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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와 후계자들을 칭하는 호칭. 카이사르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제정의 기초를 닦은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칭호다.2. 역사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대중에 공개된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신참자(노부스 호모) 가문인 본가보다는 로마에서 손꼽히는 파트리키 가문 출신이자 갈리아 전쟁과 카이사르의 내전의 승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내세우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전체 이름을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에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고, 본인을 늘 카이사르라고 지칭하고 주변인들에게도 자신을 카이사르라고 부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지지자들만 그를 카이사르라고 불렀고, 반대파 정치인들은 카이사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옥타비아누스', '투리누스'라고 불렀다.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압도적인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모든 권력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전기 때 부여된 임시 권한만 포기하고, 프린켑스이자 임페라토르로서 정치와 군사 모두에서 제1인자로 군림했다. 원로원은 그런 그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선사했는데, 이는 '존엄한 자'를 의미한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상징하는 칭호가 되었고, 후대 황제들은 제호명에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언제나 덧붙였다.
그렇지만, 카이사르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가문명'으로 사용되었을 뿐 칭호로 쓰이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와 혈연 관계이거나 인척 관계를 맺은 이들의 코그노멘이 '카이사르'이었기 때문에, 로마 황제나 남성 황족의 칭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 일가 아래에서, 남성 황족들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받고 이후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받아 선포된 프린켑스 유벤투티스가 해당 왕조 시절엔 제위계승자, 남성 황족 칭호 역을 일부 대신했다. 아니면 따로 "남들보다 최소 5년 이상 공직에 우선 취임한다."라는 특별법을 받거나, 황제가 후계자에 낙점한 일가 혈육을 봉헌하면서 공화정 아래에서의 홍보 형태로 이를 대신했다. 이는 율리우스 씨족의 카이사르 가문에서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카이사르 가문(네로 가문)으로 개념이 재정립된,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 아래에서도 비슷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가 네로를 입양하면서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 역시 그에게 특별칭호를 내림이 아닌, 가문명으로 내준 조치였다.
이런 카이사르를 처음으로 칭호로 사용한 황제는 네로가 몰락한 후 황위에 오른 갈바였다. 자신의 제위명을 "임페라토르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고 정했다. 이는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유지를 따라 로마를 이끌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음을 암시한다. 69년 1월 갈바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한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역시 제호에 '카이사르'를 추가했다. 오토를 꺾고 황제에 오른 비텔리우스는 카이사르를 쓰는 대신 '게르마니쿠스' 칭호를 사용했으며, 8살된 아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에게 게르마니쿠스 칭호를 수여해 자신의 후계자로 공인했다.
69년 12월 비텔리우스를 꺾으면서 네 황제의 해 최종 승자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제호로 사용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장남 티투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내렸다. 이 조치는 아우구스투스 치세 시절부터 임페라토르 직을 세습 형태로 받은 남성이 원로원, 로마인에게 상식적으로 "카이사르"로 불림을 모스 마이오룸 아래에서 인정함과, 그와 아들들의 정통성을 명문화하면서, 형식상 카이사르 가문의 후계를 자처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오현제 시대로 통칭화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무너진 뒤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자신과 두 아들을 스스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정치적 양자로 선포하면서, 안토니누스를 세베루스 왕조의 남자 후계자의 이름 겸 칭호 개념으로 활용함과 비슷한 선례였다.
따라서 카이사르라는 칭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인위적으로 자기 성씨를 황제의 동일 개념으로 삼았다고 볼 수 없고, 플라비우스 왕조의 제위계승법과 그들의 정통성과 연계됨 아래에서 만들어진 개념적 칭호였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부터는 애매모호한 로마 황제 개념이 가족주의적 세습 개념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로마 황제가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쓰고 후계자는 카이사르를 쓰는 관례가 도입되었다. 이때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은 후계자를 기리기 위해 발행된 동전에는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NOB CAES: 가장 고귀한 카이사르)"라는 문구가 새겨졌는데, 때로는 'CAES'로 약칭하기도 했다.
