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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344><colcolor=#ffffff> 이탈리아 사보이아 왕조 제3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Vittorio Emanuele III | |||
출생 | 1869년 11월 11일 | ||
이탈리아 왕국 나폴리 (現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 광역시) | |||
사망 | 1947년 12월 28일 (향년 78세) | ||
이집트 왕국 알렉산드리아 (現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주 알렉산드리아) | |||
재위기간 | 이탈리아 국왕 | ||
1900년 7월 29일 ~ 1946년 5월 9일 | |||
에티오피아 황제 (비정통) | |||
1936년 5월 9일 ~ 1941년 5월 5일[1] | |||
알바니아 국왕 | |||
1939년 4월 19일 ~ 1943년 9월 11일[2]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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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페르디난도 마리아 젠나로 디 사보이아 Vittorio Emanuele Ferdinando Maria Gennaro di Savoia | ||
아버지 | 움베르토 1세 | ||
어머니 |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 | ||
배우자 | 몬테네그로의 옐레나 공주(1896년 결혼) | ||
자녀 | 욜란다, 마팔다, 움베르토 2세, 조반나[3], 마리아 프란체스카 | ||
종교 | 가톨릭 | ||
신체 | 153cm | }}}}}}}}} |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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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보이아 왕조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3대 국왕이자 에티오피아의 황제(1936 ~ 1941), 알바니아의 왕(1939 ~ 1943)을 겸임했다. 다만 이탈리아 국왕 외의 지위는 추축국 말고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실상 이탈리아 왕국 마지막 국왕이나 공식적으로 아들 움베르토 2세가 34일 동안 재위를 했기 때문에 마지막 국왕은 아니다.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원들이 로마로 진군하며 폭동을 일으켰을 때는 이에 대한 진압을 거부하고, 무솔리니에 협조함으로써 그의 집권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무솔리니의 독재와 침략을 방관하여 끝내 패전이라는 파국을 맞이하였고, 이후에는 패전 수습을 위해 어떻게든 노력하였으나 왕정 종식이라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물론 그의 생애를 감안해보면 이 모든 건 그의 자업자득이다. 당초에 국왕으로서 제대로 능력도 없었다.
2. 생애
2.1. 즉위 전
나폴리에서 태어났기에 사보이아 가문의 계승자들이 전통적으로 책봉되는 피에몬테 공(Principe di Piemonte)이 아닌 나폴리 공(Principe di Napoli)에 책봉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남부의 민심을 잡기 위해 일부러 나폴리 공으로 책봉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할아버지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 의해 이탈리아 통일이 거의 완성된 상태였으며 태어난 후 2년만에 이탈리아 통일이 공식적으로 완료되면서 그의 미래에는 신생 열강국가인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차기 지도자라는 빛나는 미래가 열려 있었다.이후 왕실 교육을 받았으나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4], 몸이 약했던데다가 사보이아 가문 특유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성년이 되어서는 굉장히 내성적이고 냉소적인 성격이 되었다. 아버지 움베르토 1세는 건강했기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의 즉위는 40대 즈음 되어서야 가능했을 것이었고 본인도 특별히 왕위에 목매달지 않았다. 다만 그는 왕태자 시기에 에티오피아 침략의 실패[5] 및 사회주의 및 아나키즘 세력의 발호를 지켜보았다.
즉위 전 그는 성격이 너무 좋아서 조금만 더 심지가 굳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격이 너무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었지만 동시기 입헌군주국이었던 영국에 비교해서 왕의 권한이 매우 강하여 총리 임명권 및 의회 해산권에 총리 및 의회가 내놓은 제안에 대한 거부권 등이 있었다. 사실 의회 정치가 잘 돌아가면 왕이 유순한 것이 오히려 좋은 경우이다. 왕이 의회가 하는 일에 태클 안 걸고 조용히 얼굴마담이나 하면 되는 거니… 그러나 이탈리아의 정치 환경은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2.2. 즉위 및 초기 집권기
그가 31세가 되던 해인 1900년 7월 29일, 부왕 움베르토 1세가 아나키스트가 쏜 탄환에 맞고 급서하면서 그는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그가 즉위했을 때 이탈리아는 낙후된 노동환경에 이어 좌파 정당의 힘이 강해졌고, 열악한 경제여건에 더해 몇 년 전 에티오피아 침략전쟁의 패전이 겹쳐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자본가들과 이들을 대표하는 의회 우파 세력은 에티오피아에서의 패전은 그새 잊고 다른 열강들처럼 식민지 획득에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요구했다.
