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15대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ANTONINVS PIV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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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이름 |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보이오니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1](본명) Titus Aurelius Fulvus Boionius Arrius Antoninus |
티투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안토니누스(입양 후 개명)[2] Titus Aelius Caesar Antoninus | |
출생 | 86년 9월 19일 |
로마 제국 라누비움 | |
사망 | 161년 3월 7일 (향년 74세) |
로마 제국 로리움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138년 7월 10일 ~ 161년 3월 7일 (22년 246일) | |
제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폰티펙스 막시무스[3] Imperator Caesar Titus Aelius Hadrianus Antoninus Augustus Pontifex Maximus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4] Imperator Caesar Titus Aelius Hadrianus Antoninus Augustus Pius | |
칭호 | 피우스(138년 7월 11일) |
파테르 파트리아이(139년 1월 1일) | |
찬사 | 임페라토르 II(138[5], 143[6]) |
전임자 | 하드리아누스 |
후임자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
부모 | 친부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푸블루스 양부 하드리아누스 모친 비비아 사비나 |
배우자 | 대 파우스티나 |
자녀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양자) 루키우스 베루스(양자) 소 파우스티나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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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질서있는 평온(Tranquilitas ordinis)
로마 제국의 제15대 황제. 오현제로 평가받고 있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네 번째 황제이다. 성품과 행동 모두 겸손하고 솔직하고 자비로운 사람인 까닭에 자비로운(피우스) 황제로 불렸다.2. 생애
2.1. 출생과 본가
서기 86년 로마 근교의 도시 라누비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보이오니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이다. 흔히 이름 뒤에 붙은 피우스를 본명 일부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피우스는 원로원에게 138년 7월 10일 즉위하면서 따로 받은 별칭, 존칭이다.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고향은 본국이었던 이탈리아의 도시지만, 그의 가문은 나르보넨시스 속주 네마우수스(Nemausus)[7]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89년도 집정관을 지낸 네마우수스 출신의 갈리아계 원로원 인사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였으며, 어머니는 전직 집정관 아리우스 안토니누스의 딸 아리아 파딜라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태어날 당시 풀네임은 부모와 외조부의 이름에서 각각 따온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보이오니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Titus Aurelius Fulvus Boionius Arrius Antoninus)였다.
안토니누스의 할아버지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는 갈리아 출신의 신참급 원로원 의원으로, 명장 코르불로 휘하에서 제3 갈리카 군단장을 지냈고, 네 황제의 해의 내전에서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여 보결 집정관, 여러 총독직에 이어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공동으로 정규 집정관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안토니누스의 아버지 역시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 집정관을 역임했다. 따라서 본가인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문은 비교적 새로운 귀족 가문이면서도 플라비우스 왕조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제국의 최상위층으로 고속 출세한 가문이었다.
반면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외가인 안토니누스 가문은 플라비우스 왕조와 네르바 치세 동안 정치적으로 매우 영향력이 있었던 이탈리아 출신의 저명하고 오래된 평민 씨족 아리우스 가문 갈래 중 하나였다. 아리우스 가문은 기원전 72년 법무관이었던 퀸투스 아리우스부터 원로원 안팎에 이름을 떨치고, 세습 원로원 지위를 이어왔다. 이 씨족은 오스카 혈통으로 에트루리아에 정착해 세를 떨쳤는데, 키케로는 아리우스 가문을 공화정 후기인 기원전 70년대부터 원로원 의석을 세습한 노빌레스(평민 귀족)임에도 교육, 재능보다는 근면함으로 이름을 높였다며, 힘든 노동과 노력으로 평민 귀족 반열까지 오른 자들이라고 평했다. 안토니누스 가문은 아리우스 성씨의 한 갈래로, 오스카에서 기원해 움브리아, 오스카 지방에서 번성한 다른 아리우스 씨족 가문 지파들과 달리, 에트루리아에서 번성한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 가문이었다.[8] 따라서 이들은 퀸투스, 가이우스, 마르쿠스를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한 아리우스 가문들과 다르게 그나이우스라는 남자 이름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정도로 차별점을 뒀다. 왜냐하면 아리우스 가문은 기원전 1세기 전까지는 무명에 가까운 플레브스였지만, 아리우스 가문 내의 안토니누스 가문은 공화정 말기부터 원로원 명부에 이름을 올렸고, 제정 시작부터는 본격적으로 명성을 떨쳤기 때문이다.
외조부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는 이런 안토니우스 가문 출신으로 원로원 안에서 소위 집정관 계급, 집정관 가족으로 불린 가문 내에서도 두 번이나 집정관에 오른 당대 거물이었다. 31년생으로 에트루리아 지방이 고향인 그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교양인이자 청렴한 원로원 중진 의원으로 존경을 받았던 전직 집정관이었다. 그는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는데, 저명한 원로원 의원이자 학자인 소 플리니우스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성품이 안팎 모두 골고루 올곧고 도덕적이며 근면하고 진실했다. 때문에, 네르바 황제로부터 “올곧은 사람”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신임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그는 소 플리니우스와 달리 양심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네르바 황제에게 누명을 쓰고 티렌툼으로 추방된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사건 이후의 일로 네르바 황제가 위기를 겪고 프라이토리아니의 친위 쿠데타로 유폐된 이후, 네르바 황제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트라야누스의 등극으로 이어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행보에는 안토니누스의 외조부가 다른 이탈리아 출신의 오랜 명망가 출신 귀족 중 로마 제국 안에서 강력한 귀족 네트워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컸다. 그는 에트루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와 히스파니아 전(全) 지방까지 아우른 인사들과 두루 친분이 두터웠다. 또 동방 출신들의 약진 속에서 지역 차별을 당한 이 일대 출신 귀족들의 파벌급 수장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할아버지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와 우정이 두터웠다.
이런 배경을 가진 안토니누스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귀족층, 그중에서도 핵심 엘리트 계층에 속해 있었고, 외할아버지를 통해 쌓아 놓은 제국 서방 쪽 인적 네트워크망의 도움을 받았다. 더해 사돈 관계인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친구인 터라, 부모가 대개의 로마 귀족 가문의 결합처럼 정략혼으로 맺어진 사이임에도 관계가 완만했다. 이는 외조부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가 일찍부터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출신 로마인들과 히스파니아 출신들과 교류하면서, 이탈리아 귀족과 두 지역 간의 화합을 주도한 노력도 컸다. 때문에 후일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외조부의 가문을 상속 형태로 자연스레 물려받고, 외조부의 양자가 될 때, 이런 후광을 온전히 받았다. 특히, 그가 황제까지 오르는데 주요 배경이 된 결혼이 그랬는데,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외조부 노력 덕에 히스파니아에 뿌리를 둔 2세기 최고 명망가 안니우스 가문 사위로 일찍이 간택됐다.
하지만 아버지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는 89년에 집정관을 지낸 직후 사망했다. 이후, 안토니누스의 모친 아리아 파딜라는 98년 집정관을 지내게 되는 원로원 의원으로, 아리아 파딜라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를 따른 푸블리우스 율리우스 루푸스와 재혼했다. 아리아 파딜라는 대개의 정략혼처럼 재혼하면서 첫 결혼에서 얻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친정에 맡겼다. 따라서 그는 외할아버지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밑에서 자랐고, 일찍부터 외가의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계부는 푸블리우스 율리우스 루푸스이다. 존 그링거 등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는 칼리굴라 암살 사건의 20인 암살범 중 한명인 율리우스 루푸스의 직계손으로, 89년 안토니누스의 어머니 아리아 파딜라가 사별하자마자 자신이 따르고 있던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의 둘째딸과 결혼했다. 멀게나마 플라비우스 왕조와 인척 관계였던 그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어머니의 재혼 상대가 되면서까지 결혼한 이유는, 할아버지가 현직 황제를 암살해 처형되면서 달게 된 주홍글씨 속에서 루푸스가 이런 현실을 타개할 야심이 강하고 컸다는 게 정설이다. 안토니누스 외가가 가진 정치적 영향력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는 이야기인데, 율리우스 루푸스는 아리아 파딜라와 결혼한 이후,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어머니와 결혼한 덕을 제대로 봤다. 그는 재혼 직후 쿠르수스 호노룸을 제대로 밞았고, 이를 바탕으로 장인 도움 아래,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는 과정에서 보결 집정관 자리를 장인 도움으로 2개월간 지냈다. 이때 그는 통상적으로 4개월간 맡는 보결 집정관 임기를 2개월만 채웠다. 그렇지만 네르바 유폐 후 차기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의 즉위 과정에서 새 황제의 등극을 인정하는 중책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이를 배경 삼아 트라야누스 황제 쪽과 인연을 맺었는데, 이를 통해 그는 의붓아들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후일 트라야누스 황제의 혈육과 결혼할 기회를 만들었다.
어머니 아리아 파딜라는 율리우스 루푸스와 재혼 후,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이부 여동생인 아리아 루풀라와 율리아 파딜라를 낳았다. 아리아 루풀라, 율리아 파딜라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친남매 같았는데, 이중 율리아 파딜라는 그나이우스 미니키우스 파우스티누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세베루스와 결혼해,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를 얻었다.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는 외삼촌 안토니누스 피우스 도움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 생전에 성실히 쿠르수스 호노룸을 밞았고, 외삼촌이 황제가 된 뒤에는 제국 동쪽 전체 총독이라고 할 수 있던 시리아 속주 총독과 함께 시리아 일대 군단 사령관까지 지냈다. 이모는 아리아 안토니나인데, 그녀는 아리아 파딜라의 자매로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아들과 결혼해,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사촌 루키우스 카이센니우스 안토니누스를 낳았다. 외사촌 루키우스 카이센니우스 안토니누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보다 4살 정도 어렸고, 보결 집정관까지 지냈지만, 경력이 화려하지 않았다.
