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31 19:44:49

예카테리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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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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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제10대 임시 제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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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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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성모 마리아 예수의 테레사 마더 테레사
지도자들
앙겔라 메르켈 베나지르 부토 예카테리나 2세 캐시 프리먼 서태후
클레오파트라 코라손 아키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다이애나 스펜서
지우마 호세프 에디트 크레송 엘레오노르 다키텐 엘리너 루스벨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엘런 존슨 설리프 에바 페론 골다 메이어 그로 할렘 브룬틀란
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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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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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러시아 국영방송 로시야 1이 러시아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을 선정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해 투표가 진행됐으며 러시아 인구 1억 4,300만 명 중 5천만 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했다.
그러나 투표 과정에서 부정과 방송국 측에 의한 순위 조작 정황으로 인해 러시아 내에서 광범위하게 비판받았다.
1위2위3위4위
알렉산드르 넵스키 표트르 스톨리핀 이오시프 스탈린 알렉산드르 푸시킨
5위6위7위8위
표트르 대제 블라디미르 레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9위10위11위12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이반 4세 예카테리나 2세 알렉산드르 2세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ffcd30><colcolor=#000>
러시아 제국 제8대 황제
예카테리나 2세
Екатери́на II
파일:Royal Portrait of Catherine the Great.jpg
출생 1729년 5월 2일
프로이센 왕국 포메른 슈테틴
(現 폴란드 자호드니오포모르스키에 슈체친)
사망 1796년 11월 17일 (향년 67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묘소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재위 기간 전러시아의 황제
1762년 6월 28일 ~ 1796년 11월 17일
서명
파일:예카테리나 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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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cd30><colcolor=#000> 가문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
이름 독일어: 조피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Sophie Auguste Friederike von Anhalt-Zerbst)
러시아어: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 Рома́нова)
아버지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어머니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안나 엘리자베트
형제자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배우자 표트르 3세 (1745년 결혼 / 1762년 사망)
자녀 파벨 1세, 안나
종교 루터파 개신교러시아 정교회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
2.1.1. 프로이센 왕국의 시골뜨기 공녀
2.2. 러시아 제국 황후
2.2.1.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2.2.2. 불행한 결혼 생활2.2.3. 남편을 폐위시키다
2.3. 러시아 제국 황제
2.3.1. 예카테리나 2세로 즉위2.3.2. 계몽전제군주2.3.3. 찬란한 업적2.3.4. 아들과 첫째 며느리와의 악연2.3.5. 푸가초프의 난2.3.6. 둘째 며느리의 등장2.3.7. 황태손의 탄생과 양육2.3.8. 승하
2.3.8.1. 그 이후
3. 가계4. 여담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5.2. 드라마5.3. 게임
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러시아 제국황제.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 제8대 황제이자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 제2대 황제이다.

예카테리나 대제(Екатерина Великая/예카테리나 벨리카야)로도 불린다. 언어와 문화권에 따라서는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캐서린 더 그레이트, 영미권), '카타리나 대제'(Katharina die Große/카타리나 디 그로세, 독일어권), '카트린 대제'(Catherine la Grande/카트린 라 그랑드, 프랑스어권), '카탈리나 대제'(Catalina la Grande/카탈리나 라 그란데, 스페인어권)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외조부 표트르 1세와 더불어 러시아 역사상 대제(大帝) 칭호를 가진 단 둘뿐인 황제[1]이다. 전 세계 모든 여왕여제, 여군주를 통틀어 봐도 공식적으로 '대제'의 칭호를 지닌 유일무이한 인물이다.[2] 러시아의 마지막 외국인 출신 황제이자 러시아의 마지막 여제(女帝)이기도 하다.[3] 이를 반영해 차르 대신 차르의 여성형인 차리차(Царица), 차리나(Царина)로 호칭하기도 한다. 또한 황제를 뜻하는 임페라토르의 러시아어 여성형인 임페라트리차(императрица)로 칭하기도 한다.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이자 무주의 시조 및 유일무이한 황제 측천무후와 자주 비교되기도 하는데,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측천무후와는 반대로 예카테리나 2세는 등극만큼은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황제에 등극한 게 아니라 다른 쿠데타 주동자들에 의해 등극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예카테리나 2세 초창기에는 귀족들이 대놓고 허수아비 취급할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본인의 뛰어난 재능과 다방면의 유능함으로 우려와 무시를 불식시켰다. 표트르 1세 사후 니콜라이 1세 이전까지 거의 모든 러시아 황제들이 귀족 쿠데타에 의해 옹립되고 폐위되었는데, 이 부분은 같은 이름으로 즉위한 시외조모 예카테리나 1세와도 비슷하다.

2. 생애

2.1. 유년기

2.1.1. 프로이센 왕국의 시골뜨기 공녀

본명은 조피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 폰 안할트체르프스트(Prinzessin Sophie Auguste Friederike von Anhalt-Zerbst)였다. 조피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는 1729년 5월 2일프로이센군 소장인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Christian August, 1690~1747)와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안나 엘리자베트(Joanna Elisabeth, 1712~1760)의 장녀로 신성 로마 제국 프로이센 왕국슈테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안할트의 통치 가문 중 하나인 안할트체르프스트의 공작이었고, 어머니는 스웨덴 왕실의 혈통을 이은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족이다. 본인의 작위도 안할트체르프스트도른부르크 공녀였다. 즉, 표트르 1세의 외손자인 남편과 달리 러시아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인 순수 독일인이자 외국인 며느리 출신으로 대제로 성공한 인물이라는 독보적인 타이틀을 지닌 셈이다.

친정인 안할트체르프스트 가문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미약한 독일계 귀족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의 세력이 미약했다는 이야기이며 안할트의 당당한 통치 가문 중 하나이다. 일단 어머니 요안나 엘리자베트부터가 독일 올덴부르크 왕조의 분가 중 하나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 출신이었다. 외교 예법상 안할트를 다스리며 권력을 휘두른 또다른 가문인 아스카니아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의 나름 한 가닥하는 통치 가문으로 인정 받아 타국에서 왕족과 동등한 특권과 대우를 누렸다. 일례로 먼 친척이자 안할트를 다스리는 또다른 통치 가문인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스승이었으며 1703년 회흐슈테트 전투에서 27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휘관 겸 장군을 맡을 정도로 권위가 막강했다. 독일어로 공주, 공녀를 뜻하는 '프린체신Prinzessin'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피도 엄연한 통치 가문 출신의 왕족이었다. 요안나 엘리자베트의 오빠인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나중에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예카테리나 2세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칼 13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외사촌 동생들이다. 부계 쪽으로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 모계 쪽으로는 로마노프 왕조와 이어지는 막강한 혈통을 지닌 카를 페터 울리히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훗날 표트르 3세)과의 결혼도 상승혼이나 귀천상혼이 아닌 친척끼리의 동등 결혼이다.

