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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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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카모니카의 암각화
Incisioni rupestri della Val Camonica
1980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와
도미니코 수도원 및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Chiesa e convento domenicano di
Santa Maria delle Grazie con
l'Ultima Cena di Leonardo da Vinci
1980년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Centro storico di Roma, le proprietà extraterritoriali della
Santa Sede e la 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1982년

피렌체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Firenze
1987년

베네치아와 석호
Venezia e la sua laguna
1987년

피사의 두오모 광장
Piazza del Duomo di Pisa
1990년

산지미냐노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San Gimign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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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교회
I Sassi e il parco delle
chiese rupestri di Matera
1994년

베네토의 비첸차 시와 팔라디오 양식 건축물
Città di Vicenza e le ville palladiane del Veneto
1995년

시에나 역사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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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Napoli
1995년

크레스피 다다
Crespi d'Adda
1995년

르네상스 도시 페라라와 포 삼각주
Ferrara, città del Rinascime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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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몬테 성
Castel del Monte
1996년

알베로벨로의 트룰리
Trulli di Alberob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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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umenti paleocristiani di Ravenna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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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르타의 18세기 궁전과 공원,
반비텔리 수도교, 산 레우초
Palazzo Reale del XVIII secolo di Caserta con il Parco ,
l' Acquedotto di Vanvitelli e il Complesso di San Leucio
1997년

사보이아 궁중저택
Residenze della Casa Reale di Savoia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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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to botanico di Padova
1997년

포르토베네레, 친퀘테레와 섬들
(팔마리아 섬, 티노 섬, 티네토 섬)
Portovenere, le Cinque Terre e le isole
(Palmaria, Tino e Tine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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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나의 대성당,
토레치비카, 피아차 그란데

Cattedrale, Torre Civica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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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그리고
토레 아눈치아타 고고 지구

Aree archeologiche di Pompei,
Ercolano e Torre Annunziata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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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tiera amalfit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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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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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a archeologica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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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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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o storico di Urb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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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에스툼과 벨리아 고고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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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tà di Verona
2000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과
프란치스코회 유적

Assisi, la basilica di San Francesco e
Altri siti Francescani
2001년

빌라 데스테, 티볼리
Villa d'Este, Tiv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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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남동부 발디노토의
후기 바로크 도시
Città tardo barocche del
Val di Noto (Sud est Sici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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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cri Monti del Piemonte e della Lombardia
2004년

체르베테리와 타르퀴니아의
에트루리아인 네크로폴리스
Necropoli etrusche di Cerveteri e Tarquinia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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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 d'Or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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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acusa e la necropoli di Pantal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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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바
: 르 스트라다 누오보와 팔라치 데이 롤리

Genova: Le Strade Nuove ed 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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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불라 ・ 베르니나 지역의 래티셰 철로
Ferrovia Retica nei paesag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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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tova e Sabbio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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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
: 권력의 장소 (568년 ~ 7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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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나 산
Monte Et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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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losseo.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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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내부
파일:콜로세움복원도.jpg
콜로세움 복원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글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영어 [1]
프랑스어 [2]
국가·위치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시국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0년
등재기준 (i)[3], (ii)[4], (iii)[5], (iv)[6], (vi)[7]
지정번호 91


Barbara pyrarnidum sileat miracula Memphis
멤피스야만인들은 피라미드의 경이로움에 침묵하고[8]

Assyrius iactet nec Babylona labor;
아시리아인들의 역사(役事)바빌론을 내세우지 마라.

nec Triviae templo molles laudentur Iones,
유약한 이오니아인들아르테미스 신전으로는 찬양받지 못하고,

dissimulet Delon cornibus ara frequens;
뿔피리로 북적이는 제단은 델로스[9]를 숨길지어다.

aere nec vacuo pendentia Mausolea
허공에나 매달려 있는 마우솔레움에 대해

laudibus inmodicis Cares in astra ferant.
카리아인들[10]은 하늘 높이 과도한 찬양을 올리지 말지어다.

omnis Caesareo cedit labor. Amphitheatro,
모두의 역사(役事)는 황제의 것에 굴복하리니, 이 원형경기장에,

unum pro cunctis fama loquetur opus.
오직 이 위업[11]만이 모든 것을 대신하여 명성을 보여주리라.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마르티알리스(Marcus Valerius Martialis), 『행사시LIBER DE SPECTACVLIS』 I[12][13]
Dum Colosseum stabit
콜로세움이 서 있는 한

Roma stabit
로마는 서 있으리라

dum Roma stabit
로마가 서 있는 한

mundus stabit
세계도 서 있으리라
가경자 베다(Venerable Bede)

1. 개요

파일:콜로세움 로마 1.jpg
일반적으로 콜로세움을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14]


언어별 명칭
영어 Colosseum(콜로세움)
이탈리아어 Colosseo(콜로세오)
라틴어 Amphitheatrum Flavium(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
프랑스어 Colisée(콜리세)

이탈리아 로마의 중심지에 위치한, 고대 로마시대에 건설된 투기장. 원래 이 타입의 것은 원형극장(Amphitheatre)이라고 하는 건축물로 서기 80년경 완공되었다. 원형극장도 두 종류가 있어서 하나는 콜로세움처럼 검투사 경기[15]나 서커스 관람 등을 하는 스타디움의 개념인 앰피시어터가 있고, 다른 것으로 원형 좌석이 있어서 희곡, 연주 등을 행하는 예술적 상영장인 앰피시어터가 있다. 콜로세움은 전자의 것으로, 로마가 건축한 것 중에서 가장 큰 원형극장이다. 또한 간과하기 쉬운 사실로 완전한 원형이 아니라 타원 모양이다.

흔히 원형경기장 아무것에나 콜로세움이라고 붙이는 일이 많으나[16], 로마 시의 중심부에 있는 그것만을 콜로세움이라고 부른다. 다른 지방에도 원형극장(경기장)이 여럿 있지만 콜로세움이라고 부르지 않고 각각의 이름[17], 내지는 어디어디의 앰피시어터로 부른다. 콜로세움은 그중에서 로마 중심지에 있고 제일 크고 보존도 잘된 편이라서 유명하다보니 대명사처럼 사용될 뿐이다.

