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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르헤타바트 |
러시아 제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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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Россійская Имперія Russian Empire | ||||||
국기 | 국장 | |||||
Съ нами Богъ![1]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노라! | ||||||
상징 | ||||||
국가 | 하느님, 황제를 지켜주소서! (Боже, Царя храни!) | |||||
위치 | ||||||
■ 러시아 본토 ■ 러시아령 아메리카[2] 및 남사할린[3] ■ 영향력이 미치던 지역 | ||||||
1721. 11. 2. ~ 1917. 3. 15. (196년) | ||||||
칭제 이전 | 멸망 이후 | |||||
루스 차르국 | 러시아 공화국 | |||||
역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 1682년 표트르 1세의 즉위 1721년 제국 선포 1812년 조국전쟁 발발 1853년 크림 전쟁 발발 1861년 농노제 폐지 1905년 러일전쟁 패전, 피의 일요일 사건 발생 1906년 헌법 제정, 두마[4] 설립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7년 러시아 혁명, 제국 멸망 | }}}}}}}}} | ||||
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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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상트페테르부르크(1704–1728, 1732–1917) 모스크바(1728–1732) | |||||
국토 면적 | 23,700,000km² (1866년) 22,800,000km² (1914년) | |||||
접경국 | • 스웨덴 왕국 • 독일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오스만 제국 • 루마니아 왕국 • 불가리아 왕국 • 이란 숭고국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영국령 인도 제국 • 청나라 • 조선(1860~1910)[6][참조] • 일본 제국 • 영국령 캐나다(~1867)[8] • | }}}}}}}}} | ||||
인문 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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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근대 러시아어(공용어) 그 밖의 각 지방 고유어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국교) 이슬람,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불교 등 | |||||
민족 |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타타르인, 유대인 등 | |||||
군대 | 러시아 제국군 |
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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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황제 |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대제 알렉산드르 2세 니콜라이 2세 | }}}}}}}}} | |||
경제 | |||||
통화 | 루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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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露西亞帝國, Россійская Имперія)은 루스 차르국 로마노프 왕조의 제4대 차르였던 표트르 대제가 1721년에 제정을 선포한 이후부터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의해서 군주제가 붕괴될 때까지 196년간 존속했던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표트르 대제 이전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까지, 또는 루스 차르국의 성립 시기까지도 거슬러 올라가 러시아 제국으로 보기도 한다.엄밀히 말하자면 모스크바 대공국 · 루스 차르국 · 러시아 제국 기간은 단절기간이 없는 단일국가이며[20] 시대구분을 위한 분류에 가깝다. 루스 차르국은 표트르의 서유럽 모방 이전의 전통적 슬라브 국가의 느낌이 강하며, 러시아 제국은 더욱 유럽화된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느낌을 주는 시기이다. 실제로 기준이 되는 1721년은 스웨덴 제국과의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하고 전러시아의 황제를 처음 자칭한 해로, 1721년 이후 갑자기 나라가 획기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지만 30년 전쟁 이후 북유럽의 열강이었던 스웨덴을 끌어내리고 러시아가 유럽의 주요 세력으로 인정받았다는 상징성을 가진다. 어느 시기이든 러시아인들은 스스로를 루스라고 불렀으며, 러시아는 루스의 라틴어식 표현을 영어 발음으로 읽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정시대의 러시아와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 공화국인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현재의 러시아 연방을 구분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많이 쓰이는 표현이다.
10세기부터 17세기까지 러시아 땅은 귀족 영주들인 보야르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이반 3세 시절에 왕국의 영토를 3배로 늘리면서 세력을 대대적으로 넓혔고, 1613년에는 후일 러시아 제국의 황가가 되는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섰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표트르 대제는 내정을 개혁하여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며 본격적인 서구화 정책을 펼치면서 러시아의 국력을 몇 배로 증강했다. 그 뒤에 황제가 된 예카테리나 2세가 영토를 넓히면서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인구 면에서도 1900년 기준 전세계 인구의 12분의 1이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었다.[21] 알렉산드르 1세 재위기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에 성공하며 서방권에서도 인정받는 열강 세력으로 떠올랐다. 알렉산드르 2세는 4천만 명에 달하는 농노를 해방하였고 오스만 제국 내의 동방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시절 영국과 프랑스의 편을 들어 협상국으로서 참전하였다. 그러나 오랜 전쟁과 피폐한 경제로 인해 제국은 갈수록 파탄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버티다 못한 국민들이 2월 혁명을 일으켜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세를 폐위시키고 러시아 공화국을 세우면서 러시아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그러나 공화국 내에서도 파벌이 나뉘어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지다가 결국 10월 혁명이 터져 볼셰비키가 집권하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새롭게 권력을 잡은 블라디미르 레닌과 공산주의자들은 제정복고를 두려워하여 1918년에 예카테린부르크로 귀양을 갔던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을 총살했고, 1922년에는 소련이 들어섰다.
2. 상징
2.1. 국기
러시아 제국 국기 | 황제기 | |
<rowcolor=#000> 1858~1896 | 1883~1917 | 황제기 |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던 1600년대 이래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깃발들 중 하나였던 백청적 삼색기는 1705년에 러시아의 공식 상선기(선박에 게양하는 깃발)로 지정되고 이후 러시아 제국을 상징하는 깃발로 자리잡았다. 백색은 하느님, 청색은 황제, 붉은색은 나라 혹은 국민들을 상징했다.[22] 다만 공식적인 국기는 아니었다.
백청적 삼색기가 국기로 정해지기 이전엔 러시아 제국의 국기는 검은색, 노란색, 백색으로 이루어진 흑황백 삼색기였다. 1858년 6월 11일 알렉산드르 2세의 칙령으로 지정된 국기로, 1858년부터 1896년까지 사용되었다.[23] 현대의 러시아 국기로 친숙한 백색, 청색, 적색으로 이루어진 삼색기는 1883년 4월 28일 알렉산드르 3세의 칙령으로 위의 흑황백 삼색기를 대체하고 새롭게 정해진 국기이다. 다만 백청적 삼색기가 제정된 이후에도 위의 흑황백 삼색기를 계속 혼용해서 썼고, 1896년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한 이후에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백청적 삼색기를 정식 국기로 인식했다. 참고로 이 백청적 삼색기는 1917년까지 사용했다.
백청적 삼색기의 왼쪽 위에 노란색 방패문을 넣어 만든 깃발은 국기는 아니고 황제가 쓰던 개인용 깃발. 현대 러시아와 똑같은 국기를 러시아 제국의 국기랍시고 내놓으면 구분이 어려운 탓에 러시아 제국을 표현할 때 이 노란 방패문을 넣은 국기를 보통 역사를 설명하는 영상이나 자료에서 시대별 국기를 구별하기 위해 표시된다. 이 깃발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1914년에 황제와 국민 간 통합을 위해 만들어졌다.참고
2.2. 국장
러시아 제국 국장 | |
대형 국장[24] | |
중형 국장 | 소형 국장 |
금빛 방패 위에 얹힌 투구는 노브고로드 공국과 키예프 공국의 대공인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투구다. 방패 양 옆으로 대천사 가브리엘과 미카엘이 서있으며, 광채를 내뿜는 천사와 방패를 백색 담비 털로 만든 거대한 금빛 덮개가 뒤에서부터 덮고 있다. 덮개에는 'Съ нами Богъ'[26]라는 표어가 씌었고, 위에는 러시아 제국 황제관이 얹혔다. 황금 참나무잎이 아래에서부터 빙 둘러 문장을 감싸는데, 이 위에는 여러 도시들의 문장들이 얹혔다.
총 15개 국가들을 상징하는 문장들이 있는데, 개중 9개는 참나무 잎장식 위에 올라가 왕관을 썼고 나머지 6개는 위쪽에 따로 있다. 참나무 잎 위에 놓인 9개 문장들이 상징하는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크기가 크거나 세력이 강한 세력들이었고, 나머지 6개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먼저 참나무 잎 장식 위의 9개 문장들은 맨 왼쪽 위에서부터 반시계 방향으로부터 각각 카잔 칸국, 폴란드 왕국, 타브리다현(크림반도), 키이우와 블라디미르-수즈달과 노브고로드 연합, 로마노프 가문, 핀란드 대공국, 조지아, 시베리아, 아스트라한을 상징한다. 위쪽에 있는 6개 문장들은 맨 왼쪽부터 벨라루스, 리투아니아의 북동부 지역들, 스몰렌스크 등을 포함한 대러시아의 도시들, 남서부 지역의 도시들, 에스토니아 등을 포함한 발트해의 지역들, 투르케스탄 지역을 상징했다.
2.3. 국가
국가 (國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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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봉 | La Concorde | 조화 | ||
| 가이아나 | Dear land of Guyana, of rivers and plains | 친애하는 강과 평원의 땅, 가이아나여 | ||
| 감비아 | For the Gambia our homeland | 우리 조국 감비아를 위하여 | ||
| 과테말라 | Himno Nacional de Guatemala | 과테말라 국가 | ||
| 그리스 | Ύμνος εις την Ελευθερίαν | 자유의 찬가 | ||
| 기니 | Liberté | 자유 | ||
| 기니비사우 | Esta É a Nossa Pátria Bem Amada | 우리의 사랑스러운 조국 | ||
| 나미비아 | Namibia, Land of the Brave | 용감한 사람들의 나라, 나미비아여 | ||
| 나이지리아 | Nigeria, We Hail Thee | 나이지리아여, 우린 그대를 찬양하노라 | ||
| 남아프리카 공화국 | National Anthem of South Africa Nasionale lied van Suid-Afrika |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가 | ||
| 네덜란드 | Het Wilhelmus | 빌럼 공의 노래 | ||
| 네팔 | सयौँ थुङ्गा फूलका हामी | 수백 송이의 꽃 | ||
| 노르웨이 | Ja, vi elsker dette landet | 그래,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한다 | ||
| 뉴질랜드 | God Defend New Zealand | 하느님, 뉴질랜드를 수호하소서 | ||
| 대한민국 | 애국가 | 애국가 | ||
| 덴마크 | Der er et yndigt land | 사랑스러운 땅에서 | ||
| 독일 | Deutschlandlied | 독일의 노래 | ||
| 동티모르 | Pátria | 조국 | ||
| 라오스 | ເພງຊາດລາວ | 라오스의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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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마니아 | Deşteaptă-te române! | 루마니아인이여, 깨어나라! | ||
| 룩셈부르크 | Ons Heemecht | 우리의 조국 | ||
| 르완다 | Rwanda nziza | 아름다운 르완다 | ||
| 리비아 | ليبيا ليبيا ليبيا | 리비아, 리비아, 리비아 | ||
| 리투아니아 | Tautiška giesmė | 국가 찬가 | ||
| 리히텐슈타인 | Oben am jungen Rhein | 저 라인 강 위쪽으로 | ||
| 마셜 제도 | Forever Marshall Islands | 마셜 제도여 영원하라 | ||
| 말레이시아 | Negaraku | 조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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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나코 | Hymne Monégasque | 모네가스크 찬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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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타니 | نشيد وطني موريتاني | 아버지의 나라는 영예로운 선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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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도바 | Limba noastră | 우리의 언어 | ||
| 몰디브 | ޤައުމީ ސަލާމް | 조국의 인사 | ||
| 몰타 | L-Innu Malti | 몰타 찬가 | ||
| 몽골 | Монгол улсын төрийн дуулал | 몽골 국가 | ||
| 미국 | The Star Spangled Banner | 별이 빛나는 깃발 | ||
| 미얀마 | ကမ္ဘာမကြေ | 세상이 끝날 때까지 | ||
| 바티칸 | Hymnus Pontificius | 교황 찬가 행진곡 | ||
| 방글라데시 | “আমার সোনার বাংলা | 나의 황금빛 벵골 | ||
| 베네수엘라 | Gloria al bravo pueblo | 용감한 이들에게 영광을 | ||
| 베트남 | Tiến quân ca | 진군가 | ||
| 벨기에 | La Brabançonne De Brabançonne | 브라반트의 노래 | ||
| 벨라루스 | Дзяржаўны гімн Рэспублікі Беларусь | 우리는 벨라루스인 | ||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Државна химна Босне и Херцеговине Državna himna Bosne i Hercegovine | 간주곡 | ||
| 보츠와나 | Fatshe leno la rona | 이 숭고한 땅을 축복하노라 | ||
| 볼리비아 | Himno Nacional de Bolivia | 볼리비아의 국가 | ||
| 부탄 | འབྲུག་ཙན་དན་ | 전룡의 왕국 | ||
| 북마케도니아 | Денес Над Македонија | 마케도니아의 오늘을 넘어서 | ||
| 북한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 | ||
| 불가리아 | Мила Родино | 친애하는 조국 | ||
| 브라질 | Hino Nacional Brasileiro | 브라질 국가 | ||
| 브루나이 | الله فليهاراكن سلطن Allah Peliharakan Sultan | 술탄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 ||
| 사모아 | O le Fu’a o le Sa’olotoga o Samoa | 자유의 깃발 | ||
| 사우디아라비아 | عاش المليك | 군주를 찬양하라 | ||
| 세르비아 | Боже правде | 정의의 하느님 | ||
| 소말리아 | Qolobaa Calankeed | 어떠한 나라의 깃발이라도 | ||
| 솔로몬 제도 | God Save Our Solomon Islands | 하느님, 우리의 솔로몬 제도를 지켜 주시옵소서 | ||
| 수리남 | God zij met ons Suriname | 하느님께서 수리남과 함께 하신다 | ||
| 스리랑카 | ශ්රී ලංකා මාතා ஸ்ரீ லங்கா தாயே | 어머니 스리랑카 | ||
| 스웨덴 | Du Gamla, Du Fria | 유구한 그대, 자유로운 그대 | ||
| 스위스 | Rufst du, mein Vaterland | 스위스 찬가 | ||
| 스페인 | Himno Nacional Español | 국왕 행진곡 | ||
| 슬로바키아 | Nad Tatrou sa blýska | 타트라 산 위에 번개가 쳐도 | ||
| 슬로베니아 | Zdravljica | 축배 | ||
| 시리아 | حُمَاةَ الدِّيَارِ | 조국의 파수꾼 | ||
| 싱가포르 | Majulah Singapura | 전진하는 싱가포르 | ||
| 아랍에미리트 | النشيد الوطني الاماراتي | 내 조국이여 영원하라 | ||
| 아르메니아 | Մեր Հայրենիք | 우리의 조국 | ||
| 아르헨티나 | Himno Nacional Argentino | 아르헨티나 국가 | ||
| 아이슬란드 | Lofsöngur | 찬가 | ||
| 아이티 | Hymne national d'Haïti | 데살린의 노래 | ||
| 아일랜드 | Amhrán na bhFiann | 전사의 노래 | ||
| 아제르바이잔 | Azərbaycan Marşı | 아제르바이잔 행진곡 | ||
| 아프가니스탄 | دا د باتورانو کور | 이 곳은 용감한 자들의 고향이라네! | ||
| 안도라 | El Gran Carlemany | 위대한 샤를마뉴 | ||
| 알바니아 | Hymni i Flamurit | 깃발의 찬가 | ||
| 알제리 | قسما | 맹세 | ||
| 앙골라 | Angola Avante | 앙골라여 전진하라 | ||
| 에스토니아 | Mu isamaa, mu õnn ja rõõm | 나의 조국, 나의 행복과 기쁨 | ||
| 에콰도르 | ¡Salve, Oh Patria! | 만세, 오 조국이여! | ||
| 에티오피아 | ወደፊት ገስግሺ፣ውድ እናት ኢትዮጵያ | 전진해라, 나의 어머니 에티오피아 | ||
| 엘살바도르 | Himno Nacional de El Salvador | 엘살바도르 국가 | ||
| 영국 | God Save the King | 하느님, 국왕 폐하를 지켜주소서 | ||
| 예멘 | الجمهورية المتحدة | 연합 공화국 | ||
| 오스트리아 | Bundeshymn | 산의 나라, 강의 나라 | ||
| 우간다 | Oh Uganda, Land of Beauty | 오 우간다, 아름다움의 나라여 | ||
| 우루과이 | Himno Nacional de Uruguay | 동방인들이여.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 ||
| 우즈베키스탄 | Oʻzbekiston Respublikasining Davlat Madhiyasi |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국가 | ||
| 우크라이나 | Державний Гімн України | 우크라이나의 국가 | ||
| 이란 | سرود ملی جمهوری اسلامی ایران | 이란 이슬람 공화국 국가 | ||
| 이라크 | موطني | 나의 조국 | ||
| 이스라엘 | הַתִּקְוָה | 희망 | ||
| 이집트 | بلادي لك حبي و فؤادي | 나의 조국, 나의 사랑과 마음은 그대를 위해 | ||
| 이탈리아 | Il Canto degli Italiani | 마멜리 찬가 | ||
| 인도 | जन गण मन | 모든 국민의 마음 | ||
| 인도네시아 | Indonesia Raya | 위대한 인도네시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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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비아 | Lumbanyeni Zambia | 일어나 자랑스럽고 자유로운 잠비아를 노래하자 | ||
| 조지아 | თავისუფლება | 자유 | ||
| 중국 | 义勇军进行曲 | 의용군 진행곡 | ||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 La Renaissance | 부흥 | ||
| 짐바브웨 | Kalibusiswe Ilizwe leZimbabwe | 짐바브웨의 대지에 축복을 | ||
| 체코 | Kde domov můj? | 나의 조국은 어디에? | ||
| 칠레 | Himno Nacional de Chile | 칠레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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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르 | السلام الأميري | 아미르에게 평화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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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타리카 | Himno Nacional de Costa Rica | 코스타리카 국가 | ||
| 코트디부아르 | L'Abidjanaise | 아비장의 노래 | ||
| 콜롬비아 | Himno Nacional de la República de Colombia | 콜롬비아 공화국 국가 | ||
| 콩고민주공화국 | Debout Congolais | 콩고인들이여 일어나라 | ||
| 쿠바 | La Bayamesa | 바야모 행진곡 | ||
| 크로아티아 | Lijepa naša domovino | 아름다운 우리 조국 | ||
| 키르기스스탄 | Кыргыз Республикасынын Мамлекеттик Гимни | 키르기즈 공화국 국가 | ||
| 키프로스 | Ύμνος εις την Ελευθερίαν | 자유의 찬가 | ||
| 타지키스탄 | Суруди Миллӣ | 국가 | ||
| 탄자니아 | Mungu ibariki Afrika | 주여, 아프리카를 축복하소서 | ||
| 태국 | เพลงชาติไทย | 태국 국가 | ||
| 토고 | Terre de nos aïeux | 우리 조상의 땅 | ||
| 투르크메니스탄 | Garaşsyz, Bitarap Türkmenistanyň döwlet gimni | 독립, 중립, 투르크메니스탄의 국가 | ||
| 투발루 | Tuvalu mo te Atua | 전능하신 신을 위한 투발루 | ||
| 튀니지 | حماة الحمى | 조국의 수호자 | ||
| 튀르키예 | İstiklâl Marşı | 독립행진곡 | ||
| 파나마 | Himno Istemño | 지협의 노래 | ||
| 파푸아뉴기니 | O Arise, All You Sons | 오, 모든 아들들아 일어나라 | ||
| 파키스탄 | قومی ترانہ | 국가 | ||
| 팔라우 | Belau rekid | 우리들의 팔라우 | ||
| 페루 | Himno Nacional del Perú |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 ||
| 포르투갈 | A Portuguesa | 포르투갈의 노래 | ||
| 폴란드 | Mazurek Dąbrowskiego |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레크 | ||
| 프랑스 | La Marseillaise | 마르세유의 노래 | ||
| 피지 | Meda Dau Doka | 피지에 축복이 있기를 | ||
| 핀란드 | Maamme | 우리의 땅 | ||
| 필리핀 | Lupang Hinirang | 선택된 땅 | ||
| 헝가리 | Himnusz | 찬가 | ||
| 호주 | Advance Australia Fair | 아름다운 오스트레일리아여 전진하라 | ||
미승인국의 국가 | |||||