다만, 친정이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외가인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의 재력과 부유한 친척들의 지원 덕분에 생계를 이어갔다. 조피는 시골 생활에 진저리를 내던 어머니 요안나 엘리자베트의 교육열, 그리고 조피 본인의 강한 학구열과 부지런한 끈기있는 성격으로 어린 시절부터 18세기 공주와 통치자의 부인이 되기 위한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당대 루터교와 궁중 예법은 물론 당대 유럽의 제2외국어이자 교양인의 상징으로 취급되던 프랑스어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으며 소녀 시절부터 총명하고 뛰어난 지성을 지닌 다재다능한 여걸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그릇이 남달랐는지 또래 여자애들에 비해 대담하고 활발한 선머슴으로 자랐고 검술 훈련을 하기도 했다. 훗날 조피가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황제 예카테리나 2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공부와 학문을 향한 본인의 타고난 열정과 노력도 있었지만, 다양한 지식과 책, 학문을 접할 수 있는 교육 환경과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훌륭한 어머니의 모성애와 교육열 덕분이다. 정작 예카테리나는 프로이센에서 조피 공녀로 살았던 어린 시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여겼는지 프로이센의 그림 남작에게 "짐은 그 시절 일에 아무 관심이 없소."라는 서신을 남겼다.

2.2. 러시아 제국 황후

2.2.1.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파일:peter_iii_and_catherine_ii_by_grooth_copy_in_odessa.webp

그러던 어느 날 과거 외삼촌이자 어머니의 형제 카를 아우구스트 폰 홀슈타인고토르프가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와 약혼한 인연 덕분에, 1744년 자신의 육촌[4]이자 러시아의 차기 제위 계승권자이자 실질적 추정상속인이 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러시아식으론 표트르 3세)와 결혼하게 되었다. 종교를 루터파 개신교에서 러시아 정교회개종했다.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개명하여 예카테리나 1세의 러시아식 이름인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Catherine Alexeievna)라고 불리게 된다.

공교롭게도 본명 조피도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감금된 표트르 1세의 누나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 여대공의 독일어식 이름과 똑같았다. 소피야는 러시아의 공주였고 조피처럼 야심 넘치는 여장부였다. 이복 남동생 표트르 1세의 즉위를 반대하고 황위를 얻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다 실패하고 몰락했고, 평생 반역자 신분으로서 감옥살이하게 된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반대로 예카테리나 1세는 소피야의 안티테제에 가까울 정도로 정반대의 신분과 인생 테크를 살았다.예카테리나 1세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가난한 평민 출신 포로였지만 표트르 1세의 사랑을 받아 정부에서 황후가 되었고 그의 지명 상속으로 황제로 출세하기까지 한 말 그대로 성공적이고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의 아이콘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소피야처럼 비참한 꼴을 피하고 시외조모 예카테리나 1세의 길을 따르겠다는 의미로 조피의 러시아식 이름인 소피야가 아닌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로 개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쿠데타에 실패한 소피야와 달리 쿠데타에 성공하고 시외조모처럼 황후를 넘어 황제가 되는 데도 성공하는 드라마틱한 인생사를 보면 이는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5] 선대인 예카테리나 1세는 상술했듯 남편 표트르 1세와 금슬이 매우 좋았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 표트르 3세와 금슬이 매우 나빴다.

그렇게 시골뜨기 소녀였던 조피는 시이모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를 만나러 처음 러시아 황궁에 당도한 순간 그 휘황찬란한 치장에 넋이 빠졌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조피를 한번 뜯어보고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조피와 표트르의 결혼이 정해졌다.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로서 러시아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2.2.2. 불행한 결혼 생활

예카테리나와 표트르는 신혼 무렵엔 같은 독일인이라는 점 때문에 나쁘지 않은 사이였지만, 예카테리나가 주변 사람들의 냉대와 옐리자베타 여제의 경계를 완화시키기 위해 점차 친러시아 노선을 걷자 사이가 나빠지게 된다. 게다가 남편은 백치 수준은 아니었지만 장난감 병정이나 기차만 가지고 노는 멍청하고 머리 나쁜 인물이었던데다 심각한 성불구자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래서 장기간 부부 관계가 없었고 18년간 각자 정부를 두고 살았다. 처음에 예카테리나는 남편에게 맞춰주려고 하다가 결국 남편을 혐오해 9년 동안 피해다니면서 부부 관계도 같이 회피했다.

그러던 중 얼른 후사를 낳으라는 시이모 엘리자베타 여제의 압박으로 겨우 첫 아들 파벨 페트로비치 로마노프 대공과 딸 안나 페트로브나 로마노프 여대공을 낳은 후 자신도 마음껏 놀아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세 아이 모두 각기 다른 정부의 아이였다는 풍문도 돌았지만 아들인 파벨을 보면 성격이나 생김새나 남편과 붕어빵이다. 나머지 자식들 중 요절한 둘째는 생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설이 엇갈리고, 막내 아들은 명백하게 사생아여서 러시아 황족이 받는 대공이 아닌 일반 귀족으로 백작 작위만 주었다. 이 막내 아들이 시조가 되는 가문이 보브린스키 가문으로 그의 후손들은 소련과 미국 등지에서 학자나 교수로 일하며 혁명과 대숙청의 광풍 속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

2.2.3. 남편을 폐위시키다

표트르 3세와 결혼하여 운 좋게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부인도 건너뛰고 러시아 황후가 된 예카테리나는 타고난 재능과 학구열을 살려 열심히 러시아어문화를 공부했다.

이렇게 러시아에 충의와 헌신을 바치며 열성적으로 러시아 황족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예카테리나 황후와 달리 표트르 3세러시아 정교회를 지지하지 않았다. 독일풍과 개신교만을 계속 고집했기에 러시아 내부에서도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1762년 엘리자베타 여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마자 대형 사고를 쳐버린다. 프로이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군이자 전설적인 불패의 전쟁군주로 불리던 프리드리히 2세 빠돌이였던 표트르 3세는 프로이센을 다 몰아붙였는데도 7년 전쟁에서 빠진 것. 이게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으로, 이 엄청난 스케일의 뻘짓은 러시아 국민과 귀족들의 분노를 사고 예카테리나 역시 매국 행위나 다름 없는 남편의 만행에 크게 반발한다.

똑같은 프로이센 출신임에도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총명하고 똑똑한 지성과 카리스마, 특히 러시아어와 문화를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겸손함과 근면성실함로 평판이 좋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귀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표트르 3세는 체포되어 8일 후에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이에 대해선 아마도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 (혹은 방조)가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선황 옐리자베타 여제와 라주모프스키 사이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타라카노바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정통성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명에 의해 평생 수녀원에 유폐되었다. 그 후에 유럽 사교계를 떠돌던 한 고급 창녀가 자신이 타라카노바 황녀라고 사기를 치다가 역시 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을 받은 알렉세이 오를로프 백작에 의해 납치되어 러시아로 잡혀와 감옥에서 옥사한 일도 있었는데 19세기 화가 콘스탄틴 플라비츠키의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

2.3. 러시아 제국 황제

2.3.1. 예카테리나 2세로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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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6월 28일,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는 33세의 나이에 러시아 제국 제8대 황제 예카테리나 2세(Екатери́на II/Catherine II)로 즉위한다. 프로이센의 한미한 통치 가문인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의 딸 → 프로이센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부인 → 러시아 제국 황후 → 러시아 제국 황제에 이르기까지 공작가의 공녀에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만승지군의 지위에 올랐다. 백작가 영애에서 왕비가 된 신데렐라는 물론 웬만한 로판 여주인공도 울고 갈 파격적인 출세 가도와 신분 상승을 달린 가히 입지전적인 인물인 셈.

