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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찍은 모습 | 내부 모습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글 | [1] |
영어 | [2] | |
프랑스어 | [3] | |
국가·위치 |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시국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0년 | |
등재기준 | (i)[4], (ii)[5], (iii)[6], (iv)[7], (vi) [8] | |
지정번호 | 91 |
1. 개요
로마 판테온(Pantheon)은 이탈리아 로마시에 있는 가톨릭 성당으로, 고대 로마 시기에 지어졌다.2. 역사
M·AGRIPPA·L·F·COS·TERTIVM·FECIT (Mārcus Agrippa Lūciī fīlius cōnsul tertium fēcit 루키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 번째 집정관 임기에 지었다) |
로마 판테온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주도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건물은 당시의 판테온이 아니라 후대에 재건된 것이다. 아그리파의 판테온은 서기 80년경 화재로 붕괴되어 81년에서 96년 사이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재건했으며, 두 번째로 세운 판테온도 다시 소실되어 2세기 초 트라야누스 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에 재건되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의 세 번째 판테온은 110년경 소실된 것을 하드리아누스 치세인 114년에 재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9] 이 때 아그리파를 존중하는 의미로 옛 판테온의 정면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을 그대로 다시 새겼다. 재건 이후에도 3세기 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카라칼라 황제 시기에 보수된 기록이 있다.
판테온이라는 건물의 본래 이름과 형태, 정확한 용도는 불분명하며, 여러가지 설이 있다. 널리 알려져 있는 '판테온'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만신전'이라는 뜻으로, 다신교에서 모든 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이 판테온으로 알려진 것은 건물이 재건되고 본래의 용도를 잃은 기념관에 지나지 않게 되었을 때의 일이며, 이미 '판테온'이라 한창 불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로마 시민 누구도 이 건물이 왜 판테온인지 알 수 없었다. 아그리파 당시 이 건물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고,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전통적으로 판테온은 기독교 공인 이전 로마 내 토착 종교의 여러 신들을 모시는 신전으로 여겨져 왔으나, 이미 2, 3세기에 이러한 설에 의문이 제기되었다.[10] 로마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Lucius Cassius, Dio)는 판테온이라는 이름이 건물 자체가 아니라 건물 주변에 신상(神像)이 늘어서 있는 데에서 온 별칭이거나, 혹은 특징적인 돔 구조가 신들이 있는 하늘을 연상시키는 데에서 붙은 이름이라 추정하였다.[11] 이 설에 따르면 '판테온'은 실제 건물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시민들이 건물을 가리켜 부르는 별명이나 통칭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스-로마 사학자 콘라트 지글러(Konrat Ziegler)는 판테온이 만신전이라는 증거가 제한적이며, 판테온과 관련해 당대 로마에서 숭배되었던 신의 목록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12] 다른 견해에 따르면, 판테온은 로마의 정복전쟁으로 로마의 토착신을 믿지 않는 피정복민들을 위한 통합적 목적으로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스와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기 때문에 이교의 신을 받아들이는 것에 무리가 없었고, '로마 제국의 관점에서 아직 인지하지 못한 다른 신'이라는 개념도 존재할 수 있었다. 요컨대, 고대 지중해 문명의 종교는 정치와 분리되지 않았으므로 피정복민의 종교적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로마 제국 내로 흡수하기 위한 방편으로 판테온과 같은 시설이 이용되었다는 것이다.[13]
한편 판테온 일대에 대한 19세기의 발굴 조사에서, 아그리파가 건설했던 판테온은 현재 남아있는 판테온과 건물의 형태도 상이했음이 밝혀졌다. 학자들은 후대에 재건되었다는 사실이 역사에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았고 '아그리파가 세웠다'는 명문까지 그대로 복원한 탓에 하드리아누스의 판테온이 아그리파의 판테온과 같은 구조인 것으로 오해되었다고 설명한다. 재건 이전의 판테온은 방향이 북쪽이 아니라 남쪽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있으며, 복도 등의 구조가 더 좁고 낮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 이후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일신교인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608년 교황 보니파시오 4세가 동로마 제국 포카스 황제에게 기증을 받아 이를 가톨릭 성당으로 바꾸었다. 판테온은 이후 '순교자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Chiesa Santa Maria dei Martiri)'이 되었으며, 1400여 년간 유적이 아닌 성당으로 꾸준히 유지, 보수되었다.
