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Franz Paul Stangl 프란츠 파울 슈탕글 |
출생 | 1908년 3월 26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알트뮌스터 | |
사망 | 1971년 6월 28일 (향년 63세) |
독일 뒤셀도르프 | |
복무 | 슈츠슈타펠 (1938년 ~ 1945년) |
최종계급 | 슈츠슈타펠 대위 (최상급돌격지도자)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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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츠 슈탕글 (Franz Stangl) |
2. 상세
루돌프 회스는 알아도 프란츠 슈탕글, 크리스티안 비르트 등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유는 간단한데, 이들은 홀로코스트의 대표격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의 소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10만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루돌프 회스 못지않게, 90만을 학살한 프란츠 슈탕글, 60만명 이상을 학살한 크리스티안 비르트의 악행도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다.심지어 이들은 1만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던 아몬 괴트보다도 알려져 있지 않다. 아몬 괴트 때문에 사망한 사람의 수는 절멸수용소들에서 벌어진 학살 규모에 비해 훨씬 적지만, 이 인간은 그 특유의 잔혹한 성격으로 인한 무작위 처형, 그리고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통해 악명이 널리 전해졌다. 어쨌든 이 둘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비해 그 악명이 가장 덜 알려진 인물들일 것이다.
어느 수준을 넘어선 죽음에 대해선 악행의 정도, 비극의 정도를 제대로 가늠하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1만명을 죽인 아몬 괴트, 110만을 죽인 루돌프 회스의 악행 중 무엇이 더 나쁜 것인지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아몬괴트도 알면서 더 많은 사람을 죽인 프란츠 슈탕글이나 크리스티안 비르트를 모르는 건 안된다'같은 의견은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전범으로서 이 둘의 악명을 기억하는 것도 도의적으로 균형있는 일일 것이다.
3. 초기 행적
프란츠 슈탕글은 1908년 오스트리아 알트뮌스터의 가난한 야간 경비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대단히 나빴다고 했는데, 1916년 아버지가 영양실조로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만 했다. 이런 연유로 슈탕글은 아버지가 입었던 제복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처음 그는 지터라는 악기를 배워 교습 강사로 일하다 15세 때 방직공의 도제로 들어가 일했다. 하지만 방직업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경찰에 취직한다.4. 오스트리아 나치당에서의 행적
슈탕글은 1931년에 오스트리아 경찰에 들어갔다. 당시 위법단체였던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당원으로 2년간 재적했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이에 대해 슈탕글은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될 때 구 경찰요원들이 체포되자 이를 피하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했던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당원이 되어 기금도 냈다고 후에 실토했다. 어쨌든 슈탕글은 검거열풍에도 살아남아 오스트리아 경찰의 간부직을 유지했다.1940년 나치가 T-4 프로그램을 시작하던 당시, 슈탕글은 몸담고 있던 린츠 게슈타포의 상관과 트러블이 많았다.[1]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던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원한다고 간청했고, 결국 T-4 프로그램 시설의 보안 책임자 자리를 맡게 되었고 하트하임 안락사 센터로 발령받았다. 이때 그는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하인리히 힘러의 눈에 들었다.
1942년 3월 T-4 프로그램이 거의 종료되었을 때, 힘러는 그에게 게슈타포로 돌아갈 지 아니면 라인하르트 계획에 참여할 지 선택하도록 했고 그는 라인하르트 계획을 선택해 루블린으로 발령받았다. 루블린은 라인하르트 계획을 총지휘하는 폴란드 총독부의 SS 경찰 사령부가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한달 뒤 그는 힘러에 의해 새로 지어지던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의 초대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었다.
5.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소장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의 수용소장이 된 슈탕글은 1942년 3월부터 9월까지 소장으로 근무했다. 소비보르에는 베우제츠나 트레블링카에 비해 이송되는 유대인 숫자가 적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에 기계가 고장으로 멈출 때까지 단 6개월 동안 약 1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처음엔 소비보르 수용소가 단지 '군수 지원 캠프'라고만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곧 숲속에 숨겨져있던 가스실을 찾아내었고 그의 상관이자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관 오딜로 글로보츠닉(Odilo Globočnik)이 다가와 그에게 '만약 유대인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가스실로 보내도 좋다'고 말했으며 그렇게 유대인이 죽으면 '새로 보내준다고' 말했다고 한다.[2]
그의 아내가 유대인 학살에 대해 근심스럽게 대답하자 슈탕글은 이것은 일일 뿐,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며 더 이상의 질문을 막았다고 한다.
