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 존재하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대한 내용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문서 참고하십시오.
네덜란드 17주 Zeventien Provinciën • Dix-Sept Provinc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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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령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 일부만 독립 | ||||||
관련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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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네덜란드 Habsburgse Nederlanden Pays-Bas des Habsbourg 1482년~1555년 | |||||
국기 | 국장 | ||||
1482 ~ 1581년 | |||||
위치 | 베네룩스 | ||||
수도 | 브뤼셀 | ||||
정치체제 | 군주정 | ||||
언어 | 네덜란드어, 왈롱어[1] 등 | ||||
성립 이전 | 부르고뉴령 네덜란드 | ||||
성립 이후 |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령 네덜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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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82년부터 1581년까지 저지대 국가에 존속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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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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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룩셈부르크 군정청, 룩셈부르크 민정청, 모젤란트구 | ||
룩셈부르크 대공국 |
카럴 더 스타우터(Karel de Stoute)[2]의 유일한 후계자 마리아 반 부르혼디어(Maria van Bourgondië)[3]가 1482년 사냥 중 사고로 사망한 이후, 마리아의 남편 막시밀리안 1세는 당시 15세의 소년이었던 장남 필리프[4]에게 저지대 지역의 통치권을 물려주었다.[5] 필리프는 네덜란드를 부르고뉴식으로 통치하려고 했고, 1477년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의회와 맺은 <위대한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저지대에서 나고 자란 필리프는 자신의 영지를 잘 이해하였고 훌륭한 통치를 하였다. 그러므로 저지대의 주민들 역시 그를 지지하였다.
필리프는 부친의 중매로 1496년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왕 페르난도 2세의 차녀 후아나 공주와 결혼하였다. 이로써 스페인과 저지대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1504년 장모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후아나가 친정어머니의 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물려받게 되었다. 페르난도 2세는 후아나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카스티야까지 섭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여왕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정신병을 앓고 있었기에 카스티야 귀족들은 필리프를 카스티야의 국왕 펠리페 1세로 추대하였다. 펠리페 1세는 즉위 2년 후인 1506년 카스티야에 도착하였으나 얼마 안 가 병으로 사망하였고, 필리프가 가지고 있던 카스티야 국왕과 저지대 공작이라는 자리는 장남 카를이 계승하였다.
당시 카를 5세는 겨우 6살 밖에 안 된 어린 아이였으므로 펠리페 1세의 여동생 마르가레테(Margaretha van Oostenrijk, 1480~1530)가 섭정을 맡았다. 1515년 카를 5세가 성년이 되자 카스티야의 통치권을 돌려 받았고,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1516년 사망하자 아라곤의 왕위까지 물려받으면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초대 왕이 되었다. 1519년 친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 대공국까지 상속받았으며 경쟁자였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를 따돌리고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가 물려받은 저지대 지역, 즉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마르가레테의 섭정 이후, 1531년부터 카를 5세의 여동생 마리아(Maria van Hongarije)[6]가 통치하게 되었다. 카를 5세는 동년 브뤼셀에 중앙 행정부를 설치하여 마리아의 통치를 보좌하게 하였다. 중앙 행정부는 크게 국가 위원회(Raad can State), 비밀 위원회(De Geheime Raad), 재정 위원회(De Raad van Financiën)으로 구성되었다.
국가 위원회는 정치 현안들에 대한 자문을, 비밀 위원회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 수행에 필요한 법 제정을, 마지막으로 재정 위원회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재정 사안을 담당하였다. 본 위원회는 각각 3명의 귀족, 법률, 재정 전문가로 구성되었으며, 세금 규모를 작성, 징수하는 역할도 맡았다. 또한 각 지역에는 지역 의회가 있었으며, 군주를 대리하는 총독이 있었다.
