흑발갈안이다.
남유럽에서 금발벽안 백인들은 철기 초기에 유럽 원주민과 혼혈하면서 소수로 존재해왔고, 소수는 갈발, 녹안이 되었다. 금발벽안, 갈발녹안이 증가한 것은 게르만족이 서로마 제국 이후로 가족단위로 이주한 이후이다.
유명한 로마인의 동상을 봐도 현재 북서유럽인보다는 다른 지중해 지역 백인과 유사하고 로마 대중들을 묘사할 때는 북서유럽인보다는 중동인을 채용하는 것이 더 고증에 맞다. 그러나 고대 로마가 현대 서양의 정체성의 원류라는 대중적인 인식 + 미국 매체에서 "상류층은 금발벽안"이라는 스테레오 타입 때문에 배역을 중동인으로 채용하면 정치적 논란이 일어날 수가 있다.
다만 대중적으로 가장 알려진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와 네로 등의 초기 황제 중에선 실제로 금발이 많았다. 일리아스에도 아킬레우스를 비롯한 상당수의 그리스 인물들이 금발로 묘사된다. 고대 로마인이나 그리스인들을 묘사할 때 금발벽안을 고증에서 틀렸다고 하는 것도 편견인 셈이다.
여담으로 할리우드에서는 로마 시대 북아프리카인을 정치적 올바름을 이유로 흑인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37][38] 대표적으로는 영화 글라디에이터에서 누미디아인으로 설정된 조연이 흑인으로 나오거나, 전투마차에서 활을 쏘는 리비아 아마존이 흑인으로 나오는 경우
3. 오스만 제국 치하의 정교회 신자
오스만 제국은 본래 동로마 제국 영토였던 아나톨리아에서 수립된 국가라서 그런지, 동로마인 뿐만이 아니라 피정복민 가운데 정교회 신자들을 모두 로마인을 뜻하는 룸(오스만어 millet-i Rûm, 룸 밀레트)이라고 불렀고, 자국의 유럽 영토를 로마인의 땅을 뜻하는 루멜리(Rûm eli, 로마인의 땅[40])라고 불렀다. 또한 동로마를 멸망시킨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고, 튀르키예어로 로마 황제를 뜻하는 카이세리 룸을 칭하며 권위를 과시했는데, 이러한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 의식은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 이래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비록 무슬림이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임명하며 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했는데, 밀레트 제도 하에서 정교회 신자들은 룸 밀레트, 즉 로마인 밀레트로 분류되었다.3.1. 그리스계 정교도 튀르키예인
오늘날 오스만 제국의 후신인 튀르키예에서는 로마인을 뜻하는 룸(Rum, 복수형은 Rumlar)라는 단어가 튀르키예 영토에서 정교회를 믿으며 사는 그리스계 튀르키예인을 일컫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이는 정교회를 믿는 민족들이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이후, 현재까지 튀르키예 영토에 살면서 정교회를 믿는 민족[41]이 그리스계 튀르키예인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 혈통이지만 정교회 대신 이슬람을 믿는 그리스계 튀르키예인들은 기리틀리[42]라고 부르고, 독립국 그리스에 사는 그리스인은 유난[43]이라고 부르면서 그리스계 정교도 튀르키예인인 룸과는 구별하고 있다.한편 튀르키예에서는 키프로스 공화국의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도 "룸"으로 칭하는데 (그리스에 사는 그리스인이 아니니까) 북키프로스만을 독립국으로 승인하고, 남키프로스는 승인을 철회한 관계로 튀르키예에서 쓰는 지도에서는 남키프로스를 Güney Kıbrıs Rum Yönetimi (남 키프로스 로마인 관리지역, GKRY)이라고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1] 영어 위키백과 Roman people 중 'In the centuries when the Byzantine Empire was still a vast Mediterranean-spanning state, Roman identity was more strong in the imperial heartlands than on the peripheries'[2]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0p, 원문: ' As Annick Peters-Custot shows in her contribution, '"Byzantine" individuals from Italy never describe themselves as "Roman", although "Romanness" is supposed to be the political foundation for being part of the Eastern Empire.' 및 ;'In Syriac historiography, 'like Persians, Armenians, and Arabs, Romans are almost always treated in the third person', as Jack Tannous remarks.'[3] 적어도 제노 및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 시절인 5세기 말까지는. 아나스타시우스가 즉위하고 황제의 출신종족이라는 기득권이 사라져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했다. 그 이후로는 확연히 꺾인 것으로 보인다.[4] 'Two Romes' 401p, 'After 400, there were hardly any enclaves of ethnic separatism in the lands that would become Byzantium, and even those (e.g., the Isaurians) did not hold out for long. Certainly there were no ethnic “Greeks” left.':'400년 이후 동로마 제국 권역에서는 자기들끼리 특구를 이뤄서 살던 소수민족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었던 이사우리아인 같은 종족들도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종족적인 "그리스인"들은 확실히 남아 있지 않았다.'