6.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소장
수용소에서의 슈탕글 |
슈탕글이 트레블링카의 수용소장으로 부임할 당시, 트레블링카는 완전한 혼돈 상태였다. 학살 시퀀스 구성에 '무능'했던 전임 수용소장 에베를은 밀려드는 유대인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속여야 했을 역 주변에서도 마구잡이로 총살했다. 위장의 기능을 상실한 수용소에는 시체와 밀려드는 유대인,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유대인, 무질서하게 버려진 그들의 소지품 등이 마구 섞여 있었고 시체 썩는 냄새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에베를이 해임된 직후 크리스티안 비르트가 상황을 수습했고, 이후 슈탕글이 부임하여 수용소의 학살 시퀀스를 완성했다. 슈탕글은 술을 매우 많이 마셨는데, 술버릇이 나빠 취중에 유대인을 죽인 적도 있었다.
1943년 말 트레블링카가 폐쇄된 뒤 그는 트리에스테로 발령받아 크로아티아 파르티잔 토벌을 보조했다. 그리고 1945년 초 비엔나로 돌아가 오스트리아 지역 방어에 투입되었다.
7. 전후 도주 생활
전쟁의 막바지에 그는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T-4계획에 관여한 혐의로 1947년까지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연합국이 트레블링카에 관한 정보를 아직 많이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량학살 혐의를 적용받진 않아서 구류는 느슨한 편이었는데, 1948년 5월 아내와 과거 소비보르 수용소 동료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로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바티칸에 있던 친 나치 성향의 알로이스 후달 주교가 도주로를 만들어 슈탕글을 도망시켰다고 한다.[3]이탈리아로 탈출한 슈탕글은 이후 쥐구멍 라인[4]을 통해 적십자사가 발행한 위조여권을 사용하여 시리아로 향했다. 그리고 약 3년간 아내와 가족과 함께 시리아에서 지낸 후 1951년 브라질로 도주해 정착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프란츠 슈탕글이란 본명을 떳떳하게 현지에서 사용하면서 상파울로의 폭스바겐 공장에서 16년이나 일했다.
8. 재판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의 학살 혐의를 알고 있었음에도 1961년에나 영장을 발부했다. 그리고 주 브라질 오스트리아 영사관에 그의 이름이 버젓이 등록되어 있었음에도 나치 사냥꾼이던 시몬 비젠탈이 증거를 수집하고 그를 추적해 내는데 또 6년이 걸려 그는 1967년 2월에야 브라질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곧 서독으로 인도되어 뒤셀도르프 재판부로 넘어가면서 학살을 저지르고 20년이 더 지나서 재판대에 오르게 되었다.재판대에 오른 슈탕글은 6년 전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학살을 인정하긴 했으나 자신은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는 한때 경찰이었던 경험을 살려 (근거의 적절성과는 별개로) 꽤나 논리적인 변론를 했는데, 범죄를 정의하는 4가지 구성요소인 '행위자(Subject)', '목표(Object)', '행위(Action)', '의도(Intent)' 중 '의도'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범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즉,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전형적인 관료형 전범임을 주장한 것. 하지만 비젠탈이 모은 증인과 증거는 치밀했고 결국 3년의 재판 끝에 1970년 그는 서독의 법정 최고형이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9. 회고 인터뷰
↑ 종신형을 선고받은 프란츠 슈탕글을 취재하는 기타 세레니.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지타 세레니(Gitta Sereny)와의 인터뷰에서 슈탕글은 재판에서 그랬듯 학살은 자신의 일이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세레니는 슈탕글이 수용소에서 했던 일에 대해 상세히 질문했는데, 슈탕글은 이에 답하면서도 자신의 죄라고 인정하는 건 거부했다. 하지만 세레니가 인터뷰 막바지에 무언의 압박을 가하자 결국 자신의 행동에 대해 '유죄'라는 말을 했다. 처음에는 수용소 일을 상당히 끔찍하게 생각했지만 곧 익숙해졌다고 했으며 종국에는 즐겼다고 말했다. 튜브에서 가스실로 향하는 유대인의 행렬을 말을 타고 다니며 둘러보거나 망루 위에서 지켜보았다고 했다. 또한 화차에 실려 무더기로 이송된 유대인들을 인간이 아니라 빠르게 처리해야 할 화물로 보았다고 했다. 기타 세레니는 슈탕글을 6개월간 총 70시간 동안 인터뷰했는데, 유죄를 시인했던 마지막 취재 후 19시간 뒤 프란츠 슈탕글은 뒤셀도르프의 감옥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1971년 6월 28일).[5]
기타 세레니와의 인터뷰 일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세레니(이하 Q) : 당신이 종국엔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프란츠 슈탕글(이하 A) : 브라질에 들어온 뒤 1년 쯤 뒤 언젠가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는데요... 내가 탄 기차가 도살장 옆에서 멈췄습니다. 우리 안의 가축들이 기차 소음을 들으며 울타리를 따라 빠르게 이동하면서 기차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가축들은 내 창문 옆으로 아주 가깝게 지나갔는데요... 한마리 한마리가 밀집되어서 울타리 너머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보자... 이건 폴란드를 생각나게 하는군. 확실히, 바로 저렇게 희생자들이 바라봤지. 그 깡통 속에 들어가기 전에 말이야.'