그는 의회 및 자본가 세력이 주도한 식민지 전쟁을 묵인했고, 덕분에 이탈리아는 1912년에 다 죽어가는 병자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걸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은 무능함을 보였다. 이탈리아군은 해안을 점령했음에도 내륙의 오스만 제국군을 제대로 상대하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결국 리비아가 아닌 에게 해의 도데카니사 제도가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점령된 이후 오스만 제국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어 어떻게든 승리는 할 수 있었고, 지중해 건너 리비아와 도데카니사 제도를 식민지로 획득할 수 있었지만 고작 이 정도로 자본가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거기다 당시 우파들은 식민지를 확대해야 한다며 날뛰었고, 좌파는 좌파대로 날뛰어서 국왕을 머리 아프게 하였다.
한편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탈리아는 중립을 선포하였다. 선왕 시절에 맺어진 삼국 동맹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지중해를 장악한 영국과 리비아의 주권을 인정해 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기는 힘들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정치권은 자유주의 세력과 가톨릭, 사회주의 세력이 중립을 지지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중립에 유리하게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유순하다던 국왕이 나서서 비상대권을 발동하겠다고 위협하였고, 살란드라 내각을 이용해 협상국과 동맹국 각 측에 참전을 골자로 한 비밀 회담을 하게 했다. 당연히 의회는 분노해 날뛰었고, 국왕은 의회의 절차를 무시한 채 이탈리아의 참전을 추진하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엄청난 영토를 약속받고 1915년에 독일과 오헝 제국에 선전포고했으나 오헝과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면서도 오헝을 제대로 밀어내지 못하는 등 졸전을 보였다.
2.3. 집권 중반기: 무솔리니 정권기
국왕과 내각에 의해 추진된 1차대전은 결국 이탈리아가 가담한 협상국의 승리로 끝났으나 이탈리아 입장에선 원하는 만큼 충분한 대가를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가 획득한 영토는 아드리아해 북부의 일리리아 지방 약간과 쥐트티롤에 그친 반면, 60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수십만 명의 부상자라는 막대한 인명피해, 그리고 심각한 전비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이처럼 말이 좋아 승전국이지, 막대한 희생에 비해 얻은 게 없다는 인식이 이탈리아 전역에 들끓었고[6] 1920년부터 이탈리아 사회와 정치권은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특히 의회는 어느 당도 안정적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좌우파간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총리가 심심하면 바뀌는 등 지도력 부재의 상황에 빠져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역시 1차대전의 참전에 책임이 있었고, 이 상황에서 이탈리아에서 왕에게 부여된 비교적 큰 권한을 적절히 활용해서 혼란을 수습했다면 후대의 평가가 크게 바뀌었겠지만 그럴 역량이 모자랐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그 권한을 엉뚱한 데 써 버린다.
1922년 10월 22일, 국가 파시스트당 당수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를 추종하는 4만 여명의 검은 셔츠단이 수도 로마로 진군을 시작했다. 루이지 팍타(Luigi Facta) 총리는 어영부영 망설이다가 뒤늦게 강경 대응으로 방향을 잡고 국왕에게 계엄령 선포와 진압 부대 동원을 요청했다. 사실 검은 셔츠단이 로마에 도착한 10월 말엽 그 수는 7천 여명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도 즉시 진압이 가능한 상태였다.[7]
그리고 이들을 확실하게 진압하기 위해 총리가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해 재가를 요청하자, 국왕은 재가를 거부하여 검은 셔츠단 진압을 막았다. 이는 파시스트에 대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우호적 태도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국왕은 약 3달동안 의회가 정부 구성도 못해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판국에 검은 셔츠단이 끝내 로마까지 들어온 점에 주목했고, 의회 내 정당들이 정부를 구성할 것을 기다리며 언제까지 임시 총리 체제로 갈 수도 없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이탈리아 좌파와 노동운동 세력은 7월 31일부로 전국적 총파업에 돌입, 안그래도 선왕의 암살로 좌파와 노동운동 세력을 싫어하던 국왕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우려를 부추기고 있었다.
이러한 기존 정치권의 혼란과 사회주의 혁명의 우려 속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사회주의 세력의 준동을 막고 정치권의 혼란을 막아줄 인물로 로마 진군을 단행한 베니토 무솔리니에 기대를 걸었고, 국왕의 권한으로 베니토 무솔리니를 총리에 지명해 버렸다! 사실 무솔리니도 의회 내 우파 정당 간 혼란과 분열을 틈타 파시스트당 우위의 연립내각을 구성하려는 목적이었는데 느닷없이 국왕이 직접 "너님 총리 해보시졈?" 했던 것.