[5] Anthony Kaldellis의 'Romanland' 중 4p, 'The deceased emperor Zeno (474–491), whose body lay in state in the palace while this exchange was taking place, was an Isaurian from southern Asia Minor. The Isaurians are stereotypically described in Roman sources as mostly uncivilized mountain dwellers. They made good soldiers, but were perceived by many as violent, greedy, and insufficiently Romanized. Even though they were Roman citizens like everyone else in the empire, “Isaurians and Romans” could be juxtaposed as different categories, and the former could be labeled an ethnos (people, ethnic group, or nation).'[6]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번역본 1권의 56p에는 '바가우다이 반란은 민족적인 특성을 뚜렷이 보인다. 즉 그 이름도 켈트족을 기원으로 하는 듯이 보이고, 그 성격도 로마화된 시민 문화에 대립하는 '토착적인' 시골의 정체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7] 물론 팔미라가 내세웠던 독자성이 갈리아보다도 훨씬 컸는데, 간단하게 얘기하면 팔미라를 포함한 시리아 지역은 어족 분류상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이라 아예 인도유럽어족조차 아니라서 라틴어와의 거리가 제법 먼데, 갈리아 지역은 어족분류상 인도유럽어족 켈트어파인데 다른 어파들과 갈라지고 나서도 라틴어가 속한 이탈리아어파와는 한동안 같이 묶여있다가 조금 더 나중에서야 분리되었을 정도라서 라틴어와의 거리가 상당히 가깝다. 즉 본국 이탈리아와의 동질성 및 이질성의 정도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난다.[8] 단 예외적으로 동로마의 이탈리아 통치의 중심지였던 라벤나 및 그 인근 로마냐 지역이나, 남이탈리아 지역 등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국민'을 의미하는 개념의 '로마인'도 좀 더 오래까지 통용되었다.[9]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3-24p, 원문: 'Yet already in the sixth century, 'Romans' could also be used for those who followed the Roman creed and the liturgical practices of the Roman Church.'[10] 로마(제국)의 시민, 즉 '동로마 제국의 국민'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로마 시민'으로 쓰지 않고 늘여 썼다.[11]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10p, 원문: 'Whereas in the letters of Cassiodorus, written in the first half of the sixth century, Romani still mostly designates the Roman majority living in Italy under Gothic rule, Gregory the Great who wrote at the end of the century almost exclusively used the name for the population of the city.'[12] 반달 왕국을 1년도 안 돼서 멸망시킨 벨리사리우스가 기세를 타고 금방 전쟁이 끝날 줄 알았는데, (손익 계산 자체를 어그러지게 만든 흑사병이라는 핑계라면 핑계가 있지만 어쨌든) 생각보다 훨씬 오래 갔고, 그런 와중에도 서고트 왕국의 이베리아 반도 내륙지역이나 프랑크 왕국의 갈리아에 대해서는 손도 못 댄 셈이니. 브리타니아는 5세기 초에 서로마가 포기하고 떠났기 때문에 말할 나위도 없고.[13]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53p, 원문 'The impact of the Justinianic Wars, and especially of the fact that they did not result in the West's military domination by the eastern Emperor, cannot be overestimated. After twenty years of brutal destructive warfare waged to make the point,no one could be in any doubt that the areas beyond actual imperial authority were not part of the Empire anymore. They remained lost to barbarians; the frontier between imperial Roman inside and outside had formally been redrawn.'[14]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8p, 원문: 'In Italy, the Gothic war effectively split the Roman elites into those who supported Gothic rule (such as Cassiodorus) and those who favoured the imperial side; and later, into those who acquiesced to Lombard rule and those who withdrew to lands under Roman control. Shared Roman identity ceased to provide a sense of social cohesion.'[15]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8p, 원문: 'The end of the senate in the West removed a group that had always set the standards of what Romanness meant.'