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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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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원로원과 시민들
SENATVS•POPVLVSQVE•ROMANVS
Senātus Populusque Rōmānus
[1]
파일:800px-Roman_Republic-44BC.png
기원전 44년 강역
<colbgcolor=#a00201> 기원전 509년~기원전 27년
수도 로마
언어 고대 라틴어[2]
코이네 그리스어
갈리아어
아키타니아어[3]
이베리아어[4]
카르타고[5]
아람어
민중 이집트어[6]
일리리아
트라키아
베르베르어
기타 이탈리아 고대어[7]
기타 이베리아 고대어[8]
[9]
정부 형태 귀족공화제
국가원수 집정관
주요 지도자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그라쿠스 형제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국교 고대 로마 다신교
종족 라틴인, 에트루리아인, 삼니움인,
갈리아인, 이베리아인, 카르타고인,
그리스인, 트라키아인, 일리리아인,
이집트인, 아람인, 유대인
입법 원로원, 민회
면적 10,000km² (기원전 326년)
360,000km² (기원전 200년)
800,000km² (기원전 146년)
1,200,000km² (기원전 100년)
1,950,000km² (기원전 50년)
통화 데나리우스
세스테르티우스
공화정 성립 이전 로마 왕국
삼두정치 종료 이후 로마 제국

1. 개요2. 역사
2.1. 초기2.2. 카밀루스의 추방과 켈트족의 침공2.3. 라틴 전쟁2.4. 삼니움 전쟁2.5. 피로스 전쟁2.6. 제2차 포에니 전쟁2.7. 지중해를 제패한 공화국2.8. 자영농의 몰락과 귀족의 발호2.9.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2.10. 유구르타 전쟁2.11. 로마 내전2.12. 카이사르의 내전2.13. 제정의 시작
3. 정치 체제

[clearfix]

1. 개요

로마인들은 자기들에게 대항하는 그 밖의 나라와 섬들도 모두 멸망시키고 그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벗들이나 자기들에게 의지하는 이들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로마인들이 이렇게 멀고 가까운 곳의 임금들을 정복하니, 그들의 이름을 듣는 이는 누구나 그들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이 도와서 임금으로 만들려고 작정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임금이 되었고, 그들이 작정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듯 그들의 위세가 드높았다.

그럼에도 로마인들은 아무도 왕관을 쓰지 않고, 위엄 있게 보이려고 자주색 천을 두르지 않았다. 그들은 원로원을 세워, 삼백이십 명의 의원들이 날마다 백성의 문제를 끊임없이 논의하여 잘 다스리게 하였다. 또 해마다 한 사람을 뽑아[10] 백성을 다스리고 온 나라를 통치하게 하였다. 백성은 모두 그 한 사람의 말을 잘 듣고, 그들 가운데에는 시기나 질투가 없었다.
성경 마카베오기 상권 8장 11~16절
로마 공화국(Res Publica Romana)은 로마 왕국이 무너진 이후의 세워진 고대 로마공화정 체제이다. 기원전 510년 경 기존의 왕정을 폐지하고 450년 이후 로마 제국이 세워질 때까지 공화정을 유지했으며, 이러한 로마 공화정은 후대 공화주의 이념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아무래도 제정 시기의 로마가 세계사에 워낙 큰 족적을 남겼고, 관련 기록도 제정 쪽이 더 많다보니[11] 평가절하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도시국가 취급도 못 받는 변방에 불과했던 로마가 강대국이 된 것은 전적으로 공화정과 거기에 속한 여러 인재들 덕분이었다. 또한 공화국은 이탈리아 통일과 그리스 정복, 훗날 프랑스라 불리게 될 갈리아 정착지 건설, 한니발 전쟁에서의 승리와 북아프리카 개척, 게르만족과의 접촉, 페르시아계 세력과의 경쟁 구도 생성 등. 로마하면 생각나는 굵직한 사건들의 주역이었고, 이들의 행동과 그 여파가 21세기인 현재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2. 역사

2.1. 초기

공화정 성립 이후에도 로마의 군사적 강력함은 주변 국가들을 압도하였다. 이 때문에 라티움[12]에 있는 도시들은 라틴 연합을 맺은 채 대항했다. 로마는 홀로 연합군을 상대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압도하였고[13] 결국 카시아눔 조약(Foedus Cassianum)을 맺게 되었다. 이 조약에 쓰여 있는 내용은 로마가 힘들면 라틴 연합이 도와주고, 라틴 연합이 힘들면 로마가 도와준다는 것인데, 따라서 로마는 단독으로 이들 라틴 연합 전체와 동등한 입지에 서게 되었다.