1980년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Historic Centre of Rome, the Properties of the Holy See in that City Enjoying Extraterritorial Rights and San Paolo Fuori le Mura)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전역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로마 안에 위치한 콜로세움도 역사 지구에 포함되어 등재되었다.

이탈리아 정부가 2년간 나무판을 깔아 콜로세움 바닥을 만들 예정이라고 밝혔다.# 2021년에 지하 부분을 완전 개방한다.#

2. 명칭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정식 명칭은 건설자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일족 명을 딴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은 이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근처에 세워진 아주 거대한 네로 황제의 동상(콜로서스)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는 설이 있다.[18] 그 콜로서스 동상은 건설 당시부터 평판이 아주 나빴기 때문에[19] 네로 황제가 실각한 이후 머리 부분이 태양신의 두상으로 교체되었었고, 나중에 구리로 재활용하기 위해서 완전히 철거되었다. 하지만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은 계속 남아서 원형극장 쪽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영어 표기를 찾아보면 Colosseum과 Coliseum으로 나뉜다. 두 단어의 발음은 "컬러시엄"으로 같다.[20] 영어권 사람들에게도 꽤나 골때리는 문제인지 이에 대한 논문도 있다. 일반적인 야외 경기장 등을 Coliseum, 로마에 있는 걸 Colosseum으로 구분을 시도하기도 하나 구분이 모호한 건 여전. 한국에서는 콜로세움의 인지도가 워낙 압도적인데 비해 Coliseum이라는 표기 자체가 잘 통용되지 않다 보니 Colosseum이든 Coliseum이든 다 콜로세움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단 고유명사는 예외.

3. 활용

파일:콜로세움복원도1.jpg

예로부터 가장 재밌는 3대 구경이 불구경, 물구경, 싸움구경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투기장은 그 세 가지 구경거리를 충족시켜 주는 장소였다.

특히 로마의 정치인들은 빵과 서커스로 국민들의 불만을 억제하려 했기 때문에 콜로세움의 운영은 정치인들에게도 꽤 중요한 일이었다. 수용 규모에 대해서는 입석의 형태까지 고려하면 적어도 5만은 상회하고 최대 8만은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 결과. 매우 효율적으로 지어져, 각층, 각 섹션별로 현대의 경기장마냥 입, 퇴장 게이트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 자신이 어느 구역에 있느냐에 따라 그 게이트를 이용하면 대규모 인원이 관람함에도 불구하고 크게 붐비지 않고 입장, 퇴장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땡볕이 심한 낮에 경기가 벌어질 때는 후술하듯이 콜로세움의 천장에 미세노에서 파견 나온 해군 수병들이 범포를 덮어서 그늘을 제공했다고 하는데, 내벽 가장 위층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것들을 일종의 와이어(밧줄)로 연결해 접어놓은 천으로 덮었다.

파일:4C99FDC7000-35_15271943746273.jpg
요즘으로 말하면 3S 정책과 유사한 것이기 때문에, 입장료가 없는 건 물론이고 관객들을 위한 점심 도시락과 포도주까지 공짜였다.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는 대결을 하기도 하고 바바리사자, 카스피호랑이, 아틀라스불곰, 유라시아불곰, 코끼리, 하마, 코뿔소 등 같은 맹수들을 싸움에 붙이거나 심지어는 검투사들이나 사형수들이 맹수들과 대결을 벌이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 대 황소의 투우 경기 또는 경기장에 물을 채워서 가상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항상 치고 박는 싸움만 한 건 아니었고, 동물들이 재주를 부리거나 하는 등 현대의 서커스와 같은 공연도 이루어졌다고 한다.[21] 코끼리, 호랑이, 악어, 하마, 기린, 코뿔소 등등 로마 시민들이 평소엔 볼 수 없는 신기한 동물들이 콜로세움 안을 한 바퀴 돌아 행진하는 사파리 같은 공연도 있었다. 다만 기독교 신자들을 묶어놓고 맹수를 풀어 사형집행을 하는 행사도 있었다.

그리고 현대인들에게는 경악할 내용이지만, 볼거리로 제공되는 이른바 "수간 쇼"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미소녀 혹은 미소년들이 관중들 앞에서 동물들과 수간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그리스 문화[22]의 영향을 받은 고대 로마에서의 문화는 여성들이 성적인 목적으로 뱀을 애완동물로 길렀다는 기록이 남아있었을 정도였다.[23] 물론 피가 튀기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검투를 보고 환호하던 로마인들이었기에 아마 지금으로 치면 스트립쇼 같은 개념이었을 수도 있다.

맹수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동물들을 어느 정도 길들이고 조련할 사람이 필요했다. 개중에 가장 유명하고 능력이 좋았던 인물은 로마 역사상 최고의 베스티아리[24]로 꼽히는 카포포루스(Carpophorus)였다. 카포포루스는 기원후 1세기 경의 인물로 원래는 가난한 하층민 계급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경기장에서 불타는 짚단 한 움큼으로 곰을 물리친 걸로 유명세를 얻었고, 이후 타고난 재능으로 사자, 여우, 코끼리, 표범 등 사나운 동물들과 맞서 싸우는 법을 익혔다. 카포포루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맨손으로 야수들의 목을 꺾어 죽일 수도 있을 정도였다고. 심지어 한 경기에서 20마리가 넘는 맹수들을 무기도 없는 혈혈단신으로 싸그리 죽여버렸다는 말도 있었다.[25] 카포포루스의 인기는 엄청나서 시인 마르티알리스가 그를 찬양하는 시를 써주기까지 했다. 어찌나 인기가 많았던지 그가 경기장에 떴다하면 25만 석의 경기석이 꽉꽉 들어찼다.
파시파에가 황소와 접했던 일을 오늘에야 보았노라! 우리가 그 것을 오늘에야 보았노라! 고대의 전설이 사실로 드러났노라. 전설이 무엇을 노래하든,[26] 이 경기장이 그 것을 보여줄 것이라.
시인 마르티알리스의 글.
카포포루스는 타의추종을 불가하는 동물 조련 능력, 그리고 전투 능력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또다른 쪽으로도 엄청난 재능이 있었다. 바로 동물들이 인간을 수간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 사실 함성이 빗발치고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한 경기장 한복판에서 극도의 흥분과 공포 상태에 싸여있는 동물이 인간을 덮치도록 만든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다. 동물들에게 성적 흥분을 교묘하게 불러일으키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최적의 상태로 흥분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워낙 까다로운 작업이라 콜로세움에서조차 이런 쇼를 여는 건 상당히 힘들어 했는데, 이걸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카포포루스였다.