3. 건축학적 특징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돔 형태의 건축물이고 규모면에서도 미국 국회의사당 중앙돔보다 크다. 현존하는 그 어떤 로마 건축물보다 보존이 잘되어 있으며,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거대 돔 건축물이기도 하다. 직경 43.3 m에 달하는 거대한 돔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소피아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비견될 돔이 없었을 정도.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함께 이른바 <완벽한 고대 건축>이라는 중세 유럽인들의 이상향이며, 판테온의 돔과 실내 장식, 열주(기둥들)는 르네상스 건축과 그 이후의 유럽 전통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로마의 판테온과 로톤다 광장[14] | 파사드 양쪽에 세워진 종탑이 찍힌 사진 |
판테온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로도 버려지지 않고 꾸준히 보수되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자리에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후대에 성당으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입구 양쪽에 종탑이 세워졌고, 내부의 장식 등도 크게 변화되었다. 고대 로마의 흔적은 대부분 훼손되어 극소수만 남았다. 1천 년 이상 성당으로 사용되며 추가되었던 여러 기독교적 장식들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철거되고 고대의 모습을 되찾았다.
원래 판테온의 외벽 등은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마감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벗겨지고 벽돌이 노출되어 있다. 내부 천정의 격자무늬 공간에는 금박을 입힌 청동 별들이 장식되었다고 전하지만 오늘날 남은 건 하나도 없다. 또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를 만들기 위해 1625년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명령에 따라 판테온 현관의 도금한 청동판 지붕을 벗겨낸 것도 유명한 사례. 하지만 발다키노 제작에 사용된 청동은 베네치아에서 가져왔고, 우르바노 8세가 벗겨낸 청동의 대부분은 산탄젤로 성에 배치할 대포 주조에 사용되었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
3.1. 돔
판테온의 가장 큰 특징은 콘크리트로 만들어 올린 거대한 돔이다. 판테온은 소위 말하는 부정직한 구조를 가진 건물로, 실제 구조와 겉에서 보는 형상이 다르다. 큰 돔을 받치고 있는 아래의 원형 드럼 부분은 기둥과 보만으로 이루어진 인방 구조로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돔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1층의 두터운 벽처럼 보이는 대형 기둥 8개와 그 위의 대리석으로 가려진 거대한 아치들로, 돔 아래 1층의 보통 굵기의 기둥들이나 2층의 창문 등은 거의 장식에 불과하다. 로마의 건축가들은 아치를 써서 무게를 효과적으로 분산시키면서도 그리스식 건물처럼 기둥과 보만 사용한 정갈한 건물로 보이게 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리고 돔 내부의 형상도 비슷한 장식이 섞였다. 구조적으로 필요한 돔은 약간 더 넙적한 모양이기 때문에 실내 돔의 아랫 부분은 그냥 완전한 구형을 만들기 위해 더 두껍게 발라진 장식에 불과하다.판테온의 돔에 사용된 저밀도 콘크리트는 고대 건축 기술 가운데 독보적이다. 콘크리트에 말총을 섞어서 인장력을 보강했다고 하는데, 이는 석고를 굳힐 때 안에 비닐끈 등을 잘게 찢어 넣어 잘 깨지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하지만 돔형 구조와 말총만으로는 무게를 지탱하기 힘들어 아래 사진에 나온 것처럼 돔 안쪽에 사각형 모양의 홈을 다섯 층으로 28개씩 일정하게 파내었다. 이러한 시공방법은 돔의 중량을 감소시키는 건축학적 효과와 동시에 아름다운 무늬의 역할을 통한 장식적 효과까지 발휘하게 하였다.