이런 가족을 둔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여느 로마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 재혼 직후부터 외조부의 사실상 양자가 되었다. 그는 유년기때부터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그가 태어날 당시 55살이었던 외조부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는 외손자 안토니누스를 친아들로 여겨 키웠다. 그는 자연스레 외가의 가풍에 따라 성장했고, 이탈리아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안토니누스 가문을 이어받게 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승계가 아닌 양자 입양 형태를 통한 정식 승계였다. 따라서 그는 성인이 될 때부터 자신을 안토니누스 가문 사람으로 여겼다.
2.2. 공직 경험과 양자 입적
아버지가 89년 직후 사망하고, 어머니가 남편과 사별한 이후 재혼하면서 안토니누스는 외조부의 손에서 자랐다. 막강한 외가의 도움을 받은 안토니누스는 아버지 역할을 해준 외조부로부터 훌륭한 가르침과 예의를 배웠다. 그를 친아들처럼 키워준 외조부는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모두 유산으로 남겨줬다. 따라서 안토니누스는 일찍부터 로마에서도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안토니누스는 110년에서 115년 사이에 3차례나 집정관을 지낸 덕망 높은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2세[9]의 딸이며 미인으로 유명했던,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대 파우스티나)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외조부이자 양부인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가 일찍이 자신의 외손자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위해 공들인 성과였다. 따라서 안토니누스는 훗날 양자이자 사위이며 후임 황제가 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고모부가 되었는데, 당시 상류층 사회에서는 보기 드물게 대 파우스티나와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으며 2남 2녀를 낳았다. 그러나 이들 부부의 두 아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즉위한 138년 이전에 자녀 없이 요절했고, 장녀 역시 실바누스라는 귀족 자제와 결혼했지만 자녀 없이 135년 요절했다. 따라서 이들 부부의 자녀 중 그가 황제가 된 이후에도 생존한 자녀는 막내딸인 소 파우스티나(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뿐이었다.
원로원 귀족의 아들이자 막강한 외가와 처가까지 가진 안토니누스는 당시 로마 엘리트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명예로운 경력을 모두 경험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이는 장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2세, 두 처남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3세,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 형제였다. 장모는 비비아 사비나 황후의 이부여동생이나, 비비아 사비나 황후와 사이가 좋았고 어쨌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처제였다. 더군다나 장인 안니우스 베루스 2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와는 어릴 적부터 가장 친한 친구이자 복심이라서, 이런 처가의 인맥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황제가 되는데 큰 힘이 됐다.
원로원 의원이 된 이후, 안토니누스는 맡은 선출직, 임명직 모두에서 인품, 재능 모두에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로부터 아시아 속주 총독, 집정관 등을 선사받았는데, 꼼꼼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의 훌륭한 인품과 일 처리를 인정했다. 그래서 120년, 생애 두 번째 집정관을 경험했고, 프린켑스 자문회 의원에까지 임명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신임해 본국 이탈리아 반도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이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관직들을 정직하고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평온하고 목가적인 성품답게 안토니누스는 황제에게 아부를 하거나 어떤 공직도 먼저 지원한 적이 없었고, 120년 두 번째 집정관을 역임한 직후에는 은퇴한 뒤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 에트루리아 지방의 로리움 사유지의 시골 전원 저택에서 여생을 즐길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10]
그가 행정가로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휴식을 고려할 무렵, 티부르(티볼리) 별궁에서 지내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병에 걸려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고독감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는 황후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어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루키우스 아일리우스)[11]를 양자로 받아들여 공식 후계자로 선정했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는 좋은 집안 출신으로 금발머리에 파란눈을 가진 상당한 미남이었고, 하드리아누스가 그를 후계자로 임명한 이후부터 막대한 돈을 군인들과 시민들에게 뿌려대어 황제 후보로 손색없었다. 그러나 그는 병약했고 상당히 호리호리한 데다 군무 경험이 부족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아일리우스가 군무 경험을 쌓고 병약한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며 그를 제국의 최전방인 판노니아(오늘날의 헝가리, 오스트리아 지역)의 총독으로 파견시켰다. 그러나 이 결정은 오히려 아일리우스의 건강을 악화시켜 추운 판노니아에서 폐렴을 얻고 심한 각혈을 하다가 138년 요절하고 말았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아일리우스의 요절 직후인 138년부터 후계자 문제로 골치를 앓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차기 황제 후보가 바로 안토니누스였다. 하드리아누스가 그를 주목한 이유는 안토니누스가 당시 뛰어난 능력과 인품으로 황제에게 신임을 받으면서도, 원로원 내에서 가장 부유한 의원 중 한 명이라는 점, 그리고 안토니누스가 본래부터 교양이 있었으며 차분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큰 반발 세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정 외에도 안토니누스는 친족이 거의 없는 황제에게 사실상 남자친척이나 다름없었고, 가장 믿을 만한 인척 중 제위를 잇기 적합한 까닭도 있었다. 왜냐하면, 안토니누스의 장인은 황제와 인척관계이면서도 오랜 친구였고, 안토니누스의 장모는 트라야누스 누이의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그를 양자로 삼기에는 걸림돌이 있었는데, 바로 입양법상 필수 조건인 아버지와 아들 간의 나이 차이였다. 그렇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이 법을 바꾸면서 마지막 걸림돌을 손쉽게 제거해버렸다. 이후 그는 안토니누스를 불러 양자로 삼기 전, 나이가 적지 않은 자신의 후계자 이후도 대비하기 위해 안토니누스의 처조카인 17살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작고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7살짜리 아들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그의 양자들로 삼도록 했다. 이때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요구 조건을 수락했으며,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로 입적돼 공식 후계자가 되었다.
2.3. 제위 등극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게 된 안토니누스는 피우스라는 별칭대로 로마인들이 말하는 귀족으로서의 위엄과 덕성을 갖춘 평온한 사람이었다. 남들에게는 관대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상당히 엄격한 사람이었던 그는 키가 굉장히 크고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웅변 실력도 뛰어났던 그는 뛰어난 기품과 교양을 갖추면서도 겸손하고 근면했다. 또한 정직한 데다 침착한 사람이었고, 법률 지식과 행정 지식에 굉장히 해박했다. 그러면서도 로마 근교에 많은 수의 벽돌 공장과 이탈리아 내 소유지들을 가진 최고의 부자였는데, 사치와는 거리가 상당히 먼 사람답게 매우 소박하고 단조로운 사생활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정적이 거의 없었던 그의 황제 수락은 처음부터 무사평온이었고, 23년의 재위 기간 내내 한결 같았다.그가 즉위할 당시, 원로원에서는 전임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의 정책들에 대해 불만이 상당했다. 다수의 원로원 의원들은 하드리아누스의 수성 위주의 제국 정책과 헬레니즘 성향에 대해 상당히 못마땅해했다. 그래서 원로원에서는 하드리아누스가 발표한 법령들과 고시들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원로원의 이런 움직임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강력한 반대와 설득으로 좌절되었다. 이때 안토니누스는 원로원에게 “하드리아누스의 모든 기억들을 무효화하겠다는 것은 곧바로 저의 입양과 계승도 사실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아니냐”고 지적하면서, 원로원을 설득시키고 나아가 전임자의 신격화와 그에 따른 영예 수여를 설득했다. 이때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한때 동료이자 친구였던 대다수의 원로원 의원들에게 원성높았던 몇 가지 조치들[12]을 없애겠다고 하고, 실제로 합의대로 원로원 의원들을 구명해줬다. 따라서 원로원에서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호소대로 하드리아누스에게 사실상 기록말살형에 가까운 행동을 하지 않았고, 새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 중 생활고를 겪고 있었던 인사들의 재정적 지원을 해주면서도 원로원이 황제의 자문 역할을 하도록 해줬다. 이는 원로원과 안토니누스의 관계를 상당히 향상시켰다.
