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0.35px"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 | ||
다섯 황제의 해 | 소 페르티낙스 | |||
세베루스 왕조 |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 | |||
군인 황제 시대 |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 발레리아누스 2세 | 살로니누스 | 소 빅토리누스 | 테트리쿠스 2세 | |||
사두정치 | 크리스푸스 | 리키니우스 2세 | |||
콘스탄티누스 왕조 | 달마티우스 | 한니발리아누스 | 마그누스 데켄티우스 |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 |||
서로마 제국 | 팔라디우스 | |||
레오 왕조 | 파트리키우스 | |||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 게르마누스 | |||
이라클리오스 왕조 | 마르티노스 | 테르벨 | |||
이사브리아 왕조 | 니키포로스 | 흐리스토포로스 | |||
아모리아 왕조 | 알렉시오스 모셀레 | 바르다스 | |||
마케도니아 왕조 | 대 바르다스 포카스 | |||
두카스 왕조 | 요안니스 두카스 | 기오르기 2세 | |||
콤니노스 왕조 |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 | 소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 요안니스 로게리오스 달라시노스 | 벨러 3세 | 몬페라토의 레니에르 | |||
앙겔로스 왕조 |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 콘라드 1세 | 마누일 마우로조미스 | |||
라스카리스 왕조 | 레온 가브라스 | |||
팔레올로고스 왕조 |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스트라티고폴로스 | 루지에로 데 플로르 |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 | 흐렐야 | |||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 }}}}}}}}}}}}}}} |
<colbgcolor=#8b0000> 동로마 제국 카이사르 Хреља | 흐렐야 | |
이름 | 흐렐야(Хреља) |
생몰 년도 | 미상 - 1342년 12월 27일 |
카이사르 재위 기간 | 1341/1342년 - 1342년 12월 27일 |
[clearfix]
1. 개요
마케도니아 북동부 지역과 릴라 산맥에서 할거하며 세르비아 왕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를 오가며 자치를 누린 영주. 그의 비문에 요안니스 6세로부터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불가리아에서 가장 큰 수도원으로 알려진 릴라 수도원을 재건한 인물이기도 하다.2. 행적
그의 기원과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단지 비문에 이름 불명의 여인과 결혼한 사실만 적혀 있다. 1320년대에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를 섬겼는데, 이때부터 마케도니아 북동부의 스트루미차, 슈티프 일대와 릴라 산맥을 지배했다. 이 지역은 세르비아 왕국, 불가리아 제2제국,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그는 이곳에 군림하면서 주변 국가들의 명목상 봉신을 자처하며 자치를 누렸다.1327/1328년에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를 상대로 내전을 치르고 있던 안드로니코스 3세를 지원했고, 그 보답으로 프로토세바스토스(Protosebastos)에 선임되었다. 이 사실은 흐렐야가 1334~1335년에 재건한 릴라 수도원의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340년에 슈티프의 있는 성 미하일 수도원과 아토스 산에 있는 힐란다르 수도원에 여러 땅을 기증했는데, 이를 기념하는 비문에는 메가스 도메스티코스(Megas Domestikos)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망한 뒤 요안니스 5세의 모후 사보이아의 안나를 따르는 세력과 권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그는 1341/1342년에 칸타쿠지노스를 지원했고, 그 대가로 카이사르를 수여받았으며, 1342년 봄부터는 멜니크 총독을 역임했다. 1342년 여름 칸타쿠지노스가 세르비아 왕 스테판 두샨에게 의탁하자, 그는 세르비아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1342년 가을에 멜니크를 두샨에게 넘겼다.
이후 릴라 수도원에서 수도자로 지내다가 1342년 12월 27일에 사망했다. 불가리아측 기록에 따르면, 그는 두샨이 고용한 세르비아 용병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사후 그의 영지는 동로마 제국과 세르비아에 의해 분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