카포포루스는 사자, 멧돼지, 얼룩말, 종마 등 다양한 동물들이 인간을 덮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동물이 종 자체가 다른 인간을 처음부터 교미 상대로 생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카포포루스는 일부러 암컷의 페로몬이나 냄새를 경기장에 들어갈 여성들에게 묻히는 편법을 썼다. 일부러 발정기에 다다른 암컷에게서 냄새나 향을 채취한 다음, 그걸 여자들에게 묻힌 뒤 오랫동안 교미하지 않은 수컷 동물들과 함께 경기장에 들여보내는 방법이었다. 수간을 하기도 전에 여자를 죽여버리면 곤란하니 일부러 소음에도 놀라지 않고 상대적으로 온순한 수컷들을 썼다. 관중석 아래에서 여자가 거적떼기를 뒤집어쓰고 웅크린 채로 있으면 동물이 여성을 덮치는 방법이었다.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이 수간 쇼에 동원되었는데 개중에서 황소기린 같은 거대한 동물들에게 박힌 여성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동물들이 교미 도중 지나치게 흥분해 발톱을 여자의 목에 박아넣는 경우도 있었고, 지나치게 격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여성의 내장이 파열되거나 척추가 부서지는 경우도 많았다. 반면 와 짝지어진 여성은 평생 쓸 운을 다 썼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행운아였다. 이 쇼에 지원하면 돈을 지급했던 터라 스스로 자원하는 여성들이 많아 수요는 딱히 부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카포포루스가 주최한 첫 수간 쇼의 희생자는 5명의 남성을 독살해 죽인 여성이었다. 그 죄로 전 군중이 보는 앞에서 당나귀에게 강간당했는데, 군중들이 그걸 보고 얼마나 흥분했는지 열기가 엄청났다는 후문이 있다. 여자가 지나치게 고통스러워하자 결국 맹수들을 풀어 여자의 고통을 끝내주었다고 한다. 그 외에 원숭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든 다음 말뚝에 묶여있는 소녀들을 강간하게 만드는 쇼도 있었다.

여자만 수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도 수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남성 죄수들을 수탕나귀에게 수간당하도록 한 뒤 그 앞에 표범을 풀어버리는 등의 처형 방법들을 쓰기도 했다. 반대로 죄수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암염소와 죄수들을 수간시키기도 했다. 수간이라 보기에는 애매하지만 사티로스로 분장한 남자들이 경기장에서 어린 미소년들을 덮치도록 하는 행사도 있었다. 로마인들은 하반신은 염소,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인 신화속의 동물 사티로스가 성욕이 왕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동성애의 영향을 받아 일부러 이런 행사를 기획했다고 한다. 그당시에는 나름 보기 힘든 특급 행사였다고.

수간 쇼가 로마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도 있었다. 주신 제우스는 여러 동물들의 형상을 하고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이걸 재현하겠답시고 수간 쇼를 공공연하게 보여줬던 것이다. 행사 주최자들은 이 수간 행사가 단순한 여흥거리일 뿐만 아니라 제우스를 경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포장해서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당연히 군중들은 열광했고 수간 쇼는 고대 로마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행사들 중 하나였다.

카포포루스의 맹수들이 항상 수간이나 성적 용도로 사용되는 건 아니었다. 수간보다는 맹수들이 사람들을 잔인하게 찢어죽이는 게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는 행사였다. 그 잔인함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감옥에 갇혀있던 죄수들이 경기장에 끌려가는 게 싫어 화장실 스펀지[27]를 목에 찔러넣어 자살하거나 바퀴살 사이에 고개를 집어넣어 자살하는 경우까지 있었다.[28] 하지만 죄수들의 고통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던 카포포루스는 일부러 맹수들이 사람을 공격하고 피 냄새를 좋아하도록 훈련시키는데 공을 들였다. 아래는 당시 카포포루스가 맹수를 조련하는 법에 대하여 남긴 글들 중 하나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본능을 직접 자극하지 않는 한 동물이 사람을 잡아먹도록 훈련시키는 건 놀랍도록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인간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린 새끼 시절부터 훈련을 시켜야만 합니다. 고양잇과 맹수의 본능을 발현해야만 합니다. 맹수가 무해한 어린 새끼에 불과할지라도 노예들에게 그 앞에서는 일부러 겁먹은 척하라고 하십시오. 새끼 맹수가 한 번 툭쳐도 엄청나게 아파하는 것처럼 연기하라고 하십시오. 노예들을 생고기로 덮어, 사람을 공격할 때마다 즉각적인 보상을 얻을 수 있게 하십시오.

맹수가 자라나면 살아있는 노예들을 먹이로 주십시오. 이때 노예의 팔을 부러뜨리고 이빨을 모조리 뽑아 절대 맹수를 해칠 수 없도록 하십시오. 명심하십시오. 맹수는 언제나 자신이 쉽게 이길 수 있다고 믿어야만 합니다. 맹수가 자신감을 기를 수 있도록 어린아이, 여자 순서로 살아있는 노예들을 먹이로 던져 주십시오. 노예들에게 칼을 쥐어주고 공격할 지점을 알려주되, 노예가 이길 것 같으면 당장에 쳐죽이십시오. 절대로 노예가 이기게 두어서는 안됩니다.
카포포루스(Carpophorus)의 맹수 조련법. AD 1세기 경.
맹수들을 이용한 행사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정교해졌다. 군중들이 더 자극적이고 더 새로운 쇼를 원했기에 베스티아리와 검투사들이 머리를 싸매고 새로운 죄수 고문 방법들을 개발해냈기 때문이었다. 행사 주최자들은 죄수들에게 스스로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 경기장에 정교하게 만든 구조물과 미로 따위를 만들어놨다. 그리고 최악의 순간에 구조물이 무너지게 만들어 그 위에 올라가있던 죄수들이 맹수들 사이로 떨어져 죽게 만들었다. 죄수들이 경기장 밖으로 살아나갈 가능성은 애초부터 아예 없었다. 죄수들은 상자에 묶이고, 말뚝에 묶이고, 십자가에 못박힌 채로 맹수들에게 갈갈이 찢겨나갔다. 그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는 군중들은 어떤 죄수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을지 돈을 걸며 내기했다.