2.4. 통치 스타일과 내치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전임자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달리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원격 조정으로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13] 물론 이것은, 철저하게 제국의 행정 및 군사 체제를 다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공로에 의한 결과였지만 안토니누스의 뛰어난 행정 조정 능력도 크게 공헌했다.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실시한 인사 정책을 거의 바꾸지 않았고, 정년이 다 돼서야 바꿀 정도로 철저하게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을 따랐다.통치 스타일처럼 내치에 상당히 전념하면서 본국 이탈리아 각 분야 사업에 대한 넉넉한 자금 지원과 본국 내 사회복지에 힘썼다. 이때 그는 대규모 토목사업에도 힘써 본국 내 주요 항구인 오스티아, 푸테올리, 테라키나 등을 개선, 개량하면서 오스티아에 새로운 공중 목욕탕을, 카푸아에 새로운 원형 극장을 건설했다. 또 어린이 교육과 빈민층에 대한 식량 지원 및 교육 지원에도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이런 안토니누스의 시혜 정책은 본국 외 속주들에도 적용되었는데 과거 하드리아누스 시절 황제의 방문으로 막대한 부담에 시달린 그리스, 소아시아, 에게 해 일대의 여러 속주들에 대해서 세금 인하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 지원이 있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와 속주들에 자선사업과 세금 인하, 토목 공사 등으로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죽으면서 자신의 아들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에게 티베리우스가 남긴 유산에 버금가는 20억 세스테르티우스를 국고에 남겨줬다. 그 이유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워낙 꼼꼼한 일 처리와 재무 행정 관리 덕분이기도 했지만, 지나치다 할 정도로 황제 개인의 모든 생활이 검소했기 때문이다.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남긴 화려한 별궁과 정원들에 관심도 가지지 않았는데, 이때 그가 휴일에 유일하다시피한 사치(?)라고는 과거처럼 가족들을 데리고 로마 근교의 개인 사유지로 이동해 시골 생활을 즐기며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한 뒤, 친구들을 불러 소박한 저녁을 함께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는 로마 제국의 유례 없는 평화였다. 그가 통치한 23년 동안 자연 재해나 가끔씩 일어나는 분쟁[14]을 제외하곤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물론 항상 게을리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던 안토니누스의 통치 철학이 그런 평화를 낳기도 했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끊임없는 시찰에 의한 성과가 더 큰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근현대 이후 연구들에서 밝혀졌듯이, 2세기 중반기부터 로마 재정 문제는 시작됐고 본국 이탈리아를 비롯해 서방속주들의 경제, 사회적 쇠퇴로 인해 동방속주들과의 경제적 편차는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따라서 안토니누스의 내치에 관한 평가는 오늘날 안토니누스가 평화기에도 이 문제 해결에 얼마나 노력했는지 공헌한 증거로 언급된다. 즉, 트라야누스의 대외전쟁들(특히 다키아 전쟁)로 인해 누적된 문제와 하드리아누스의 효율성 중심 내치로 인한 문제 해결에 안토니누스는 최선을 다했다.
2세기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본국의 제조업과 상업은 동방속주들의 생산력에서 밀리고 서방의 남갈리아 일대에게조차 뒤쳐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은 다키아 일대의 엄청난 금광, 은광을 얻어 국가 재정이 풍족해진 것 외에는, 근본적으로 본국과 서방 경제가 다키아 일대의 생산품에도 타격을 입는 부작용을 초래해 로마 재정이 장기적으로 불안해지는 문제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안토니누스 즉위 직전에 이미 이탈리아와 서방속주들은 제 살 파먹기식으로 무역로 경쟁을 하다가 서로 경쟁력을 잃거나, 생산수출품이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일대에게 밀려 산업 전체가 사양길에 접어들게 상황을 악화시켰다. 따라서 안토니누스는 이 문제가 차후 로마 재정에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이런 문제해결에 힘썼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 베스파시아누스 치하 아래에서 끝없이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들의 발전을 유발해, 동방과의 격차를 줄인 조치와 비교된 과거 두 황제의 통치 결과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래서 안토니누스의 이탈리아 중심 내정은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치세 아래 경제적 취약성이 방치되었던 부분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받는다. 또 그가 막대한 공적 자금 투입을 하고 복지수혜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내린 결정 역시 그가 얼마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조치로 해석되고 있다. 실제 그는 즉위 직후부터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방치된 이탈리아의 쇠퇴를 비롯해, 파르티아 전쟁으로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벌어진 동방 내 파산상태의 지방도시 재건을 위해 상당히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안토니누스의 노력에도 이탈리아와 서방속주는 함께 발전해야 하면서도, 서로 경쟁구도였던 만큼 황제 개인 혼자 이를 해결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왜냐하면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정복은, 서방 속주(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내의 상업, 농업, 제조업 발전과 상호 공존이라는 순환적 경제체계에 분명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토니누스는 이 문제 해결방법으로 막대한 공적 자금을 투입해 남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 일대의 항구 개발 등의 활로를 마련하는 것에 집중했는데, 그럼에도 이는 동방 속주들과 본국 및 서방 속주 간의 경제격차를 심화시켜 악순환에 빠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2.5. 조용한 평화의 비밀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역대 로마 황제 중 유일하게 정복, 군사작전에 대한 기록도 없고, 실제로도 로마군을 지휘한 적이 없다. 그는 거의 대부분을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보내며 군을 통제했다. 이는 1세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1세가 연상되는 모습이라는 평을 듣는데, 안토니누스의 치세와 군사작전, 전략은 선대 황제 중 클라우디우스 1세와 묘하게 비슷했다. 그렇지만 이런 평에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브리타니아 원정과 갈리아 출정 연설을 통해 속주로 나간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달리 일평생동안 프라이토리아니 외의 로마군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치세 23년 내내 로마군과는 담을 쌓았다고 해도 좋았는데, 이런 로마 황제와 공화정 시대의 집정관은 전무해 당대, 후대 로마인들은 안토니누스의 이런 모습을 특이하게 여기면서도 로마 엘리트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통제로 여겨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후 여러 학자들에게 이런 모습 때문에 "전임자 덕에 골치아픈 문제는 없었고, 운이 좋았다", "시대를 잘 타고 났다"고 욕을 먹고 있다.21세기 이탈리아 티부르 일대에서 발굴된 비문, 영국 내 여러 유적, 비문들에 따르면,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이전의 어떤 황제들처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국방 문제에 최선을 다했고 그 성과가 확실했던 것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과거 알려진 이미지처럼 최대한 외교로만 해결하고, 전쟁을 피하는 이미지와 다른 모습도 곳곳에서 띤 까닭에 "왜 아우렐리우스 빅토르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국방정책을 그토록 찬양했는지 이해간다"는 평까지 듣고 있다.
안토니누스는 전무하다시피한 군경력에도, 제국 안에서 벌어진 두 번의 폭동을 조기 진압하고 때론 적극적이고 과감하면서도 조용하게 국경에서의 소란을 제압했다. 재위 초기, 그는 유대에서 반란이 터지자, 이를 신속히 진압하도록 한 다음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취약한 푸닉 일대의 방어선 문제를 해결하고자 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 누미디아 일대 도시들의 요새화를 명하고 이를 관리, 감독해 확실한 평화를 찾고자 했다.
흑해 북부와 게르마니아 지방에서의 모습은 이미지와 달리 공세적이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하드리아누스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안토니누스는 흑해 북부에 스키타이인들이 침공하자, 예상을 깨고 로마군을 보내 이를 막고 스키타이인들이 아나톨리아를 유린할 시도조차 못하게 조치까지 취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소아시아 일대와 흑해에서 공세적 입장을 취한 것은 예외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안토니누스는 라인강 너머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유능한 장군이자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카루스 페도를 151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으로 임명한 다음 로마군을 15마일 전진케 하고 요새를 건설하도록 해 게르만족들의 기습 도발을 막았다. 이후 그는 페도를 155년까지 재임시켜 게르만족들의 소동을 조기 제압하고 적극적으로 로마군이 우위 속에서 전선을 유지하도록 힘을 쏟았다.
이는 칼레도니아인들의 소규모 도발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비슷했다. 안토니누스는 외교술을 고수하거나 방어만 하겠다는 이미지와 달리 일천한 군경력에도 139년 새로운 총독을 임명한 다음, 하드리아누스 시대 매뉴얼과 다른 형태의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공세 전략을 택하라고 명령했다. 이 결과, 새 총독 롤리우스는 부임 직후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명에 따라, 스코틀랜드 남부까지 진군해 도발을 일삼는 칼레도니아인들을 제압하고 안토니누스 방벽을 건설해 이곳을 새로운 방어벽 삼아 칼레도니아인의 브리타니아 침공을 막았다. 허나 이런 노력에도 로마는 현실적인 한계로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안토니누스 방벽 사이의 영토를 황무지로 사실상 방치했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말년이 되면 이 성벽을 버리고 남하했다.
이런 조치 외에도 그는 재위 기간 23년 내내 여러 총독들의 성과, 행보를 철저히 감시하고 보고받아 적절한 조치를 취해 반란을 모두 조기진압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안토니누스는 이 부분에서 평화로우면서도 단호했고, 원칙적이면서도 관용적이라서 반란은 초기에 모두 진압됐다. 그는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추방된 경력이 있고, 언제라도 반란을 일으킬 골칫덩이 총독, 장군들을 여럿 감시하면서 이 부분에 늘 신경을 썼다. 그 결과, 프리스키아누스, 티티아누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다가 조기에 덜미가 잡혀 최후를 맞이했다. 반란을 꿈꾼 프리스키아누스는 체포 전 자살, 티티아누스는 기소 후 원로원에서 유죄를 받아 반역죄로 처벌받았는데, 안토니누스는 별명 그대로 그들의 유가족 재산 압류에 기권을 행사해 연좌제를 거부했다.
그 결과,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당대 로마인들과 후대 로마 장군, 군인들에게 문치적인 이미지에도 "이탈리아 안에서 모든 위기를 처리하고 예방한 현제", "외교에만 치중하지 않고 적의 도발에 선제적으로 대처해 평화를 구걸하지 않는 황제"로 찬사를 받았다. 허나 이런 안토니누스의 조용하면서도 소리없는 노력과 전략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더욱이 그의 치세 아래 로마 제국은 방어적, 수세적 모양새를 취해 안토니누스 피우스 사망 직후 터진 자연재해, 파르티아의 도발, 안토니누스 역병의 발발, 북부 게르만 부족들의 흥성과 침공을 막지 못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후반부터 실질적인 공동황제로 있으며 쌓아 놓은 외교전술, 조기 대응 형태의 전략을 폐기하고,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가 이를 진두지휘하는 전략을 취하기에 이른다.
