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3:12:40

사두정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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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3.1.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시해와 갈레리우스의 이탈리아 원정3.2. 막시미아누스의 축출과 카르눈툼 회담3.3. 콘스탄티누스 1세-막센티우스 동맹의 결렬과 갈레리우스의 죽음3.4. 콘스탄티누스 1세 VS 막센티우스3.5. 리키니우스 VS 막시미누스 다이아3.6. 콘스탄티누스 1세 VS 리키니우스3.7. 리키니우스 처형과 내전의 종결
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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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두정치가 자체적인 모순으로 인해 붕괴되자, 로마 제국의 패권을 놓고 여러 황제가 맞붙으면서 306년부터 324년까지 전개된 대규모 내전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로마 제국을 재통합했다.

2. 배경

284년, 로마 제국의 동방 정제 누메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원정을 중단하고 귀국하던 중 마차 안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 후, 근위대장 디오클레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로 개명하고 새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서쪽으로 진군해 285년 3월 서방의 황제였던 카리누스를 물리치고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지난 50년간 수많은 황제가 비명에 죽었고, 황제 혼자서 외세의 침략과 내란을 막기에는 제국이 지나치게 넓다는 게 분명해졌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혼자서 제국을 이끄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제국을 분할하여 군사적 역량이 뛰어난 이들에게 각지의 방위를 맡기기로 했다.

우선 카리누스를 물리친 직후, 친구 막시미아누스를 서방의 카이사르(부황제)로 임명하여 라인 전선과 아프리카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도나우 전선과 시리아 전선을 사수했다. 이후 286년에 막시미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정황제)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카라우시우스가 브리타니아에서 독립하여 '브리타니아 제국'을 선포하고, 아프리카 속주에 대한 베르베르인들의 침략이 갈수록 거세진 데다, 도나우 강변의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의 동태도 심상치 않아서 두 명의 황제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분명해지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93년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두 명의 부제를 선임했다.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지명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지명했다. 이른바 사두정치의 시작이었다.
파일:Prima_tetrarchia_Diocletianus.png
293년부터 305년까지의 사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수도를 니코메디아로 정하고 아나톨리아 반도, 폰투스, 시리아, 이집트 방위를 맡았다. 동방 부제로 지명된 갈레리우스는 수도를 시르미움으로 정하고 판노니아, 모이시아, 트라키아, 일리리아를 맡았다.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는 수도를 메디울라눔으로 정했으며, 이탈리아, 아프리카, 히스파니아를 맡았다. 그리고 서방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수도를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으로 정하고, 브리타니아, 갈리아, 비네엔시스를 맡았다. 두 정제는 부제들과의 정치적 결연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부제들의 양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또한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와 자기 딸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를 결혼시켰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역시 갈레리우스와 자기 딸 갈레리아 발레리아를 결혼시켰다. 다만 국방을 제외한 분야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선임 황제라는 뜻의 '세니오르'(SENIOR)를 칭하며 거의 단독으로 결정하고 다른 황제들을 지도했다.

이러한 조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는 라인 강 전선에서 활개치는 게르만족을 물리치고 카라우시우스의 반란을 진압해 브리타니아를 로마 제국에 복종시켰으며, 막시미아누스는 아프리카 속주에서 준동하는 베르베르인들을 쳐부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킨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도미티아누스를 쳐부수고 흐트러진 행정을 재정비했으며, 갈레리우스는 도나우 강 전선을 안정시키고 아르메니아, 아나톨리아 일대를 공략하던 나르세스 1세의 페르시아군을 대파하고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한 뒤 <니시비스 평화 협약>을 강요하여 아르메니아 왕국이베리아 왕국이 로마의 봉신이 되는 걸 인정하게 만들고 메소포타미아 북부 일대를 로마 제국에 할양하도록 했다.

