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넘어옴1 != null
''''''{{{#!if 넘어옴2 == null
{{{#!if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AC00 &&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AC00 || 넘어옴1[넘어옴1.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2 != null
, ''''''{{{#!if 넘어옴3 == null
{{{#!if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AC00 &&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AC00 || 넘어옴2[넘어옴2.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3 != null
, ''''''{{{#!if 넘어옴4 == null
{{{#!if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AC00 &&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AC00 || 넘어옴3[넘어옴3.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4 != null
, ''''''{{{#!if 넘어옴5 == null
{{{#!if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AC00 &&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AC00 || 넘어옴4[넘어옴4.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5 != null
, ''''''{{{#!if 넘어옴6 == null
{{{#!if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AC00 &&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AC00 || 넘어옴5[넘어옴5.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6 != null
, ''''''{{{#!if 넘어옴7 == null
{{{#!if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AC00 &&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AC00 || 넘어옴6[넘어옴6.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7 != null
, ''''''{{{#!if 넘어옴8 == null
{{{#!if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AC00 &&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AC00 || 넘어옴7[넘어옴7.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8 != null
, ''''''{{{#!if 넘어옴9 == null
{{{#!if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AC00 &&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AC00 || 넘어옴8[넘어옴8.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9 != null
, ''''''{{{#!if 넘어옴10 == null
{{{#!if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AC00 &&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AC00 || 넘어옴9[넘어옴9.length - 1] > 0xD7A3
은(는)}}}}}}}}}{{{#!if 넘어옴10 != null
, ''''''{{{#!if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AC00 &&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D7A3
{{{#!if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AC00) % 28) == 0
는}}}{{{#!if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AC00) % 28) != 0
은}}}}}}{{{#!if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AC00 || 넘어옴10[넘어옴10.length - 1] > 0xD7A3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if 설명 == null && 리스트 == null
{{{#!if 설명1 == null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아래 문서를}}}{{{#!if 설명1 != null
{{{#!html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아돌프 히틀러(동명이인)]] 문서{{{#!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를}}}{{{#!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동명이인)#s-|]]번 문단을}}}{{{#!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동명이인)#|]] 부분을}}}}}}{{{#!if 설명2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를}}}{{{#!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3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를}}}{{{#!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4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를}}}{{{#!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5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를}}}{{{#!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6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를}}}{{{#!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7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를}}}{{{#!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8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를}}}{{{#!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9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를}}}{{{#!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10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 문서{{{#!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를}}}{{{#!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의 [[#s-|]]번 문단을}}}{{{#!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의 [[#|]] 부분을}}}}}}#!if 설명 == null
{{{#!if 리스트 != null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아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if 리스트 != null
{{{#!if 문서명1 != null
* {{{#!if 설명1 != null
동명이인: }}}[[아돌프 히틀러(동명이인)]] {{{#!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문서의 [[아돌프 히틀러(동명이인)#s-|]]번 문단}}}{{{#!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문서의 [[아돌프 히틀러(동명이인)#|]] 부분}}}}}}{{{#!if 문서명2 != null
* {{{#!if 설명2 != null
: }}}[[]] {{{#!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3 != null
* {{{#!if 설명3 != null
: }}}[[]] {{{#!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4 != null
* {{{#!if 설명4 != null
: }}}[[]] {{{#!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5 != null
* {{{#!if 설명5 != null
: }}}[[]] {{{#!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6 != null
* {{{#!if 설명6 != null
: }}}[[]] {{{#!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7 != null
* {{{#!if 설명7 != null
: }}}[[]] {{{#!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8 != null
* {{{#!if 설명8 != null
: }}}[[]] {{{#!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9 != null
* {{{#!if 설명9 != null
: }}}[[]] {{{#!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문서의 [[#|]] 부분}}}}}}{{{#!if 문서명10 != null
* {{{#!if 설명10 != null
: }}}[[]] {{{#!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문서의 [[#s-|]]번 문단}}}{{{#!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문서의 [[#|]] 부분}}}}}}|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f0200 0%, #dd0200 20%, #dd0200 80%, #bf0200); color: #ffffff; min-height: 34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아돌프 히틀러 | |||
| }}}}}}}}} | ||||
| <colbgcolor=#dd0200,#dd0200><colcolor=#fff> | |
| 출생 | 1889년 4월 20일 |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스라이타니아 브라우나우암인 (現 오스트리아 오버외스터라이히주 브라우나우암인) | |||
| 사망 | 1945년 4월 30일 (향년 56세) | ||
| 나치 독일 베를린 미테구 퓌러붕커 (現 독일 베를린 미테구 미테 프리드리히슈타트[1]) | |||
| 묘소 | 없음[2] | ||
| 재임기간 | 제24대 국가수상 | ||
| 1933년 1월 30일 ~ 1945년 4월 30일 | |||
| 제3대 국가대통령 | |||
| 1934년 8월 2일 ~ 1945년 4월 30일 | |||
| 초대 퓌러 | |||
| 1934년 8월 2일 ~ 1945년 4월 30일 | |||
| 서명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dd0200,#dd02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 (1837년 ~ 1903년)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 (1860년 ~ 1907년) | |
| 배우자 | 에바 브라운 (1945년 4월 29일 결혼)[3] | ||
| 자녀 | 없음[4] | ||
| 학력 | 실업학교 중등과정 (졸업) 실업학교 고등과정 (중퇴) | ||
| 병역 | 육군 상병 (Gefreiter) 만기전역[5] | ||
| 국적 | (1889~1918)(1918~1919) (1919~1925) 무국적 (1925~1932)[6] (1932~1933) (1933~1945) | ||
| 신체 | 175cm[7][8], 77kg | ||
| 종교 | 기독교(가톨릭 추정) → 불명(범신론 추정)[9] | ||
| 최종 당적 | |||
| 상훈 | 1급 철십자 훈장 2급 철십자 훈장 전상장 (Verwundetenabzeichen) | }}}}}}}}} | |
| 공식 초상화 |
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인, 나치 독일의 퓌러.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독재자 및 학살자로 악명높은 인물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지도자로 정치 활동을 하며 두각을 드러냈고 제24대 국가수상과 제3대 국가대통령을 역임하며 집권했다. 재임 중 공화국 체제를 무너뜨리고 나치 독일 체제를 수립한 뒤 퓌러(영도자)가 되어 독재자에 등극했다.