한편 카를 5세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확장에 나서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투르네, 아르투아, 위트레흐트, 헬러, 흐로닝언 등을 자신의 영지의 일부로 편입하였다. 최종적으로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는 17개의 작위와 그 영지, 총 17개 주가 속하게 되었다. 1548년에는 네덜란드 지역을 제국 내 자치 지역으로 설정하고, 1549년 <황제 조칙>(De Pragmatieke Sanctie, 1549)을 공표하여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 속하는17개의 작위를 사실상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묶어 자신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모든 권리를 상속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1555년 카를 5세가 모든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펠리페 2세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를 지배하게 되었다. 보통 이 시점부터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불리게 된다.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17개 주의 구성 | |||
번호 | 지역 명칭 볼드체는 해당 지역이 속하는 언어권을 가리킨다 | 명목상 작위 | 비고 |
1 | 프랑스어: 아르투아(Artois) 네덜란드어: 아르테시어(Artesië) | 백작령 | [7] |
2 | 프랑스어: 플랑드르(Flandre) 네덜란드어: 플란데런(Vlaanderen) | 백작령 | |
3 | 프랑스어: 말린(Malines) 네덜란드어: 메헐런(Mechelen) | 영주령 | |
4 | 프랑스어: 나뮈르(Namur) 네덜란드어: 나먼(Namen) | 백작령 | |
5 | 프랑스어: 에노(Hainaut) 네덜란드어: 헤너하우번(Henegouwen) | 백작령 | |
6 | 프랑스어: 젤랑드(Zélande) 네덜란드어: 제일란트(Zeeland) | 백작령 | |
7 | 프랑스어: 올랑드(Hollande) 네덜란드어: 홀란트(Holland) | 백작령 | |
8 | 프랑스어: 브라방(Brabant) 네덜란드어: 브라반트(Brabant) | 공국 | |
9 | 프랑스어: 랭부르(Limbourg) 네덜란드어: 림뷔르흐(Limburg) | 공국 | |
10 | 프랑스어: 뤽상부르(Luxembourg) 네덜란드어: 뤽셈뷔르흐(Luxemburg) | 공국 | [8] |
11 | 프랑스어: 위트르슈(Utrecht) 네덜란드어: 위트레흐트(Utrecht) | 주교령 | [9] |
12 | 프랑스어: 프리즈(Frise) 네덜란드어: 프리슬란트(Friesland) | 영주령 | |
13 | 프랑스어: 겔드르(Gueldre) 네덜란드어: 헬러(Gelre) | 공국 | |
14 | 프랑스어: 그로냉그(Groningue) 네덜란드어: 흐로닝언(Groningen) | 영주령 | |
15 | 프랑스어: 드렝트, 랭엥, 웨드, 웨스테르올드(Drenthe, Lingen, Wedde, Westerwolde), 네덜란드어: 드렌터, 링언, 베더, 베스터르볼더(Drenthe, Lingen, Wedde, Westerwolde) | 영주령 | [10] |
16 | 프랑스어: 오베르슬(Overijssel) 네덜란드어: 오버레이설(Overijssel) | 영주령 | |
17 | 프랑스어: 쥐픈(Zutphen) 네덜란드어: 쥐트펀(Zutphen) | 백작령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와 중앙 정부 간의 갈등은 항상 일어났는데, 주로 세금과 종교 문제에서 나타났다. 특히 당시 유럽은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고, 네덜란드 지역도 이에 예외가 아니었다. 루터교회의 확산은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에게 큰 위협이었다. 카를 5세는 1550년 <피의 칙령>(Bloedplakkaat)을 공표하여 루터회 교인들은 누구나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루터파뿐만 아니라 칼뱅파 역시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었고, 카를 5세는 루터회와 마찬가지로 칼뱅파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한 조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 군주들이 개신교의 편에 서면서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카를 5세는 종교 화해[11]를 선언하였다.[12]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카를 5세는 결국 동년 퇴위하여 펠리페 2세에게 저지대와 스페인과 아메리카 식민지,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을 물려주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는 차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위를 물려주었다.
