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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 동로마 제국 카이사르 Ιωάννης Ρογέριος Δαλασσηνός | 요안니스 로게리오스 달라시노스 | |
생몰 년도 | 1100년경 - 1166년 이전 |
카이사르 재위 기간 | 1136년 - 1152년 |
부모 | 로게리오스(아버지) 달라시노이(어머니) |
아내 | 마리아 콤니니 |
자녀 |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안나 콤니니 테오도라 콤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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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의 카이사르. 1136년 요안니스 2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다. 1143년 요안니스 2세 사후 반란을 꾸몄다가 발각되어 감금되었고, 1146년 마누일 1세의 용서를 받아 복귀했다.2. 행적
1100년경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에 참여했다가 알렉시오스 1세에게 귀순한 로게리오스와 달라시노스 가문 출신의 여인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어머니의 성을 선호해 자신을 '요안니스 달라시노스'라고 칭했지만, 요안니스 키나모스 등 대다수 동로마 역사가들은 그의 노르만식 성인 로게리오스라고 불렀다. 1136년 이전에 요안니스 2세의 장녀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했고,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카이사르를 수여받았다.1143년 동방 원정을 떠났던 요안니스 2세가 사망하자,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빈 틈을 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는 노르만인들과 일부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황위를 쟁취하려 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악수흐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고, 아내 마리아가 마누일에게 남편의 음모를 이실직고하는 바람에 들통나고 말았다. 그는 긴급 체포된 뒤 대관식이 열릴 때까지 억류되었다가 마누일의 사면을 받고 직위를 유지했다.
1147년 2월 블라헤르네 궁전에서 열린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1152년 바르다르 계곡 상류에 있는 스트루미차 총독에 부임했다. 1145/1146년경 아내 마리아 콤니니가 사망한 후 홀아비로 지내던 그는 1152년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이 사망한 후 미망인 콩스탕스가 안티오키아 공국의 단독 여성 군주가 되자 안티오키아를 동로마 제국에 완전히 복속시키기로 마음먹은 마누일 1세에 의해 안티오키아로 보내져서 콩스탕스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콩스탕스는 그가 너무 늙고 매력적이지 않다고 여기고 르노 드 샤티용과 결혼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그는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수도원 생활을 하다가 1166년 이전에 사망했다.
그는 마리아 콤니니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아들 안드로니코스와 알렉시오스는 별다른 기록이 없고, 안나 콤니니는 제국의 스트라테고스를 역임하던 알렉시오스 페트랄리파스와 결혼했다. 테오도라 콤니니는 마누일1세의 심복인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의 형제인 요안니스 콘토스테파노스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