이후에는 국왕의 현안정치 개입권한을 발동하지 않고 조용히 잘 살았다.(…) 가끔 무솔리니와 사진도 찍어주며 무솔리니 파시즘 독재체제의 기반이자 얼굴마담 역할도 충실히 해주었고, 무솔리니도 자신이 추진하는 국정 방안에 어깃장 놓지 않는 국왕에게 충분한 예우를 보여주었다. 물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관점에서는 무솔리니와 국가 파시스트당 집권으로 좌파와 노동조합이 척결되어 '왕정에 대한 위협'과 '국익과 사회를 위협하는 혼란'이 사라졌다는 점[8]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후 무솔리니 정권의 침략 전쟁 수행과정에서 에티오피아 황제와 알바니아 국왕을 겸하게 된다. 왕은 무솔리니의 침공 계획에 이견이 없었고, 겸임하게 된 에티오피아 황위와 알바니아 왕위에 대해서도 기뻐했다.[9] 그래서 이탈리아가 무조건 항복한 후에도 이 두 지위는 포기 못한다고 버티다 2달 만에야 백기를 들었다.
2.4. 집권 말기: 축출된 군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의 동맹으로서 연합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이탈리아는 다시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에서 보여주듯 신나게 털리기 시작했다.(…)프랑스 침공 실패야 일종의 에피소드 정도로 웃어넘길 수 있었으나 사실상 건드릴 필요가 없던 그리스 침공에서 약소국 그리스에게 털려서 독일의 구원을 받아야 하질 않나[10],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20만 대군이 2만에게 뼛속까지 털리면서 본진인 리비아까지 모두 토해내고 독일 국방군이 와서야 겨우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에르빈 롬멜이 점령하려고 그렇게 애쓴 토브룩 요새는 본래 이탈리아 것이었다. 덕분에 독일은 소중한 15만명을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전역에 배치하여 3면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1941년 1월 영국군 주도 연합군의 아프리카 전역이 시작되어 5월에는 에티오피아를 상실하고 그 해 말에는 동아프리카 전역을 상실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42년 11월 북아프리카 식민지까지 모두 상실하고 이듬해 5월에는 이탈리아 왕국군이 북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축출된다. 이렇게 북아프리카 전역이 종결되자 연합군의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본토 진공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결국 연합군은 남부 시칠리아 섬에 상륙, 이탈리아 전선이 시작되었다.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고, 노동자들은 종전을 희망하는 총파업에 나서고 있었다. 뒤이어 7월 19일에는 연합군 공군에 의한 대규모 로마 공습이 이뤄져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7월 24일, 연합군이 로마에 대규모 공습을 단행한 직후 열린 파시즘 대평의회에서 19 대 7로 무솔리니 축출을 결의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를 추인했다.
이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국왕 권한으로 새로운 총리로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임명한 다음 연합국과의 강화를 지시하는 등 항복과 종전을 주도했다. 이때가 국왕으로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가장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선 때였다. 그러나 무솔리니를 해임한 다음에도 이탈리아 내에 주둔중인 독일군의 수가 아직 이탈리아군 병력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이기에 가능한 빨리 항복해야 한다는 군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연합국을 상대로 왕위 유지 보장, 개전 이전 식민지 유지, 유고슬라비아에서 병합한 영토 유지, 이탈리아가 아닌 발칸 반도를 통한 연합군의 진격 등을 항복 조건으로 내세워 항복 협상을 한 달이 넘게 끄는 바람에[11] 이탈리아가 항복할 시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할 독일군 병력이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다음 정부 지도부와 함께 연합군이 먼저 해방시키고 있던 이탈리아 최남부로 피신했다. 당시 이탈리아군 전력은 독일군에 비해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피신은 불가피한 면이 있었지만, 무질서하게 이루어진 항복과 정부의 피신으로 인해 이탈리아 왕국군이 명령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면서 독일군이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지원하기 더 수월해졌고, 이탈리아 북부는 전쟁 참화를 직격탄으로 맞게 되었다.