스페인인으로 자라난 펠리페 2세는 1559년 자연스럽게 스페인으로 떠났고,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이곳에서 자고나란 이복 누이 마르가레테(Margaretha van Parma)에게 통치를 위임하였다. 마르가레테는 카를 5세 때 설치된 기구인 국가 위원회의 자문을 받으며 통치하게 되는데, 특히 이 위원회 위원들 중 앙투안 페레노 드 그랑벨(Antoine Perrenot de Granvelle)은 펠리페 2세의 최측근이었다. 1559년 그는 교회조직이 개편되면서 메헬렌의 대주교가 되었고 그 해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재상이 되었다.
펠리페 2세의 비호 아래 평민 출신인 그가 국정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자 다른 귀족 출신 자문 위원들의 불만과 우려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특히 1559년 그랑벨에 의해 발효된 <교회 재조직령>은 네덜란드 토호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하지 않는 규정이었고, 이에 귀족들이 폭발하여 그랑벨을 사퇴시키고자 동맹을 맺어 펠리페 2세에게 청원하였다. 펠리페 2세는 처음에 이를 용인하지 않았으나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진출과 이복 누이 마르가레테의 청원에 의해 1564년 마침내 그랑벨을 퇴진시켰다.
그랑벨의 뒤를 이어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대귀족들이었다. 이 대귀족들은 빌럼 판오라녀(Willem van Oranje), 라모랄 에흐몬트(Lamoraal Egmont), 필립스 판 호른(Filips van Horn)이었다. 그러나 경제 사정이 악화되고, 종교 분쟁이 격화되자 펠리페 2세는 1565년 10월, 마르가레테에게 이교도들을 향해 더욱 강력히 대응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빌럼 등 소수 대귀족들은 칼뱅교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왕에게 요구했고, 종교적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하위귀족들도 이에 동참하여 뢰이크(Luik)에서 '합의'(Compromis)라는 연합을 결성했다.
1566년 4월, '합의'연합을 구성한 하급귀족들은 마르가레테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청원서에는 종교 재판 시 이단에 대한 관용과 의회를 매개로 자신들의 정치 참여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쓰여졌다. 이 때 그들은 '거지들'(geuze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일단 마르가레테는 이 청원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만연했던 가톨릭의 부패와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불안이 1566년 8월 10일 성상 파괴 운동으로 폭발하였다. 네덜란드의 관리, 귀족, 시민, 빈민층 모두가 동참하여 벌어진 이 운동은 삽시간에 네덜란드 전역을 휩쓸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연이어 성상 파괴 소동이 벌어졌다. 마르가레테는 스페인 본국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조직하여 성상파괴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567년 3월 13일 마르가레테는 모든 네덜란드 귀족들에게 왕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서약을 명령하였다. 에흐몬트와 호른은 서약했으나 빌럼은 거부하고 독일로 망명하였다. 펠리페 2세는 이러한 사건들을 더욱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1567년 8월 22일 마르가레테 대신 알바(Alba) 공(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을 임명하였다. 그는 폭동 재판소(De Raad van Beroerten)를 설치하고 칼뱅교의 무장봉기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약 8,000명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이렇게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탄압에 항의한 에흐몬트와 호른도 포함되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3. 역대 총독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01818, #a01e1e 20%, #a01e1e 80%, #801818);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 ||||
<rowcolor=#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나사우의 엥겔베르트 2세 | 윌리엄 드크루아 | 마르가레테 폰 외스터라이히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 ||
<rowcolor=#fff> 스페인령 네덜란드 | |||||
<rowcolor=#fff>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 파르마의 마르가레테 |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톨레도 | 루이스 데레케센스 이 수니가 | ||
<rowcolor=#fff>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돈 후안 데아우스트리아 | 파르마-피아첸차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 페테르 에른스트 1세 폰만스펠트포어데로르트 |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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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엔리케스 데아세베도 |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7세[A] |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A] |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 | ||