[16]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3p, 원문: 'Early medieval Romanness in the West had a most glorious past, but held little promise for the future.'[17] Isidoro de Sevilla(Isidore of Seville). 서고트 시기의 스페인·포르투갈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서고트 왕들을 제치고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Etymologiae'라는 백과사전의 원시적인 형태를 비롯해 저술도 여럿 했고, 이 사람 말고도 형제자매 중 셋이나 위키백과에 따로 문서가 있는 이름 있는 성인이다.(Leander of Seville, Fulgentius of Cartagena, Florentina of Cartagena.) 영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콤마, 콜론, 마침표 또한 발명했다고 한다. [44][18]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인 552년부터 이라클리오스 때의 624년까지는 이베리아 반도 동남쪽에 동로마 영토가 있었다.[19]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0p, 원문: 'In Isidore's early seventh-century History of the Goths, for instance, the term Romanus is employed in this sense. Whereas in the beginning of the text, the term Romani covers the inhabitants of the whole Roman Empire, it is subsequently reduced to the Eastern Romans and to the Byzantine military forces in Spain (milites). On no occasion does the term Romani describe the inhabitants of the former provinces.'[20]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2p, 원문 'The example of Isidore is telling: a Hispano-Roman with a brilliant classical education, a defender of the Roman Church and at the same time a professed enemy of 'the Romans', that is, the Byzantines, who lived under Gothic rule and never used the label 'Romani' for the Latin-speaking population of Spain.'[21] 서로마 제국 황제라고도 하고 신성 로마 황제라고도 하지만 어쨌든 당대에는 별도의 수식어가 없었다.[22]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중 21p, 원문: 'As Paolo Delogu remarks in his contribution, Charlemagne later sought to suppress the 'ethnic' perception of an imperium Romanorum to avoid the impression that the imperial title could be bestowed by the people of Rome in the same way the Franks could raise a rex Francorum.'[23] Names of the Greeks라는 위키백과 문서에 의하면 'By the time of the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most easterners had come to think of themselves as Christians and, more than ever before, as Romans.(서로마의 멸망 시점에서 대부분의 동방 제국민들은 스스로를 기독교인, 그리고 종전보다도 더욱더, 로마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 the Greeks among them could no longer consider it foreign, run by Latins from Italy.(그리스인들은 it(로마 제국)을 더 이상 이탈리아에서 온 라틴인이 운영하는 외국(즉 외래의 정복자)으로 간주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이 있다.[24] 개종 및 세례라는 것은 매우 중대한 정치행위이기에 당연히 함부로 할 수 없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실익에 대해서 주변 인사들과 직접 만나서, 혹은 서신을 통해서 교류하며 의견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25]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5p, 원문: 'Bishop Avitus of Vienne wrote to Clovis on the occasion of his baptism: 'Let Greece, to be sure, rejoice in having an orthodox ruler, but she is no longer the only one to deserve such great a gift.' 당시 그리스라는 정치체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거니와, 문맥상 동로마 제국에서 그리스 속주만 따로 떼어서 지칭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한 지방(속주)에 한정된다면 'governor' 등의 표현을 쓰지, 'ruler'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결국 제국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26] 물론 철저히 제국의 입장이고 이탈리아 현지인의 입장은 '전쟁이 장기화되어서 그렇게 시달리고 파괴되었는데 이제 다 정리되고 나니까 세금까지 내야 돼?'