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융커(Junker)[1]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지배 계급을 형성한 보수적인 토지 귀족 세력을 말한다.2. 내용
오늘날에는 융커가 독일, 그중에서도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지주 귀족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굳어졌지만, 융커라는 단어 자체는 민족국가의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게르만족 사회에서 꽤나 광범위하게 쓰였고, 따라서 이웃의 네덜란드나 스칸디나비아 말에도 융커라는 단어가 있다.[2]융커의 주된 영지는 엘베강 동쪽의 중동부 독일, 그러니까 오늘날 브란덴부르크, 포메른, 슐레지엔, 포젠, 동프로이센, 서프로이센 등지에 분포하고 있었다. 독일 동부지방은 중세기 이래 독일인의 동방식민운동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이곳 농민의 부역생산으로 지탱되는 대농장을 거느린 지주 토지귀족을 융커라 불렀다. 독일 동부지방의 이런 대농장 위주의 구조는 소규모 자영농 위주인 독일 남서부 지방의 바이에른, 슈바벤 등과 대조적인 특성을 이루었다.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독일 남서부 지역은 로마법의 영향을 받아 토지를 비롯한 재산이 자녀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는 균등분할상속법이 통했기 때문에[3] 세월이 지나면 농토가 조각조각 나뉜 데 비해, 로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일 중동부 지역에서는 재산이 맏아들에게만 상속되는 장자상속법이 적용돼서 세월이 지나도 한 가문이 넓은 농토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 있었다.[4]
융커들은 프로이센의 지배계층으로 농업을 경영함과 동시에 프로이센 정부와 군부의 중요한 자리를 독점하였고 큰 세력을 휘둘러서 특권을 유지했다. 문화적으로는 그리 세련되지는 못한 계층이었으나 군사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유능했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잘 챙겨주는 호엔촐레른 왕조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그 결과 이들의 위세는 1871년 독일 통일을 기점으로 정점에 이르렀으며[5] 아예 "제국은 프로이센에 의해 돌아가며, 프로이센은 융커에 의해 돌아간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3. 쇠퇴
하지만 절정기라는 얘기는 앞으로는 내려갈 일 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실제로 융커들의 몰락이 시작된 것도 독일 제국 시기였다. 자신들의 토지와 농업에 집착하는 바람에 융커들의 본거지였던 독일 동부지역은 산업화를 통해 눈부시게 성장한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되었고, 이곳 주민들 역시 낙후된 경제사정과 꼴통+꼰대 융커의 착취를 피해 서부 공업지대로 이주해버렸던 것이다. 또 외국으로도 많이 이주했는데, 실제로 20세기 초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장 많이 갔던 지역도 포젠, 서프로이센, 동프로이센이었다. 1871년 당시 독일의 농어촌 인구는 64%였지만 1907년이 되면 33%로 줄어들면서 융커들에게 타격을 가했다.여기에 20세기 초반이 되면 신대륙이나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에서 나온 싼 수입 농산품이 독일 본토 시장을 강타하면서, 융커들도 이에 대응해 자신들의 농장을 기계화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각종 관세를 매겨서 수입 농산물을 억제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정치적 권력을 이용해 부유한 서부를 착취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프로이센내에서 두드러졌는데, 프로이센 의회는 독일제국 의회와 달리, 3계급 투표제라는 차등투표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고, 이 때문에 프로이센 의회에서 융커가 치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제국의 상층부를 이루고 있던 융커들은 자신들의 근거지인 브란덴부르크, 포메른 지방이 위협받지 않도록 동프로이센 방면을 방어하기 위해 슐리펜 계획을 무시하고 막대한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빼돌리도록 군과 정부를 압박[6]했으며, 결과적으로는 무익한 것으로 판명된 이 행동이 전쟁장기화에 기여하면서 궁극적으론 독일 제국 붕괴의 큰 원인이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히틀러 체제를 거치면서 융커의 몰락은 더더욱 가속화됐지만, 그래도 무너진 제정(帝政)과는 달리 융커가 지니고 있던 정치적, 군사적 권력이나 융커라는 계급 자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까지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하지만 평민에 사병 출신이던 히틀러는 융커들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나치 독일 시기의 융커들은 독일 제국 시기와는 달리 귀족적인 티를 안내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융커들을 견제하기 위해 에르빈 롬멜, 발터 모델 등 평민 출신 장군들을 적극 등용했다.