가난한 농민 출신과 문맹이라는 한계상 정치적 입지도 미약하고 뭘 제대로 할 줄 몰라 치세도 불과 2년으로 끝난 시외조모와 달리 예카테리나 2세는 태생이 엄연한 독일계 공작가 영애로서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아 다양한 책과 학문을 섭렵한 덕에 지성과 교양, 처세술에 무척 뛰어난 재색겸비엄친딸이었고 치세 기간 폐위당한 적이 한번도 없었고, 겨울 궁전에서 승하할 때까지[6] 무려 34년에 달했다. 이를 바탕으로 황권을 강화하였고 정치, 외교, 경제, 군사, 학문, 예술, 문화, 교육, 내정 방면으로 엄청난 활약과 치적을 세웠다.

2.3.2. 계몽전제군주

국민이 군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군주가 국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중략) 군주 정치의 진정한 목적은 백성들로부터 그들이 타고난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선에 이르도록 그들을 올바로 이끄는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주의 관련 서적들을 꽤 좋아했고, 몽테스키외, 볼테르와도 여러 번 서신을 교환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여기에 감명을 받아 계몽주의적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상황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제헌의회를 소집하고 법전을 제정하고자 했으나 2년 만에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만다. 각 계층의 반대가 너무 심했던 것이다. 특히 지주들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제한될까 봐 더욱 심하게 반대하였다.

1764년에는 정부 중 한 명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시켰다. 이로서 예카테리나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7] 한편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을 숙적이라고 여겼고, 1768년부터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때의 오스만 제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국력은 여전히 강해서 러시아로서도 이기는게 쉽지 않았다.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군주를 자처했으며 실제로 그녀의 이상은 당시의 여느 서유럽 군주보다도 더 급진적이었으나, 근본적으로 지지 계층이 지주 중심의 귀족이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도 서유럽과 너무 괴리된 러시아 특유의 사회적 현실과 괴리된 급진적 이상을 강력히 추진한 예카테리나의 잘못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푸가초프의 난 이후 농노제를 강화하고 민중을 억압한 것 때문에 계몽사상가들에게 폭군 취급을 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러시아 민중에게 미움을 받았다.

오죽하면 소련 시절에 그녀의 이름을 딴 "차리친"은 반동 전제군주의 이름을 쓰는 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소련 공산당에 의하여 "스탈린그라드" 라고 이름이 바뀌었으며, 스탈린이 죽은 뒤에는 오늘날의 볼고그라드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었다. 스탈린의 선임이자 볼셰비키의 창립자인 블라디미르 레닌 또한 예카테리나 2세를 백성을 억압한 악랄한 반동 전제군주라고 격렬히 매도했다.[8]

2.3.3. 찬란한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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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주요국들의 1인당 조세수입을 비교한 표. 예카테리나 2세 재위기 동안 러시아의 1인당 조세수입이 3배가 넘게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농업과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력을 비약적으로 끌어 올렸고, 볼테르 등의 문인들을 후원하며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초청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 굉장한 업적을 세웠다. 예술에도 지대한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아서 유럽 각지에 퍼져있는 그림, 조각들을 수집, 현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만들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원래 예카테리나 2세가 휴식을 취하던 일종의 별궁으로 그녀의 초대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으나 현재는 러시아인은 물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최고 수준의 미술관이 되었다. 그녀가 사들인 미술품들도 굉장히 많다. 현재에는 한 작품당 1분씩만 감상을 해도 8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치 면에서도 큰 성과를 올렸다. 오스만 제국을 강하게 압박하여 러시아-튀르크 전쟁(1770년 ~ 1774년)에서 승리를 거두고, 뒤이어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을 체결해 오스만 제국이 쥐고 있던 흑해의 제해권을 수중에 넣고 캅카스 지역을 할양받아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았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서 수 세기 동안 약탈을 일삼으며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괴롭혔던 크림 칸국은 멸망했다.

1788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가 1721년 뉘스타드 조약, 1743년 오보 조약으로 상실한 카리알라의 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발트함대의 주력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위해 흑해로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선방했으나 1790년 7월 스벤스크순드[9] 해역에서 구스타브 3세가 친정한 스웨덴 해군에게 완패하여 베렐레 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영토 상실은 없었고 혁명 프랑스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했으나 뉘스타드 조약 이후 꼭두각시로 만들었던 스웨덴에 더 이상 내정간섭은 하지 못 하게 되었다.

1789년, 그 유명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유럽 전역에 노동자와 하층민들, 그리고 여러 귀족들 사이에서 자유주의진보주의, 계몽주의, 민주주의민족주의 열풍이 불어닥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주의를 버리고 반동주의로 노선을 틀어 보수화 정책을 펼쳤다.[10] 이후 3차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1795년 마지막 폴란드 분할을 마쳤다. 이로써 1611년 지그문트 3세 바사모스크바 함락으로 러시아에 굴욕을 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멸망시켰다.

또한 크림 칸국으로부터 해방시킨 우크라이나 동부에 카자크 농부들을 정착시키고, 새로이 정복한 옛 크림 칸국 영토에 도시를 여럿 세웠다. 이런 도시들은 내심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방하여 진정한 로마가 되고자 하는 일명 그리스 계획(Catherinian pseudo-Hellenization)의 일환으로 티라스폴, 오데사[11], 헤르손[12], 멜리토폴, 세바스토폴, 심페로폴, 스타브로폴 같은 그리스식 이름을 붙였다. 또한 볼가 강 남부 유역과 카스피해 연안에 칼미크인들의 영토를 축소시키고 그 자리에 대규모의 독일계 이민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농업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렸다.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인신매매약탈을 일삼던 크림 타타르족이 토벌되면서 농업이 안정화되고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산 밀은 러시아의 주력 수출 품목이 되었다.

