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9:49:52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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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여대공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великая княжна О́льга Никола́евна России
파일:Olgachair.jpg
<colbgcolor=#FFE4E1><colcolor=#000000> 이름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О́льга Никола́евна Рома́нова)
출생 1895년 11월 15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차르스코예 셀로 알렉산드르 궁전
사망 1918년 7월 17일 (향년 22세)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에프 하우스
장례식 1998년 7월 1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신체 165cm
아버지 니콜라이 2세
어머니 헤센의 알릭스 공녀
형제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알렉세이
종교 러시아 정교회
서명 파일:olga_signature.pn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373a3c,#ddd {{{#!folding [ 시성 정보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E4E1><colcolor=#000> 시성 1981년: 해외 러시아 정교회
2000년: 러시아 정교회
축일 그레고리력: 7월 17일
율리우스력: 7월 4일
호칭 해외 러시아 정교회: 황실 순교자[1]
러시아 정교회: 황실 수난자[2]
성인 추대 종파 러시아 정교회
해외 러시아 정교회
그리스 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안티오키아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러시아 그리스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OTMAA 5남매2.3. 화목한 가정과 고립된 황실2.4. 총명한 첫째 황녀2.5.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등장, 혼담을 내치다2.6.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과 비참한 죽음
3. 가족관계4. 여담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헤센의 알릭스 공녀의 1남 4녀 중 장녀이자 맏이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파일:Grand Duchess Olga Nikolaevna of Russia.jpg
파일:Великая Княжна Ольга Николаевна.jpg
<rowcolor=#000> 1898년 1904년
1895년 11월 15일,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1남 4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부부의 첫 자식인 올가의 탄생은 아들 딸 막론하고 두 사람에게 큰 기쁨이었고, 특히 아버지 니콜라이 2세는 그녀를 무척이나 애지중지했다.

태어날 때 아버지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영원히 기억할 날이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9시 정각에 들렸고, 우리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하느님이 보내주신 이 아이의 이름을 올가라고 지었다!
니콜라이 2세는 종종 올가를 같은 해에 태어난 조카 이리나 유수포바[3]와 비교하였다.
1896년 3월 21일, 성찬예배에 참례하여 딸들을 안고 영성체를 하게 하였다. 우리 아이(올가)는 조용히 하였으나 이리나는 약간 울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인 앨리스 공주의 4녀이다. 따라서 태어난 해에 부모님과 함께 여러 나라를 방문할 때 외외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을 만났으며, 빅토리아 여왕은 증손녀를 귀여워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 보인자였기에 자녀들이 유럽 여러 나라 왕족들과 결혼하면서 혈우병 유전자가 널리 퍼졌는데, 올가는 평생 결혼하지 않아서 혈우병 보인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2.2. OTMAA 5남매

파일:OTMAA_1910_in_court_dress.3.jpg
<rowcolor=#000> OTMAA 5남매
올가는 타티야나와 항상 같이 방을 쓰고 똑같은 옷을 입을 정도로 가장 친했지만, 서로가 일기 등에서 머리글자인 'OTMA'(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로 표현할 정도로 자매들끼리도 모두 서로 친했고, 5남매 우애가 좋아서 막내 남동생 알렉세이 황태자와 함께 OTMAA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혼란스러웠던 러시아 제국과 달리, 황제 부부가 아들딸 차별 없이 자식들을 전부 몹시 사랑하며 키웠기에 가정은 화목했다.

가족들 사이에서 황녀들을 부르는 애칭이 있었는데 올가는 올랴, 올리쉬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3. 화목한 가정과 고립된 황실

황녀들은 호화로운 생활 대신 철제 침대를 쓰고 스스로 침구 정리 등 검소하고 부지런한 일과를 교육 받았으며 가족끼리 화목하고 소박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가정과 달리 올가를 포함한 차르 가족의 대외적 이미지는 좋지 않았고, 차르 부부가 너무 귀족 사회를 등한시하고 가정에서 자기들끼리만 뭉쳐지낸 탓에 올가와 타티야나는 나이가 차서도 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공식 칭호(= 황녀 전하)조차 낯설어 할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상태로 성장했다.

