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마리아 콤니니 (영어: Maria Komnene, 그리스어: Μαρία Κομνηνή) |
출생 | 1152년 3월 |
사망 | 1183년 |
직위 | 포르피로엔니타 |
반란 대상 | 알렉시오스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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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의 반란자. 마누일 1세 황제 사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황후의 친서방 정책에 반발한 민중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고, 나중엔 안드로니코스 1세와 손을 잡고 마리아 황후의 실권을 박탈했다. 그러나 1183년 안드로니코스에게 독살당했다.2. 생애
1152년 3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1세와 줄츠바흐의 베르타 황후의 장녀로 출생했다. 1163년 11살의 나이로 헝가리 왕자 벨러(훗날 벨러 3세)와 약혼했다. 마누일은 벨러를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동로마 궁정에서는 벨러를 알레시오스로 불렀다. 그러나 1169년 알렉시오스 2세가 출생하면서, 약혼이 취소되었다. 이후 시칠리아 왕국의 굴리에모 2세와 약혼했지만, 이 마저도 취소되었다. 1179년 가을 27살의 나이로 몬페라토 후작 굴리에모 5세의 아들인 17살의 몬페라토의 레니에르와 결혼했다.7개월 후인 1180년 9월 마누일 1세가 사망했고 황위는 어린 황자 알렉시오스 2세가 이었다. 알렉시오스의 모친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황후가 섭정하였지만, 친서방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반발하는 이들이 많았다. 레니에르와 마리아 부부는 이러한 민심을 읽고 반란을 꾀했다. 그러나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부부는 지지자 150명과 함께 아야 소피아로 숨었다. 토벌대는 아야 소피아 성당을 포위했지만, 총대주교 테오도시오스가 이들을 비호해서 체포하지 못했다.
부부는 아야 소피아에서 민중을 선동했고, 친서방 정책에 불만이 가득했던 민중은 이에 호응했다. 그들은 동료 공모자들을 석방하고 섭정단을 퇴진하라고 요구했다. 마리아 황태후는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레니에르와 마리아는 아야 소피아를 요새로 전환하고 외국인 용병을 고용했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이에 맞서 부활절을 기념하여 황궁에 방문했던 테오도시오스 총대주교를 전격 체포하고, 새 총대주교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마리아 황후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테오도시오스는 석방되었다. 민중은 이 사건에 분노하였고, 곧 황태후와 섭정단 지지파와 레니에르와 마리아 지지파 간의 시가전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며칠간의 시가전 끝에 양측은 화해하기로 했다. 마리아와 레니에르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고, 반란군은 사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너그러운 조치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황태후의 인기는 갈수록 떨어졌고, 민중의 서방인에 대한 적개심은 증폭되었다.
1181년 5월,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수도의 혼란을 바로잡겠다며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흑해의 연안지대에서 거병했다. 민중은 열렬히 호응했고, 칼케돈 해협에 이르렀을 때 그의 병력은 수만에 달했다. 그를 막으려 했던 진압군은 가볍게 격파되었고, 함대 사령관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도 반란군에 가담했다. 급기야 1182년 4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성내에 거주 중이던 서방인 수만 명을 학살했다. 이후 안드로니코스는 수도에 입성했고, 레니에르와 마리아 부부를 별궁으로 옮겼다. 1183년, 안드로니코스는 사람을 시켜 부부를 독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