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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Hyazinth Graf Strachwitz von Groß-Zauche und Camminetz 히아친트 슈트라흐비츠 폰 그로스자우헤운트카미네츠 백작[1] |
출생 | 1893년 7월 30일 |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주 그로스슈트렐리츠 군 그로스슈타인[2] | |
사망 | 1968년 4월 25일 (향년 74세) |
서독 바이에른 주 트로스트베르크 | |
복무 | 프로이센 왕국 육군 → 국가방위군 육군 → 나치 독일 육군 → 슈츠슈타펠 |
최종 계급 | 중장 (나치 독일 육군) 대령 (슈츠슈타펠 연대지도자)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 |
주요 서훈 | 금강석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
별명 | 전차백작(Der Panzergra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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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아친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 폰 그로스차우헤운트카미네츠 (Hyazinth Graf Strachwitz von Groß-Zauche und Camminetz) |
2. 생애
2.1. 초기 행적
1893년에 슐레지엔의 그로스슈타인(Grossstein)[3] 에서 유서깊은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 슈트라흐비츠는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은 후 베를린으로 보내져 프로이센 왕국의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후원을 받은 프로이센 국왕의 호위부대인 <Garde du Corps>의 일원이 되었다.[4] 슈트라흐비츠는 입대 후에도 리히터페르데 군사대학에서 공부했다. 또 스포츠에도 열성적이어서 특히 승마와 펜싱, 육상경기에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1916년에 슈트라흐비츠는 예정된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이 확실시되었지만 이 올림픽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중지되었다.2.2. 제1차 세계 대전
그는 서부전선에 출전해 전공을 세워 1914년에 중위로 승진한 후 두 개의 철십자 훈장을 수상했다. 그러나 1914년말 프랑스군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당시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어 게릴라로 의심받아 프랑스 법정에선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슈트라흐비츠는 곧 감형되어 프랑스 남부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는데 독일이 패전한 후, 석방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로 귀국했다.2.3. 국가방위군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 육군에 복귀해 1920년부터 1930년 초까지 제7 기병연대의 예비역 장교로 있었다. 1934년에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독일군의 기계화가 요구되자 슈트라흐비츠는 전차부대에 배속을 희망하여 그는 1935년에 아이제나흐의 파견 제2 전차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소령으로 승진해 제1 전차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2.4.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폴란드 침공 및 프랑스 침공에 참가한 슈트라흐비츠는 이어서 발칸반도에서 전투에 참가해 그로스도이칠란드 연대와 함께 베오그라드로 진격했다. 1941년 5월에 예비역 대령으로 승진한 후 1941년 6월에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제2 전차연대 제1 전차대대 지휘관이 되어 동부전선으로 이동했다.제2 전차연대는 제16 전차사단의 예하였는데 제16 전차사단은 부크 강의 교두보를 확보하면서 오토바이 부대를 파견했지만 소련군의 반격에 마주치고 말았다. 슈트라흐비츠는 원군을 위해 잠수전차를 사용해 강을 건너 소련군을 기습했다. 이 때 그는 스스로 3호 전차에 올라 타 선두에 서서 군을 지휘했다.
슈트라흐비츠의 전차 및 예하 전차들은 소련군의 차량 300량을 파괴하고 포대를 점령했다. 독일군은 부크 강 교두보 확보에 성공해 부근의 소련군을 소탕했다. 이 공적으로 슈트라흐비츠는 1941년 8월에 기사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그 후 그의 부대는 동부전선에서 용맹을 떨쳐 슈트라흐비츠는 전차백작(Der Panzergraf)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후 제16 전차사단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지휘하던 제6군 예하가 되어 1942년 말에 스탈린그라드 부근에서 포위당했다. 당시 슈트라흐비츠는 제2 전차연대의 지휘관으로 승진해 포위망의 북쪽에서 소련군과 싸웠다. 그의 제2 전차연대는 소련군의 T-34 전차 105량을 파괴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슈트라흐비츠는 비행기로 포위망을 벗어나 후송되었다.
이 공적으로 그는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받았다. 1943년 1월에 엘리트 부대인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의 전차연대 지휘관으로 복귀한 슈트라흐비츠는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무장친위대 제3 SS 기갑사단 토텐코프와 함께 싸웠다. 여기서도 용맹을 떨친 그는 다시 훈장을 받았다. 1943년 11월에 그는 그로스도이칠란드 사단에 사임안을 냈다. 표면상 건강이 사임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사단장이던 발터 헤른라인과의 불화가 원인이었다.
2.5. 나치당 입당과 슈츠슈타펠 가입
SS소령 제복을 입은 모습 |
1943년 11월에 <슈트라흐비츠 전투단>이 편성되어 북부집단군소속으로 동부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그는 1944년 4월에 금강석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이 수여되었다. 1945년 1월에 예비역 중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구축 전차여단인 <오버슐레지엔>의 여단장으로 부임한 슈트라흐비츠는 절망적인 잔황속에서도 용맹을 떨쳐 소련군의 전차 및 차량 100대를 격파했다.
2.6. 전후 행적
1945년 4월에 전황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슈트라흐비츠는 부하들에게 비인도적인 소련군의 포로가 되느니 미군의 포로가 되라고 설득했다. 그는 소련군의 포위망을 결사적으로 탈출해 체코슬로바키아로 후퇴한 후 다시 바이에른 주의 미군에 투항했다.미군의 포로가 된 슈트라흐비츠는 1947년 6월 석방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한 슐레지엔은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되어버려 슈트라흐비츠도 돌아갈 고향과 영지를 잃고 말았다. 1947년 7월 노라 폰 슈툼(Nora von Stumm, 1916–2000)이란 여성과 결혼해 2남 2녀를 뒀다.
1949년 시리아군의 군사고문으로 취임했다가 1951년 서독으로 돌아와 바이에른 주에서 거주하던 슈트라흐비츠는 1968년 4월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그로스차우헤운트카미네츠'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2] Groß Stein, Landkreis Groß Strehlitz. 現 폴란드 오폴레주 크랍코비체군 고골린읍 카미엥실롱스키 (Kamień Śląski). 이곳이 속한 고골린은 지금도 독일인이 20% 가까이 사는지라 폴란드어와 함께 독일어도 공용어다.[3] 그의 가문은 슐레지엔 지역에서 가장 많은 토지와 산림을 소유했을 만큼 엄청나게 부유했다.[4] 이 부대는 프리드리히 대왕시절, 1740년부터 이어져 내려 온 역사깊은 부대로 모든 독일육군 중에서 최고명문 부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