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5:39:20

네 황제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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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황제의 해
Annus Quatuor Imperatorum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시기 68년
주요 황제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라인 방면 로마군의 반란과 갈바의 최후3.2.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전쟁3.3. 비텔리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의 전쟁
4. 이후

[clearfix]

1. 개요



AD 69년, 한 해에만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까지 4명의 황제가 잇따라 등극한 사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플라비우스 왕조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내전이다.

2. 배경

68년 4월,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네로 황제의 폭정을 규탄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총독 갈바를 새 황제로 추대하기로 하고, 그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 뜻을 알렸다. 네로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최근에 창설된 이탈리카 1군단을 리옹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그들이 투입되기 전에, 라인 강 상류의 군단이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의 지휘하에 반란군을 먼저 공격했다.

루푸스의 군대는 반란에 가담한 베손티오(오늘날의 브장송)를 포위했고, 빈덱스는 베손티오를 구하러 달려왔다. 두 군대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 서신을 주고받았다. 빈덱스는 네로를 타도하는데 힘을 보태달라고 청했지만, 루푸스는 거부했다. 이에 빈덱스는 베손티오로 접근했고, 루푸스의 병사들은 즉시 반격했다. 이렇게 벌어진 전투에서, 빈덱스의 반란군은 괴멸되었다. 빈덱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네로에게 반감이 있던 건 라인 군단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은 루푸스에게 황제가 되어달라고 요구했다. 루푸스는 이를 거절했지만, 라인 군단은 더 이상 네로를 위해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갈바는 이 때를 틈타 루스타니아 속주 총독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협력을 받아 히스파니아 전역을 장악하고, 원로원에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라고 요구했으며, 프라이토리아니에 사람을 보내 뇌물을 찔러주며 네로 타도에 협력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원로원과 프라이토리아니 모두 네로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네로는 68년 6월 9일 자결했다.

그리하여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된 갈바는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과거 명문가들이 권력을 독점하던 공화정 시기를 그리워하는 원로원이 선호하는 인물이었으며, 근위대장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와 프라이토리아니 역시 충성을 맹세했기에 입지가 매우 탄탄해 보였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당시 로마인들은 그의 화려하고 훌륭한 경력을 보고 훌륭한 황제가 될 거라 기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자만했기 때문인지, 그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에서 로마까지 가는 데 석 달이나 걸렸다. 그 과정에서 정적으로 간주한 총독들을 잇따라 처형했다. 히스파니아에서 바이티카 총독 오불트로니우스 사비누스를 포함한 몇몇 인사들을 처형했으며, 갈리아에서 아키타니아 총독 베투스 실로를 처형하고 빈덱스를 토벌하고 병사들로부터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거절했던 루푸스를 해임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여행 동안 탐욕스럽고 잔혹한 성품을 유감없이 보여줬고,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그가 오스티아 항구에 상륙했을 때 환영하지 않았다고 한다.

갈바가 이렇듯 느긋한 여행을 하는 사이,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딴 마음을 품고 갈바가 아직 로마로 들어오지 않은 이 때에 정변을 일으켜 자기가 황제가 되기로 작심했다. 그는 자신이 칼리굴라 황제의 사생아라고 밝히며, 네로의 합법적인 후계자로서 황위를 계승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네로의 거세된 남자노예이자 동성애인인 스포루스[1]와 결혼했다. 그러나 프라이토리아니 장병들은 칼리굴라의 사생아라는 님피디우스의 주장을 전혀 믿지 않았다. 백인대장 셉티미우스는 "가이우스 황제의 해방노예인 자기 외조부 지위를 이용해 벌인 사기극"이라는 진실을 밝혀냈고, 여러 근거를 기반으로 이를 알게 된 장병들은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거짓말하는 것을 알고 분노한다. 여기에 더해 당시 프라이토리아니 내부 분위기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인정한 갈바가 그보다 중요하다고 판단 중이었다. 그래서 프라이토리아니는 새로운 황제가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새로운 혼란을 야기시킨 님피디우스를 붙잡아 죽였다.

68년 10월 초순에 마침내 로마에 도착한 그는 네로가 자신과 싸우기 위해 조직한 제1 아디우트릭스 장병들을 호출했다. 이들은 주로 로마 해군 선원들로 구성되었는데, 갈바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자신들이 계속 군단병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갈바는 자신을 히스파니아에서 로마까지 따라온 병사들을 시켜 이들을 밀비우스 다리에서 포위해 수천 명을 학살한 뒤, 살아남은 장병들만 기존 군단에 배속시켰다. 타키투스는 갈바의 로마로의 행군을 긴 피비린내나는 행군이라고 묘사했다. 이후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약속했던 보너스 지급을 "나는 돈으로 병사를 사지 않고 징집한다"라며 거부했고, 늙고 장애가 있는 호르도니우스 플라쿠스를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 방탕하고 탐욕스럽기로 유명한 비텔리우스를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으로 보내 라인 방면 로마군이 유능한 지휘관을 내세워 반기를 들 여지를 없애려 했다.