<rowcolor=#fff>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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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데베나비데스 카리요 | 프란시스쿠 드모라 | 이니고 멜코르 데벨라스코 | 후안 도밍고 데수니가 이 폰세카 | ||
<rowcolor=#fff>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카를로스 데아라곤 데구레아 | 파르마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 오토네 엔리코 델카레토 |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데아구르토 | ||
<rowcolor=#fff> 제29대 | 제30대 | ||||
막시밀리안 폰 바이에른 | 이시도로 데라쿠에바 이 베나비데스 | ||||
<rowcolor=#fff>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 |||||
<rowcolor=#fff> 제31대 | 제32대 | 제33대 | 제34대 | ||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 | 비리히 필리프 폰다운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엘리자베트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하라흐로라우 | ||
<rowcolor=#fff> 제35대 | 제36대 | 제37대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 마리아 크리스티나 | 카를 루트비히 | |||
샤를 알렉상드르 | 알베르트 카지미어 | ||||
[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 |||||
}}}}}}}}} |
4. 참고 문헌
- 김영중, 장붕익 공저, 《네덜란드史 (세계각국사)》,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94, 88~95쪽
- 송미숙, 《미술사와 근현대사》,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3, 36~37쪽
5. 관련 문서
[1] 당시 프랑스어 사용지역에서는 주로 프랑스어와 가까운 왈롱어를 주로 썼다.[2] 네덜란드어 명칭, 용맹한 성격 탓에 용담공 샤를(Charles Ier le Téméraire)이라고 알려졌다. 부르고뉴 공국의 마지막 공작이다. 종주국인 프랑스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부르고뉴의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로타링기아 왕국의 국왕으로 인정받기 직전까지 갔다가 실패로 돌아갔고, 영지였던 저지대와 부르고뉴 본토를 하나로 연결하기 위해 그 사이에 있던 로렌 공국의 수도 낭시를 공략하다가 스위스 용병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3] 이쪽은 부귀공 마리(Marie de Bourgogne)로도 알려졌다. 부친인 용담공 샤를이 전사한 직후, 남자 계승자가 없다는 이유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침공해오면서 겐트 성에 유폐되어 버린 신세가 되었고, 이를 막시밀리안 1세가 구출한 후 마리와 결혼했다.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고, 거기서 승리를 거두어 마리는 부르고뉴 본토를 잃는 대신 저지대 지역의 상속을 인정받았다. 막시밀리안과의 사이에서 장남 필리프와 장녀 마르가레테의 1남 1녀를 두었다.[4] 펠리페 1세는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라고 불렸다.[5] 막시밀리안 1세는 어린 필리프를 대신하여 그동안 섭정을 맡아 네덜란드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어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돌아가야 하자 더 이상 섭정을 할 수 없었기에 통치권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6] 1505~1558. 헝가리어로는 합스부르크 마리어(Habsburg Mária).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의 왕 러요시 2세와 결혼했으나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하면서 둘째 오빠 페르디난트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으로 등극할 때까지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의 섭정을 지냈다.[7] 릴/레이설(Lille/Rijsel), 두에/도바이(Douai/Dowaai), 오르시(Orchies/Oorschie) 성백령과 투르네투르네시/도르니크도르니크세(Tour et le Tournaisis/Doornik en het Doornikse) 영주령 포함.[8] 프랑스어권으로 분류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독일어권이다. 독일어 이름은 룩셈부르크(Luxemburg).[9] 후에 영주령으로 전환된다.[10] 4개 백작령을 일괄적으로 1개 주로 취급한다.[11] 그러나 이 종교 화해는 가톨릭과 루터교회 만이 해당되는 것으로 네덜란드 개신교의 다수를 차지하던 칼뱅교는 해당되지 않았다. 따라서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여전히 가혹한 종교 탄압이 자행되었다.- 《미술사와 근현대사》, 36p[12] 엄밀히 말하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도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주도한 것이지 카를 5세는 이를 끝까지 반대했다. 페르디난트 1세가 자샌의 의사를 무시하면서 강행한 화의로 인해 황권이 정말로 유명무실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퇴위 원인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