베르사유 조약의 불공평함 그리고 대공황과 실업난으로 인한 독일인들의 불만이 고조된 상황에서 무명에 불과했던 그는 천부적인 연설과 선동 능력을 바탕으로 독일 내에서 인지도를 쌓았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속칭 나치당)의 지도자로서 압도적인 표를 얻어 정권을 잡아 1933년 총리가 되어 히틀러 내각을 구성하고, 수권법을 통과시키는 것을 통해 독일의 민주주의 체제를 무력화시켜 나치 독일을 수립하였으며, 그 이후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으로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병합한 '지도자 겸 국가수상', 일명 퓌러의 자리에 올랐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개시하여 막대한 인명 손실을 초래하고,[10]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홀로코스트, T4 작전 등 독일의 전쟁범죄에 책임이 있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반인륜 전쟁범죄자로 평가받는다.[11]
그는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이던 1945년 4월 30일 칩거하던 퓌러붕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고, 며칠 후 5월 9일, 그의 뒤를 이은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연합국에 항복하며 그가 수립한 나치 독일은 종말을 고했다.
2. 약력
- 1900년 9월 : 국립 초등학교 졸업
- 1904년 9월 : 실업학교 중등과정 졸업
- 1905년 : 실업학교 고등과정 중퇴
- 1914년 ~ 1919년 : 독일 제국군, 바이에른 왕국군 병역 복무
- 1914년 12월 : 독일 제국군 바이에른 왕국군 육군 2급 철십자 훈장 수훈
- 1918년 6월 : 독일 제국군 바이에른 왕국군 육군 1급 철십자 훈장 수훈
- 1919년 ~ 1920년 : 국가방위군 육군 근무
- 1920년 : 국가방위군 육군 상병 만기전역
- 1919년 ~ 1920년 2월 독일 노동자당 조사 및 감시 담당 파견, 전역 및 독일 노동자당 입당
- 1920년 2월~ 1945년 4월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원[12]
- 1921년 1월 ~ 1945년 4월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제2대 당수
- 1932년 3월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후보로 출마 (낙선 / 2위)
- 1933.1. ~ 1945.4. 바이마르 공화국 제24대 국가수상
- 1933.1. ~ 1935.1. 초대 프로이센 자유주 주지사
- 1933.3. ~ 1945.4. 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34.8. ~ 1945.4. 바이마르 공화국 제3대 국가대통령 및 나치 독일 초대 총통
- 1941.12. ~ 1945.4. 제3대 독일군 육군최고사령관
3. 생애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생애#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nopad> |
Ein Staat, der im Zeitalter der Rassenvergiftung sich der Pflege seiner besten rassischen Elemente widmet, muß eines Tages zum Herren der Erde werden. 이후의 시대에서, 인종적 오염을 거부하는 국가가 언젠가는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13]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암인이라는 도시의 알로이스 히틀러라는 평범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가를 꿈꾸며 상업 미술가 활동을 이어나가던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 제국군(바이에른 왕국군)에 자원입대하였다. 독일 제국의 패전 이후 히틀러는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 노동자당에 들어가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원래는 감시역으로 파견되었는데, 정당원이란 사람들이 그냥 불평만 늘어놓는 뜨내기들로 보이니까 본인이 일침을 놓으면서 입당했다.
그는 괴벨스와 함께 청중을 압도하는 연설과 경이로운 선전능력을 발휘하여 동네 소수정당에 불과했던 나치당을 제1당으로 일으켜 세웠다. 정권을 장악한 후 총리직과 새로 얻은 대통령직을 합쳐 퓌러의 자리에 올랐다.
| 1936년 3월 27일 에센에 위치한 크루프 공장에서의 연설[14] |
|
나치 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했으며, 군수산업과 중공업을 집중 육성하고 아우토반과 같은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건설해 독일을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했고, 사회 각 영역에 군국주의적 색채를 강화하는 조치들을 실행했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있고 패배주의에 찌들었던 독일 국민 대부분의 열광을 받기에 충분했고 심지어 '히틀러=독일의 메시아'라는 나치 당국의 선전을 그대로 믿는 국민들도 나올 정도였다. 전쟁을 기피하는 연합국의 소극적인 반응에 힘입어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역을 무혈로 독일에 병합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미래 비전은 아리안의 세계 지배로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폴란드 침공은 1차 대전으로 잃은 실지의 회복은 물론, 독소 동맹으로 동부 전선을 고착하고 서쪽에만 신경쓸 수 있게 됐다. 드디어 연합국의 선전포고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전쟁 초기 나치 독일은 영국, 프랑스의 소극적 자세에 따른 이른바 가짜 전쟁의 전개를 역이용하여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복속시키고, 드디어 양 진영은 격렬한 전면전에 돌입한다. 독일은 마지노 선을 우회해 대대적인 프랑스 침공으로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이른바 전격전으로 단숨에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대륙을 정복하는 데 성공하나, 대전 중반부를 넘어서고부터는 독소전쟁의 전략적 실책에 짐덩이가 되어 버린 주축을 떠안은데다 일본의 도발로 전선이 확대되는 등 악재가 겹쳐 매우 열세에 처하게 된다.[16]
그와 동시에 점령지에서도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점령지 주민 학살을 주도하고 각종 전쟁범죄를 방치, 조장함으로써 그는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레지스탕스와 파르티잔들이 돌아다니며 테러, 사보타주를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파시즘의 압제와 인권 탄압에 질려 내부적으로도 반나치 인사들이 암암리에 생겨났다. 유능한 과학기술자들은 연이어 연합국으로 망명하거나 투항했으며,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을 비롯한 군부 측근들까지 히틀러에 대한 암살과 쿠데타를 시도했다. 결국 전쟁 말기 그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실패와 노르망디 상륙 이후 반 년에 걸친 연합국의 공세에 독일은 주도권을 완전히 잃고 몰락해 버렸다. 서부에 전력을 몰아 회심의 반격을 노린다는 계획도 실패하고 동부에서는 소련군이 빠르게 들어오고 있었다. 계속된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연합군 전략폭격기들이 히틀러가 애써 만들어놓은 산업단지들과 도시들을 전부 초토화시켜 버렸고 독일의 전쟁수행능력도 점점 악화되었다. 군대가 와해되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진격도 후퇴도 없이 그저 "결사항전을 하라"고 떼를 썼다. 지휘에서 전략과 전술이 실종되었고, 물자의 보급도 끊겼다. 이미 전선에는 소년병과 노병이 징집되어 최전방에 끌려가 싸운 지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죽기 1주일 전까지 편성도 제대로 안 된 부대를 데리고 나가서 싸우라고 명령했다.[17] 이윽고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이 베를린을 포위하자 총통 벙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 넣은 독재자의 최후는 허망했다.
