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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페겔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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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슈츠슈타펠 문장.svg 친위대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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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헤르만 페겔라인.jpg
이름 Hans Georg Otto Hermann Fegelein
한스 게오르크 오토 헤르만 페겔라인
출생 1906년 10월 30일
독일 제국 안스바흐
사망 1945년 4월 28일 (향년 38세)
나치 독일 베를린
형제자매 남동생 발데마르 페겔라인 (1912 ~ 2000)
배우자 그레텔 브라운 (1915 ~ 1987, 1944년 결혼)
자녀 딸 에바 바르바라 페겔라인 (1945 ~ 1971)
친인척 처형 일제 브라운 (1909 ~ 1979)
처형 에바 브라운 (1912 ~ 1945)
동서 아돌프 히틀러 (1889 ~ 1945)
복무 슈츠슈타펠 (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중장 (집단지도자)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신체 키 175cm

1. 개요2. 행적3. 기타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나치 독일의 사병 조직인 무장친위대의 고위 장교였으며, 힘러의 부관이자 히틀러의 인척이기도 하였다. 발데마르 페겔라인의 형이기도 하다. 최종 계급은 친위대 집단지도자(Gruppenführer), 즉, 중장이였다.[1][2]

2. 행적

1925년 국가방위군에 입대하였고, 소위로 임관하여 기병 장교로 복무했으며, 1928년에는 뮌헨 경찰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슈츠슈타펠이 세를 불려 나가자 1933년 4월 10일에 그는 육군에서 슈츠슈타펠로 전군했다. 이후에는 SS 기병 학교장을 맡았으며,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올림픽에 쓸 말을 관리하기도 했다. 상술한 공화국군 경력과 친위대 경력을 비교해보면 짐작이 가능하겠지만[3] 공화국군 시절보다 친위대 시절의 역할이 넘사벽으로 높아진 이유는 빼어난 미남이여서 하인리히 힘러가 금 소년으로 부르며 자기의 친아들로 그를 대할 정도로 총애하였기 때문이다.[4]

이후 2차 대전이 터지고,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이 성공한 뒤 그는 친위대 해골기병연대(Totenkopf Reiterstandarte)를 지휘하게 되어 12월까지 바르샤바에 주둔했다. 1940년 5-6월 벨기에 공방전 및 프랑스 공방전때 무장친위대의 전신인[5] 특무부대의 일원으로서 종군한다. 프랑스 전역에서의 공적으로 1940년 12월 15일 2급 철십자장을 수훈받았다. 뒤이어 터진 독소전쟁에서 1941년 그의 휘하 부대들은 벨라루스에서 민간인 1만 7천명을 학살하였다. 이후 1942년 2월 1일과 12월 1일에는 연대지도자와 상급연대지도자로 진급하였고, 1943년 2월 1일에는 여단지도자(brigadeführer)로 진급했다. 그리고 동년 5월부터 9월까지 SS기병여단의[6] 여단장을 맡다가 부상을 당했다. 그동안 이 여단이 제 8SS기병사단, 일명 플로리아 가이어 사단으로 개편되자 그 해 10월부터 1944년 1월 1일까지 사단장을 맡았다가 힘러의 천거로 인해 연락장교로 보직이 바뀌었고, 계속해서 복무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일생에 개인적으로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1944년 6월 3일에 에바 브라운의 여동생인 그레텔 브라운과 잘츠베르크에서 결혼했고, 자연히 히틀러와는 동서지간 인척이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힘러와 히틀러를 제외하면 어지간해선 그를 건들기 힘들 정도가 되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동년 6월 21에는 집단지도자로 진급한다.
파일:집단지도자 페겔라인.jpg
친위대 집단지도자 페겔라인