Q : '깡통'이라 하셨는데 무슨 뜻인가요?
A : ...그 뒤론 통조림 고기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바라보던 그 커다란 눈들... 바로 뒤에 자신들이 죽을 거라는 걸 모르면서 말이죠...
Q : 그래서 당신은 그들을 인간이라고 느끼지 않았다는 건가요?
A : 화물이요. 그들은 화물이었습니다.
Q : 언제부터 그들을 화물이라 생각했죠?
A : 아마 트레블링카의 학살구역을 처음 본 뒤로 그랬던 것 같군요. 내 기억으론 비르트가 거기 서 있었는데, 구덩이 옆에는 검게, 파랗게 썩은 시체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인간적인 부분이란건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건 엄청난, 엄청난 양의 부패한 살점이었습니다. 비르트가 말했습니다. "이 쓰레기들을 가지고 무얼 하지?" 아마 그때부터 저는 그들을 무의식적으로 화물로 본 듯 합니다.
Q : 그 희생자들 중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한번이라도 당신의 아이들을 떠올린 적 있나요? 부모의 입장으로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A : 아니오... 전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그들을 거의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대량의 화물이었습니다. 전 가끔 벽에 서서 그들이 '튜브'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습니다. 근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들은 나체로 발가벗겨져서 밀집된 채로 달리면서, 채찍을 맞으면서 마치...
Q : 그걸 바꿀 수는 없었나요? 당신의 지위에서 마치 가축우리에서와 같은 나체 이동, 채찍질을 멈출 수는 없었나요?
A : 아니요. 아니요. 전혀요. 이건 시스템이었습니다. 비르트가 고안했죠. 이건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 #
프란츠 슈탕글(이하 A) : 브라질에 들어온 뒤 1년 쯤 뒤 언젠가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는데요... 내가 탄 기차가 도살장 옆에서 멈췄습니다. 우리 안의 가축들이 기차 소음을 들으며 울타리를 따라 빠르게 이동하면서 기차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가축들은 내 창문 옆으로 아주 가깝게 지나갔는데요... 한마리 한마리가 밀집되어서 울타리 너머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보자... 이건 폴란드를 생각나게 하는군. 확실히, 바로 저렇게 희생자들이 바라봤지. 그 깡통 속에 들어가기 전에 말이야.'
Q : '깡통'이라 하셨는데 무슨 뜻인가요?
A : ...그 뒤론 통조림 고기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바라보던 그 커다란 눈들... 바로 뒤에 자신들이 죽을 거라는 걸 모르면서 말이죠...
Q : 그래서 당신은 그들을 인간이라고 느끼지 않았다는 건가요?
A : 화물이요. 그들은 화물이었습니다.
Q : 언제부터 그들을 화물이라 생각했죠?
A : 아마 트레블링카의 학살구역을 처음 본 뒤로 그랬던 것 같군요. 내 기억으론 비르트가 거기 서 있었는데, 구덩이 옆에는 검게, 파랗게 썩은 시체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인간적인 부분이란건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건 엄청난, 엄청난 양의 부패한 살점이었습니다. 비르트가 말했습니다. "이 쓰레기들을 가지고 무얼 하지?" 아마 그때부터 저는 그들을 무의식적으로 화물로 본 듯 합니다.
Q : 그 희생자들 중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한번이라도 당신의 아이들을 떠올린 적 있나요? 부모의 입장으로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A : 아니오... 전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그들을 거의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대량의 화물이었습니다. 전 가끔 벽에 서서 그들이 '튜브'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습니다. 근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들은 나체로 발가벗겨져서 밀집된 채로 달리면서, 채찍을 맞으면서 마치...
Q : 그걸 바꿀 수는 없었나요? 당신의 지위에서 마치 가축우리에서와 같은 나체 이동, 채찍질을 멈출 수는 없었나요?