파일:6234234234.jpg
해전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고대 기록에 남겨져 있는데, 정말로 이루어졌느냐에 대해서 그동안 현대 학자들이 의문을 표했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어떻게 물을 채우고 수밀 구조를 유지했을지와, 물을 채워서 전함을 띄워 돌아다닐 만한 공간이 되기는 하느냐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모의 해전은 로마 시내의 대형 저수 시설에서 시행했다는 설이 이 설의 다수설이다. 실제로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지은, 모의해전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대 저수지도 있다. 물론 평상시에는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였고 특별한 경우에만 모의 해전장으로 사용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특별한 경우라고 해도 아우구스투스의 그 긴 치세에도 모의 해전은 한 번밖에 없었다. 그냥 '저수지'보다는 '모의 해전장'이 간지 나서 그렇게 붙여 놓은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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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에 따르면 콜로세움 내부의 석재 구조물은 도미티아누스가 확장공사를 할 때 세워졌었고, 티투스 당대엔 나무 판자와 기둥으로 임시 무대를 설치하는 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위 사진은 좀 과장되었지만 무대를 치우고 물을 채우는 식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콜로세움에서는 신화나 전설, 역사적인 사건들을 재연하는 공연도 펼쳐졌다. 구체적인 예로는 자신을 화장하는 장작더미 위에 산 채로 타 죽은 헤라클레스,[29] 리라를 연주하다 술 취한 여인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은 오르페우스, 자신의 팔을 태워서 로마에 충성심을 보인 전설적인 영웅 가이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30]의 이야기 등이었는데, 모두 분장한 노예들이 완벽하게 그들의 운명을 재연해 냈다고 한다.[31] 또한 크레타 왕비 파시파에(미노타우르스의 모친) 역을 맡은 여자 죄수가 황소에게 수간을 당하고, 다이달로스 역을 맡은 남자 죄수가 날개를 잃고 경기장 바닥에 추락해 온몸이 뭉개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32] 이러한 공연의 목적은 젊은이들에게 산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16세 이하의 어린이들에게도 관람이 허용되었다.

또한 네로의 교회 탄압 당시에도 크리스천들을 콜로세움 한 가운데에 묶어놓고(세워놓고) 사자를 풀어놓아 뜯어먹히게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네로 시절에는 콜로세움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 네로가 죽은 뒤 내전을 거쳐 황제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가 시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네로가 세운 개인 궁전터에 짓기 시작한 것이 콜로세움이고, 티투스 황제를 거쳐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에 개장했다. 한편 중세 시대에 콜로세움의 공간을 이용해서 민가로 불하하기도 했고, 이탈리아의 프란지파니 가문은 콜로세움을 사들여서 요새화해 성채로 삼기도 했다. 바위를 빼다가 건축자재로 써버리는 일도 잦았다. 순교자가 생긴 장소에 대해 보여 주는 기독교적 숭배와는 영 딴판인 취급이었던 것이다.[33]

콜로세움이 종교적 성소로 여겨지게 된 것은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가 난 성소[34]라고 선포하면서였다. 하지만 남아있는 구체적인 기록은 네로 황제 때 타키투스의 기록인데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이 시기에 콜로세움은 지어지지도 않았다. 거기에 16세기 이전에 기독교 기록을 뒤져봐도 그런 이야기는 찾아볼 수가 없는데, 갑자기 베네딕트 14세가 이런 주장을 하기 시작한 것.[35] 물론 죄인들을 이용해 콜로세움에서 베스티아리를 한 것은 사실이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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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사적 신빙성이 낮다는 것은, "네로가 콜로세움에서 박해하였다"는 명제에 관한 것이다. 로마가 원형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것은 엄연히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상기했듯 콜로세움은 도미티아누스 시기에 정식으로 개장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네로 이상으로 철저하고 조직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한 황제였다.
이 놀라운 행위(순교)는 어느 로마 도시에서나 가장 중요한 공공장소 가운데 하나에서 아주 암울하게 진행되었다. 순교는 원형경기장의 구경거리라는, 로마인들의 생활을 특징짓는 폭력과 질서가 복잡하게 뒤얽히는 축도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기독교도들의 순교가 유혈이 낭자한 구경거리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77년 리옹에서 한 무리의 기독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군중은 기독교도들이 고문대에서 찢기고, 철판 의자에서 그을려지고, 황소 뿔에 받히고, 굶주린 사자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며 갈채를 보냈다. 원형경기장에 질서 있게 앉은 잘 차려입은 군중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도들을 사자에게 던져주는 행위는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로마 다수파의 권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Christopher Kelly,[37] 「The Roman Empire」

즉 콜로세움에서의 기독교 박해는 주체가 네로가 아니었다 뿐이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다. 베네딕트 14세가 콜로세움을 성소로 삼은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반영한 듯, 오늘날에는 가톨릭의 의례 장소로도 사용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매년 파스카 성삼일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열리는 십자가의 길 행사로, 교황이 순례자 행렬을 이끈다.