갈바는 자신의 즉위를 도운 오토 등 공신들을 홀대하고 탐욕스러운 측근 인사들을 중용했다. 특히 갈바의 동성애인이자 남첩인 해방노예 이켈루스가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했는데, 세간에서는 그가 국고 안의 재물을 훔쳐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여기에 네로가 돈이나 물건으로 준 선물 가격을 22억 세스테르티우스로 환산해 이중 90퍼센트를 하사받은 이들에게 물어내라고 요구하여 수많은 이의 반감을 샀다. 결국 이러한 행보에 환멸을 느낀 이들이 반기를 들면서, 로마 제국 출범 이래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중 하나였던 네 황제의 해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3.1. 라인 방면 로마군의 반란과 갈바의 최후

69년 1월 1일, 마인츠에 주둔하고 있던 라인 강 군단이 갈바에 대한 충성을 거부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원로원에 차기 황제 선출을 맡기겠다고 밝혔지만, 하루 만에 이를 뒤집고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비텔리우스를 추대했다. 원로원이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황제로 세울 리 없다고 여겼을 뿐더러, 비텔리우스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으로 부임한 이래 그들에게 막대한 재물을 선뜻 나눠주고 후한 대우를 해준 것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갈바에게는 라인 방면 로마군이 원로원에 차기 황제 선출을 맡긴다는 메시지만 전달되었다.

그는 원로원을 포섭하기 위해 네로 시대에 일어난 피소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추방되었다가 귀국했던, 30살의 젊은 귀족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리키니아누스를 양자로 들인다고 선포했다. 피소 리키니아누스는 갈바와 마찬가지로 원로원 의원들이 선호하는 명문가의 자손으로, 폼페이우스의 딸 폼페이아의 직계후손이자 크라수스의 직계손자로 칼푸르니우스 가문에 양자로 입적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인선은 그다지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피소는 좋은 혈통, 훌륭한 인품과는 별개로 오랜 기간 망명생활을 한 터라 지지기반도 없고, 망명 전에도 공직경험이 없었다. 게다가 일찍이 갈바를 황제로 추대한 뒤 자신을 후계자로 세워주길 기대했던 오토의 반감을 샀다.

결국 오토는 무력으로 해결하기로 작정했다. 69년 1월 15일 오전, 그는 팔라티누스 아폴론 신전 제사 중 황제를 수행하던 일행에서 빠져나온 뒤, 준비된 가마를 타고 은밀히 로마 외곽을 빠져나와 근위대 병영으로 들어가서 대기중이던 근위대에 의해 새 황제로 추대되었다. 갈바는 이 소식을 듣고 호위병들에겐 근위대와 맞서게 하고 자신은 가마를 타고 멀리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라쿠스 쿠르티우스 근처에서 오토를 따르던 근위대에 적발된 뒤 가마 밖으로 비참하게 내동댕이쳐진 다음 카무리우스라는 병사 손에 목이 관통돼 죽었다. 그의 양자 피소 역시 살해된 다음 목이 잘렸다. 갈바의 목은 효수되어 깃대에 목이 걸렸다가 재산관리인 아르키부스가 몰래 빼내서 남은 몸통과 함께 아우렐리아 가도에 위치한 황제 정원에 안치했다. 오토는 피소의 머리를 유가족에게 돌려줘 장례를 치르게 해줬다.

3.2.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전쟁

오토는 갈바를 처단하고 황위에 오른 뒤 비텔리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이 소식을 알리면서 라인 전선으로 돌아가면 제국의 영토 일부를 내주는 등 후한 대접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병사들에게 황제로 추대된 이상 끝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은 터라 오토의 제안을 묵살하고 로마로 계속 진군했다. 하지만 라인 방면 로마군에 라이벌 의식을 품고 있던 도나우 방면 로마군이 오토에 지지를 표명하고 비텔리우스에 맞서기 위해 로마로 진군하면서, 오토에게 희망이 생겼다.

