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14:32:14

말메디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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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Malmedy massacre
프랑스어: Le massacre de Malmedy, ou masscre de Baugnez
네덜란드어: Bloedbad van Malmedy
독일어: Das Malmedy-Massaker
1. 개요2. 사건 진행3. 논란과 이야기들4. 여담
4.1. 창작물에서의 묘사

1. 개요

벌지 전투 당시 요아힘 파이퍼가 지휘하던 파이퍼 전투단에 의해 발생한 포로 학살 사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avelot_massacre_maison_Legaye.jpg
파이퍼 전투단 패퇴 후 스타벨로에서 발견된 민간인 학살 현장 사진

2. 사건 진행

1944년 12월 17일 벨기에말메디에서 무장친위대 SS 제1기갑사단 소속의 요아힘 파이퍼가 지휘하는 파이퍼 전투단 병사들이 사로잡은 미군 포로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하여 83명을 학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심지어 파이퍼 전투단은 말메디만이 아니라 이후 그들이 거쳐간 모든 지역에서 포로 및 민간인 학살에 연루되었다. 격전지였던 스타벨로에서는 전투가 끝난 후 포로 9명과 여자 및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 93명이 학살당했다.

당연하게도 이를 보고받은 연합군 수뇌부는 크게 분노해 이 사건을 독일군의 포로 학살로 규정하고 포로로 붙잡은 독일군 병사들에게 보복해도 좋다는 공식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훗날 전범 재판에서 파이퍼와 그 부하들에게 포로 학살의 책임을 물으려고 하였지만 문제는 당시 '독일군 수뇌부에선 포로를 처형하라는 공식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상기했듯 '연합군 수뇌부가 공식 명령으로 포로 학살을 지시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결국 재판은 치러졌고 유죄 판결도 나왔지만 당시에도 심각한 논란이 오갔다.

여하튼 말메디 학살 사건의 영향으로 미국 병사들의 전투 태도가 달라졌다. 이런 변화는 포로 대우에도 영향을 줬다. 국방군 포로와 무장친위대 포로를 다루는 방식도 달라졌다. 무장친위대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사병인 데다 제네바 협약에서 언급한 중대한 위반행위(grave breaches)를 무수하게 실행했으므로 범죄조직으로 처리되었다. 사설조직도 제네바 협약상 교전권은 인정되긴 하지만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등 협약상 중대한 위반행위를 하면 공식적으로 교전권이 박탈되고 범죄조직으로 처리된다. 이 때문에 전후 독일에선 무장친위대의 군복무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1]

민병대도 마찬가지로 범죄조직에 속하지 않았으며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교전권이 인정된다. 전쟁 말기 나치 독일에서 국민돌격대에게 군복 대신 완장 하나 채워 주고 '이걸로 니넨 합법적 군인이니 잘 싸우도록' 같은 개드립을 친 이유도 어쨌건 제네바 협약상 교전권을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이런 현상은 이후 독일군과 미군의 교전 현장에서 숱하게 발생했고 심지어 상관의 전사를 학살로 오해한 부하들에 의한 단위 부대 전체의 조직적인 포로 학살 같은 참사도 발생했을 정도였다.

말메디 사건 이후 미군이 SS 포로를 어떻게 취급했는지는 영화 퓨리에서 보여준다. 영화에서 미군은 SS 포로를 굉장히 잔인하게 조리돌림하면서 가혹하게 다루는데 영화 초반에 워대디가 SS 부사관의 멱살을 잡고 패드립을 날리면서 조롱하며 구타하다가 주변 병사들이 겨우 뜯어말리는 장면이 나오고 이후 마을 진입 장면에서 항복한 독일군 중 SS 장교(소위)가 강제동원에 불복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 확인된다. 마을 곳곳의 전봇대와 건물에 붙어 있는 장대에 교수형으로 죽은 시체들이 매달려 있는데 시체엔 '나는 적과 싸우지 않았습니다'라는 취지의 글귀가 적힌 푯말이 걸려있다. 그러자 동행하던 미군 보병에게 끌려나와 톰슨 기관단총으로 무자비하게 즉결처형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3. 논란과 이야기들

말메디 재판 및 사형수들에 대한 사형 영상
당시 영어에 능통했던 파이퍼는 영국 군가 "It's a Long Way to Tipperary"를 포로들을 향해 흥얼거렸다고 한다. 이 노래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처음 군가로 불렸다. 사건 당시에는 영미군 전체에서 유행하던 노래였다. 여기서 파이퍼의 전투단에 포로 때문에 진군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유유히 떠난 뒤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정황을 보면 파이퍼는 급한 진군을 위해 뒤에 포로를 놓아 둘 수 없었고 포로를 데리고 가면 진군 속도가 늦어질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포로를 풀어주면 경로가 발각되고 이들이 적군과 합류하여 역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또 당시 옆 마을에 있었던 아이젠하워를 잡으러 서둘렀다는 연구도 있다. 아이젠하워의 자서전에도 파이퍼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2] 자신이 포로로 잡힐까봐 염려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포로 학살에 대한 공식적인 문서는 발견된 적이 없지만 상관이었던 요제프 디트리히에게 구두로 명령을 받았을 것이란 의혹은 강하게 제기된다. 파이퍼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면 곧이어 학살된 민간인과 군인 포로의 시체가 뒤이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애초에 포로 학살 명령을 공식적으로 문서로 남겨 명령을 내리는 멍청한 군대는 많지 않다.

