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3:26:21

게오르기 리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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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화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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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게오르기 리보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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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화국 초대 총리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리보프 공작
Князь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Львов
Duke Georgy Evgenievich Lvov
파일:Georgy Lvov 1917.jpg
출생 1861년 11월 2일[1]
작센 왕국 드레스덴
(現 독일 작센드레스덴)
사망 1925년 3월 7일 (향년 63세)
프랑스 제3공화국 일드프랑스 오드센 불로뉴비양쿠르
묘소 생트 주느비에브 데부아 묘지
재임기간 초대 총리
1917년 3월 15일 ~ 1917년 7월 20일
서명 파일:게오르기 리보프 서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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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9a6><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예브게니 블라디미로비치 리보프
어머니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 리보바[2]
배우자 빌마 르보프파를라기[3] (이혼)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종교 러시아 정교회
소속 정당 입헌민주당
1905년 ~ 1911년
진보당
1911년 ~ 1925년 }}}}}}}}}

1. 개요2. 생애3. 활동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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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의 정치인. 1917년 3월 15일부터 같은 해 7월 20일까지 러시아 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역임했다. 본래 1905년부터 1911년까지 입헌민주당(러시아) 소속이였으나 1911년 이후부터는 보수자유주의 정당인 진보당(Прогрессивная партия)에 속했다.

2. 생애

리보프는 작센 왕국 드레스덴의 러시아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예브게니 리보프 공작은 개혁적 자유주의자였고 그 또한 그런 아버지의 성향을 물려받았다. 그는 당대 러시아 귀족치고는 상당히 검소한 생활을 했으나 농노제 폐지 이후 집안은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다.

성인이 된 이후 러일전쟁 시기 만주에서 의료 여단을 꾸리며 차르의 신임을 얻었고 두마가 설립된 이후에는 젬스트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도시 연합과 전국 젬스트보의 지도자로서 의회정치가 유지되도록 노력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 시기, 자유주의자가 주도권을 잡던 2월에서 7월 사이 총리로 수행했다.

10월 혁명 이후 튜멘으로 낙향했다가 볼셰비키 정부에게 체포되어 예카테린부르크로 수감된다. 이후 내전 중 예카테린부르크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의해 점령되자 연금에서 풀려나고 미국으로 가서 시베리아 정부를 서방 국가들이 지원하도록 외교전을 펼친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전은 소득이 없었고 이후 파리에 거주하면서 러시아 이주민들을 도우며 수공업에 종사하다 1925년 생을 마감한다.

3. 활동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자유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었다. 러시아 젬스트보(농촌 자치 기구)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2월 혁명이 일어나자 자유주의자의 거두로써 임시정부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니콜라이 2세의 동생 미하일 대공이 임시정부의 국가원수 자리에서 내려온 이후에는 국가원수 권한대행까지 맡아 수행했다.

하지만 전쟁을 지속함으로 인기를 잃었고 우크라이나 독립 문제로 몇몇 장관들이 사퇴한 이후 사회주의 인사들이 참여한 개조 내각은 전쟁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이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소비에트정권 이양을 주장하는 페트로그라드의 시위를 기관총 부대와 카자크 기병을 동원해 무력 진압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내자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이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사회혁명당멘셰비키 주도의 2차 연립정부가 수립된다.

4. 여담

  • 2월 혁명 당시 여성 시위대들이 리보프가 여성참정권을 수용하도록 압력을 넣으려고 했으나 리보프는 이미 성인 참정권을 도입할때부터 여성참정권을 포함해서 많은 여성 운동가들을 놀라게 했다.
  • 그가 예카테린부르크에 수감되었을때 차르 일가가 처형될 시기 같이 처형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좌파 사회혁명당에서 합법주의 파벌(테러 행위 반대파)의 수장 이삭 스타인버그가 적극적으로 그의 처형을 반대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1] 율리우스력: 10월 21일[2] 혼전성은 모솔로바[3] Vilma Lwoff-Parlaghy. 본명은 헝가리어식으로 브러흐펠드 빌머 에르제베트(Brachfeld Vilma Erzséb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