군인 황제 시대에 등장한 황제들은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자식들을 조기에 카이사르로 지명했고, 때로는 장남을 처음부터 아우구스투스로 지명하여 분할 통치하고 차남 이하에겐 카이사르 칭호를 내렸다. 갈리아 제국 황제 테트리쿠스 1세는 아들 테트리쿠스 2세를 카이사르로 임명하고 동료 집정관으로 삼았지만, 274년 아우렐리아누스에게 토벌되면서 무의미해졌다.
293년 3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두 명의 상급 황제와 두 명의 하급 황제에 의한 통치 체제인 사두정치를 도입했다. 두 상급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로서 각각 서방과 동방에서 통치를 행사하고, 두 하급 황제는 카이사르로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관할 구역을 부여받고 아우구스투스가 맡긴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나중에 아우구스투스가 퇴위하면 아우구스투스로 승격한 뒤 새 카이사르를 지명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306년부터 사두정의 내전이 발발하면서 붕괴되었다.
사두정의 내전의 최종 승리자인 콘스탄티누스 1세는 초기엔 장남 크리스푸스를 카이사르로 삼고 여러 군사적 임무를 맡겼다가 자신의 아내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처형해버린 뒤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그리고 조카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를 카이사르로 두었다. 그는 337년 사망하면서 세 아들을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키고 제국을 삼분할하고,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는 카이사르 직위를 유지하고 특정 구역을 맡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달미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는 337년 여름에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병사들의 폭동으로 피살당했고(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세 아들 만이 제국을 물려받았다.
350년대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사촌인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차례로 카이사르로 지명해서 자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동안 대리 통치하게 했다. 이후 황제들은 새 황제를 지명할 때 카이사르를 거쳐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키는 기존 방식보다는 아우구스투스로 바로 승격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로마 제국의 내우외환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에서 자신이 미처 관리하지 못하는 구역을 대신 맡아줄 이가 과도기를 거치게 하는 것보다는 바로 공동 황제로 삼아서 무게를 실어주는 편이 낫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만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조카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요안네스를 물리치고 서로마 제국 황제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전에 카이사르로 선임했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 카이사르를 나타내는 동전에는 십자가가 없는 왕관 문양이 새겨졌다. 이 시대의 대다수 황제들은 후계자들이 카이사르를 거치도록 하지 않고 곧바로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하사해 공동 황제로 삼음으로써 후계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 대신 카이사르는 차남 이하의 자식들이나 황제의 친척 또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에게 자주 수여되었다. 테오필로스는 자신의 막내딸 마리아와 결혼한 알렉시오스 모셀레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했으며, 미하일 3세는 삼촌 바르다스에게 카이사르를 수여했고, 니키포로스 2세는 아버지 대 바르다스 포카스에게 카이사르를 수여했다.
심지어 외국의 군주에게 카이사르 칭호가 수여된 경우도 있었다. 705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복위될 수 있게 해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칸 테르벨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로부터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다. 또한 1081년 알렉시오스 1세는 선대 황후 알라니아의 마리아의 형제이자 조지아 왕인 기오르기 2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함으로써 셀주크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공동 대응하기를 희망했다.
이렇듯 카이사르 칭호를 쓰는 이들의 범위가 늘어나면서 권위가 떨어지자, 알렉시오스 1세는 형제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 특별히 세바스토크라토르(Sebastokratôr: 장엄한 통치자)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또한 마누일 1세 치세 부터는 제국의 특정 영토를 관리하는 황자에게 데스포티스 칭호가 부여되었다. 데스포티스 칭호를 수여받은 황자는 카이사르 및 세바스토크라트로와는 달리 황제의 지시 없이 자율적으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의 칭호에 "카이제리 이 룸(로마 제국의 카이사르)"을 추가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은 국가가 멸망할 때까지 대대로 카이사르 칭호를 쓰면서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진정한 후예라고 강조했다.