그후 제국의 질서를 개편하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해 큰 성과를 거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3년 11월 20일 세 명의 황제와 함께 로마에서 그동안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로마 시민들이 자신을 친근하게 대하려 하자, 일반 시민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절대적인 권위를 추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에 있는 게 불편해져서, 303년 12월 20일에 로마를 떠났다. 이후 304년 1월 1일 라벤나에서 집정관 취임 의식을 거행한 뒤 도나우 강으로 향한 후 갈레리우스의 대 카르피족 원정에 참여했다. 이때 걸린 가벼운 병이 악화되자, 늦여름에 니코메디아로 돌아갔다. 304년 11월 20일 니코메디아 궁전 인근에 열린 서커스 개막식에 참석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후 궁궐 깊숙한 곳에서 나오지 않았고, 니코메디아 전역에 그가 이미 죽었으며 갈레리우스가 권력을 온전히 장악할 때까지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305년 3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대중 앞에 모습을 다시 드러내면서 소문이 거짓이라는 게 확인되었지만, 몸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그해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들과 근위대 장교들, 군단 대표자들을 소집한 뒤 유피테르 신전의 조각상 앞에서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하고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와 갈레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선임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리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발적으로 제위에서 물러난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의 성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카이사르로 지명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뜻밖에도 갈레리우스의 오랜 부하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와 갈레리우스의 외조카였던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카이사르로 지명했고,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무시당했다.

4세기 경의 기독교 역사가였던 락탄티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갈레리우스의 압력에 굴복하여 퇴위했으며, 후임 인선 역시 갈레리우스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후임 카이사르로 지명한 선택에 갈레리우스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실제로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 황제 퇴위 이래 적어도 영향력은 엄연히 갈레리우스보다 선임 황제로서 아우구스투스 세니오레스였던 콘스탄티우스를 압도했다. 서방 부제가 오랜 부하였고 동방 부제가 생질이었으니..... 다만 콘스탄티누스를 인질로 삼고 여러 전투에서 선봉에 내세워서 콘스탄티누스를 학대했다는 얘기는 기독교도들의 왜곡일 소지가 높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 곁으로 돌아갔을 때도 늘 선봉에 나섰고 훗날 부제가 되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진 이후에도 로마인들이 보기엔 정신 나갔다 싶을 정도로 전열 맨 선두에 나서서 적병을 격살하길 즐기는 전형적인 맹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들을 돌려보내달라는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이 핑계 저 핑계 댄 건 사실로서, 이유는 유능한 맹장인 콘스탄티누스가 꽤나 쓸만해서 보내주기 아까워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콘스탄티우스 또한 아들 콘스탄티누스와는 달리 나서기를 삼가는 진중한 스타일이었던지라, 이렇게 시작된 2차 사두정치는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의 주도하에 잘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던 306년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된 지 1년만에 브리타니아의 북부 변경이었던 에보라쿰에서 병사하자, 이민족 족장들 및 현장에 있던 장병들이 1년 동안 외적에 맞서 용맹을 떨친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 즉 새로운 서방 정제로 추대했다. 이는 사두정 체제 붕괴의 서막이 되었다. 락탄티우스에 따르면,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휘장과 의복을 갖춘 초상화를 받아보고 불속에 집어던졌다고 한다. 그는 처음엔 군대를 동원하여 서방 정제를 참칭한 콘스탄티누스를 격멸하려 했지만, "이런 일로 내전을 벌이는 건 무익한 짓이다"라는 측근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콘스탄티누스에게 "카이사르로 인정해줄 테니 아우구스투스 직위는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일단 정통성을 인정받는 게 중요했기에 받아들였다. 이후 서방 부제 세베루스가 당연히 정제로 승격하면서 히스파니아 속주들을 받아갔고, 갈레리우스는 그 시점에서 아우구스투스 세니오레스가 된다.

그렇게 콘스탄티누스가 카이사르, 곧 서방 부제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로마에 있었던 전임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격노했다. 20년간 카이사르로서 아버지 밑에서 일하다가 1년 정도 아우구스투스를 맡았던 자의 아들은 카이사르가 되었는데, 20년 세월을 아우구스투스로서 서방 세계를 이끌었던 아버지의 장자인 자신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여겼다. 여기에 장군들이 제국을 4개로 분할하고 수도를 별도로 정하여 통치를 행사하느라 졸지에 들러리가 되어버린 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 그리고 로마 시를 지키는 역할만 맡고 있었던 프라이토리아니의 불만도 매우 컸다.[1]

그러던 중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가 로마 시 역시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처럼 속주세를 내게 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시민들은 격분했다. 결국 306년 10월 28일, 프라이토리아니 대원들이 서방 정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파견한 로마 시장과 몇몇 고위 행정관들을 죽이고 막센티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뒤이어 루카니아에 은거하고 있었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도 아들의 요청에 응하여 로마로 달려간 뒤 황제의 의복을 입고 원로원으로부터 "두 번째 아우구스투스"로 지명되었다. 이리하여 장장 20년 가까이 이어지는 내전이 발발했다.

