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Hans Jüttner 한스 위트너 |
출생 | 1894년 3월 2일, 독일 제국 포젠주 슈미겔 |
사망 | 1965년 5월 24일, 서독 바이에른주 바트 퇼츠 |
복무 | 슈츠슈타펠 (1933년 ~ 1945년) |
최종계급 | 슈투름압타일룽 소령 (돌격대지도자)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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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위트너 |
2. 초기 행적
독일 제국 포젠의 슈미겔[1]에서 태어난 한스 위트너는 고교졸업 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 육군에 종군하여 1915년에 소위로 승진했지만 독일의 패전 후인 1920년에 제대당하여 그 후 세일즈맨으로 일하다가 1928년부터 프리랜서로 일했다.3. 나치당 입당
한스 위트너는 1931년에 나치당에 입당했다. 1933년에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체육강사가 된 위트너는 이 때 돌격대와 친위대에 입대했는데 1934년에는 뮌헨의 돌격대 훈련소의 소장이 되었다. 1935년 이후엔 완전히 친위대원으로 활동하여 이후 무장친위대가 되는 친위대 특무부대에서 일했다. 1936년 9월에 친위대 소령으로 승진한 위트너는 베를린 사령부에 배치되었다.4. 제2차 세계 대전
위트너는 친위대 특무부대의 예비대 감독으로 일했는데, 1940년에 위트너는 사령부에서 유력자가 되었다. 8월 15일에 친위대 작전본부가 신설되자 본부장으로는 하인리히 힘러가 앉았지만 실무는 위트너가 담당했다. 1943년 7월에 위트너는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3년 1월 30일엔 힘러로부터 친위대 작전본부장의 자리를 양도받아 정식으로 취임했다. 1944년 7월 20일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고 힘러가 국내예비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위트너는 그 대리로 지명되어 국내예비군의 실권도 장악했다.5. 전후 재판과 행적
독일의 패전 후인 1945년 5월 17일에 영국군의 포로가 된 위트너는 1948년에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듬 해에 4년으로 감형되어 복역 후 바이에른 주 바트 퇼츠에서 노인 요양소를 운영하다가 1965년에 사망했다.[1] 현재는 폴란드령 슈미기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