이렇게 힘이 커지자 예전에 로마를 경시하던 에트루리아 지역까지 공격하게 되었고 결국은 유능한 장군인 카밀루스의 지휘 아래 기원전 396년 에트루리아의 이름난 도시인 베이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때 베이의 주민은 모두 학살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텅 빈 베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평민과 귀족들의 의견이 엇갈려 내분이 일어났다. 평민들은 로마 시민의 절반을 베이로 이주한 다음 살게 하여 또 다른 로마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런 급진적인 의견에 귀족들의 의견은 매우 부정적이었고 특히 전쟁을 지휘한 카밀루스가 이것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다.

그러자 평민들은 분개하였고 카밀루스를 횡령 혐의로 고발했다. 사실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시민들은 카밀루스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기로 작정했으므로 카밀루스가 무죄 판결받는 것은 가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카밀루스는 자진해서 로마를 떠났다. 그래도 재판은 열렸고 카밀루스는 벌금형에 처해졌다.

2.2. 카밀루스의 추방과 켈트족의 침공

로마의 귀족과 평민들이 이런 내분을 벌이는 동안 갈리아에서 켈트족이 남하하게 되었다. 켈트계 세노네스족은 베이 점령의 5년 뒤인 기원전 391년에 남하하였는데 이들은 우선 에트루리아 지역의 클루시움이라는 도시를 포위했다. 이때 클루시움은 베이 점령 이후 에트루리아 지역에 세력을 뻗기 시작한 로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로마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바빴고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켈트족에게서 방파제가 될 수 있었던 베이를 없앤 것은 로마 자신이었다.

브렌누스가 지휘하는 세노네스족은 로마로 진격했는데 당시 로마는 이미 라티움의 패권자였으나 귀족과 평민의 계급투쟁, 즉 베이에 제2의 수도 건설 여부에 대한 논쟁으로 군사력이 약해져 있었다. 급조된 로마군은 기원전 390년 7월에 벌어진 알리아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며 로마의 성문도 열려 있었다고 한다. 켈트계 세노네스족은 성 안으로 진입하였고 로마 시민은 싸울 수 있는 자들만 뽑아 로마 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로 올라가 농성하였다. 원로원 의원이더라도 싸울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가지 못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방어에 유리했으나 비좁았기 때문이다. 켈트족은 원로원 의원, 어린 아이, 여자 할 것 없이 죽이고 로마 시내의 건물들과 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살랐다. 그 결과 기원전 390년 이전의 로마 문서들은 모두 소실되었다.

켈트족은 로마 시내를 점거하긴 하였으나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로마인들이 계속 저항하였고, 켈트족은 떠돌아다니는 데 익숙해져 있어 도시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 몰랐다. 시체를 수로에 그냥 버려 더러워진 수돗물을 먹고 전염병까지 생길 정도였다. 로마인들은 도저히 방법이 없자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했고 켈트족은 300kg 황금을 받고 로마를 떠났다. 로마는 다시 카밀루스를 불러들여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떠나는 켈트족을 습격하여 분풀이를 하였다. 하지만 주변의 라틴 부족들은 로마를 깔보기 시작하였고 이후 주변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20년이나 소비하게 된다.

로마는 켈트계 세노네스족에게 당한 패배를 계기로 군대를 개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그리스식의 팔랑크스 스타일을 버리고 레기온 스타일로 진화한다. '팔랑크스'는 모든 무장한 병사들이 하나의 거대한 사각형을 이뤄 공격하는 방식이었으나 '레기온' 스타일은 작은 네모들로 큰 네모를 형성해 공격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레기온 스타일은 훗날 삼니움족과의 전투에서 발전한 뒤 칸나이 전투 직후 대대(Cohort)를 편성함으로써 완성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켈트족과 상대하였을 때, 우수한 무장을 갖춘 신분 높은 계급이 중앙에 위치하였는데 양익이 달아나면서 중앙이 포위, 그들이 모두 섬멸되었다.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후로 높은 계급의 생존률을 높히기 위해 계급순의 일렬로 배치하는 전술을[14]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로 나뉘는 마니풀루스 진형이었다. 즉 켈트에게 당한 패배는 로마가 레기온 스타일의 전투 방식을 창시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2.3. 라틴 전쟁

50년 후 라틴 연맹은 다시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데(라틴 전쟁) 그 이유는 라틴 연맹에서 함께 공화국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는데 로마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로마는 라틴 연맹보다 세력이 컸으므로, 굳이 권력을 나눠먹을 이유가 없었다. 결국 이 싸움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 로마는 라틴 연맹을 해체하고 동맹국으로 삼으며 새 라틴 동맹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때 로마가 점령한 라틴 도시국가들을 대한 태도는 고대 사회에선 매우 드물게 온건한 것이었다. 로마는 이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부여해주었고, 이들에게 투표권을 제외한 로마 시민으로서 누릴 권리인 '라틴 시민권'을 주었다. 게다가 이들에게 연공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단지 요구한 것은 전쟁이 났을 때 로마에게 보조병을 보냄으로써 협력하라는 것이었다.