특히나 올가의 2살 아래 동생인 타티야나는 평소에는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니콜라이의 딸 타티야나)' 라고 불렸는데 갑자기 친한 귀족 시녀가 공식 자리에서 자기를 '황녀 전하' 라고 부르자, 타티아나는 기겁하며 테이블 밑에서 시녀의 다리를 걷어차며 귓속말로 "미쳤냐? 지금 무슨 소릴 한 거냐" 라고 말했다. 그저 예법에 맞게 황녀를 황녀라고 불렀을 뿐인데, 왜 타티아나가 놀라서 기겁했냐면 왕족이라도 가족들끼리 애칭으로 부르는 것은 당시 서양 국가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공식 석상에서도 이런 애칭을 자주 즐겨쓰고 제대로 된 호칭(= 황녀 전하)으로 불러주지 않았기에 생긴 일이었다. 즉, 타티아나는 황녀의 신분임에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황녀라는 호칭으로 불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외부 행사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소리다. 타티아나가 이 정도였으니 2살 차이인 올가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올가도 타티아나도, 거의 가정에 틀어박혀 살았기 때문에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이 아닌 타인들은 황실의 자녀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모를 정도였다. 오죽하면 측근들은 두 황녀를 두고 스물 전후의 나이인데 둘이서 노는 건 초등학생 수준이라고들 했다. 보다 못한 할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가 나서서 사교계 데뷔 나이가 찬 올가와 타티야나를 가장무도회에 억지로 등 떠밀어 보냈지만, 가장무도회에서 신분을 감춘 두 자매는 아는 사람도 소개해줄 사람도 없어서 또래 귀족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마침 조카 손녀의 결혼식 참석 때문에 러시아에 있던 고모할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야[4]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저런 황녀들을 지켜보던 황제나 황후도 이런 행사가 피곤하다는 기색으로 어색하게 구경만 하는 모습(왜냐면 자기들도 친한 사람이 없으니까)자발적 아싸에 충격을 받아서 이건 황후가 딸들을 너무 싸고 돌아 키운 탓이라고 대판 까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후에도 허영과 사치로 얼룩지고 문란한 러시아 사교계는 가급적 접근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철저한 교육도 있었지만, 올가와 타티아나는 사이좋은 가족들과 화목한 가정이 있는 황실 내에서만 틀어박혀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했고, 덕분에 혼란스런 러시아 제국의 상황과 달리 가족들과 함께 안락하고 평안한 나날을 보내며 성인으로 자라났다.

2.4. 총명한 첫째 황녀

아버지 니콜라이 2세와 닮은 꼴이었다고 하며 아버지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올가는 솔직하고 자기주장이 확실한 성격으로 특히 어린 시절 이런 기질이 두드러졌다. 아이였을 때 초상화를 그리러 방문한 화가에게 "당신은 아주 못생겼고 나는 당신이 전혀 좋지 않아요!" 라고 외친 적도 있었고, 13살 때는 하인들에게 예의바르게 대해야 한다며 황후에게 꾸중을 들었다.

그러나 이후 4명이나 되는 동생들이 태어나고 나이가 들면서 올가는 점잖고 다정한 성격이 되었다. 러시아 황녀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우아하고 품위가 있었고 춤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하거나 선행을 베푸는 것을 좋아해, 성미가 급했던 어린 시절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성인이 된 후로는 용돈 사용에 자유가 생겼는데, 이때 외출했다가 목발을 한 아이를 보고 용돈을 그 아이의 치료비로 쓴 적도 있다고 한다. 로마노프 일가의 망명길까지 함께한 가정교사 길리어드는 올가에 대해 "눈에 띄게 빠른 두뇌를 가졌고, 독립적인 태도였다"고 회상했다. 책을 자주 읽었고, 피아노 연주도 특기였다.