| 남오세티야 | Республикӕ Хуссар Ирыстоны Паддзахадон Гимн |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의 국가 | ||
대만 | 中華民國國歌 | 중화민국 국가 | |||
中華民國國旗歌 | 중화민국 국기가 | ||||
| 북키프로스 | İstiklâl Marşı | 독립행진곡 | ||
|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 | يا بني الصحراء | 오, 사하라의 아들이여! | ||
| 소말릴란드 | Samo ku waar | 오래 평화롭게 | ||
| 코소보 | Европа | 유럽 | ||
| 트란스니스트리아 | Слэвитэ сэ фий, Нистрене Slăvită să fii, Nistrene | 우리는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찬가를 부르네 | ||
| 팔레스타인 | فدائي | 전사 | ||
자치지역의 국가 | |||||
| 가가우지아 | Tarafım | 나의 조국 | ||
| 그린란드 | Nunarput utoqqarsuanngoravit | 우리의 오랜 땅이여 | ||
|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 Ode to Newfoundland | 뉴펀들랜드 송가 | ||
| 도네츠크 인민공화국[a] |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гимн Донецкой Народной Республики |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국가 | ||
| 루간스크 인민공화국[a] |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гимн Луганской Народной Республики |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국가 | ||
| 모르도비야 공화국 | Шумбрат, Мордовия! | 만세, 모르도비아여! | ||
| 바시코르토스탄 | Башҡортостан Республикаһыныӊ Дәүләт гимны |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의 국가 | ||
| 부랴티야 공화국 | Песня о родной земле | 우리가 태어난 땅에 대한 노래 | ||
| 북아일랜드 | Londonderry Air | 런던데리의 아리아 | ||
| 북오세티야 공화국 | Цӕгат Ирыстоны паддзахадон гимн | 북오세티야 공화국의 국가 | ||
| 스릅스카 공화국 | Моја Република | 나의 공화국 | ||
| 사하 공화국 |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гимн Республики Саха | 사하 공화국의 국가 | ||
| 스코틀랜드 | Flower of Scotland | 스코틀랜드의 꽃 | ||
| 신트마르턴 | O Sweet Saint Martin's Land | O Sweet Saint Martin's Land | ||
| 아디게야 공화국 | Адыгэ Республикэм и Гимн | 아디게야 공화국의 국가 | ||
| 아루바 | Aruba Dushi Tera | 아루바, 아름다운 땅이여 | ||
| 알타이 공화국 | Алтай Республиканыҥ Гимны | 알타이 공화국의 국가 | ||
| 우드무르티야 공화국 | Шунды сиос ӝуато палэзез | 태양은 붉은 잿더미 속에서 타오르네 | ||
| 인구셰티야 공화국 | ГӀалгӀайчен гимн | 인구셰티야의 국가 | ||
| 웨일스 | Hen Wlad Fy Nhadau | 나의 아버지의 땅 | ||
| 체첸 공화국 | Шатлакхан Илли | 샤틀락의 노래 | ||
| 추바시야 공화국 | Чăваш Ен гимнĕ | 추바시야 공화국의 국가 | ||
| 카라차예보-체르케시야 공화국 | Къарачай-Черкес Республиканы Гимни / Къэрэщей-Шэрджэс Республикэм и Къэрал Орэдыр | 카라차예보-체르케스카야 공화국의 국가 | ||
| 카렐리야 공화국 | Гимн Карелии / Karjalan tasavallan hymni | 카렐리야 공화국의 국가 | ||
| 카탈루냐 | Els Segadors | 수확자들 | ||
| 칼미키야 공화국 | Хальмг Таңһчин частр | 칼미키야 공화국의 국가 | ||
| 코미 공화국 | Коми Республикаса кып | 코미 공화국의 국가 | ||
| 퀴라소 | Himno di Kòrsou | 퀴라소 국가 | ||
| 타타르스탄 공화국 | Tuğan yağım | 나의 모국 | ||
투바 공화국 | Мен – тыва мен | 나는 투바인이다 | |||
| 페로 제도 | Tú alfagra land mítt | 그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땅 | ||
| 하카시야 공화국 | Хакас гимн | 하카스 찬가 | ||
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노래 | |||||
| 나이지리아 | Arise Oh Compatriots, Nigeria’s Call Obey | 일어나라 동포들이여 | ||
| 나치 독일 | Horst-Wessel-Lied |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 ||
| 남아프리카 연방 | Die Stem van Suid-Afrika | 남아프리카의 외침 | ||
대한제국 | 大韓帝國愛國歌 | 대한제국 애국가 | |||
大韓帝國國旗歌 | 국기가(대한제국) | ||||
| 독일 제국 | Heil dir im Siegerkranz | 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 | ||
| 동독 | Auferstanden aus Ruinen | 폐허에서 부활하여 | ||
| 러시아 제국 | Гром победы, раздавайся! | 승리의 천둥이여, 울려라! | ||
Молитва русского народа | 러시아인의 기도 | ||||
Боже, Царя храни! | 하느님, 차르를 보호하소서! | ||||
| 로디지아 | Rise O Voices of Rhodesia | 로디지아의 목소리를 상승시키리 | ||
|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 الله اكبر | 신은 위대하다네 | ||
| 만주국 | 滿洲國建國歌 | 만주국 건국가 | ||
| 민주 캄푸치아 | ដប់ប្រាំពីរមេសាមហាជោគជ័យ | 영광스러운 4월 17일 | ||
| 베트남 공화국 | Tiếng Gọi Công Dân | 공민에게 고함 | ||
| 베트남 제국 | Đăng đàn cung | 등단궁 | ||
|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 | Ваяцкі Марш | 병사들의 행진 | ||
| 불가리아 왕국 | Шуми Марица | 마리차는 전진한다 | ||
| 비시 프랑스 | Maréchal, nous voilà ! | 원수여 우린 여기에 있습니다 | ||
| 사르데냐 왕국 | S'hymnu sardu nationale | 사르데냐의 노래 | ||
| 소련 | Интернационал | 인터내셔널가 | ||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гимн СССР | 소비에트 연방 찬가 | ||||
| 스페인 제2공화국 | Himno de Riego | 리에고 찬가 | ||
|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 Naprej, zastava slave | 영광의 깃발을 향해 | ||
|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Հայկական Սովետական Սոցիալիստական Հանրապետություն օրհներգ | 국가 | ||
| 아르차흐 공화국 | Ազատ ու անկախ Արցախ | 아르차흐는 자유와 독립을 원하리 | ||
|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 ملی سرود | 국가 | ||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 ملی سرود | 국가 | ||
|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 공화국 | ኢትዮጵያ, ኢትዮጵያ, ኢትዮጵያ ቂዳ ሚ |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앞으로! | ||
| 오스만 제국 | 문서 참조 | 문서 참조 |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Kaiserhymne | 황제 찬가 | ||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Державний гімн Української Радянської Соціалістичної Республіки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 ||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 Хеј Словени | 슬라브족이여 | ||
| 이란 팔레비 왕조 | سرود شاهنشاهی ایران | 황례포 | ||
| 응우옌 왕조 | Đăng đàn cung | 등단궁 | ||
| 이라크 | أرض الفراتين | 두 강의 땅 | ||
| 아랍 연합 공화국 | والله زمان يا سلاحي | 오 나의 무기여, 오랜 시간이 지나왔구나 | ||
| 이탈리아 왕국 | Marcia Reale | 왕의 행진곡 | ||
|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 Giovinezza | 청춘 | ||
| 중화민국 북양정부 | 卿雲歌 | 경운가 | ||
청나라 | 鞏金甌 | 공금구 | |||
頌龍旗 | 송룡기 | ||||
체코슬로바키아 | Kde domov můj? Nad Tatrou sa blýska | 체코슬로바키아 국가 | |||
|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 ចម្រៀងនៃសាធារណរដ្ឋប្រជាមានិតកម្ពុជា |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애국가 | ||
| 크림 인민 공화국 | Ant etkenmen | 우리는 맹세한다 | ||
| 토스카나 대공국 | La Leopolda | 라 레오폴다 | ||
| 러시아 (1991년) | Патриотическая Песня | 애국가 | ||
| 미국 | Hail, Columbia | 컬럼비아 만세 | ||
My country, 'Tis of Thee | 나의 조국, 그분의 땅 | ||||
오스트리아 연방국 | Sei gesegnet ohne Ende | 끊임없이 축복받으세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국기가 | 국기가(대한민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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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페란토 운동 | La Espero | 희망 | ||
| 올림픽 | Ολυμπιακός Ύμνος | 올림픽 찬가 | ||
| 유럽연합 | Anthem of Europe | 유럽 찬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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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승리의 천둥이여, 울려라!
〈승리의 천둥이여, 울려라!(Гром победы, раздавайся!, 1791–1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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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 절 || 러시아어 || 번역 ||
1 Громъ побѣды, раздавайся!
Веселися храбрый Россъ!
Звучной славой украшайся:
Магомета ты потресъ.승리의 천둥이여, 울려라!
찬미하라, 러시아의 용감함을!
러시아의 영광은 밝게 빛난다.
우리는 무슬림을 흔들어 놓았다네.후렴 Славься симъ, Екатерина!
Славься, нѣжная къ намъ мать!찬양하라, 예카테리나를!
찬양하라, 우리의 온화한 국모를!2 Зри, премудрая Царица!
Зри, великая жена!
Что Твой взглядъ, Твоя десница
Нашъ законъ, душа одна.보아라, 지혜로운 여제 폐하를!
보아라, 위대하신 여인을!
그대의 생각과 결정은
곧 우리의 법이며 유일한 마음이라네.3 Зри на блещущи соборы,
Зри на сей прекрасный строй:
Всѣхъ сердца Тобой и взоры
Оживляются одной.보아라, 빛나는 대성당을,
보아라, 이 아름다운 구조를.
너의 모든 마음과 눈이
하나되어 살아 움직이게 한다네.
2.3.2. 시온의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시온의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Коль славен наш Господь в Сионе, 1794–1816)〉 |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856년부터 러시아 제국 멸망 직전인 1917년 10월까지 크렘린의 스파스카야 탑에서 이 곡조를 연주했으며, 10월 혁명 이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표트르와 파벨 대성당에서도 연주됐다. 이 곡의 상징성은 상당해서 러시아국의 국가로도 사용됐고 대조국전쟁 당시 나치 독일의 괴뢰국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의 상징으로도 쓰였다. 심지어 현재 러시아에서도 국가행사에 쓸 정도로 유서깊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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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 절 || 러시아어 || 번역 ||
1 Коль славен наш Господь в Сионе,
Не может изъяснить язык.
Велик Он в небесах на троне,
В былинках на земле велик.
Везде, Господь, везде Ты славен,
В нощи, во дни сияньем равен.시온의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차마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
당신의 옥좌는 하늘에서도 위대하시며
땅의 풀잎 속에서도 그분은 위대하시다
주님, 당신은 모든 곳에서 영광스러우시며
밤에도 낮에도 당신의 빛남은 다르지 않도다.2 Тебя Твой агнец златорунный
В себе изображает нам;
Псалтырью мы десятиструнной
Тебе приносим фимиам.
Прими от нас благодаренье,
Как благовонное куренье.황금양털을 가진 당신의 양
우리에게 당신을 상징하시니
10현 솔트리로
당신께 향을 피우니
우리의 감사를 받아주소서
향기로운 제물로써.3 Ты солнцем смертных освещаешь,
Ты любишь, Боже, нас как чад,
Ты нас трапезой насыщаешь
И зиждешь нам в Сионе град.
Ты грешных, Боже, посещаешь
И плотию Твоей питаешь.당신은 태양으로 인간을 비추시며
하느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축복받은 식사로 우리를 만족케 하시며
우리를 위해 시온에 성읍을 만들어 주시오니
오 하느님 죄인들을 찾아주소서
당신의 살로 그들에게 베푸소서4 О Боже, во Твоё селенье
Да внидут наши голоса,
И взыдет наше умиленье,
К Тебе, как утрення роса!
Тебе в сердцах алтарь поставим,
Тебе, Господь, поём и славим!오 하느님 우리의 목소리가
당신의 집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소서
그리고 우리의 부드러운 감각이 아침이슬 같이 일어나게 해주소서!
당신을 위해 온마음으로 제단을 지으리라
당신을 위해 노래하고 영광을 돌리겠나이다!
2.3.3. 러시아인의 기도
〈러시아인의 기도(Молитва русских, 1816–1833)〉[27] |
러시아에서 국가(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гимн)라고 불릴 만한 노래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15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이때는 알렉산드르 1세가 제위에 있었으며 나폴레옹의 침략을 막아낸 조국전쟁과 같은 큰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때문에 자연스레 황제를 중심으로 한 애국적인 가사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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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 절 || 러시아어 || 번역 ||
1 Боже, Царя храни!
Славному долги дни
Дай на земли!
Гордыхъ смирителю,
Слабыхъ хранителю,
Всѣхъ утѣшителю —
Всё ниспошли!
Гордыхъ смирителю,
Слабыхъ хранителю,
Всѣхъ утѣшителю —
Всё ниспошли!하느님, 황제를 보호하소서!
영광된 이에게 장구한 시대를
누리게 하소서!
자랑스러운 정복자에게,
영광스러운 수호자에게,
모든 이들의 위로자에게,
모두에게 강림하셨나이다!
자랑스러운 정복자에게,
영광스러운 수호자에게,
모든 이들의 위로자에게,
모두에게 강림하셨나이다!2 Перводержавную
Русь православную
Боже, храни!
Царство ей стройное,
Въ силѣ спокойное!
Всё-жъ недостойное
Прочь отжени!
Царство ей стройное,
Въ силѣ спокойное!
Всё-жъ недостойное
Прочь отжени!한처음의 권력인 왕권을
정교회 루스를
하느님, 보호하소서!
이 땅에 평온과
평화의 왕국을 이루소서!
모든 악을
물리치소서!
이 땅에 평온과
평화의 왕국을 이루소서!
모든 악을
물리치소서!3 О, Провидѣніе!
Благословеніе
Намъ ниспошли!
Къ благу стремленіе,
Въ счастьѣ смиреніе,
Въ скорби терпѣніе
Дай на земли!
Къ благу стремленіе,
Въ счастьѣ смиреніе,
Въ скорби терпѣніе
Дай на земли!오, 하느님의 섭리여!
영광이 깃들도록
우리에게 강림하셨나이다.
선을 위한 정진을,
기쁨 안에 겸손을,
슬픔 안에 인내를,
이루게 하소서!
선을 위한 정진을,
기쁨 안에 겸손을,
슬픔 안에 인내를,
이루게 하소서!
2.3.4. 하느님, 폐하를 보호하소서!
〈하느님, 황제를 보호하소서!(Боже, Царя храни!, 1833–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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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 절 || 러시아어 || 독음 || 번역 ||
1 Боже, Царя храни!
Сильный, державный,
Царствуй на славу, на славу намъ!
Боже, Царя храни!
Сильный, державный,
Царствуй на славу, на славу намъ!보제, 짜랴 흐라니!
씔늬이, 뎨르좝늬이,
짜르스뜨부이 나 슬라부, 나 슬라부 남!
보제, 짜랴 흐라니!
씔늬이, 뎨르좝늬이,
짜르스뜨부이 나 슬라부, 나 슬라부 남!하느님, 폐하를 보호하소서!
강인하며 위엄찬 황제시여,
영광을 위하여 군림하사, 우리의 영광을!
하느님, 폐하를 보호하소서!
강인하며 위엄찬 황제시여,
영광을 위하여 군림하사, 우리의 영광을!2 Царствуй на страхъ врагамъ,
Царь православный!
Боже, Царя храни!
Царствуй на страхъ врагамъ,
Царь православный!
Боже, Царя храни!짜르스뜨부이 나 스뜨라흐 브라감,
짜르 프라보슬랍늬이!
보제, 짜랴 흐라니!
짜르스뜨부이 나 스뜨라흐 브라감,
짜르 프라보슬랍늬이!
보제, 짜랴 흐라니!군림하심으로 적이 떨게 하소서,
정교회의 황제시여!
하느님, 폐하를 보호하소서!
군림하심으로 적이 떨게 하소서,
정교회의 황제시여!
하느님, 폐하를 보호하소서!
3. 역사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제국/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4. 영토
1914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행정구역 |
러시아의 핵심 지대는 당연히 '유럽 러시아'였다. 핀란드와 폴란드 일부를 제외하면 러시아의 국경은 동유럽 평야 일대와 거의 일치했다. 제국의 서쪽 국경은 최북단 바란게르피요르드에서 보트니아 만까지 콜라반도를 가로질렀으며, 발트해 남쪽 쿠로니아 사주까지 쭉 내려온 다음 다뉴브강 하류까지 이어졌다. 그 후에 폴란드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거대한 타원을 그리며 프로이센 왕국, 갈리치아,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했다. 북쪽 얼어붙은 북극해에 있는 노바야제믈랴, 콜구예프 섬, 바이가치섬 등 얼음으로 뒤덮인 섬들도 대부분 유럽 러시아에 속했다.[32] 유럽 러시아의 동쪽에는 낙후된 아시아 영토, 키르기스 평원과 광활한 시베리아가 있었다. 우랄 산맥과 우랄강, 카스피해가 유럽과 아시아의 자연경계였다. 한편 남쪽에는 흑해와 코카서스 지방이 있었는데, 이 곳은 마니치강 저지대를 경계로 유럽과는 구분됐다.
러시아 제국의 가장 큰 특징이자 최대 약점은 열린 바다로 나가는 항구가 몇 없다는 것. 북쪽의 거대한 해안가는 죄다 북극해의 빙하에 뒤덮여 당시로서는 항구로 쓸 수가 없었고, 보트니아 만과 핀란드 만 일대에 항구가 있었으나 이 곳을 이용해 발트 해를 거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리가 만과 발트 해는 역사적으로 슬라브인들의 바다라기보다는 게르만과 발트족, 핀족의 영역이었기 때문. 흑해 북쪽 해안가도 러시아의 영토였지만 내륙해에 불과했고, 흑해의 유일한 통로인 보스포루스 해협은 오스만 제국의 땅인지라 제대로 써먹기도 힘들었다. 넓고 얇은 카스피해는 아예 외해로 나가는 통로가 없어 유럽 러시아와 아시아 영토를 잇는 데에나 쓰였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평생 숙원은 외해로 나가는 안정적인 부동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팽창 |
러시아가 북아메리카에서 알래스카만 차지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러시아는 여기서 더 남하해서 오늘날 캐나다의 밴쿠버 지역과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영유권을 두고 영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19세기 초에는 캘리포니아 북부까지 남하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5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로스 요새(Форт-Росс, Fort Ross)'를 짓기도 하였다.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의 북쪽 경계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기에, 스페인에서는 자기 식민지 근처까지 모피 찾아 내려온 러시아인들을 보고 기겁했다. 로스 요새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주 수출품인 모피의 감소로 1848년에 폐쇄되었다. 맨 위의 지도를 확대해서 보면 알래스카뿐 아니라 오늘날 캐나다 영토의 일부도 녹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미국 본토인 캘리포니아와 워싱턴주 북쪽에도 녹색 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미국이 들어오기 전에 하와이 일부 섬까지 진출해서 요새를 쌓기도 하여 하와이 원주민들이 러시아에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하와이 제도 내부에서 다른 섬의 부족장들끼리 권력 다툼이 일어나던 와중에 오늘날 하와이 제도 서북부 카우아이 섬의 부족장인 카우무알리가 하와이 섬의 부족장인 카메하메하 1세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의 힘을 빌리려 한 것이다.[39] 동아프리카 지부티의 사갈로라는 항구도시를 '신 모스크바(Новая Москва)'로 명명하여 1889년 1월부터 2월까지 약 1개월 동안 식민지로 세운 적도 있다. 다만 둘 다 극히 짧은 기간이었기에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제외된다.[40]
5. 정치
크렘린의 알현실 '안드레옙스키 홀' |
러시아의 차르 전제정은 모스크바 대공국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으로, 이반 3세가 동로마 제국을 모방해 전제군주제의 틀을 잡았으며 이후 17세기와 18세기를 거쳐 절대군주정의 형태로 발전했다. 1613년에 동란 시대를 종결하고 새로 즉위한 미하일 1세 시대까지만 해도 아직 로마노프 왕조의 힘이 약했기에 유력자들이 모인 의회에 해당하는 젬스키 소보르를 매년 개회했다. 그러다가 1682년 즉위한 표트르 1세부터 본격적인 황권 강화가 시작되어 귀족의회인 보야르 두마를 폐지한 뒤 대신 서구적인 관료제로 이를 대체시켰다. 게다가 정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차르의 종교적 권위를 뒷받침하도록 했다.