2.4. 삼니움 전쟁

로마가 라티움 지역에서 가장 센 도시가 된 뒤 부하까지 거느리는 동안 아펜니노 산맥에 살고 있는 삼니움족 중 일부가 서쪽 평야 지대에 남하하여 비옥한 땅에서 살려고 마음먹었다. 이들은 로마가 버티고 있는 라티움 지역을 피해 라티움 지역의 바로 아래쪽의 평야 지대인 캄파니아 지역으로 "민족 이동"을 시작했다. 캄파니아 지역의 도시들이 라티움 지역의 보스인 로마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로마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부하들과 함께 삼니움족을 두들겨 내쫓고 캄파니아 지역 도시들도 동맹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삼니움족은 15년 뒤 대대적으로 캄파니아 지역을 공격했다(제2차 삼니움 전쟁). 이미 이 지역의 보스가 된 로마는 바로 이들을 요격하였는데 이번엔 호락호락하지 않아 이 삼니움족과 로마인의 전쟁은 무려 22년을 끌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2차 삼니움 전쟁 초기엔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전쟁 초기에 로마인들이 압도적인 승리를 연이어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거듭된 연승에 고무된 로마인들은 삼니움족의 본거지인 아펜니노 산맥으로 직접 진격해 이들을 궤멸시키기로 결심했으나, 두 집정관이 4개 군단을 이끌고 진격했다가 카우디움 협곡 전투에서 매복 부대를 만나 모두 생포되는 치욕을 당했다. 이 두 집정관과 그들의 군단병을 모두 생포한 삼니움 족장은 이들의 처우에 대해 고심했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들 군단병을 모두 처형하든지 아니면 모두 조건없이 풀어주라고 조언했다.

그 이유인즉 이들 모두를 처형하면 로마는 쇠약해질 것이고, 조건 없이 풀어주면 로마인들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 족장은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로마인들의 무장을 해제한 채 속옷 차림으로 멍에 밑을 기어가도록 한 뒤 로마로 돌려보냈다. 따라서 로마는 병력을 고스란히 보존하면서도 삼니움족에 대한 적개심을 맹렬히 키우게 된다.

로마인들은 산으로 올라가 삼니움족과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고 전략을 바꾸어 이들을 산 위에서 고립시키는 전략을 폈다. 즉 삼니움족의 도시들 중 산 밑이나 중턱에 있는 도시를 공략하고, 이들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평야 지대의 도시들을 공격해 로마의 동맹국으로 바꾸는 방법이었다. 이 전략은 성공적이어서 삼니움족은 계속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결국 삼니움족은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심지어 켈트족까지 끌어들여 로마와 결전을 벌였는데 로마는 센티눔 전투에서 이들 연합군을 쳐부수고 삼니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삼니움족과의 싸움 후 로마는 삼니움족의 전투 방식에서 많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 유명한 투창 '필룸'(복수형 '필라')과 사각 방패 '스쿠툼'도 삼니움족의 무기를 도입한 것이며,[15] 전투 방식도 크게 바뀌어 기존의 뻣뻣한 팔랑크스 편제를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유연하고 전략적인 움직임이 가능한 마니플-코호트 단위로 군대를 조직하는 법을 도입하게 된다. 이렇게 완성된 로마의 레기온은 나중에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를 박살내면서 그 우월성을 지중해 세계 만방에 알리게 된다.

2.5. 피로스 전쟁

삼니움 전쟁이 끝나자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마그나 그라이키아')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곧바로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과의 분쟁에 개입하여 이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로마는 투리이의 분쟁에 개입하여 그들에게 소규모의 병력을 파견했는데, 이때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 중 가장 강력한 도시였던 타렌툼의 영해를 지나게 되었다. 타렌툼과의 조약에는 이들의 영해를 로마 선단이 지나면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타렌툼은 이 로마 선단을 공격했고, 이 일에 분노한 로마는 타렌툼에 선전포고를 단행했다. 타렌툼은 그리스 서쪽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에페이로스 왕국에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에페이로스 왕국의 왕은 피로스 1세로 당시 지중해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장군이었다. 그는 로마를 격파하고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을 자신의 세력에 넣으려는 욕심으로 이것을 허락하면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이렇게 벌어진 피로스 전쟁에서 피로스 1세와 로마는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회전을 벌였고, 피로스 1세는 명성에 걸맞게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사자가 로마군 전사자의 7할에 이르렀으므로 원정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없었다. 이때 로마는 피로스 1세에 대항하여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고,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과 동맹 관계였던 시칠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공격했다. 로마와의 전쟁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 피로스 1세는 이를 핑계삼아 이탈리아를 떠나 시칠리아로 무대를 옮겼다.

피로스 1세는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여 연이은 승리를 쟁취했으나, 훗날 포에니 전쟁 때 증명되듯 해군없이는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했다. 카르타고 도시들을 공략할 때 카르타고 해군의 꾸준한 보급은 피로스 1세가 도시를 함락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피로스 1세는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에게 군자금을 요구했고, 그리스계 도시들은 이것에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리스계 도시들이 피로스 1세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고 카르타고의 해군력을 제압할 방법이 없게 되자 피로스 1세는 시칠리아 공략을 포기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되돌아 왔다.