하지만 개인적으로 승승장구하던 그의 최후는 비참했는데 사건의 발단은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며칠 전, 이미 배신자가 된 힘러와[7] 접촉하기 위해 민간인으로 변장해 몰래 벙커와 베를린을 빠져나와 중립국으로 도망가다 친위대 국가보안국에 잡혔다. 이 일로 히틀러의 분노를 산 그는 결국 1945년 4월 28일에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하인리히 뮐러가 게슈타포에게 지시를 내려 페겔라인을 처형하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37년 4개월 2일)였다.[8] 다만 베를린에서 페겔라인이 처형된 것 자체는 확실하나 그가 어떤 방식으로 처형당했는지는 직접 본 사람이 없고, 나중에 정확하게 증언한 사람도 없어서 지금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영화 몰락에서는 마약을 흡입하고 유흥을 즐기다 자던 그를 강제로 끌어내 총살시킨걸로 묘사했지만 베를린 공방전에 그와 함께 참전한 SS 여단지도자 빌헬름 몽케는 그가 마당에서 총살당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처형되기 전에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를 찾아가서 자기 동생이 아직 페겔라인의 아이를 임신 중인 걸 감안하여 제발 그를 사형시키지 말라고 히틀러에게 부탁하였다. 히틀러는 그녀에게 페겔라인의 반역 증거가 나왔으니 이 일에 왈가왈부 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럼에도 그녀가 쉽게 진정하지 않자 몽케 부대로 복무시키겠다고 해서 겨우 달랬다고 한다.

그리고 부인 말고도 친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자기보다 6살 아래 남동생인 발데마르 페겔라인(Waldemar Fegelein)이었다. 그도 무장친위대의 고위급 장교였는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복무하여 도합 20년 동안 복무했던 형과 달리 복무기간은 7년으로 훨씬 짧았다.[9] 또 계급도 장성인 형과 달리 영관급인 연대지도자(대령)에서 끝났으나[10], 형과는 달리 죽지 않고 미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1946년에 석방되었다. 이후 악셀 페겔라인으로 개명을 한 뒤, 승마장을 경영하였으며[11], 2000년 11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도 자기의 형 처럼 전쟁범죄 의혹이 있는 사람이나, 본인은 이를 극구 부정했다.

페겔라인이 죽은 후,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내인 그레텔은 동년 5월 5일에 오버잘츠베르크에서 딸을 낳았다. 따라서 딸의 얼굴도 못 보고 죽은 셈. 게다가 딸 이외에는 친자식이 없었다. 유복녀로 태어난 딸 이름은 에바 바르바라(Eva barbara)였는데 이름을 이렇게 지은 이유가 바로 4월 30일에 히틀러와 함께 자살한 헤르만 페겔라인의 처형이자 그레텔의 언니인 에바 브라운을 기억하는 의미로 지은 것이었다. 허나 바르바라는 1971년에 남친이 교통사고로 죽은 직후 자살하였고, 그레텔은 전후에 재혼했다가 친딸이 죽고 16년 뒤인 1987년에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바르바라 이외의 자녀는 없었다.

3. 기타

  •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록에 따르면 돈과 명예를 밝히는 속물적인 면모가 있긴 했다고 밝혔고, 그의 휘하 부대들이 민간인 1만 7천명을 학살하는 등 전쟁범죄에 책임이 있지만 그나마 쥐꼬리만한 양심은 있었는지 카민스키 여단과 오스카 디를레방어 사단의 도를 넘은 잔학행위에 대해 히틀러에게 직언하여 카민스키의 처형과 디를레방어의 해임에 가여하기도 하고, 바르샤바 봉기의 폴란드측 지휘관 부르코모로프스키와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의 친분으로 수용소가 아닌 자신의 별장에서 지내는 편의를 봐 주기도 했다.

4. 대중매체에서

영화 다운폴의 패러디에서 히틀러의 만악의 근원 기믹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배역은 토마스 크레치만.[12]


SS 소령인 오토 귄셰가 페겔라인이 벙커에서 사라졌다고 보고하자 히틀러가 당장 페겔라인을 찾아오라며 격분하는 장면인데, 여기서 책상을 내려치며 FEGELEIN![13]이라고 일갈하는 게 워낙 인상 깊어서인지, 어느새 몰락 패러디에서 히틀러가 당하는 온갖 생고생의 배후 포지션으로 자리잡았다. 당연히 히틀러는 페겔레인을 잡아오라 내지는 해치우라며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지만 결국에는 실패하는 게 평상시 패턴. 심지어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얼마 뒤에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다시 나타나면서 절망한 히틀러가 절규하기도 한다.


