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6AA7><colcolor=#fecc00> 스웨덴 바사 왕조 초대 국왕 구스타브 1세 Gustav I | |
이름 | 구스타브 바사 Gustav Vasa |
출생 | 1496년 5월 12일 |
스웨덴 우플란드 리드보홀름 성 | |
사망 | 1560년 9월 29일 (향년 64세) |
스웨덴 스톡홀름 트레 크로노르[1] | |
재위 | 스웨덴 왕국의 왕 |
1523년 6월 6일 ~ 1560년 9월 29일 | |
배우자 |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카타리나 (1531년 결혼 / 1535년 사망) |
마르가레타 레이욘후부드 (1536년 결혼 / 1551년 사망) | |
카타리나 스텐보크 (1552년 결혼) | |
자녀 | 에리크 14세, 요한 3세, 카타리나, 세실리아, 망누스, 안나, 소피아, 엘리사베트, 칼 9세 |
아버지 | 에리크 요한손 바사 |
어머니 | 세실리아 몬스도테르 |
형제 | 마르가레타, 요한, 망누스, 안나, 비르기타, 마르타, 에메렌티아 |
키 | 190cm |
서명 |
[clearfix]
1. 개요
칼마르 연합을 주도하던 덴마크로부터 스웨덴을 독립시킨 실질적인 국부이다. 스웨덴을 근대 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다.2. 왕위에 오르기 전
아버지 에리크 요한손 바사(Erik Johansson Vasa 1470~1520)는 스웨덴 원로원 의원이었고 어머니 세실리아 몬스도테르(Cecilia Månsdotter 1476~1523)도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가 속한 바사 가문은 칼마르 연합 시기 스웨덴 섭정을 배출하기도 한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이었다.1517~1518년 스웨덴을 완전히 복속하려 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에 맞서 독립 투쟁에 참여했으나 섭정 소 스텐 스투레(Sten Sture den yngre 1493~1520)가 패배하면서 크리스티안 2세에게 보내질 귀족 자제 인질로 선정되어 덴마크로 끌려갔다. 당시 같이 끌려간 동료들은 전부 덴마크로 변절했으나 구스타브 바사는 변절하지 않고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자유도시였던 뤼베크로 도망갔다.
뤼베크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크리스티안 2세는 스톡홀름 대학살(Stockholms blodbad)을 일으켜 주요 스웨덴 귀족들을 처형해 스웨덴의 독립 운동 의지를 꺾으려 했다. 구스타브 바사의 아버지 에리크 요한손도 이때 희생당했다.
3. 스웨덴 독립 전쟁
달라르나에 도착한 구스타브 바사는 지역 농민들에게 크리스티안 2세의 학살을 알리며 봉기를 유도했다. 그러나 수도의 소식을 알리가 없던 농민들은 뭔 헛소리냐며(...) 이를 무시했고 실망한 그는 노르웨이 국경으로 도주했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스톡홀름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입수한 달라르나 농민들은 노르웨이 국경 코앞에서 그를 붙잡아 달라르나 지역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구스타브 바사가 긁어모은 농민병들은 덴마크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만으로 모였고 구식 무기에 훈련도 받지 못했지만 용병에 의존하던 소수의 덴마크군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고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구스타브 바사가 주도로 일어난 농민병들의 소식을 듣고 스웨덴 다른 지역에서도 봉기가 일어났고 스톡홀름과 일부 성채를 제외한 대부분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스톡홀름은 농민병들만으로 함락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어 구스타브 바사는 다시 뤼베크로 건너가 뤼베크 시의원들을 설득해 데려온 용병들과 함께 탈환했다[2].한편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에서의 실패와 평소 덴마크 귀족들과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덴마크 왕위에서 폐위당했고 노르웨이에서도 연달아 폐위당해 처가가 있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덴마크 왕위는 크리스티안 2세의 숙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프리드리히에게 넘어갔고 스웨덴 신분제 의회는 새로운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1세가 스웨덴 왕위를 주장할까봐 새로이 스웨덴 국왕을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1523년 6월 6일 스트랭네스(Strängnäs)에서 열린 의회에서 구스타브 바사는 스웨덴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4. 국내 정책
핀란드까지 탈환에 성공했지만 즉위 초창기 그의 신세는 귀족들의 대표자에 불과했고 왕권도 불안정했다. 1529년 베스트라예탈란드에서 귀족 및 성직자들이, 1533년 달라르나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구스타브 1세는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이후 귀족들은 잠잠해졌으며 달라르나 지역도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구스타브 1세의 치세 중 가장 위협적이었던 농민봉기는 1542년 벌어진 다케의 난이었다. 이 반란은 1543년 진압되었고, 주동자 닐스 다케는 오체분시되어 전국으로 시체가 전시되었다.