2.6. 후계자 계승 계획 변경의 속사정
하드리아누스는 오촌당숙 트라야누스의 아내로 자신에게는 당숙모가 되는 폼페이아 플로티나 황후의 권유로 트라야누스의 조카딸 비비아 사비나와 일찍이 결혼했다. 그런데 이 결혼은 사촌이었던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보호자가 된 트라야누스가 크게 내켜하지 않은 결혼이었고,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중매로 맺어졌다. 동시대 하드리아누스의 아내인 비비아 사비나 황후를 보좌했던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처럼 하드리아누스는 아내와 관계가 특별히 다정하지 않았고, 수에토니우스를 비롯한 황궁 관료들이 황후와 가깝거나 가까워지는 것을 안 좋아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부부는 자녀가 없었는데, 136년 60세가 된 황제는 건강이 악화되자 에트루리아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의 아주 훌륭한 청년이었던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양자 겸 후계자로 삼았다.그러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는 아주 훌륭한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138년 1월 추운 판노니아에서 폐결핵에 걸려 요절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양자 요절 후,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친인척 관계였던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사위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삼았다. 이때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먼친척이 되는 안니우스 베루스의 손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안토니누스의 후임황제로 정했다. 하드리아누스가 이렇게 조치를 취한 이유는 안토니누스의 장모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머니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와 관련이 있었다. 그녀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외조카가 낳은 딸로, 아버지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친구였고, 그녀의 이부언니는 트라야누스의 양녀와 같던 소 마티디아, 하드리아누스의 아내 비비아 사비나였다. 따라서 그녀 언니들과 그녀의 자녀와 손주들은 손이 많지 않고, 친척도 많이 없는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에게 혈연상 멀어도 몇 안 되는 친척이었는데,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자녀, 손주 외에는 트라야누스 피를 이은 황족은 없었다.[15] 이와 함께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의 아내로 아내 비비아 사비나의 조카 대 파우스티나가 자신의 양손주들을 보호하게 했다. 이어 자신의 양손녀 케이오니아 파비아를 마르쿠스의 배필로 정해놓고 약혼시킨 뒤 9살도 안 된 루키우스 베루스를 안토니누스, 대 파우스티나의 딸 소 파우스티나와 정혼시킨 다음 죽었다. 즉, 로마 황제나 공화정 시대 명문 귀족들이 자신의 혈육이 장성할 때까지 그 혈육의 가까운 남자 친인척을 혈육의 보호자 겸 징검다리로 했던 방식을 활용해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후계를 정했다.[16]
그런데 ‘징검다리’ 위치가 된 안토니누스는 즉위 직후, 처조카 마르쿠스의 배우자를 아내 대 파우스티나, 장모의 언니로 트라야누스 황제가 생전 손녀로 여겨 집과 재산을 하사한 황녀 소 마티디아와 상의 후 자신의 딸로 바꾸어 버린다. 세 사람은 신중한 논의 후, 이 결정을 내렸는데, 루키우스 베루스와 딸의 정혼을 없던 일로 하고, 하드리아누스의 양손녀 케이오니아 파비아를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라는 좋은 명문가 출신 원로원 귀족 자제와 결혼시킨 뒤 루키우스 베루스의 매형이 된 이 남자와 그 일가를 후원해주는 방식으로 후계 구도를 완전히 개편해버렸다.[17] 다시 말하면, 하드리아누스가 세운 계획을 이 계획의 장기 알이 된 안토니누스가 바꿨다. 이때 그는 자신의 위치를 징검다리 바지사장에서 장인이자 고모부가 사위를 양자 겸 가문 후계자 삼아 넘기는 관례를 활용해 바꾸고, 하드리아누스의 양손녀를 좋은 명문가에 시집보내 자신과 마르쿠스, 루키우스 형제의 우호세력을 더 늘려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획득했다.
사실 이런 안토니누스의 행동은 당시에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유는, 하드리아누스가 정한 결혼 정책이 후임자를 생각하지 않은 결정이었고, 당사자인 안토니누스 부부와 이들 부부의 딸 소 파우스티나에게 너무 불리했기 때문이다. 안토니누스 부부는 말년이 되면서 까칠해지고 참을성이 없어지는 황제의 일방적인 조건 제시를 받아들였지만, 이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원한 것도 아니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아울러 안토니누스는 즉위 후 하드리아누스의 계획을 온전히 따를 경우, 징검다리 처지가 되어 마르쿠스가 장성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불안정성을 가지게 될 상황이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에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친조카, 처조카라서 본래부터 한가족이었다고 하더라도, 황제와 황후 신분이 된 상황에서 후계자로 내정된 조카에게 의지하는 듯한 모양새가 연출돼 이는 누가 보더라도 우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원래 하드리아누스가 정한 소 파우스티나의 상대는 마르쿠스의 후계자로 내정된 루키우스 베루스였지만 루키우스 쪽이 한참 동생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10살도 안 된 소년이라서, 나이대로는 마르쿠스 쪽이 소 파우스티나와 더 맞았고[18], 로마 귀족과 상류층의 결혼에서 남자와 여자의 평균 초혼 연령을 생각하면 안토니누스 입장에서 자신과 딸 모두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를 생각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선제와의 약속을 파기해야만 했다.
이런 속사정 때문에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제시한 조건을 일부 바꿨는데, 그럼에도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유지해 그 약속의 기본틀은 어기지 않았다.
이 과정, 결정으로 안토니누스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긴다. 그는 아내, 장모의 언니로 장모 역할을 해준 마티디아와 절차 전체를 처음부터 진행시켜 잡음을 없앴다. 동시에 전임자의 결정을 슬기롭게 해결해, 처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사위로 맞이하며, 아끼는 처조카를 정적으로 삼지 않으면서 골육상쟁, 궁중음모의 위험성을 제거한다. 고모부가 처조카를 사위삼아 가문의 대를 잇는 로마 귀족들의 흔한 방법을 이용하며, 명분을 얻은 것은 덤이었다. 즉, 이 계획 변경으로 마르쿠스의 황제 즉위 명분도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서 안토니누스의 명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19][20][21]
2.7. 로마법 발전
오현제 중 한 명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최대 업적으로 학자들이 평가하는 것은 로마법 발전 부분이다. 안토니누스는 역대 로마 황제 중 가장 뛰어난 법률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답게 로마법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원래부터 탁월한 행정가였던 그는 다른 황제들처럼 자문회의에서 5명의 법률가들로부터 법률적 도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법률적 지식이 해박한 데다, 자신을 보좌하는 법률가들보다도 훨씬 뛰어난 법률가였다.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재위 기간 중 법률 정비에서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재판에서 유죄 사실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무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규정과 재판에서 판사들의 견해가 팽팽히 맞설 때, 피고는 반드시 불확정의 이익을 받아야한다는 규정을 법적으로 확립한 것이라고 한다. 사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나타나는 오래된 원칙이고, 로마에서도 계속 심심치 않게 나타나며 피우스 황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저건 명목상이고 전근대 시절이 그렇지만 권력자에게 찍히면 저런 거 그냥 무시당했다. 이외에도 안토니누스는 상속과 노예들의 처우 문제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고 이를 법으로 명확히 규정했다. 이때 그는 이전까지 애매하게 해석되기도 하던 상속법을 명쾌하게 정리했고, 가부장에게 종속된 가족 내 약자들(특히 노예들)의 법적 권익을 보호하면서 국가적으로 노예들의 해방을 장려했다.
이런 까닭에 그의 치세 동안 주인이 노예를 죽이거나 학대할 경우, 과거와 달리 처벌이 엄격히 시행되었고, 벌금 역시 증대되었다. 또 이탈리아 및 속주 전역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었던 인신매매에 대해서도 무관용으로 강하게 처벌했다. 아울러 로마군 내 탈영병에게 행해지던 가혹한 처벌을 법적으로 완화시켰다. 동시에 전쟁 포로로 잡은 이들에 대한 처우 문제 역시 10년간 광산에서 노역 후 자유민으로 풀어주도록 바꿨다. 이외에도 그는 유대인들의 할례 인정, 기독교 탄압 제지 등의 조치를 내려 엄격히 시행했다.
2.8. 사망
23년간의 행복한 통치 및 평화로운 감시를 마친 이후, 안토니누스는 사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후계를 넘기고 노환으로 병사했다. 즉위 후 몇년 지나지 않아서 그는 아내인 대 파우스티나의 죽음으로 홀아비가 됐는데, 아내의 노예를 정부로 삼을 뿐 재혼하지 않고 평생 아내를 그리워했다고 한다.이때 그의 사망에 대해 로마 시대 전기 작가들은 황제가 고령임에도 평소처럼 저녁식사에서 치즈를 많이 먹은 것이 원인이 돼 다음날 밤 구토를 하고 열병으로 진전돼 하루 뒤에는 상태가 심하게 악화됐다고 한다. 따라서 안토니누스는 자신의 명을 직감한 듯, 통치권을 서둘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넘기며 마지막 정리에 들어갔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죽기 직전 통치권을 이양받았는데, 안토니누스는 이 보고를 받은 직후 당직 중인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에게 군호로 '침착'이라는 말을 남기고 잠을 자듯 몸을 뒤척이더니 161년 3월 7일, 자신이 유독 좋아했던 로마 근처의 로리움 내 소박한 시골 집에서 평온히 세상을 떠났다.