4.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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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도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콜로세움

오랜 내전 기간을 끝마치고 파탄 상태에 이른 로마의 상태에서 어디서 돈이 나와서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런 초대형 사업을 벌였는가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콜로세움을 건설하는 데에 든 재정은 대부분 아들이자 후대 황제가 되는 티투스예루살렘에서 약탈한 보물들로 충당했다고 한다.[38] 만약 시민들을 쥐어짜서 지었다면 당연히 반발이 나왔을 테지만 남의 나라 보물을 판 돈과 후술할 네로의 사치스러운 궁전을 뜯어다가 자재를 보충했으므로 반응이 좋았다. 티투스는 콜로세움이 완공되자 무려 100일 동안 축제를 벌였는데, 이는 플라비우스 왕조의 업적을 광고함과 동시에 베수비오 화산 폭발, 로마 화재, 페스트 확산 등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함이었다.[39] 게다가 전대 네로 황제의 개인 궁전인 이른바 '황금 궁전'이 있던 것을 헐고 그 자리에 시민들의 유흥 시설인 경기장을 지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신분에 따라 관중석이 위에서 아래로 나뉘어져 있었고[40] 나무조각의 혹은 흙으로 구워진 입장권에 쓰인 번호가 적힌 출입구로만 드나들 수 있어 수만 명의 관중이 들어가는 당대 초 거대 경기장임에도 불구하고 30분이면 모두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 완공됐을 당시의 원형 경기장의 크기는 일부만 남아있는 현재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외벽의 높이는 52m에 달했으며 상술한 네로의 개인 궁전에서 뜯어낸 각종 조각상들을 외벽의 아치 내부에 배치했다. 외벽 처마와 기둥도 1, 2, 3층이 각각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으로 다른 외양을 취하고 있다. 베수비오 화산에서 나오는 화산재를 이용한 콘크리트 같은 특수 건축재와 무게를 분산시키는 아치형 구조를 채택해 비교적 적은 자재로 거대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최상층에는 나무 기둥이 설치되어 햇빛이 강한 날에는 오늘날의 돔구장처럼 천으로 된 차양막이 하늘을 가릴 수 있는 구조였다.[41] 한편 이 큰 경기장의 부지를 제공하고 그 많은 아치에 들어갈 조각상을 죄다 충당하게 한 네로의 '황금 궁전'이 얼마나 사치스러웠을지 예상할 수 있다. 궁 중앙의 인공 연못은 마치 바다를 연상시켰다고 전할 정도이니.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크기의 건물인지라 베스파시아누스도 아니고 티투스도 아닌 도미티아누스의 치세때 완공되었다. 정확하게 언급하자면, 첫 개장은 티투스의 치세인 서기 80년에 한 것이 맞으나 이후 도미티아누스가 기존 3층이었던 콜로세움에 1개 층을 더 얹어 서기 82년에 4층으로 완공시킨 것이다.

찬란한 위상을 자랑했던 콜로세움이었지만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그대로 방치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석재 장식 등은 계속 파괴되거나 도난되었고,[42] 지금은 뼈대만 앙상하다시피 한 상태. 구조체 조차 상당수가 사라져 그냥 놔두면 연쇄적으로 무너질 우려가 있어 콘크리트로 버팀벽을 세워 놓았다. 참고로 콜로세움 근처의 도로를 정비하고 콜로세움의 정비를 시작한 건 다름 아닌 무솔리니.

천 년 이상의 세월 동안 방치되다 보니 콜로세움에는 진귀한 식물이 자랐고, 식물학자들이 이를 연구하러 콜로세움을 방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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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이 키르쿠스 막시무스

사실 콜로세움은 로마 건축계의 콩라인인데, 전차경주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는 무려 15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초초거대 경기장이었다. 물론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보면 알겠지만 콜로세움보다 훨씬 낮은 높이에 횡으로 길쭉한, 현대로 치면 일종의 레이싱 경기장으로, 말하자면 스타디움에 가까운 콜로세움과 일대일 비교는 좀 힘들다. 또한 용도상으로 보면 콜로세움은 모든 종목의 경기가 가능했지만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오직 경주만 가능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 같이 좁고 긴 경기장은 축구장으로 부적합하다. 물론 둘 다 어마어마한 건물이었다는 점에서 로마의 강대한 국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로마와 이탈리아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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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파리의 상징이 에펠탑이라면, 이탈리아와 로마의 상징은 콜로세움이다.

콜로세움은 로마 관광의 필수 코스로 여겨지고 있다.[43] 주요 관광지인 만큼 표 구입 행렬이 정말 길다. 바티칸 박물관과 더불어 너무 길어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면 팔라티노&포로 로마노 입구에서도 콜로세움과 묶어서 표를 파는 데다가 사람들이 그쪽은 잘 모르는지 줄이 상대적으로 짧으므로 이 쪽을 이용하도록 하자. 표가 있다면 프리패스가 가능하다. 그런데 언뜻 봐서는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표를 사러 서있는 것인지 입장하러 서있는 것인지 헷갈릴 수 있으므로, 포로 로마노에서 표를 샀다면 긴 줄에 서지 말고 바로 들어가도록 하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내부 매표소에서 표를 사기 위해 서있는 것이다.

표 구매 시, 한국어 오디오가이드를 대여할 수 있다.

또 한 이탈리아는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소매치기, 강도가 유명한 국가이다보니 이렇게 복잡하고 긴 줄이 있는곳에서 개인소지품을 더욱 신경 써야하는건 덤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꼭 이탈리아만 해당되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유럽에선 영국, 프랑스와 더불어서 알아주는 쪽이니 더욱 더 신경쓰자. 유튜브 등에서도 보면 알수 있듯이 여기 소매치기의 절도 능력은 일반인들은 쉽게 상상을 못할 달인들의 달인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특히 카메라나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촬영하거나 손으로 들고 있을 때 대놓고 그대로 낚아채서 도망가는 경우가 빈번하다(오토바이, 자전거를 타고 선글라스나 마스크, 모자등을 통해 얼굴을 가리고 다가오는 사람을 특히 주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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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공식 포스터에서도 활용되었다.

2023년 6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출신 남성 관광객이 콜로세움 투기장의 벽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면서 씨익 웃었다고 한다. 해당 관광객이 벽에 이름을 새기는 영상이 인터넷에 퍼졌고, 이탈리아 문화부 장관은 "이 관광객의 행동은 반달리즘이며 이탈리아의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했다.