3. 영향
'카이사르' 칭호는 후대 유럽 국가들의 군주들에게도 변형된 형태로 사용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자리잡은 독일권에서는 카이사르를 독일어로 변환한 '카이저'를 황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고,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를 이어받은 불가리아, 러시아 제국 등 동유럽권은 카이사르를 슬라브어로 변환한 '차르'로 사용했다. 이 외에도 폴란드에서는 카이사르를 폴란드어로 변환한 체사르쉬(cesarz)'를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다.티베트, 부랴트, 몽골 등에서 전해지는 전설의 영웅 ‘게사르/게세르’도 카이사르에서 유래했다는 가설이 있는데, 이 가설에 따르면 8세기 카불 샤히 왕조의 왕으로 아바스 왕조의 침입을 무찌른 프로모 케사르 왕이 모델이라고 하는데, 프로모 케사르 왕의 부왕이 동로마 레온 3세와 교류하며 ‘프로모 케사르’(로마의 카이사르)라고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바이 게세르 신화》
4. 역대 카이사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0.35px"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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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 }}}}}}}}}}}}}}} |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지만 모종의 사유로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지 못했거나 인정받지 못한 인물들만 기재한다.
-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136년 6월에서 8월에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138년 7월 10일에 병사함.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 166년 10월 12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169년 9월 10일에 귀에 난 악성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직후 수술 합병증으로 사망함.
- 소 페르티낙스: 193년 1월 1일 아버지 페르티낙스가 황위에 오른 뒤 카이사르로 지명됨. 193년 3월 28일에 아버지가 프라이토리아니 장병들에게 살해된 후 물러남.
-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 225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에게 딸을 시집보냄.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인용한 푸블리우스 헤레니우스 덱시포스의 역사서에서는 이때 카이사르 칭호를 받았다고 하나 불확실함. 227년 율리아 마마이아에 의해 반역 혐의로 처형됨.
-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236년 1월에서 5월 사이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238년 6월 아버지와 함께 병사들에게 살해됨.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아누스(발레리아누스 2세): 256년 9월 아버지 갈리에누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258년 여름 도나우 전선에서 사망함.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코르넬리우스 살로니누스 발레리아누스(살로니누스): 258년 6월 아버지 갈리에누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260년 7월 갈리아 전선 로마군이 포스투무스를 황제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키자 근위대장 실바누스는 이에 맞서기 위해 살로니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추대했음. 그러나 이 조치는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했고, 살로니누스는 실바누스와 함께 포스투무스에게 살해됨.
- 소 빅토리누스: 가공 인물일 가능성이 있음.
-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테트리쿠스 2세): 273년 아버지 테트리쿠스 1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274년 아버지와 함께 아우렐리아누스에게 항복함.
- 리키니우스 2세: 317년 3월 1일 아버지 리키니우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324년 9월 19일 아버지와 함께 퇴위했고, 나중에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아버지와 함께 처형됨.
- 크리스푸스: 317년 3월 1일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326년 3월 계모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와 간통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됨.
- 달마티우스: 335년 9월 18일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337년 살해됨.
- 한니발리아누스: 335년 9월 18일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337년 살해됨.
- 마그누스 데켄티우스: 350년 7/8월 마그넨티우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353년 8월 18일에 자살함.
-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351년 3월 15일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354년 처형됨.
- 팔라디우스: 455년 3월 17일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455년 5월 31일에 처형됨.
- 파트리키우스: 470년 레오 1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471년 아버지 아스파르와 형 아르다부르가 피살된 뒤 축출됨.
- 게르마누스: 582년 8월 5일 티베리우스 2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582년 8월 11일 카이사르 직위를 거부함.
- 마르티노스: 638년 이라클리오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641년 9월 발렌티노스 아르샤쿠니에 의해 폐위된 후 로도스로 추방됨.
- 테르벨: 705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 니키포로스, 흐리스토포로스: 769년 4월 1일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5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776년 레온 4세를 상대로 찬탈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실각함. 이후 780년 레온 4세가 사망한 후 재차 음모를 꾸몄다가 또다시 발각되어 수도원에 보내짐.
- 알렉시오스 모셀레: 831년 장인 테오필로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840년 미하일 3세가 출생한 뒤 테오필로스의 압력을 받아 842년 이전에 수도원으로 은퇴함.
- 바르다스: 862년 4월 22일 미하일 3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지명됨. 866년 4월 21일 미하일 3세와 바실리오스 1세의 음모로 피살됨.