패색이 짙어지기 전에는 독일인들에게 거의 신으로 숭배받는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종전 후에는 유럽에서나 전세계적으로도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나치즘에 입각하여 전쟁 중 점령지의 민간인 학살을 명령하는 등 숱한 전쟁 범죄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또한 홀로코스트 같은 인종 학살을 주도했고 T-4 프로그램 같은 장애인 말살 정책을 펴기도 했다.
남미의 칠레, 아르헨티나는 친독 국가였다. 다만 이들은 부득이한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치의 남미 도주 문서 참고. 중동, 아프리카나 인도 등지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이다. 일부는 대놓고 아돌프 히틀러를 옹호하기도 한다. 이들은 영국, 프랑스 같은 서구 열강에게 시달린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 발트 3국, 아이슬란드, 스웨덴 등은 나치 독일의 후원자였다. 핀란드, 발트 3국은 소련에게 많이 시달려 부득이하게 나치와 손을 잡았었고, 아이슬란드는 덴마크 군주인 크리스티안 10세 때문에 화가 났던 아돌프 히틀러가 독립시켜줬기 때문이다. 단 발트 3국을 제외하면 이들 나라들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더라도 아돌프 히틀러를 옹호하거나 긍정적으로 여기진 않는다.[18]
2010년대 후반 들어 유럽의 이슬람 난민들이 유럽에서 범죄 등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자 비주류 민족 및 인종들을 사회에서 배제하려는 극우파들이 유럽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즉, 유럽에서 극우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인데, 그래도 하도 이미지가 시궁창이므로 자신들은 나치가 아니라고 하며 연성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마린 르펜 등이 그렇다.
여담으로, 히틀러는 전 세계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물론 좋은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로 말이다. 히틀러와 똑같은 독일 내의 또다른 대표 제2차 세계 대전의 인물들인 헤르만 괴링, 빌헬름 카이텔, 카를 되니츠,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같은 사람들은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인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괴링은 그나마 나치당 활동 경력이나 권력서열,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삽질들 덕분에 타 인물들보다 인지도가 높지만 나머지는 보통 역사나 군사학 전공자, 덕후들이나 아는 수준이다.
4. 사상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사상#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사상#|]] 부분을 참고하십시오.5. 가족 관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가족 관계#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가족 관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6. 평가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평가#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평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7. 소속 정당
| 소속 | 기간 | 비고 |
| | 1919 - 1923 | 정계 입문 |
| ( ) | 1923 - 1924 | 정당해산 |
| | 1924 - 1945 | 재창당 사망 |
8. 선거 이력
|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32 | 독일 대통령 선거 | 전국 | | 13,418,547 (36.8%) | 낙선 (2위) | [19] |
| 1933.3 |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 비례대표 (북바이에른·슈바벤 비례선거구)[20] | 17,277,180 (43.91%) | 당선 (1위) | 초선[총리][22] | |
| 1933.11 | 나치 독일 총선 | 39,655,244 (92.11%) | 재선[총리] | |||
| 1936 | 44,462,458 (98.8%) | 3선[총리] | ||||
| 1938 | 48,751,587 (98.93%) | 4선[총리][26] |
명성에 비해 원내 입성은 1933년으로 상당히 늦은 편인데, 국적 문제 때문에 그렇다. 1925년 오스트리아 국적을 포기한 이후 6번이나 귀화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고, 7년 후인 1932년 2월 25일에 간신히 독일 국적을 얻어 그 이후 대선과 총선 출마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차피 바이마르 공화국은 일반적인 의원 내각제와 달리 의원이 아니어도 총리와 장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었다.
9. 저서
- 나의 투쟁(1925)
10. 각종 매체의 아돌프 히틀러
10.1. 역사서
히틀러에 대한 평가는 어떤 책이 나왔나로 먼저 볼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를 다룬 서적은 전후 수천 종이 쏟아져 나왔는데 음모론이나 별 신빙성 없거나 흥미 위주의 책을 제외하고 진지하게 다룬 서적으로는 수백여 종이 있고 국내에 발매된 것 중 권위있는 서적은 요아힘 C.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과 이언 커쇼의 《히틀러 1(의지), 2(몰락)》이 있다. 요하임 페스트는 전문 학자는 아니지만 독일의 저명한 방송인 겸 저널리스트로 <프랑크푸르트 자이퉁>에서 주필를 지내고, 독일 공영방송 ZDF의 현대사 편집장을 20년간 지낸 전문가이며, 이언 커쇼는 영국의 역사학 교수이다. 커쇼는 수십년 넘게 준비해서 발표한 히틀러를 다룬 저작으로 영국의 기사 작위도 받았다. 두 작품 모두 히틀러를 다룬 저작 중에 가장 권위가 있고 자세한 대신에 단점이라면 읽기에 매우 부담스러운 분량이다. 요하임 페스트는 개정판 기준 1,400페이지, 이언 커쇼는 2200페이지가 넘는데 특히 커쇼의 책은 페스트의 책보다 책 넓이도 넓어서 양은 거의 두 배에 달한다. 두 작품 모두 읽으면 좋겠지만 하나만을 읽는다면 2000년대에 나온 이언 커쇼의 《히틀러》 하나만 봐도 무리가 없다. 반대로 히틀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가 쓴 《히틀러 여비서와 함께 한 마지막 3년》을 읽어보기 바란다.-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은 현재 한국에 여러 권 정발되어 있다.
- 아돌프 히틀러 사후 포로로 잡힌 히틀러의 전속 부관인 오토 귄셰와 하인츠 링에를 심문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의 순간을 재구성한 《히틀러북》이 존재한다. 이는 스탈린의 개인 문서로 분류되었다가 소련 붕괴 이후 해금되었고, 2003년 독일 현대사연구소의 마티아스 울과 헨릭 에벨레가 이 파일을 찾아내어 출판했다. 한국에는 2008년 루비박스가 정발했으나 2017년 현재 절판되었다.
