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1:30:33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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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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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4A460><colcolor=#000000> 스페인의 카르디날 인판테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
Cardenal-Infante Fernando de Austria
파일: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jpg
이름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 이 아우스트리아
(Fernando de Austria y Austria)
출생 1609년 5월 16일
스페인 왕국 산로렌소데엘에스코리알
사망 1641년 11월 9일 (향년 32세)
스페인령 네덜란드 브뤼셀
아버지 펠리페 3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형제 아나, 펠리페 4세, 마리아 아나, 카를로스, 마르가리타, 알론소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초기3. 추기경이 되다4. 30년 전쟁5. 위협과 형의 시기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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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테셴 공작 카를과 그 궤를 같이하는 최고의 명장으로 꼽힌다. 나폴레옹 전쟁카를 루트비히가 있다면 30년 전쟁에는 이 사람이 있다.

2. 생애 초기

1608년 엘 에스코리알에서 스페인 국왕펠리페 3세와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두 부부 역시도 다른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처럼 5촌간이었다.

형제로는 형 펠리페 4세루이 13세와 결혼하는 큰누나 안 도트리슈, 페르디난트 3세와 결혼하는 작은누나 마리아 아나가 있었다.[1]

3. 추기경이 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60px-Coat_of_Arms_of_Cardinal-Infante_Ferdinand_of_Austria.svg.png
추기경 때의 문장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에는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있는 남계 후손들은 성직자가 되게 하는 관행이 있었다.[2] 이러한 관행으로 인해 아버지 펠리페 3세는 페르난도가 추기경이 되기를 바랐고, 그는 10살의 나이에 톨레도 대교구대주교가 된다.

곧 그는 추기경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이름은 Cardinal-infante Fernando가 되고 흔히 '카디날 인판테'라고 불리게 된다.[3]

4. 30년 전쟁

파일:external/cdn-1-wdh.habsburger.net/peter_paul_rubens_begegnung_koenig_ferdinands_von_ungarn_mit_dem_kardinalinfanten_ferdinand_vor_der_schlacht_bei_noerdlingen_original_0.jpg

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초반에는 백산 전투에서의 승리와 발렌슈타인의 등장으로 선전했지만, 뒤로 갈수록 스웨덴군과 프랑스의 리슐리외의 지원으로 틸리가 1631년 전사하고 발렌슈타인 역시 암살되어 물자가 부족해지고, 태산북두의 군 지휘관들이 전사함에 따라 밀리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장군이 부족해지자 합스부르크 가에서는 추기경 왕족들을 장군으로 만들기로하여, 1630년 페르난도는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의 뒤를 이어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이 되고 군사 작전에 나서게 된다.

이후 총독직을 수행하다가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에 나서게 된다. 당시 신교도 군대는 뇌르틀링겐을 수복하여 도나우뵈르트와 레겐스부르크를 탈환하려 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페르난도는 당시 헝가리 왕국 국왕이었던 페르디난트(훗날의 페르디난트 3세)와 연합하여 뇌르틀링겐 전투에 임한다. 이 전투에서 개신교 측은 상당히 자만하고 있었을 뿐더러[4], 지휘관인 구스타프 호른과 작센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는 서로를 정말 싫어해 원수 보듯 하였지만 합스부르크의 군대는 소위 오래된 테르시오라고 불리는 정예병들과 충분한 병력 덕에 스웨덴-작센 군대를 무려 8번이나 막아내고 격파까지 하는 기염을 선보인다.

이 전투를 통해서 전세는 합스부르크 쪽으로 기울었다. 아울러 스웨덴 역시 전쟁에서 거의 이탈(!)할 뻔 했으니, 뇌르틀링겐의 승전의 영향은 그에게 지대한 것이었다.

5. 위협과 형의 시기질투

이렇게 페르난도는 승승장구하고 그 이후 네덜란드의 여러 지방을 위협하고 탈환한 후 급기야는 프랑스를 위협하지만 첫째 매형인 루이 13세[5]와 네덜란드 독립군에게 1637년부터 패배한 후 그의 위신과 명예는 떨어진다.

아울러 그의 명성을 질투한 궁정 내의 귀족과 펠리페 4세는 그가 루이 13세의 조카[6]와 결혼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거기다가 스페인의 행정과 재정 역시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과 카탈루냐 반란으로 매우 좋지 않아서 페르난도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다가 1642년 브뤼셀에서 병사했다. 사망 이후 총독이 된 프란시스코 데 멜로는 그만한 자질이 없는 인물인 탓에 로크루아 전투에서 대 콩데에게 대패하여 스페인이 무너지고 베스트팔렌 조약, 합스부르크의 쇠퇴로 이어진다.

[1] 이 페르난도의 외조카들인 루이 14세(안 도트리슈의 아들)와 레오폴트 1세(마리아 아나의 아들)는 나중에 적이 되어 9년 전쟁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죽어라고 싸운다. 참고로 페르난도의 형제관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루이 14세와 레오폴트 1세는 이종사촌이기도 했다.[2] 대표적으로 페르디난트 3세의 동생 레오폴트 빌헬름, 요제프 2세마리 앙투아네트의 막내 동생 막시밀리안 프란츠.[3] 여담이지만 가장 어린 카디날 인판테는 펠리페 5세의 아들 루이스 추기경으로, 7살에 카디날 인판테가 되었다. 루이스는 페르난도의 조카 루이 14세와 마리 테레즈의 증손자니 현손자뻘이다.[4] 병력 수까지 잘못 알고 있었다[5] 큰누나 아나의 남편.[6] 앙리 4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의 딸인 몽팡시 여공작 안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 사촌인 루이 14세 시절에 프랑스 귀족들이 일으킨 프롱드의 난에 가담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루이 14세와의 사이가 멀어져 난이 진압된 이후, 자신의 영지에 칩거하다가 간신히 궁정에 복귀했지만 결국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