1944년 6월 로마 탈환 이후 로마로 귀환했으나 왕실은 로마 시민들에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이후의 대독전 수행에 있어서도 이탈리아는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특수지위국으로 분류되었으며 전 국토는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다. 이런 일을 벌인 주범인 무솔리니는 종전 직전에 처단되었으나 국민들은 무솔리니 다음으로 전쟁에 책임[12]이 큰 국왕 및 왕실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특히 북부 주민들은 국왕과 왕실이 무솔리니 정권과 함께 전쟁을 벌여놓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재빨리 남부로 피신한 것에 크게 배신감을 느꼈다.[13]
2.5. 퇴위와 말년
전후 사회당, 공산당 등 좌파 진영의 주도로 공화정 수립이 추진되고, 결국 1946년 6월 2일 총선과 함께 왕정 유지 여부를 결정하는 개헌 국민투표 실시가 결정됐다.사회당과 공산당 등 좌파의 공화정 여론은 이탈리아 통일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라 그리 놀랄 것은 없었지만, 전쟁 후에는 전통적으로 왕당파였던 우파 안에서도 공화정에 호의적인 여론이 늘어났다. 특히 1946년 4월에 우파 주류 정당인 기독교민주당 당원의 60%가 공화정을 선호하는 반면 겨우 17%만이 왕정을 선호한다고 답해 왕실과 왕당파에 큰 충격을 줬다. 왕당파는 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퇴위를 종용하였고, 결국 5월 9일에 퇴위와 함께 움베르토 왕태자에게 양위한 후 같은 날 저녁 이집트 왕국으로 망명했다. 또한 이때 그는 이미 76세의 고령이기도 했기 때문에 양위 명분은 충분했다.
귀하는 공화정 전환에 찬성하십니까, 혹은 왕정 유지에 찬성하십니까? | ||
투표일 | 1946년 6월 2일 | |
투표율 | 89.08%(28,005,449표) | |
입장 | 공화정 전환 | 왕정 유지 |
결과 | ||
12,718,641표 | 10,718,502표 | |
54.27% | 45.73%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는 46:54로 왕정 폐지로 결론이 났다. 무솔리니 실각과 함께 연합군이 일찍부터 입성한 남부는 군주제 지지 여론이 더 강했던 데 비해, 독일군의 개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레지스탕스 활동[14]이 상대적으로 더 강력했던 북부는 공화제 수립 여론이 더 강했다.[15] 움베르토 2세와 왕정 지지 측에서는 결과가 조작되었다며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조작되었다는 증거는 없었고 최종적으로 대법원이 이의 제기를 기각했다.
1946년 6월 13일 이탈리아 정치권이 공화정 수립을 선언한 다음 날 외아들 움베르토 2세는 포르투갈로 망명했고 며느리 벨기에의 마리조제 공주는 움베르토와 같이 망명했다가 곧 남편을 떠나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했다.[16] 망명지에서 왕정 폐지 소식을 들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아들을 실패자 취급하며 조소했고, 이듬해인 1947년 12월 28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다.[17]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는 그의 장례식에 일체 조문하지 않았다.
3. 평가
양차대전 당시 세계 각국 군주들 중, 동년배인 니콜라이 2세와 더불어 투탑으로 가장 평가가 나쁜 군주이다. 그나마 니콜라이 2세는 항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연구가 계속 이루어지고 자료가 발굴되면서 재평가라도 받고 있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재평가의 여지조차 없다.감당이 안 될 정도로 국내의 분리주의가 심했고 외교적으로도 열강들(특히 러시아)의 필요 이상의 압박을 받았다는 참작사유가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나 비록 팽창주의적 정책 방향으로 외교적으로 적을 만들어내서 결과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빌헬름 2세 또한 전쟁 전에 오헝 제국과 동맹을 맺어서 좋든 싫든 참전했어야 했고 전쟁을 강하게 주장한 군부(특히 루덴도르프)가 황제조차 통제를 못할 정도로 발언권도 영향력도 엄청났다는 참작사유가 있었다.
하다못해 똑같이 전쟁 때 도망갔다는 것으로 마찬가지로 비판을 받는 조선의 선조 또한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정치를 그럭저럭 잘 이끌어간 명군이었다. 그런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전쟁 시기를 빼놓고 보더라도 전쟁 이전인 재위 초반기부터도 극심한 좌우 정치대립과 급작스런 내각 교체에 대한 혼란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물론 부왕의 갑작스런 암살로 준비도 안 된 채 갑작스레 즉위했다는 참작사유도 있지만 즉위 당시 그는 갓 성인이 된 21살도 아닌[18] 성년기를 넘긴 지 한참 지난 31살이었고,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보다 재위기간도 훨씬 길어서 그들에 비해 본인 의지대로 뭐라도 해볼 만한 건덕지가 더 있었다. 거기다 비록 입헌군주국의 군주였다고는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재자 무솔리니를 말 한마디로 해임시키고 권력을 빼앗을 정도의 실권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1940년에 무솔리니가 참전을 강행할 때 참전에 반대하는 한마디만 했더라도 평가가 이 정도로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무솔리니와 같이 끝까지 싸우고 깔끔하게 패전하기라도 했다면 이탈리아 국민들로부터 "졌지만 잘 싸웠다"는 평이라도 받았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솔리니 집권기에는 무솔리니를 통해 골칫거리였던 좌익 세력들을 척결하고 편하게 살았고, 무솔리니가 전쟁 참전을 결정했을 때도 태클 없이 군말없이 있다가 전쟁을 일으킨 후 계속 지기만 하자 왕실의 안녕만을 위해 무솔리니만 잘라내고 연합군에 항복했다는 점과 전쟁을 시작할 때도 무솔리니에게 전권을 맡기고 편하게 있었으면서 전쟁으로 이탈리아 본토가 위협받자 해당 지역의 이탈리아 국민들이 연합군에게든 독일군에게든 죽어나가고 있을 때 본인의 실책으로 초기 대처에 실패해 사태를 악화시킨 상태에서 국민들을 보호하려는 척조차도 하지 않고 친족들만 챙겨 안전한 남부로 피신했다는 점[19]이 가장 큰 비판을 받는다.