표트르 1세의 급격한 서구화와 왕권 강화는 필연적으로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때문에 그를 이은 예카테리나 2세는 '귀족에 대한 헌장'을 발표해 귀족들이 이전 세대 동안 쌓아온 모든 특권과 재산을 인정하고 '도시에 대한 헌장'을 연달아 발표하며 도시마다 자치 시정부를 구성토록 허락하기도 했다. 이같은 조치는 귀족층의 반발을 무마하는 효과를 냈으나 동시에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은 황제와 국가 관료체계에게 있었다. 덕분에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절대주의의 정점'이라 불릴만한 권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후임 차르들은 이같은 권력을 이용해 알렉산드르 1세가 국가평의회(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сове́т)를 설치, 일종의 입법기구를 만들었으며 알렉산드르 2세는 지방자치정부인 젬스트보와 독자적인 사법부를 설치했다. 하지만 여전히 1905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러시아에는 국가 단위의 제대로 된 입법부도,[42] 헌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겨울궁전에서 열린 무도회 |
차르는 다른 유럽 군주들에 비해 훨씬 높은 비율의 토지와 기업들을 소유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미하일 카투코프, 니콜라이 카람진 등 저명한 작가들조차 러시아에는 강력한 차르가 필요하며 서구의 공화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러시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43]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이후 국가두마가 창설되면서 두마 군주정(Думская монархия)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두마 군주정은 상당히 정의하기 어려운 혼종이었다. 유럽인들은 당시 러시아를 '독재자 차르 아래의 입헌군주정'이라고 썼는데, 당시 러시아의 과도기적인 체제를 상징하는 표현. 1905년 10월 이전까지 러시아의 법에는 차르의 권력이 '전제적이고 무제한이다'라 쓰였으나 이후에는 '무제한'이라는 표현이 삭제됐다. 차르는 여전히 국가두마가 통과시킨 모든 법률을 무제한으로 무력화할 수 있었지만[44][45] 그렇다고 차르 마음대로 법률을 통과시킬 수도 없어서 모두 선출된 의회의 의결을 거쳐야만 했다. 당시 러시아는 '절대군주가 자체적으로 본인의 권력을 제한하는 군주정'으로써, 내내 이를 계속 차르의 재량에 맡길 것인지 아니면 법으로 못박아 제한할 것인지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으며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종결된다.
개혁주의 움직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러시아 지도부 대부분은 보수주의 성향이 매우 짙었다. 러시아 보수주의는 근본적으로 지식인 계층의 반이성주의, 정교회의 종교주의, 농노와 지주들로 이루어진 토지사회의 전통주의, 군대 장교들의 군국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반이성주의를 선호하던 러시아는 당시 서유럽에 몰아닥치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낭만주의를 불편해했다. '진보'라는 명백히 자유주의적인 이념은 러시아에 들어와서는 '기존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최신 기술만의 도입'이라는 보수적 근대화 개념으로 격하됐다. 일부 러시아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발전된 근대 기술의 도입이 독재정치의 도구로 전락할 것을 우려했고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차르 독재 하의 러시아가 '통신 기술을 가진 칭기즈 칸'이 되어버릴까봐 걱정했다.
5.1. 중앙 정치
5.1.1. 황제
자세한 내용은 차르 문서 참고하십시오.니콜라이 2세 |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
표트르 1세가 대북방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자, 러시아 귀족들은 차르에게 '전러시아의 황제'라는 칭호를 바치기로 결정했다. 표트르 1세는 1721년 11월 2일에 이 칭호를 받아들였으며 네덜란드 공화국, 프로이센 왕국이 즉시 러시아의 칭제를 승인했다. 이어 1723년에는 스웨덴이, 1739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1742년에는 영국과 오스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이, 1745년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마지막으로 1764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러시아의 황제위를 인정함으로써 이후부터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제국'이라 불렸다.
러시아의 황제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오직 두 가지의 제한만이 걸려있었는데, 그마저도 기존의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하나는 황제와 황후 모두 러시아 정교회 신자여야만 한다는 것, 나머지 하나는 파벨 1세가 발표한 파벨 계승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제외하면 러시아 황제의 권한은 사실상 무한했다.
그러나 1905년 10월 17일에 상황이 바뀌었다. 황제는 1906년 4월 28일에 발표된 헌법에 따라 선출된 국가두마의 동의 없이는 그 어떠한 명령도 법률로 만들 수 없다고 스스로 발표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력에 제한을 걸었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의회를 해산할 권리를 유지했고, 실제로 해산권을 사용하기도 했다. 게다가 황제는 국가두마에서 통과시킨 모든 법률들에 대해 무한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으며 오직 황제만이 개헌을 시작할 권한이 있었다. 황제가 임명한 장관들은 오직 황제에게만 책임을 졌고 국가두마나 국민들에게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두마의 의원들과 국민들은 이들에게 의혹을 제기할 수는 있었으나 이들을 면직하거나 제거할 수는 없었다. 황제의 권한은 1906년 4월 28일 이후로 꽤나 제약되었으나 여전히 매우 강력했다.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는 먼저 황제관을 머리에 씌운 다음, 레갈리아를 착용하고 성유를 기름부음받은 뒤 정교회로부터 축복을 받는 등 대단히 의례적인 절차로 가득했다.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가 동로마 황녀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하면서 동로마의 대관식에서 모티브를 따왔기 때문. 러시아 황제는 이를 근거로 자신들이 동로마를 이은 후계자, 즉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정교회 총대주교로부터 기름을 부음받는 의식이 가장 중요한 의식이어서, 군주에게 하느님의 신성한 권위를 덧씌운다는 의미가 있었다. 대관식은 수도가 어디였든지 상관없이 항상 크렘린의 성모승천대성당에서 치러졌으며 마지막으로 치러진 대관식은 1896년 5월 26일 치러진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대관식이다.
5.1.2. 의회
5.1.2.1. 국가평의회
1901년 5월 7일 마린스키 궁전에서 열린 국가평의회 기념화 |
원래는 차르의 최측근들로 구성된 작은 모임에서 시작했다. 주로 외교나 외치 문제에서 차르에게 조언을 해주는 역할로 표트르 1세 시절에 '추밀원'라는 이름으로 처음 공식 문서에 등장했다. 예카테리나 1세는 '최고추밀원'라는 이름으로 바꾸었고, 회의의 역할과 기능은 황제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그러다가 표트르 3세가 1762년 5월 20일에 '제국평의회'라 개칭했으나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하고 얼마 안가 해산시켜버리면서 잠시 계통이 끊겼다.
그러다가 알렉산드르 1세 시절인 1810년, 개혁가 미하일 스페란스키의 개혁정책 아래 '국가평의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활한다. 스페란스키는 본디 국가평의회를 러시아 의회의 상원으로 만들 구상이었으나, 실제로는 황제가 믿을만한 최측근들을 앉혀놓는 조언기구에 불과했다. 의원들의 수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1810년 설립 당시에는 35명의 의원들이 있었고 1890년에는 2배로 증가해 무려 60명의 의원들로 구성됐다. 입법위원회, 사회종교위원회, 경제산업위원회, 과학상업위원회 이렇게 4개의 위원회로 이루어졌고 각기 할당된 업무를 처리했다. 평의회 의장이 주재하는 전체 본회의를 따로 열기도 했다. 국가평의회의 주요 업무는 법률의 예비타당성 조사, 법률의 공포 및 폐지였으나 어디까지나 황제의 보조 역할에 불과할 뿐, 실질적인 입법부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평의회는 직권상 위원인 장관들이 제출한 법률과 프로젝트들을 모두 전반적으로 검토했다. 대부분은 예산과 국가 지출에 관한 일이긴 했지만 국정과 관련된 업무라면 뭐든지 검토할 의무가 있었다. 평의회는 법률의 변경을 제안하거나 검토할 권한이 있었고, 장관들이 제출하지 않은 자료들까지도 사찰할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평의회의 한계는 명확하여 어디까지나 황제에게 권고안만을 제출할 수 있었다. 권고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황제는 아무 페널티 없이 마음대로 평의회의 권고안을 무시할 수 있었다. 평의회는 사실상 외교정책 수립에 아무 역할도 하지못했고, 평의회의 의원들이 황제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1905년의 혁명 이후, 1906년부터는 헌법에 명시된 기구가 되어 러시아 제국 의회의 상원을 맡았다. 의원의 절반은 황제가 임명했고 나머지 절반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선거로 선출했다. 젬스트보에서 56석, 귀족 의회에서 18석, 러시아 정교회가 6석, 증권거래소, 상공회의소, 기업가들이 12석,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6석, 핀란드 의회에서 2석을 뽑았다. 의외로 당시의 영국 상원과 프로이센 왕국의 상원과 비교했을 때 훨씬 출신 성분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민주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간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며 1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소련에서는 1991년 붕괴 직전 소비에트 국가평의회를 만들기 전까지는 국가평의회를 계승한 기관을 만들지 않았다.
5.1.2.2. 국가두마
타브리체스키 궁전 | 당시 국가두마 회의 모습 |
1905년 혁명의 열기에 짓눌린 세르게이 비테는 '두마'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불리긴 두마'라고도 부르는데, 처음에는 그저 황제의 또다른 조언 기구에 불과했으나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자 이를 막기 위해 니콜라이 2세가 발표한 '10월 선언'을 통해서 그 중요도가 격상됐다. 황제는 새로 소집할 국가두마에 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권을 약속했고, 그렇게 구성된 두마에 입법권과 감사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다. 새로 만들어질 국가두마는 러시아의 하원 역할을 할 것이었고 기존의 국가평의회는 상원 역할을 할 것이었다.
두마는 총 442명으로 구성됐다. 극도로 복잡한 절차로 선출되었고 부유층과 지주 계급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중앙아시아를 제외한 각 지방에 선거구들이 할당됐고 대도시들에도 의석이 할당됐다. 의원들은 지역의 선거인단들 중에서 뽑혔고 선거인단은 지주, 시민, 농민 이 3개 계급이 선출했다. 가장 부유한 사람들은 직접 참석한 반면 빈곤층들은 대표를 뽑아 대리시켰다. 도시민들은 납세하는 기준 재산에 따라 선거권이 나뉘었고 이들은 직접 의원을 선출할 수 있었다. 농민들은 '볼로스트'라는 행정구역 단위로 대표를 뽑았다. 노동자들의 경우 50인 이상의 사업장은 각기 선거인단에 1명 이상의 선거인을 선출할 수 있었다. 선거인단 투표는 비밀투표에 단순 다수결이었고, 다수가 보수층이었던지라 급진주의자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그나마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 오데사, 리가, 바르샤바 등 대도시들에서 의원을 직접 선출할 수 있게 한 덕분에 그나마 급진주의자들이 두마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절대 자신의 전제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1906년 4월 기본법을 발표해 '최고 전제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두마의 동의 없이 법을 제정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반대로 두마 역시 황제의 허락 없이는 법을 통과시킬 수 없었고 황제는 거부권을 무한히 행사 가능했다. 장관들의 임면권 역시 여전히 황제가 틀어쥐었고 행정부는 두마에 그 어떠한 책임도 의무도 없었다. 게다가 황제에게는 원할 때마다 두마를 해산하고 새로 소집할 권리까지 있었다. 러시아의 실상은 여전히 황제가 압도적인 비공식적 절대 군주정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06년 4월 27일 제1차 두마가 소집됐다.
제1차 두마는 약 500명의 의원들로 구성됐다.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노동당 같은 급진 좌파정당들은 선거 자체를 보이콧했고, 때문에 온건 성향의 입헌민주당이 가장 많은 184석을 차지했다.[46] 제2당은 약간 더 좌파 성향의 트루도비키로 약 100석을 차지했다. 그 외에 10월 17일 연합 등 약 45석의 우파 연합도 있었으며 농민 집단 출신의 타 의원들은 무소속이었다. 이렇게 구성된 1906년 7월 8일부터 73일 간 지속됐지만 딱히 성과를 내지 못했다. 두마가 토지개혁과 선거개혁을 원했지만 황제와 이반 고레미킨 총리는 두마를 견제했다. 자유주의를 두려워한 황제가 결국 두마를 해산했다. 이에 분개한 입헌민주당 대표 파벨 밀류코프는 200명의 의원들과 함께 핀란드로 도망쳐 '비푸리 선언'을 발표해 불복종 저항운동을 요구했으나 국민들에게 무시당했고, 얼마 못가 체포당해 진압당해버렸다.
두마를 개회하는 니콜라이 2세 | 현재 타브리체스키 궁전의 모습 |
1907년 11월 소집된 제3차 두마는 이전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고 지주 자산가 계급들의 비율이 높았다. 덕분에 두마는 5년의 임기를 처음 채우는 데에 성공했고, 200개의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2,500개의 법안에 대해 투표를 실시했다. 두마는 스톨리핀의 군사력 향상, 토지개혁, 사회복지 제도를 지지했다. 정부와 두마 사이의 관계는 개선됐지만 좋은 것은 아니었다. 제3차 두마 내내 제국은 불안에 시달렸고 제국 곳곳이 계엄령 아래거나 봉쇄 조치가 내려졌다. 제2차 두마의 강제해산, 제1차 두마의 의장이던 무름체프의 장례식, 레프 톨스토이의 장례식, 광신도와 선동가들에 대한 언급이 금지됐고 두마는 근본적인 개혁의 원동력을 잃었다. 스톨리핀은 1911년 9월 암살당했고 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가 새 총리로 임명됐다.[48]
마지막 두마인 제4차 두마는 1912년 11월 15일부터 1917년 10월 6일까지 열렸다. 그러나 두마와 황제 사이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는데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세를 정부가 두마에게 철저히 숨겼기 때문. 두마는 점점 황제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의원들은 점점 하나로 뭉쳐 급진화되어갔다. 정부와 두마 사이의 관계는 날로 최악으로 치달아 의원들이 보리스 슈튀르머 총리에게 야유를 퍼붓는가하면 내각 장관들을 라스푸틴의 부하, 겁쟁이와 암살자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새로 임명된 알렉산드르 트레포프 총리는 의회에서 제대로 연설조차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2월 혁명이 일어나 게오르기 리보프의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러시아 공화국이 선포되며 국가두마는 10월 6일 영구적으로 해산됐다.
5.1.3. 각료회의
1905년 6월 14일 찍은 장관들의 모습 | 1905년 제1차 각료회의 |
각료회의(Совет министров) 명단 | ||||
내무부 (Министерство внутренних дел) | 재무부 (Министерство финансов) | 교통부 (Министерство путей сообщения) | ||
외무부 (Министерство иностранных дел) | 법무부 (Министерство юстиции) | 전쟁부 (Военное министерство) | ||
해양부 (Морское министерство) | 교육부 (Министерство народного просвещения) | 궁내부 (Министерство императорского двора) | ||
상공부 (Министерство торговли и промышленности) | 토지관리 및 농업총부 (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землеустройства и земледелия) | 국가감독부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онтроль) | ||
국가보건총부 (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м здравоохранением) | 마사부 (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коннозаводства) | 신성통치종무원 수석법무관 (Обер-прокурор Святейшего Синода) |
본디 황제는 1861년 11월 24일에 '각료위원회'를 만들어 자문 기관으로 활용했다. 비공식적으로는 1857년 10월부터 제대로 된 기능을 시작했으며 여러 부서들의 소관이 겹치는 복잡한 사안을 황제가 친히 결정할 때나 간간히 쓰였다. 각부 장관들과 주요 행정부 관료들, 국가평의회 의장, 각료회의 의장, 황제가 임명한 특별위원 등으로 구성됐다. 여기서 황제가 친히 결정을 내리면 해당 업무 소관인 장관들이 가지고 가서 실무진들에게 처리하라고 하달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1863년부터는 각료위원회에 제출되는 안건의 수 자체가 크게 줄어들었고, 그마저도 1882년 12월부터는 아예 위원회가 중단되어 한 번도 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1905년 11월 1일에 니콜라이 2세의 개혁으로 인해 '각료회의'라는 이름으로 부활한다. 1861년의 각료위원회는 어디까지나 황제의 조언자 겸 들러리였기에 제대로 된 행정부라고 볼 수는 없었다. 모든 권한이 황제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행정부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관료들 간의 협치라든가 부서간 타협 및 조정도 딱히 없었다. 그러다가 1905년의 개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인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 더이상 각료회의 의장은 황제가 아닌 황제가 임명한 장관이 맡았으며, 의회에 제출된 법안의 심사, 행정조직 개편, 관료 임면, 국방 및 외교,[49] 상속,[50] 예산 편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한 권한을 위임받았다. 계엄령의 선포 및 종료, 유배지 지정, 헌병 및 경찰력 강화, 도시 및 지방정부 감독, 회사 설립 등의 실무도 모조리 각료회의의 소관이었다. 1909년에는 분야별로 안건을 심사할 소위원회까지 만들어지면서 이전보다는 행정부의 모습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2월 혁명이 일어나자 각료회의는 즉각 중단됐다. 황제는 서둘러 퇴위를 발표하는 동시에 3월 15일 게오르기 리보프를 각료회의 의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이미 각료회의의 권한은 모두 국가두마에게 넘어왔다고 질타했고, 황제의 명령은 무시당한 채 각료회의도 소멸됐다.
5.1.4. 신성통치종무원
종무원 건물[51] | 1917년 종무위원들의 모습 |
원래는 러시아 정교의 최고 지도기관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이었다. 하지만 표트르 1세가 대대적인 서구화 개혁을 진행하면서 이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은 눈엣가시가 되고야 만다. 일단 유럽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고 싶었던 황제 입장에서 총대주교청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러시아의 '후진적'인 가치들과 지나치게 깊게 얽혀있었고, 특히 총대주교 1인이 독자적인 최고 종교 지도자로서 군림하는 모습은 황제 입장에서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1700년 보수적인 총대주교 아드리안이 사망하자 표트르 1세는 일단 총대주교직을 공석으로 비운 다음 20년 간 개혁 성향의 대주교 스테판 야보르스키를 총책임자로 임명, 20년간 정교회를 정부 아래로 편입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결국 1721년 시노드, 즉 신성통치종무원이 만들어지면서 총대주교청은 해체되고 정교회는 예전의 영향력과 권위를 대폭 상실한 채 황제 정부 아래로 들어왔다. 표트르 1세는 기존의 프리카즈 제도를 해체하고 유럽식 관료제를 이식했으며 이 과정에서 정교회의 권한들을 담당 부서에 이관시켜버렸다. 본래 표트르 1세도 총대주교를 폐지할 생각까지는 없었으나 총대주교가 공석이 되자 예산도 훨씬 절약이 가능했고 성직자의 토지 소유 금지와 사치 금지를 통해 돈이 남아돌자 이에 고무된 황제가 아예 폐지하고 신성통치종무원으로 대체시켜버린 것이었다.
신성통치종무원은 처음에는 10명의 주교들로 이뤄져 있었고 나중에는 12명으로 확대됐다. 황제가 임명하는 종무원장, 즉 수석법무관이 신성통치종무원을 전반적으로 관리했고, 표트르 1세는 사제들에게 반역을 고백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알리라고 명령했고 세속화를 통해 정교회의 권한은 약화하고 교회를 아예 정부에 종속시켜버렸다. 기존에 정교회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관점이 있었다면 표트르는 이를 뒤집고 교회의 신성불가침을 부정한 뒤 국가권위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다만 황제는 문맹이 많은 성직자들을 위해 교회 시스템 개선에 나섰고, 교회의 땅을 압수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정교회는 신성통치종무원 아래에서 더욱 관용적으로 변했다. 정교회는 날로 교파들에 대해 관대해졌고 가톨릭 교도와의 통혼이 1721년부터 허가됐다. 루터교회에 큰 감명을 받았던 황제는 정교 역시 마찬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어 구빈원, 학교, 공공복지 사업에 적극 나설 것을 명령하며 정교의 조직, 재정, 정책을 단단히 통제했다.
신성통치종무원의 역할은 크게 총대주교청과 다를 것은 없었다. 종무위원들은 1명의 원장, 2명의 부원장, 4명의 위원, 4명의 평가위원으로 나뉘었다. 각 위원들은 분쟁을 조정할 때마다 투표를 했고 각각 1표씩을 행사했다. 이들은 다양한 계층과 재산계급에서 뽑힌 사람들로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었다. 종무원에서 일하는 6,000명의 사람들을 책임졌으며 정교회의 막대한 재산을 관리했고 옛 총대주교청의 권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종무원의 주요 업무에는 정교회 신앙을 감독하고 교리 교육, 축제 개최, 의례 및 미사 분쟁 해결, 이단 억압, 기적과 성유물 판단, 미신 및 주술 금지, 수도원과 교회의 건립 따위가 있었다.
5.1.5. 원로원
원로원 의원들의 모습 | 원로원 건물 |
원로원의 1인자인 '수석법무관'이 원로원 의장을 맡아 황제의 뜻을 원로원에 전달했다. 수석법무관이 황제와 원로원을 이어주는 다리였기에 황제는 수석법무관을 직접 '군주의 눈'이라 불렀다.