A : 아니요. 아니요. 전혀요. 이건 시스템이었습니다. 비르트가 고안했죠. 이건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 #
그리고 다음은 Into That Darkness: An Examination of Conscience에서 슈탕글의 마지막 인터뷰를 담은 부분 일부이다. 책 일부만이 나온다. 다만 미리보기 마지막 부분에 하술한 내용 전부가 나온다.
"난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부끄럼이 없소....난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해치려 하지도 않았어요..." 그는 뭔가 다르게, 이전보다 덜 예민하게 강조했고, 다시 오랫동안 기다렸다. 나는 처음으로, 그동안 많은 날을 인터뷰했지만 처음으로 그의 대답을 거들지 않았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그는 마치 탁자에 붙어있는 것처럼 탁자를 두 손으로 움켜잡더니, "그렇지만... 저는 거기 있었지요." 기묘할 정도로 메마르고 피곤한, 후회의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 몇 마디 문장이 나오는 데 거의 30분이 걸렸다. "네 맞습니다." 마침내 그가 천천히 말했다. "실제로 저도 책임(Guilt)을 짊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죄.... 나의 죄를 오직 이 대화에서만 ... 이제서야 처음으로 이야기하게 되었군요..." 그는 이야기를 멈췄다.
그는 "나의 죄"라는 단어를 이야기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이 대화의 마지막에 그의 몸과 얼굴은 축 쳐져 있었다.
약 1분 뒤 약간 성의 없이 탁한 목소리로 그가 다시 이야기했다. "저의 죄는, 제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겁니다. 그게 저의 죄입니다."
"아직 여기 있다구요?"
"전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게 제 죄입니다."
"당신이 죽었어야 했다는 의미인가요? 아니면 죽을 용기가 있었어야 했다는 말인가요?"
"뭐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군요" 그가 애매하게, 이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지금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근데 그때는요?"
"맞습니다." 그는 천천히 대답했는데, 아마 내 질문을 의도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 같다. "난 20년을 더 살았어요. 그 좋았던 20년이요. 하지만, 이젠 정말 살아 있는것보단 죽는 게 나은 것 같군요." 그는 좁은 감방을 둘러봤다. "전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솔직한 어조로 그가 얘기했다.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젠 그만하지요. 지금껏 해왔던 이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젠 끝냅시다. 이젠 이야기를 끝내자구요." 그리고 끝났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탕글은 19시간 뒤, 다음날 월요일 오후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그는 "나의 죄"라는 단어를 이야기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이 대화의 마지막에 그의 몸과 얼굴은 축 쳐져 있었다.
약 1분 뒤 약간 성의 없이 탁한 목소리로 그가 다시 이야기했다. "저의 죄는, 제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겁니다. 그게 저의 죄입니다."
"아직 여기 있다구요?"
"전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게 제 죄입니다."
"당신이 죽었어야 했다는 의미인가요? 아니면 죽을 용기가 있었어야 했다는 말인가요?"
"뭐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군요" 그가 애매하게, 이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지금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근데 그때는요?"
"맞습니다." 그는 천천히 대답했는데, 아마 내 질문을 의도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 같다. "난 20년을 더 살았어요. 그 좋았던 20년이요. 하지만, 이젠 정말 살아 있는것보단 죽는 게 나은 것 같군요." 그는 좁은 감방을 둘러봤다. "전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솔직한 어조로 그가 얘기했다.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젠 그만하지요. 지금껏 해왔던 이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젠 끝냅시다. 이젠 이야기를 끝내자구요." 그리고 끝났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탕글은 19시간 뒤, 다음날 월요일 오후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9.1. 인터뷰어: 기타 세레니
기타 세레니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작가로 1938년 안슐루스 때 프랑스로 이주했다가 프랑스 점령 이후 레지스탕스를 도왔다는 혐의를 받아 영국으로 탈출해 정착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참관했다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행적에 관심을 가진 뒤 전기작가가 되었다.그녀는 인간이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심리적으로 추적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으며, 자료를 얻기 위해 관련자들을 몇 달, 몇 년에 걸쳐 인터뷰하기로 유명했다. 1960년대 말 영국을 뒤흔든 초등학생 연쇄 살인범 메리 벨[6]의 재판 이후 메리벨의 어머니를 2년에 걸쳐 인터뷰한 이후 1972년 메리 벨의 전기를 출간했고, 1974년에는 프란츠 슈탕글을 취재하여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슈탕글에 관한 전기를 출간했다. 1995년 알베르트 슈페어의 전기를 출간했다.
