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14:33:52

구스타브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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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80d53><colcolor=#ffffff>
스웨덴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 제2대 국왕
구스타브 3세
Gustav III
파일:1280px-Gustav_III_Sweden.jpg
출생 1746년 1월 24일
스웨덴 스톡홀름
사망 1792년 3월 29일 (향년 46세)
스톡홀름 스톡홀름 왕궁
재위기간 스웨덴 국왕
1771년 2월 12일 ~ 1792년 3월 29일
서명 파일:구스타브 3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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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80d53><colcolor=#fff> 가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
아버지 아돌프 프레드리크
어머니 프로이센의 루이제 울리케 공주
형제자매 칼 13세, 프레데리크 아돌프, 소피아 알베르티나
배우자 덴마크의 소피 마그달레네 공주 (1766년 결혼)
자녀 구스타프 4세 아돌프, 칼 구스타브
종교 루터교회 }}}}}}}}}

1. 개요2. 생애3. 개인적 면모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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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 국왕으로 아돌프 프레드리크프로이센의 루이제 울리케 공주의 장남. 부왕이 뇌졸중으로 사망하자 스웨덴 왕위를 계승하였다.

2. 생애

왕당파의 지지 아래 근위병을 임용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칼 12세 이후로 50년간 지속되던 의원내각제 체제를 뒤엎으며 계몽주의에 입각한 전제군주제로 회귀시켰고 이로 인해 스웨덴의 자유의 시대(Frihetstiden)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여러 사회적인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귀족들과의 불화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1788년, 예카테리나 2세[1]에게 1721년과 1743년 빼앗긴 카리알라 수복을 명목으로 대 러시아 전쟁을 일으켰다. 1790년 스벤스크순드[2] 해전에서 친정하며 거둔 완승을 통해 1790년 베렐레 조약을 체결하며 러시아 제국의 내정간섭을 철폐시키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지만 전쟁의 명분인 실지회복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전쟁 중간에 핀란드 출신 장교단이 아냘라 역모사건을 모의하다 발각되면서 스웨덴과 핀란드가 갈라지는 분기점을 제공하고 말았다.

전쟁 이후 결사 및 안보법을 강제하면서 귀족들과의 사이는 돌이킬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1792년 3월 16일, 가장무도회 자리에서 자신의 전직 경호원이었던 요한 앙카르스트룀 대위에게 암살당했다. 정확히는 즉사하지 않고 앙카르스트룀이 쏜 총에 맞아 수술로 총알을 제거하여 살았으나 당시의 수술이 현대와 달리 위생이 불결하여 감염이 심한 나머지 후유증으로 인해 1792년 3월 29일 스톡홀름 왕궁에서 패혈증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그가 안장될 리다르홀름 교회에서 열렸다. 범인 앙카르스트룀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참수당했다. 사후 14세의 아들이 구스타브 4세 아돌프로 즉위하여 동생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의 섭정을 받았다.

3. 개인적 면모

개인적으로는 바로크 문화의 애호가였으며 어린 시절 프랑스에서 유학한 여파인지 프랑스 문화에 경도되었고, 하가 백작이라는 가명을 쓰고 종종 프랑스를 방문했다. 그가 모은 예술품은 오늘날 스톡홀름 왕궁(Stockholms slott)의 구스타브 3세 골동품 박물관(Gustav III:s antikmuseum)에 남아있으며, 스톡홀름 인근 드로트닝홀름 궁전(Drottningholms slott)에서는 구스타브 3세의 왕립 오페라 극장(Drottningholms slottsteater)을 가이드 투어로 둘러볼 수 있다.

커피를 매우 싫어하여 금지하려고 했지만, 반발이 심하자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사형수 쌍둥이를 종신형으로 살려주는 대신에 한명은 매일 커피를, 한명은 차를 마시게 한 것. 하지만, 실험결과를 보지 못하고 암살당했는데 차를 마신 형제는 83살로 장수했지만 커피만 마신 형제는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걸 연구하던 의사들도 먼저 죽어서 이 사람이 언제 죽었는지 더 이상 기록이 없다는 것. 아무튼, 이런 실험으로도 커피의 유해성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로도 스웨덴 왕가는 커피금지령은 꿈도 꾸지 않았다.

4. 대중매체에서


스웨덴의 가구 판매업체 이케아의 TV 광고에 등장하였다. 특유의 썩소는 덤. (1분 5초)

[1] 예카테리나 2세의 어머니인 요한나 엘리자베트가 구스타브 3세의 아버지인 아돌프 프레드리크의 여동생이었으므로 둘은 사촌이었다.[2] 현재의 핀란드 코트카(Kotka) 앞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