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colcolor=#fff> 오토 칠리악스 Otto Ciliax | |
출생 | 1891년 10월 30일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노이디텐도르프 (現 독일 튀링겐 주 네세아펠슈테트) | |
사망 | 1964년 12월 12일 (향년 73세) |
서독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뤼베크 | |
복무 | 독일 제국 해군 →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 → 나치 독일 해군 |
최종 계급 | 대장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 영국 해협 돌파작전 |
주요 서훈 |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대양함대기장[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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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계 1, 2차대전 독일 해군의 제독. 영국 해협 돌파작전의 입안자로써 기함 샤른호르스트에 승선하여 항행을 지휘하였다.2. 생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기에는 SMS 하노버에서 근무하였고, 1916년에는 HMS 노팅엄을 격침하였던 SM U-52에 배속되었었다. 이후 1918년 SM UB-96, UC-27에서 근무하였고 1차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해군에 계속 남아 있었다.전간기였던 1936년에는 해군최고사령부 작전부의 어뢰정 사령관 겸 참모로 재직하였고 그 이후부터 1938년까지는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아트미랄 셰어 함장으로써 근무하였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었던 1938~1939년 사이에는 샤른호르스트의 함장으로써 참전하였었다.
세계 2차대전 기간인 1941년, 해군의 함급별 사령관 중 전함사령관에 보임되었다. 1942년 비스마르크의 침몰 이후, 브래스트에 남아 있던 프린츠 오이겐, 그나이제나우, 샤른호르스트 3척의 전함의 주둔지를 빌헬름스하펜으로 이전하는 영국 해협 돌파작전(케르베로스 작전)을 입안, 현장 지휘하였다. 해군력이 비교적 약했던 당시 크릭스마리네의 상황에서 전함들의 역할보다 항공 전력의 엄호가 더 중요했고, 영국 해군도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주요 전함들이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전함 간의 교전은 없었다. 하지만 크릭스마리네의 주요 전함들은 영국의 기뢰가 매설된 해역을 지나면서 타격을 입었고 이 때 칠리악스가 승선해 있었던 샤른호르스트함도 폭발로 인해서 큰 손상을 입었다. 결국에는 목적지였던 빌헬름스하펜까지 무사히 주요 전력을 보존하여 복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어뢰정 총감직을 맡았다가 1943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하여 노르웨이 해군집단사령부의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카를 되니츠와의 마찰로 인해서 1945년, 테오도어 크란케로 교체되었다. 1945년 종전과 함께 잠시 포로가 되었지만 1946년에 풀려났고 1964년에 사망한다.
아들 오토 H. 칠리악스도 독일 연방해군에서 근무하였고 준장(Flottillenadmiral)까지 올랐다.
[1] High Seas Fleet Badge(Das Flottenkriegsabzeich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