2.3.4. 아들과 첫째 며느리와의 악연

예카테리나 대제를 힘들게 하는 존재가 있는데 다름 아닌 아들 파벨 페트로비치 황태자였다. 시외조부 표트르 1세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의 관계처럼 예카테리나 2세는 아들과 모자 관계가 무척 나빴다.[13]

파벨도 강제로 어머니와 떨어져 이모할머니의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자식으로서의 일말의 정이 없던 데다 표트르 3세의 혈통을 중시하던 어느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어릴 때부터 권력을 갈망하며 어머니로부터 표트르 3세의 유일한 아들로서 정통성이 더 강하다는 명분을 앞세워 황위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예카테리나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무척 싫어하고 증오했다. 특히 파벨은 여성의 정치는 나라를 망치는 지름길이라는 그 가정교사의 교육까지 받았기 때문에 그 시대 대부분의 남성들처럼 남성우월주의가 심하여 여성이면서 황제의 자리에 앉은 어머니를 좋게 보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든지 간에 본인의 눈에는 아버지를 몰아내고 황위를 차지하고 정부들이나 장교들과 바람 피우는 어머니를 죽도록 미워했다. 예카테리나도 이렇게까지 자길 죽일 기세로 적대하고 황위까지 탐내는 것도 모자라 황제로서도 남편으로서도 문제가 명확했던 표트르를 억지로 감싸돌고 성격과 외모도 그렇게 미워했던 남편의 나쁜 점들만을 쏙 빼닮아가는 아들을 절대 좋아할 수 없었고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혐오했다. 매사 마주칠 때마다 모자는 서로에게 으르렁거리기 일쑤였고 정책적인 면에서도 격렬하게 대립했다. 사실상 예카테리나 2세와 파벨은 일반적인 어머니와 아들이 아닌 말 그대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자 일생일대의 정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버지의 무능함과 멍청함은 스스로의 폐위를 자초할 정도로 모두가 인정하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수십년간 남편을 대신해 7년 전쟁의 삽질로 혼란에 빠진 러시아를 다방면으로 부흥시키고 영토를 확장하여 유럽 강대국의 반열에 끌어올린 업적으로 정통성을 메꿀 만한 엄청난 영향력과 증조부 표트르 1세를 잇는 '대제'로서의 명성, 귀족들과 러시아 제국군에게 압도적 인기와 지지를 누리고 있었다. 또, 이런 어머니를 대책 없이 폐위시키거나 죽인다고 저절로 황위가 넘어올 리 없고 분노한 귀족들의 쿠데타가 일어날 게 뻔했다. 본인에게도 전 세계적으로 패륜아란 낙인이 찍혀 하나도 좋을 게 없기에 말만 정통성에 늘고 늘어질 뿐 그저 어머니가 죽기만을 조용히 기다려야만 했다.

여기에 더해 파벨의 첫 번째 부인이자 예카테리나 2세의 첫째 며느리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네(러시아식 이름: 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 대공비)마저 여제의 또다른 눈엣가시였다. 나탈리야 대공비는 활발하고 유쾌하며 냉철하고 진지한 여장부였지만 동시에 거만하고 충동적인 다혈질 성격이었으며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본성을 드러냈다. 영국의 외교사절 제임스 해리스 초대 맘스버리 백작도 나탈리야에 대해 남편에게 최소한의 애정을 보여주지 않고 마치 독재자처럼 지배하고 있다는 언급을 쓸 정도. 처음 예카테리나는 며느리만큼은 잘해주려고 했고 처음에는 유쾌함과 자유분방한 성격에 황실에 활기가 생기는가 싶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갈등이 생겼다. 나탈리야 대공비는 파벨을 사랑하지 않지만 권력을 휘두를 필요를 느끼고 항상 자기 지배 하에 두려고 소수의 친구를 뺀 사람들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시어머니가 갓 러시아 황실로 시집 올 때와 달리 정략결혼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러시아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고 남편의 즉위를 돕기 위해 여러 가지 정치적 음모를 꾸미는가 하면 면전에서도 막말과 적대를 서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탈리야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파벨 못지않은 비호감으로 찍혔다. 결혼한 지 2년이 지나도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꼭 필요한 후사이자 황태손을 낳지 못했기에 두 사람의 고부갈등도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2.3.5. 푸가초프의 난

설상가상으로 푸가초프의 난(1772~1775)으로 인해 모자의 관계는 아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악화되는데 당시 푸가초프는 여느 죽은 왕족 사칭자들처럼 스스로를 살아돌아온 표트르 3세라고 사칭하면서 파벨의 즉위를 명분으로 삼아 반란군을 이끌고 남러시아 대부분을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파벨 입장에선 당연히 웬 듣도 보도 못한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사칭하며 이득을 뜯어내려는 사기꾼 행세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의도치 않게 푸가초프를 뒤에서 몰래 지원한 흑막으로 용의선상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반란의 열기도 전국적으로 멈출 줄 모르고 고조되었기 때문에 뭘 어떻게 변명하든 예카테리나는 아들을 향한 배신감과 분노가 커질 수밖에 없었고 그날로 파벨과 영원한 원수지간이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그 와중에도 사태 수습을 위해 측근이자 러시아 최고의 장군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대원수 휘하의 육군을 앞세워 반란군을 철저히 진압했으며, 체포된 주동자이자 남편의 사칭범인 푸가초프도 공개처형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농노들을 더욱 탄압했다.

2.3.6. 둘째 며느리의 등장

그 후 사이가 나쁜 며느리 나탈리야가 마침내 예카테리나가 고대하던 장손자를 낳았다. 하지만 파벨과 나탈리야의 첫 아들은 사산되었고 나탈리야는 선천적인 질병인 척추분만증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며느리와 장손마저 비명횡사하자 예카테리나는 곧바로 새로운 며느리를 물색하는데,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러시아식 이름: 마리야 표도로브나)였다. 그녀는 키 크고 수려한 용모의 미남미녀들을 대대로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뷔르템베르크 가문의 공녀였다. 212cm에 달하는 엄청난 키로 유명한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대왕이 며느리를 물색하던 예카테리나의 요청에 따라 직접 러시아 황실의 혼사에 관여해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네와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를 황태자비 후보로 추천한 배경이 있었다. 먼저 황태자비로 고른 나탈리야가 사망하면서 조피 도로테아가 자연히 새로운 며느리가 된 것. 근데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된 조피 도로테아는 먼저 죽은 전임자였던 나탈리야 대공비의 오빠 헤센다름슈타트의 루트비히의 약혼자가 되어 있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이 약혼을 파기하는 조건으로 루트비히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한 덕분에 파벨과 뒤탈 없이 결혼할 수 있었다. 조피 도로테아의 어머니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는 역대 러시아 군주들의 최후가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는 걸 알았기에 딸을 걱정했지만 조피 도로테아는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러시아로 향하는 마차에 탔다. 1776년 이름을 마리야 표도로브나로 개명하고 파벨과 결혼하여 정식으로 대공비가 되였다.

마리야 표도로브나 대공비는 과연 뷔르템베르크의 공가 출신답게 무척 아름답고 빼어난 미녀라서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에게 미모 유전자를 물려줄 것이란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운 성격과 못생긴 외모로 러시아 궁정 내에 인기도 없었던 파벨을 그래도 남편이라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현모양처였고[14] 원예와 예술에도 재능이 있어 직접 꽃을 키우거나 수제 공예품들을 타인에게 선물하는 걸 좋아했으며 교육 및 자선 기관도 관심이 많았다. 미남미녀를 무척 좋아한 예카테리나는 아름답고 지혜롭기까지 한 마리야 대공비를 무척 아끼고 총애했다. 한편으로는 시어머니의 문란한 남성 편력을 싫어하고 남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둘 사이에 갈등이 터질 때마다 중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남편의 편을 들면서 반항하고 자신의 정숙함과 정결함을 이유로 시어머니보다 더 우월하다고 과시한 탓에 나탈리아 때처럼 고부갈등이 심해져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다. 한편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늘 차기 황후로서의 자각을 품고 다양한 활동에 기여하였고 예카테리나도 이런 둘째 며느리를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2.3.7. 황태손의 탄생과 양육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몸도 마음도 괴로웠던 남편 파벨도 이런 그녀를 전처 나탈리야 못지않은 사랑으로 대했다. 그 결실의 대가로 파벨 1세와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슬하에 10명의 자식들(4남 6녀)을 낳았다. 10명의 자식들을 다산하여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한 로마노프 왕가를 크게 번성시켜주었기에 예카테리나의 기쁨도 절로 늘어난 셈.