예카테리나 2세[5]를 좋아해서 한 번은 남동생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가 자신의 하인을 큰소리로 꾸짖자 알렉사이에게 "예카테리나 2세는 하인을 꾸짖을 때도 작은 소리로 했단다. 너도 작은 소리로 말하렴"이라고 말하며 차분히 타일렀다고 한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가 6살인 무렵에 보이스카우트 행진을 보러 갔는데, 어린 알렉세이는 "나도 보이스카우트 행진에 참여하고 싶다"고 떼를 쓰며 주변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때 올가가 점잖게 만류하자 알렉세이는 자신보다 9살이나 위인 큰누나의 뺨을 힘껏 올려쳤다. 이 상황에 모두들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있었지만 올가는 알렉세이가 가진 혈우병으로 인한 고통과 공포를, 또 남동생이 아직 어려서 정신적으로 미숙함을 알았기 때문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일을 무마시켰다.

하지만 올가 역시 감수성 예민한 10대 소녀였고, 남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에 견디기 힘들었던 올가는 궁에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뛰쳐들어가 대성통곡을 했고, 알렉세이 역시도 자기 잘못을 알아서 그런 큰누나에게 며칠이나 저녁 디저트를 상납하면서 빌었다고 한다(...).

이렇게 어른스럽고 점잖은 올가를 두고 어머니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나 러시아 제국 대신들은 올가를 미래 황위 계승자로 생각하기도 했다. 이는 남동생 알렉세이 황태자가 병약해 요절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6].
파일:Grand_Duchess_Olga_Nikolaevna_of_Russia_(1910).jpg
올가는 문무에 모두 출중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통솔력이 뛰어났으며, 승마를 즐겨 17살에 기마대장(騎馬隊長)을 맡은 적도 있었다. 거기다 4자매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고독한 문학소녀 타입이었던 그녀는 복잡한 러시아어의 문법도 설명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엔 간호사로서 부상병들을 치료했고 병원 업무를 보기도 했다.

1911년 올가는 오페라 하우스를 방문했는데 여기서 동생 타티야나와 함께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이 암살당하는 현장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두 황녀는 너무 놀라서 기절까지 했고 그 날밤, 둘 다 울다가 잠을 설쳤다고 한다.

2.5.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등장, 혼담을 내치다

올가가 성년이 되어 갈 무렵, 어머니는 병약한 알렉세이 황태자를 보며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그런 상황에 알렉산드라 황후의 친구인 안나가 시베리아 수도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데리고 왔다. 이 때 올가가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라스푸틴을 물리치라'고 충고했다는 말이 있으나, 실제로 그 말을 한 인물은 니콜라이 2세의 막내 여동생이자 올가의 막내 고모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이었다. 이때 황녀들은 자기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라스푸틴에게 홀딱 빠져 있었고, 훗날 총살될 때까지 라스푸틴의 사진이 들어 있는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었것이 볼셰비키에 의해 확인되었다.[출처] 다만 총명한 성격이라 당시 러시아의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것은 맞는 것으로 추정되며, 주치의 예브게니 봇킨의 아들 글렙이 쓴 회고록에 따르면 국민들이 자신의 부모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종종 걱정스러운 기색도 보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2달 전 가족들과 함께 루마니아 왕국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올가와 루마니아카롤 왕세자와의 혼담이 오갔다. 카롤은 빅토리아 여왕의 친손녀 에든버러의 마리의 장남으로 올가처럼 모계 쪽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었고, 그의 어머니 마리 왕비는 올가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사촌이었다. 또한 카롤의 외할머니인 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아는 올가의 아버지 니콜라이 2세의 고모이기도 해서 마리 왕비는 아버지 니콜라이 2세의 고종사촌이었다. 이런 관계로 올가에게 카롤은 부계와 모계 모두 6촌 관계였다.

그러나 카롤 왕세자는 유명한 바람둥이로 소문나 있었고 올가는 카롤과의 결혼을 싫어했다.
나는 러시아인이고, 영원히 러시아에 남을 거예요.
그렇게 올가는 카롤 왕세자와의 혼담을 거부했지만, 카롤은 차르의 딸들과 결혼하기 원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러시아를 여러 번 찾았다고 한다. 올가가 거절하자 올가의 여동생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에게 청혼했다고도 하고, 혁명 직전인 1917년 1월에도 러시아를 방문해 차르 가족을 만났었다고 한다.

