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44대 황제 막시미누스 다이아 MAXIMINVS DAZA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누스 Galerius Valerius Maximinus |
출생 | 270년 11월 20일 |
로마 제국 다이아 | |
사망 | 313년 7월 (향년 42세) |
로마 제국 타르수스 | |
재위 기간 | 동방 부제 |
305년 5월 1일 ~ 310년 (5년) | |
동방 정제 | |
310년 ~ 313년 7월 (3년) | |
전임자 | 갈레리우스 |
후임자 | 리키니우스 |
부모 | 양부 : 갈레리우스 |
배우자 | 2명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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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황제. 전대에 군인 황제 시대를 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같은 막시미누스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므로 거기에 연이어서 막시미누스 2세라고 하기도 한다.[1]파라오 지위를 가졌던 최후의 파라오이다.
2. 생애
갈레리우스 황제의 외조카로, 270년 11월 20일 다키아 지방의 펠릭스 로물리아나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다자(Daza)였는데, 이 이름의 뜻은 고향 일리리아 일대의 이름이었다. 다만, 이런 이국적인 이름에도 그는 날 때부터 로마인이었다.그는 외삼촌에게 로마식 이름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누스를 받았고, 공식적으로 막시미누스라고 불렸다. 이후 그는 군에 입대해 장교가 되어 군경력을 쌓아 나갔다.
25살이던 305년, 외삼촌 갈레리우스에게 동방 부제의 자리에 임명받아,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치권을 위임받았다. 이때 그는 카이사르 칭호를 받으면서 사실상 갈레리우스의 상속자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308년 외삼촌 갈레리우스는 리키니우스라는 무명의 군인에게 서방의 아우구스투스 자리를 내렸다. 이때 갈레리우스는 전현직 여러 황제들을 소집한 회동에서 서방의 정제[2]에 리키니우스를 올려 오르게 했다. 실망한 다이아는 불만을 품게 됐다. 그래서 동방 정제인 삼촌이 멀쩡히 살아있던 310년, 자신에게도 정제 지위를 달라고 삼촌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305년에 카이사르 칭호를 내린 조카를 지켜봤던 삼촌 갈레리우스는 정제의 희소성을 생각해서 딱 잘라 거절했다. 대신 갈레리우스는 308년 다이아와 콘스탄티누스에게 필리우스 아우구스티(Filius Augusti, 황제의 아들)라는 칭호를 주었다.
이렇게 외삼촌의 양자이자 정식 상속자임을 보장받았지만, 다이아는 정제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310년 페르시아 원정 도중에 군대의 지지를 내세워 자신을 스스로 아우구스투스라고 칭했다. 이때 그는 정제의 복장과 상징을 자기 멋대로 그냥 썼다고 한다.
기독교를 싫어해서, 외삼촌 갈레리우스가 사후 한 달 전쯤(311년 4월) 발표했던 기독교 관용령(Edict of Toleration by Galerius)를 그냥 무시하고 자신의 지배 영역에서 유혈 탄압을 행했다고 한다. 심지어 병사들이 기독교인들을 쫓다가 아르메니아 국경을 넘어가서 아르메니아 쪽에서 크게 항의를 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기독교 사가 락탄티우스의 <박해자의 최후>(De Mortibus Persecutorum)에 의하면, 그의 최후에 대한 묘사는 삼촌 갈레리우스처럼 최대한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3]
311년 외삼촌 갈레리우스 사후 서방 정제의 직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동방으로 오게 된[4] 리키니우스와는 관할권을 두고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고(사두정의 내전), 2:2 구도가 되니 적의 적은 나의 친구의 원리로 막센티우스[5]와 동맹을 맺게 된다. 하지만 막센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에게 패해 죽어서 먼저 떨어져 나갔고, 결국 313년 4월 30일 트라키아의 치랄룸(Tzirallum)에서 리키니우스에게 패하게 되면서[6] 결국 몰락하고 후퇴하면서[7] 니코메디아를 거쳐 그 해 8월, 소아시아 남동부의 타르수스에서 향년 만 42세로 죽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의하면 독(Poison)이 확실히 언급되었으므로, 독살이었거나 독으로 자살했을 것으로 보인다.[8] 당대의 자료인 위에 언급했던 <박해자의 최후>에서도 "그는 독을 삼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망 당시, 이름 미상의 아내와의 사이에 막시무스라는 이름의 8살 아들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7살 딸을 뒀다고 한다.
[1] 영어 위키백과에는 항목명이 막시미누스 2세로 되어 있다.[2] 저 회동 자체가, 4두정치를 지키려는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스스로 4두정치를 파괴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정제를 부제에서 올려야지, 웬 듣보잡을 자기 친구라고 해서 바로 정제로 올렸기 때문이다.[3] 음독 후 며칠에 걸쳐서 정신착란, 발작, 흙 집어 먹기, 맨벽에 이마 찧기, 안구에서 빠져나온 눈알 같이 잘 죽었다고 비꼬는 것처럼 구체적이다.[4] 서방에는 경쟁자가 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 둘인데 동방에는 경쟁자가 다이아 하나인 점 때문으로 보인다.[5] 원래 리키니우스는 서방 정제로, 서방에서 가장 중요한, 즉 정제가 영유할 땅은 당연히 로마 시가 있는 이탈리아고, 그런 이탈리아는 식량 안보 및 지정학적 특징 때문에 북아프리카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원래라면 리키니우스의 땅이었을 곳을 막센티우스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6] 에디르네(아드리아노플) 근교라, 이 전투가 역사상 여러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 전투 목록의 처음을 장식한다.[7] <비잔티움 연대기>에 의하면 노예로 위장하고 달아났다고 한다.(...)[8] His death was variously ascribed "to despair, to poison, and to the divine just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