당연한 말일텐데, 안토니누스는 젊은 시절부터 널리 인망을 얻은 탓에 그가 가족들 앞에서 잠자듯 편안하게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본국과 속주를 가리지 않고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앞다투어 죽은 황제에게 온갖 영예를 경쟁하듯 수여하려는 진풍경이 벌어졌는데, 원로원에서는 어떤 논쟁 없이 신격화됐다고 한다. 아울러 그의 시신은 로리움 내 시골 사유지를 떠나 로마에 도착한 직후,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됐다. 그런데 이때 황제의 시신은 성대한 장례의식 속에서 20년 전 사망한 아내와 젊은 시절 요절한 두 친아들 곁에 매장됐음에도 화장되지 않고 시신 매장 방식으로 안치됐다. 그래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로마 역대 황제 중 최초로 당시 유행 중인 시신 매장 형태로 영면에 들어간 황제가 됐다.
3. 평가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후임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에 들이 닥친 온갖 재해 및 이민족의 칩입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23년의 통치 기간 내내 평화 그 자체를 경험한 황제였다. 빡빡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 이후 조금 나른한 안토니누스의 통치를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의견들을 보면 “하드리아누스 역시 20년 넘게 로마를 통치했고, 안토니누스도 20년 넘게 로마를 통치했다. 그런 두 황제가 모두 훗날을 대비한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면
그래서 그를 비판할 때 사람들은 안토니누스가 치세 당시 미리 문제점에 대비해야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현대 연구들을 통해, 특히 내치 및 경제, 사회 부분에서 취한 그가 한 결정과 노력들을 통해 충분히 반박되고 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시대를 겪으면서 내재된 본국 이탈리아 경제, 사회 재건, 서방과 동방 사이의 경제적 격차 심화, 동방 속주 내 도시들의 파산 해결에 있어, 안토니누스는 항구 인프라 개발, 서방과 이탈리아 일대의 경쟁적 구조의 산업 통합 등의 조치를 취하는 등 내재된 문제 해결에 상당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즉,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처럼 마냥 사회시혜책을 내리고 황제가 개입하는 조치에 그치지 않은 안토니누스의 행동은 제국 내 내재된 문제 해결을 위한 예방책들도 포함된 결정이기 때문이다.
3.1. 로마군의 질적 약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비판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면 바로 국방비 절감에 따른 로마 정예 병력의 질적 약화일 것이다. 그가 통치하던 23년의 기간 동안 분명히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라는 말에 걸맞게 제국의 위엄과 힘이 국경선 너머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전임자들인 트라야누스의 군사적 업적들과 하드리아누스가 전역을 순방하면서 로마군을 효율적이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공헌 덕분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지속된 평화의 결과, 안토니누스는 치세 내내 로마군의 비용 절감을 위해 상당히 노력하는 것에만 힘을 쏟았다. 그의 이런 노력은 오히려 로마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방치하고 말았고, 하드리아누스 시대보다 훨씬 고립주의적인 수동적 방어 체계로 로마군의 방어 시스템을 바꾸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까닭에 그가 죽고 난 뒤 고스란히 나라를 물려받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는 즉위 직후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와중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외적들과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다르게 볼 여지도 있다. 전임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방만한 재정운영[22]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절에 은화 함유량을 86.5%까지 떨어뜨려야 했고, 그래서 수세적인 정책을 펼쳤을 수도 있다.[23]
3.2. 게르만족 관련 문제
안토니누스 황제 시기에 가장 큰 논란이 되는 부분은 먼 게르만 부족에게 박살나고 있었던 가까운 게르만 부족이 로마에 직접 군사적 원조를 요청했으나 안토니누스가 묵살한 것이다. 그 결과 그나마 로마에 우호적이었던 가까운 게르만족이 먼 게르만족에게 합병당하고, 로마 제국은 결국 더 공격적이고 야만화된 먼 게르만족(고트, 알레만니, 반달 등등)의 대규모 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안토니누스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고 생각된다.후기 로마 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하나 같이 지적하는 것은 로마 제국 국경선 바깥의 게르만족의 사회 조직과 군사 조직이 고도화하고 갈수록 로마 제국의 총력전 전략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들이 이걸 어디서 배우고 있었던 걸까? 다름 아닌 로마 제국이었다. 이렇게 점차 성장해가고 있었던 "가까운 게르만족"이 "먼 게르만족"을 제압해서 인력까지 얻게 되었다면?
물론 적극적인 군사적 지원을 통해 이들을 우방으로 삼고, 이들과 함께 이들의 영토에서 먼 게르만족을 견제하였다면 후대 황제들의 부담이 훨씬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매사가 그렇게 원하는 대로만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을뿐더러 오히려 "가까운 게르만족"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원교근공은 외교의 진리였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의 설이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사학계에 제기되었던 주장들이라곤 해도 대부분 옛날 학설이니까 문제가 된다. 그나마 연구가 일찍부터 잘 이뤄진 로마 제국사 전기 부분은 이 점이 크게 단점으로 두드러지지 않지만, 합리적인 연구와 분석이 비교적 근래 한국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서구 학계에서는 이미 90년대에 다 논쟁끝난 부분[24]으로 이뤄진, 후기에 접어들수록 틀린 부분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의 경우를 예로 든다고 해도, 한창 게르만족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던 갈리아족을 도와 이들 게르만족을 격파하고 갈리아족의 세력을 유지시킨 뒤 점차 로마화를 시켜 갈리아 전역을 로마 땅으로 삼는 데 성공했던 건 그 "우호적인 갈리아 부족"까지 포함하는 대대적인 정벌이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먼 게르만족에게 밀리고 있었던 가까운 게르만족의 처지도 이때의 갈리아족과 마찬가지라곤 하지만, 게르만족을 엄연히 타자로 여겼던 갈리아인들과 "가까운 게르만인"들의 환경이 같았을까? 게다가 종국엔 "가까운 게르만족"까지 결국은 진압해야 되는데? 이런 걸 하려면 또 다시 대규모 군사 계획을 수립해야 하지만 전쟁을 감행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안토니누스에게 군사적 식견과 전략적 안목이 부족했던 것은 맞지만, 그에게도 그리고 당대의 로마인들에게도 이런 것을 포함한 결단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뿐더러 실천했다고 한들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카이사르 같은 천재적인 무장이 아무 때나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때의 게르만족은 카이사르 시절의 게르만족과는 전투력이 또 달랐다. 후대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카이사르와는 달리 고전한 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 시대의 로마군이 카이사르보다 멍청하고 군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게르만족 사회 자체의 조직력과 군사력이 성장한 것이 이유였다. 무엇보다 실제로 갈리아를 평정했던 카이사르조차 자칫 잘못했으면 갈리아 원정을 처참히 실패하고 인생의 내리막길을 걸어갈 뻔하지 않았던가? 3세기가 되면 게르만족은 한차원 더 성장한다.
그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때는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긴 했지만 결국 국경 지대에서 횡포를 부리는 게르만족을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무찌르는 데 성공했던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환경이 비교적 유리했던 안토니누스 시대 때는 선제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면 확실히 결과는 더욱 나았을 것이고, 안토니누스가 이를 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안토니누스의 군사적 식견과 역량이 하드리아누스나 트라야누스만 못했던 것이 이유라는 추론은 물론 일리가 있다.J.B 번리는 안토니누스를 두고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에 안주하였으며 잠재적 위기에 대한 대처를 하려들지 않은 것이 그의 죽음 이후의 재앙에 제국을 노출시켰으며, 따라서 현명한 통치자로 볼 수가 없다."라는 비판을 하였다. 그리고 Ernst Kornemann이라는 학자는 그의 통치는 기회의 낭비의 연속일 뿐이라는 지적까지 했다.
이는 호전적인 게르만족의 잠재적인 위협을 우호적인 게르만족과 "연합해 싸우는 예방 전쟁"을 통해 외부 영토에서 저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안토니누스는 평화에 지나치게 안주하여 방치했고, 그로써 호전적인 게르만족을 로마가 직접 상대해야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므로 예방에 소홀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해당 설들은 물론 일리는 있으나, 당대 게르만족 사회의 성장에 대한 연구가 반영되지 않았으므로 위에서 제기된 문제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안토니누스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를 알 수 있다.