또다른 특징으로는 화산재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화산재 등을 사용하는 저밀도 콘크리트는 물에 굉장히 강하다. 일반 콘크리트는 물이 내부로 스며들지만[15] 저밀도 콘크리트는 물이 내부로 스며들지 않으면서 상대적으로 가볍다. 이런 특징이 콘크리트의 수명을 굉장히 길게 연장시킨다. 이러한 공법이 적용된 사례의 대표 격 건축물이 바로 로마의 판테온 돔으로,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고 그동안 지진으로 인한 피해로 인한 보수 이외에는 대대적인 보수가 거의 없었다.[16] 로마의 콘크리트 기술은 멸망 후 배합법이 실전되었다가, 현대의 연구로 다시 재현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천 년 뒤에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판테온의 돔을 능가하기 전까지 돔의 직경에서 이를 능가하는 돔은 세워지지 못했으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판테온을 천사의 작품이라 칭하며 극찬했다. 피렌체에 위치한 두오모 성당의 돔을 설계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고 전면의 삼각형 지붕에서 후면의 원형 돔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성 베드로 대성당, 파리의 팡테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의 외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돌프 히틀러가 세계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했던 게르마니아 계획에서도 판테온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 히틀러가 무솔리니와의 친선을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판테온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이 때 판테온에 무척이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게르마니아 건설 계획의 중추를 담당하던 건물인 '국민회관'의 돔 내부 디자인은 히틀러의 신고전주의 건축물 취향과 판테온 기억이 맞물려 판테온과 굉장히 흡사하다.
건물의 최상부에는 둥근 구멍을 뚫었는데 지름이 9 m에 달한다. 이 구멍은 오쿨루스(Oculus)라고 불리는데 라틴어로 눈이란 뜻이다. 비는 안에서 생기는 상승기류가 구멍으로 나갈 때 기압차로 들어오지 못해 충분하다고 알려졌으나, 한국처럼 굵은 비가 다량으로 오는 일이 적고 가는 비가 조금 오는 경우가 많은데 문을 닫고 제사를 지낼 때 불을 피워 생기는 상승기류가 가는 비가 내리는 것을 막는 정도고 굵은 비는 못 막는다. 보통은 개방된 건물이기 때문에 기압차가 없으니 가는 비도 그냥 쏟아져 들어온다. 바닥에는 비가 빠져나가는 배수구도 있다.[17]
3.2. 내부
내부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라파엘로 산치오, 초기 바로크 시대의 화가 안니발레 카라치, 작곡가 아르칸젤로 코렐리, 건축가 발다사레 페루치, 이탈리아를 통일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와 그의 맏아들 움베르토 1세 및 움베르토 1세의 왕비인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19] 왕비의 무덤이 있다. 왕정이 폐지가 되지 않았다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움베르토 2세도 이곳에 묻힐 수 있었겠지만 1946년 이탈리아에서 왕정이 폐지되면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망명지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묻혔다가 2017년 피에몬테주의 비코포르테 성소(Santuario di Vicoforte)[20]로 이장되었고, 움베르토 2세는 사보이아 가문의 조상들이 묻혔던 프랑스 사부아의 오트콩브 수도원(Abbaye royale d'Hautecombe)에 매장되었다. 2023년 기준으로 입구에서 1시 방향은 빈 곳인데, 누군가 묻힌다면 이곳에 묻힐 가능성이 있다.[21]3.3. 오벨리스크
판테온 앞 광장의 분수 위에 놓인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파라오인 람세스 2세 때 만든 것으로, 헬리오폴리스에 있던 것을 로마로 운반해 이시스 세라피스 신전에 갖다두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4. 여담
영국의 최고급 자동차 제조사 롤스로이스의 전면부 그릴이 이 건물을 형상화했다고 한다.AS 로마의 구단주는 로마의 기적 이후 너무 기쁜 나머지 판테온 분수에 들어갔다가 벌금 450유로짜리 고지서를 받았다. 구단주는 벌금 대신 23만 유로를 로마市 정부에 기부했다고.