한 주장에 따르면 말메디에서는 탈주를 시도한 미군 포로에게 경고사격 후 조준사격이 가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을 본격적인 포로 학살로 오인한 포로들이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했으며 당황한 독일군이 이를 저지하고자 도주하는 포로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다 발생한 사고로 추정되기도 한다. 참고로 탈주 포로를 사살하는 것은 국제법상 위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탈주를 시도하는 순간 포로는 포로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전투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메디 학살의 경우 대부분의 포로들은 조직적 탈주를 시도하다가 사살된 것이 아니라 멍하게 서 있다가 죽었다. 죽은 척하여 살아남은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독일군들은 쓰러진 포로들의 급소나 복부를 걷어차고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비명을 지르면 바로 총격을 가해 확인사살을 하였으며 킬킬거리면서 개머리판으로 죽은 시체를 짓이기며 웃고 떠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생존자들도 일관되게 갑작스럽게 발포했다고 증언했다. 시신 부검 결과 대부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두부관통상을 입은 점을 보면 저항하거나 도망가다가 총에 맞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포로를 모아 놓고 갑자기 겨냥해서 죽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포로들이 저항하거나 탈주를 시도한 것은 갑작스런 발포 후에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도 소수에 그쳤다. 또 갑자기 탈주 시도가 이루어졌다면 대부분의 시체가 머리에 관통상이나 치명상을 입기는 어렵다. 무방비 상태에서 지향 사격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최종 단계에선 쓰러진 사람을 발로 차서 약간이라도 움직이면 다시 사격해서 끔살하는 확인사살이 몇 건 자행되었다.

결국 포로 학살이라고 볼 여지는 충분했다. 여기에 12월 18일부터 12월 21일에 걸친 진격로상에서 있었던 다른 학살들은 작전 중 전사한 몇몇 중대장의 독단에 의해 강행된 학살행위라는 사실이 입증됐다. 참고로 의도적인 학살은 아니었다고 해도 특별한 권한 없이 임의로 전시 국제법을 확대 해석한 일선 장교들의 약식 군사재판은 충분히 학살로 간주된다.
지휘관인 파이퍼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진 이유는 말메디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게 밝혀져서도 아니고, 그가 학살 명령을 내렸다는 혐의가 입증되어서도 아니다. 지휘관으로서 일련의 학살 사건 전반에 대한 지휘책임을 물은 것이다. 밑의 사람이 사고를 치면 윗사람이 책임지는 건 군대는 물론이고 전세계 거의 모든 조직의 공통점이다. 파이퍼 본인도 자신이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 점에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다만 학살 당사자였던 병사들의 상태를 감안해서 병사들의 책임은 최소한으로 물어야 한다는 취지의 이의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다만 당대 사람들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 특히 말메디에서의 첫 포로 사살 사건은 전시 국제법상 문제가 될 정도의 사건은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의외로 당시 재판관들, 심지어 검사들 중 상당수도 말메디 사건 한정으로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사형 판결이 나온 뒤에도 가해자들을 구명하기 위해 사적으로 활동하기까지 했다. 당시 파이퍼 전투단과 교전했던 미군 대대장 중 한 명은 파이퍼가 부상당한 미군을 위해 의무병을 배치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독일군에게 불리한 증언도 많았지만 유리한 증언도 꽤 나왔기 때문에 확실하게 혐의가 있다고 단정내리기 어려웠다.

4. 여담

파이퍼는 1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56년 12월 13일 감형으로 풀려났다. 석방 후 전직 SS 모임의 주선으로 포르셰에 취직하여 해외 판촉 직원으로 일하려고 했으나 전범으로서 외국의 기피 인물이었기 때문에 곧 퇴직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전선에서 민간인을 무차별로 폭격한 보베 학살(Boves massacre)에 대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보베 학살은 이탈리아 파르티잔이 독일군 몇 명을 억류한다는 이유로 350채 가옥을 평지로 만들고 45명을 사살한 사건이다. 하지만 무죄로 결론난다.