에 가깝다.[27] 이 때부터 동로마인을 그리스인이라고 타자화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28]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5p, 원문: 'the 'Romans' complain to Narses about his harsh rule, threatening that it would suit them better to serve the Goths than the Greeks.'[29]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중 5p, 원문: 'In German, we can differentiate between Römer,ancient Romans, and Romanen, post- Roman Romans: a convenient,but controversial distinction.'[30]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중 18p, 원문: 'Another regional Roman group, presented in Francesco Borri's contribution, lived in Dalmatia, where Carolingian annals distinguish between Roman and Slavic settlers. In the tenth century, Constantine Porphyrogenitus distinguished these as Rhōmanoi from the general subjects of the Empire, Rhōmaioi' 및 'The Greek term Rhōmanos also appears in Italo-Greek documents for the representatives and inhabitants of Rome.'[31]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9p, 원문: 'As Liudprand of Cremona put it in the tenth century: 'We regard "Roman!" as one of the worst insults.' 및 이 각주의 'For the bad reputation of the citizens of Rome, see the contribution by Paolo Delogu, in this volume.'[32] 한편, 7~9세기 무슬림들은 서구인들의 경우, 그나마 손으로 만드는 거라도 잘하는 '로마인'들과는 달리 그마저도 못하고 싸움만 잘하는 족속이니 짐승과 같다고 여겼다. 나름대로 비잔틴인이 그나마 서구인보다는 낫다고 평가해준 셈이지만, 비잔틴인들은 이런 평가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33] 전쟁 중에 영토가 뺏었다가 뺏겼다가 하는 것이 자세하게 묘사된 몇몇 유튜브 연도별 영상을 보면, 로마-페르시아 전쟁, 674-678년 및 717-718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으로, 소아시아에서는 북부 일부를 제외한 중·동부 내륙, 서·남부 해안 등이 대부분 침탈 혹은 일시적인 점령을 당했었다. 발칸반도 또한 테살로니카가 '사실상 슬라브의 바다에 떠 있는 로마의 섬'(virtually a Roman island in a Slavic sea)이라는 표현이 쓰였을 정도였다.[34] 이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에 실패해 정통 로마 제국으로 인정받진 못하지만 제4차 십자군 이후 세워진 동로마계 망명 국가인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에서 세르비아 제국의 황족인 시메온 우로시가 군주가 되기도 하긴했다.[35] 영국과 프랑스[36] 'Roman self-identification among Greeks only began losing ground with the Greek War of Independence, when multiple factors saw the name 'Hellene' rise to replace it. Among these factors were that names such as "Hellene", "Hellas" and "Greece" were already in use for the country and its people by the other nations in Europe, the absence of the old Byzantine government to reinforce Roman identity, and the term Romioi becoming associated with those Greeks still under Ottoman rule rather than those actively fighting for independence. Thus, in the eye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 Hellene was a brave and rebellious freedom fighter while a Roman was an idle slave under the Ottomans.'[37] 단, 고대 로마에 흑인들이 아예 없던것은 아니고, 누비아와 에티오피아, 사헬 흑인들이 로마에서 정착해서 로마 군인이 되기도 했고, 개중 일부는 귀족으로 출세하기도 했다.[38] 동시대가 배경인 라틴아메리카 실사물에서는 북아프리카인을 백인 배우나 메스티소 배우가 연기하는 경우가 절대다수이며, 할리우드 마냥 흑인화를 남발하지는 않는다.[39] 넓은 의미의 메스티소 중에서는 백인 혈통이 가장 강한 카스티소 배우가 캐스팅되는 게 가장 적절하다.[40] 이후 그리스어화된 루멜리(Ρούμελη)가 라틴어화되어 루멜리아(Rumelia)라고 더 잘 알려짐.[41] 다만 아타튀르크 이래 튀르키예 정부에서는 튀르키예 영토에 살면서 튀르키예어를 쓰고 튀르키예인의 정체성을 가진 모든 사람이 튀르키예인이다라는 모토를 내세우며 튀르키예 국민 모두가 하나의 민족임을 강조해서 공식적으로 소수민족에 대한 통계를 내지 않는다.[42] 그리스계 무슬림 튀르키예인 가운데 크레타 출신이 많아서 크레타인을 뜻하는 기리틀리라고 부르게 되었다.[43] 고대 소아시아에 있었던 그리스 식민도시들을 일컫는 말인 이오니아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