거기다 항복 협상을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빼앗긴 식민지 반환을 연합국에 타진했다가 무시당했는데, 무솔리니 이전부터 있었던 식민지인 리비아와 에리트레아, 소말릴란드 뿐만 아니라 무솔리니에 의해 획득한 알바니아와 에티오피아까지 반환해 달라고 하는 바람에 무솔리니를 통해 식민지를 얻었으면서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무솔리니만 잘라내고 연합국에 항복했으면서 무솔리니 체제의 식민지는 안 내놓으려고 한다며 비판받았다.
4. 사후 논란
사망 후 그의 유해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매장됐다가 2017년 12월 17일에 이탈리아 피에몬테에 있는 비코포르테 성소(Santuario di Vicoforte)의 사보이아 가문 묘지[20]에 안장되었다. 또한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사망하고 그곳에 매장된 옐레나 왕비의 유해도 이틀 앞선 12월 15일 같은 가족묘지에 안장됐다.한편, 왕과 왕비 유해의 이탈리아 국내 운구에 대해서 당시 이탈리아 유대인 단체 '이탈리아유대인공동체연합(L'Unione delle comunità ebraiche italiane)' 회장 노에미 디 세니(Noemi Di Segni)는 "파시즘 정권의 급부상에 결코 반대하지 않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파시즘 정권과 파시즘 정권이 자행한 폭력의 공모자"라며 "이탈리아 정부 승인 아래 그의 유해가 송환된 것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탈리아에 있는 반(反)파시즘 레지스탕스 활동 참가자 전우회(戰友會) '이탈리아파르티잔전국협회(Associazione Nazionale Partigiani d'Italia)' 전(前)[21] 회장 카를로 스무랄리아(Carlo Smuraglia)도 "그의 유해를 엄숙한 의식 아래 국가가 나서서 송환한 것은[22] (파시즘에 맞선) 역사적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양심과 충돌하는 것"이라며 운구를 허락한 이탈리아 정부를 비판했다.[23]
다른 한편, 왕과 왕비 유해의 이탈리아 국내 운구에 대해서 현 사보이아 가문의 당주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귀환한 증조부의 유해가 안치될 올바른 장소는 판테온"이라고 발언해 빈축을 샀다. 그의 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의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을 두둔하는 발언과 비슷한 정치적 성향의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5. 가족관계
5.1. 아내
몬테네그로의 옐레나 공주 |
왕비 몬테네그로의 옐레나 공주는 몬테네그로 왕국의 국왕 니콜라 1세의 5녀다.[24] 남편과 사별한 뒤에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5.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베르골로 백작부인 욜란다 공주[25] (Princess Iolanda, Countess of Bergolo) | 1901년 6월 1일 | 1986년 10월 16일 | 베르골로 백작 조르지오 칼비 슬하 2남 3녀 |
2녀 | 헤센의 방백비 마팔다[26] (Mafalda, Landgravine of Hesse) | 1902년 11월 2일 | 1944년 8월 27일 | 헤센카셀의 필리프[27] 슬하 3남 1녀 |
1남 | 움베르토 2세 (Umberto II) | 1904년 9월 15일 | 1983년 3월 18일 | 벨기에의 마리조제 공주 슬하 1남 3녀[28] |
3녀 | 불가리아의 왕비 조반나[29] (Giovanna, Tsaritsa consort of Bulgaria) | 1907년 11월 13일 | 2000년 2월 26일 | 보리스 3세 슬하 1남 1녀[30] |
4녀 | 부르봉파르마의 루이지 공자비 마리아 프란체스카[31] (Maria Francesca, Princess Louis of Bourbon-Parma) | 1914년 12월 26일 | 2001년 12월 7일 | 부르봉파르마의 루이지 공자[32] 슬하 3남 1녀 |
6. 기타
- 키가 매우 작은 153cm였다. 위는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와 찍은 굴욕샷. 할아버지(158cm)와 아버지(178cm)보다도 키가 작다.[33] 당대 최단신 지도자였던 엥겔베르트 돌푸스(150cm)보다 고작 3cm 더 크다.