피로스 1세가 시칠리아에 있는 동안 로마군은 전쟁에 대한 대비를 꾸준히 하여 피로스 1세의 병력을 훨씬 웃도는 군단을 편성하고 있었다. 피로스 1세는 이에 대해 로마군이 한 데 모이기 전에 각개격파하기로 결정하고 말벤툼에 머물던 로마 군단을 야습하기로 하나,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가 피로스 1세의 야습을 알아챘으므로 실패하고 피로스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피로스 1세는 결국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은 결국 로마에게 항복했다.

피로스 1세를 격퇴하고 이탈리아 남부마저 장악한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반도를 통째로 지배하는 세력이 되었다.[16] 그러자 이젠 시칠리아 섬과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당시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계 그리고 에트루리아계 도시들과의 내분에 개입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메시나를 점령한 마메르티니 용병과 시라쿠사와의 내분에 로마가 개입하자 시라쿠사의 히에로 2세는 카르타고와 연합하여 로마군을 상대하기로 했으나 시라쿠사군은 격파당해 로마에게 복속되었고, 카르타고는 로마에 전쟁을 선포하여, 시칠리아 섬을 놓고 두 나라는 23년에 걸친 전쟁(제1차 포에니 전쟁)을 치렀으나 로마는 우수한 병사의 질, 풍부한 전쟁 경험, 지휘관의 자질 등에서 카르타고에 우위를 점했으므로 승리를 거두었다.

2.6. 제2차 포에니 전쟁

20여 년 뒤에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함으로써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여기서 로마인들은 전쟁 초기의 연패와 칸나이 전투에서의 대패 끝에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배반하는 등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기회를 살리지 못한 카르타고 정부의 무능력과 라틴 동맹이 쉽게 와해될 것이라고 예상한 한니발의 전략적 판단 착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한니발 사이의 사절을 우연히 생포하는 행운 등이 겹쳐 전세를 역전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스페인을 정복하고,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여 자마 전투에서 숙적 한니발에게 칸나이의 굴욕을 그대로 돌려주며 2차 포에니 전쟁 역시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2.7. 지중해를 제패한 공화국

카르타고를 제압한 로마는 그리스 본토의 싸움에 개입하여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를 격파하고 마케도니아의 항복을 받아냈다(마케도니아 전쟁). 그 뒤, 아이톨리아 동맹의 요청으로 그리스에 개입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대왕 안티오코스 3세를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격퇴하고 소아시아까지 건너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그리스 지역의 패권을 확립했다. 그 뒤 필리포스 5세의 뒤를 이은 페르세우스 왕이 로마에게 다시 반기를 들었으나 로마는 피드나 전투에서 승리하고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를 멸망시켰다.

로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로마의 패권에 반발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그리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던 코린토스와 포에니 전쟁의 맞수였던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많은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림으로써 주변국에 본보기를 보였다. 그 이후로는 로마의 패권이 공고해져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세계의 전체를 소유하는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지중해를 제패하면서 로마는 당시 서양과 중동을 아우르는 수도가 되었으며 수많은 지식인, 부유층, 출세한 해방 노예, 새로 해방되는 무수한 노예들이 로마로 상경하였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전리품을 얻은 로마 정부는 도시를 세계 수도에 걸맞은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공사를 벌였고, 따라서 일자리를 찾아 유입되는 노동자들도 상당하였다. 로마 시의 인구는 급격히 팽창하였고 100만 명의 인구를 수용하는 대도시가 되어 지중해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2.8. 자영농의 몰락과 귀족의 발호

그러나 급속도로 이루어진 로마의 성장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기존의 파트로누스, 클리엔테스의 폐쇄적인 구조가 붕괴되어 버렸고, 전통적인 공화정의 탈을 쓴 귀족 정치의 기능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카르타고에서 수입된 라티푼디움 경영으로 인한 경제 구조의 대변화로 자영농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귀족들이 독점적으로 부와 재산을 쌓기 시작했다.

이렇게 귀족 정치를 지탱한 로마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의 파괴, 늘어난 부를 독점하는 원로원 계급, 그리고 증대하는 전쟁과 그에 따른 복무 기간의 장기화 등으로 인하여 평민 계급과 귀족 계급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일부 개혁가들이 이런 문제를 로마 공화정의 체제 내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문제점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부를 독점한 원로원 의원들은 그들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농장을 늘려나갔다. 이에 자영농들이 농장을 원로원 의원들에게 헐값에 팔고 그 돈을 탕진하는 이들이 많게 되어 자영농의 수는 꾸준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들 자영농들은 로마 군단의 중추를 이루는 중보병들의 구성원이었으므로 이들의 몰락은 로마 군단의 질적 하락을 초래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여기서 설명하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당시 로마의 경제 구조를 의도적으로 단순화해서 설명한 것으로 실질적인 분석에서는 전혀 다른 과정과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 당시에 보였던 사실과 인식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봐야 하는 문제도 많다.