이들 작품을 통해 영국 문학상 중 가장 권위있는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 매해 영어, 프랑스어로 쓰여진 최고의 전기 작품에 수여하는 더프 쿠퍼 상을 받았고, 2004년에는 영국 정부로부터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받았다. 2012년 케임브리지에서 9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기타 세레니는 악마의 형성 과정을 탁월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지만, 악마를 '인간화'했다는 점에서 비판도 받는다. 그 외에도 1998년 다시 메리 벨에 대한 전기 '들리지 않는 외침'을 출간했을 때 메리 벨이 전기의 저술에 관여하고 거액의 인세를 받아간 일이 알려져 비판받기도 했다.
9.2. 인터뷰의 시사점
수많은 나치 관료들이 바로 슈탕글의 사례와 같이 위에서 전해진 명령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학살자가 되었다. '그는 T-4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는 트레블링카 수용소장이 되었다' 같은 무미건조한 서술과 함께 그가 학살자가 되는 과정이 드러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그런 끔찍한 직책을 맡게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었나 하는 것이었고, 그 답은 바로 위의 증언과 같았다. 직책을 맡게 되었을 때 어떤 결심이나 마음의 준비 같은 걸 하기 보단 자신의 직책에 따라 수행해야하는 의무로서 일을 처리했고, 평상시를 살아가는 자신의 인격과 학살행위를 완전히 분리했다. '유대인은 정말 나쁜 인간이니 꼭 죽여 없애야 한다'는 증오 따위는 없었다. '화물을 처리하는 일', 즉 유대인을 죽이고 처리하는 일을 관료제에 따라 더 능력있던 자신이 역할을 맡아 더 완벽하게 수행했을 뿐이었다. 아돌프 아이히만, 크리스티안 비르트, 아몬 괴트처럼 자신의 신념으로 유대인 말살계획에 완전히 공감하며 발벗고 나서 학살을 저지른 것들도 있었지만 다른 많은 나치들은 의지가 배제된 살인명령에 따르는 기계였기 때문에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이런 점을 고려할 때, 슈탕글 전기의 부재 An Examination of Conscience(양심에 대한 시험)는 많은 의미를 담는다. 관료제에 속한 한 명의 관료가 부당한 명령을 받고 자신의 양심을 시험했을 때, 슈탕글은 오답을 고른 사람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을 트레블링카의 수용소장직에 앉힌다면 그 중 상당수가 나치의 처벌을 각오하고서라도 정답을 고를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 중 양심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트레블링카는 가동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사회의 개개인에 통용되는 도덕률로써 비극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것을 막을 또다른 방법은 바로 부당한 명령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관료제는 거대한 국가의 의지를 어떻게든 실현시킬 수 있게 하는데, 그 의지가 불순하다면 관료제는 끔찍한 도구가 되고 만다. 나치즘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증오의 이데올로기가 관료제가 잘 잡힌 나라를 삼켜버리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 슈탕글의 사례로써 잘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행정 체계가 대단히 거대해지고 복잡해진 오늘날 관료제를 포기하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다. 한 국가사회에 단 한사람이라도 절멸수용소장의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도덕률을 만들 수 없다면, 슈탕글의 사례, 더 나아가 홀로코스트가 오늘을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끔찍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정부를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 즉 교묘한 선동 속에서 불순한 의지를 내포하는 증오의 이데올로기를 인식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10. 최후
"전 제가 한 행동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전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해치려고 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그곳에 있었지요."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소장 프란츠 슈탕글, 사망 19시간 전 기타 세레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 인정하며.
1971년 6월 28일에 슈탕글은 수감중이던 뒤셀도르프 형무소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소장 프란츠 슈탕글, 사망 19시간 전 기타 세레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 인정하며.
[1] 이는 재판 당시 슈탕글 본인의 증언이었기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질 수 있다. 다른 자료에선 슈탕글이 잠복과 수사를 반복하는 게슈타포 업무에 지루함을 느꼈다고도 한다.[2] 절멸수용소의 목적을 고려할 때, 이들 유대인은 존더코만도를 의미하는 듯 하다.[3] 후달 사교가 나치 잔당을 도망시켜준 일은 1947년 신문에서 대서특필되었는데, 그 후 후달은 1951년에 사직하여 1963년 로마에서 사망했다.[4] Ratline. 나치 전범들이 남미로 도망한 경로.[5] 기타 세레니는 각종 자료와 이 취재를 바탕으로 1974년 프란츠 슈탕글에 관한 전기를 출간했다. 제목은 Into That Darkness: An Examination of Conscience. 알베르트 슈페어의 전기와 더불어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한글 번역은 되지 않았지만 원문판은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다.[6] 붙잡혀 재판받을 당시 11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