- 대 바르다스 포카스: 963년 아들 니키포로스 2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음.
- 요안니스 두카스: 1074년 형제 콘스탄티노스 10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음. 1074년 루셀 드 바이욀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가 오히려 생포된 뒤 루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됨. 루셀의 반란이 진압된 뒤 미하일 7세의 용서를 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귀환해 수도사 생활을 함. 1078년 니키포로스 3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자 미하일 7세에게 퇴위를 권고함. 1081년 알렉시오스 1세가 니키포로스 3세를 축출하고 황위에 오르는 데 기여한 후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카이사르에 재선임됨.
- 기오르기 2세: 1081년 니키포로스 3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음.
-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 1081년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음.
- 소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음.
-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선임됨. 요안니스 2세가 황위를 굳히는 데 기여한 공로로 세바스토크라토르로 승격했지만, 1130년 요안니스 2세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유배됨.
- 요안니스 로게리오스 달라시노스: 요안니스 2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음. 1143년 요안니스 2세 사후 반란을 꾸몄다가 발각되어 감금되었다가 마누일 1세에게 용서받아 지위를 유지함.
- 벨러 3세: 1163년 동로마 제국에 인질로 보내진 뒤 마누일 1세의 총애를 받다가 1165년 아들이 좀처럼 태어나지 않자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마누일 1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음. 그러나 1169년 알렉시오스 2세가 태어나자 취소되었고, 1172년 형 이슈트반 3세가 사망하자 헝가리로 돌아가서 새 왕이 됨.
- 몬페라토의 레니에르: 1179년 마누일 1세의 장녀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하고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음. 1180년 9월 마누일 1세가 사망한 뒤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와 모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를 상대로 아내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수도에서 벌어진 혼란을 틈타 입성한 안드로니코스 1세에 의해 아내와 함께 독살당함.
-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1185년 이사키오스 2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음. 1186년 아센과 페터르의 난 진압에 착수했다가 오히려 참패한 뒤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은퇴함.
- 콘라드 1세: 1187년 이사키오스 2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음. 이후 알렉시오스 브라나스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브라나스를 존경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원성을 사자 위협을 느끼고 예루살렘 왕국으로 떠남.
- 마누일 마우로조미스: 셀주크 제국 연대기 작가 이븐 비비에 따르면, 1200년 룸 술탄국의 술탄 케이휘스레브 1세가 동로마 제국에 망명했을 때 카이사르 직책을 역임하던 그가 자기 딸을 술탄에게 시집보냈다고 함.이후 동로마 제국이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의해 무너지자 케이휘스레브 1세와 함께 룸 술탄국으로 돌아가서 클르츠 아르슬란 3세를 몰아내고, 케이휘스레브를 술탄으로 복위시켰다. 이후 룸 술탄국의 지원을 토대로 니케아 제국과 전쟁을 벌인 끝에 메안데르 강의 상류 계곡에 있는 초나에와 라오디케아 시를 포함한 상당한 영토를 영지로 확보함. 이후 그의 가문은 13세기 말까지 룸 술탄국 궁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함.
- 레온 가브라스: 로도스에서 할거하면서 테오도로스 1세 또는 요안니스 3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음.
-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1259년 이복 형제 미하일 8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선임됨. 1260년 세바스토크라토르로 승격함. 이후 동로마 제국의 주요 장성으로서 아카이아 공국과의 전쟁을 이끔.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스트라티고폴로스: 1259년 미하일 8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선임됨.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에 결정적으로 공헌함.
- 루지에로 데 플로르: 카탈루냐 용병대장. 1304년 안드로니코스 2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받음. 1305년 미하일 9세와의 회담 도중 피살됨.
-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 1326년 삼촌 안드로니코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의 군대에 합세해 마케도니아 중부의 동로마 영토를 약탈함. 안드로니코스 2세로부터 카이사르 칭호를 줄 테니 귀환하라는 권유를 받자 이를 수락하고 테살로니카로 돌아가던 중 병에 걸려 스코페에서 사망함.
- 흐렐야: 마케도니아 북동부와 릴라 산맥의 영주. 요안니스 6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