키 때문에 다른 굴욕을 당한 적도 있었다.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단신을 놀리기를 좋아했는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독일을 방문하자 빌헬름 2세는 일부러 체격이 큰 장병들을 선별해서 의장대를 구성해 방문 행사에 동원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작은 키가 더욱 돋보인 것은 물론이다. 반면에 왕비 몬테네그로의 옐레나 공주는 남편과 대비되게 키가 180cm이나 되며 당대는 물론 현재 기준으로도 엄청난 장신이었고 남편을 내 작은 왕이라고 부르며 귀여워했고[34] 부모님과 조부모와는 달리 부부간의 금슬도 좋은 편이었다. 한편 오촌 조카인 3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35]는 198cm의 엄청난 장신이었는데, 이 때문에 당대에는 두 사람이 종종 비교가 되기도 했다고.
- 제2차 세계 대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추축국의 지도자 중에서 독보적으로 인지도가 낮은데다 풍자도 덜 당한 인물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연합국에서 만든 프로파간다를 보면 풍자되고 있는 것은 아돌프 히틀러, 히로히토(또는 도조 히데키),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보면 알겠지만 저 셋 가운데 무솔리니만 국가원수가 아니다.[36] 연합국에서는 입헌군주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보다는 파시스트당의 지도자인 무솔리니가 훨씬 더 전쟁의 주동자에 가깝게 보였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도 무솔리니와 달리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긴 했다. 히로히토도 입헌군주이긴 한데 당대 일본은 천황을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내세운 것도 있어서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히로히토를 도조 히데키로 대체할 경우 아돌프 히틀러만 국가원수가 된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한 후 국가원수 직위까지 계승한 것.
- 나폴리에 있는 이탈리아 국립 도서관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립도서관이다. 1922년에 이름을 얻었는데 군주제 폐지 후에도 이름이 바뀌지 않았다. 시칠리아 메시나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갈레리아가 있다.[37]
7. 매체에서
-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오프닝에서 잠시 등장한다. 주인공인 귀도와 친구의 차가 고장나 브레이크 없이 돌진하다가 국왕의 퍼레이드에 끼어들게 되고 그 바람에 국왕보다 먼저 앞서가다가 국왕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귀도와 친구가 국왕으로 착각받아 먼저 환영받으면서 지나갔다. 이때 잘보면 귀도가 사람들에게 비키라면서 손을 흔드는데 그 장면이 나치식 경례와 비슷한 동작이어서 주변 사람들도 다 손으로 나치식 경례를 한다. 그 뒤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본인이 탄 차가 지나가는데 환영하지 않고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 때문에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다.
- 《Hearts of Iron IV》에서는 기본적으로 이탈리아의 국민 정신으로 나와서 안정도를 5% 올려준다. 만약 독일이 카이저 복귀-영국 적대 루트를 탈 시 국가 중점으로 무솔리니를 암살하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국가 지도자가 된다. 물론 일반적인 상황에는 입지가 좁다. By Blood Alone DLC가 추가되면서
초상화가 더 못생겨지고이탈리아로 대평의회 루트를 탈 시 민주주의나 비동맹주의 지도자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비동맹 지도자가 될 시 디시전으로 좀 더 일찍 왕태자에게 양위할 수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를 지도자로 만든 상태에서 로마를 재건하면 아우구스투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로 이름이 바뀌고 초상화도 변경된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독일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무솔리니에게 책임을 물어 원 역사보다 일찍 무솔리니를 잘랐지만 막상 배상금 한 푼 없이 트렌티노알토아디제만 넘겨주는 조건으로 휴전하라고 하여 바돌리오 총리의 뒷목을 잡게 하고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독일은 로마를 불바다로 만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이에 분노한 이탈리아 국민들은 왕정 폐지를 부르짖었고 결국 이에 굴복한 비토리오는 그보다 더한 조건을 인정해야 했다. 전후 경제가 갈수록 안 좋아지는 와중에도 반대 세력 탄압에만 급급하다가 결국 내전이 터지자 황급히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도주한다. 독일의 개입으로 인한 내전 종결 후에 히틀러의 종용과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기를 원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끊이질 않자 아들인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하고 퇴위한다.