6. 대중 매체에서

이탈리아와 로마를 상징하는 매우 유명한 건물이다보니 자주 모습이 비친다.

6.1. 영화

6.1.1. 맹룡과강

극중에서 이소룡척 노리스의 최후의 대결 장소가 된 곳이기도 하다. 다만 실제 촬영 당시에는 콜로세움 내부에서의 촬영 허가가 내려지지 않아서 콜로세움 내부 사진을 찍고 세트를 만들어서 촬영했다고 한다.

6.1.2. 코어

로마에 닥친 엄청난 번개로 인해 개박살이 난다. 특히 가루째 부서지는 장면이 압권.[44]

6.1.3. 점퍼

장면 중 주인공이 여자친구와 로마로 여행을 가고 콜로세움에 몰래 들어가는 장면과 내부 촬영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콜로세움에서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콜로세움에 장비를 놓을 수 없기 때문에 카메라와 기타 촬영장비를 모두 들고 촬영을 한 것이라고

6.1.4. 글래디에이터(영화)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글래디에이터(영화)에선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주인공 막시무스와 동료들이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하기 위해 로마에 막 도착했을 때 동료인 주바가 콜로세움을 보며 '저런 거 본 적 있어? 사람이 어떻게 저런 걸 지었을까?'라고 말한다.

6.1.5.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

작중 고질라가 콜로세움의 아담한(?) 사이즈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곳을 자신의 침대로 삼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판에서 나온 내용에 따르면 로마 콜로세움을 비롯한 로마의 건축 양식이 고질라를 숭배했던 고대 추종자 인간들의 건축 양식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고지라의 취향이라고.

6.2. 만화 및 애니메이션

6.2.1. 유희왕 ZEXAL

No.54 반골의 투사 라이언하트가 발견된다.

6.2.2. 탑블레이드

유럽팀의 안토니오(잔카를로 토르나토레)가 여길 임대해서 팽이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6.2.3. 재키찬 어드벤처

물의 악령이 봉인해제를 할 때 나온다

6.2.4.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2부에서는 고대 로마파문 전사들과 싸우고 난 뒤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해진 기둥 속 사내들이 콜로세움 지하에서 2000년 동안 동면을 시작했다. 제5부 후반부에는 주인공 일행이 마피아 파시오네보스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와 접선하기 위해 향한 곳이기도 하다.

6.2.5. 원피스

드레스로자에서 나오는 코리다 콜로세움도 위 건축물을 모티브로 한 것.

6.2.6. C.M.B. 박물관 사건목록

4권에서는 콜로세움 밑에 유대교의 성지인 제2 대성전의 잔해가 있다는 설정이 나온다. 티투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뒤, 신전을 조각 내 가져와서 로마 한 가운데에 파 묻었고, 이후 그 위에 콜로세움이 세워졌다는 내용. 워낙 충격적인 설정인지라 이걸 알게 되면 이스라엘이 콜로세움을 폭파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신전을 되찾으려 들거라는 언급이 나온다. 때문에 주인공이 작중에서 은폐하는 몇 안 되는 사건이다.

6.2.7. 톰과 제리

톰과 제리: 수퍼 레이스 (Tom and Jerry: The Fast and the Furry, 2005)에서 톰과 제리의 제트기 레이스 도중에 외벽이 박살나더니 산산조각난다.

6.3. 게임

6.3.1.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상술한 맹룡과강의 그 장면을 패러디한 콜로세움 스테이지가 그대로 등장한다. 무심하게 혼자 돌아다니는 고양이 한 마리는 덤, 대응되는 캐릭터는 로즈와 버디.

6.3.2.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

잠입, 암살, 경주, 로물루스의 유물 등 주요 미션 장소로 등장하며, 이 게임에 등장하는 유적 중 주인공 에치오 아디토레가 가장 자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건물이다.

6.3.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

6.3.4.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중세 시대(???)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효과는 국경을 넓히고 침공해 온 적 유닛에게 추가 피해를 입히며 요새와 탑의 건설 비용이 감소하는 것. 원래부터 적 유닛에게 추가 피해를 입히는 러시아가 지을 경우 상대에게 우주방어가 뭔지 알려줄 수 있으며, 요새와 탑의 건설 비용에 보너스를 받는 로마나 한국이 건설하면 타워 디펜스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다.

6.3.5. 라이즈: 선 오브 롬

작중 중반부에 주인공 마리우스가 검투사 데모클레스로 변장해 네로 황제의 아들 콤모두스와 싸우는 무대로 등장하는데, 마리우스가 참전했던 브리타니아 전투를 고대 로마의 기술력으로 재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자동으로 지형이 마구 바뀌는 콜로세움의 웅장함이 그야말로 압권.

6.3.6. 문명 시리즈

분명히 고유명사이고 제법 유명한 건축물임에도, 시리즈 대대로 불가사의가 아니라 일반 건물로 등장하다가 최신작인 문명 6에 들어서야 불가사의로 승격되었다.
  • 문명 1: 도시의 불행한 주민 세 명을 만족한 상태로 만들어준다.
  • 문명 2: 전작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주민 셋을 만족한 상태로 만들어주며, 게임 후반에 전기를 연구하면 주민 넷을 만족시켜 준다.
  • 문명 3: 매 턴 문화를 제공하고, 도시의 불행한 주민 둘을 만족한 상태로 만들어 준다.
  • 문명 4: 행복을 제공하고, 문화에 투자할수록 행복을 더 많이 제공한다.
  • 문명 5: 행복을 제공하며, 모든 도시에 콜로세움을 지으면 행복을 추가로 올려주는 국가 불가사의인 원형 경기장[45]
  • 문명 6: 이전까지 콜로세움이 담당하던 역할은 원형 경기장(Arena)이 대신하고,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효과는 인근 도시들에 매 턴 문화와 충성도를 더해 주고 쾌적도도 제공하는 것. 효과 자체는 유용하지만 도시를 다소 밀집시켜서 지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고, 다른 특수지구에 비해 효과가 떨어지는 유흥단지를 일찍 지어야 하는데다 원형 경기장까지 지어줘야 한다는 조건이 빡빡하다는 것도 흠.