3. 전개

3.1.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시해와 갈레리우스의 이탈리아 원정

막시미아누스 부자가 로마 원로원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칭했다는 소식을 접한 서방 정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는 메디올라눔에서 로마로 남진했다. 그의 군대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아래에 이르러 포위하자, 막시미아누스는 병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귀순을 권고했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의 병사 대부분은 지난날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숱한 전장에서 활약한 바 있었다. 존경하는 황제를 적대할 수 없었던 그들은 심히 동요했고, 막센티우스는 이 때를 틈타 그들에게 상당량의 뇌물을 찌르며 귀순을 종용했다. 결국 대다수 병사들이 막시미아누스 부자 편을 들어버렸고, 세베루스는 동북쪽의 라벤나로 도주했다.

막시미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라벤나를 포위한 뒤 항복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고 정중히 대우하겠다고 제안했다. 세베루스는 이 약속을 믿고 307년 3월 또는 4월에 귀순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세베루스는 얼마 안가 피살되었다.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제를 참칭하고 정당한 황제를 살해한 반역자 막센티우스를 토벌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일리리아와 동방에서 집결한 정예병들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로마로 가는 길목마다 강력한 요새가 세워져 있어서 진군에 애를 먹었다.

갈레리우스는 마음을 바꿔 찬탈자인 막센티우스와 화해하기 위해 2명의 장교를 파견했지만, 막센티우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막센티우스가 갈레리우스에게 황제로 인정받으려 했지만 갈레리우스가 이를 거부했고, 이를 인정받지 않은 상태로 물러나면 향후 신변에 위험이 생길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막센티우스가 그의 병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찔러주면서 일리리아 군단 상당수를 탈영시키자, 갈레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철수하면서 퇴각로 주변의 시골들을 모조리 약탈했다. 이에 갈레리우스에 대한 민중의 인기는 추락했고, 막센티우스는 이탈리아에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3.2. 막시미아누스의 축출과 카르눈툼 회담

막센티우스가 갈레리우스를 상대로 선전하는 사이,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로 가서 서방 부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의논하고 자신의 어린 딸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를 콘스탄티누스 1세와 결혼시켰다. 그 대가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장인이 된 막시미아누스와 동맹을 체결하고 이탈리아에서의 막센티우스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트리어에서 파우스타와 결혼식을 올린 후 아우구스투스(서방 정제)를 칭했다. 다만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와 대적하는 건 원하지 않았기에, 공식적으로는 막센티우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로 귀환한 막시미아누스는 아들이 권력을 온전히 장악하고 자신은 들러리로 선 것에 불만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 그는 유일한 황제가 되기로 작정하고, 막센티우스가 제국을 약화시켰다고 비난하며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막센티우스의 자의(보라색 황복)를 강제로 벗기려 시도했다. 이는 군대가 본인을 지지할 거라는 착각으로 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미 막센티우스를 지지하고 있었던 군대는 막시미아누스에게 반발했고, 막시미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를 떠나야 했다. 막시미아누스는 308년 초에 갈리아로 가서 사위인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의탁했다.

308년 11월 11일, 갈레리우스는 정국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를 불러 다뉴브 강 상류의 카르눈툼에서 회담을 열었다(카르눈툼 회담). 막시미아누스는 이 자리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정계 복귀를 권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단호히 거부하고 오히려 그에게 정계에서 은퇴하라고 요구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대한 존경심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던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설득되어 정계에서 은퇴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막시미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의 뜻에 따라 서방 정제로 리키니우스를 삼는 데 동의했다. 여기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서방의 부제로 돌아가고, 막센티우스는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갈레리우스의 계획은 실패했다. 신임 서방 정제로 리키니우스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집트와 시리아를 다스리던 동방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지금까지 아무런 공적도 없었던 자가 어떻게 단번에 아우구스투스가 될 수 있느냐?"라며 자신이 정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 역시 정제에서 부제로 돌아가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리키니우스가 서방에 오는 것도 막았다. 결국 리키니우스는 달마티아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한편, 아프리카 속주 대리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알렉산데르는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는 막센티우스의 요구를 거부하고 군대의 지지를 받아 황제를 자칭했다. 이에 막센티우스는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 루피우스 볼루시아누스와 제나스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했고, 알렉산데르는 309년 또는 311년경에 체포된 뒤 교살당했다. 막센티우스는 알렉산데르 지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3.3. 콘스탄티누스 1세-막센티우스 동맹의 결렬과 갈레리우스의 죽음

