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80d53><colcolor=#ffffff> 스웨덴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 제2대 국왕 칼 11세 Karl XI | |
출생 | 1655년 11월 24일 |
스웨덴 스톡홀름 트레 크레노르[1] | |
사망 | 1697년 4월 5일 (향년 41세) |
스웨덴 스톡홀름 트레 크레노르 | |
재위 | 스웨덴 왕국의 왕 |
1660년 2월 13일 ~ 1697년 4월 5일 | |
배우자 | 덴마크의 울리케 엘레오노레 (1680년 결혼 / 1693년 사망) |
자녀 | 헤드비그 소피아, 칼 12세, 울리카 엘레오노라 |
아버지 | 칼 10세 구스타브 |
어머니 |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트비히 엘레오노라 |
종교 | 개신교 (루터회)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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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의 스웨덴 국왕으로 절대왕정을 구축해 스웨덴 역사상 최극성기를 이룩하였다.2. 상세
아버지 칼 10세 구스타브가 북방전쟁 도중인 1660년 사망하여 겨우 4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어머니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트비히 엘레오노라와 관료 5명이 섭정을 맡았는데, 어머니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스웨덴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이래 수많은 전쟁을 치러왔고,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기에 섭정 정부는 스웨덴 중앙은행을 설립했다. 섭정 정부는 그가 성년이 되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계속 통치했으나 스코네 전쟁(1675 ~ 1679)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를 계기로 친정을 시작했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5세와 직접 맞붙은 룬드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불리해졌으나 북유럽의 균형을 주장한 프랑스가 개입하여 오데르강 동부의 포메른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회복할 수 있었다.전쟁 이후 내치에 힘써 토지를 회수하여 균등하게 분배하는 정책을 수행했고, 법률 제도를 고치며 군제도를 개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697년 사망했다.
3. 가족 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부인 헤트비히 조피아 (Hedvig Sophia, Duchess of Holstein-Gottorp) | 1681년 6월 26일 | 1708년 12월 22일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4세 슬하 1남(카를 프리드리히) |
1남 | 칼 12세 (Charles XII) | 1682년 6월 17일 | 1718년 11월 30일 | |
2녀 | 울리카 엘레오노라 (Ulrika Eleonora) | 1688년 1월 23일 | 1741년 11월 24일 | 프레드리크 1세 |
4. 기타
구 500스웨덴 크로나의 모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