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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프로이센 Westpreuße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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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 1945년 | |||||
프로이센 왕국 (1772~1871) 독일 제국 (1871~1918) 바이마르 공화국 (1919~1933) 나치 독일 (1933~19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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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인민 공화국 | |||||
행정 | |||||
시간대 | (UTC+1/+2) | ||||
주도(州都) | 단치히 | ||||
인문환경 | |||||
면적 | 25,534km² (1890년 기준) | ||||
인구 | 1,703,474명 (1910년 기준) | ||||
인구밀도 | 66.7명/km² |
폴란드어: Prusy Zachod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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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동부를 이루고 있던 주. '서'프로이센이라는 명칭 때문에 서부 지역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간혹 보이는데 프로이센 전체는 독일 제국 최동단이다. 어디까지나 동프로이센보다 서쪽에 있어서 서프로이센이라는 명칭이 붙었을 뿐이다. 이는 베스트플란데런과 오스트플란데런의 관계와 유사하다.2. 역사
2.1. 초기
본래 서프로이센 지역은 폴란드 왕국의 영토였으나 폴란드가 고공 분할 시대로 약해지고 발트해 일대의 이교도를 개종하려던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의 초빙으로 들어온 튜튼 기사단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1454년 튜튼기사단의 지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의 도움을 받은 덕에 반란은 성공했고 이 일대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독자적인 하나의 지역으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전통적으로 포메른의 일부로 취급되는 포메렐리아와 서프로이센 지역을 묶어서 왕령 프루시라는 지역을 만들어, 포메렐리아도 프로이센의 역사의 일부로 포함되게 된다. 반면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오늘날의 동프로이센 일대는 튜튼 기사단이 폴란드 왕국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그대로 통치했으며, 이후 종교 개혁 시기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가 개신교로 개종하고 세속주의를 채택함에 따라 프로이센 공국으로 재탄생했고 서프로이센과 다른 길을 걸었다. 이후 1618년 요한 지기스문트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프로이센 공작의 지위도 겸하게 되었다.2.2. 프로이센 왕국 서프로이센 주(Provinz Westpreußen)
프리드리히 대왕은 1772년의 1차 폴란드 분할을 통하여 그단스크를 제외한 서프로이센 영토를 점령하고 프로이센의 오랜 숙원이던 동프로이센과 본토 브란덴부르크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2]프리드리히 대왕은 본토인 브란덴부르크와 외지인 동프로이센을 연결하는 이 요충지를 즉시 독일화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개인적으로 폴란드인을 지극히 혐오하여 서프로이센 지역이 캐나다 식민지보다 덜 문명화되었다며 폴란드인을 이로쿼이족에 비유했다. 과연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기만의 캐나다 식민지를 문명화하는 거대한 과업에 정력적으로 착수했다. 그는 폴란드 왕실과 수도원, 귀족 소유의 토지들을 몰수하고 이를 독일인 이민자들에게 나눠주어 경작하게 했고, 폴란드인 귀족들에게 과중한 세율을 부과하여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만들었다. 특히 폴란드 귀족에 과중한 세율을 물린 정책은 폴란드 귀족뿐만 아니라 폴란드 농민들마저 망하게 만들었다.[3]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패하면서 일시적으로 남부 지역이 바르샤바 공국의 일부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로는 당연히 도로아미타불. 참고로 1824년부터 1878년까지는 동프로이센과 통합되어 프로이센 주(Provinz Preußen)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 불어닥친 민족주의 광풍에 발맞추어 프로이센 왕국 역시 이 일대의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독일의 다른 지역들처럼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독일인들이 이 곳으로 이주해오는 한편 독일화가 거세졌다. 특히 1871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로는 이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독일 정부는 각종 세제 혜택이나 국책사업을 독일인들에게 수주해주었다. 그 외에도 독일인에게 서프로이센에서의 각종 사업 권유 및 허가를 집중적으로 주었다.
이런 독일의 노력 때문인지 20세기 초반이 되면 상당히 동화가 진척되어서 전체 인구의 40% 이상이 독일인이었으며, 독일어를 제1언어로 구사하는 사람은 인구의 70% 정도였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협상국이 민족자결주의와 더불어 신생 폴란드에게 해양 접근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이 지역의 대부분은 신생 폴란드 제2공화국으로 넘어갔으며 주도 단치히는 단치히 자유시라는 특별 자치 형태로 분리되었다. 그에 따라 123년만에 다시 동프로이센은 독일 본토와 분리된 월경지가 되었고, 이는 독일인들을 가장 격분케 한 전후조치 중 하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립 이후로도 독일은 공공연히 폴란드와의 국경 승인을 거부했고 영토 반환을 이유로 폴란드산 석탄 수입을 막거나 항구 사용을 거부하는 등 무역 분쟁을 여러 차례 일으켰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에는 아예 대놓고 폴란드를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으며 이는 '폴란드를 언젠가 손 한 번 봐줘야 한다'고 여겼던 독일 군부도 마찬가지였다.