한국어 위키백과에도 잘 설명된 건축물 중 하나. 참고하면 좋다.
2018년 초부터 입장객에게 3유로(약 4천 원) 남짓 소액 입장료를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한다. #
프랑스 파리에 있는 건물은 팡테옹이며 철자는 악상기호를 빼면 똑같다.
이것의 마계 악마 버전으로는 판데모니움(만마전)이 있다.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서 에치오 아우디토레가 판테온을 기어올라가 오쿨루스로 잠입해 타겟을 암살하는 미션이 있다.
바로 옆에 맛있기로 유명한 카페도 있으니 가 보면 좋다.
[1]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2] Historic Centre of Rome, the Properties of the Holy See in that City Enjoying Extraterritorial Rights and San Paolo Fuori le Mura[3] Centre historique de Rome, les biens du Saint-Siège situés dans cette ville bénéficiant des droits d'extra-territorialité et Saint-Paul-hors-les-Murs[4]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5]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6]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7]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8]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9] Hetland, Lise. "Zur Datierung des Pantheon." In The Pantheon in Rome: Contributions to the Conference, edited by Graßhoff, G., Heinzelmann, M., and Wäfler, M., 9–12. Bern, 2006.[10] 서기 200년경의 로마인에게 판테온은 이미 200년 전 조상들의 유물이었다.[11] Cassius Dio. "Roman Histories" 53.27.[12] Ziegler, Konrat. "Pantheion." In Pauly's Real-Encyclopädie der Classischen Altertumswissenschaft: neue Bearbeitung, Vol. XVIII, 697–747. Stuttgart, 1949.[13] 아무리 늦게 잡아도 대략 AD 30년 경에는 해당 개념이 로마 제국 안에 보편화되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편린을 사도행전 17장 34절에 있는 바울로의 발언을 통해 간단하게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14] 로마의 판테온과 로톤다 광장, 루돌프 폰 알트, 1835년, 18 x 24.8 cm, 종이에 수채, 오스트리아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15] 현대의 콘크리트 구조물은 주기적으로 유지보수가 필요하다.[16] 저밀도 콘크리트의 특징으로 고대 로마는 항구를 만들 때 방파제 역시도 저밀도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나무틀에 콘크리트를 붓고 그대로 바다에 넣으면 바닷속에서도 그대로 굳는다.[17] 이렇게 비를 막을 수 없는 구조 때문에 본래는 오쿨루스가 막혀 있었다는 전승도 있다. 천주교 전승에는 판테온이 성당으로 축성될 때, 이교의 신들의 영혼이 판테온을 빠져나가며 오쿨루스를 막고 있던 솔방울이 건물 밖으로 튕겨나갔고, 오쿨루스 구멍으로 성령과 성모를 상징하는 장미꽃잎이 비처럼 쏟아졌다고 한다. 해당 전승에서는 바티칸의 솔방울 정원의 솔방울 조각상을 이쿨루스의 마개라고 지목한다. 지금도 성령강림대축일에는 해당 전승을 기념하여, 오쿨루스 구멍으로 장미꽃잎을 뿌리는 행사를 한다고 한다. #[18]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왕비인 오스트리아의 아델하이트는 이탈리아 왕국 수립 전인 1855년 사망했기 때문에, 기존에 사보이아 가문에서 왕실 묘역으로 사용하던 토리노의 수페르가 성당에 따로 안장되어 있다.[19] 마르게리타 피자의 유래가 된 인물로 움베르토 1세와는 사촌 지간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친동생 제노바 공작 페르디난도의 딸.[20]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부부는 조상인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묻힌 방에 안장되었다.[21] 1882년 주세페 가리발디가 사망했을 때 가리발디를 판테온에 매장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판테온이 통일 이탈리아 왕국 군주들의 묘역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 근왕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