8. 둘러보기
[1] 국제연맹을 포함해 미국, 소련, 멕시코, 중국 등 국제사회 다수에게 승인받지 못했다. 영국, 프랑스는 1938년에 이를 승인했으나 1940년 6월에 2년 만에 이를 취소했다. 게다가 이탈리아 왕국군은 마지막까지 에티오피아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해서, 1941년 초 영국군 주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로 진군하는 순간까지도 몇몇 지역은 여전히 하일레 셀라시에를 지지하는 토착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 정부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 후에도 2달 남짓이나 에티오피아 황위는 의회가 합법적으로 짐에게 부여한 칭호라며 버티다가 결국 11월에 와서야 공식적으로 포기한다.[2] 1943년 11월 에티오피아 황위를 공식적으로 포기할 때 같이 포기했다. 다만 알바니아 왕국은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분노한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해 이미 폐위당했던 상태였다. 이후 나치 독일의 괴뢰국인 알바니아 섭정왕국이 세워진다.[3] 보리스 3세의 왕비[4] 움베르토 1세가 결혼 전부터 연상의 여성과 불륜이었는데 결혼 초창기부터 마르게리타에게 걸려서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마르게리타가 어머니에게 돌아가겠다고 난리치다가 시아버지이자 큰아버지이자 통일의 주역 중 하나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싹싹 빌어서 이혼이나 별거는 없었지만 마르게리타는 움베르토 1세를 남편이 아니라 군주로서만 생각하고 받들겠다고 말했고, 덕분에 어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얼음같은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5] 1896년에 단행된 에티오피아 침공전쟁에서 이탈리아 원정군이 대참패해 궤멸당하고 에티오피아에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은 바가 있다. 명불허전 이탈리아군.[6] 볼멘 소리가 나올 법도 한게 이손초 하나를 12차에 걸친 공격에도 뚫지 못하고 60만의 전사자를 내는 추태도 보였지만 어쨌든 전선을 밀어붙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항복을 받아낸 1등 공신은 이탈리아였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쥐트티롤과 기타 지방을 얻었긴 했는데 이게 영 성에 차지 않았던 것.[7] 일단 제대로 무장을 갖춘 인간조차 없었다.[8] 물론 일시적으로 공개 활동만 사라졌을 뿐, 이탈리아 사회당과 이탈리아 공산당 등 좌파는 계속 지하 활동으로 명맥을 잇고 있었고, 나중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다시 성장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왕정 폐지에 앞장선다.[9] 정작 알바니아 침공 당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불필요한 일이라며 반대했다.[10] 실은 이마저도 원래 독일은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리스는 파시스트에 우호적인 세력이 집권 중이라 친독에 가까웠는데 괜히 무솔리니가 전쟁을 거는 바람에 그리스를 우호국으로 잡아둘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탈리아가 개털리고 있다는 것에 비웃을 뿐 개입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리스가 영국 편에 설 가능성이 있었고 그것을 막아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참전한 것이다.[11] 당시 연합국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왕위 유지는 수용할 수 있으나, 그 외의 요구사항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했다.[12]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의 공격적 대외정책에 힘을 실어준 인사 중 한 명이 바로 국왕 본인이었다.[13] 차라리 사보이아제노바, 사보이아아오스타 같은 방계 가문이라도 남아서 저항했으면 모르겠는데 이들도 같이 튀어서 왕실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커졌다. 그나마 직계와 달리 방계는 전쟁 관여 정도에 따라 완전히 입국 금지를 당하지는 않았고, 설령 당했더라도 금방 해제되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경우 직계보다 평판은 낫지만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도긴개긴이다.[14] 이탈리아 파르티잔 활동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보다 더 좌파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이탈리아 왕국군과 대등하게 교전하거나 전쟁 막판에는 무솔리니를 붙잡아서 처형하는 등 전체적인 저항 규모 면에서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정도를 제외한다면 타 저항 조직과의 비교를 불허했다.[15] 그중 북부의 몇몇 주요 도시는 공화제 지지율이 무려 80% 이상 나왔으며, 사보이아 가문의 본거지였던 토리노조차도 공화제 지지율이 더 높았다.[16] 이때 셋째딸인 조반나 공주 태생의 외손자인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차르 시메온 2세는 어머니와 함께 외할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망명해있던 알렉산드리아로 왔다.[17] 공교롭게도 이탈리아 공화국 제헌 헌법이 공포된 다음날이다.[18] 니콜라이 2세의 경우에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처럼 성인기에 즉위하긴 했지만 부황 알렉산드르 3세가 자신의 건강을 과신해서 아들이 30세가 될 즈음부터 본격적인 제왕학 수업을 시키려 했기에 알렉산드르 3세가 그 전에 급서하여 제왕학 수업을 못 받고 26살에 즉위한 점이 참작되긴 한다.