원래는 표트르 1세가 부재한 상황을 대비해 만들어진 일시적 기구였으나 그가 돌아온 이후에도 유지되어 상설기구가 되었다. 1711년에는 9명이었고 1712년에 정원이 10명으로 늘었다. 수석법무관과 원로원과의 다툼이 생기면 황제가 중재해 가라앉혔다. 원로원은 수많은 장관 관료들과 연결되었고, 행정과 법률 분야에서만큼은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떠올랐다. 알렉산드르 1세가 창설한 국가평의회도 원래는 이 원로원에게서 입법권을 분리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1800년대 내내 원로원은 사실상 러시아의 최고 사법부로 작동했고 모든 법률과 관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원로원은 여러 개의 부서로 세분되어 있었다. 형사 사건을 다루는 부서와 민사 사건을 다루는 부서는 사실상의 대법원 역할을 했다. 또한 '문장부'라는 부서도 따로 있어 귀족들과 명예시민들의 권리를 조율했다.
5.2. 지방 정치
5.2.1. 행정 구역
1914년 러시아의 행정구역 | 모스크바 총독 관저 |
각 구베르니야에는 주지사와 부지사를 두어 관할토록 했다. 종종 여러 개의 구베르니야를 1명의 주지사가 한꺼번에 담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군사권까지 가지고 있어 상당히 막강한 권한을 자랑했다. 그 상위 계급인 총독도 존재했는데, 핀란드, 바르샤바, 빌뉴스, 키예프, 모스크바, 리가에 총독이 주재했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오데사, 세바스토폴, 케르치, 니콜라예프, 로스토프 같은 대도시들에는 자치 행정기관이 따로 있어서 구베르니야와는 독자적으로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는 경찰서장이 주지사의 역할을 했다.
5.2.2. 지방 정부
모스크바의 시 두마 청사 |
젬스트보는 1861년 알렉산드르 2세가 시행한 개혁 때 창설된 지방의회로, 러시아의 34개 구베르니야에서 존재했다. 농민들의 자치 기구인 미르나 볼로스트와는 달리, 젬스트보는 국가 기관의 일부로써 지역 경제를 담당하는 실질적인 자치 정부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귀족 등 대지주, 소지주들의 대표, 부유층들의 대표, 중산층들의 대표, 농민들의 대표[53] 이렇게 5개 계급으로 이뤄졌고 귀족들의 비중과 영향력이 훨씬 높았다. 1년에 1번 이상 회의를 열었고 법안을 의결, 조정할 수 있었다.[54] 행정, 과세, 교육,[55] 의료[56] 등을 모두 관할했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모든 권한이 소비에트에게 넘어가며 자연스레 폐지됐다.
시 의회에 해당하는 '시 두마'는 1870년대 이래로 모든 유럽 러시아 지방에 설치됐다. 모든 주택 소유자, 세금을 납부하는 상인, 장인 및 노동자들은 재산의 양에 따라 내림차순으로 분류한 다음 3개의 계급으로 나누었다. 이 계급들이 각각 동일한 수의 대의원을 선출해 시 두마를 구성했다. 하지만 최상류층의 모수가 매우 작았던 것을 생각하면 부유층들의 목소리가 과도하게 많이 반영되었던 셈. 시의 행정부는 선거로 뽑힌 시장과 시 두마에서 선출한 우프라바들이 운영했다. 알렉산드르 3세가 1892년 발표한 칙령에 따라 시 두마 역시 젬스트보와 마찬가지로 주지사 소관으로 옮겨지며 갈수록 권한이 축소됐다. 1894년부터는 시베리아에, 1895년에는 코카서스 지방에도 시 두마가 설치됐다.
발트해 연안 지방은 다른 지방들과는 조금 다르게 운영했다. 스웨덴 제국이 지배하던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 그리고 나중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지배하던 쿠를란트-젬갈렌 등은 대북방전쟁 이후 러시아에 편입되었는데, 1721년 니스타드 조약에 따라 발트 연안 지방의 독일 귀족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교육, 치안, 지방 사법, 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특권을 누렸다. 그렇게 170여 년 정도 후인 1888년, 점차 치안 및 영지 사법 행정권 등이 점차 독일 귀족에게서 중앙 정부로 넘어오기 시작했고 도르파트 제국 대학이 유리예프 제국 대학으로 개칭하는 등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화가 일어났다. 1893년에는 거의 러시아 본토와 비슷한 행정체계가 설치되어 러시아의 입김이 한층 더 거세졌다.
6. 군사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제국군 문서 참고하십시오.러시아 제국군은 크게 러시아 제국 육군과 러시아 제국 해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800년대 초 나폴레옹 전쟁에 큰 기여를 하면서 유럽의 경찰이라는 칭호와 함께 유럽 최강 육군 강국이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크림전쟁에서 약점을 여지없이 노출하며 무너지자 큰 충격을 받고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라는 국가가 전반적으로 낙후되었던 탓에 동시대 영국, 프랑스, 독일군 등과 비교했을 때에는 턱없이 기술도 훈련도도 뒤처진 것이 현실이었다. 러시아 제국군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부진한 성과를 거두었고, 불안정하고 혁명 분자들이 들끓는 집단이었다. 결국 2월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자 러시아 제국군은 백군과 소련군으로 분열되어 계승된다.
주류는 육군과 해군이었으나 러시아 제국 공군도 존재했다. 1912년 창설되어 고작 5년간만 존재했던 군대였다. 러시아는 1800년대 말부터 공군의 필요성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고, 1910년에 공군 창설을 위해 장교들을 프랑스로 파견, 같은 해 말 여러 대의 프랑스와 영국 비행기를 구매한 뒤 비행사 훈련을 시작했다. 1912년 8월에 공병대 소속이던 비행대를 따로 분리해 항공대를 창설하면서 독립적인 공군이 되었다. 러시아는 비행기들을 사들이면서 공군의 규모를 크게 키웠고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거대한 공군을 운용하는 국가였다. 하지만 전황은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혁명이 터지면서 공군도 사라졌다. 비행사들 일부는 백군으로 갔지만 대부분은 소비에트에 남아 소련 공군의 모태가 되었다.
황제를 직접 호위하는 제국 근위대(Лейб-гвардия)도 있었다. 표트르 1세가 1683년 창설한 이래 점차 규모가 커지더니 단순한 황제의 친위대에서 벗어나 제국군 전체의 정예부대로 거듭났다. 근위대는 황실 사무에 동원됐고 대부분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에 주둔했다.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시위대에게 총을 발포한 부대들도 바로 이 근위대. 99,000명에 달하는 근위대가 마음만 먹었다면 혁명을 무자비하게 진압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근위대는 기존의 황제의 충성스러운 군대가 아니라 농촌에서 징집한 신병들이 뒤섞여 있던 상태였다. 게다가 장교들마저 실전 경험이 부족했고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던 차였다. 결국 근위대 소속 파블롭스키 연대, 세묘놉스키 연대, 이즈마일롭스키 연대 등이 볼셰비키에 가담해 반란을 일으키며 황제에 전면적으로 총을 겨누고야 만다.
러시아 제국 내의 자치군대도 존재했다. 폴란드 입헌왕국 왕국군(1814년 ~ 1831년)은 러시아 황제가 동군연합을 겸한 폴란드 입헌왕국의 자체적인 군대로 상당한 전력을 보유했지만 1830년 폴란드인들이 러시아에 대항해 일으킨 11월 봉기에 이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봉기 진압 후 러시아 당국이 보복으로 해체시켜버렸다. 핀란드 대공국 대공국군(1878년 ~ 1901년)은 러시아 제국 자치국인 핀란드 대공국의 자치군대이며 1878년 군사개혁이후에 형성되었다. 이 군대는 핀란드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핀란드인으로 구성되었고 최고사령관은 러시아 제국의 황제이며, 군대의 지휘관은 핀란드 총독이 가진다. 규모는 5,600명, 8개의 소총대대, 1개의 기병연대, 포병은 없었다. 후에 1901년 새로운 병역헌장이 승인된 후 해체되기 시작해서 제3친위 핀란드 소총대대(주둔지: 헬싱키)가 마지막으로 해체(1905년)되었다.
6.1. 육군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제국 육군 문서 참고하십시오.나폴레옹 전쟁시기 당시의 러시아 제국 육군 |
원래 표트르 1세 이전의 러시아에서는 스트렐치라는 머스킷병을 운용했다. 러시아 최초의 상비군으로서 이반 4세가 처음 창설했고 초창기에는 굉장히 유용한 전력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규율이 흐트러지고 충성심이 낮아지는 등 불안정한 군대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전쟁 시기에는 농노들을 징집해 군대를 증강해 운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1600년대에는 루스 차르국에서 서유럽의 군사 교리를 따라 '신질서 연대'를 창립했다. 신질서 연대는 정규군 보병, 용기병, 흑기병 등 여러 병과가 혼재했다. 1631년에는 모스크바에 정규 연대 2개를 창설했으며 1632년 스몰렌스크 전쟁 동안 정규 연대 6개, 흑기병 연대 1개, 용기병 연대 2개를 새로 꾸렸다. 처음에는 토지가 없는 귀족과 스트렐치들의 자식, 자원병, 카자크들을 모아 만들었고 지휘관들은 전원 외국인이었다.
스몰렌스크 전쟁이 끝나자 모든 신질서 연대는 해체됐으나 20년 뒤 또 폴란드와 전쟁이 일어나며 재창설됐다. 정규군과 용기병들은 상비군으로 재편되었으며, 흑기병들은 돈과 토지가 없는 중산층, 귀족들의 자제로 구성되어 복무의 대가로 토지를 받았다. 지휘관의 절반 이상이 젠트리 계급 이상일 정도로 엘리트층으로만 구성된 군대였다. 평시에는 일부 연대가 해체되긴 했으나 러시아는 막대한 군대를 운용했다. 1681년 기준 러시아는 61,000명에 달하는 정규 연대 33개, 29,000명에 달하는 용기병 및 흑기병 연대 25개를 거느리고 있었다. 1600년대 후반 이 신질서 연대는 러시아 군대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고 1700년대부터 개혁이 시작되며 러시아 제국군의 모태가 된다.
표트르 1세는 징집 제도를 활용해 러시아의 군대를 강화했고 독일을 카피해 근대식 정규군을 편성했다. 특히 귀족 출신만을 장교에 앉히던 관례를 깨고 평민들도 능력만 있다면 장교 출신에 올려주었으며 재능만 있다면 귀족 작위를 하사받기도 했으며 이 특례는 예카테리나 2세가 폐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농민과 도시인들의 징집은 지역별로 나누어 이뤄졌는데 처음에는 가구를 기준으로 하다가 형평성 논란으로 인구수 기준으로 바꾸었다. 1700년대 복무 기간은 종신이었지만 1793년 25년으로 단축됐고, 1834년에는 현역 20년에 예비군 5년, 1855년에는 현역 12년에 예비군 3년으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1760년대와 90년대 동안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라는 역대급 명장이 독주하던 시대였다. 역사상 단 한 번도 패해본 적이 없는, 세계사적으로도 몇 안 되는 위대한 장군들 중 하나였던 수보로프는 1777년부터 1783년까지 크림반도와 코카서스에서 근무했으며, 1780년에는 중장이 되었고 1783년에는 보병 대장으로 승진했다. 1787년부터 1791년까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코시치우슈코 봉기 동안 러시아가 폴란드에 맞서 승리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또한 플린트락 소총이 도입되었으며 1763년에는 참모단이 창설되는 등 러시아 제국군의 질이 점진적으로 향상되던 시기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군복 | 제1차 세계대전 시기 군복 |
그러나 유럽 최강 육군이라는 러시아 육군의 자존심은 크림전쟁의 패배로 박살나고야 만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러시아는 전쟁부 장관 드미트리 밀류틴의 주도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선다. 기존의 아동 징집 제도를 폐지, 21세 이상 남자들에 대해 병역의 의무를 부활시키는가 하면 전국에 군관구를 설치했다. 대신 병사들의 복무 기간은 6년, 예비군은 9년으로 단축했다. 이로 인해 풍부한 경험을 갖춘 징집병을 예전보다 훨씬 대량으로 양성이 가능했으며 평화시에 군대 규모를 줄여 돈을 아낄 수 있었다.[58] 모든 징집자들에게는 초등 교육이 제공됐고 영구적인 병영을 설치하는 등 아예 러시아의 군대를 갈아엎은 초유의 대개혁이었다. 밀류틴의 개혁은 표트르 1세 이래로 유지된 러시아의 군제 제도를 뒤짚어엎었고, 심지어 현대 러시아 연방군의 기틀을 잡은 개혁이라고 평가받는다.
이후에도 러시아 제국군은 의화단 운동, 아무르강 전투 등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1904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군대는 날로 예산이 줄어들고 사기가 꺾이고 있었다. 러시아 국가예산에서 군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1881년 30%에서 1902년 18%로 감소했고, 1904년까지 러시아는 자국 군인 1명당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군인 1명당 지출한 금액의 57%, 63%밖에 지출하지 않았다. 1883년과 1903년 사이에 1,500건이 넘는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며 러시아군의 사기는 점차점차 사그라들었다. 말기로 갈수록 황제와 제정에 대한 불만이 심해지며 1905년부터 1906년까지 무려 400건이 넘는 봉기가 일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니콜라이 2세는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전쟁에 뛰어들었다. 개전 당시 러시아군은 115개의 보병 사단, 38개의 기병 사단, 7,900문의 총포(야포 7,100문, 곡사포 540문, 중포 257문)을 보유한 대군이었다. 하지만 군 구급차는 고작 2대, 차량은 679대에 불과했다. 러시아는 독일 제국과 싸우기 위해 32개 보병 사단과 10.5개 기병 사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46개 보병 사단과 18.5개 기병 사단, 발트해와 흑해 연안을 방어하기 위해 19.5개 보병 사단과 5.5개 기병 사단, 시베리아와 튀르키스탄에 17개 보병 사단과 3.5개 기병 사단을 주둔시켰고 크게 동부 전선, 캅카스 전선, 루마니아 전선에서 싸웠다. 러시아는 야심차게 참전했으나 지휘부의 무능함과 안일함 때문에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에게 패배하고 기나긴 소모전으로 접어들었으며, 결국 1917년 혁명이 일어나 제국이 붕괴되었고 이후 형성된 볼셰비키 정권은 치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하고 만다. 물론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바로 조약을 파기했지만 공산주의 정권이라는 근본적인 한계 탓에 잃은 영토를 되찾는데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결국 홀로 나섰지만 폴란드에게 탈탈 털리며 벨라루스의 절반과 우크라이나의 2/3를 재확보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6.2. 해군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제국 해군 문서 참고하십시오.1849년 흑해 함대 시찰 |
러시아 해군은 크게 2가지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부동항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공해로 개방된 접근이 쉽지 않았다는 것.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다른 발트해 항구,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이 되면 얼어붙어 사용할 수가 없었기에 러시아는 흑해 연안, 그리고 무르만스크에 항구를 건설해야만 했다.[60] 그리고 발트해의 상대적으로 강력한 발트함대조차도 인근 덴마크, 독일 등의 견제로 대서양으로 자유롭게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큰 제약이 걸려 있었다. 흑해함대 역시 오스만 제국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틀어막혀 지중해로 나가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러시아 해군은 발트함대, 흑해함대, 극동함대, 북극함대 등 상대적으로 고립된 해군 집단들을 따로따로 키워야만 했다.
현대 러시아 해군의 시조는 표트르 1세다. 1696년 아조프 원정 당시 표트르는 보로네시 강에서 건조한 군함 2척, 화선 4척, 갤리선 23척, 평저선 1,300척을 이끌고 아조프 요새를 점령했는데 이때 해군의 중요성을 절감한 그는 원정이 끝난 직후인 1696년 10월 20일 공식적인 해군 창설을 시작하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이것이 바로 러시아 해군의 시작이다. 러시아는 대북방전쟁 동안 발트함대를 건조했다. 발트함대의 본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두었고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탈린과 비보르크에도 기지를 건설했다.
1745년 러시아 해군은 36척의 전열함, 9척의 호위함, 3척의 정찰선, 5척의 포격선, 77척의 보조 선박 등 총 130여 척의 범선 선박으로 이뤄져 있었다. 노를 저어 운용하는 선박들은 그보다 더 많아서 253척의 갤리선, 143척의 반갤리선, 143척의 브리건틴 등이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아스트라한, 아르한겔스크 등 24곳의 조선소에서 선박들을 찍어냈다.[61] 장교는 모스크바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귀족 출신이었고 일반 선원들은 징집병이었다. 해군 복무는 종신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해군병 학도들을 해외로 보내 유학시키거나, 네덜란드나 그리스, 스코틀랜드 같은 곳에서 장교들을 초청해 고용하고 해군에 복무하게 만들기도 했다.
러시아가 공격적인 확장 정책을 펼침에 따라 러시아 해군도 날로 규모가 커져갔다. 1770년대에 발트함대가 흑해에 파견되어 오스만 함대를 꺾고 에게해까지 진출했으며, 1771년에 아조프 함대가 창설, 1778년에는 헤르손에 군항이 만들어졌고 1783년에 흑해함대의 첫 전함이 헤르손에서 취역, 1784년에 공식적으로 흑해함대가 창설됐다. 18세기 후반 러시아는 영국, 스페인, 프랑스에 이어 세계 4위 규모의 해군력을 보유했다. 당시 러시아 해군은 크게 발트함대와 흑해함대가 있었는데 발트함대는 전함 35척, 호위함 19척을 보유했고 흑해함대는 전함 23척과 호위함 130척을 보유했다. 그 외에도 북극해 전단, 카스피해 전단, 오호츠크 전단 등도 존재했으나 규모면에서는 밀렸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러시아 해군은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발트함대는 부식과 노후화 문제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방어에도 벅찼다. 러시아는 기존의 해군력 유지에만 신경썼을 뿐 확장은 더이상 하지 않았고 육군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1802년 해군 군사부가 설치되고 1815년 해군성으로 개칭한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러다가 1825년 니콜라이 1세가 즉위, 황좌에 오르자마자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제3의 해군 강국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면서 다시 대대적인 투자가 시작된다. 러시아 해군은 황제의 비호 아래 급격히 성장했으며, 덕분에 1829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지중해 함대와 흑해함대를 활용해 오스만 군대를 패퇴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크림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 | 강구트급 전함 |
기술적인 발전도 거듭하여 1826년 최초의 8문 대포를 장착한 무장 증기선을 도입했고, 10년 뒤에는 배수량 1,340톤, 177kW의 출력의 28문짜리 첫 증기 외륜선을 건조했다. 뿐만 아니라 탐험에도 앞장서 1803년부터 50년 간 무려 40번 넘게 장거리 탐험항해에 나서 러시아령 아메리카와 알래스카 탐험을 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1800년대 후반 내내 해군 확장을 거듭해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계 3위 규모의 해군을 보유하게 된다. 특히 미국 사업가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의 조언을 귀담아 들은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대를 이어 해군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지원했다. 어찌나 늘어나는 속도가 빨랐던지 러시아의 함대 건조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 영국, 독일, 미국, 특히 프랑스 등지에서 수입해와야 했을 정도.
러시아 해군이라고 항상 발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개전했고 발트함대와 태평양함대가 일본 해군에 격파당하면서 엄청난 대외적, 실질적 타격을 입었던 것. 러시아 해군력은 이 전투로 세계 3위에서 6위로 추락했다. 러시아 해군의 초점은 극동에서 발트해로 다시 옮겨갔고 독일로부터 발트해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어하는 것에 힘썼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해군을 포기하지 않고 1906년에 해군 참모부를 창설, 여러 군함들을 발주하며 러일전쟁에서 입은 피해 회복에 애썼다. 기뢰 부설, 잠수함 편대 창설, 드레드노트 건조 등 1906년부터 1913년에 걸쳐 러시아의 해군 지출은 총 5억 1,900만 달러로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5위 규모였다.
러시아 함대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흑해와 발트해에서 고군분투했다. 발트함대는 방어적으로 나서 독일 해군과 맞섰고, 흑해함대는 전력 우위를 바탕으로 오스만 해군을 깨부수어 놓았다. 그러나 대전 도중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 함대도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었다. 그나마 발트함대가 방어전략을 펼친 덕에 온전한 편이었는데, 그마저도 발트 내전으로 인해 외국의 개입군이 쳐들어오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표트르 브란겔과 발트함대 상당수는 소비에트에 반대해 백군 편을 들고선 브란겔 함대를 결성, 아예 떨어져 나갔다. 크론슈타트 반란에서 소련의 가혹한 처우에 반발해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 해군의 잔재는 대부분 소련 해군으로 이어졌지만, 앞서 언급한 브란겔 함대는 러시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7. 경제
자세한 내용은 알렉산드르 2세/재위 기간 러시아 제국의 경제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니콜라이 2세/재위 기간 러시아 제국의 경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러시아 경제 근대화의 변곡점이 된 농노 해방령 |
나중에 조율을 거치는 과정에서 처음 제안된 개혁안보다는 약간 후퇴했다. 해방 농노들에게 할당되었던 토지는 면적이 줄어들었고 그 손해분은 대신 더 낮은 이윤의 벌목권으로 메꿔줬다. 만일 농노들에게 주어질 할당지의 면적이 더 늘어나는 경우라면 지주 입맛대로 잉여분을 깎을 수도 있었다. 특히 비옥한 러시아 중부 흑토지 일대는 유난히 삭감되는 정도가 심했다. 농노들이 지급받은 토지의 면적은 으레 한 가정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작았고 여자 농노들은 아예 토지 할당 대상으로도 선정되지 못했다. 게다가 이전까지는 농노들이 자유롭게 쓰던 목초지와 산림이 모조리 지주의 소유로 인정되어버리며 앞으로는 돈을 내고 이용해야만 했다. 농노와 지주 계급 사이의 갈등은 날로 커져갔다.