카롤 뿐만 아니라 영국에드워드 왕세자와도 혼담이 오갔다. 나이 차이는 1살로 나이대도 잘 맞았고, 니콜라이 2세가 에드워드의 아버지 조지 5세와 이종사촌, 알렉산드라 황후도 조지 5세의 고종사촌으로 어릴 때부터 영국 왕실과의 인연 등 러시아 제국의 첫째 황녀 신분인 올가는 대영제국의 왕세자비로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카롤과 마찬가지로 에드워드도 부계와 모계로도 둘 다 육촌이었다. 그러나 올가는 에드워드 왕세자와의 혼담도 내쳤다. 만약 이때 혼담을 내치지 않았더라면 에드워드 8세가 훗날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8], 에드워드의 아버지 조지 5세러시아 혁명 때 차르 일가의 구조를 망설이는 일은 없었을 수 있다.

올가가 결혼을 거절했던 이유는 남동생 알렉세이가 병 때문에 오래 살기 힘들 것 같아 올가의 계승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단명할 것이 분명한 알렉세이를 염두에 두어 파벨 1세 시대에 도입된 살리카법을 폐지하고 여성에게도 계승권을 주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로마노프 가문에 차고 넘치는 남성 황족 중 1명과 올가가 결혼하게 하여 제위를 잇게 할 계획이었다. 1917년 기준 제위 계승권을 가진 남성 황족이 29명에 그 중 반 이상이 미혼이었으니 신랑감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중 니콜라이 2세의 친사촌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1891~1942)[9]이 니콜라이 2세의 총애를 받으며 잘 나갔기 때문에 올가의 신랑 후보로 유력했다. 또한 니콜라이 2세의 숙모인 마리야 파블로브나 대공비가 자신의 차남인 보리스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의 혼사를 주선하기도 했지만, 보리스는 올가보다 무려 18살이나 연상인데다 사생활도 문란했기 때문에 이 건은 알렉산드라 황후가 단번에 거절했다.

부모인 니콜라이 2세알렉산드라 황후 부부도 자녀들이 자신들처럼 연애 결혼을 하길 바라서 정략결혼에 크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특히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경험으로 부모의 역할은 망삘이 보이는 결혼을 반대하고, 적절한 상대를 허락하는 정도여야지 그 이상으로 자식의 결혼에 참견하면 안 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10]

2.6.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과 비참한 죽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로마노프 왕가의 몰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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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었다. 황제 일가는 볼셰비키 감시 하에서 연금생활을 시작하였다. 볼셰비키 당원들은 황녀들의 침실의 문을 못 잠그게 하였으며 심지어 욕실까지 따라왔다. 황녀들은 길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경멸과 비난과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황가를 감시하는 군인들은 황녀들이 불쾌해하도록 울타리에 음란한 낙서를 해놓기도 했다.

올가는 연금 생활 동안 어머니를 위해 시를 지어주기도 했지만, 마지막 몇 달 간은 아주 우울해했고 체중도 많이 줄었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선 산책 시간 외에는 대부분 알렉세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1918년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로 이송되었고, 7월 17일 새벽에 유대인인 야코프 유롭스키가 황제 일가를 깨워서 2열로 세우고 지하실로 인도하였다. 니콜라이 2세는 사진을 찍는 거라며 가족들을 안심시켰으나 유롭스키의 손에는 총이 있었고, 짧은 사형 통보 후 그들을 무자비하게 총으로 쏘아 죽였다. 황제 일가의 주검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사람 손길이 가지 않는 곳에서 황산으로 훼손된 채로 아무렇게나 묻혔으며, 올가는 불과 22세였다. 처형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올가는 니콜라이 2세와 달리[11] 유롭스키의 발언 내용을 명확히 인지했는지 해당 통보를 들은 직후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와 함께 성호를 그으려 했다고 한다.