그렇게 1년이 지나 1777년 12월 23일 황태자 부부 사이에서 건강한 황태손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대공이 무사히 태어난다. 오래도록 기다려온 황태손의 탄생에 무척 기뻐한 예카테리나 2세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시이모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황제가 갓 태어난 파벨을 빼앗아 키웠듯이 이번에 본인이 알렉산드르 대공을 빼앗아 키웠다. 아들과 며느리 부부와의 면회도 1주일에 한 번만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도 빼앗기만 한 건 아니고 황태손을 낳아준 며느리 마리야에게 감사의 선물로 화려한 파블롭스크 궁전을 수여해주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어린 알렉산드르 대공을 금지옥엽처럼 무척 귀여워했다. 마치 실질적인 황태손처럼 대우하고 철저한 제왕학 수업을 진행했으며 계몽주의자유주의 사상을 가르치기도 했다.[15] 2년 후 1779년 둘째 손자가 태어나자, 예카테리나 2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둘째 손자의 양육권도 빼앗아 동로마 제국의 시조 콘스탄티누스 대제에서 따와 이름을 콘스탄틴이라고 명명했다. 두 손자 중 알렉산드르가 예카테리나와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를 더 많이 닮았고 콘스탄틴 쪽이 표트르 3세와 파벨 부자의 성격과 외모를 가장 짙게 물려받았다.

예카테리나 2세는 안 그래도 꼴도 보기 싫은 밉상 아들이 황위를 잇는 걸 바라지 않을 뿐더러 파벨 자체도 황제가 되기엔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다고 판단했는지 황태손에게 모든 희망을 걸기로 한 듯하다. 일단 모친을 향한 파벨의 정신병적인 증오심과 훗날의 어머니의 유산과 업적들까지 지우려든 행보만 봐도 자식들, 특히 황위를 이을 장남에게 좋은 점은 싹다 거르고 불쌍한 남편(...)을 죽이고 황위에 올라 많은 남자와 바람피운 사악하고 잔인한 악녀이자 폭군이라는 식으로 세뇌교육시킬 게 뻔했다. 그 결과 세뇌당한 알렉산드르는 할머니를 무조건 증오하고 할아버지 표트르 3세를 따르다 나라를 말아먹을 가능성이 너무 높았기에, 이를 사전에 파악하고 뿌리부터 차단하기 위한 나름의 보험이자 조치로도 보인다. 일설에 따르면 죽기 전 장손 알렉산드르를 황위에 앉히기 위해 파벨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는 설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장손자와 둘째 손자를 홀로 키우려고 한 예카테리나의 선택이 현명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1786년, 알렉산드르가 10살이 되자 장손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는 지지 선언을 남겼다. 하지만 파벨이 아직 눈 시퍼렇게 뜨고 건재한 데다 황위에 오르기에는 황태손의 나이도 너무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다는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 후 예카테리나는 뒤이어 태어난 손주들인 알렉산드라 여대공, 옐레나, 마리야 여대공, 예카테리나 여대공, 올가 여대공, 안나 여대공, 니콜라이 대공, 미하일 대공까지 보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예카테리나는 황태손 알렉산드르와 둘째 손자 콘스탄틴만 자기가 기르고 장손녀 알렉산드라와 그 이하 손주들의 교육권은 황태자 부부의 책임에 맡겼다.

특히 손녀들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미녀인 옐레나 여대공을 무척 아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신 여자인 헬레네에서 이름을 따와 붙였다. 세월이 흘러 청년으로 장성한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 형제를 위해 각각 바덴의 루이제 공녀[16]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공녀[17]와의 정략결혼도 추진했다.[18] 그리고 스웨덴과의 동맹을 통해 러시아의 국익을 창출하기 위해 장손녀 알렉산드라 여대공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왕비로 시집보낼 계획도 세웠지만, 러시아 정교회에서 루터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요구안을 거절해서 성사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7남 요제프 대공과 결혼하여 오스트리아 대공비가 된다.

2.3.8. 승하

1796년 11월 17일에 67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러시아 황제들 가운데 최장수 기록이다.
2.3.8.1. 그 이후
그렇게 예카테리나 2세가 승하하여 34년에 달한 예카테리나 시대는 막을 내린다. 파벨 황태자는 바로 달려와서 황위를 물려받아 러시아의 파벨 1세로 즉위하고 마리야 표도로브나도 황태자비에서 러시아 황후로 승격한다. 그러나 그는 그토록 증오하던 어머니만큼 눈에 띄는 치적과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일이 안 풀리면 다짜고짜 고함치고 화풀이하는 신경질적이고 포악한 성격과 분노조절장애, 외적으로도 표트르 3세를 닮은 작은 키(166cm)와 볼품 없는 추한 외모의 소유자라 전임자인 어머니와 비교해봐도 인간적인 매력이 너무 뒤떨어졌고, 아래와 같은 폭압적인 정책 추진으로 러시아 내에서도 대외적 이미지와 평가도 비호감으로 찍혔다.

파벨은 어머니의 유산과 업적, 정책, 흔적들을 이유 불문하고 모조리 철회하는 반 예카테리나 정책을 추진했다. 우선, 표트르 대제부터 이어져온 러시아의 지명 상속제를 폐지하고 여제의 즉위를 대대로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했다.[19] 어머니와 친분이 깊은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하고 지방 기관까지 탄압했고 국경을 폐쇄해 해외 여행과 무역마저 제재를 가했다. 최악의 암군이라 불리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한답시고 아버지처럼 본인이 좋아하는 비실용적인 프로이센풍으로 바꿔 러시아 제국군을 비효율적으로 바꾸는가 하면, 직접 정원사와 주변 신하들을 말 안들으면 손수 육체적 체벌을 가했다. 의심병이 생겨 자길 사랑해준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와 갑자기 혼인무효화하고 알렉상드르의 계승권까지 박탈하면서까지 둘째 손자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이것도 모자라서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불패의 명장이자 전설적인 구국 영웅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대원수마저 단순히 어머니의 충신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로 푸대접했는데, 대원수를 위한 추모식이라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볼품 없는 규모로 장례를 치르면서 제국군에서의 민심도 덩달아 나빠졌다.