3.3. 내정 집중의 속사정과 그 한계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치세는 평온했고, 완벽해보였지만 알고 보면 또 그렇지 않았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두 차례 대규모 대외전쟁, 하드리아누스의 대외 순방, 그리고 선대 황제들의 대규모 공공건축물 건립과 대대적인 개보수 사업들은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 취약성 노출을 인지한 로마 엘리트 층에게 당면한 문제로 다가왔다. 따라서 이 황제가 한 일이 없어보여도 후대 로마인들이나 1940년대 이후 현대 로마사 연구에서도 좋은 황제 내지 내정에 최선을 다한 황제라고 평가받고 있다.먼저 그가 즉위할 당시, 하드리아누스 시대 아래에서 내재된 불만이 표출되며 로마 제국의 국제 프린키파투스는 자칫 황제와 원로원 간의 기싸움을 넘어 양측의 정쟁이 심화될 분위기였다. 내전의 승리자에게 아우구스투스의 호칭을 부여하는 것도, 부자 상속이나 형제 상속에서도 늘 이를 통과시켜주는 이들이 여전히 원로원이었던 로마 원수정체 안에서 이는 단순한 갈등이 아닌 내전 혹은 정쟁에 따른 갈등 심화 이상의 문제였다. 당장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시대간, 네로 몰락 후 갈바 ~ 베스파시아누스까지의 네 황제의 해만 보더라도 어떤 느낌인지 짐작이 갈 문제였다. 다행인건 안토니누스가 즉위 전부터 인망 높고 정적이 거의 없던 신사인데다, 즉위 후에도 변함없는 황제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후임이었던 가이우스(칼리굴라)와 달리 노련했고 경험이 풍부했기에 평이 나쁘다 못해 증오의 대상까지 된 전임자로 단단히 화난 원로원을 쉽게 달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꼬아버린 제위 계승과 황실 결혼계획 문제로 자칫 제위계승자 간의 궁중암투 문제, 본인 집안 문제까지 일시에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는 무척 깔끔하게 해결했고 잡음도 나지 않아 평가가 좋았다. 따라서 그의 시대에 다시 확립한 원로원과의 공존 관계는 외손자 콤모두스가 192년 암살되기 전까지 벌어질, 로마 황실 특유의 고질적 궁중암투의 위험성을 사전에 없앴다.[25]
그러나 이런 부분보다 그가 더 높게 평가받고 있고, 오늘날에도 현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그의 국고 관리와 국고 재정 건전화 노력이다. 로마 제국은 간접세가 보편적이지 않고 세금 구조가 오늘날처럼 복잡하지 않았지만, 국가 재정이 잘 살고 부유한 지방들(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일대, 그리스와 레반트, 이집트)에서 거둬들인 속주세 의존 문제 등의 고질적 약점이 뚜렷했다. 그런데 이런 단점 외에도 동서간 경제 편차는 하드리아누스 시대를 거치면서, 이전까지와 달리 원로원 안에서 속된 말로 한 가닥 하는 부자 원로원 의원들까지 지중해 동부 출신과 아프리카 속주 출신들이 자리를 채우며 권력 판도까지 서방 속주 나아가 이탈리아까지 밀리는 상황이 시작됐다.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입장에서는 그냥 넘어갈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들과 공존한다고 해도 이탈리아와 서방 경제 상황 악화는 로마시민권자들이 많은 이 일대가 생산성 악화, 민생 불안에 따른 치안 문제 등 악영향이 상당해진다는 이야기도 됐다. 설상가상 하드리아누스의 대외순방은 그가 즉위한 무렵, 잘사는 그리스계 도시들과 동방의 부유한 여러 지방들의 지방 재정까지 황제 체류 문제 등으로 이미 많은 돈을 쓴지라 마냥 이쪽 돈을 끌어쓰면서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에 퍼주기만도 어려웠다. 이는 세베루스 집권 직전의 상황을 전한 갈레노스의 설명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데, 잘사는 속주보다 경제가 정체를 넘어 쇠락기에 접어든 이탈리아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는 도시 경제의 한계, 농촌 내 빈부격차 심화 현실에서 단순히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이에 안토니누스가 취한 어쩔 수 없는 방법이 바로, 본국 이탈리아 각 분야 사업에 대한 넉넉한 자금 지원과 본국 내 사회복지였다. 간단히 말하면, 황제가 이탈리아 각 분야에 계획적으로 돈을 풀어, 각 지방마다 인프라 건설과 이를 통한 도시 경제 활성화에 노력한 것이다. 따라서 안토니누스 시대의 이런 노력 아래,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들은 아우구스투스 이래 성장해놓은 경제 규모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다만, 이런 안토니누스의 방법은 임시방편이었고 후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외침, 자연재해, 전염병 등 모든 문제가 폭발하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언 발에 오줌누기였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26]
이 외에도 안토니누스는 국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꾸준히 황제가 평온한 듯 하면서도 불안했던 하드리아누스 개혁의 여러 문제를 원상복귀시키거나 이를 개선했다. 그는 즉위 직후 하드리아누스의 여러 조치 중 황제가 편하게 일하기 위해 바꾼 치안판사 제도와 로마관료 내 군대 미경력자 채용 완화 조치를 원상복귀시켰고, 마구잡이로 면세혜택이 내려진 특칙도 개선했다. 또 적극적으로 법을 고치고 민생을 관리해 속주 내 불만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그는 2세기부터 두드러진 현상, 즉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 귀족들과 다른 군문제에 문외한 귀족다운 한계도 노출했고 이는 향후 로마의 대외관계 및 속주 내 잠재된 불안요소를 가중시켰다. 그는 본국과 속주 민생 및 경제 문제에 매달린 나머지(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인지 몰라도), 두 전임자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이후 속주 군단의 탈이탈리아화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어 있던 문제를 수동적으로 방치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군단병들의 처우 개선을 수용해줬지만, 도미티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같은 병사와 그 가족들이 진짜 원하는 처우는 개선해주지 않은 채 탈영병 대우 개선, 로마군에게 포로가 된 게르만족과 그 가족 처우 개선 같은 징계 문제, 포로 처우 개선 및 그들의 정착 조치 등에 더 신경쓰는 모습까지 보여 비난받고 있다. 이는 상술된 게르만족 문제와 로마군 질적 문제보다 그가 현대 로마사 학자들에게 더 크게 비난받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안토니누스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래에서 연이어 취해진 속주 개편 및 통치 과정에서 심화된, 출신지와는 별개로 오랜 복무 기간으로 주둔지와의 이해관계가 깊어진 로마군, 로마군 사령관의 주둔지 권력장악 문제 역시 손보지 못했다. 따라서 설령 하드리아누스가 키워놓은 문제라고 해도 이 부분에서의 노력 역시 지나칠 정도로 소홀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이는 즉위 전까지 군복무 경험이 없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기 전까지 수십년간 방치됐는데, 뒤늦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노력한다고 해도 수십년간 미뤄진 이 문제들은 한 명의 황제가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이런 안토니누스의 실책들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까지 미봉책에 그치게 된 위험성을 내포케 했다.
4. 성격 및 일화
전임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와 달리 겸손하고 솔직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만년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기한테 개긴 원로원 의원들을 고발하는 칙령을 내리자 앞장서서 이를 막았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죽음 이후 고발을 모두 취소시켰다. 그 이유를 하드리아누스의 명령 때문이라고 말해 원로원의 신임을 얻었다. 그의 이름에 붙여지는 피우스(자비로운 자)라는 별칭은 이 때문에 생겨났다.또한 정책 결정시 친구들과 숙의하고 결정을 내리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모든 정보를 보고 판단해야 하는 황제로서 과히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안토니누스의 친구들이 대부분 한가닥 하던 인물들이라 굳이 걸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27]
태어나면서부터 엘리트 계층이었고, 자신도 이를 자각하고 있었다. 황제 즉위 직후 관례적으로 내리는 하사금을 원래 자기 재산에서 충당해 버릴 정도로 공과 사의 구별에 엄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유머 감각과 온화함도 갖추고 있었다니, (동시대 인물들의 평처럼) 천상 '신사'였다. 사자 사냥을 좋아한 전임 황제와 달리 낚시를 좋아했고 황제 소유로 되어 있는 별장에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검소했다고 한다.
물론 약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안토니누스의 최대 약점은 황실 여인들이었다. 먼저 황제는 네 자녀 중 유일하게 오래 산 막내딸 소 파우스티나를 몹시 아낀 딸바보였다. 따라서 그는 소 파우스티나와 사위 마르쿠스, 그리고 또 다른 양자 루키우스를 문자 그대로 끼고 살았다. 아울러 그는 막내딸 못지 않게 아내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대 파우스티나)를 사랑했던 애처가이면서도, 유독 아내와 그녀의 친구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공처가였다고 한다. 후대에 작성된 고대 기록, 동시대 사람의 기록을 참고해 적은 로마인들에 따르면, 안토니누스의 아내 대 파우스티나는 기가 쎄고 단정치 못한 품행을 가지고 있어, 안토니누스는 아시아 속주 총독 시절과 황제 등극 직후, 그녀의 성격으로 벌어진 일이 있을 때마다 슬픈 마음으로 여러 번 참았다고 한다. 다만, 대 파우스티나가 진짜 방종맞고 거친 언행을 했는지는 의문이라는 평을 듣는다. 왜냐하면 이 주장이 시작된 고대 기록들은 거진 1세기 후에 나온 기록이거나, 대 파우스티나와 소 파우스티나 및 그녀들의 자녀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본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그 제자들, 디오 카시우스의 것들에서 시작된데다, 이런 출처를 남긴 쪽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부부와 당시 10살이던 소 파우스티나를 아시아 속주에서 총독과 휘하 도시 담당관으로 만난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후일 소 파우스티나에게 이를 갈면서 뿌린 비방성 악담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티쿠스와 그 제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믿은 당대, 후대 기록들은 안토니누스가 진짜 공처가였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낳게 한다는 평을 듣는다.