- 생각의 나무에서 2008년에 정발한 독일 역사학자 겸 저널리스트 라파엘 젤리히만의 《아돌프 히틀러: 집단 애국의 탄생》이 있다. 2017년 현재 절판 상태이다.
- 요아힘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이 1998년에 1권, 2000년에 2권이 정발되었다. 나치 시대에 대한 의도주의 연구의 결과물로 이언 커쇼의 《히틀러》가 나오기 이전까지 아돌프 히틀러 평전의 대표적인 물건으로 거론되었다. 페스트의 책은 1970년대에 먼저 나왔고, 1990년대 동구권 기록이 해제되면서 개정판이 나왔지만 그래도 이언 커쇼의 책보다 이전이며 전체적으로 무리는 없지만 현재의 연구와 사실이 약간 다른 면도 있다. 그외에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를 다룬 요아힘 페스트의 《아돌프 히틀러, 최후의 14일》도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영화 <몰락>의 원전이 되었다. 후자는 2005년 교양인에서 정발했으나 2017년 현재 절판되었다.
- 이언 커쇼의 《히틀러》가 존재한다. 2010년 1월 교양인에서 정발한 걸작으로 나치 시대 전반에 대한 기능주의 연구를 집대성한 결과물인데 권당 50,000원씩, 2권에 100,000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엄청난 분량의 압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나치 시대와 아돌프 히틀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저서이다. 이전까지의 히틀러 연구들이 무비판적으로 인용했던 사료들의 신뢰성을 철저히 검증하여 히틀러와 나치시대 연구에 큰 획을 그은 저서이다. 사실 이언 커쇼 이전에 출간된 히틀러 전기들은 이제 와서는 굳이 찾아볼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커쇼는 이 연구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 이언 커쇼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자 그의 스승인 마르틴 브로샤트 교수의 《아돌프 히틀러 국가》 역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 트라우들 융에의 《히틀러 여비서와 함께 한 마지막 3년》,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인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도 한국에서 정발된 상태이다.
- 평전이 아닌 또 다른 저명한 서적으로는 시대가 낳은 쌍생아 스탈린과 히틀러를 동시에 다룬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Dictators)이 있다. 리처드 오버리는 역사학자로 독소전쟁을 다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의 저자이기도 하며 이 부분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 1930년 1월 1일부터 1월 30일까지 히틀러의 집권 과정을 다룬 예일대 교수 헨리 애슈비 터너 2세가 쓴 《히틀러의 30일》도 있다.
- 만화가 김태권이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기를 다룬 《히틀러의 성공시대》를 그렸으나, 역사 왜곡이 심하다 보니 평가가 심히 안 좋다.
- 2019년, 퓰리처 상을 받은 미국의 작가 존 톨랜드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이 페이퍼로드를 통해서 출판되었다. 과거의 물건이라 이후 이언 커쇼의 평전에 비하면 학술적인 질은 떨어지는 편이지만 히틀러가 걸어온 생애의 발자국 하나까지 죄다 살리려 한 작가의 열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책도 2권 짜리에 각각 40,000원 구성으로 금전적인 부담은 적지 않지만 문체는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편이라서 히틀러에 대한 입문용으로는 괜찮으며 히틀러에 대한 흥미로운 잡썰들도 꽤나 많이 실려 있아서 그런 잡썰들을 읽는 재미도 있다. 문제는 앞서 서술되었듯, '결정판'이라는 이름이 안어울리게 지금은 꽤 낡은 책인 데다가,[27] 저자가 전문 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료 해석 등에 한계가 뚜렷하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 독일 역사학자 하랄트 슈테판이 지은 《아돌프 히틀러》도 있다. 원서는 독일에서 1983년에 나온 책으로 1997년 한길사에서 정발했다. 히틀러의 전기라기 보단,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히틀러의 정치적 측면과 세계관을 주로 분석했다.
10.2. 창작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창작물#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창작물#|]]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1. 여담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여담#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돌프 히틀러/여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2. 어록
저지른 악행이 커서 그런지 히틀러의 어록 중에서는 영미권에서 창조된 것이나, 한국 웹에서만 나오는 것 등 히틀러가 말한 적도 없는 가짜 어록들이 다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히틀러는 스스로를 민족의 영도자로 묘사하는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 떠도는 어록을 보면 간혹 영화 속 악당이 자기 죄를 자백하는 수준의 엉터리 가짜 어록들이 즐비해있다. 예를 들면 빵과 서커스 운운하며 전 국민을 조롱하는 말을 히틀러가 했다는 내용은, 영미권에선 오토 슈트라서와 견해 차에서 노동자들의 관심사는 그정도 뿐이라는 뉘앙스로 내뱉은 것으로만 등장하나,[28] 독일어로는 해당 내용을 찾을 수 없는, 독일 비실재→영미권 창조→한국 곡해 어록이다.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인식과 달리, 히틀러와 나치당은 독일 국민들의 지지에 굉장히 민감했고 독일인들은 히틀러와 나치당의 악행이 자신들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는 한 묵인한쪽에 가깝다.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기 직전 총선에선 오히려 나치당의 득표율은 떨어진 상황이었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으로 철저하게 공산당과 사민당을 억압하며 치루어진 선거에서조차 과반을 넘지 못했다. 힌덴부르크 사후, 히틀러에게 정식으로 지도자 겸 국가 총리(Führer und Reichskanzler)를 부여하도록 한 국가 지도자법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 노동자 계층이 다수 차지하고 있던 함부르크와 아헨 등 일부 지방에서는 찬성표가 70%를 못 미치기도 했고[29] 히틀러가 주도한 전쟁 역시 독일 국민들에게 그리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오히려 독일 국민들은 의심과 걱정의 눈으로 히틀러를 바라보았고, 제 1차 세계대전때와 같은 애국주의 열풍이 불어 모병소마다 청년들이 붐비는 광경은 연출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가 정말로 독일 국민들을 깔보고 무시하는 말을 했다면 권력이 위태로우면 위태로워지지 그에게 득이 될 것은 전혀 없었다.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미친듯이 날뛴다던가 독일인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그런 말을 한 건 1945년 패전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한 이후 일이다.
그리고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임에도 오스트리아 독일어의 문법이 아닌 표준 독일어 문법으로 선전했으며, 이는 독일 국민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함이었다.