그에 비하면 알렉산드르는 할머니와 뷔르템베르크 가문의 미녀인 어머니로부터 훤칠한 체격(178cm)과 수려한 외모를 물려받아 인기가 많았다. 태어나자마자 할머니 품에서 영재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계몽주의자유주의를 지지했고 성격도 신중하고 차분한 편이었다. 또한 어머니를 무작정 미워하고 증오하기만 했던 아버지와 달리 할머니 예카테리나를 황제로서는 아버지보다 더 존경했으며 아버지의 폭압적인 전제정치에 비판적이었다. 예카테리나도 생전에 파벨이 아닌 알렉산드르를 차기 황제로 지목했기 때문에 귀족들도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결국 귀족들은 알렉산드르를 왕위에 올리고 쿠데타의 명분을 얻기 위해 파벨의 성격을 역으로 이용하여 황후와 자녀들이 황제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감쪽같이 속은 파벨은 장남을 견제하다 못해 계승권을 박탈시키고 자식들과 아내를 쫓아낸 후 자기를 더 닮은 차남 콘스탄틴에게 체사레비치 칭호를 주려고 했지만, 어리석게도 이는 자신의 목숨을 끊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결국 파벨은 즉위 5년 만에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킨 귀족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심지어 아들 알렉산드르마저 아버지를 외면해버렸다. 어머니와 귀족들에게 폐위당하고 8일 후에 죽은 아버지 표트르 3세와 비교해 봐도 훨씬 더 비참하고 불명예적인 최후를 맞이한 셈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적장남 알렉산드르 대공이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황위를 차지하게 되고, 23세의 젊은 나이에 러시아 제국 제10대 황제 알렉산드르 1세로 즉위한다.[20][21]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시아버지를 내쫓고 즉위한 시어머니의 선례를 이어 황제에 오르려는 욕심을 드러냈지만, 아들 알렉산드르가 막았다고 한다.

알렉산드르의 즉위를 바란 예카테리나 2세의 소원은 사후 5년 만에 빠르게 이루어진 셈. 알렉산드르 1세는 예카테리나를 향한 존경심은 여전하여 즉위 후 첫 공식 연설문에서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정신과 마음으로 통치하고 싶다."고 선언했다. 할머니의 정책들을 본래대로 되돌리고 해고당한 장교와 공무원들을 복직시켰다. 귀족들의 특권도 돌려주고 할머니의 명예도 회복했다. 이렇게 예카테리나 2세는 지명 상속제의 마지막 수혜자로서 외국인 여성이라는 한계를 딛고 재능과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시대를 평정한 마지막 여제였다.

3. 가계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표트르 3세
(Пётр III)
1남 파벨 1세
(Павел I Петрович)
1754년 10월 1일 1801년 3월 23일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네 루이제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슬하 4남 6녀[22]
1녀 안나 페트로브나
(Анна Петровна)
1757년 12월 9일 1759년 3월 8일
그리고리 그리고리예비치 올로프 (사생아)
(Григо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Орлов)
1남 알렉세이 그리고리예비치 보빈스키
(Алексей Григорьевич Бобринский)
1762년 4월 11일 1813년 6월 20일 안나 도로테아 폰 운게슈테른부르크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포템킨 (사생아)
(Григо́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отёмкин-Таври́ческий)
1녀 옐리자베타 그리고리예브나 템키나
(Елизаве́та Григо́рьевна Тёмкина)
1775년 7월 24일 1854년 6월 6일 이반 칼라게오르기
슬하 4남 6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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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cccpcamera.photo-web.cc/ekate.jpg
  • 일본에서 표류하여 러시아까지 방문했던 다이코쿠야 고다유(大黑屋光太夫)가 가져 온 그녀의 초상화를 히다야(飛騨屋)가 모사한 바 있다. 원본으로 생각되는 초상화와 비교해 보자.
  • 고다유의 귀국 후 당시 난학(네덜란드학) 연구자인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편찬한 '북사문략(北槎聞略)'에서는 링크와 같이 묘사되었다.
  • 남자를 많이 밝혀 애인을 많이 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심지어 이미 나이가 60이 넘어서 죽음을 앞에 두던 순간까지도 수많은 애인들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몇 년에 한 번씩 애인을 갈아치우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헤어진 애인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영지, 관직 등을 하사하여 후히 대접하였다. 이를 두고 정치적 계산이 숨어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귀족 명문가의 자제들이나 유능한 신하들과 교류를 하는 한편 적지 않은 보상을 통해 그들을 완전히 자신의 수족과 같은 심복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비단 젊고 잘생긴 귀족 청년들뿐만 아니라 실력있고 명망 높은 장군과 신하들도 애인으로 두곤 했다. 내연남을 선발할 때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쳤는데, 우선 의사가 건강검진을 하고 합격한 후보자는 지적 능력과 황제를 즐겁게 해줄 만한 소양을 갖추었는지 검사를 받고 마지막으로 황제의 측근과 시험적인 합방을 거친 후에 충분하다고 판정되면 그때서야 황제의 침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막판엔 교양이고 지식이고 상관없이 잘생기고 젊은 미남이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들어갔다고 한다.
  • 황제의 수많은 내연남 중에 유명한 이를 몇 명 꼽자면 세르게이 살티코프 공작, 그리고리 포템킨 공작, 주보프, 알렉산드르 란스코이, 그레고리 오를로프 정도가 있다. 오를로프는 군인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잘생긴 외모로 단숨에 황제를 사로잡았다. 결정적으로 오를로프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황제가 남편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황제의 정부였고 아들도 두었다. 폴란드의 마지막 왕이자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의 원수로 활약한 것으로 유명한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의 숙부였던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와도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23] 포템킨 공작은 황제보다 10살 연하로 평범한 외모였지만 커다란 그것과 빼어난 능력으로 12년간 황제의 내연남 노릇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총애가 점점 예전만 못하자 스스로 뚜쟁이를 자처하며 황제의 애인감을 물색하고 다녔다.
  • 황제의 남성 편력 때문에 사후에 황제가 수간하다가 깔려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고 하는데, 신빙성은 별로 없다.
  • 파벨 외의 사생아들은 곧장 친부나 딴 데 맡겨버렸지만 남편 표트르도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남성들과 연애를 즐기면서 아이들까지 낳았는데 막상 공식적 아들인 파벨 1세와는 평생 소원한 관계였다. 일단 남편 표트르 3세와는 사이가 극악이었고 파벨은 태어나자마자 옐리자베타 여제가 데려다 키워서 예카테리나는 어머니로서 사랑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파벨은 생김새와 성격 모두 아버지인 표트르 3세를 닮았다. 그래도 정이 없는 건 아니라 파벨이 결혼할 때는 미모를 고려하여 아들과 함께 직접 신부를 간택했고 많은 자금을 하사하여 저택과 취미 생활에 돈을 펑펑 쓰게도 해주는 등 나름대로 겉으로나마 아들과의 관계 회복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자신을 쏙 빼닮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며느리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며 남편 파벨의 편만 들자 모자관계와 고부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달았다. 이처럼 어머니와 사이가 나빴던 파벨은 차기 황제가 될 장남인데도 궁정에서 따돌림과 공공연한 무시를 당했고, 예카테리나가 장손 알렉산드르 1세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던 생각도 이런 연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24] 아들 파벨을 싫어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거론된다. 파벨은 자식을 안 낳으면 쫓겨날 판이니 원치 않아도 낳아야 했던 아이였고 낳자마자 옐리자베타에게 빼앗겨 정을 줄 틈도 없었고 여제에게 감히 아들의 안부도 물을 수 없었다. 한 마디 삐끗했다가 자신이 옐리자베타를 믿지 못한다는 오해를 살까봐 알아서 기는 처신이었다. 파벨이 자라는 동안 예카테리나에게는 일단 궁정에 자리 굳히기가 더 중요한 때였다. 또한 그녀로서는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지만 그렇게 혐오하던 남편의 자식, 거기다 그를 닮은 아들이라 더 싫었을 수도 있다. 아들에게서 보이는 남편의 싫은 모습 때문에 정을 못 붙이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고 파벨 역시 친부의 죽음에 의혹을 품고 있었다. 결국 결혼한 파벨과 불화가 깊어지자 아들 부부에게 영지를 따로 줘서 분가시켜 버리고 웬만하면 오지 못하게 하고 옐리자베타가 파벨을 대신 후계자로 키우려 한 것처럼 손자들도 빼앗아 자신이 키웠다. 심지어 파벨의 사생아 설이 퍼진 건 바로 예카테리나 자신이 아들에게 "니 애비는 표트르가 아니고 내가 같이 잔 첫 남자라서 넌 황제 핏줄도 아님!" 같은 출생의 비밀로 통수를 친 것이 시작이다. 파벨이 러시아 황위 계승에서 여계 후손의 즉위를 막아버린 건[25] 이런 어머니에 대한 증오감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정작 파벨의 외모를 보면 아버지 표트르를 빼닮은 탓에 쌍으로 못 생겨서, 이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아들 약 오르라고 날린 빅엿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 예카테리나 2세는 독일계들을 적극적으로 러시아로 이주를 추진했고 이를 위해 러시아로 이주하는 독일인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독일계 러시아인 문서 참고.