대 파우스티나는 상당한 미녀에 교양이 풍부하고, 세련된 멋쟁이였지만, 다른 로마 귀부인들과 비교해 여장부 성격에 확실히 자기 주장이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와는 성격이 딴판이었고, 조용하고 침착한 남편과 묘하게 대비됐다. 하지만 안토니누스와 대 파우스티나는 일평생동안 서로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연인 사이였다. 그녀는 일평생동안 로마와 로마 근교 호화별장 외에는 살아본적도 없었지만, 안토니누스가 좋아하는 소박하고 지나치게 평범한 에트루리아 시골집 생활을 즐겼고 남편의 취미활동을 함께 할 정도로 이해심이 대단했다. 이런 까닭에 안토니누스는 신혼 때부터 아내를 무척 좋아해, "맹세코, 나는 아내 없는 궁전에서 사느니 차라리 아내와 함께 기아라 섬[28]에서 살겠다."[29]고 했고, 서기 141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안토니누스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괴로워했다.
대 파우스티나 사후, 그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또 다른 여인들은 양자이자 후계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와 유일한 그의 첩실 갈레리아 리시스타라테, 그리고 안토니누스에게 장모 역할을 해준 아내의 이모 소 마티디아였다.
소 마티디아는 서기 85년 전에 태어나 대략 서기 161년 이후까지 살 정도로 매우 장수했던 황실 어른이었다. 그녀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딸로 여긴 누나의 손녀 중 한명으로, 고상하고 교양 넘치는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무척 아낀 친혈육이었고, 하드리아누스가 진심을 다해 존중하고 배려한 황녀였다.[30][31]
마티디아는 85년 아버지 루키우스 민디우스가 죽을 때부터 어머니 살로니아 마티디아, 이부자매 비비아 사비나,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와 함께 외종조부 트라야누스의 명으로 함께 살았고, 첫 남편과 사별 후 재혼하지 않았고, 자녀 없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이런 점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이었는데, 혈육이 많지 않던 트라야누스 황제는 조카의 세 딸 중 결혼하지 않은 그녀에게 다양한 지위와 선물을 내리면서 손녀로 대했다. 따라서 마티디아는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한 도시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직접 내린 대저택, 영지를 받아 살았고, 로마에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즉위 전까지 산 빌라를 받았다. 그녀는 로마와 이 도시를 오고 가며 살았는데, 신분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두루 사람을 배려하고 친구로 대했다. 그래서 그녀가 거주한 도시는 주민들의 결정으로 그녀 이름을 딴 마티게라고 개명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장모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언니 미티디아는 그가 대 파우스티나와 결혼한 직후부터 최대 후원자였다. 그녀는 자매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자녀들을 일찍부터 친자녀로 대했고, 대 파우스티나를 동생이 죽은 뒤엔 어머니처럼 아꼈다. 그래서 안토니누스 역시 이런 배경으로 마티디아에게 여러 도움을 받았고, 그녀의 영향력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재위 기간 내내 대단했다. 마티디아는 피우스가 대 파우스티나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하드리아누스 황제 생전 당시에는 황제 부부의 순행을 함께 하면서 안토니누스에게 많은 지원을 했고, 안토니누스가 즉위한 뒤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 결혼 결정과 같은 굵직한 가족 문제를 슬기롭게 도와줬다.[32] 또 그녀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어머니 역할도 함께 했는데, 이런 그녀의 도움과 배려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대 파우스티나 건강이 악화된 직후부터 그녀에게 두 양자 양육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다.[33] 또 그녀는 조카사위 안토니누스를 위해 본인의 영향 아래 여러 잡음을 막아, 피우스는 이런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래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이런 마티디아에게 아우구스타들이 누린 몇 가지 특권을 내려, 그녀가 자신의 유언장을 법적 효과로 선포할 수 있도록 해줬고,[34] 캄파니아에서 지진 발생 후 복구된 세사 아우룬카 재건 당시에는 황제가 마티디아의 관대함을 앞세워 그녀를 자신의 어머니이자 장모라고 하며 동상, 비문을 건립했다.
마르쿠스의 친모인 도미티아 루킬라는 안토니누스 치세 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시누이였던 대 파우스티나 생전부터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아들 마르쿠스에게도 시누이(마르쿠스의 장모이자 고모) 대 파우스티나처럼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래서 안토니누스는 처조카이자 사위이며 양자인 마르쿠스처럼 도미티아 루킬라의 영향을 받았고, 이들 여인들의 영향 탓에 아내의 친조카인 마르쿠스의 배필을 바꾼 것이 아니냐는 호사가들의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안토니누스는 이 두 여인 외에도 아내가 생전 총애하던 노예 갈레리아 리시스타라테의 의견도 많이 참조해 이를 그대로 반영하기로 유명했다. 대개의 로마 황제들은 아내와 사별 후, 여러 젊은 여인들을 정부(첩)나 비밀애인으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공화정기 원로원 의원, 귀족들도 비슷했다. 그런데 안토니누스는 특이하게도 아내 사후, 아내를 지근거리에서 모신 갈레리아 리시스타라테를 아내의 유언과 결정, 마티디아의 권유로 자신의 정부로 삼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이 방식으로 그는 아우구스타 자리를 원한 귀족 가문과 여러 귀부인들의 관심을 뿌리쳤고, 궁중 음모를 조기 차단했다. 이는 이전의 베스파시아누스와 비슷한 경우였는데, 베스파시아누스와 달리 안토니누스는 지극히 아내의 생전 결정과 유언 등을 반영해 리시스타라테를 첩실로 삼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35][36]
리시스타라테는 대 파우스티나를 오랫동안 모신 노예로 대 파우스티나 생전 해방노예가 되고, 옛 주인인 대 파우스티나가 죽은 뒤, 옛 주인 결정 아래 황제의 첩실이 됐다. 따라서 그녀는 다른 정부들과 달리 거의 비서, 생활보조인처럼 살았다. 동시에 그녀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비호 아래, 황제의 첩실 자격으로 인사결정에 어느 정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첩실 갈레리아 리시스타라테의 도움으로 근위대장 자리에 오른 인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피우스의 시대 내내 이들 세 여인의 입김은 상당해, 이들의 개입은 많았다. 그래서 어느 날 발레리우스 호물루스가 황제가 주재하는 아폴로 신전 제사에서 도미티아 루킬라가 기도하는 것을 보고 농담삼아 "저 여자(도미티아 루킬라)는 폐하의 날이 끝나고 자신의 아들이 제국을 통치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있는 겁니다"라고 황제에게 얘기하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당시 이 사람의 말이 워낙 뼈있는 농담이면서도 상황을 봐가며 한 까닭에, 안토니누스의 반응은 성격처럼 그냥 평화롭게 넘어갔다고 한다. 황제는 이후에도 이 농담에 대해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는데, 이는 본인이 이를 간접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발레리우스 호물루스의 발언은 안토니누스 황제의 심기를 건들지 않고, 황제 측의 경고도 담겨, 황제 입장에서는 되레 고마운 말이었다. 서로 농담으로 여겨 웃고 넘겼다고 하나, 호물루스의 지적은 곧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경고였다. 도미티아 루킬라와 그녀의 딸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동생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의 문제는 모두 인지할 만큼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들은 고상했고 교양 넘쳤지만, 안토니누스의 양자, 사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배경을 믿고 기가 세고 주제넘게 행동 중이라고 지적받고 있었다. 이들 모녀가 지위를 이용해 자기들 집에 하숙한 유지들 아들들을 노골적으로 추천하거나, 피시디아의 술라 영지[37] 등 값 나가는 부동산을 집어 삼킨 것은 유명했다.
이 외에도 안토니누스는 별명처럼 워낙 신사라서 시민이나 비(非) 로마인 및 주변 민족, 심지어 자신의 권한 안에 있는 노예와 클리엔테스들에게까지 유독 사랑을 받았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이런 그를 전설적인 로마의 초기 왕이자 칼푸르니우스, 아이밀리우스 씨족[38]의 시조인 누마 폼필리우스와 비교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온화한 성품의 안토니누스는 23년 내내 누마처럼 종교의식도 성실히 수행하고, 운을 타고 났다고 할 정도로 재위 내내 평온한 치세를 보냈기 때문이다.