2.9.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는 국유지를 파산한 무산자 계급들에게 무상으로 임대해주는 농지법을 발의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 국유지는 이미 임대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바로 법률에 밝은 원로원 계급으로 새로 로마의 소유가 된 국유지에 대한 정보와 가격, 그리고 이를 임대받기 위한 복잡한 절차를 훤히 꿰고 있었으므로 국유지가 생기면 곧바로 원로원 계급의 누군가가 임대를 금방 받아버리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가 나누어줄 국유지는 바로 이러한 땅들로 무산자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원로원 계급이 가진 땅의 임대권을 돌려받아야했다. 당연히 원로원 계급은 권력과 토지를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순순히 포기하려들지 않았다. 그라쿠스 형제는 이 반발을 무릅쓰고 농지법의 시행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호민관 권리를 사용해 민회에 회부하여 적법한 절차를 통해 가결시켰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크게 반발하며 그라쿠스 형제에게 당장 취소할것을 요구했으나 그라쿠스 형제가 거부하자 격분하여 그동안 로마 공화국이 규정한 헌법을 초월하는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이 두 형제와 그들의 지지자들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농지법을 무산시켰다.

두 형제 중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원로원이 최초로 발의한 Senatus Consultum Ultimum, 즉 원로원 최종 권고의 희생자가 되었는데 이 원로원 최종 권고는 일종의 긴급조치와 같은 것으로[17] 원로원이 원하면 모든 헌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어떤 처형도 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원로원이 사실상 공화정의 탈을 벗어던지고[18] 처음으로 귀족정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다.

원로원은 본래 헌법상 조언만 내릴 수 있는 기구였으며 입법권,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은 행사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19] 원로원의 칙령(decree of senate)이라는 것이 존재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집정관에게 권고하는 형태를 띠고 집정관이 이를 받아들여 행사하는 것으로써 그 효력을 가질 뿐이었다. 물론 원로원이 지금의 의회처럼 예산에 대한 결정도 내렸으나, 이것 역시 재무관들에게 고참으로서 방침을 내리는 형태로서 효력을 지녔다. 비록 원로원의 방침이 막강한 권한을 가져 집정관과 재무관들이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자발적인 집행이라는 시늉을 함으로써 권위는 있으나 권한이 없는 원로원의 모습을 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원로원 최종 권고'는 이런 '원로원의 칙령'과 전혀 다른 것으로 이것을 집정관이나 다른 이들이 따르지 않으면 반역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는 권고가 아닌 명령이었다. 즉, 원로원이 권한이 없긴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권한이 있을 수도 있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원로원의 이 명령은 로마 시민들이 가진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 그리고 호민관에 대한 신변 불가침권, 그리고 민회에서 가결되어 효력을 갖게 된 법안까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것이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상은 공화국 로마의 정치 체계 근본을 파괴하는 행위였다.[20]

원로원이 이러한 초법적인 행위로 그라쿠스 형제를 살해하고 강제로 법안을 폐기시켜 일단 급한 불을 껐지만 이후에도 몇 명의 호민관들이 원로원에 도전하다가 죽는 일들이 생겼다. 그렇게 잠시동안이지만 기존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2.10. 유구르타 전쟁

그 와중에 누미디아 왕국의 왕이었던 유구르타가 로마에 반기를 들어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낸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군제를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개혁함으로써 무산자 계급을 로마 군단으로 흡수한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당시에는 매우 적절한 개혁으로 여겨졌지만 문제는 이 개혁이 군벌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아 공화정을 무너뜨린 주범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근본적인 토지 개혁이나 자본 구조의 개편 없이 단순히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꾼 관계로 재원 마련은 물론 지휘관의 사병화가 촉진되었다.[21]

상승 장군으로 유명했던 마리우스는 자신이 이끌던 군단병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고, 결국 이런 지지가 사병화를 촉진해 국내 쿠데타도 성공시켰다. 이를 본받은 후계자인 술라와 폼페이우스 등이 쿠데타와 월권 행위를 저지르면서 공화정의 근간이 무너져 결국 제국으로 가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이 새로운 형태의 군단병으로 30여 만명에 달하는 게르만족의 이탈리아 남하를 격파함(킴브리 전쟁)으로써 모병 제도를 로마에 확립시켰다. 그러나 이들에게 전역 후에 지급했던 농토 배분 문제로 인해 다시금 원로원과 마찰을 겪게 되었고 마리우스파였던 호민관 사투르니누스가 그라쿠스 형제가 발의한 것과 똑같은 형태의 농지법, 즉 국유지를 마리우스 군단병에게 퇴직금으로 나눠주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하다 다시 원로원의 반발로 인하여 목숨을 잃게 되었다. 마리우스는 현직 집정관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해 신뢰를 잃게 되어 정치적으로 실각하고 만다.[22][23]