해방 농노들은 상환금을 갚아나가며 자기 소유의 토지를 구매했다. 토지 상환금의 20%는 지주에게 내고 나머지 80%는 정부에게 지불했다. 농노들은 토지를 대신 구매해준 정부에게 49년 만기 6% 이자로 돈을 납부해야만 했다. 이 상환금에는 단순 토지의 가격 뿐만 아니라 지주가 손해본 농노의 노동력 값까지 책정되어 있어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결과적으로 농노들은 이 상환금을 갚느라 상당한 고통을 겪었고 정부가 상환금 명목으로 거둬들인 세금은 무려 20억 루블에 달했다. 사실상 정부가 국민들의 돈을 갈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63]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과는 달리 러시아 정부는 결과적으로 토지개혁에 단 한 루블도 투자하지 않은 채 상환 작업을 국가의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었다. 지주의 부채는 고스란히 새로 해방된 농노들의 어깨로 옮겨갔다. 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러시아의 귀족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됐고 기존 엘리트층이던 귀족들이 부르주아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주와 귀족들의 자본력이 강해질 수록 농노들이 건실한 자영농이 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러시아식의 농업 자본주의는 서유럽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봉건주의 잔재들이 저렴하고 관리가 편하다는 이유로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표트르 스톨리핀이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해 1903년부터 개혁을 추진하면서 상당히 개선된다. 1906년 농민은행이 막대한 토지를 구매해 모두 농민들에게 싸게 팔았다. 그 결과 1916년까지 전체 토지의 90%가 농민 소유가 되었다.[64] 농민들의 삶은 나아졌고 1913년 농민들의 소득은 1900년 대비 1.5배 증가했다.[65]
농노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노동력이 죄다 지주의 사슬 아래 묶여있는 바람에 산업화에 필수적인 '자유 노동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산업화를 하고 싶어도 고용할 노동자가 없으니 하지 못했고, 산업은 정체된 상태로 유지되었으며 농업도 후진적인 농노제에 묶여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농노 해방령 이후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급경제가 화폐경제로 전환되며 특히 중부 흑토 지대의 귀족들이 시대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농노제에 익숙해 경제적 지식도, 축적한 자본도, 숙련된 노동력도 없는 수많은 귀족들은 경제적으로 쪼들리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공식적으로 파산을 신청해 부채를 탕감받거나, 부양비를 받고 평민 자녀를 양자로 입적하는 등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농노 해방령으로 인해 막대한 수의 자유 노동자들이 시장에 풀렸다. 약 400만 명의 해방 농노들이 즉시 시장으로 나와 떠돌며 임금 노동자로 변했지만, 점진적으로 더 많은 수의 농노들이 노동자 계급으로 서서히 전환됐다. 1880년대 초반에 이미 러시아에는 상당히 탄탄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어 무려 그 수가 735만 명에 달했다. 농노 해방령을 발표한 직후인 1861년부터 1900년까지 노동자 계급은 320만 명에서 1,400만 명으로 증가해 무려 4.4배나 증가했다. 동시기 국가 전체 인구는 7,000만 명에서 1억 3,290만 명으로 약 90% 정도 급격히 증가했다.
러시아 정부와 지주들은 평민들을 쥐어짜 엄청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토지 상환금을 이용해 지주는 30년 동안 총 20억 루블을 받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작으로 막대한 외국 자본이 몰려왔다. 1860년대부터는 철도 건설로, 70년대부터는 산업 붐이 일어나며 외국인 투자가 늘어난 것. 1861년부터 1881년까지 19,000km가 넘는 철도망이 구축됐고 남부의 공장에서는 이전까지는 해외 수입에 의존했던 레일과 철도 장비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남부의 도네츠크 석탄 분지의 성장이 눈부셨다고. 코카서스에서는 바쿠의 유전이 크게 발전해 귀중한 석유 자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가내 수공업이 직물 공장으로 대체되어 직물 생산량은 3배로 뛰었고 자본주의는 산골벽지까지 침투했다. 지주들은 점차 자본가로 진화했고 부유한 해방농노들은 '쿨라크'라는 엘리트 계급을 형성했다.
독일, 프랑스와 비교한 러시아의 PPP 기준 경제 규모 |
자본가와 회사 뿐만 아니라 도시와 인프라도 그와 발맞추어 성장했다. 도시 전체의 배치가 유럽식으로 깔끔해졌고, 새로운 건물들이 줄줄이 올라갔으며 거리도 직선화하고 가로수를 심는 등 본격적인 근대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861년 전까지는 모스크바, 사라토프, 빌뉴스, 스타브로폴, 토르조크를 제외하면 변변찮은 상수도 시스템마저도 없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모든 대도시에 체계적인 수도 시스템이 설치됐다. 1879년부터는 모든 러시아 도시들에 전기가 공급되어 거리에 빛을 밝혔고, 1882년에는 도시 건물에 전화기가 등장했다.
한창 뻗어나가는 자본주의라는 세계적 흐름에 올라탄 러시아는 다른 국가들처럼 1873년 ~ 1877년에 경제위기를 겪었고, 80년대 후반에 장기불황을 거쳤으며 90년대에 급격한 산업 호황을 누렸다. 1800년대의 마지막 10년 동안 러시아의 산업 생산은 2배로 증가했고 동시기 독일은 62%, 미국은 38%, 영국은 27% 증가했다. 물론 애초에 러시아의 경제력이 이들과는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었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으나 그래도 크게 발전한 것은 확실했던 셈. 1897년 노동법이 도입된 후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기타 열강의 노동자들보다는 가난했으나 상대적으로 생활 조건은 나은 편이었다. 전반적인 강도는 당대 기준으로 낮은 편이었고 러시아는 노동법이 있는 몇 안 되는 국가였다. 노동자들의 근로 시간은 감소했으나 노동자 당 생산성 성장률은 연 1.6%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로 꾸준히 성장했다. 1913년 러시아 노동자의 하루 노동 시간은 10시간 미만이었고 1894년부터 1913년까지 급여는 1.5배 증가했다.
러시아 제국 중앙은행[66] | 바쿠의 유전 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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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농노 해방령은 사업가와 공장주들에게는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극초기에는 공장에 예속된 농노들이 해방되어 대거 탈출, 잠시간 공장 운영이 어려워지기도 했지만[67]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공장주들은 대규모로 자유 인력들을 고용해 써먹을 수 있었다. 정부의 지속적인 개혁으로 자본가들에게는 무궁무진한 기회가 열렸다. 철도 건설의 시작으로 단시간에 중공업이 급성장했고 주식회사가 출현했다. 1890년대 들어서는 타 유럽 국가들처럼 제대로 된,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과 기업가들이 등장했고 20세기 초에는 전체 사업체의 3분의 2가 주식회사나 집단운영 체제였다. 면화 산업, 무역 및 금융업에서 가장 많은 수익이 나왔고 점차 기업의 독점이 나타났다. 농노 해방령은 봉건 농노제를 부르주아와 자본주의 관계로 변모시켰고 여러 대규모 산업들이 나타나고 발전했다. 철도망이 확대되며 자본주의와 근대적 금융업이 러시아 전역으로 퍼진 것은 덤이었다.
러시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600년대 후반부터 1740년대까지 꾸준히 증가하여 북유럽과 서유럽의 가장 발달한 국가들과도 견줄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1740년대 이후부터는 쇠퇴하고 말았다. 1700년대 러시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폴란드에 비해서는 높았으나 영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40~70%에 불과했다. 1860년 러시아의 1인당 소득은 일본과 비슷했고 미국, 영국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며 청나라나 인도의 2배 정도였다. 분명 세계적으로 봤을 때 낮은 수준은 아니었으나 열강들 중에서는 가장 뒤떨어지는 정도였다. 1861년 농노 해방령으로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1인당 소득은 한동안 정체되어 있다가, 1890년대가 돼서야 다시 꾸준히 경제 성장이 일어났다. 다만 미국과 영국 등이 워낙 빠르게 성장하는 바람에 20세기 초에는 미영에 비해서는 더욱 뒤쳐졌고, 일본과는 경제 성장률이 비슷했으며 브라질, 중국, 인도보다는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농업 중심 국가였다. 1861년 농노 해방령 이전까지 농업이 의존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고, 무려 1897년 인구조사에서도 여전히 러시아 인구의 95%가 시골에 살았다. 니콜라이 1세와 알렉산드르 3세는 연이은 개혁으로 러시아의 경제를 개혁하려 애썼다. 1883년에 러시아 농민은행이 창립되어 농노들에게 대출을 해주는가 하면 2년 후에는 귀족은행도 따로 만들어져 법정이자율로 대출을 해주었다. 인두세는 1886년 폐지됐다. 그해 재무장관으로 취임한 이반 비슈네그라드스키는 토지세를 인상하고 곡물 수확법을 규제해 농민들에게 압력을 가했는데, 이 정책이 1891년의 흉작과 겹치면서 무려 40만 명이 굶어죽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1892년 세르게이 비테로 교체됐고 비테는 알코올 독점으로 1894년에만 3억 루블을 벌여들였다. 이러한 정책들로 농민들은 농노 시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쥐어짜이는 신세였다. 다만 토지와 시설, 가축을 소유한 부농 계급 '쿨라크'가 등장해 1900년에는 전체 인구의 10~20% 정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16년에는 소득세가 도입되었다.
7.1. 수정주의적 관점
전통적으로 제정 러시아 말 경제는 흔히 농노, 농민들에 대한 착취와 학대로 점철된 역사로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러시아 제국 후기의 경제사, 특히 1861년의 농노 해방령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나고 있는 추세다. 소련은 제국을 쓰러뜨리고 집권한 본인들의 정통성을 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러시아 제국을 폄하할 수밖에 없었고, 영미권 사학계 역시 근본적으로 그동안 러시아 제국을 후진적이고 농노들을 착취해 살아가는 정권으로 폄하해왔다. 때문에 러시아 제국에 대한 평가는 1990년대까지도 부정적으로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최근에는 특히 영미권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러시아 제국 말기의 생활수준이나 경제 상황 등을 점점 이전보다는 고평가하기 시작하는 추세다.예를 들어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교수 트레이시 데니슨은 러시아 농노제 자체의 빈곤함과 후진성을 재조명했다. 해당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농노들에게 사유재산권과 거주이동권을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무역과 공업을 포함한 비농업 활동에 뛰어들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농노제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농노들의 재산권과 이동권을 인정하고 지원해주며, 때때로 이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바로 지주귀족들의 이익과 부합했고 때문에 이들이 그것을 단순히 말이나 관습으로 한 게 아니라 제도적으로 보장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셰레메티예프 가문의 보쉬차즈니코보(Voshchazhnikovo) 영지. 셰레메티예프 가문은 농노들이 지주의 이름으로 토지를 구입할 수 있도록 허가했고 계약이 가능한 위임장을 제공했다. 기존 학계는 '지주가 농노들의 사유재산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만을 강조했으나 셰레메티예프 가문은 토지 소유권에 대한 분쟁을 처리할 때 중재인 4~5명을 선정하고 가용 증거에 따라 최대한 공정한 결정을 내리려 노력하는 등 농노들의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지주귀족이 농노들의 재산권, 이동권을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투자하는 셰레메티예프 가문의 경우가 러시아에서 보편적인 것은 절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드문 사례도 아니었다. 한국사의 공노비-사노비, 외거노비-솔거노비 같은 분류를 제외하더라도 트레이시 데니슨의 의견을 따른다면 러시아는 너무 거대해서 농민/농노든 농노제든 일관성이 없었다. 따라서 농노제 하에서 자본주의화와 공업화가 둔화된 경우도 있겠지만 반대로 촉진된 경우도 있고, 결국 케바케의 영역이라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1861년 농노제가 폐지된 이후 농민들의 생활 수준이 악화되었다는 개념 역시 1970년대 후반부터 격렬해진 논쟁에 휘말리며 수정주의 역사가들에 의해 이의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해방된 농노의 의무가 임시 의무기간 동안 증가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일단 농민이 토지를 상환하기 시작하면 지불해야 하는 금액은 더 낮아졌다. 게다가 농민들의 생활수준 저하를 입증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 지표인 농민들의 누적 체납액 역시 해석에 이견이 있다. 조사에 따르면 농민들은 상환금과 기타 직접세를 지불할 여유가 있을 때는 지불했지만 지불할 수 없을 때는 지불하지 않았다. 즉 농민 스스로 이러한 세금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냥 안냈고, 정부와 지주들도 굳이 억지로 받아낼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농민들이 명목상으로 얼마나 착취당했느냐가 실제로 그들의 경제적 상황을 악화시켰는지 그 자체로는 확신하기 어렵다.[68] 러시아의 '후진적'으로 보이는 관습들은 사실 농민들의 입장에서 매우 '합리적'인 제도였으며, 러시아가 인구가 많고 땅이 넓기에 지역적, 시기적으로 부침과 양극단적 사례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농노제 폐지 이후 전반적인 농민의 생활수준 하락을 포함한 극적인 '농업 위기'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즉 기존의 전통주의적 관점은 러시아의 농노들이 해방은 되었으나 과도한 토지 상환금으로 인해 더욱 고통받았고, 정부가 공업화를 위해 농민들을 희생시키는 바람에 더더욱 고통받았으며, 따라서 제정 말기 농노제 해방 이후 농민들의 생활 수준이 급락해 생존의 위기를 느끼는 수준까지 추락했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수정주의 학파는 이를 비판하며 러시아 농민들의 생활 수준은 타 유럽 농민들과 엇비슷한 수준이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수정주의 학파도 한계가 있어 제국 말기의 경제 수준 및 농민들의 실태를 지나치게 낙관한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농민들이 농노 해방령 이후 전반적으로 빈곤해진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기존의 지나치게 과장된 전통주의적 관점처럼 아예 굶어죽기 직전으로 내몰린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8. 외교
러시아의 팽창을 경계한 당시의 풍자화 |
스웨덴과 러시아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충돌했다. 1788년에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가 국내 정치 갈등 봉합을 위해 러시아에 전쟁을 걸었으나 곧 교착상태에 빠진 채 2년만에 휴전을 맺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웨덴이 틸지트 조약과 대륙봉쇄령을 무시하고 영국과 협력하려 들자, 틸지트 조약의 당사자였던 러시아가 발끈해 선전포고한 뒤 몇 주만에 승리해 핀란드를 뜯어갔다. 그러나 1812년 나폴레옹이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침공하자 스웨덴도 러시아와 화해해 함께 프랑스에 맞선다. 러시아는 스웨덴의 노르웨이 지배를 인정했고 나폴레옹 패망 이후부터는 그 어떠한 전쟁도 없었다.
프랑스와는 처음에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러시아는 북유럽, 동유럽에서 놀았고 프랑스는 서유럽에서 놀았기 때문. 표트르 1세가 파리를 방문해 프랑스의 발달된 문화를 러시아로 수입한 이래로, 간접적으로 충돌하는 경우는 있어도[70]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 단순히 서유럽을 넘어 전 유럽의 지배자가 되고 싶었던 나폴레옹이 동쪽으로 진군하며 러시아와 정면 충돌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프랑스에 적대적으로 변했고 러시아 원정으로 나폴레옹을 굴복시키며 엄청난 패배를 안겼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패망 이후에 보수주의와 반동주의를 주창했지만 정작 프랑스는 러시아의 팽창주의, '타타르적'인 문화를 경멸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에 맞서 싸운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러시아는 19세기 내내 친독 성향을 유지했고 공화주의 프랑스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는데 1890년대에 프랑스가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에 먼저 손을 내밀며 관계가 호전된다.[71] 물론 중간에 약간씩 마찰이 있긴 했지만[72] 이후 러시아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프랑스와 러시아와 동맹을 유지했다.[73]
독일과의 관계는 협력과 견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왔다갔다하는 관계였다. 둘 사이의 완충국이 있을 때는 따뜻하기 그지없는 관계였으나 서로 직접적으로 국경을 접하게 되면 자연스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 세워지고 20년 뒤 러시아 제국이 선포되면서 두 국가 사이 관계도 끊임없이 변화했다. 7년 전쟁으로 서로 전쟁을 벌였으나 유명한 독빠였던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에 퍼주다시피하는 평화조약을 맺기도 했고, 프랑스 혁명으로 국왕이 처형당하자 기겁해서 서로 손을 맞잡고 프랑스와 싸우기도 했다. 1871년 독일 제국이 등장하자 처음에는 3제 동맹을 맺고 독러 재보장조약을 체결하는 등 처음에는 좋은 관계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1890년에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쫒아내고 재보장조약 연장을 거부, 러시아의 산업화에 강한 우려를 나타내면서 적성국가로 돌아섰다. 결국 러시아와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적이 되고야 만다.
또다른 독일어권 국가인 오스트리아와는 초기에는 협력적이었으나 뒤로 갈수록 양국 감정이 악화되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왕위계승전쟁, 7년 전쟁에서 한편으로 싸웠고 오스만을 공동의 적으로 두었으며 사이좋게 폴란드를 갈라먹었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반동주의의 기치 아래 하나되어 빈 체제의 가장 열성적인 수호국들이었던 것이다. 1848년 혁명 당시 헝가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헝가리를 침공해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을 회복시켜준 것도 러시아였다. 하지만 크림 전쟁 때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 중립을 취하면서 관계가 크게 훼손됐다.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를 포기하자 니콜라이 1세는 격분했다.[74]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자국 내 슬라브인들을 선동하는 위협이라 여겼고 3제 동맹, 1897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방문 등 사건에도 여전히 둘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75]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세계대전에서 반대편에서 싸웠고 둘다 망할 때까지 적대관계였다.