패전이 점점 확실시되면서 일부 융커들은 영향력과 영토를 지킬 가망이 없는 소련의 점령이 아닌, 그나마 귀족주의에 대해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한 영국[7]이나 미국[8]과의 평화협정을 통해서 영향력을 지키고자 했다. 이들을 소위 검은 오케스트라라고 지칭하며, 이들이 주체가 된 반나치 저항운동으로 1938년 오스터 음모사건과 1944년 발키리 작전이 있다. 결국 무장 친위대를 비롯한 나치당과 직접 연결된 무력 집단들이 이를 진압하였고 융커로 분류되는 국방군 내부의 인사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4. 몰락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과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을 분할점령함에 따라 그 지역의 융커들은 땅을 잃고 피난민 신세가 되었고, 오데르-나이세 선 서쪽의 융커들도 동독의 토지 개혁(Bodenreform)[9]에 의해서 소멸되었다. 서독 융커들은 재산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규모가 크지 않았고[10], 또 이미 정부가 대놓고 제조업 위주로 경제정책을 펴기 시작했기 때문에 농업 위주의 경제적 기반을 가진 대지주인 융커들은 한낱 지역 토호로만 남았을 뿐 이전과 같은 정치적 영향력은 갖지 못한 채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2022년 독일 쿠데타 모의에서 몇몇 융커들도 가담한 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
5. 출신 인물
북독일 연방 결성 이후 정계를 통해 독일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고의 엘리트 계급으로서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정계, 재계, 학계 등 모든 분야에서 이름에 폰(von)이 들어가는 근대 독일 역사의 거물들, 특히나 군인들은 다수가 융커 출신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요한 하인리히 폰 튀넨 (1783 ~ 1850)
- 한스 요아힘 폰 치텐 (1699 ~ 1786)
-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 (1721 ~ 1773)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1780 ~ 1831)
-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1742 ~ 1819)
- 오토 폰 비스마르크[11] (1815 ~ 1898)
- 헬무트 폰 몰트케 (1800 ~ 1891)
-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1838 ~ 1917)
- 알프레트 폰 슐리펜 (1833 ~ 1913)
-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1848 ~ 1916)
- 파울 폰 힌덴부르크 (1847 ~ 1934)
-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1849 ~ 1945)
-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1892 ~ 1918)
- 한스 폰 젝트 (1866 ~ 1936)
- 쿠르트 폰 슐라이허 (1882 ~ 1934)
- 프란츠 폰 파펜 (1879 ~ 1969)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1893 ~ 1946)
- 발두어 폰 시라흐 (1907 ~ 1974)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1875 ~ 1953)
- 페도어 폰 보크 (1880 ~ 1945)
- 귄터 폰 클루게 (1882 ~ 1944)
- 빌헬름 리터 폰 레프 (1876 ~ 1956)
-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1895 ~ 1945)
- 에리히 폰 만슈타인 (1887 ~ 1973)
- 게오르크 폰 퀴힐러 (1881 ~ 1968)
- 발터 폰 브라우히치 (1881 ~ 1948)
- 발터 폰 라이헤나우 (1884 ~ 1942)
-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1881 ~ 1954)
-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1881 ~ 1954)
-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1892 ~ 1945)
- 핫소 폰 만토이펠 (1897 ~ 1978)
-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1878 ~ 1946)
-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1899 ~ 1972)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1907 ~ 1944)
-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1878 ~ 1966)
- 헤닝 폰 트레슈코프 (1901 ~ 1944)
- 빌헬름 리스트 (1880 ~ 1971)
- 에르빈 폰 비츨레벤 (1881 ~ 1944)
- 베르너 폰 브라운 (1912 ~ 1977)
[1] 중세 독일어로는 Juncherre, 현대 독일어로는 Jung(젊은) Herr(주인님), 즉 도련님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Young Sir.[2] 네덜란드어로는 Jonkheer라고 한다. 이 단어에서 나온 유명한 지명이 현대 뉴욕의 용커스(Yonkers) 일대이다. 그리고 현 네덜란드 국왕 빌럼알렉산더르도 아버지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Claus von Amsberg)가 무작위 하급귀족이라 융커 작위가 최말단으로 붙는다.[3] 위에서 설명한 지역들 모두 로마 제국의 속주여서 수백 년 간 직접 지배를 받았는데, 슈바벤 지역인 바덴 대공국과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바이에른 왕국은 라이티아 속주였다.[4] 현재 독일은 전국적으로 균등분할상속법이 원칙이나, 국지적으로는 장자상속을 허용한다.[5] 물론 이런 배타적인 기득권은 기타 독일 지방, 특히 남서부의 바이에른과 라인란트 일대의 부르주아들에게 거센 반발을 사면서 경멸어린 시선을 받았다. 융커에 대한 경멸심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바로 라인란트 출신의 서독의 초대 연방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남독일 지역에서 융커라는 단어는 일종의 멸칭으로 쓰이고 있을 정도이다.[6] 동프로이센이 역사적인 의미 때문에 중요해서가 아니라 동프로이센이 발트해 연안 지역과 폴란드를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고 동프로이센이 무너지면 서프로이센, 포메른, 그리고 핵심지인 브란덴부르크까지 순식간에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독일 제국의 융커 출신 비중은 당연 브란덴부르크와 포메른 출신이 제일 많았고 동프로이센 출신 융커들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 시절에 거의 정리되어 숫자도 많지 않았다.[7] 실제로 윈스턴 처칠같은 영국 보수당 정치가들은 언싱커블 작전처럼 전후의 냉전 시대를 염두에 두고 융커들을 소련에 대항할 반공 선봉장으로 밀어주려고 했다.[8] 미국의 경우 한번도 귀족제도가 공직적으로 존재한 적은 없지만, 당시에는 보스턴 브라민같은 앵글로색슨 개신교도 상류층이 정재계를 장악하여 미국 사회에서 일종의 귀족처럼 위세를 부리던 시기였다. 특히 이들은 뉴딜정책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보수연합을 지지하면서 당시 미국에 비해 훨씬 기업친화적인 경제환경을 갖춘 독일에 호감을 가졌다.[9] 당시 토지개혁 구호부터가 아예 "융커의 땅을 농민의 손으로"였다.[10] 사실 이쪽은 이미 중소 자영농 수준이었고 정치권력도 별로 크지 않았다.[11] 젊었을 때는 자기가 거느리던 농노들을 무장시켜서 무려 의회를 습격하려고 했었던 초강경파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