68년 3월 14일, 오토는 프라이토리아니와 검투사, 해방노예로 구성된 장병들을 긁어모아서 북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비텔리우스의 군대가 이탈리아로 들어서는 걸 저지하려 했고, 함대를 총동원해 해상에서 적의 보급로를 교란하게 했다. 그러나 적군이 이미 이탈리아에 들어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계획을 바꿔 도나우 방면 로마군이 합세할 때까지 포 강 전선을 사수하기로 했다. 당시 그의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는 지난날 부디카의 난 토벌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선임되었다.

3월 말, 파울리누스가 이끄는 오토군은 아울루스 카이카나 아일리우스가 이끄는 비텔리우스군과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오토군이 승리했지만, 파울리누스는 동족상잔을 벌이는 것에 심적 부담이 컸는지 당장 추격해서 섬멸하자는 요구를 묵살하고 적이 크레모나로 후퇴하는 걸 내버려뒀다. 카이키나는 크레모나에서 재정비한 뒤 파비우스 발렌스의 또다른 군대와 합세해 재 공세를 벌일 준비를 갖췄다. 그들이 베드리아쿰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토는 군사 회의를 열어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파울리누스 등은 도나우 방면 로마군이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회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토의 형제 티티아누스와 근위대장 프로쿨루스는 당장 전투를 벌이자고 주장했다. 오토는 고심 끝에 아군이 저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서 사기가 크게 올랐으니 기세를 이어가면 또다시 이기리라 여기고 진격 명령을 내렸다.

오토 본인은 포 강 남쪽 둑에 있는 브릭셀리움에 상당한 예비군과 함께 남았고, 파울리누스 등이 이끄는 본대는 베드리아쿰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어진 전투에서 압도적인 수적, 전투력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4만 명의 로마인이 죽었다고 한다. 브릭셀리움에서 패배 소식을 접한 오토는 도나우 방면 로마군과 합세한 뒤 전쟁을 이어가자는 측근들의 조언에 "나는 더 많은 동족이 죽는 것을 감당할 수 없소"라며 거부한 뒤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고 재산을 하인들에게 나눠준 후 모든 서류를 불태워서 자신을 따랐던 이들을 보호하려 했다. 그 후 단검을 목에 찔러 자살했고, 남은 이들은 비텔리우스에게 달려가 충성을 맹세했다.

3.3. 비텔리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의 전쟁

오토가 자살했을 무렵, 비텔리우스는 갈리아에 남아서 카이키나와 발렌스가 승리를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오토가 죽고 원로원이 자신을 황제로 선포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느긋하게 로마로 향했다. 그는 지나가는 곳마다 호화스러운 연회를 벌였으며,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이 지역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걸 방임했다. 그리고 도나우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장병들을 크레모나 시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강제 투입시켰다. 그러다 베드리아쿰에 이르렀을 때, 전장에서 여전히 썩고 있는 수천 구의 시신을 바라보며 한 마디 했다.
"적의 피는 냄새도 향기롭구나."

비텔리우스는 로마에 입성한 뒤 파울리누스와 살비우스 티티아누스 등 오토의 심복들을 사면했다. 그러나 근위대 전원을 해고하고 라인 군단 병사들을 근위대에 배속시켰다. 이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근위대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동이었고, 뒷수습도 말끔하지 못해 해고된 근위대 병사들과 그 가족들을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또한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혔던 네로를 대놓고 찬양하면서, 네로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선포해 원로원의 반감을 샀다. 게다가 폭식에 탐닉해 각 귀족 가문들의 희귀하고 맛난 레시피로 만든 고급 요리를 즐기는 데 열중했고, 국정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어머니 섹스틸리아가 보다 못해 정신 좀 차리고 국정을 돌보라고 충고하자, 그는 어머니를 향해 폭언을 퍼붓고 밀쳐버렸다.

그의 사치 행각으로 인해 국고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대금업자들은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텔리우스는 황제에게 감히 그따위 요구를 하다니 불경하기 짝이 없다며 그들을 체포한 뒤 가혹한 고문을 가한 후 처형했다. 여기에 돈을 마련하기 위해 부자들에게 자신을 상속자로 지명하라고 강요한 뒤 죽여서 재산을 가로챘고, 가능한 한 모든 왕위 경쟁자들을 배제하고자 그들에게 권력을 나눠주겠다고 유혹해 궁궐로 끌어들인 뒤 죽이려 들었다.