Stärke liegt nicht in der Verteidigung sondern im Angriff. 국력은 방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공격에 있다. |
Die große Masse der Menschen wird eher einer großen Lüge glauben als einer kleinen. 대중은 작은 거짓말보다는 큰 거짓말을 믿게 된다. 저서 《나의 투쟁》에서 |
삶이란 뭐요? 삶은 곧 국가요. 개인은 어떻든 죽어야 하지 않소?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자살하지 않고 소련에게 항복하였다는 전문을 듣고.[31] |
그 때,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한 투쟁이 이 싸움의 주 목표가 되었습니다. 저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이 전쟁에 참가하며, 이 역병이 독일인들의 일상에서 완전히 쫓겨날 때까지 절대 쉬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오직 하나의 승리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아니면 독일 국민! 승리자는 독일 국민이 될 것입니다! 1933년 2월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Sportpalast) 연설 중 |
Ich habe es feierlich versichert und wiederhole es, daß wir von diesen Weststaaten nichts fordern und nie etwas fordern werden. Ich habe versichert, daß die Grenze zwischen Frankreich und Deutschland eine endgültige ist. Ich habe England immer wieder eine Freundschaft und, wenn notwendig, das engste Zusammengehen angeboten. Aber Liebe kann nicht nur von einer Seite geboten werden, sie muß von der anderen ihre Erwiderung finden. Deutschland hat keine Interessen im Westen. Unser Westwall ist zugleich für alle Zeiten die Grenze des Reiches. Wir haben auch keinerlei Ziel für die Zukunft und diese Einstellung des Reiches wird sich nicht mehr ändern. 저는 엄숙히 약속하건데, 우리는 서방국가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프랑스와 독일 간 국경은 확정되었음을 보증했습니다. 저는 영국에 대해 여러 차례 우정을, 그리고 필요하다면 가장 긴밀한 협력을 제안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한쪽에서만 줄 수 있은게 아니며, 반드시 반대쪽에서도 응답이 있어야합니다. 독일은 서쪽에 아무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우리의 서부 방벽은 영원한 독일국의 국경입니다. 우리는 또한 미래에 대해 아무런 목표도 없으며, 독일국의 이러한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Als Nationalsozialist und deutscher Soldat gehe ich in diesen Kampf mit einem starken Herzen! Mein ganzes Leben war nichts anderes als ein einziger Kampf für mein Volk, für seine Wiederauferstehung, für Deutschland,und über diesem Kampf stand nur ein Bekenntnis: der Glauben an dieses Volk! Ein Wort habe ich nie kennengelernt, es heißt: Kapitulation.(...)Deutschland – Sieg Heil! 국가사회주의자이자 독일 병사로서 저는 굳건한 마음으로 이 전쟁에 뛰어듭니다. 제 인생은 오직 독일 민족과 독일 민족의 부활 그리고 독일을 위해 싸워온 투쟁이었으며, 그 투쟁을 지탱한 단 하나의 신념은 바로 독일 민족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제가 결코 알지 못하는 단 하나의 단어는 바로 '항복'입니다.(중략) 독일이여, 승리하라! 1939년 9월 1일, 오전 10시 베를린 크롤 하우스에서 폴란드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며 # |
우리는 우리 앞에 독일이 있음을 알고, 독일은 우리와 함께 행진하며, 독일은 우리를 따릅니다! 1934년 9월 7일 제6차 나치당 전당대회 히틀러 유켄트 연설 중 보기 (4분 7초 부근부터) |
국가의 권위는 절대 스스로 종결되지 않는다. 어떠한 종류의 폭정이라 하더라도 불가침화되고 신성화된다. 만약 국가의 권력수단이 민중을 폐허로 인도한다면, 저항은 모든 개개인 시민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의무이다. 저서 《나의 투쟁》에서 |
외교의 목표는 국가의 실질적인 생존이 되어야지, 절대로 영웅적인 몰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목표에 이르는 모든 길은 선한 것인데 반해, 그 실패는 범죄적인 직무유기로 봐야 한다. 저서 《나의 투쟁》에서[32] |
스포츠적이고 기사다운 시합은 인간의 최고의 자질을 깨웁니다. 그것은 이해와 존중 안에서 전투원(선수)들을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단합시킵니다. 그것은 또한 평화의 정신 안에서 국가들을 결속시키는 것을 돕습니다. 그것이 올림픽 성화가 죽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회사. 당시 올림픽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작성해준 것으로 추정된다. |
친애하는 동지들, 독일의 노동자 여러분, 나도 여러분과 같은 계급 출신입니다. 지난 4년간의 전쟁 동안 여러분에 속해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불굴의 정신을 배우고 배고픔을 이겨내며 여기까지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민족과 민족 사이의 영원한 증오의 투쟁은 어떤 민족에 의해 조성됩니다. 이들은 뿌리없는 풀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작은 집단입니다. 이들은 민중을 대립으로 몰아넣고 평화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여러 곳에 정착해 살면서도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고향을 가지지 않습니다. 오늘은 베를린, 내일은 브뤼셀, 모래는 파리, 프라하, 빈, 혹은 런던, 어디든 그들은 정착합니다. 어디서든 돈벌이를 하고 있는 유대인이야 말로 국제적인 반역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국민은 토지에 묶여있고, 토지는 국가에 묶여있으며, 국민은 국가의 생활 가능성에 묶여있습니다. 나에게 용기를 준 것은 지식 계층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두 계급의 국민인 농민과 노동자들입니다. 여기 있는 몇 명은 공산당을 박멸한 나를 용서할 수 없겠지만, 난 다른 정당들도 없애버렸습니다! 내가 정권을 잡기 전에는 600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37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이는 9개월 만에 달성한 놀라운 성과입니다. 지난 9개월 동안, 나는 독일 국민을 위해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하려 노력했습니다. 정치인이 열심히 직무에 전념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독일 국민들의 소망은 단 하나, 우리의 방식대로 행복을 추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간섭을 하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간섭을 하지 않으니, 다른 나라들도 우리를 간섭하지 마십시오. 지식계급, 중산 계급, 노동 계급이라는 단어에 나는 관심없습니다. 나는 독일 국민들에게만 관심이 있고, 독일 국민들을 위해서만 힘을 쏟을 것입니다. 11월 12일, 독일 국민들의 의사를 전 세계에 보여줍시다! |