이후 유해가 발견되었으나 당시에는 기술의 부재로 인해 황제 일가의 유해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기술 발전이 된 1998년 발견된 유해들이 DNA 검사를 통해 황제 일가인 것으로 확인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당에 일가족과 함께 안장되었다. 2000년에 러시아 정교회는 올가 로마노바를 수난자로 인정하여 '성녀'로 시성했으며, 2008년 러시아 대법원은 "황제 일가가 부당한 정치 탄압에 의해 희생되었다."라는 판결을 내려 아버지 니콜라이 2세에 대한 복권도 이루어졌다.

3. 가족관계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 제국의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Nikolaevna of Russia)
니콜라이 2세
(Nicholas II)
알렉산드르 3세
(Alexander III)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Princess Dagmar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헤센의 알릭스 공녀
(Princess Alix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의 카를 공자
(Prince Charles of Hesse and by Rhine)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12]
(Princess Elisabeth of Prussia)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4. 여담

  • 올가의 이름은 러시아어로 '거룩함'(Holy)이다. 가족들 사이에서 황녀들을 부르는 애칭이 있었는데, 가족들은 그녀를 올리쉬카(Olishka, Olyshka), 올랴(Olya)라고 불렀다.
  • 알렉산드르 3세의 장손녀다. 본인이 아버지 니콜라이 2세의 1남 4녀 중 첫째고, 아버지 니콜라이 2세도 할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4남 2녀 중 첫째이기 때문이다.

5. 대중매체

만약 살아남았다면 당찬 성격과 병약한 남동생 알렉세이 때문에 차리나 자리를 이어받았을 것이라는 대체역사가 많다.
  • 마찬가지로 대체역사물인 동방의 라스푸틴에서는 군밤조선과는 달리 알렉세이가 건강하게 살아있지만 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여 역시나 차리나가 되었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러시아 제국이 망한 뒤 백계 러시아인들의 국가인 극동공화국에 정착, 여동생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이 대한제국의 황태자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서도 백계 러시아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한제국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결혼을 받아들인다. 이후 극동공화국에 제정복고가 논의되고 다른 차르 계승자[14]들이 하나같이 결점이 있는 상태라 차리나가 될 확률이 높다.


[1] Royal Martyrs[2] Royal Passion-Bearers[3] 1895~1970, 알렉산드르 3세의 외손녀로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의 6남 1녀 중 장녀이다. 훗날 라스푸틴 암살을 주도한 귀족 펠릭스 유수포프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4]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여동생으로 니콜라이 2세의 고모이다. 올가와 타티야나에게는 친가뿐만 아니라 외가 쪽으로도 친척인데 마리야의 남편 알프레드 왕자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삼촌이라 황후의 외숙모이기도 했다.[5] 살리카법을 러시아에 도입한 파벨 1세의 어머니다.[6] 러시아는 황녀에게 황위 계승권이 없었지만 이미 여제로서 군림했던 예카테리나 1세와 2세, 안나 이바노브나, 옐리자베타 페도로브나라는 전례가 있었으니 상황에 따라서는 여제의 즉위를 가능하게 바꿀수도 있었다.[출처] Robert K. Massie, The Romanovs: The Final Chapter p. 8[8] 상식적으로 러시아의 황녀랑 결혼한 상태에서 미국인 평민을 왕비 자리에 앉히겠다고 난리치는 군주는 없을 테지만, 여자 때문에 왕위까지 내던졌던 행각상 정말 올가와 결혼한 상태에서 이혼을 감행했다면 방송까지 준비해 폼나게 자진 퇴위하기도 전에 쫓겨났을지도(...).[9] 니콜라이 2세의 막내 숙부인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1860~1919, 후일 혁명 중 처형)의 아들이다.[10] 21세기였다면 적절했겠지만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큰 착각이었다.[11] 니콜라이 2세의 유언은 "뭐라고 했나? 잘 들리지 않는데." 혹은 "그럼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이다. 유롭스키 일행의 자동차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말을 잘 듣지 못했다고 한다.[12]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이다.[13] 고모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의 고명딸.[14] 니콜라이 2세의 동생 미하일은 수용소에서 사망한 걸로 추정, 아들 알렉세이는 혈우병, 사촌 키릴 대공은 혁명 당시 소비에트 편을 든 적이 있어서 백계 러시아인들의 지지를 못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