[1] 흔히 '피우스'를 본명으로 아는 경우가 많으나, 이 별명은 제위 등극 이후 원로원에서 준 존칭 같은 별칭으로, 제호 안에 포함된 이름이다.[2] 아내의 이모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양자로 입양된 뒤, 개명한 이름.[3] 138년 7월 10일 즉위 직후, 전임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뜻에 따라, 관례상 사용했다. 이 제호는 다음 날, 원로원에서 피우스 칭호를 줄 때, 제호를 바꾸면서 황제 스스로 바로 바꿨다.[4] 138년 7월 11일 이후부터 서거까지 사용했다. 너무 길고, 거창하다며 황제 본인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라고 짧게 제호를 서명했고, 발행 주화 역시 재위 초기 외에는 약칭된 제호를 널리 사용했다.[5] 7월 10일 즉위 직후.[6] 브리타니아 승전 선포 직후, 로마군에서 찬사.[7] 오늘날의 프랑스 님[8] 대개의 이탈리아의 오래된 평민 씨족 가문들처럼 안토니누스 가문 중 일부는 포에니 전쟁 이후 퇴역병들이 현지에 땅과 노예를 받아 정착해, 제정 시대부터 원로원에 이름을 날렸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법학자, 장군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의 스승 프론토와 친구인 가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이 사람은 부친이 푸닉의 도시 키르타 태생이고 프론토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속주에서 태어나 로마로 건너온 이탈리아 혈통의 속주 태생 로마인이었다. 즉,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외조부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와는 혈연관계도, 지연도 없어, 안토니누스 피우스와는 남남이었다.[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할아버지이다.[10]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황제가 된 뒤에도 휴일마다 가족들과 함께 개인 사유지에 있는 시골집에서 닭을 키우고, 사냥과 낚시를 즐기는 가정적이고 목가적인 생활을 즐겼다.[11] 본명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로 저 이름은 후계자로 선정되면서 개명한 것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즉위 초기에 숙청한 선제 트아야누스의 4명의 중신들 중 한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아 그 사이에 자식이 있었던 그를 후계자로 삼은 건 하드리아누스 입장에서 정치 노선은 달랐으나 분명 애국자였던 그들에 대한 나름의 속죄였을지도 모른다.[12] 본국 이탈리아 내에 설치된 4구역 판사직 폐지, 하드리아누스가 임종하면서 일부 원로원 의원들의 처벌을 수락하고 이들의 법적 보호를 박탈한 명령[13]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에 건설된 안토니누스 방벽이다.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달리 이 방벽은 기본적인 감시 기능을 확장한 개념이었다. 철저하게 수성으로 일관한 안토니누스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14] 그나마도 안토니누스의 편지 한 통으로 해결하곤 했다.[15] 트라야누스 황제는 친자녀, 사생아 모두 없었다. 트라야누스의 누이는 딸의 자녀들로 후사가 이어졌지만, 그녀의 외손녀 자녀 중 유일하게 자녀를 둔 사람은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였다. 소 마티디아는 첫 결혼 중 남편과 사별 후 정절을 선언했고, 자녀가 없었다. 하드리아누스와 결혼한 비비아 사비나 역시 자녀가 역시 없었다.[16] 가장 익숙한 선례로는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친혈육들인 누나의 외손자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 미래를 위해 서기 4년, 서기 7년, 서기 14년 연달아 취한 결정이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때 이들 형제를 보호하고, 게르마니쿠스가 본인의 모든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고자, 아내가 첫 남편에게서 얻은 의붓아들이자 딸 율리아의 남편 티베리우스를 정식 입양한 뒤, 사후 공개된 유언장으로 이를 공식화했다.[17] 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여러 자녀 중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딸 파딜라와 결혼했다.[18] 마르쿠스가 1살 연상[19] 소 파우스티나와 이혼을 하려면 자신의 황제 직위도 반납해야 한다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으니 말 다했다. 물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소 파우스티나가 금슬이 좋아서 어느 정도는 핑계거리로 댄 것이기도 하다.[20] 게다가 소 파우스티나는 그 당시 기준이나 오늘날 기준으로 봤을 때, 소문이나 후대 콤모두스 암살 후 기록처럼 그렇게 음탕한 편은 아니었으나 정숙한 부인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운신 폭이 이 때문에 좁아진 건 확실해, 어쩔 수 없이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넘겨준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21] 이 부분의 경우, 콤모두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생전에는 별다른 문제도 안 보였고, 무엇보다 황제의 외아들이라는 위치 상 그를 죽이지 않으면서 제위를 넘겨주지도 않는 것 자체가 분쟁의 씨앗을 뿌려두고 최고급 비료를 한가득 부어둔 것이니 다름 없는 행위라서 파우스티나와는 별개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기는 하다.[22] 트라야누스랑 달리 전쟁은 하지 않아서 전리품은 없고 황제의 제국 순행으로 지출은 매우 늘었다. 로마만 그런 건 아니지만 권력자의 순행은 온갖 행사와 축제로 많은 경비가 지출된다. 더군다나 즉위시 국고에 넣어야 할 부채 8억 세스테르티우스를 탕감해주기까지 했다.[23] 은화의 은 함유량은 네로 황제 이후로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나 세베루스 황제가 갑자기 하루 아침에 줄였다는 소리도 있는데 그런 게 절대 아니다.[24] 3세기의 위기를 로마 체제 자체에서만 찾고, 게르만족의 성장에 대해선 도외시하던 잘못된 연구 경향들을 말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평화 정책에 대한 건이 아니다.[25] 그렇다고 해도 루킬라의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가 발생해, 궁중암투 자체가 192년 전까지 마냥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까지 안토니누스가 완전히 막았다는 평은 이전처럼 황제 자리를 놓고 파벌끼리 원로원에 다리를 놓고 연대해 황제를 정치적으로 집요하게 공격하거나, 근위대 일부를 포섭해 황제를 제거하려는 암살 음모 방지 등을 말한다.[26] 다행이라면, 평온했던 나라에 큰 위기가 닥친 시대에 때마침 로마 제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등장해 급한 불은 껐다는 점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노력한다고 해도, 황제의 건강은 즉위 전부터 오랜 격무로 인해 좋지 않았고 제국의 문제는 황제 혼자의 노력으론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후임은 첫 2년간은 나름 일을 했다가, 이후 완전히 망가져 나라를 내팽겨친 콤모두스였으니....[27] 사실 이런 모습은 세종대왕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28] 에게해에 위치한 섬으로 로마 시대 범법자들이 유배되는 곳으로 유명했다.[29] 일부 책들에서는 황제가 막내딸 소 파우스티나를 빗대한 말로 나오는데, 사실은 동명이인의 아내 대 파우스티나를 거론하면서 한 말이다.[30]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아내에게는 꽤 냉담했지만, 장모와 아내의 자매들에게는 매우 자상하고 무한한 애정을 밝혀 보였다. 이 정도의 애정을 받은 사람은 하드리아누스를 젖먹이때부터 키워준 유모 게미니아 부부 외엔 없을 정도였는데, 하드리아누스는 마티디아에게 제국 순행을 권유했고, 자신의 서신을 검토할 특권을 주고, 말년에는 까칠한 와중에도 먼저 인사 추천을 청했다.[31] 하지만 두 황제 모두는 마티디아에게 아우구스타 칭호를 내리지 않고, 황녀 특권만 내렸다.[32] 소 마티디아는 비비아 사비나와 함께 자매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세 자녀를 자신들의 아이로 여겼다. 이중 소 마티디아는 일찍부터 대 파우스티나와 그녀의 딸 소 파우스티나를 아꼈고, 남조카 중에서는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버지)를 아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부부의 자녀들 양육까지 할머니처럼 손수 도왔다.[3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가 즉위 후 회고했듯이, 마티디아는 어린 루키우스 베루스를 손수 키우고, 입양으로 형제가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를 친형제 이상의 우애를 쌓게끔 성장시킨 할머니이자 어머니와 같았다.[34] 마티디아는 조카사위 안토니누스 피우스보다 장수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때까지 살았다. 따라서 그녀의 유언장 공표와 상속 명령 집행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됐고, 소 파우스티나가 고인의 손녀 역할을 하면서, 로마 시민과 마티게 주민들에게 현금을 하사했다.[35] 로마 사회에서 아내와 사별 후 정식결혼을 거부한 이들이 형식적으로 사실혼 형태의 첩 내지 정부를 한명을 둔 것은, 통상적으로 가문을 이을 후계자와 남은 자녀를 배려하거나 죽은 아내를 못 잊어 내린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보통의 귀족 중 바람을 피거나 자유로운 삶을 원한 이들은 대개 복수의 애인을 두고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지 않는 방법을 선호했기 때문. 물론 갈바의 예처럼 죽은 아내의 친정 전체가 기가 쎄고, 사별해 홀로 된 남편이 큰 흠집이 있을 경우에도 애인을 두는 경우가 있긴 했다.[36]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사위, 양자이자 대 파우스티나의 친조카이며 양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시 이런 사례를 반영해, 소 파우스티나와 사별 후 당시 홀로 된 옛 약혼녀 케이오니아 파비아의 청혼을 거절하고 아내가 맺어준 여인을 애인으로 승격시켜 정식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했다. 물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진짜 이유는 소 파우스티나를 못 잊어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37] 공화정 후기의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서 승리 후 피시디아 지방을 로마 속주로 편입할 때에 개인 영지로 얻은 땅으로, 당대부터 매우 비싸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매물이 나오더라도 경매가 치열했고, 가격이 엄청났는데, 이 비싼 대영지를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는 어떤 수를 써서 헐값에 사들였다. 당시에는 오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카이사르 신분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콤모두스 황제를 루킬라와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의 아들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등이 암살 시도한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후 회자돼 비난을 받았다. 그렇지만 로마에서는 연좌제가 적용되지 않아, 술라 영지는 그녀의 후손 안니아 파우스티나를 거쳐, 안니아 파우스티나의 두 자녀 폼포니우스 바수스, 폼포니아 움디이아 남매 소유로 넘어갔다. 이는 튀르키예에서 비문 발굴로 확인됐다.[38] 피소로 유명한 칼푸르니우스 가문은 누마의 차남에서 기원한 진짜 후손이 맞는 반면, 아이밀리우스 가문은 알바롱가에서 기원해 로마로 강제편입된 알바롱가 귀족의 후예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