2.11. 로마 내전

그 뒤 현재 튀르키예 지역에 있는 폰토스 왕국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가 로마의 비티니아 속주를 침공하는 일이 발생했다(미트리다테스 전쟁). 이에 현직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군단을 편성했으나 마리우스는 자신의 옛 부하들을 움직여 군단 지휘권을 현직 집정관이 아닌 마리우스가 갖는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켰다. 이에 분노한 술라는 놀라에서 편성한 군단을 이끌고 수도 로마를 점령하고 마리우스 파를 제거한 뒤 미트리다테스 6세와 싸우러 떠난다. 하지만 술라가 떠나자 군사력이 없던 로마를 마리우스가 점령하였고 마리우스는 원로원 의원들과 그들의 지지자를 모두 학살했다. 그러나 마리우스가 겨우 보름 만에 사망하면서 마리우스파는 구심점을 잃게 된다.

그 뒤 로마는 술라와 마리우스파의 내전에 휩싸였다. 미트리다테스 6세와 강화를 맺고 돌아온 술라는 마리우스파의 저항을 진압하고 로마를 점령한 뒤 이들을 대거 숙청했다.# 그 뒤 로마 원로원 귀족들의 독재는 계속되었으나 술라의 부하였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술라의 개혁[24][25]을 무효화하고 더불어 민회에서 제정된 법은 원로원의 동의가 없더라도 효력을 갖는 것을 골자로 하는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시켰으며[26] 또한 이들은 호민관과 연합하여[27] 원로원과 대놓고 대립하는 등[28] 이 무렵에 이르면 원로원 귀족들의 정당성은 상당 부분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던 민중파(구 마리우스파)의 일부 역시 로마에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인데, 그는 젊은 시절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또한 딱히 원로원에 반대하는 정책을 입안한 적도 없었으므로 원로원 의원들이 그를 경계했지만 딱히 적대하지는 않았다.[29]

카이사르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부임한 히스파니아 서부 지역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당시 동방 원정을 끝내고 마리우스 때와 마찬가지로 퇴직금으로 농지를 배분해야 하는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던 폼페이우스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막대한 재력을 가진 크라수스까지 끌어들여 삼두정치로 결속을 맺은 뒤 폼페이우스의 지원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어 농지법을 통과시켰다.[30]

2.12. 카이사르의 내전

그 뒤 카이사르는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여 8년간의 기간 동안 갈리아 전역을 로마 패권하에 제패하는 업적을 쌓는다.(갈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뛰어난 정치적인 수완과 군사적 업적으로 인한 높은 명성을 극도로 경계한[31]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임기 종료 뒤 군사 지휘권을 반납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집정관 선거에 나서라는 요구를 했다. 카이사르는 군사 지휘권을 반납하는 순간 정적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을 알았다. 지휘권을 반납하고 이탈리아 땅을 밟는 그 즉시[32] 카이사르가 선택할 길은 사실상 원로원 최종 권고에 의해 맞아죽든가[33] 들고 일어나든가 둘 중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원로원에 군사 지휘권을 유지한 상태로 출마하는 등 여러 가지 타협안을 제시하였으나 원로원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저항도 제대로 못 하고 잡혀 죽은 그라쿠스 형제와는 달리 군대를 이끌고 있었고. 또, 8년간에 걸쳐 갈리아를 평정했다는 명분도 있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고 온 자신에 대한 원로원의 부당한 처우를 로마 시민들에게 호소하며[34] 한편으로는 자신의 갈리아 원정군을 소집하여 이탈리아 본국으로 쳐들어오니, 이리하여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생했다.

2.13. 제정의 시작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그리스에서 원로원 세력의 군대를 연파하며,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사실상 로마 공화정은 종말을 고하고 제정이 시작되었다.