아프가니스탄을 두고 싸우는 영국과 러시아의 풍자화 |
현재 튀르키예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과는 러시아가 오스만을 일방적으로 뜯어먹는 관계였다. 이미 오스만 제국은 전성기가 지나 서서히 시름시름하고 있었고, 반대로 1700년대 건국된 러시아는 오스만의 영토인 발칸반도와 흑해, 동유럽에 영향력을 투사하고 싶었기에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러시아는 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오스만 내에 영향력 행사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오스만 제국을 분할해 갈라먹을 생각까지는 없었지만[77] 반오스만 감정이 날로 득세하며 나중에는 오스만을 아예 잡아먹으려 들었다. 러시아는 오스만의 배를 갈라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한 뒤 흑해와 지중해까지 자유로운 통행을 확보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꿈이자 목표였을 정도다. 러시아는 오스만의 힘을 빼기 위해 1910년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등의 독립전쟁을 지원했고 1914년에는 이탈리아가 오스만에게 트리폴리를 빼앗아가는 것을 도왔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충돌했다. 두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끝까지 견원지간이었던 셈이다.[78]
동양의 패권국 중국과는 이미 1600년대부터 관계를 맺었다. 1654년에 러시아가 표도르 바이코프를 청나라에 첫 대사를 파견하며 본격적인 외교전의 시작을 알렸고[79]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1729년 캬흐타 조약을 맺으며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1750년대 청나라가 준가르를 합병한 이래로는 중앙아시아에서도 직접 국경선을 맞대게 되었고, 다른 유럽 열강들과는 달리 동등한 황제의 자격으로 청나라와 외교전을 펼쳤다. 타 유럽 국가들이 군주 대 군주 방식으로 청나라와 외교했던 것과는 달리, 직접 영토를 맞댄 러시아는 청나라 이번원이 따로 관리하는 특별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부터는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점차 영토를 빼앗아가기 시작했고 아이훈 조약, 베이징 조약을 연달아 맺으며 만주와 연해주, 사할린을 뺏어왔다. 삼국간섭을 중재하며 중국으로부터 이권 약탈을 계속했고 1900년 의화단 운동 때도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베이징을 약탈하는 등 1917년까지 청나라를 저금통 취급하며 계속 털어먹었다.[80]
그 외 국가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일본 제국과는 1855년 처음 국교를 수립, 서로 중국과 한국을 뜯어먹으며 1890년대 초까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만주와 조선을 두고 충돌해 러일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1905년부터 1917년까지는 같이 만주와 외몽골을 분할해 가져가면서 나름 관계를 회복했다.[81] 미국과는 우호적인 사이였다. 러시아 정부는 1803년 미국을 처음으로 인정했고 문화교류를 통해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1867년 알래스카 조약을 맺어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다. 러시아 내전 당시에도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러시아 제국 편을 들었다. 한국과는 1884년 처음 국교를 맺었고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지만 러일전쟁의 패배 이후 대조선 영향력이 0에 수렴해져버렸다.[82]
9. 종교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
러시아 정교회에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 이렇게 3곳에 관구주교, 그 아래에 14명의 대주교과 50명의 주교가 있었다. 최고위 직품인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표트르 1세가 폐지하고 대신 신성통치종무원을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사라졌다. 모든 고위 성직자들은 독신을 유지해야 했고 수도원 사제들 사이에서만 뽑았다. 직품이 낮은 사제품과 부제품까지는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으나, 대신 아내와 사별했을 때 재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러시아 역시 다른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처럼 포그롬으로 상징되는 반유대주의가 강했다. 예카테리나 2세가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 동부 일대를 먹어치운 뒤, 폴란드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제약이 가해졌다. 러시아는 집단거주지 '페일'을 정하고 유대인들이 이 밖의 지방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특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강제동화 정책을 실시한 니콜라이 1세 시대에 탄압이 심했다. 1827년부터는 유대인 어린이들을 군사 기관에 징집해 정교로 개종을 강요했으며 유대인들을 '유용한 그룹'과 '쓸모없는 그룹'으로 나누어 분리하려 시도했고 집단거주지 내 이동의 자유와 상업의 자유를 더욱 옥좼다. 알렉산드르 2세는 탄압을 완화하고 유대인들에게 군 복무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는 유화책을 폈으나, 그가 암살로 사망한 뒤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완전 정반대였다. 그는 유대인 정착지와 재산 소유를 크게 제한했고 유대인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의 종류를 줄였다. 1886년에는 키예프에서, 1891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유대인을 추방했다.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모스크바 총대주교 |
정교회가 아닌 기독교 종파들에 대해서는 그나마 관대한 편이었다. 루터교회는 발트 지방의 독일 귀족들과 볼가 독일인들의 종교였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특혜를 베풀었다. 예수회 역시 별다른 탄압을 받지 않았다. 때문에 예수회가 정작 본거지인 서유럽에서 1759년부터 탄압당하는 동안 러시아에서 살아남아 훗날 재기할 발판이 되기도 했다. 가톨릭은 엄중히 통제했다. 러시아 정부는 가톨릭이 폴란드 민족주의의 원인이라고 보아 지극히 경계했고 폴란드 전역에 정교회 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제아무리 러시아라도 가톨릭을 대놓고 탄압하기는 힘들었고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강제 개종 시도는 없었다. 반면 정교회 내 이단 세력들에 대해서는 얄짤이 없어서 고의식파, 영성파, 몰로칸파 등은 중앙아시아 등지로 추방해버렸다.
1905년 니콜라이 2세는 종교 관용령을 발표하고 정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게도 관용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타 종교들은 기존보다 훨씬 살기 편해진 '황금기'가 열렸다. 심지어 유대인 집단거주지에 대한 제약들도 일부 완화됐을 정도. 이 황금기는 2월 혁명으로 제정이 엎어지고 소련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비판도 있는 것이, 니콜라이 2세는 반동적 폭동으로 일어난 반유대주의 학살 때 이를 반쯤 방치했고 심지어 일부 폭동은 당국에 의해 선동되거나 비밀경찰 오흐라나가 배후에 있다고 의심받기도 했기까지 했다. 세르게이 비테 총리는 회고록에서 경찰이 포그롬을 선동하는 선언문을 인쇄, 배포했다고 주장했다.
종교 신도수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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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CD01><bgcolor=#FFCD01> 종교 ||<rowbgcolor=#FFCD01> 남성 || 여성 || 신자수 (비율%) ||
정교회 42,954,739명 44,168,865명 87,123,604명 (69.34%) 이슬람 7,383,293명 6,523,679명 13,906,972명 (11.07%) 가톨릭 5,686,361명 5,781,633명 11,467,994명 (9.13%) 유대교(아슈케나짐) 2,547,144명 2,668,661명 5,215,805명 (4.15%) 루터교회 1,739,814명 1,832,839명 3,572,653명 (2.84%) 정교회 고의식파 1,029,023명 1,175,573명 2,204,596명 (1.75%)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625,592명 553,649명 1,179,241명 (0.94%) 불교 240,739명 193,124명 433,863명 (0.34%) 장로회 42,877명 42,523명 85,400명 (0.07%) 재세례파 33,598명 32,966명 66,564명 (0.05%) 아르메니아 가톨릭 20,028명 18,812명 38,840명 (0.03%) 침례회 18,372명 19,767명 38,139명 (0.03%) 카라임[84] 6,372명 6,522명 12,894명 (0.01%) 성공회 2,042명 2,141명 4,183명 (0.003%) 기타 기독교 2,371명 1,581명 3,952명 (0.003%) 기타 비기독교 계열 종교 144,983명 140,338명 285,321명 (0.23%) 총계 62,477,348명 63,162,673명 125,640,021명 (100%)
정교회 분포 | 이슬람교 분포 | 가톨릭교 분포 |
유대교 분포 | 루터교 분포 | 정교회 고의식파 분포 |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분포 | 불교 분포 | 이교도 분포 |
10. 인구
러시아 제국의 민족 분포 |
그러다가 1891년 러시아 대기근을 겪은 뒤, 전국 단위의 인구 조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897년에 니콜라이 2세가 이를 허가함으로써 1897년에야 처음으로 러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한 첫 일반 인구 조사가 시행됐다. 인구 조사는 총 2단계로 나누어 실시했다. 135,000명의 조사원[85]들이 1896년 12월부터 3달간 모든 가구를 방문해 설문지를 작성했고, 이를 중앙에 보고한 다음 1년 뒤에 다시 모든 가구를 한꺼번에 재방문해 자료의 정확성을 검증했다. 조사는 인구의 이동이 상대적으로 적은 겨울에 이뤄졌다. 데이터 처리에 총 8년이 걸렸다. 1905년에 모든 작업이 끝났고 총 89개 구베르니야의 인구 동향을 담은 자료 119권과 요약본 2권이 발행됐다. 이게 러시아 제국이 시행한 처음이자 유일한 전국 단위의 일반 인구 조사다.
1897년 인구조사에는 여러 개의 항목들을 물어봤다. 성과 이름은 물론, 성별, 가족과 가주와의 관계, 나이, 결혼 유무, 재산과 계급 및 지위, 출생지, 등록지, 평소 거주지, 종교, 모국어, 문해력, 직업, 징집 대상 유무 따위를 모두 물어봤다. 인구 조사 결과 러시아 제국의 인구는 총 1억 2,564만 21명이었다. 개중 49.73%인 6,247만 7,348명이 남성이고 50.27%인 6,316만 2,673명이 여성이었다. 중위 연령은 21.6세로 상당히 젊은 편이었다.
러시아령 중앙아시아는 투르키스탄이라고도 불렀다. 189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령 중앙아시아 5개 오블라스티에는 5,260,300명이 살았으며 개중 13.9%가 도시에 거주했다.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는 156,400명의 타슈켄트, 82,100명의 코칸드, 61,900명의 나망간, 54,900명의 사마르칸트 순서였다. 조금씩 러시아인들의 유입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중앙아시아는 무슬림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1911년 기준 가장 러시아인의 인구가 많은 세미레체 오블라스티 전체 인구의 17%, 그리고 도시민의 50%가 러시아인이었다. 이렇게 정착한 러시아인들의 80%는 개간할 땅을 찾아 옮겨온 농부들이었다. 나머지 4개의 오블라스티는 러시아인의 비율이 고작 4%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무슬림의 도심지 옆에 세운 유럽식 정착촌에 자기들끼리만 모여 살았다.
1898년부터 1905년까지 장장 8년 여간 정리한 러시아 제국의 인구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다만 당시에는 아직 현대와 같은 공교육에 의한 민족 정체성 확립이 나타나기 전이었으므로, 당시 민족 구분은 주로 언어와 종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래는 언어에 따른 1897년 러시아 제국의 민족별 구성이다.[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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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CD01><bgcolor=#FFCD01> 1897년 러시아 제국의 민족별 구성 ||
민족 도시 시골 총합 화자 % 화자 % 화자 % 러시아인 8,825,733 52.45 46,841,736 43.05 55,667,469 44.31 우크라이나인 1,256,387 7.47 21,124,164 19.41 22,380,551 17.81 폴란드인 1,455,527 8.65 6,475,780 5.95 7,931,307 6.31 벨라루스인 171,383 1.02 5,714,164 5.25 5,885,547 4.68 유대인 2,502,217 14.87 2,560,939 2.35 5,063,156 4.03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카라칼파크인 46,827 0.28 4,037,312 3.71 4,084,139 3.25 타타르인 417,727 2.48 3,319,900 3.05 3,737,627 2.97 독일인 418,533 2.49 1,371,956 1.26 1,790,489 1.43 라트비아인 230,719 1.37 1,205,218 1.11 1,435,937 1.14 바시키르인 13,844 0.08 1,307,519 1.20 1,321,363 1.05 리투아니아인 43,136 0.26 1,167,374 1.07 1,210,510 0.96 아르메니아인 272,801 1.62 900,295 0.83 1,173,096 0.93 루마니아인 64,134 0.38 1,057,535 0.97 1,121,669 0.89 모르드바인 14,022 0.08 1,009,819 0.93 1,023,841 0.81 에스토니아인 139,544 0.83 863,194 0.79 1,002,738 0.80 사르트인 204,046 1.21 764,609 0.70 968,655 0.77 추바시인 6,051 0.04 837,704 0.77 843,755 0.67 조지아인 98,503 0.59 725,465 0.67 823,968 0.66 우즈베크인 91,750 0.55 634,784 0.58 726,534 0.58 사모기티아인 8,946 0.05 439,076 0.40 448,022 0.36 튀르크어족 156,348 0.93 284,064 0.26 440,412 0.35 우드무르트인 2,245 0.01 418,725 0.38 420,970 0.34 마리인 2,191 0.01 373,248 0.34 375,439 0.30 타지크인 103,240 0.61 247,157 0.23 350,397 0.28 부랴트인 2,038 0.01 286,625 0.26 288,663 0.23 투르크멘인 2,687 0.02 278,670 0.26 281,357 0.22 이메레티인 17,181 0.10 256,005 0.24 273,186 0.22 민그렐인 11,539 0.07 228,086 0.21 239,625 0.19 사하인 3,890 0.02 223,494 0.21 227,384 0.18 체첸인 871 0.01 225,625 0.21 226,496 0.18 아바르인 5,533 0.03 207,159 0.19 212,692 0.17 튀르키예인 13,378 0.08 195,444 0.18 208,822 0.17 카렐리야인 2,791 0.02 205,310 0.19 208,101 0.17 키르기스인 270 0.00 201,412 0.19 201,682 0.16 칼미크인 1,263 0.01 189,385 0.17 190,648 0.15 그리스인 33,621 0.20 153,304 0.14 186,925 0.15 불가리아인 14,371 0.09 158,288 0.15 172,659 0.14 오세트인 5,907 0.04 165,809 0.15 171,716 0.14 레즈긴인 5,146 0.03 154,067 0.14 159,213 0.13 코미인 6,340 0.04 147,278 0.14 153,618 0.12 핀란드인 25,610 0.15 117,458 0.11 143,068 0.11 다르긴인 1,847 0.01 128,362 0.12 130,209 0.10 토티아르 타타르인 579 0.00 117,194 0.11 117,773 0.09 페르먀크인 366 0.00 104,325 0.10 104,691 0.08 카라칼파크인 46 0.00 104,228 0.10 104,274 0.08 쿠르드인 1,148 0.01 98,801 0.09 99,949 0.08 카바르다인 523 0.00 98,038 0.09 98,561 0.08 타트인 4,099 0.02 90,957 0.08 95,056 0.08 라크인 1,642 0.01 89,238 0.08 90,880 0.07 쿠미크인 3,529 0.02 79,879 0.07 83,408 0.07 압하스인 343 0.00 71,760 0.07 72,103 0.06 어웡키인 192 0.00 66,078 0.06 66,270 0.05 노가이인 299 0.00 63,781 0.06 64,080 0.05 중국인 24,794 0.15 32,665 0.03 57,459 0.05 위구르인 10,789 0.06 45,680 0.04 56,469 0.04 미샤르 타타르인 657 0.00 53,190 0.05 53,847 0.04 체코인 8,375 0.05 42,010 0.04 50,385 0.04 인구시인 541 0.00 46,868 0.04 47,409 0.04 체르케스인 1,660 0.01 44,626 0.04 46,286 0.04 집시 6,551 0.04 38,031 0.03 44,582 0.04 탈리시인 1,035 0.01 34,256 0.03 35,291 0.03 페르시아인 18,976 0.11 12,747 0.01 31,723 0.03 카라파파크인 9 0.00 29,893 0.03 29,902 0.02 카라차이인 45 0.00 27,178 0.02 27,223 0.02 한국인 1,716 0.01 24,289 0.02 26,005 0.02 벱스인 117 0.00 25,703 0.02 25,820 0.02 한티인 179 0.00 19,484 0.02 19,663 0.02 프랑스인 12,966 0.08 3,467 0.00 16,433 0.01 사모예드인 127 0.00 15,750 0.01 15,877 0.01 스반인 94 0.00 15,662 0.01 15,756 0.01 카슈가르 위구르인 139 0.00 14,799 0.01 14,938 0.01 스웨덴인 6,969 0.04 7,230 0.01 14,199 0.01 이조라인 37 0.00 13,737 0.01 13,774 0.01 축치인 8 0.00 11,787 0.01 11,795 0.01 만시인 9 0.00 7,642 0.01 7,651 0.01 킵차크인 6 0.00 7,601 0.01 7,607 0.01 우데게인 11 0.00 7,089 0.01 7,100 0.01 영국인 5,746 0.03 1,308 0.00 7,054 0.01 니브흐인 14 0.00 6,180 0.01 6,194 0.00 코랴크인 31 0.00 6,027 0.01 6,058 0.00 아시리아인 1,307 0.01 4,046 0.00 5,353 0.00 이탈리아인 3,824 0.02 936 0.00 4,760 0.00 이텔멘인 6 0.00 3,972 0.00 3,978 0.00 만주인 54 0.00 3,340 0.00 3,394 0.00 일본인 1,855 0.01 794 0.00 2,649 0.00 세르비아-크로아티아인 1,197 0.01 618 0.00 1,815 0.00 사미인 41 0.00 1,771 0.00 1,812 0.00 아랍인 93 0.00 1,603 0.00 1,696 0.00 노르웨이-덴마크인 1,031 0.01 609 0.00 1,640 0.00 아이누인 6 0.00 1,440 0.00 1,446 0.00 에스키모-알류트인 1 0.00 1,098 0.00 1,099 0.00 케트인 6 0.00 988 0.00 994 0.00 헝가리인 699 0.00 262 0.00 961 0.00 유카기르인 0 0.00 948 0.00 948 0.00 알바니아인 70 0.00 866 0.00 936 0.00 몽골인 84 0.00 733 0.00 817 0.00 아프가니스탄인 43 0.00 571 0.00 614 0.00 알류트인 338 0.00 246 0.00 584 0.00 추반인 190 0.00 316 0.00 506 0.00 기타 레즈긴어족 165 0.00 255 0.00 420 0.00 키스트인 97 0.00 316 0.00 413 0.00 네덜란드인 225 0.00 110 0.00 335 0.00 인도인 236 0.00 76 0.00 312 0.00 스페인-포르투갈인 112 0.00 26 0.00 138 0.00 기타 언어 69 0.00 5 0.00 74 0.00 미분류 2,142 0.01 2,985 0.00 5,127 0.00 총계 16,828,395 100.00 108,811,626 100.00 125,640,021 100.00
10.1. 현대식 국경에 따른 인구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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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CD01><rowbgcolor=#FFCD01> 국가 || 인구 || 비율 ||
러시아 67,476,000명[87] 53.7% 우크라이나 23,430,407명[88] 18.65% 폴란드 9,402,253명 7.48% 벨라루스 6,927,040명 5.51% 카자흐스탄 4,000,000명 3.18% 리투아니아 3,135,771명 2.50% 조지아 2,109,273명 1.68% 우즈베키스탄 2,000,000명 1.59% 몰도바 1,935,412명 1.54% 라트비아 1,929,387명 1.54% 아제르바이잔 1,705,131명 1.36% 에스토니아 900,000명 0.72% 아르메니아 797,853명 0.64% 키르기스스탄 750,000명 0.60% 타지키스탄 646,000명 0.51% 투르크메니스탄 350,000명 0.28%
10.2. 인구별 도시 규모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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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CD01><rowbgcolor=#FFCD01> 현재 국가 || 도시 || 인구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1,264,900명 러시아 모스크바 1,038,600명 폴란드 바르샤바 626,000명 러시아 오데사 403,800명 폴란드 우치 314,000명 라트비아 리가 282,200명 우크라이나 키예프 247,700명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174,000명 조지아 트빌리시 159,600명 리투아니아 빌뉴스 154,500명 러시아 사라토프 137,100명 러시아 카잔 130,000명 러시아 로스토프나도누 119,500명 러시아 툴라 114,700명 러시아 아스트라한 112,900명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112,800명 아제르바이잔 바쿠 111,900명 몰도바 키시나우 108,500명 핀란드 헬싱키 93,000명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 92,000명 벨라루스 민스크 90,900명 러시아 노보고로드 90,100명 러시아 사마라 90,000명 러시아 오렌부르크 72,400명 러시아 야로슬라블 71,600명 라트비아 다우가우필스 69,675명 벨라루스 비쳅스크 65,900명 에스토니아 탈린 64 572명 라트비아 리에파야 64,489명 러시아 크라스노다르 65,600명 러시아 볼고그라드 55,200명
11. 사회
1856년 알렉산드르 2세의 대관식 선포 |
러시아 제국은 신민들을 귀족, 성직자, 상인, 코사크, 농민 등 철저한 신분제도 '소슬로비예(soslovies)'로 나누었다. 인구의 절대다수인 81.6%가 농민이었다. 나머지는 귀족이 0.6%, 성직자가 0.1%, 시민과 상인이 9.3%, 군인이 6.1% 정도를 차지했다. 러시아 정부는 1832년 부동산 과세 법률로 사회를 크게 귀족, 성직자, 도시민, 농민 이렇게 4개의 계층으로 나눴다. 귀족과 성직자의 부동산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으나 도시민과 농민들의 부동산에는 세금이 부과됐다.
귀족은 세습 귀족(потомственное дворянство)과 개인 귀족(личное дворянство)으로 나뉘었다. 당연히 세습 귀족이 개인 귀족보다 높은 작위로, 아내와 자녀, 남성 후계자들에게 세습될 수 있었던 반면 개인 귀족은 오직 아내에게만 이전이 한정되었고 1대에서 끝났다. 성직자는 '하얀 옷의' 사제들과 '검은 옷의' 수도사들로 나누었다. 사제들은 대중들과 섞여 미사를 드렸으나 수도사들은 대중들과 섞이지 않았다. 도시민들은 '세습 명예 시민', '개인 명예 시민', '상인', '도시 평민'으로 구분됐다. 세습 명예 시민과 개인 명예 시민은 1832년 니콜라이 1세가 도입한 계급으로 귀족과 일반 시민들 사이의 계층이었다. 학위 소지자, 특정 대학 졸업자, 예술인, 뛰어난 상인 및 자본가들에게 주어진 특혜 계급으로 과세, 군복무, 신체적 처벌 등에서 자유로웠다. 도시 평민들은 도시에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무역과 수공업에 종사하고 세금을 냈다.[89] 도시에 영구적인 거주지가 있지만 농촌에 사는 이들은 '도시 농민'이라고 해서 따로 분류했다.