2.3. 후신(?) : 포젠-서프로이센 변경주와 서프로이센 관구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폴란드 제2공화국은 발트해로 나가는 통로('폴란드 회랑')을 얻을 수 있었다. 상술했듯 서프로이센 주의 주도였던 단치히와 그 주변은 단치히 자유시라는 이름의 국제연맹 관할구역이 되었으나, 특히 독일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일부 지역(플라토, 슐로샤우, 도이치 크로네)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잔류할 수 있었다.역시 독일인들이 많이 거주해 바이마르 공화국에 잔류한 포젠 주 일부 지역들(슈나이더뮐 시, 네체크라이스, 봄스트, 프라우슈타트, 슈베린, 메세리츠)을 합쳐, 바이마르 공화국은 1922년 7월 1일에 '포젠-서프로이센 변경주(Grenzmark Posen-Westpreußen)'를 출범시킨다. 주청 소재지는 슈나이더뮐(Schneidemühl).
포젠-서프로이센 변경주의 영역. 북쪽 덩어리 가운데 남쪽 끝 네체크라이스와 주도 슈나이더뮐을 제외한 곳이 구 서프로이센 주였던 지역이다. 비록 찌꺼기(...)만 남았지만, 동프로이센으로 가는 프로이센 동방철도가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었기에 나름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1938년, 이 변경주를 포메른과 브란덴부르크에 분할 합병시켜버린다.
한편 동프로이센에 가까우면서 독일인들이 다수였던 서프로이센 지역(엘빙, 마리엔부르크, 슈툼, 마리엔베르더, 로젠베르크)은, 1922년 7월 1일부로 동프로이센 주가 관할하는 '서프로이센 관구(Regierungsbezirk[4] Westpreußen)'가 된다. 관구청 소재지는 마리엔베르더[5]였다.
2.4.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급기야 1938년 이후로 독일은 폴란드에게 단치히로 가는 철도에 대한 치외법권을 요구했고 폴란드가 이를 거부하면서 2차대전이 발발한다. 어찌보자면 서프로이센은 2차대전의 도화선이었던 셈. 폴란드 침공 이후 이 일대는 다시 독일의 영토로 편입되지만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고 이 일대는 다시 폴란드의 영토로 돌아옴과 동시에 이 일대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은 모두[6] 독일 본토로 추방당했다. 폴란드는 획득한 서프로이센 지역에서 포메렐리아를 분리해 그단스크 주를 새로 설치했고 지금도 서프로이센 지역은 바르미아마주리주, 포메렐리아 지역은 포모제주로 서로 다른 행정구역을 이룬다.[7]3. 출신 인물
4. 외부 링크
5. 관련 문서
[1] 포츠담 회담의 결과 비스툴라곶 북부 지역이 소련에게 할양되었다. 이 지역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로 편입되었으며 현재 칼리닌그라드 주 중 유일하게 구(舊) 서프로이센 지역으로 이루어진 곳이다.[2] 국토가 연결되면서 같은 시기 예카테리나 2세의 지도 하에 무섭게 성장하고 있던 러시아를 유사시 손쉽게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프로이센에게 1차 폴란드 분할은 하나의 쾌거였다. 또한, 이때부터 프로이센의 군주가 국제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왕으로 인정받아 프로이센 영역 밖에서도 '프로이센 왕'으로 지칭할 수 있게 된다.[3] 이 때문에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동쪽으로 진격해오자 미적지근했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폴란드인과 달리 프로이센의 폴란드인은 바로 반란을 일으켜 나폴레옹에 붙어버렸다. 그 보답으로 나폴레옹이 세워준 것이 바르샤바 공국이다.[4] 현 또는 관구로 번역되며, 주와 시·군 사이의 중간 계층의 행정 구역이다.[5] 현 폴란드 크비진(Kwidzyn).[6] 단순히 전쟁 기간 중에 이주해온 사람 말고도 전쟁 이전부터 살던 토박이들도 싹다 추방시켜 버렸다. 뮌헨 협정 당시 주데텐란트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민족과 국경선을 일치시키지 않으면 결국 또다시 문제가 생길 거라는 판단을 연합국들이 내렸기 때문. 여담이지만 그 덕분에 폴란드는 원래 제2공화국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자국민을 포함해 독일인, 유대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등이 사는 다민족국가였지만 전쟁 후에는 99% 폴란드인만이 사는 단일민족국가가 된다.[7] 참고로 폴란드 제2공화국 시기에 서프로이센 지역은 포모제 주라는 이름의 하나의 주였다. 193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해당 주의 인구 비율은 폴란드인 88%, 독일인 10%, 유대인 2%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