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

5.2. 드라마

  • 예카테리나 대제(2019): HBO에서 사극 미니시리즈 4부작 '예카테리나 대제'를 방영한다. 노년의 예카테리나 집권 시기를 배경으로 하며 헬렌 미렌이 예카테리나 2세를 연기했다. 예고편 영상

5.3. 게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도미네이션즈/유니버시티/카타리나 여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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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명 시리즈: 문명 2 이후 문명 5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문명의 군주로 개근했다. 실제 초상을 가져다 쓴 문명 2를 제외하면 매 작품마다 이미지가 상이하게 다른 것이 특징으로, 문명 3에서는 나이 든 할머니로, 문명 4에는 군복을 입고 남장을 한 모습으로, 문명 5에서는 젊고 예쁜 모습으로 나왔다. 문명 6에서는 표트르 대제로 교체되었지만 문명 7에 귀환이 확정되었다. 물론 작품 특성에 따라 이번엔 꼭 러시아를 이끌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 러시아 에피소드 퀘스트에 등장하는 조피라는 독일 출신 황태자비 후보가 이 사람이다. 여기서는 본인을 쫓아내려는 러시아 귀족들의 음모에 휘말려서 고생하는 역할로 등장. 에피소드 퀘스트를 깨면 대부호 전직증을 주는데 이 대부호란 직업 전직증없이 전직하는데만 2억 두캇이 드는 직업이다. 역시 독일의 왕족이자 러시아 황태자비... 여기에선 흑발 히메컷의 소녀 모습으로 등장한다.
  • 타임 프린세스: 그녀의 일생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 '예카테리나 여제' 스토리가 출시될 예정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본래 출시 예정일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겹쳐지게 된 불상사로 인해 결국 스토리 출시가 지연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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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33,#2d2f34><colcolor=#000,#ffcc33>통치 국가<colbgcolor=#fff,#1f2023>러시아 제국 (핀란드 대공국 · 캅카스)
생애 생애
재위 시기 폴란드 분할 · 러시아-튀르크 전쟁(퀴췩 카이나르자 조약)
정책 보수주의 · 제국주의 · 계몽주의
가족 관계 배우자 표트르 3세 · 장남 파벨 1세
대중매체 더 그레이트 · 예카테리나 · 캐서린 제타 존스의 더 그레이트 · 문명 시리즈
기타 로마노프 왕조 · 러시아 제국 · 볼테르 · 몽테스키외 · 예멜리안 푸가초프 · 에르미타주 박물관 · 그리고리 포템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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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왕국에서도 대왕(大王, le Grand/르 그랑)의 칭호를 지닌 왕은 부르봉 왕조의 창시자이자 초대 국왕 앙리 4세, 앙리의 장손이자 부르봉 왕조 제3대 국왕 루이 14세 둘뿐이다. 예카테리나 대제의 프랑스어식 표기도 카트린 라 그랑드(Catherine la Grande)로 이는 당연히 '르 그랑'(le Grand)의 여성형, 즉 여성 대왕을 의미한다.[2] 잉글랜드 왕국의 여왕이자 영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중 하나로 고평가 받는 엘리자베스 1세, 시이모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만 봐도 뛰어나고 총명한 지성을 갖춘 여걸이었고 명목상으로도 실권도 국왕, 황제였고 각자 45년, 21년의 긴 치세 기간 동안 탁월한 업적을 남겼지만 이들조차 대왕이나 대제의 칭호가 없다.[3] 어머니를 매우 증오했던 아들 파벨 1세가 즉위하자마자 사적인 증오심을 나랏일에도 적용시켜 서유럽을 따라 장자의 계승을 확립시키고 여자는 황제가 될 수 없도록 준살리카법을 제정했다. 이 때문에 내손자며느리이자 예카테리나처럼 독일계 출신 황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헤센 대공국의 공녀 알릭스)는 낯가림 심한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시내조할머니처럼 러시아 궁정에 적응을 못하고 딸만 내리 넷을 낳다가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를 비롯한 시댁 어르신들로부터 아들을 낳으라는 강요와 압박을 받아 알렉세이를 낳을 때까지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걸렸다. 만일 파벨 1세가 준살리카법을 제정하지 않고 혼자서만 어머니를 증오하고 마는 선에서 끝냈다면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맏이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여대공이 러시아의 황태녀가 되었을 것이다.[4] 어머니 요하나 엘리자베트와 표트르의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가 친사촌으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Christian Albrecht von Schleswig-Holstein-Gottorf) (1641년 ~ 1695년)를 같은 증조부로 두고 있었다.[5] 소피야 자체도 반역자의 상징이자 마가 낀 이름이라 여겨졌는지 이후 러시아 황실에는 소피야라는 이름을 가진 공주가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6] 물론 지나친 농노제 탄압과 부족한 정통성 때문에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마저도 진압해버렸다.[7] 다만 즉위 후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예카테리나에게 반발했고, 결국 재침공해야 했다.[8] 물론 레닌 본인도 공산주의자로서의 행적과 볼셰비키에 의해 그녀의 직계 후손들인 니콜라이 2세 황제 일가를 정당한 재판 없이 몰살한 것을 감안하면 예카테리나 2세를 마냥 떳떳하게 비난하고 욕할 처지는 못 된다.[9] 현재의 핀란드 코트카 앞바다.[10] 이는 예카테리나 2세가 신료들이나 귀족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의 내용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편지 중에 한 구절에는 "농민들이 지식을 쌓고 자유를 얻는다면, 그것이 바로 곧 러시아 황실의 종말이 될 것이다."라고 쓰기도 하였다.[11] 오데사(오데소스)의 원래 위치는 현재의 불가리아 바르나 일대였다.[12] 사실 헤르손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고대 헤르소니소스의 위치는 세바스토폴인데 헤르손은 전혀 다른 곳에 이름이 붙여졌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게 이미 수백년 전 까마득한 일이니 지명비정이 엉망이 된것이다. 그래도 크림 반도와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동떨어진 위치는 아니다.[13] 그래도 표트르 1세는 맏아들의 황태자 지위를 박탈하고 고문 끝에 죽여버렸고 후회조차 안 했지만(그래도 장례식에서 비통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예카테리나는 여러 일설이 오가지만 공식 석상에서 한번도 마음에 안 든다고 아들을 죽이려고 하거나 황태자의 지위를 박탈하는 최소한의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들을 죽여도 별 후환이 없는 표트르 대제에 비해 예카테리나는 그 당시에는 후계자라고는 파벨 한 사람밖에 없었고 본인의 신분과 성별과 정통성 문제를 거론하며 여제의 통치에 반대하는 소수 세력들 때문에 폐위당할 위험이 컸기에, 어쩔 수 없이 냅둔 것뿐. 