[1] 독일 국방군이나, 나치 친위대, 공산군의 중장은 계급 체계의 차이로 인하여 서유럽 및 한국과 미군의 소장 계급에 해당된다.[2] 그러나 독일군의 중장을 단순히 소장급 계급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우선 준장이란 계급이 없다 뿐이지 국방군은 고참대령이 준장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고참대령이 여단장이나 사단장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무장친위대는 준장에 상응하는 상급대령 계급이 존재하였다. 독일군 중장은 사단을 지휘하기도 하였지만 (주로는) 군단을 지휘하였다. 2차대전시 미군 소장은 소수의 경우 군단도 지휘했지만 주로 사단 지휘했고 국군소장은 군단을 지휘하지 않기에 단순히 독일군에 준장 계급이 상설되지 않았다 하여 독일군 중장이 한국이나 미군 소장이다 이렇게 말하긴 어렵다.[3] 헤르만 페겔라인과 동년배인 국방군 장교들의 계급은 개전 이전에는 대위 내지 소령, 잘해봐야 중령으로 일선의 중대장 내지 대대장, 혹은 하급 제대의 참모를 맡았다.[4] 어느 정도냐면 1939년부터 SS기병연대(후술할 8기병사단의 전신)를 지휘한 그는 전쟁 당시 잔악한 태도를 보여 문제가 되었으나 그를 총애하던 힘러가 빨리 개입해서 무마시킬 정도였다. 괜히 몰락에서 힘러랑 같이 나온 것이 아니다.[5] 무장친위대에 해당하는 부대는 이미 전쟁 전부터 존재하였으나 이러한 부대들이 본격적으로 무장친위대라는 이름으로 불린 건 프랑스 침공 이후 ~ 독소전쟁 개전 이전 시점부터였다.[6] 이 부대 자체는 상술한 기병연대를 모토로 하여 1940년에 창설하였다. 당연히 주요 지휘관도 헤르만 페겔라인이었다.[7] 힘러는 대전 말 자신의 위치에 불안감을 느끼고 연합군과 협상을 시도하기 위해 슈타이너 분견군을 포함한 수 만명의 병력을 협상용 카드로 쓰기 위해 몰래 빼돌린데다, 자기가 히틀러의 후계자가 된다고 떠벌리고 다녔는데, 이 사실이 영국 BBC방송으로 보도된 걸 마르틴 보어만이 히틀러에게 보고를 하자 그는 제대로 격노하여 힘러를 체포한 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허나 힘러는 이미 베를린에서 멀리 도망간 상황인데다 대전 말, 독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겹처 잡을 수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히틀러 본인도 명령을 내린지 2일 만에 자살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힘러의 기대와는 달리 연합군은 힘러와 협상 따위를 할 생각이 없었다. 허나 이를 전혀 몰랐던 그는 나중에 카를 되니츠플렌스부르크 정부에 가담하였으나(히틀러의 힘러 처형령은 전후의 혼란했던 상황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되니츠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를 두려워했던 되니츠에게 5월 6일날 해임당했던데다 그 곳에서 은둔하는 것도 거부당했고, 결국 평범한 독일군 장교로 변장을 한 이후에 도망치다가 영국군에게 잡혔다. 이후 억류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협상을 위해서 자기의 진짜 신분을 밝혔을 때야 비로소 연합군이 자신과의 협상 따윈 없이 무조건 전범재판에 세우겠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청산가리를 복용하고 자살하여 의미없는 배신의 댓가를 치르게 되었다.[8] 공교롭게도 그 날은 자신의 처형을 지시한 하인리히 뮐러의 45번째 생일이었다. 물론 당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제대로 된 생일 파티는 꿈도 못 꿨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일과 페겔라인의 죽은 지 2일 뒤에 히틀러와 그의 부인이 된 에바 브라운이 자살한 후, 하인리히 뮐러는 그 이후의 행방이 묘연해졌고, 지금까지도 그가 어디에서 뭘 하다 죽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9] 1938년에 슈츠슈타펠에 들어가 1945년까지 복무하였다가 미군에 붙잡혔다.[10] 대전 말인 1945년 2월에 무장친위대 37사단 뤼초의 사단장을 맡기도 했으나, 한 달 만에 카를 게체너로 교체되었다.[11] 헤르만의 아버지도 승마장을 경영했으나 대공황 당시인 20년대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헤르만 페겔라인이 기병장교가 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커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12] 크레치만은 2차대전을 다룬 영화에서 독일 국방군 장교 역으로 자주 출연하는데, 다운폴 이후 제작된 작전명 발키리에서는 그 반대로 1944년 7월의 암살 미수 당시 히틀러의 명으로 암살 모의자들을 진압하는 오토 에른스트 레머 소령 역으로 출연했다. 한국에서는 2017년작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광주의 진실을 알린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역할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13] 패러디물에서는 종종 Failure, damn it 등으로 치환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