베르사유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은 독일의 볼셰비즘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평화 조약과 볼셰비즘이라는 것은 한 괴물에게 달려 있는 두개의 머리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참수해버려야 합니다! 사회주의는 공동의 이익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용어를 훔쳐서 본래의 의미를 혼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사회주의'를 빼앗겠습니다. 사회주의란 본래 고대 아리아인과 게르만인들의 제도입니다. 우리 독일의 선조들은 그 지역의 땅을 공동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로부터 공동의 이익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로 둔갑할 권리가 없습니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개인이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인격을 부정하지도 않으며 또한 애국적입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자유당'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부터 우리는 스스로를 '국가사회주의자'라고 부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국제주의자 또한 아닙니다. 우리의 사회주의는 오로지 국가적입니다. 우리는 인종의 연대를 바탕으로 국가가 생산적 계층의 정당한 주장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국가와 인종은 하나입니다. |
Deutsche! Männer und Frauen! In wenigen Tagen hat sich innerhalb der deutschen Volksgemeinschaft eine Umwälzung vollzogen, die wir heute wohl in ihrem Umfange sehen, deren Bedeutung aber erst spätere Geschlechter ganz ermessen werden. 독일의 남녀들이여, 짧은 시간 동안, 독일 민족 공동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 우리는 그 변화의 규모를 목도하고 있지만, 그 진가는 후손들이 완전히 이해할 것이다. Ich kann somit in dieser Stunde dem deutschen Volk die größte Vollzugsmeldung meines Lebens abstatten. Als Führer und Kanzler der deutschen Nation und des Reiches melde ich vor der deutschen Geschichte nunmehr den Eintritt meiner Heimat in das Deutsche Reich! 나는 이 순간, 독일 국민들에게 내 생애 가장 위대한 사명의 완수를 보고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독일 국민과 독일국의 총통이자 국가수상으로서 내 조국 오스트리아가 독일국에 합병되었음을 선언한다! |
큰 거짓말이 잦아지면 곧 사실이 될 것이다. 출처 불명 |
위대한 거짓말쟁이들은 위대한 마법사들이다. 출처 불명 |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 어떤 동맹도 무의미하며 무가치하다. 출처 불명 |
내가 만약 오늘 혁명가로서 여기에 서게 된다면, 그것은 혁명에 맞선 혁명가로서다. 출처 불명 |
독일은 세계 최강국이 되거나, 혹은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출처 불명 |
우리의 사회복지제도는 그저 단순한 자선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자들에게 "제발 가난한 사람들에게 뭔가 주시죠"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독일 국민 여러분, 서로 도우십시오. 모두가 도와야 합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항상 당신보다 더 불행한 상황에 빠진 (독일)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독일인으로써 같은 동포인 그 사람을 돕고 싶어해야 합니다." |
13. 관련 이미지
| ▲ 대전 발발 불과 1년 전인 1938년의 모습. |
| ▲ 타임지에 히틀러가 선정되었을 때의 표지. 그가 악인임을 잘 드러내는 표지이다.[37] |
| ▲ 히틀러의 초상화가 있는 동전과 우표 | |
| ▲ 히틀러의 초상화가 있는 Alpina 회중시계 |
14. 참고 자료
- Adolf Hitler. (1925). 《Mein Kampf》 / 역자 황성모. (2014). 《나의 투쟁》. 동서문화사
- Rißmann, Michael (2001). Hitlers Gott. Vorsehungsglaube und Sendungsbewußtsein des deutschen Diktators
- Norman H. Baynes, ed., The Speeches of Adolf Hitler, April 1922-August 1939. Vol. 1.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42.
- Speer, Albert. <Inside the Third Reich: Memoirs>. New York: Simon & Schuster, 1997
15. 둘러보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0101, #cc0000 20%, #cc0000 80%, #b70101);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000> 초대 | 제2대 | 제3대 | |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아돌프 히틀러 | 카를 되니츠 | ||
|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41212, #000000 20%, #000000 80%, #141212); color: #f3e989;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3e989>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 필리프 샤이데만 | 구스타프 바우어 | 헤르만 뮐러 | 콘스탄틴 페렌바흐 | 요제프 비르트 | |
| <rowcolor=#f3e989> 제15대 |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
| 빌헬름 쿠노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빌헬름 마르크스 | 한스 루터 | 빌헬름 마르크스 | |
| <rowcolor=#f3e989> 제20대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 헤르만 뮐러 | 하인리히 브뤼닝 | 프란츠 폰 파펜 | 쿠르트 폰 슐라이허 | 아돌프 히틀러 |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0101, #cc0000 20%, #cc0000 80%, #b70101); color: #fff; min-height: 34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000> 제24대 | 제25대 | 제26대 | |
| 아돌프 히틀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 ||
| }}}}}}}}} | ||||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수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 안톤 드렉슬러 | 아돌프 히틀러 | 마르틴 보어만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 #fff 20%, #fff 80%, #fff); color: #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베르너 폰 프리치 | 발터 폰 브라우히치 | 아돌프 히틀러 | 페르디난트 쇠르너 | }}}}}}}}} |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 ||||
| 지도자들 & 혁명가들 부문 # | |||||
| 시어도어 루스벨트 | 블라디미르 레닌 | 마거릿 생어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엘리너 루스벨트 | |