대신 개인적인 혐오와 맞물려 황제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직접 키운 황태손 알렉산드르를 지목했다. 후계문제를 대차게 말아먹어 러시아를 혼란에 빠트린 표트르 1세와 달리 예카테리나는 자식농사에 실패했지만 황태손만큼은 제대로 교육시켜 후계 문제도 잘 해결하려 노력했다.[14] 파벨을 사랑하는 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나탈리야 황태자비에 대한 질투도 상당해 그의 유품들을 빼앗거나 나탈리야의 시녀들과도 한바탕 갈등을 벌였다. 불륜을 싫어해서 시어머니 예카테리나 주변의 남자 애첩들을 싫어하고 늘 거리를 두었다고.[15] 거기에 부모의 결혼을 주선해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 요제프 1세가 알렉산드르 대공의 대부 역할을 해줬다.[16] 러시아식 이름은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황태자비.[17] 러시아식 이름은 안나 표도로브나.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부인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의 언니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이모이다. 또한 벨기에 왕국의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누나.[18] 하지만 애정 없는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은 옐리자베타 황후와 안나 대공비를 사랑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는 아내를 형식적으로만 대했고 그나마 제정신을 차린 알렉산드르는 마리아 나리쉬키나와 헤어지고 옐리자베타에게 사과하며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옐리자베타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정부 마리아 나리쉬키나와 사귀었으며 콘스탄틴은 아버지를 닮아 의처증이 심하고 폭력적인 쓰레기 남편이라 걸핏하면 결혼 생활 내내 안나 대공비에게 극심한 가정폭력을 휘둘렀다. 에두아르트와 루이즈 남매도 둘 사이의 자식이 아닌 모두 안나 대공비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여 낳은 사생아들이었다. 결국 지칠 대로 지친 안나는 화해하자는 남편의 말도 듣지 않고 이혼을 요구했고 1820년에 혼인무효화하고 폴란드 귀족과 귀천상혼하고는 폴란드 총독직을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가 준 체사레비치 칭호마저 미련 없이 포기하고(어차피 형이 제정한 법령 때문에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줄 수 없다.) 17살 연하 남동생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대공에게 황위를 넘긴다.[19] 알렉상드르는 이걸 다시 손보려고 시도하지 않으면서 죽은 뒤 두 번이나 굴욕적인 취급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장자상속제가 아닌 지명 상속제라는 기괴한 시스템으로 수많은 쿠데타와 반란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예카테리나를 지지한 귀족들도 준살리카법에 찬성을 표했고 알렉산드르도 즉위 후에도 콘스탄틴에게서 체사레비치 칭호를 도로 가져가지 않고 이를 내버려뒀다.[20] 알렉산드르는 이전부터 귀족들이 쿠데타를 꾸민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길 아무 이유 없이 개인적 의심만으로 황태자 지위에서 쫓아낸 건 엄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제위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사실상 이를 방관했다. 그러면서도 모후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에게 비난과 질책을 들었고 스스로도 황위를 얻기 위해 아버지를 죽였다는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받았을 때 펑펑 울면서 "나는 내게 부과된 의무를 다할 수 없다.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끊임없는 기억으로 어떻게 통치할 힘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죄의식을 고백했지만, 암살 주동자 중 한 명이자 파벨의 귀족 탄압 정책에 시달렸던 팔렌 백작은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로 "이제 그만 좀 우시고 가서 통치를 하십시오!"라고 버럭 일갈했다.[21] 알렉산드르가 아버지에게 엄청난 실망과 두려움을 느꼈던 건 사실이다. 상술했듯 그 전부터 황제로서는 아버지보다 친할머니를 더 높게 평가했고 특히 파벨의 통치에 대해서는 러시아가 '광인을 위한 장난감'으로 전락했다고 신랄한 악평을 쓸 정도로 무척 싫어하는 반응을 보였고 귀족들의 눈치와 민심을 살피며 사적으로만 죽은 아버지를 애도하고 끝내야 했다.[22]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비 헬레나 파블로브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비 마리아 파블로브나, 뷔르템베르크의 왕비 카타리나 파블로브나, 네덜란드의 왕비 아나 파블로브나, 니콜라이 1세[23] 아직 스타니스와프가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되기 전 그의 정치 스승이던 찰스 윌리엄스 경[27]의 소개로 아직은 대공비의 신분이었던 예카테리나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이후 스타니스와프가 폴란드 국왕에 당선된 뒤 이미 남편을 제거하고 황제가 된 예카테리나에게 청혼했으나 예카테리나는 거절한다.[24] 당시 러시아는 황제가 후계자를 직접 선정하는 지명제였기 때문에 장남을 건너뛰고 바로 장손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 가능했다. 어쨌든 차기 제위 계승자를 지명하던 탓에 러시아에서는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서유럽에서는 러시아를 후진국 취급하며 대놓고 비웃었다. 심지어 예카테리나와 서신까지 주고받으며 교류하던 볼테르조차 러시아 황태자 자리는 지명이 아니라 점령하는 것이 아니냐며 대놓고 조롱했다. 이후 러시아의 황태자 지명제는 파벨이 즉위한 뒤 살리카 법을 도입하면서 폐지된다.[25] 이 파벨의 여계 계승 제한은 고손자며느리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아들에 집착하여 아들의 혈우병을 치료하기 위해 라스푸틴을 가까이하고, 러시아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는 나비 효과를 제공했다. 명군이지만 아들에게는 0점짜리 어머니였던 예카테리나 2세와 파벨 1세의 관계는 마치 명석하고 총명하지만 빌헬름 2세 한정 자식교육은 엉망이었던 빅토리아 황태후와 빌헬름 2세와의 관계와 비슷하다 볼 수 있다.[26] 6,5,5인 세종대왕보다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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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영국인으로 당시 베를린에 대사로 파견되어 있었다. 스타니스와프는 당시 치료를 위해 베를린에서 거주하고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