가장 아래 계급이 농민들이었다. 인구 피라미드의 대부분을 차지해 8,800만 명 이상의 러시아인들이 농민이었으며 개중 10,447,149명[90]이 해방된 농노 남성이었고 9,194,891명이 국가 소속 농민 남성, 842,740명이 영지 소속 농민 남성들이었다. 세금 납부는 물론이요 군복무의 의무까지 떠맡았다. 코카서스, 타타르스탄, 바시코르토스탄,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등지의 토착민들은 아예 '이노로치(инородцы)'라고 하여 문자 그대로 '다른 기원의 사람들', 즉 아예 외부인으로 취급해버렸다. 하지만 농민들보다는 나았던 것이, 이노로치들은 특정 세금 면제, 자치권, 군복무 면제 등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노로치들이 정교회로 개종해서 농민 계급으로 편입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 경우에도 군 복무 및 투표세 면제 등 일부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크게는 이 5개의 분류로 나뉘었으나 당연히 이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위 장교들(상위 장교들은 귀족 계급에 속했다)을 따로 '군인 계급'으로 분류했고, 전역한 군인이나 탈영, 직위해제된 군인들도 여기에 속했다. 위의 5개 계급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라츠노친치'라고 불렀다. 뜻은 '잡다한 계급의 사람들'이었으나 실상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시베리아로 유배당해 추방된 사람들도 따로 분류했는데, 개중에서도 추방된 귀족들은 '추방 귀족'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대우해줬다. 이런 계급 분류는 18세기 후반 자본주의 발전과 농노제의 폐지의 영향으로 현실에서의 계급과 일치하지 않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 때까지 계속 사용됐다.
11.1. 농노와 지주들
겨울철 러시아 도시를 묘사한 <마슬레니차>[91] |
그러나 돈의 원천인 땅을 내주기 싫었던 지주들은 농노들에게 내줄 할당지의 면적을 최대한 깎아쳤다. 특히 농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민가 주변의 목초지는 최대한 손아귀에 틀어쥐고 농노들에게 내주려 들지 않았다. 가장 가치가 높은 땅을 여전히 지주가 틀어쥐고 있었으니, 결국 상당수의 농노들은 옛 주인들에게서 다시 토지를 빌려 생활해야만 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농노들은 비참한 삶을 살았다. 일주일 중 7일을 일해야했고 춥고 황량한 군대로 징집되어가거나 저먼 시베리아로 강제로 쫒겨날 위험도 늘 안고 살았다. 농노들은 지주의 사유재산이라 지주는 언제든지 농노들을 팔아치울 수 있었다. 함부로 도망치거나 세금을 제때 내지 못했다거나 모종의 이유로 지주의 마음에 들지 않을 시 농노들은 언제나 처분의 대상이었다. 농노들의 자식은 마찬가지로 교육을 거의 받지못했고 고된 노동을 했지만 엄청난 고세율 때문에 러시아에서 가장 가난했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 황제가 이러한 농노들의 실태가 러시아의 개혁을 뒤처지게 만드는 원인이라 여겨 2,300만 명의 농노들을 해방했으나 이후에도 이들은 빈곤을 탈피하지 못하고 러시아의 최하층을 구성했다. 1865년 젬스트보를 만들어 지방의 행정은 물론 교육, 복지 등을 책임지게 한 것도 농노들의 생활을 개선하려 한 의도였다.
국가에 소속된 '국가 농노'도 있었다. 표트르 1세의 칙령으로 처음 생겨났고 예카테리나 2세의 교회 토지 몰수, 해외 영토 정복, 귀족들에게서 몰수한 토지 등 다양한 이유로 생겨난 농노들이었다. 귀족들은 군침을 흘리며 국가 농노들을 개인 농노로 이전하려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1724년 국가 농노는 전체 인구의 19%를 차지했으며 1858년에는 인구의 45%를 차지했다. 이들은 국유지에서 거주했고 나라에 세금을 바쳤다.[93] 일반 농노들보다는 훨씬 살기가 편해서 법정 출두, 거래, 재산 소유, 이동의 자유 등 다양한 권리들을 인정받았다. 반대로 자유민이었기에 각종 세금을 납부하고 도로, 수로 건설 등 부역에도 동원됐다. 국가 농노들이 경작하는 땅은 원칙적으로 나라의 소유였지만 실제로는 농노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등 사실상 농노들의 것이었다. 1801년에는 추가로 처녀지를 사고 소유할 수 있는 권리까지 부여받았다. 국가 농노들은 일반적으로 8에이커의 땅을 할당받았으나 땅이 남아도는 곳에는 최대 15에이커까지도 땅을 할당받았다.[94]
1900년대 러시아의 농민들 |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결국 버티다 못한 농촌 주민들의 5분의 1이 고향을 떠나버렸다. 매년 성인 남성의 절반 이상, 심각한 지역에서는 성인 남성의 4분의 3, 여성의 3분의 1이 고향을 떠나 일자리를 구해 러시아 전역을 떠돌았다.[96] 세계에서 가장 비옥하다는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의 흑토 지대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많은 농민들이 '무상 할당'을 받았는데, 그 토지 할당량은 정상적인 할당량의 8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헤르손의 평균 할당량은 고작 0.36헥타르에 불과했으며 1.2~2.3헥타르 당 5~10루블이라는 상당한 상환금을 물어야 했다. 우크라이나에는 국가농민들을 제외하면[97] 농민 공동체 미르조차 없어서 농민 개개인이 모든 상환금을 전부 상환해야 했기에 상황은 더더욱 안 좋았다. 그나마 행정이 덜 촘촘했던 대초원 지대가 살만했다. 땅이 더 저렴하게 평가됐고 1월 봉기 이후 할당량이 다소 증가한 폴란드도 그나마 나았다. 모든 토지가 독일인 지주 소유였던 발트해 인근 지방은 농노가 없이, 지주들이 자유 노동자들을 고용해 땅을 직접 경작하거나 임대했다. 전체 농업 종사자의 4분의 1만이 농민이었고 나머지는 단순한 고용 노동자들이었다.
그와중에 지주들의 상황도 딱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농노들을 강제로 갈아넣어 일시키는 데에 익숙해지던 지주들은 농노 해방 이후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라에서 받은 수백만 루블의 상환금은 농업 개선이나 현실적인 투자는커녕 지주들의 허영과 사치에 낭비됐다. 막대한 이익을 낼 수 있는 숲은 팔려나갔고, 예전의 부를 유지한 지주들은 오직 해방농노들에게서 막대한 임대료를 뜯어오는 지주들 뿐이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부를 유지한 채 늘려나갔지만 대다수의 대중들은 점점 빈곤해졌다. 게다가 농민 공동체 미르라는 러시아 특유의 제도가,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개인이 딱히 더 잘살게 되는 구조는 아니었기에 더더욱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
1861년부터 1892년까지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는 85만km2에서 61만km2로 무려 30% 감소했다. 그 후 4년 동안 귀족들은 8,577km2를 더 매각했고 귀족들이 땅을 팔아치우는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어 1903년 한 해 동안에만 8,0002에 달하는 막대한 토지가 귀족들의 손을 떠났다. 반면 1861년 이래로 농민 소유의 토지는 점점 증가했다. 특히 1882년 농민토지은행이 설립되어 토지를 구매하고자하는 농민들에게 저렴하게 대출을 제공하면서, 해방 농노와 그 후손들은 1883년부터 1904년까지 지주들에게서 78,900km2의 땅을 사들였다. 1906년 11월 니콜라이 2세는 농노들을 해방 당시 할당된 토지의 소유자로 즉시 인정하며 모든 상환금을 면제했다. 또한 개방경지제[98]를 철폐하고 하나의 경작지로 통합하라 명령하기도 했는데, 두마는 이를 먼 미래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보고 실행을 나중으로 미뤘다.
12. 교육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교[99] | 모스크바 제국대학교[100] |
신분이 높을 수록 문해율이 높아서, 귀족들은 84~87%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상인들의 문해율은 75%가 넘어갔다. 농노들은 한 자릿수 대의 처참한 문해율을 보였으며 여자들은 모든 계급에서 남자들에 비해 문해율이 낮았다. 동시대 서유럽의 문해율이 50%가 넘어갔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비참한 수준. 농노들을 가르쳐야 할 정교회는 문학을 포함해 교육이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고 여겨 전혀 좋게 보지 않았다. 농노들은 글을 배우지 못했고 예술가, 사업가, 교수 등 지식인의 비율은 대단히 낮았다. 1851년 기준 전체 러시아인의 8%만이 도시에 거주했다.
1801년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하면서 유럽의 계몽주의와 진보적인 개혁 정책들이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가 일었다. 하지만 황제가 약속한 수많은 개혁 정책들은 상당수가 이뤄지지 않았고 1820년 이후부터는 황제가 외교와 신앙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개혁은 더더욱 요원해지고야 말았다.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의 관료제는 빈약하기 짝이 없던 수준이라, 그 넓은 제국에 공무원의 숫자가 고작 17,000명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대부분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몰려있었다. 이 숫자는 전국민에게 효율적인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턱도 없는 수치였고, 대부분의 젊은 러시아 지식인들은 서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군대와 정교회는 독자적인 교육 기관이 있었으나 자기 영역에만 특화된 대단히 좁은 지식만을 가르쳤다. 그나마 알렉산드르 1세가 전국적인 교육 시스템을 창설한 것이 희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00년 러시아 제국의 초등학교 모습 |
가장 중요한 대학은 독일을 따랐다. 카잔, 하르키우, 상트페테르부르크, 빌뉴스, 타르투, 모스크바에 6개의 대학을 만들었다. 하지만 대학 과정은 오직 극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최고급 교육이었고, 1825년 러시아 전역의 대학생은 고작 수 백명에 불과했다. 고등교육기관에 다니는 학생들조차 고작 5,500명밖에 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대학 진학이 아예 금지되었으며 대부분의 귀족과 엘리트층들은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기보다 개인 가정 교사를 고용해서 교육시켰다. 러시아 제국 대학의 질과 학문적 수준은 동시대 서유럽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있었으며 그 규모도 훨씬 작았다.
니콜라이 1세는 외국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가짜 지식'이라 조롱하며 러시아를 어지럽힌다고 여겼던 극한의 반동주의자였다. 하지만 그 아래의 교육부 장관인 세르게이 우바로프는 반대로 대학 내의 학문적 자유를 더더욱 장려하고 종교계의 의심을 받던 교수진들을 대폭 밀어주었다. 우바로프는 러시아 학문의 질을 높이고 시설을 개선했으며 대학 입학의 문을 더 넓혔다. 니콜라이 1세는 1848년까지 우바로프의 소위 '진보적' 개혁을 용인했으나 이후 뒤집어버렸다. 러시아는 이후 1800년대 중후반 내내 대학 교육에만 집중했고, 초등과 중등 교육의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무시했다. 1900년까지 총 17,000명의 대학생들이 배출됐고 30,000명 이상이 전문 교육기관에 등록했다. 우수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훗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위와 혁명의 최전선을 맡게 된다.
13. 평가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제국을 앙시앵 레짐으로 보았고, 반공주의자들은 러시아 전제정을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모체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한동안 이어져서 '인민들이 굶어 죽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수탈해댄 나라' 나 '반동적인 군주들이 민주주의를 원하는 인민들을 총칼로 탄압한 나라' 라는, 망해도 싼 나라였다는 부정적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소련은 소비에트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일부러 제정 말기의 수탈과 인민들의 빈곤한 삶을 과도하게 강조하며 러시아 제국을 깎아내렸다. 러시아 제국은 계급주의적이고 귀족, 성직자 등 상위 계층들이 농노와 노동자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지탱되던 기형적인 정치체로 폄하되었고, 동시대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렸던 산업화와 근대화의 책임까지 얹히면서 더더욱 평가가 악화되었다.이러한 전통주의적 평가는 근현대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소련은 러시아 혁명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차원으로 러시아 제국을 깎아내렸다면 미국, 영국 등 서구권 학계도 냉전 당시 소련을 비난하기 위하여 그 전신인 러시아 제국을 미개하고 낙후된 제국으로 제시했다. 러시아가 옛날 타타르의 멍에 시절 '동양적이고 미개한' 타타르인들에게 지배받았던 바람에, 이들의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습성이 그대로 러시아 제국으로 이어졌다는 지극히 인종차별적인 프레임이 씌워졌던 것이다. 서구권은 러시아 제국의 가부장적이고 상명하복적, 폭력적인 집단주의적 문화 때문에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기조가 몇 십년 동안 이어졌기에 러시아 제국에 대한 기존의 평가, 심지어 현재까지도 상당수 대중들의 평가는 상당히 박한 편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정점을 찍고선 그 이후부터는 끊임없이 쇠락한 국가,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며 아시아 국가 따위에게까지 패배한 나라, 문해율도 낮은데다가 농민들은 끊임없는 영양실조와 기근에 시달리던 나라, 귀족과 성직자들이 인구 대부분의 농민들을 경멸하고 무시하던 계급주의 나라, 서구 열강들에게 경제적 식민지가 되어버린 나라,[101] 너무나도 거대한 제국이었으나 산업화를 이룩하지 못하고[102] 그 역량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했던 나라, 체르케스인들을 학살하고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 3국 일대에서 강제로 러시아화를 추진한 나라,[103] 극소수의 엘리트들이 인민들을 쥐어짜며 돌아가던 나라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넘쳐났다.
그러나 냉전 시대부터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면서 당시 러시아 제국 민중의 삶이 정말 그렇게 팍팍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고, 당시 러시아 농민들의 경제적 수준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농민 빈곤설은 상당 부분 약화되었다. 물론 러시아 농노들이 전반적으로 빈곤하게 살았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기존 전통주의적 관점에서 묘사하던 지옥 같은 사회상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특히 제정 말기인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는 조금씩이나마 계속 농민들의 삶이 개선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덤으로 군주들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한 이유도 그것이 단순한 반동주의가 아니라 군주와 귀족 간의 파워게임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부정적 인식은 조금씩 사그러들고 있다.
특히 소련이 붕괴하고 새로 들어선 러시아 연방에서는 러시아 제국을 복잡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러시아의 여론조사 기관 레바다 센터가 2017년 4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의 48%가 로마노프 왕조의 전복과 10월 혁명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한 반면, 31%는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여론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 중 35%는 1917년 볼셰비키의 집권이 합법적이라 생각했고 45%는 불법이라고 대답했다. 19%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104] 다만 러시아인들은 대체적으로 차르 정권의 전복이 큰 손실이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 제국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으며 이후 들어선 소련에 대해서는 미묘한 반응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분위기로 보고 있다.[105][106]
블라디미르 푸틴과 현 크렘린 정권은 러시아 혁명과 차르 정권의 붕괴를 곱게 보지 않는다.[107] 푸틴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2016년 12월 소치에서 한 연설 도중, '모든 혁명은 책임감 결여의 산물'이며 '국가와 수백만 생명의 잔혹한 파괴라는 대가를 치르는 혁명 대신 일관되고 점진적인 진보를 추구하면 안 되는가?'라고 말했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황족을 비롯한 많은 이의 목숨을 빼앗은 혁명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푸틴이 혁명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또다시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 대상은 푸틴 정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련 시대의 위대함과 내셔널리즘은 프로파간다로 유용하게 써먹지만 정작 그 혁명에 대해서는 미묘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푸틴 정권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지에 대한 러시아 제국주의를 부각하면서, 한때 이들을 모두 포괄했던 러시아 제국을 이용해 역사적으로 묶으려는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기도 한다.
14.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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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표트르 1세 | 예카테리나 1세 | 표트르 2세 | 안나 이바노브나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이반 6세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 표트르 3세 | 예카테리나 2세 | |
제9대 | 제10대 | 임시 | 제11대 | |
파벨 1세 | 알렉산드르 1세 |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 니콜라이 1세 |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
알렉산드르 2세 | 알렉산드르 3세 | 니콜라이 2세 | }}} }}}}}} |
15. 대중매체에서의 러시아 제국
- 호사가들에게 흔히 양판소의 모델 국가[108]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절대군주 황제, 강력한 귀족들, 근대식 중앙집권 전제군주국과 중세식 지방분권을 모두 충족시키는 체제의 절묘한 조화, 화려하고 문란한 사교계, 농노 등이 있다는 점에서 완벽히 일치하기 때문이다.[109] 제국을 뒤엎는 혁명이 배경인 경우 무능하고 부패한 러시아 제국의 지배층, 그런 지배층을 상대로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혁명가 등이 대표적인 겹치는 소재로 나온다.
- 가면라이더 V3의 중간 보스인 키바 남작은 원래는 러시아 제국의 남작으로 시베리아에 살고 있었는데 똑같이 러시아의 귀족 출신 육군 장교로 나중에 겔 쇼커 대간부가 되는 블랙 장군과는 면식이 있던 사이로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함께 아프리카로 망명했다.
- 이지테크의 유럽전쟁에서도 러시아 제국은 나온다. 어마무시한 영토를 자랑해 난이도는 매우 쉬운 편이다.
- 아이언 하베스트 1920+의 세계관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을 인정하여 루스비에트 연방이 되어 나온다.
- 웹소설 동방의 라스푸틴에서 21세기 한국인이 어려진 채 떨어진 곳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주인공에 의해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초강대국이 된다.
- 폴란드볼/컨트리볼에서는 역사물에 주로 등장한다. 아무래도 현대 러시아 연방볼에게 인지도가 밀리다보니 일반 만화에서는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역사물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시기를 주 배경으로 등장하며, 튀르키예한테서 클레이를 잔뜩 털고 항구나 부동항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며, 거대한 덩치와 몸빵 때문에 자기보다 작은 다른 볼들이 와서 달려들어도 오히려 공격한 볼이 튕겨져나가서 넉아웃 당하는 연출이 종종 나온다. 이건 소련에도 해당한다. 소비에트 러시아와는 러시아 내전에서 혈전을 벌이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 Victoria 시리즈에서 플레이어블 국가로 등장한다.
- Hearts of Iron IV에서는 No Step Back DLC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중점 루트 중 2차 적백내전을 일으켜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는 루트가 있다.
- 토탈 워: 엠파이어와 토탈 워: 나폴레옹에서 플레이어블 국가로 등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엠토의 러시아는 아직 칭제를 하기 전이라 루스 차르국이라 불리던 시절의 러시아다.
- Guts & Blackpowder의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중 좀비 사태가 벌어지자, 외교는 물론 소식도 없는 상태다.[112] 그래도 군대는 존재한다. 심지어 이 군인들도 나폴레옹 전쟁 때 참전하여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군인들이다.
- 한국 대체역사물에서는 19세기가 배경이라면 무조건 등장한다. 소설 내에서는 영국 쪽에 붙기로 했다면 조선의 앞길을 막는 보스몹 느낌으로 묘사되며 그게 아니면 조선의 동맹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보통은 조선의 동맹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전제군주정을 유지 중인 근대 유럽 국가라서 조선인들이 상대적으로 감정 대입이 편할 뿐더러 일본이나 청나라에 비해 감정의 골이 적을 뿐 아니라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열망은 비교적 약하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113][114] 설령 조선을 지배하려 한다 해도 탈출할 기회가 있기도 하다. 또한 러시아 혁명에 의한 공산주의의 발생을 억제함으로서 공산주의의 위협을 최소화하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원 역사의 소련의 포지션을 중국 등 다른 나라가 가져가는 편이다.
- 악역 황녀님은 과자집에서 살고 싶어에 등장하는 제국의 모티브가 러시아 제국으로 보인다. 일단 이름들이 죄다 러시아 풍이기도 하고.