한편, 비텔리우스에게 갖은 수모를 받고 도나우 전선에 귀환한 로마군은 반기를 들기로 작정하고,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무키아누스는 이를 거절하고, 그 대신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을 치르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7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정식으로 황제로 추대되었고, 이집트 속주 주둔군 역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장남 티투스에게 유대인들을 상대하게 한 뒤 무키아누스와 함께 로마로 진군했고, 도나우 방면 로마군 역시 8월에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인정한 뒤 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2]의 지휘하에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비텔리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카이키나 휘하의 여러 군단을 파견하여 적이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걸 막게 했다. 그러나 제7군단 게미나를 이끌고 있던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대단한 용장이면서도 심리전, 용병술, 협상술에 능한 사령관이라서 비텔리우스 군은 붙는 족족 박살났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키나는 비텔리우스의 무능한 통치에 반감을 품고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투항하려 했다가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69년 10월, 지휘관을 스스로 끌어내린 라인 방면군은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제7군단과의 맞대결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같은 날 프리무스의 도나우 주둔 제7군단은 비텔리우스 세력이 웅거한 크레모나를 습격해 도시를 함락시키고 주민들을 포로로 붙잡는다. 이때 프리무스는 같은 로마인을 노예로 삼을 수 없다며 노예화는 시키지 않았으나, 비텔리우스를 끝까지 지지한 포로들은 모조리 처형시켰다. 이 직후, 카이키나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이송된 뒤 석방되었다.[3] 한편, 비텔리우스의 또다른 부관 파비우스 발렌스는 갈리아에서 지원군을 모으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하기로 한 현지인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제 믿을 만한 두 장군이 모두 사라지고 추종자들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서,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끄는 베스파시아누스 군 선봉이 아벤티노 언덕을 넘어 로마에 입성한다. 이에 비텔리우스는 퇴위하기로 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는 메바니아에서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를 기다렸으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와 퇴위 조건을 합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제국의 휘장을 신전에 바치기 위해 가는 길에 나중에 도나우 방면군에게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한 근위대에 의해 붙들려 궁궐로 강제로 끌려갔다. 69년 12월 도나우 방면군이 로마에 입성했을 때, 비텔리우스의 지지자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는 그들이 크레모나에서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비텔리우스 골수 지지자들을 모조리 처형한 전례를 생각해서, 또는 안토니우스의 신들린 협상술, 심리전에 말려 그랬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시의 건물들에 자리잡은 그들은 돌, 투창, 기와를 미친듯이 던졌고,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자신의 도나우군에게 차분히 시가전에 임하게 하면서 다시 교전이 시작됐다. 지휘관 역량에서 차이가 많이 난 만큼 베스파시아누스 진영이 시가전에서 우위를 차지했는데, 계속된 저항에 머리 끝까지 열받은 제7군단 병사들은 비텔리우스 군이 보이는 대로 모조리 살육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로마 시가전에서 50,000명이 죽었으며 유피테르 신전을 포함한 수많은 건물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때 전직 아프리카 총독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동생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혼자서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대범하게 프리무스의 도나우 군단에 맞서 최후까지 분전했다가 결국 항복했다. 치열했던 로마 시가전에서 로마시민들이 보인 모습은 타키투스의 표현에 따르면 개탄스러웠는데 로마 시민들은 군단병들의 싸움을 마치 검투사 시합보는 듯이 하며 분전하는 자에게는 환호성을 보내고 패배하여 숨는 자는 끌어내어 죽이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69년 12월 20일, 비텔리우스는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와 교섭을 진행하면서 뒤통수 칠 궁리를 했다. 그는 아내 소유의 캄파니아 내 고급 저택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운 뒤 더럽고 낡아빠진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도중에 계획을 포기하고 텅 빈 황궁에 돌아온 뒤 돈을 챙겨 허리띠 안에 넣고 다시 탈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예상했던 일이었고, 비텔리우스의 꼼수는 로마를 점령한 도나우 군단 병사들이 황궁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실패했다. 이에 비텔리우스는 병사들을 피하여 황궁 안의 숙소로 쓰이던 방 한 곳에 숨었다. 이때 그는 침대 매트리스와 집기로 자신이 숨은 방을 막고 걸어 잠그며 필사의 몸부림을 쳤으나 끝내 체포되었다. 비텔리우스는 병사들에게 짐승 다루듯 끌려 나왔고, 입은 옷은 거의 찢겨져 반절 이상 벗겨졌다. 이후 로마 시내로 끌려가서 분노한 시민들과 도나우 군단 병사들에게 포로 로마노에서 갖은 모욕과 고문을 당했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나는 한때는 너희의 황제였다."

타키투스는 이에 대해 비텔리우스가 생전에 보여준 그나마 황제다웠던 유일한 모습이라고 평했다. 그 후 비텔리우스는 참수되었고, 시체는 테베레 강에 던져졌으며 잘린 머리는 장대에 꽂혀 퍼레이드 행렬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비텔리우스의 아들과 동생 역시 같은 날 살해되었다.