6.3.7. 그란 투리스모 시리즈

이 유적을 위주로 짜낸 시가지 서킷들이 등장했다.

6.3.8. 도미네이션즈

고전 시대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불가사의/콜로세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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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6.4. 기타

  • 이탈리아 5센트 주화의 도안이다.
  • 인터넷, 특히 오늘의 유머에서 키보드 배틀이 벌어지는 글을 '콜로세움'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터넷 상에서 말싸움을 하는 것을 검투사들이 싸우는 경기장인 콜로세움에서 착안하여 비유한 것.
  • 2021년에 레고로도 발매되었다. 무려 9,036개 라는 역대 최대 개수의 부품이 사용되었다.
  • 해신 같은 한국 사극에서도 종종 비슷한 것이 사용되곤 한다.
  • 오래된 농담 중에 ‘전화기로 지은 건물은 콜(call)로세움이다’ 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사실 call은 전화기 자체를 뜻하는 게 아니라 전화 통화를 뜻하는 단어인 것이 함정. 전화기는 (tele)phone이다.
  • 복면가왕에서는 우리집 부서져또... 콜로세움이라는 가명이 나왔다.
  • 이탈리아 로마의 유적 콜로세움 벽면에 자신과 여자친구의 이름을 낙서로 새긴 영국인 관광객이 콜로세움이 문화유적인 줄 몰랐다는 변명을 내놓았다. #