310년, '서방 정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프랑크족이 라인 강을 도하해 갈리아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출정했다. 이때 그는 처남인 막센티우스가 남쪽에서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장인인 막시미아누스에게 일부 병력을 맡겨 아를에서 수비하게 했다. 그런데 막시미아누스는 아를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전사했다며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즉 사위를 배신한 것이었다. 막시미아누스는 모든 병사에게 뇌물을 줬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그의 행위를 배신으로 간주했다. 결국 군대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막시미아누스는 아를을 떠나야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프랑크족과의 전투를 중단하고 재빨리 남하했다.

막시미아누스는 마실리아(현 마르세유)에 숨었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의 군대가 마실리아를 에워쌌다. 마실리아 주민들은 막시미아누스보다는 콘스탄티누스 1세를 따르는 쪽을 선택하고 막시미아누스를 넘겨줬다.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로부터 강하게 규탄받고 자살을 강요당했다. 결국 막시미아누스는 310년 7월 목을 매 자살했다.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막센티우스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동전을 주조하고 아버지의 헌신적인 아들로서 매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복수하겠다고 선언했다.

311년 4월 말이나 5월 초,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가 중병에 걸렸다. 그는 311년 4월 30일 니코메디아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종식하고 관용을 베풀겠다는 칙령(<니코메디아 칙령>)을 반포한 뒤 6일만에 온몸이 썩어가는 질환으로 붕어했다. 서방 정제 리키니우스와 동방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즉시 갈레리우스가 다스렸던 영역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리키니우스는 발칸 반도 전역을 차지했고,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소아시아를 확보했다.

3.4. 콘스탄티누스 1세 VS 막센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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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에 전력을 쏟기 전에 서방 정제 리키니우스와 손을 잡기로 하고, 311/312년 겨울 자신의 누이였던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를 리키니우스와 결혼시켰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이에 대응하여 로마에 사절을 파견해 막센티우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그를 황제로 공인하겠다고 제안했고, 막센티우스는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리키니우스 연합과 막센티우스-막시미누스 다이아 동맹이 결성되었다.

312년 봄, 콘스탄티누스 1세는 4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처음 마주친 요새화된 마을 세구시움을 재빨리 함락시켰지만(세구시움 전투), 지난날 갈레리우스가 약탈을 자행해 주민들의 원한을 샀던 걸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병사들에게 마을을 절대로 약탈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그들을 친근하게 대해 민심을 얻었다. 이후 진군을 이어간 그는 아우구스타 타우리노룸(오늘날 이탈리아 투린) 서쪽에서 막센티우스의 중무장한 기병대와 맞붙어 크게 이겼다(아우구스타 타우리노룸 전투). 토리노는 자신들에게 도주해온 막센티우스의 병사들을 받아들이는 걸 거부하고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성문을 열었으며, 북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사절을 보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2년 여름 중반까지 메디올라눔에서 군대를 쉬게 한 뒤 브리샤(오늘날 이탈리아 브레시아)로 이동해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적군을 가볍게 격파한 뒤(브리샤 전투) 베로나로 진격했다. 베로나 방면군 사령관 뤼리키우스 폼페이아누스는 아디게 강으로 둘러싸인 베로나에서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마을 북쪽에 소규모 부대를 보내 눈에 띄지 않게 강을 건넜다. 이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폼페이아누스가 대규모 파견대를 보냈지만 오랫동안 게르만족과 혈투를 치르면서 압도적인 전투력을 갖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소규모 부대에 격파당했다. 콘스탄티누스군은 베로나를 포위하여 식량을 수급할 여지를 박탈했다(베로나 전투).