| 아돌프 히틀러 | 윈스턴 처칠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 다비드 벤구리온 | 마오쩌둥 | |
| 마틴 루터 킹 | 루홀라 호메이니 | 마거릿 대처 | 로널드 레이건 | 미하일 고르바초프 | |
| 레흐 바웬사 | 넬슨 만델라 | 요한 바오로 2세 | 호찌민 | 탱크맨 | |
| 같이 보기: 과학자 & 사상가 부문, 예술가 & 연예인 부문, 건설자 & 거인 부문, 영웅 & 아이콘 부문 | }}}}}}}}}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 | <tablebordercolor=#e90606> | 올해의 인물 (1930년대) Time Person of the Year 1930's |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nopad> | ||||
| <rowcolor=#fff> 1930년 소금 행진 | 1931년 3선의 총리 | 1932년 1932년 미 대선 | 1933년 뉴딜 정책 | 1934년 뉴딜 정책 | |
| <nopad> | |||||
| <rowcolor=#fff> 1935년 이탈리아의 침략 | 1936년 세 황제의 해 | 1937년 와 중일전쟁 | 1938년 팽창 야욕 | 1939년 공산주의의 팽창 | |
| | |||||
| 추축국 주요 지도자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
| 아돌프 히틀러†S ,총통, | 빌헬름 카이텔C ,OKW 최고사령관, | 파울 요제프 괴벨스†S ,선전부 장관/총리, | 헤르만 괴링CS ,공군 제국원수, | |
| 하인리히 힘러S ,SS 국가지도자, | 에리히 레더C ,전쟁해군 원수, | 카를 되니츠C ,전쟁해군 원수/플렌스부르크 정부 대통령, | ||
| | ||||
| 에마누엘레 3세-> ,국왕, | 베니토 무솔리니† ,두체/총리, | 피에트로 바돌리오-> ,총리, | ||
| | ||||
| 히로히토 ,천황, | 고노에 후미마로S ,내각총리대신, | 도조 히데키C ,내각총리대신/육군대신, | 스즈키 간타로 ,내각총리대신, | |
| | ||||
|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 | 살러시 페렌츠C ,총리, | |||
| | ||||
| 미하이 1세-> ,국왕, | 이온 안토네스쿠C ,총리, | |||
| | ||||
| 보리스 3세† ,국왕, | 시메온 2세 ,국왕, | |||
| (-> : 전향 혹은 전향 시도 | † : 종전 이전 사망 | C : 전후 재판을 받음 | S : 자살 ) | ||||
| }}}}}}}}} | ||||
[1] 더 자세히는 빌헬름거리 88번지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문 요양원 앞마당 지하이다. 다만 방공호는 동독 시절 철저하게 매립되어 사라졌기에 지하라고 하기에는 살짝 애매하다.[2] 시체는 1946년에서야 겨우 전부 수습되어 비밀리에 탄약 상자에 넣어 매장되었는데 스탈린은 그의 추종자들이 이 시체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보안에 상당한 애를 썼다. 결국 이 탄약 상자는 독일과 소련 각지를 떠돌며 무려 8번이나 이장되다 결국 1970년 4월 4일 동독의 KGB 지부에 명령이 하달되어 두개골이나 이 등 신원 확인이 가능한 일부분만 소련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화장된 뒤 작센안할트주, 마그데부르크 근교 엘베강에 뿌려졌다.[3] 이미 오랫동안 사실혼 관계라서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로 대접을 받았다. 간결한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인 4월 30일에 히틀러와 같이 자살했다.[4] 장마리 로레가 자신이 히틀러의 아들이라 주장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다만 하인츠 히틀러, 윌리엄 패트릭 스튜어트휴스턴 등 조카는 있었다.[5] 독일 제국 바이에른군(1914년 ~ 1919년), 국가방위군 육군 (1919년 ~ 1920년).[6]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에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내내 독일 국적을 가지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국적과 무국적 신분으로 살았다.[7] 1914년 병역판정 기록[8] 당시 독일 남성 평균키인 173cm보다 컸다.[9] 히틀러의 연설과 주변인들과의 발언을 토대로 그의 종교관을 분석한 Richard Weikart 교수는 히틀러가 사회진화론적으로 이해한 자연의 질서를 신과 동일시 했다는 점에서 범신론자라고 분석했다. #[10] 아돌프 히틀러 치하에서 학살한 사람 숫자가 최대 추정치로는 30,000,000명이라는 견해도 있다. 유대인 뿐 만 아니라 폴란드 민간인, 소련 민간인, 소련 전쟁포로들도 무수히 많이 학살했기 때문이다.[11] 전쟁 막바지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전쟁 이후 전범재판을 받지 못한 것 뿐이지, 수많은 이들의 증언과 기록들만 보더라도 그가 명백히 다수의 전범행위들을 해왔다는 건 확실하다. 만약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지 않고 살아서 체포되었다면 즉시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다른 나치 고위급 인물들처럼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12] 1921년 독일 노동자당의 당명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바꾸었다.[13] 이는 다소 의역한 것이며, 직역하자면 "인종적 오염의 시대에서, 자신의 가장 우수한 인종적 요소를 보호하고 키우는 데 전념하는 국가가 언젠가는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정도가 된다.[14] 이 연설은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3년 차이자, 이틀 후에 1936년 총선 및 라인란트 재무장에 관한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던 시점에서 이루어져 있다. 라인란트 재무장 국민 투표는 이미 강행한 후에 사후 동의를 받는 투표였고, 나치 독일의 총선 역시 NSDAP가 제시한 단일 후보 명단에 대한 찬반 투표였기 때문에 선거 연설인데도 '찬성' 투표를 해달라고 말하고 있다. 나치 정권이 집권한 이후의 선거 연설이기 때문에 지난 3년간의 히틀러 정권이 이룩한 업적을 독일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이 주가 되고 있다. 나치 정권의 공격적인 대외 정책에 대한 국제 사회의 규탄을 독일 민족의 자존심으로 묵살할 것을 호소하고, 그런 자존심을 되찾아준 자신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는 히틀러 특유의 궤변이 잘 드러나는 연설이다. 이렇게 실시된 선거에서 나치당은 무려 98.8%에 달하는 찬성표를 얻었다.[번역관련] 이 영상을 포함한 상당수 유튜브 내 나치 영상들의 번역체를 보면 ~이다, ~라 로 끝나는 마치 전제군주정 군주가 백성들에게 혹은 군대 간부가 병사들에게 하달하는 식의 문어체 반말투로 작성되어 있다. 다만 내셔널지오그래픽과 같은 전문 매체에서는 반존대로 연설하는 것으로 번역하는 편이고, 이에 따라 나무위키에 추가된 번역에서는 격식차린 존댓말로 옮겼다. 단 원문에서 비칭 2인칭 Du 사용이나('너'에 가까운 뜻이나 가벼운 표현이라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지 보통 '그대들'로 현지화하는 경우가 많다.) 지시문에서 영어의 Please에 해당하는 Bitte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문의 어투를 전달하는 것을 중시하는 아마추어 번역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문어체 반말투에 가까운 듯하다.(유튜브에서 활동하는 상당수 아마추어 번역가들이 영어권 유튜버나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말투를 구어체 반말로 번역하는 것과도 비슷하다.)[16]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벌이고 나서 루즈벨트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동맹인 추축국은 다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심지어 히틀러는 미군의 참전이 불러올 파멸을 깨닫지 못하고 일본의 대미 공습을 칭찬하기까지 했다.[17] 명령을 받은 펠릭스 슈타이너는 이것이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고는 투항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분노하는 장면이 유명하다.