4. 이후

비텔리우스가 비참하게 죽으면서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의 유일한 황제로 등극했지만, 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텔리우스가 라인 방면 로마군을 대거 이탈리아로 끌고 가면서 힘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 바타비아인들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선동에 따라 바타비아 반란을 일으켰다. 라인 전선의 주력 부대였던 제1게르마니카 군단, 제3 마케도니아 군단, 제15 프리메게니아 군단, 제16 갈리아 군단은 도나우 방면 로마군과의 전쟁과 바타비아 반란에서 소멸되었다. 키빌리스는 율리우스 사비누스를 갈리아 제국 황제로 추대하고, 생존한 로마 병사들에게 사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했으며, 군단들의 소멸을 기념하는 동전을 주조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혼란에 빠졌던 로마 시를 안정시킨 뒤 북쪽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전해듣고 부관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를 보내 진압하도록 했다. 루푸스는 제8 아우구스타 군단, 제11 클라우디아 군단, 제13 제미나 군단, 제12 라팍스 군단, 그리고 최근 모집된 군단인 제2 아디우트릭스 군단을 이끌고 출발했다. 하지만 제8 군단은 이탈리아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만 이동하여 라인강의 전략적 교차점을 지켰고, 제11군단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전선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으며, 브리타니아에서 소환된 제14 제미나 군단은 히스파니아에서 소환된 제6 빅트릭스 군단과 제1 아디우트릭스 군단과 함께 갈리아를 방비했다. 따라서 키빌리스를 토벌하는 역할을 맡은 부대는 제2 아디우트릭스 군단, 제13 게미나 군단, 제21 라팍스 군단의 3개 군단이었다.

루푸스의 군대가 몰려오자, 키빌리스의 동맹자 중 한 명인 율리우스 투토르는 항복했고, 휘하 부대는 새 총독에게 귀순했다. 이후 3개 군단이 트레비란족의 수도인 트리어를 위협하자, 트레비란족은 리고두룸 마을 근처에서 맞섰으나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로마군은 트리어에 입성했다. 그는 여기서 보쿨라를 살해하는 데 관여했던 제1 게르마니카 군단과 제16 갈리카 군단병들을 만났다. 그는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로마 시민으로 받아줬다. 그러나 두 군단은 더 이상 신임받지 못했다. 제1 게르마니카 군단은 해산되었고, 제7 게르마니카 군단이 판노니아에 추가되었다. 제16 갈리카 군단은 제16 플라비아 피르마 군단으로 재구성되었다. 또한 루푸스는 트레비란족과 링고네스 족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반역을 저지른 자들만 처벌하고 나머지는 용서했다.

키빌리스와 율리우스 클라시쿠스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은 6월 7/8일 야간에 트리어에 주둔한 로마군을 기습 공격했다. 한때 진영 안까지 침투하는 데 성공했지만, 3개 로마 군단의 반격으로 패퇴했다. 이제 반군의 세력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에 국한되었다. 키빌리스는 어떻게든 활로를 뚫기 위해 휘하 함대를 이끌고 발 강과 라인강에서 로마군을 괴롭혔다. 그러던 중 로마 함대의 기함을 탈취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야기했다. 로마군은 이를 굴욕으로 여기고 바타비아로 쳐들어가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그러나 이 무렵 폭우가 내리면서 강이 범람해 로마 함대가 막심한 피해를 입고 진영이 홍수에 휩쓸리는 등 큰 타격을 입자, 로마군은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던 70년 9월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키빌리스는 로마가 이제 모든 자원을 자신에게 쏟아부을 것임을 깨닫고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루푸스는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고, 양자는 나발리아 강 위에 다리를 세우고 협의했다. 협상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바타비아인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8개의 보조 기병 부대를 추가로 징집하며, 바타바아의 수도 네이메헌은 파괴되고 주민들은 2km 하류에서 무방비 상태로 도시를 재건해야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제10 게미나 군단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바타비아에 주둔하기로 했다. 이렇게 바타비아 반란이 종결되면서 네 황제의 해의 혼란상은 막을 내렸고, 베스파시아누스를 시작으로 30년간 로마를 지배한 플라비우스 왕조가 탄생했다.


[1] 네로의 두번째 황후인 포파이아 사비나와 닮아서 총애받았다고 전해진다.[2]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증손자로, 소 옥타비아의 법적 증손자, 혈연상 외증손이다.[3] 카이키나는 나중에 에프리우스와 함께 베스파시아누스를 타도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선동해 플라비우스 왕조를 전복할 계획을 세워서 연설문을 작성했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근위대장을 맡고 있던 티투스에 의해 로마에서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