이후 프랑스에 정착하여 가명을 쓰고 신분을 감추면서 자동차 잡지에 가명으로 기사를 투고하거나 밀리터리 서적 번역 일을 하다가 결국 신분이 노출되고 말았다. 1976년 파이퍼는 암으로 투병하던 아내를 먼저 독일로 보낸 뒤 프랑스에 남았다. 그는 프랑스 극좌 테러리스트들로 추정되는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가슴에 총을 맞고 죽었으며 집은 불탔다. 괴한들은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말메디 학살 당시 베레트(Wereth) 지역에서 고립된 흑인 미군 포로 11명이 SS에게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으나 SS는 그들을 잔인하게 구타했다. 전신을 마구 구타한 뒤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턱을 짓뭉개고 양쪽 팔뼈를 부러뜨렸다. SS는 포로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일부러 급소만을 피해 고문하는 악 마같은 짓을 저질렀다. 손톱을 모두 뽑은 뒤 손가락을 절단했으며 이빨을 모두 뽑아 버리고 마지막으론 총검으로 눈알을 파내거나 움직이는 차량으로 산 채로 몸을 짓뭉개는 등 총살형이 아닌 끔찍한 고문을 통해 살아 있는 포로들을 학살하였다.

SS가 보여준 일본군 못지 않은 잔혹성에 미군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지휘부에서는 이러한 만행의 범인들을 추적했으나 증거가 부족했던 탓에 안타깝게도 아무도 기소할 수 없었다. 이들은 향후 전투에서 전사했거나 운 좋게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살아남았을 것이다. 학살이 이루어진 베레트 지역에는 학살된 포로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말메디 학살 이외에 독일군이 미군 포로를 상대로 자행한 학살로는 그래뉴 학살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독일군이 미군을 상대로 자행한 포로 학살은 그래뉴 학살, 말메디 학살, 이탈리아에서의 미 OSS 정보원 집단처형, 룩셈부르크 발하우젠에서 다수의 미군 포로 처형 (이 사건은 주체가 SS인지, 독일 국방군인지는 불명) 이렇게 총 4가지다. 그래뉴 학살과 발하우젠 학살을 제외한 나머지 학살의 주모자에 대한 처벌은 모두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프랑스 마을 주민이 D-DAY 당시 낙오된 미 공수부대원을 독일군이 즉결처분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다. 특히 SS는 포로를 잡지 않고 즉결처분하는 것을 즐기다시피 하여 연합군의 증오와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서방 연합군 포로와 소련군 포로를 가리지 않고 자행되었다. 게다가 지상에 불시착한 미 공군 파일럿들 역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즉결처분당하거나 폭격당한 독일 마을 주민들에게 보복으로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이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포로 학살 사건은 더 많을 수 있다.

4.1. 창작물에서의 묘사

아르덴 공세를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 자주 등장한다.

1965년 제작한 벌지 대전투(Battle of the Bulge)에서는 공터에 포로들을 모아 놓고 갑자기 트럭에서 기관총을 난사해서 학살하는 장면으로 묘사한다. 즉 처음부터 계획적인 학살로 묘사했다. 겨우 소위 한 명만 언덕에서 굴러 넘어져서 극적으로 달아나는데 이 포로를 통해 이 학살의 실체가 알려지고 이걸 알게 된 연합군 포로인 월렌스키 소령이 다른 부대 사령관인 마틴 헤슬러 대령에게 포로 학살을 따지게 된다. 맹장인 헤슬러 대령도 이 실체를 알자 분노하여 상급대장인 상관에게 비열하게 포로를 죽이는 추악한 짓이라고 따져들었다. 상관이 전쟁 중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덮으려는 투로 말하자 더더욱 분노하며 그러기에 상부에서 학살을 금지해야 한다면서 따지며 학살로 인해 연합군은 항복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울 것이라며 앞으로의 작전이 힘들어졌다고 경고하며 그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여담으로 언급한 소위도 처음에는 전투의지도 없어서 휘하 부사관이 독일군을 기습하려 했으나 항복해 버려 포로 수용소로 끌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학살+부사관이 본인을 지키다가 죽은 것에 각성해 떠돌아다니다가 똑같이 길을 잃은 미군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재정비하고 큰 역할을 해낸다.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대표작 불꽃의 기사에서는 포로가 탈출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경고사격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이 학살로 발전했으며 파이퍼가 그 책임을 지게 됐다고 파이퍼 편을 들어 서술했다. 군법재판 과정에서 변호인 에버렛 대령의 항소 과정도 서술했다.

2003년에 제작한 세인트 앤 솔저란 영화에서도 탈주 시도로 인해 발생한 우발적인 학살로 묘사하였다.

알파캣이 그린 월드 오브 탱크 역사웹툰에서 M12 자주포 포병인 카버 상병이 목격했다. 카버 상병 본인은 총에 맞은 척하고 쓰러져서 확인사살을 운 좋게 면하고 생존했고, 파이퍼 전투단이 운용하던 티거 전차를 목격하는데 이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렸으나, 결국 포병부대를 기습해온 적 티거 전차와 동귀어진한다.


[1] 단, 전쟁말기에 강제징집된 인원들은 인정해줬다.[2] 아르덴 대공세 당시 아이젠하워의 사령부에서 가장 가까운 독일군 부대가 파이퍼의 부대였다. 가장 멀리 진격했기 때문인데, 결국 너무 깊이 들어온 탓에 파이퍼와 부하들은 모든 장비를 폭파한 뒤 맨몸으로 도망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