다만, 카이사르 본인이 제정을 시작할 생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카이사르는 생전에 제정으로 가겠다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고 황제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전에 암살당했으니 말이다. 물론,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으로서 활동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로마 역사에도 이미 여러 번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원로원 체제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었고 스스로 황제가 되는 왕관을 거부하는 정치적인 제스처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로마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꾼 것은 사실상 아우구스투스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성립시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카이사르에게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부연하자면 반대로 카이사르가 암살당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성립시켰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라고 해도 카이사르처럼 암살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즉, 로마가 제정으로 가게 된 배경에는 카이사르와 비교해도 원로원파의 지분도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셈이다. 애시당초 민중파 정치가들을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마구 죽여댔으니까 그들도 죽지 않으려면 뭔가 보험을 걸어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의 경우는 그것이 관용이었으나, 공화파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암살당했으므로 그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로서는 관용과는 다른 보험을 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사자인 카이사르는 그가 이 될 것을 두려워한 원로원파에게 암살당했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원로원은 물론이고 공화국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35] 로마는 또 다시 내전에 휩싸였다. 카이사르의 양자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정리하고 원로원으로부터 세 가지 권리(로마군 전체에 대한 임페리움, 민회 거부권이 포함된 호민관 특권, 그리고 제1시민 프린켑스 칭호)를 수여받아 최초의 황제가 되어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로써 로마 공화국이 종언을 고하고 로마 제국이 새로이 출발했다.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제국 시대, 심지어 서로마가 망한 후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제국에 대한 자칭 및 타칭으로 공화국(res publica)라는 용어가 쓰였다. 8세기까지도 서방의 저술가들이 자국도 아닌 동로마를 가리켜 '(신성한)공화국' 등으로 높여 불렀다고 한다.[36] 참고로 8세기 후반에는 제국 대신 교황령이 '공화국'으로 지칭되었다고 한다.[37] 800년 카롤루스 대제의 로마 황제 대관 이후 서방에서 동로마 제국을 진짜 로마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게 된 것의 전조현상이 이미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 라틴어 'res publica'에서 영어 'republic'이 나왔고 그 일반적인 번역어가 '공화국'이기 때문에 편의상 공화국으로 썼지만 이 '공화국'은 '군주가 없어야만 함'을 함의하는 근현대적인 용례가 아니다. res publica는 직역하면 공공의 것, 의역하면 '국가공동체' 쯤 된다. 분명히 더 깊은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국가'로 번역하면 state, country 등과 구분이 안 되고, 그렇다고 공공의 것이기 때문에 그냥 '공동체'로 번역하면 그 공동체의 종류에는 신앙공동체, 상인공동체 등도 있기 때문이다.[38]