폼페이아누스는 극비리에 베로나를 빠져나온 뒤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서 베로나를 구출하려고 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본대에 포위를 계속 이어가게 한 뒤, 자신은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폼페이아누스와 대적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폼페이아누스는 전사했고, 그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베로나는 곧 항복했고, 아퀼레이아, 무티나, 라벤나가 뒤를 이었다. 막센티우스는 압도적인 전투력을 과시하며 밀고 내려오는 적과 정면 대결하지 않기로 하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앞세워 수성전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천천히 나아가면서 로마 주변의 도시들을 하나둘씩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자, 로마 시민들이 동요했다. 312년 10월 27일, 군중들이 전차 경주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무적이라고 외치며 막센티우스를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참고로 이것이 조롱인 이유는 막센티우스가 봉기한 후 원로원으로부터 '무적의 프린켑스'라는 칭호를 수여받고, 이에 맞게 본인도 군신 마르스를 섬겼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를 격퇴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센티우스는 이런 상황에서 수성전을 벌였다가는 내부의 배신자가 성문을 열고 항복할 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야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312년 10월 28일, 그는 로마에서 출진하여 밀비우스 다리와 티베르 강을 후방에 둔 채 적과 대면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 크리스푸스의 가정교사로 일했던 락탄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밤에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병사들의 방패에 '키로 십자가'(XP)를 새기게 했다고 주장했다. 에우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에서 황제가 생전에 자신에게
"병사들과 함께 빛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모양의 형상이 하늘에서 구현된 걸 목격했으며, 그 밑에는 '이로써 승리하리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라고 고백했다고 기록했다. 다만 황제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때 그리스도의 상징이 담긴 표식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벌어진 역사적인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는 상대보다 2배 많은 병력을 동원했지만 현격한 전투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우수한 기병대가 막센티우스의 기병대를 격파한 뒤 적 보병대의 측면을 공격해 그들을 티베르 강으로 밀어냈다. 병사들은 황급히 밀비우스 다리를 향해 도주했으나, 다리가 중간에 무너지는 바람에 수많은 이가 익사했다. 막센티우스는 말을 타고 있다가 병사들에게 밀려 티베르 강으로 떨어진 뒤 익사했다. 그의 시신은 나중에 강에서 건져진 뒤 수급이 베어져 로마 거리를 행진한 후 카르타고로 보내졌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시에 입성한 뒤 승리를 선포하고 원로원으로부터 서방의 황제로 인정받았다.

3.5. 리키니우스 VS 막시미누스 다이아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만나 향후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313년 2월 3일 <밀라노 칙령>을 반포해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인들에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기간 동안 압류된 모든 재산을 돌려주기로 결의했다. 한편,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막센티우스가 몰락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공세를 감행했다. 313년 4월, 막시미누스는 7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시리아를 떠나 비티니아에 도착한 뒤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비잔티움을 포위 공격해 11일만에 입성했다. 이후 헤르클레아를 장악한 후 전초기지로 삼았다.

리키니우스는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밀라노를 급히 떠나 30,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폴리스에 이르렀다. 313년 4월 30일, 양군은 아드리아노폴리스 근교의 치랄룸(Tzirallum)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우수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던 리키니우스의 군대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두었으며,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노예로 위장한 채 소아시아로 도주했다(치랄룸 전투).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소아시아 남부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병력을 재집결시키려 했으나, 313년 8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락탄티우스의 《박해자의 최후》에 따르면, 그는 독을 삼킨 후 며칠에 걸쳐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흙을 집어먹고 맨벽에 이마를 찧었으며, 나중에는 눈알이 안구에서 튀어나오는 등 끔찍한 발작을 벌이다가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이후 리키니우스는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다스리던 동방 영토를 모조리 장악해 동방의 황제로 군림했다. 그러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막시미누스 다이아의 측근과 가족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전임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후 아우렐리아 프리스카와 딸 갈레리아 발레리아를 살해하는 등 가혹한 숙청을 단행해 신망을 잃었다.