16. 관련 문서
[1] "스 나미 보흐"로 읽는다. 현대 철자법 개정 이후의 표기는 'С нами Бог!'이다.[2] 1867년 미국에 판매.(알래스카 조약)[3]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로 일본 제국에 할양.(포츠머스 조약)[4] '중앙의회'를 의미한다.(사실 이전부터 대도시의 지방자치제도, 지방의회들은 존재했고 알렉산드르 2세 시절 때 본격적으로 제정비되어 지방의회인 젬스트보로 설립되었다.) 현재도 러시아의 하원을 '국가두마'라고 한다.[5] 동군연합 형태 대공을 러시아 차르가 겸임[6] 1860년 베이징 조약 체결 후.(연해주 할양)[참조] 대한제국으로 존속한 기간(1897~1910) 포함. 참조.[8] 알래스카 조약 체결 전.[9] 알래스카 조약 체결 후부터, 다만 서로 가깝긴 하지만 육로로 연결되어 있던 것이 아니라서 접경국이라 보기에는 살짝 애매하다.[10] 1906년 러시아 제국의 헌법인 《국가기본법》이 발포되었으나, 군주의 권력을 보장하는 내용이 많아 발포 이후에도 전제군주제가 지속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국가기본법》에는 명시적으로 전제군주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은 없었다.[11] 공식 명칭은 전러시아의 황제.[12] 공식적으로는 임페라토르였으나 타국이나 민중들은 루스 차르국의 영향으로 계속 차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장 국가에서도 여전히 차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13] 18세기 표트르 대제 치세에 제정된 철자법.[14] 드물긴 하지만 Рассѣя라는 표현도 사용되었다.[15] 1918년 러시아 혁명 이후 개정된 철자법.[16] 1933년 벨로루시 SSR 치하에서 개정된 철자법.[17] 벨라루스의 언어학자인 브라니슬라우 타라시케비치(Браніслаў Тарашкевіч, 1892–1938)가 제정한 고전 절차법.[18] "Empire of Russia"라는 명칭도 쓰인다.[19] 지금도 중국은 러시아를 이렇게 부른다.[20] 왕조는 혼란 시대에 잠깐 난립한 황제들을 제외하고 크게 류리크 왕조와 로마노프 왕조로 나뉘지만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귀족회의를 통해 류리크 왕조와 인척이었던 로마노프 가문에게 평화적으로 계승한 것이기 때문에 연속성 있는 체제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21] 대영제국과 대청제국에 이어 세계 3위. 유럽의 저출산으로 인해 소련 말기에는 소련인이 전 세계 인구의 1/16, 현재의 러시아는 소련 붕괴와 지속적 저출산으로 세계 인구의 1/50을 차지할 뿐이다.[22] 이 백청적 색깔의 조합은 슬라브족의 상징색으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면서 나중에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토대로 유럽에 눈독을 들일 때에 범슬라브주의자들이 자주 활용하기도 했다.[23] 흑황백 삼색기는 약 30년 정도 러시아의 국기로 사용됐는데, 이 시기 동안에는 오직 황제와 정부기관만이 흑황백 삼색기를 게양할 수 있었고 일반 개인이나 시민들은 오직 백청적 삼색기만을 쓸 수 있었다.[24] 'Greater Version'이라고 해서 여러 국장들 중 가장 화려하고 크기가 큰 형태의 국장이다. 이를 간략화해서 만든 중형 국장과 소형 국장 역시 따로 존재한다.[25] 러시아 제국의 첫 기사단이자 최고의 기사단. 1698년에 결성되었으며 당시 러시아에서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영예였다.[26] 한국어로 해석하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정도가 된다[27] 제정 러시아어 표기는 Молитва Русскаго народа.[28] 전성기 시절의 이 두 나라가 세계 육지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29] 알래스카에 이어 남사할린이 빠진 1914년 당시의 국경으로도 핀란드와 폴란드도 러시아령으로 포함되어 1945년 이후의 소련 영토보다 조금 더 크다.[30] 이 당시 영국은 수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다만 굳이 따지자면 그것은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까지의 일이며(이마저도 20세기 전중기에 캐나다와 호주는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거의 독립국급의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러시아가 훨씬 넓었던 기간이 더 길다. 러시아가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영국이 캐나다, 호주, 인도를 식민지화한 것은 19세기 전중반의 일이다.[31] 러시아 제국은 지금의 러시아 연방보다 인도 2개 면적만큼 더 컸다.[32] 다만 카라해 일대는 시베리아로 분류됐다.[33]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인해 오스만의 속국이던 몰다비아 공국의 동부 지역과 오스만 직할령 일부가 러시아령으로 넘어갔다. 베사라비아는 러시아가 유럽에서 획득한 마지막 영토기도 하다.[34] 1808년 핀란드 전쟁에서 스웨덴이 패배하고 프레드릭스함 조약으로 스웨덴 동부 일대, 즉 현재의 핀란드가 러시아의 자치령으로 편입된다. 러시아 차르는 핀란드 총독과 핀란드 의회를 통해 간접 통치했고, 핀란드는 사실상 입헌군주제나 다름없었다. 차르는 결코 핀란드 대공국을 입헌군주정이라 명시하지 않았으나 핀란드인들은 반쯤 그렇게 생각했다.[35] 러시아는 1800년대 초 페르시아의 카자르 왕조를 때려눕히고 굴리스탄 조약, 투르크멘차이 조약 등을 연달아 맺으며 코카서스 일대를 뜯어내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36] 러시아는 1800년대 중후반부터 중앙아시아에 집중진출하더니, 1865년에는 투르키스탄 대부분을 차지했고 1885년까지 확장을 계속했다.[37] 러시아는 빈 회의에서 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다. 서류상으로는 폴란드 입헌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황제가 폴란드 국왕을 겸한 동군연합이었지만, 1831년 11월 봉기가 일어난 이후부터 자치권이 약화되더니 결국 1867년에 폐지, 아예 합병되어버렸다.[38] 아르다한, 아르트빈, 이그디르, 카르스, 에르주룸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했다.[39] 관련 글.[40] 관련 글 1, 관련 글 2.[41] 러시아 제국은 전통적으로 내부정쟁이 치열한 국가로서 전제주의를 지향하는 황제권과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귀족권 중에서 어느 쪽이 주도권을 잡고 있느냐에 따라 국가 체제가 극과 극으로 바뀌었다. 모스크바 대공국, 루스 차르국 시대를 포함하여 실질적으로 명확하게 전제정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시기는 생각보다 적다. 그 거대한 영토에서 일사불란하게 전 인민을 통제하고 차르의 의지를 강요하기란 불가능했다. 따라서 차르 전제정은 실질적인 정치 체제보다 추상적인 정치 이념에 가까운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42] 국가평의회는 어디까지나 황제의 조언기구로 실질적인 입법부로 보기에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43] 유럽과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냉전 시기 이를 근거로 러시아 제국의 후진적이고 전제적인 통치 체제 때문에 전체주의적인 소련이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독재와 세습, 맹목적인 복종이라는 특성이 러시아인의 유전자에 깊게 남아 소련이라는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했다고 여겼던 것. 허나 이들의 관점은 러시아인들이 미개하고 '아시아적'인 타타르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라는 인종차별적 시선을 그대로 담고 있었으며, 현재는 합리적인 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44] 이는 국가두마에 진출하면서 혁명세력을 지원하는 입헌민주당, 혁명을 목적으로 국가두마를 이용하기 위해 진출한 사회혁명당 등을 유사시 찍어누르기 위함이었다.[45] 입헌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정도로 (비록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지만) 우호적이었던 표트르 스톨리핀이 혁명세력과의 커넥션을 끊으라고 발언할 정도였다.[46] 입헌민주당은 비교적 온건한 편이라 많은 유권자들을 끌어모을 역량이 있는 유일한 정당이었지만, 도시 중산층에만 한정되었을 뿐 농촌 지방에 호소력이 없었다.[47] 멘셰비키가 47석이고 볼셰비키가 18석이었다.[48] 재무장관 출신이던 코콥초프는 협조적인 두마 덕분에 균형 잡힌 예산을 짜고 꽤나 효율적인 집행이 가능했다고.[49] 하지만 황제가 국방 및 외교권만큼은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국방 및 외교를 전담하기보다는 황제의 국방권과 외교권을 보조하고 조언하는 것, 황제의 특별명령을 심사 및 이행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50] 다만 황실 재산의 상속에 대해서는 예외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다만 황제가 직접 조사를 지시하는 경우에는 가능했는데 예를 들어 니콜라이 2세의 지시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에 대해 재무감사가 들어간 적이 있다.[51] 종무원은 하술할 원로원과 동일한 건물을 사용했다. 현재 이 건물은 러시아의 헌법재판소 건물로 쓰이고 있다.[52] 다만 미르와 볼로스트의 자치는 정부에서 구성한 경찰위원회 때문에 크게 약화되었으며, 결국 1923년 소련의 개혁으로 폐지된다.[53] 볼로스트가 선출했다.[54] 다만 황제가 임명한 주지사가 젬스트보의 법안들을 보류, 승인 거부할 수 있었으며 1890년 이후부터는 정부가 젬스트보의 입법권에 간섭하는 경우가 더욱 많아졌다.[55] 젬스트보는 기존의 농민들을 교육시키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농민들은 종교학교나 국립학교보다 젬스트보가 세운 학교를 선호했고 그 덕에 러시아의 문해율은 10%에서 68%로 껑충 뛰어올랐다.[56] 젬스트보가 실패한 영역. 젬스트보는 근대식 의학을 보급하려 노력했으나 농민들은 문맹인데다가 신을 두려워했고, 전통 의학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지, 그리고 의사의 봉급 등 예산 문제 등 난항을 겪었다.[57] 여러 주둔군으로 이뤄진 군대로 각 주둔군은 고유한 규율과 군복, 계급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1800년대 후반에 제국군의 예를 따라 표준화되었다. 대부분의 카자크는 기병이었으나 일부 규모가 큰 카자크 주둔군에는 보병도 있었다. 3개 카자크 연대는 황제의 근위대로 뽑혀 화려한 진홍색 코트를 입고 다니기도 했다.[58] 하지만 이는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더이상 장로와 관리들은 급진적인 젊은이들에게 말을 안들으면 강제로 군대에 보내버리겠다고 협박할 수 없었고, 농민들이 군대에 대거 입대하면서 농민층과 군대 사이의 유대가 깊어졌다. 군대에서 교육받은 농민들은 급진화되기 시작했고, 퇴역 후에도 여전히 급진적인 성향을 유지했으며 군대는 점점 농민들의 불만에 더 공감하기 시작했다.[59] 당시 러시아 해군은 흑해는 꽉 잡아두고 있었으나 발트해는 완전히 독일에게 내주고 있었다.[60] 이는 오늘날 러시아 해군에도 심각한 골칫거리라 러시아 해군은 세계에서 쇄빙선을 가장 많이 운용하는 해군이기도 하다.[61] 표트르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1,260척의 선박이 건조됐다. 백해, 아조프해, 발트해, 카스피해 등 다양한 곳에서 진수되어 유용하게 써먹었다. 단순 양 뿐만 아니라 질도 올라가서 1700년 대북방전쟁 시작 당시 해군의 선원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던 것과 달리 1721년에는 무려 7,215명의 숙련된 러시아인 수병들이 생겨났다.[62] 이 해방령으로 인해 옛 농노들은 이제 재산을 소유하고, 무역과 공업에 종사하고, 지주의 동의 없이도 결혼을 할 수 있었고 법적 청구도 가능했으며 지방선거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63] 1861년의 개혁 이후에도 귀족들은 여전히 세금이 대부분 면제됐다. 1880년대까지 정부가 거둬들인 직접세 중 17분의 16이 빈곤한 농노들에게서 뜯어낸 것이었다. 나머지 귀족과 성직자 계급, 시민 계급을 모두 합쳐도 17분의 1밖에 안됐다는 이야기.[64] 다만 자영농들의 농장은 지주 농장에 비해 효율이 낮았고, 기근이 닥치자 정부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식량을 부랴부랴 수입해오는 등 부작용이 있기도 했다.[65] 22루블에서 33루블로 증가. 물론 가장 극단적인 추정치이며 일부 2차 소득과 비밀 암거래를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66]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경제대학 건물로 쓰이고 있다.[67] 특히 대규모의 농노들을 소유하고 부려먹은 철근 공장과 직물 공장들이 이런 경우가 심했다.[68] 물론 농민들은 요구된 상환금의 95%를 지불했다. 5%의 부족분은 정부 측에서도 예상하던, 허용 범위 내의 미납금이었다.[69]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작센 선제후국과 러시아 제국은 동맹을 맺고 스웨덴의 젊은 왕 칼 12세가 즉위한 틈을 타 스웨덴을 공격했다. 이 것이 바로 대북방전쟁의 시작이다.[70] 프랑스와 러시아는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반대편에 싸웠으며 1756년 7년 전쟁 때는 함께 프로이센 왕국과 맞서 싸웠다.[71] 러시아 역시 1890년대 들어서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려있었다. 1890년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해임한 뒤 독러 재보장조약 연장을 거부하자, 러시아는 외교적으로 고립당했고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을 견제할 수단이 필요해졌다. 한편 교황 레오 13세 역시 독일의 반가톨릭주의에 분노해 프랑스와 러시아를 독일의 대항마 삼아 하나로 묶으려 들었고 이 모든 조건들이 맞아 떨어져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가 급물살을 타고 호전된 것이다.[72] 보스니아 합병 당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에 맞서 러시아를 지원해주기를 거부하자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의 관계는 파탄 직전까지 간다. 니콜라이 2세는 프랑스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고 동맹 파기까지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대안이 없어서 못했다.[73] 프랑스 투자자들은 1913년까지 러시아에 130억 프랑이라는 거금을 투자했고 프랑스는 러시아의 가장 큰 투자자였다. 러시아 제국의 산업화는 프랑스의 자본 덕이 컸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러시아는 프랑스와 함께 협상국 편에 섰다.[74] 러시아의 앙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나중에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꺾고 독일의 패자가 되는 데에도 러시아의 방관이 큰 역할을 했다.[75]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가 1908년 보스니아를 합병해버리며 베를린 조약을 깨버리자 당황한 러시아와 관계회복은 더더욱 요원해졌다. 결국 러시아가 한 발 물러나긴 했지만 두 제국 사이의 관계는 계속 안 좋아졌다.[76] 자세한 내용은 영국-러시아 제국 관계 문서 참조.[77] 가장 큰 이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오스만이 사라진 틈을 타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를 제치고 세력을 확장하지 않을까 두려워해서였다.[78]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칭하던 러시아 입장에서 동로마를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은 명분상으로도 불구대천의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러시아는 제3의 로마를 자칭하며 옛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끝까지 수복하려 들었다.[79] 다만 표도르 바이코프가 중국식 외교관례를 따르길 거부하면서 실제로 황제를 알현하지는 못했다.[80] 자세한 내용은 청러관계 문서 참조.[81]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 관계 문서 참조.[82] 자세한 내용은 조러관계 문서 참조.[83] 오늘날 상당수의 체르케스인들은 여전히 해외에서 살고 있다. 1800년대 후반 내내 집없는 무연고 체르케스인들이 넘쳐났던 탓에 '체르케스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발칸 아나톨리아 지방에서는 '도둑'과 동의어로 쓰일 정도였다.[84] 유대교의 일파이지만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유대인들에 대해 병역 등 납세의무를 더 가혹하게 부과하던 상황이라 카라임들은 러시아 제국 정부 측에 자신들은 유대교가 아니라 별개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결국 별개의 종교 집단으로 따로 분류되었다.[85] 교사, 사제, 군인, 문맹 퇴치 교육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86] 정치적 목적 때문에 러시아인의 비율이 다소 과장되었을 수 있다. 러시아 당국은 우크라이나를 소러시아로, 벨라루스를 백러시아로 표기해 러시아의 하위 단위로 표시했다. 반대로 독립 움직임이 있었던 폴란드인들은 고의적으로 그 수를 축소했다.[87] 개중 시베리아 일대에 5,758,822명이 살았다.[88] 개중 크림 반도에 1,447,790명이 살았다.[89] 도시 평민의 계급은 상속이 가능했지만 법이나 자치 시정부에 의해 명단에서 삭제되거나 추가될 수 있었다.[90] 1858년 기준. 오직 남성들만 셈했다.[91] 러시아 화가 보리스 쿠스토디예프가 1916년 그린 그림. 러시아의 늦겨울에 치르는 봄맞이 축제 '마슬레니차'를 묘사한 작품이다. 커다란 짚 인형을 태우는 게 특징인데, 원래 인신공양이었다가 인신공양 풍습이 사라지며 짚 인형으로 대체된 것이다.[92] 지주들에게 배상해야 할 구매금은 단순히 토지의 가치 뿐만 아니라 지주가 잃어버린 농노들의 노동력들까지 모조리 계산한 금액이었다.[93] 다만 폴란드나 발트해 등지에서는 국가가 국가 농노들을 개인에게 임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임대된 국가 농노들은 지주들에게 부역해야했다.[94] 물론 이는 갈수록 줄어들어 1830년 말에는 국가 농노 1인당 소유한 토지가 고작 3~5에이커 수준으로 축소되어 버렸다.[95] 참고로 3모작을 한다는 기준 하에 한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토지가 11~17헥타르다.[96] 이렇게 고향을 떠난 남자들은 '젬랴체스트보(землячество)'라고 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한국식 향우회 같은 느낌. 이들은 같은 고향 출신끼리 타지에서 같이 의지하며 먹고살았다.[97] 그렇다고 국가 농민들은 상황이 좋았냐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이들도 과도한 상환금에 질려 대량으로 탈주하는 형편이었다.[98] 개방경지제는 장원이나 마을을 중심으로 하나에 수백 에이커에 달하는 큰 밭 두세 곳이 펼쳐져 있고 이 밭들을 띠모양으로 분할하여 대상재배 방식으로 경작하는 것이다.[99]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의 전신.[100] 현재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의 전신.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교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현 국립대학교로 계승된 것과는 달리 모스크바 제국대학교의 건물들은 본관을 포함해 상당수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스탈린 시대의 웅장한 사회주의풍 건물들이 지어졌다.[101]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까지 러시아의 수출 수익 1위 품목은 농산물도 광물도 아닌 모피였다. 산업 자본 대부분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사실상 핵심 산업 상당분이 외국 자본에 묶여있었다.[102] 실제로 러시아에서 가장 산업화된 지방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도 모스크바도 아니고 식민지격인 폴란드와 발트 3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이 포탄 10발을 쏠 때 러시아는 고작 1발을 쐈다.[103] 이같은 경향은 1800년대 이후 근대 민족주의가 발흥하던 제정 러시아 후기로 갈수록 두드러진다. 다만 러시아에서는 이와 같은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국 같은 국가들이 해외에서 식민지인들을 학살하고 수탈할 때, 러시아 제국은 오히려 식민지에 훨씬 친화적인 관용 정책을 펼쳐 이들을 동화시켰다고 믿는다. 실제로 러시아 제국이 다민족 국가였고 타타르, 우크라이나, 발트 독일인 엘리트를 포섭해 끌어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극도로 계층적인 사회였다. 유대인과 원주민들은 민족 피라미드 가장 아래에 있는 '이노로치', 영원한 이방인으로 취급받았다.[104] 참고로 14년 전 2003년에 조사했을 때는 42%가 볼셰비키의 집권이 합법이라 답했고 39%가 불법이라 대답해 합법이라는 대답이 불법이라는 대답보다 더 많았다.[105]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소련, 그리고 스탈린에 대해서도 50%가 대조국전쟁에서 승리하고 러시아에 번영을 가져다준 위대한 지도자라고 평가했으나 68%가 그가 폭군이었으며 수백만의 무고한 피해자들을 만들었다는 데에 동의했다.[106] 더 이상 초강대국이 아닌 푸틴의 러시아에서, 스탈린과 소련은 지위 상실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보상'이다. 나치 독일을 무너뜨리고 냉전 동안 미국과 맞선 초강대국이라는 이미지는 러시아가 공산주의 제국의 붕괴 이후 겪은 굴욕을 보상받기 위한 일종의 정신적 위안이었다. 그렇기에 소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갈수록 많아지긴 하더라도 현재의 비참함에 대비되는 그 '위대하던 시절'의 향수는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것.[107] 오죽했으면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기관지 프라우다가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크렘린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를 인터뷰하자 왜 경축해야 하나?라고 반문했을 정도다.[108] 정확하게는 약간 근대 배경 양판소나 로판. 좀 더 옛날인 고중세 배경은 동로마 제국에 가깝다.[109] 로판이 실제로 모티브를 따온 건 아니고 어쩌다가 비슷하게 그려진 거다. 로판은 거의 서양 배경으로 하는데 서양 군주제랑 동양 군주의 차이점을 잘 알지 못하고 동양식 군주에 가깝게 묘사하고 중세부터 근세까지의 여러나라의 요소를 마구 섞다보니 러시아 제국과 비슷해졌고, 이런 러시아 제국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대중적으로 자리잡은 것이다.[110]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겨울전쟁, 대조국전쟁 중 2개 이상은 참전했다는 소리.[111] 일례로 르제프 전투를 배경으로 한 1942: 언노운 배틀에서 등장하는 한 늙은 병사는 '그 시절 싸움에서는 무언가 제대로 돌아갔다. 죽으면 신부가 와서 기도도 해주고, 하지만 요즘에는 그냥 대충 넘어가 버린다.'란 대사를 한다.[112] 좀비가 러시아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이나 가상이나 추위는 전염병의 약점이다. 그러므로 러시아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전염병이 돌연변이라도 한 것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며, 공식적인 발언도 없어 사실인지는 알수없다.[113] 결정적으로 영국 같은 경우는 혐성국 이미지 + 영일동맹의 사례 때문에,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때문에 한국의 동맹으로 묘사하기 꺼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가치를 증명하면 확실히 챙겨주는 국가들인 건 맞고 미국 같은 경우 성공 보증수표이기 때문에 러시아와 친하더라도 최소 미국만은 장기적으로 협력하는 관계로 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영국도 영러협상이 진행되면 한국과 가까워질 기회가 존재한다. 그외에는 프랑스 같은 경우는 자존심만 세워주면 팍팍 퍼주기 때문에 러시아와 함께 2대 유럽 고려천자국가로 자주 선정된다.[114] 독일 같은 경우 군사적 협력 대상으로 설정되지만 결국 패배하는 만큼 실질적인 동맹이 되는 경우는 드물며 오헝 제국이나 이탈리아는 실질적으로 도움되는 게 없어서 자주 패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