14세기부터 스웨덴 왕권에 위협이 되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기 위해 마르틴 루터의 제자 울라우스 페트리(Olaus Petri 1493~1552)로 하여금 루터교회를 보급하게 했다. 이로서 스웨덴에서도 종교 개혁이 실시되었다. 수도원 재산을 몰수하여 국가 재정을 보충했으며 울라우스 페트리의 동생 라우렌티우스 페트리(Laurentius Petri 1499~1573)를 최초의 루터파 출신 웁살라 대주교로 앉혀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켰다. 또한 페트리 형제로 하여금 여러 출판물을 발행하게 하였고 1540년 스웨덴어로 쓰여진 구스타브 바사 성경을 출판하여 스웨덴어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구스타브 바사의 종교 개혁은 핀란드에서도 실시되었고 미카엘 아그리콜라(Mikael Agricola 1510~1557)를 오보 대주교로 앉혀 종교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아그리콜라는 핀란드어 성서를 발행하여 핀란드어 발전에 기여하였다. 1550년 한자도시인 레발(Reval)을 견제하고자 헬싱포르스(Helsingfors)를 세웠으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조세 제도도 개혁하여 농민들로부터 직접 세금을 거둬들였다. 덕분에 왕실 세입이 증대되었다. 이외에도 1544년 의회를 구워 삶아 지금까지 선출제였던 스웨덴 왕위 계승을 자신의 후손만 후보자로 나올수 있게 바꾸어 사실상 세습제로 바꾸었다.
5. 대외 정책
초창기에 크리스티안 2세의 복위 시도에 위협을 느끼고 새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1세와 동맹을 맺어 국방을 안정화시켰다. 1533년 프레데리크 1세가 사망하고 덴마크에서 백작 전쟁이라 불리는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는데 구스타브 1세는 프레데리크 1세의 아들 크리스티안 3세를 지원했다. 크리스티안 3세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평정했고 덕분에 크리스티안 2세의 복위를 도왔던 뤼베크에게 이전에 독립 전쟁의 대가로 부여했던 막대한 특권들을 폐지시켰다.말년인 1555~1557년 루스 차르국과 전쟁을 치렀는데 비보리(Viborg)를 침공한 모스크바 군대를 막아냈으나 역으로 뇌테보리(Nöteborg)[3]를 침공했을때 스웨덴군의 문제만 보여주면서 퇴각했다. 이 전쟁은 노브고로드 조약으로 종식되었다.
6. 말년
구스타브 1세는 맏아들 에리크와 둘째 요한이 틈만 나면 싸우는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이 둘의 갈등은 1557년 둘째 이하의 자식들에게 스웨덴을 공국으로 나누어 분배하여 준독립국 수준의 자치를 허용한 건으로 인하여 그가 방조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 그가 추구했던 왕권 강화와는 상반된 정책이었고 덕분에 스웨덴은 막내 칼이 즉위하기 전까지 바사 왕조 내부의 골육상쟁으로 얼룩진 정쟁을 겪었다. 1550년대부터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1560년 9월, 아들들과 귀족들을 불러모아 단합을 부탁하는 마지막 연설을 끝으로 숨을 거두었다.7. 기타
스웨덴 국기를 공식적으로 채택한 국왕으로 알려졌으며, 그가 국왕으로 정식으로 선출된 6월 6일은 스웨덴에서는 독립기념일로 공휴일이다.독립 전쟁 당시 노르웨이 국경으로 도주할때 노르웨이 농민들이 그를 도와주었는데, 오늘날 이를 기념하여 당시 그의 도주 코스 90km를 달리는 구스타브 바사 노르딕 대회(Vasaloppet)가 1922년부터 열리고 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4차 스웨덴 크로나 은행권의 도안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했었는데, 그의 위상이 스웨덴에서 얼마나 높은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
스웨덴 각지에서 그의 동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스톡홀름 북방민족 박물관(Nordiska Museet)에는 초거대 조각 동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