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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8년 10월 14일 |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現 폴란드 실레시아) | |
사망 | 1947년 1월 16일 (향년 48세)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레포르토바 수용소 | |
복무 | 나치 독일 육군 → 무장친위대 |
1914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중장 (나치 독일 육군 → 무장친위대 집단지도자) |
주요 참전 | 폴란드 침공 기사의 도약 작전 독소전쟁 |
주요 서훈 | 곡엽 검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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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좌)안드레이 시쿠로와 판비츠, 카자크 부대 내 행사에서 (우)표트르 크라스노프와 판비츠 |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 육군-친위대의 장군. 최종계급은 무장친위대 집단지도자 겸 육군 중장. 2차대전기 내내 독일 측 카자크 기병대를 지휘했다.
종전이후 미·소·영 3국의 약속에 따라 독일 측 카자크들이 소련으로 송환되자 독일인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스스로 들어가 부대원들과 재판 받았으며, 주요 지휘관이었던 안드레이 시쿠로, 표트르 크라스노프 장군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참고로 2차대전 말기에 15 SS 카자크 기병군단으로 확대, 이전편성되면서 부대 자체는 무장친위대 산하로 편입되었으나 판비츠 본인이 SS로부터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고 계급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기록이 없었다.
2. 생애
헬무트 폰 판비츠는 당시에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국경에 접해 있었던 슐레지엔의 로젠베르크 O.S.[2]에서 프로이센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에 프로이센 사관 학교에 입교했고 국경 지역 출신답게 카자크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사관생도로써 독일 제국군 1기병연대에 지원자 자격으로 참전했고 나중에 16세의 나이로 중위까지 올랐다. 같은 해 2등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1년 뒤에는 다시 1등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1차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유 조약을 거부하는 독일 내 무장단체인 자유군단의 리더가 되어 폴란드 분리주의자들에 대항했으며, 1920년에 우익세력이 바이마르 공화국 전복을 기도한 카프 폭동이 일어나자 판비츠는 여기에 참여했다. 브레슬라우에서 사회민주주의자를 살해한 혐의로 수배되자 폴란드 제2공화국으로 도피했다가, 나중에 검은 제국군의 리더로써 정치인을 암살하다 퀴스트린 폭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다시 수배되었고 다시 판비츠는 폴란드, 헝가리로 도피했다.
이후 1931년, 사면을 받은 판비츠는 독일로 돌아와 재입대했고 대위 계급이 보전되어 2기병연대 기병대대장으로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근무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이 일어나면서 오스트리아 빈에 주둔하는 11 기병연대에 소령진급과 함께 파견연대장으로 발령받게 된다. 이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프랑스와 폴란드에 주둔했던 45 보병사단의 파견정찰대의 지휘관으로써 활약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판비츠는 다시 독일 국방군으로 복무했으며 1941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활약해 전공으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과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대령으로 진급했다.
한편,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면서 독소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미 동유럽 일대는 소련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소전쟁초기 현지인들은 독일 국방군을 일종의 해방자로 여겼었다. 이 과정에서 섭렵한 카자크 출신 망명자인 표트르 크라스노프, 안드레이 시쿠로 장군이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소련에 대항해 전투에 참전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괴벨스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망명한 백계 카자크들이나 카자크 포로 중 자원자들을 소집해서 1942년부터 1943년에 걸쳐 카자크 기병여단(Cossack Cavalry Brigade)를 창설했고 기병장교인 판비츠의 지휘하에 두었다. 이때 만들어진 제1카자크 기병연대에 소속된 연대급 지휘관들은 소련군에서 투항한 이반 코노노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독일인으로 구성되었었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 일대의 파르티잔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토벌 과정에서의 잔혹함으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대한 기사의 도약작전에도 투입되었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에서의 진압작전 중 판비츠 지휘하의 병력들이 민간인에 대한 강간, 방화, 약탈, 즉결처형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그 횟수와 정도가 전쟁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을 정도를 넘어서자 판비츠는 그러한 행위를 금지시키고 최대사형으로 처벌한다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1943년에는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때의 수여식에서 전간기의 행보도 그렇고 보수적인 귀족가문출신의 독일인임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에게 슬라브 민족을 열등한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선 전략적인 차원에서 틀린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해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 카자크 전통복장의 판비츠 |
판비츠는 러시아 정교회 활동에 카자크 부대원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카자크 출신 군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또 카자크 기병대의 자체적인 계급 중에서 가장 높은 펠다타맨이라는 계급이 부여됐는데 전통적으로는 차르에게만 부여되는 계급이었다.
이후 1945년에 판비츠와 15 SS 카자크 군단의 병력은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영국군 8군단에 항복하면서 연합국 쪽에서 처분받기를 희망했지만 이미 연합국 간에는 소련으로 대부분의 독일 측 카자크들을 넘겨줄 것에 대한 약속이 있었다. 휘하병력들은 트럭 단위로 줄줄이 소련으로 송환되었으나 정작 판비츠 본인은 독일인, 독일 국적이었기 때문에 송환되지 않았다. 하지만 판비츠는 서방측에서 처분받을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처형되거나 굴라크행이 예정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소련 관할하에 있었던 유텐베르크에 투항했다.[3] 이때 판비츠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카자크들과 불행 속에서도 함께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같은 부대 지휘관이었던 표트르 크라스노프와 안드레이 시쿠로 등과 함께 전쟁범죄로 기소돼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가 교수형을 당하고 거의 50년이 지난 1996년 판비츠의 가족들이 러시아 연방에 유죄판결에 대한 파기를 청원했고, 이후 열린 군사최고재판에서 판비츠를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의 희생자로 규정해서 복권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다음 해인 5년 뒤 2001년에 1996년의 재판권한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진 끝에 결국 판비츠의 전쟁범죄 유죄판결은 유효한 것으로 판결되었다.[4] 개인의 의견에 의해서 결정이 번복된 것이다.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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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배경 | 러시아 내전 | 제2차 세계 대전 | 독소 전쟁 | |
주요 이념 | 파시즘 | 반소주의 | 반자본주의 | 러시아 내셔널리즘 | |
주요 인물 | 요제프 괴벨스 | 하인리히 힘러 | 헬무트 폰 판비츠 | |
안드레이 블라소프 | 표트르 크라스노프 | 표도르 아브라모프 | 세르게이 부냐첸코 | 표도르 트루힌 | 이반 코노노프 | 미하일 스코로두모프 | 보리스 시테이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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