[19] 당장 적측인 영국의 조지 6세는 형 에드워드 8세의 무책임한 퇴위로 준비도 안된 상태로 즉위했고 얼마 후 제 2차 세계대전이란 포화에 휘말리나 그는 망명 제의를 거부하고 런던에 남아서 정무를 보고 포화로 피해를 입은 국민들을 독려하는 등 국왕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했다. 또한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왕비도 망명을 거부하고 남편을 내조하고 일반 국민들처럼 배급을 받고 살았으며 그런 부모님을 본 장녀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운전병으로 직접 참전한다. 이런 조지 6세 가족의 모습을 본 국민들은 마지막까지 저항 의지를 꺾이지 않았고 전선에서 같이 싸운 영국 왕실에 큰 신뢰를 가지게 되고 지금도 영국 왕실이 유지되는 주 요인이 되었다.[20] 다만 이곳에 묻혔던 사보이아 가문의 사람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유일했다.[21] 회장 임기 : 2011년 4월 16일 - 2017년 11월 3일[22] 이집트에서 이탈리아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운구할 때 이탈리아 공군기가 사용되었다.[23] 기사[24] 니콜라 1세는 무려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 10명이 딸이였다. 그 중 5명의 공주가 각각 타국의 왕이나 왕자와 결혼한 덕분에 니콜라 1세는 유럽의 시아버지라는 별명이 생겼다. 세르비아 왕국의 국왕이자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초대 국왕인 페타르 1세의 부인 류비카도 니콜라 1세의 장녀로 옐레나의 언니다.[25] 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망명했다가, 아버지의 사후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와 쭉 이탈리아에서 거주했다.[26]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나치 독일의 보복으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27]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카를과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의 3남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외외증손이다. 형들이 자녀없이 죽어서 헤센카셀 가문을 이어받았고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이 단절된 1968년 이후에는 명목상의 헤센 대공위도 계승했다.[28]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마리아 가브리엘라 등.[29] 불가리아 왕정 폐지 후 자녀들을 데리고 아버지가 망명해있던 알렉산드리아로 망명했다가 1951년 다시 에스파냐로 망명했으며, 아들 시메온 2세가 결혼하고 나서는 오빠 움베르토 2세가 먼저 망명해있던 포르투갈의 이스토릴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불가리아 민주화 이후 말년에 불가리아를 방문하기도 했었다.[30] 시메온 2세 등.[31] 오스트리아의 제정복고 논의와 맞물려 전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였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의 결혼이 잠시 거론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의해 수감되었다가 전후 석방되어 잠시 이탈리아에 머물다 프랑스로 돌아가 그곳에서 살았다.[32] 파르마 공국의 마지막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아들. 룩셈부르크의 장 대공의 숙부이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바로 위에 나온 보리스 3세의 외삼촌이다.[33] 현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전질환으로 인해 심한 통증을 앓았고, 그래서 성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할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고종사촌 겸 당이모인 오스트리아의 아델하이트 여대공과 결혼했고, 아버지 움베르토 1세와 어머니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도 친사촌 관계였기 때문. 숙부인 오도네 왕자(할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3남)도 유전질환으로 인해 왜소증을 앓다 20세에 사망했으니 근친혼의 희생자인 셈이다.[34] 다행히도 180cm의 아내의 유전자 덕에 아들은 장신이었다. 대부분 자녀들의 키는 모계 유전자가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많다. 옐레나와의 결혼은 발칸 반도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당시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문제가 되던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질환을 막기 위해 수상 프란체스코 크리스피가 일부러 사보이아 왕조와 피가 섞이지 않은 가문을 추천한 것도 있었다. 다만 몬테네그로의 페트로비치네고시 가문이 당시에는 공가여서 사보이아 왕조보다 격이 한단계 아래였던지라 이탈리아 내에서는 불만이 좀 있었다.[35]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아메데오의 손자이다. 사보이아 왕조의 직계가 움베르토 1세 이후로는 외아들로만 이어졌기 때문에, 계승 서열이 직계 바로 다음 순서에 해당하는 왕족이었다.[36] 이탈리아 왕국은 영국처럼 입헌군주국 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무솔리니의 정치적 위치는 정부수반이었다.[37] 밀라노에 있는 조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 나폴리에 있는 부왕 움베르토 1세 갈레리아에 비하면 크기는 조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