[18] 그도 그럴것이 핀란드는 전쟁 막바지 연합국의 압력에 독일과 전쟁을 벌였다. 물론 핀란드군이나 독일군 양쪽 전부 어제까지 같이 소련과 싸우던 전우였기에 처음엔 서로 눈감아 주었지만 배반자를 벌하라고 날뛴 히틀러덕에 독일군이 철수 하며 유대인을 학살하거나 마을을 방화하는 범죄를 저질렀다.[19] 1차 투표 11,339,446 (30.1%) 득표[20] 제24선거구[총리] [22] 히틀러 내각 출범[총리] [총리] [총리] [26] 1945.04.30 사망으로 궐위[27] 국내에서 늦게 나와서 그렇지 원저는 1976년 미국에서 나온 책이다.[28] "Your socialism is Marxism pure and simple. You see, the great mass of workers only wants bread and circuses. Ideas are not accessible to them and we cannot hope to win them over. We attach ourselves to the fringe, the race of lords, which did not grow through a miserabilist doctrine and knows by the virtue of its own character that it is called to rule, and rule without weakness over the masses of beings."(당신들의 사회주의는 순수하고 단순한 마르크스주의이다. 알다시피,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빵과 서커스만을 원한다. 그들에게 아이디어는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비참한 교리를 통해 성장하지 않았고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 통치하고 약함없이 수많은 존재를 통치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있는 영주 종족 인 변방에 우리 자신을 붙인다.)[29] 당시 나치 독일의 투표는 반대에 표시하지 않은 모든 표를 찬성표로 카운트하는 수법을 자행했다.[30] 한국에서는 뜬금없이 웹툰 선천적 얼간이들로 재조명되었다. 선천적 얼간이들/줄거리 19화 참고.[31] 이어 히틀러는 파울루스가 개인은 어떻게든 죽는데 눈물의 골짜기에 빠져 고통으로부터 군인들이 해방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렸다고 맹비난한다.[32] 타 국가에서의 외교에 대해서 결코 패배하는 일이 없이 승리하는 일만이 있어야 하고 이것이 안 된다면 그것은 운이 나쁜 것이 아닌 직무유기로 봐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타 국가와의 외교관계에서 을의 입장에 놓이는 것은 절대 있어선 안되고, 영웅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보다는 국가의 부흥을 위한 갑의 방향을 향하는 것이 절대선이라는 것이다. 말 자체만 놓고 보면 정치현실주의의 핵심을 찌르는 명언으로 전혀 흠잡을 곳이 없지만, 정작 히틀러는 정반대로 (나치의 관점에서) 영웅적인 몰락을 거쳐 국가의 실질적인 멸망으로 향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실 1930년대 시점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질적인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보기도 어려웠으며, 정말 생존이 위협받는 수준이면 딱 필요한 예방전쟁을 하면 했지 타국에 쳐들어가서 땅따먹기를 할 여력도 없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시절의 독일 제국이나 현대 이스라엘처럼 정말로 국가의 실질적인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국가들이 보면 코웃음칠 소리. 자국의 역량을 과대평가해 파멸을 자초한 것도 잘못이지만, 애초에 '영웅적인 몰락'을 각오하고 '실질적인 생존'을 위해 투쟁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으니 엉뚱한 피해 망상에 쫓겨 세계에 민폐를 끼친 셈이다.[33] 이날 수권법 통과로 독일이 나치당 일당 체제로 변경된 이후 치러진 첫 총선과 앞선 10월 독일의 국제연맹 탈퇴에 대한 찬반 국민 투표가 진행되었다. 연설 말미에 타 국가에게 독일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쏘아붙인 것은 국제 연맹 탈퇴 찬반 투표를 노린 것이다.[34] 읽어보면 알겠지만 몇몇 부분에선 말이 굉장히 앞뒤가 안맞고 내용이 제멋대로다. 실제로 히틀러의 연설은 질적인 측면에서는 같은 추축국의 국가원수였던 베니토 무솔리니의 연설과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히틀러가 연설의 대가 중 하나로서 알려져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몸짓과 퍼포먼스를 잘 활용했기도 하지만, 조력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괴벨스는 독일 전역에 라디오를 보급하고, 히틀러의 정책을 뛰어난 연설을 통해 활력을 얻게 했다. 또한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연설장처럼 히틀러가 연설을 할 장소를 계획할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되도록 설계함으로써 히틀러를 신격화 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35] 아이러니하게도 나치즘, 아니 파시즘 자체가 본격적인 전시 동원 체제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좌파 사회주의적인 면모도 있었다. 괜히 "양극단은 서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이는 파시즘이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중심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나치당의 공식 당명이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인 것에서 알 수 있다. 애초에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노동계급의 연대를 강조하고, 과학적 합리주의를 중시하며 체제를 위한 절대적인 희생을 미덕으로 삼는 등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단지 방법론적으로 한쪽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반대쪽은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국제주의를 채택했을 뿐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 차이가 제1세계 민주국가나 제3세계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파시즘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함으로써 수명을 50년 가량 더 연장시켜주었다.[36] 나치가 조작질을 많이 해서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히틀러는 자기가 나중에 학살한 공산주의자들이나 유대인들과도 친하게 지낸 적이 있었고, 실제로 어느 시점까지는 나치 내부에 좌파 사회주의적 성향을 띠거나 유대인 혈통을 가지고 있는 인사들도 몇몇 있었다. 이들이 모두 장검의 밤을 비롯한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숙청되서 그렇지.[37] 아래에는 "그 불경한 오르간 연주자로부터 울려 퍼지는 증오의 찬가."라고 적혀있다.
분류
- 아돌프 히틀러
- 타임지 올해의 인물
- 1889년 출생
- 1945년 사망
- 독일의 화가
- 독일의 남성 작가
-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 화가 출신 정치인
- 당 대표/독일
- 나치당원
- 나치 독일 육군 최고사령관
- 제1차 세계 대전/군인
- 독일의 자살한 인물
- 자살한 나치 관련자
- 자살한 정치인
- 자살한 작가
- 총기에 죽은 인물
- 독일의 테러 피해자
- 오스트리아의 정치인
- 오스트리아계 독일인
- 독일로 귀화한 인물
- 올림픽 개회 선언자
- 건국자
- 유럽의 독재자
- 오버외스터라이히 주 출신 인물
- 인터넷 밈/정치인
- 제2차 세계 대전/사망자
- 슈투름압타일룽/인물
- 인터넷 밈/역사
- 임기중 죽은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