[1] Historic Centre of Rome, the Properties of the Holy See in that City Enjoying Extraterritorial Rights and San Paolo Fuori le Mura[2] Centre historique de Rome, les biens du Saint-Siège situés dans cette ville bénéficiant des droits d'extra-territorialité et Saint-Paul-hors-les-Murs[3]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5]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6]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7]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8] 보통 피라미드 하면 쿠푸의 대피라미드를 떠올리기 쉬운데 쿠푸의 피라미드는 카이로에서 멀지 않은 남쪽에 위치한 도시 기자에 위치해 있다. 물론 멤피스에도 피라미드가 없는 것은 아니며 더 오랜 세월 동안 이집트의 수도 역할을 했던 도시이기 때문에 마르티알리스가 말하는 피라미드는 멤피스의 다른 피라미드일 수도 있고, 혹은 마르티알리스가 지역을 착오했을 가능성도 있다.[9] 당시 델로스는 델포이와 더불어 아폴론 신전으로 유명했다.[10] 마우솔레움이 위치한 터키 서남부의 카리아(Caria) 지역에 살던 이들을 의미한다.[11] '건물'로도 번역할 수 있다.[12] 서기 40~102(?). 히스파니아(현 스페인) 출신의 로마 시인. 도미티아누스에게 발탁되어 후원을 받았고 도미티아누스의 최측근 인물로 활약하였으며 개인적 교감을 나누는 친구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 치세에 리즈시절을 맞이했으며 도미티아누스가 살해되어 실각했을 때 같이 몰락했다. 그렇다고 살해되거나 탄핵당한 것은 아니고 고향으로 낙향해 은퇴하여 여생을 마쳤다. 후임 황제들인 네르바트라야누스의 입장에서 기록말살형을 당한 황제의 측근을 그냥 데리고 있기도 뭐했을 것이고 도미티아누스와는 달리 시인들을 그닥 좋아하지도 않았다.[13] 마르티알리스의 작품은 풍자시와 행사시 두 가지가 남아있는데, 그 중 행사시가 바로 콜로세움의 개장을 축하 및 기념하기 위해 출판한 작품이다. 다만 상당부분이 전승과정에서 사라져 현재에는 33편의 시만 남아 있다. 이 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말 그대로 이전 문명 국가들의 유산을 모조리 까대며 황제가 짓고 있는 콜로세움이 이전 불가사의들의 명성을 능가할 거라며 찬양하고 있다. 도미티아누스의 측근이었고, 콜로세움의 원래 명칭이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이었던 만큼 플라비우스 왕조의 업적인 콜로세움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터. 그리고 애초에 마르티알리스의 직업이 풍자시인이다. 또한 이런 류의 시를 묘비(Epigraph)에 쓴 문구에서 유래했다고 하여 에피그램마(Epigramma)라 한다.[14] 대리석이 붙은 외벽과 훼손된 내벽이 만나는 부분[15] 흔히들 전차 경기가 콜로세움에서 벌어졌다고 착각하는데, 전차 경기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이루어졌다.[16] 문명 시리즈에선 대대로 일반 건물로 나온다. 그러다 문명 6에서 원형 경기장이 특수지구 유흥단지의 건물로 편입되면서, 마침내 불가사의로 단독 등장하였다.[17] 예를 들어 베로나의 앰피시어터는 일반적으로 아레나라고 한다.[18] 콜로세움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네로 황제가 거대한 인공 호수를 만들려던 곳이었다. 이 인공 호수를 포함한 하술된 개인 궁전과 거대한 도심공원을 만들려던 것이 네로 황제의 원래 계획이었고 그래서 건축을 기획한 네로를 본딴 거대한 동상을 인공 호수가 들어설 자리 부근에 세운 것이라고.[19] 애초에 네로의 이 도심공원 프로젝트 자체가 로마 시민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20] 일부 국내 영어사전에는 두 단어의 발음기호가 다르게 적혀 있는 것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강세가 o에 있고 두번째 모음 o/i는 강세가 없어 대강 뭉개진 음으로 발음된다. 구글 번역기에 두 단어를 모두 넣어보면 알 수 있다.[21] 코끼리를 훈련시켜 코끼리가 걸어가다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한다거나...[22] 수간을 종교적인 행위로까지 인식하였다.[23] 수간이 유럽에서 죄악시된 건 기독교가 압도적인 지배적 위치를 가진 중세 무렵이다.[24] 동물과 싸우는 사람을 "베스티아리(Bestiarii)"라고 불렀다. 사실 엄밀히 말해 글래디에이터는 사람과 싸우는 직종만을 가리키므로 베스티아리는 글래디에이터로 취급되지 않는다. 이들은 대개 수입해온 흔치 않은 동물들과 싸웠다. 제국 각지에서 잡아오기도 했고, 심지어는 카스피호랑이, 코뿔소, 시리아코끼리, 북아프리카코끼리, 아틀라스불곰, 유라시아불곰, 아시아사자 같은 희귀한 맹수들도 잡아 왔다. 모두 위험한 맹수들이기에 이들은 활과 창, 횃불, 갑주 등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스코틀랜드산 사냥개들을 대동한 채 맹수들과 대결했다. 대개 베스티아리가 유리하지만 동물이 이길 확률도 약간 있었다. 이 때문인지 관중들은 짐승을 죽이는 장면 못지않게 베스티아리가 죽는 장면을 보고 싶어했다고 한다.[25] 하지만 이는 카포포루스의 인기와 찬양으로 부터 나온 과장된 이야기에 불과하고 인간이 거대한 맹수들과 맨몸으로 싸우는 것은 그저 자살행위다.[26] 파시파에미노스 왕의 왕비였다. 하지만 파시파에는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하얀 황소를 사랑하게 되었고, 장인 다이달로스를 시켜 나무로 된 암소의 형상을 만들도록 했다. 형상이 완성되자 그 안으로 들어가 발굽에 치이거나 깔려죽을 걱정 없이 황소와 마음껏 사랑을 나누었다. 이 사랑의 부산물이 반은 사람 반은 황소의 모습을 갖춘 괴물 미노타우로스였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네로는 이 전설을 실제로 경기장에서 공연하도록 했다. 여성을 암소 모습의 특수 제작 틀 안에 집어넣고 황소가 덮치게 했다고.[27] 고대 로마에서는 해면 비슷한 걸로 만든 스펀지를 막대기에 달아 물을 묻혀 화장실에서 엉덩이를 닦았다. 일종의 휴지 대용품이었던 셈.[28] 세네카는 이 사례를 소개하면서 "이 죄수가 경기장에서 죽었다면 얼마나 명예로운 죽음이었을까!"하고 한탄했다.[29] 참고로 불에 타 죽기 전에 히드라의 독에 의해 옷이 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자신의 살까지 함께 뜯어내 버리는 장면도 있다.[30] 도시국가 시절의 로마를 침략한 적국의 왕 포르센나를 암살하려다 사로잡히자 포르센나의 눈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오른손을 집어넣고 손이 다 타버릴 때까지 비명 한 번 안 지르고 버텨 로마인의 용기를 증명해 보였다는 애국자.[31] 유명한 영화인 글래디에이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검투사 노예들과 로마군을 섭외하여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한니발자마 전투를 재현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여기선 막시무스의 주인공 보정으로 로마군이 끔살. 근데 무장 상태를 보면 막시무스와 동료 검투사들이 글라디우스, 필룸, 스쿠툼 등 로마군의 표준 무장을 했고 로마군이라고 나온 패거리는 채리엇을 타고 활을 쏘는 등 전혀 로마군답지 않다...[32] 출처 로마제국, 쾌락의 역사 p300-302.[33] 물론 이건 콜로세움만이 아니라 로마가 유지되던 시대의 건축물 중 현재까지 원래모습인 건축물은 판테온뿐이다. 다른 건축물은 모두 석재공급장 취급을 받았다. 오히려 비슷한 시기의 포로 로마노와 비교하면 성지지정 때문에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한 편이라는 주장도 있다.[34] 로마가 교회를 탄압하면서 초기 신자들을 사자에게 물어죽이게 한 장소.[35] C.M.B. 박물관 사건목록 4권에서는. 베니틱토 14세가 콜로세움 지하에 묻혀 있는 제2신전의 유물의 존재를 알아채곤, 유적 훼손으로 그 존재가 드러나는 걸 막기 위해 순교지로 지정했단 가설을 내세운다.[36] 콜로세움이 없었을 때에도 수용인원이 5배가 되는 대경기장이 있었다. 로마가 제국이 되기 전 공화정이었을 때부터 범죄자들의 처형을 이런 식으로 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2대황제 티베리우스 때부터 산적, 도적의 수괴를 기둥에 묶어두고 사자에게 잡아먹히게 했다고....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도 콜로세움에서가 아닌 다른 경기장에서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네로 황제 당시에는 콜로세움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37] 케임브리지 대학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교수. 로마 제국사(고대 말기) 전공.[38] 참고로 저 헤롯 왕의 성전은 벽돌 하나하나에 금박을 입혀서 무지막지하게 화려했다고 전해지는 건물이다. 로마병들이 이걸 하나하나 벗겨가는데 고생꽤나 했다고. 이 정도이니 콜로세움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일부 충당할 수 있었다는 것도 이해가 될 것이다.[39] 여담으로 티투스는 그 와중에도 온갖 재난에 대한 대책을 세우느라 끊임없이 일했고, 결국 병에 걸려 사망한다.[40] 귀족이 경기를 제일 잘 볼 수 있는 아래쪽, 시민들은 중간,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이나 노예, 여성들은 가장 위의 자리였다고 한다. 다만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은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됐다고.위에선 3S 정책이라 입장료가 없다며?? 그게 시민 한정이라고[41] 이 차양막은 배의 구조를 응용했기 때문에 미세눔 해군기지에서 파견된 수병들이 관리했다고 한다.[42] 콜로세움을 직접 보면 외벽에 구멍이 숭숭 뚫린 걸 볼 수 있는데 이 구멍은 전부 철 쐐기와 나무 쐐기들이 있던 자리로, 전부 빼 가서 없어진 것이다.[43]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 언덕의 입장료와 통합적으로 받고 있다. 즉, 표 한 장을 사면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 언덕을 모두 볼 수 있다는 말씀.[44] 콜로세움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광장 등 로마의 주요 건축물도 싸그리 부서진다. 후에 번개로 인한 화재로 로마 시내 곳곳이 불타는 장면이 나온다.[45] 일러스트나 원문 명칭을 보면 로마의 전차 경주장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