3. 정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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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로 번역하면 'The Senate and People of Roma'이다. '원로원과 시민들'은 국체이며 '로마'가 국명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Republic of Korea'를 예로 들 경우, Republic이 국체고 Korea가 국명이 되는 것과 같다.[2] 초기 언어 및 공용어[3] 프랑스 아키텐 지방에서 사용된 고대어. 현대 바스크어의 직접적인 조상이다.[4] 이베리아 반도의 선주민들이 사용한 언어. 현재는 사멸했고 로망스어군의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 교체되었다.[5] Punic. 페니키아어의 카르타고식 변형이며, 로마군이 카르타고 시를 파괴한 후로도 5세기경까지 북아프리카(그 중에서도 마그레브 일대)에서 라틴어와 혼용/병용되었으며, 나아가 그 지역 로마인들의 라틴어에도 영향을 주었다.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후자의 케이스에 속하는데, 카르타고어 악센트와 억양이 많이 들어간 라틴어를 썼다고 한다.[6] 5세기 이후 콥트어로 계승[7]사르데냐 지방의 누라기어, 현 리구리아 지방의 고대 리구리아어, 현 베네치아 지방의 베네티어, 현 시칠리아 지방의 시켈어, 중남부 이탈리아의 삼니움족이 사용한 오스크움브리아어[8] 포르투갈 지방에서 쓰이던 루시타니아어, 이베리아의 켈트족들이 사용하던 켈티베리아어[9] 라틴어와 그리스어, 아람어를 제외하면 해당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다.[10] 실제로는 두 명의 집정관이 있었고 이 부분은 저자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한 명인 경우가 없지는 않은데 독재관이 있었던 시기의 경우다. 독재관은 나라가 비상한 위기에 처했을 때만 선출하였으며 임기가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오히려 독재관은 임기를 꽉 채우는 것보다도 임기 내에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서 그만두는 것이 유능함 및 공화정 체제에 대한 존중의 징표로서 칭송받았다.[11] 시기상 제정이 공화정보다 후대라 기록이 더 많이 남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제정 시기에 받아들인 기독교가 기록 문화에 호의적이었던 덕도 보았다.[12] 라티움은 로마와 그 주변 지역을 뜻한다.(지금도 이 지역을 라치오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라티움을 현대 이탈리아어로 발음한 것이다.) 로마를 끼고 흐르는 강인 테베레 강의 북쪽을 에트루리아 지역이라고 부르고 그 남쪽이 라티움 지역이었다. 라티움 지역 밑에는 릴리스 강이 흐르는데 그 남쪽을 캄파니아 지방이라고 부른다.[13] 이는 도시들이 라틴 연합을 맺을 때쯤 이미 로마는 라티움의 절반 정도를 지배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체급 자체는 이미 대등하였으나 시스템의 통일성과 효율성에 있어서 연합군은 로마를 당해낼 수 없었다.[14] 물론 나중에는 보통 계급과 상관없이 전투 경험과 나이 순으로 3줄로 서게된다.[15] 참고로 나머지 3신기 중 하나인 '글라디우스'는 훨씬 나중에 이베리아 반도의 켈티베리안으로부터 도입한 것이다.[16] '갈리아 키살피나'로 불리던 북이탈리아는 제외.[17] 긴급조치는 헌법 위반이기는 했어도 최소한 법전에 적혀 있기는 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초법적인 권한이었던 원로원 최종권고는 그만도 못한 셈이다.[18] 이 시점부터 로마는 철저한 귀족정이었다.[19] 입법권은 호민관과 민회가, 군사권과 행정권 등은 집정관이나 재무관 등이, 사법권은 법무관이 맡는 식으로 각각의 권한은 선거로 선출된 관료들이 갖고 있었다.[20] 무엇보다 이 원로원 최종권고는 로마법에도 없는 초법적인 행위였다.[21] 물론 애시당초 중산층이 무너진 데다가 이를 되돌릴 개혁을 무시했으니 마리우스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당장 군대는 필요한데 정작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이상 모을 수가 없기 때문에 벌이진 일이다.[22] 마리우스든 술라든 어디까지나 무골일 뿐 당시 로마가 필요로 하던 정치가는 아니어서 혼란을 수습하지는 못했다. 거기다 마리우스는 타이밍 좋게 죽는 바람에 본인은 크게 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를 따르던 민중파에게는 그야말로 재앙과도 같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23] 물론 암살당했다든가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평범한 병사였다. 애시당초 마리우스는 사망 당시 나이가 72세라 충분히 오래 산 편이었다. 문제는 마리우스 사후 민중파에는 군사적 재능을 가진 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24] 본인은 공화정을 지키려고 생각했으나 그 수단으로 공화국의 전통을 부정하는 요소를 그대로 사용한 역설적인 내용이었다.[25] 대표적인 것이 바로 로마 시민과 민회의 권한을 축소시킨 것. 애시당초 공화정은 민회에서 하는 시민의 투표가 핵심인데 시민의 권한을 줄이는 것은 쓸모도 없고 공화국 정신도 부정하는 것이다.[26] 말할 것도 없이 이 법을 폐지한 사람 또한 술라였다.[27] 로마의 호민관은 둘에게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대신 막강한 군사력의 보호를 받았다. 말할 것도 없이 호민관들은 신체 불가침권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원로원 최종 권고에 무력화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나 크라수스같은 세력가들에게 기대서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던 것.[28] 실제 이유는 원로원이 자신들의 권력 행사에 제약을 거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사실 이들은 로마에서도 신참에 해당하는 쪽이라 명문 귀족 가문과는 잘 맞지 않았다. 크라수스같은 경우는 주로 기사 계급을 대표했고 폼페이우스는 군부를 대표했기 때문.[29] 물론 실제로는 뼛속까지 민중파였던 인물로 대놓고 술라에게 개겼던 전력이 있던 인물이 바로 카이사르였다. 그렇다보니 원로원에 직접 대놓고 반대하진 않았지만(일단 카이사르 본인도 원로원 의원이다.) 원로원 최종권고에 해당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끝까지 반대하였다. 물론 카토같은 골수 원로원파는 카이사르에게 적대하였고.[30] 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라쿠스 형제의 안은 너무 급진적이라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어서 주로 폼페이우스의 퇴직병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식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이후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퇴직병에게 일정한 액수의 퇴직금을 주는 법령을 제정함으로써 이 논란은 종지부를 맺게 된다.[31] 애시당초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대립하는 민중파의 거두였다.[32] 이전에는 로마 영토부터라고 했지만 로마 영토가 아니라 이탈리아 부터다. 원래 도시국가 로마 내에는 군대를 들이는 것은 금지되었고(물론 술라가 진작에 그 전통을 파괴했지만) 교외에서 혼자 들어오는 것이 전통이었으다.(물론 정말로 혼자 오지는 않았다. 당연히 지휘관 정도면 급수가 있으니 자기 추종자나 가솔들과 같이 왔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에서 불후의 명언인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한 것도 그 루비콘 강이 바로 이탈리아의 영토 경계선이기 때문이었다. 즉, 이탈리어 영토부터 혼자 오라는 것은 뜬금없는 소리고 말할 것도 없이 그 도중에 카이사르를 암살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로마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이런 짓을 실컷 자행해왔던 전적이 있었다.[33] 원로원에 의한 공공연한 암살이나 마찬가지다.[34] 당시 카이사르의 부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보다 한발 앞서 로마로 돌아와 호민관에 선출되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카이사르의 집정관 선거를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35] 당시 로마군은 카이사르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외에도 암살이라는 수단을 좋지 않게 생각한 자들도 있었으며, 카리스마가 있는 카이사르 개인에게 매력을 느낀 자들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당시 포에니 전쟁 이후로 로마 내부의 모순 상당 부분을 카이사르가 해소한 점도 있어서 당시 카이사르는 로마인들과 로마군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36]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11p, 원문: 'Between the sixth and eighth centuries, the Eastern Empire could still be called res publica or sancta res publica by western authors.'[37]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3p, 원문: 'Then, in the later eighth century, res publica was used for the sphere of political domination that the popes tried to carve out of former Byzantine possessions.'[38] 어떻게 보면 테란 자치령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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