3.6. 콘스탄티누스 1세 VS 리키니우스

314년, 콘스탄티누스 1세를 암살하려 한 암살자가 적발되어 체포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암살자를 조사한 결과, 그 배후가 리키니우스의 부하로서 나중에 공동황제로 지명되었던 발레리우스 발렌스로 밝혀졌다. 또한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의 접경지대인 아에모나(현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동상과 초상화를 파괴하도록 했다. 이에 양자는 전쟁을 벌였고, 314년 10월 8일 키발라이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승리했다(키발라이 전투). 뒤이어 316~317년 마르디아 전투에서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또다시 승리했다.

그 후 317년 3월 1일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트라키아를 제외한 발칸 반도 전역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발레리우스 발렌스는 처형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 크리스푸스와 차남 콘스탄티누스 2세, 리키니우스의 아들 리키니우스 2세가 카이사르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320년, 리키니우스는 <밀라노 칙령>에서 약속한 종교의 자유를 부정하고 기독교인들을 다시 탄압했다. 그는 주교들의 종교회의를 전부 금지했고 주교와 사제를 다수 유배보냈으며, 자신의 부하들 중 기독교의 신이 아닌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전부 쫓아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항의했지만, 리키니우스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324년, 국경 안으로 들어온 사르마티아인을 격퇴하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휘하 부대가 리키니우스령이었던 트라키아로 통지없이 진입했다. 이에 리키니우스는 조약 위반이라며 전쟁을 선포하고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맞붙었다. 324년 7월 3일 하드리아노폴리스 대전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130,000명과 리키니우스의 165,000명이 맞붙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압승을 거두었다. 리키니우스는 비잔티움으로 후퇴한 뒤 부관 마르티니아누스를 서방의 정제로 내세우고 우세했던 해군을 맡겨서 적이 소아시아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다르다넬스(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해전을 벌이게 했다. 당시 리키니우스가 동원한 갤리선은 350척이었고,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동원한 갤리선은 200척이었다. 크리스푸스는 이 다르다넬스 해협 해전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해 적 함대를 궤멸시켰다. 324년 9월 18일 보스포로스 해협 너머에서 벌어진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양군이 재차 맞붙었는데, 이번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대승을 거두었다.

3.7. 리키니우스 처형과 내전의 종결

리키니우스는 니코메디아로 도주한 뒤 병력을 끌어모아 재차 전쟁을 치르려 했지만, 그의 황후이자 콘스탄티누스 1세의 누이였던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가 지금 항복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며 간절히 설득하자 결국 마음을 바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귀순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를 아들 리키니우스 2세와 함께 테살로니카에서 여생을 보내게 했지만, 325년 고트족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리키니우스 부자를 처형했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유일무이한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4.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재통합을 성사시킨 뒤 군사, 행정, 세금 체계 등 여러 분야에서 전반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비잔티움을 대대적으로 개발한 뒤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그는 이곳을 노바 로마(Nova Roma), 즉 '새로운 로마'라 명명했으나, 역사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의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또한 게르만족과 사르마티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단행해 그들을 굴복시키고 공물을 매년 바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군사적 역량이 탁월했으며 성품도 훌륭해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던 장남 크리스푸스에게 계모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처형하고 파우스타와 함께 기록말살형에 처했는데, 그가 장남을 이토록 잔혹하게 처분한 이유는 현재까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337년 5월 22일 붕어하면서,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세워 제국을 3개로 분할하고, 조카인 달마티우스한니발리아누스를 카이사르로 세워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달마티우스에게, 폰투스를 한니발리아누스에게 넘겼다.

그러나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병이 아니라 이복형제들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헛소문이 돌자, 콘스탄티누스 1세를 추앙하던 군인들이 분노하여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를 포함해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거의 모든 남성 구성원을 살해했다.(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이때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계모인 바실리나도 살해되었는데, 당시 12살의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와 6살의 율리아누스만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 대량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세 아들은 유언장에 따라 제국을 공식적으로 3분할했다.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셋째 콘스탄스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서부 일리리쿰을, 차남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집트, 시리아, 동부 일리리쿰 등 동방 영토를 다스렸다. 그러나 세 아들이 서로 반목하기 시작하고 야심가들이 이 때를 틈타 분란을 일으키면서, 로마 제국은 또다시 내란에 휩싸였다.


[1]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막시미아누스 부자와 로마 시민들의 주장으로서, 정작 막시미아누스 자신은 선임 정제, 즉 아우구스투스 세니오레스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켰을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