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2] Ga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 ||
별명 | 칼리굴라 Caligula | ||
출생 | 12년 8월 31일 | ||
로마 제국 안티움 | |||
사망 | 41년 1월 24일 (향년 28세) | ||
로마 제국 팔라티누스 언덕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37년 3월 16일 ~ 41년 1월 24일 (3년 31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제호 | Ga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3][4] | |
휘 | GAIVS IVLIVS CAESAR GERMANICVS[5] |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 ||
배우자 | 유니아 클라우딜라 (33년 결혼 / 34년? 36년? 37년? 사망) | ||
리비아 오레스틸라 (37년 결혼 / 37년 이혼) | |||
롤리아 파울리나 (38년 결혼 / 38년 이혼) | |||
밀로니아 카이소니아[6] (39년 결혼) | |||
자녀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이[7], 율리아 드루실라,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 (논란)[8],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사촌동생, 입양아들) | ||
아버지 | 게르마니쿠스 | ||
어머니 | 대 아그리피나 | ||
형제 |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 티베리우스 카이사르[9], 가이우스 율리우스(이그노투스 카이사르)[1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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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Oderint, dum metuant.
두려워하는 한, 증오하게 둬라.[11]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 두려워하는 한, 증오하게 둬라.[11]
재위 기간 내내 원로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최후가 비참했던 터라 고대 기록으로부터 암군, 폭군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20세기 이후 옛 로마 강역에서 대대적인 유적, 유물 발견과 새로운 비문 발견과 해석이 이루어지면서, 현대에는 폭군이긴 하지만 역사 기록에서 쓰여져 있는 만큼 비상식적이고 터무니없을 정도의 폭군은 아닌 것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2. 명칭
통칭은 칼리굴라(Caligula)이지만, 이는 로마 관보, 비문, 동판, 로마인들의 기록상 공식 표기나 이 사람이 제 입으로 자신을 부른 공적, 사적 통칭이 아니다. 공식적 이름이자 로마인들이 부른 이름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CAIVS CAESAR GERMANICVS), 줄여서 가이우스(CAIVS)다. 현대 이탈리아에서는 가이오 체사레 "칼리골라", 황제의 본명을 부를 경우에는 가이오(Gaio), 카이오(Caio)라고 하며 줄여 부를 때는 통칭화된 별명 칼리골라라고 한다.칼리굴라(Caligula)는 가이우스 황제의 어린 시절 병사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후대에 이르러 학자들이 가이우스를 외삼촌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구분하기 위해 부른 이름이 대중 영화 《칼리굴라》로 유명세를 떨치면서 통칭이 된 경우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실제 로마 기록상 가이우스 황제를 직접 다룬 타키투스와 세네카, 유대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요세푸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는 그를 로마의 임페라토르이자 프린켑스, 로마 시민으로의 이름처럼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적거나 줄여 부르더라도 '가이우스'로 표기할 뿐 오늘날 사람들처럼 칼리굴라라고 당연시하며 부르지 않고 있다.[12][13] 이는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조시무스의 기록,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발행한 라틴어 비문 해석 매뉴얼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시무스는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쓰다가 간혹 가이우스 칼리굴라로만 표기 중이다. 오늘날 서양 로마사 비문 해석 바이블로 쓰이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발행서에 나온, 로마 시대 비문이나 관보 등에서도 이 황제는 명확히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로 나온다.
오늘날 대중들에게 통칭화되어 불리는 칼리굴라(Caligula)는 작은 군화[14]라는 의미다.
3. 상세
로마 황제로서 살아생전 이름은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당대 필로는 가이우스라고 적고 불렀고, 후대 디오는 "지금 우리가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부르고, 몇몇은 가이우스 게르마니쿠스라고 하는 가이우스 황제"라고 하는 로마 제국의 세번째 황제다.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Gaius Iulius Caesar Germanicus).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 중 처음으로 황제가 된 인물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함께 로마인들에게 역대 로마 황제 중 카이사르라는 명사를 황제 지칭 표현이 아닌, 황제 개인 공식 성씨로 불린 마지막 황제이다. 또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친혈육으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를 모두 이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이기도 하다.
로마 황제 중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함께 카이사르(CAESAR)를 황제라는 개인명사가 아닌, 형식상 공화국인 원수정 로마 아래에서 개인 성씨로 황제 본인과 원로원이 사용해 부른 마지막 ‘카이사르’이다. 이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이래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의 직계를 중심으로 한 혈육 간의 입양 형식으로 이어져 내려 왔다. 하지만 칼리굴라가 근위대장 카이레아와 그를 따르는 일부 근위대 병사들에게 배신당해 일가족 전체와 살해됨으로써 역사상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15]
원로원 회의록, 금석문, 관보, 요세푸스, 필로의 기록 등 당대기록에서는 이 황제를 오늘날 통칭으로 부르는 칼리굴라 대신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이는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을 어린 시절 불렸던 별명을 통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황제 본인을 비롯해 로마 원로원과 로마인들도 공식석상에서는 가이우스, 또는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이는 후대 로마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실제 기록에서 그는 그냥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불린다. 따라서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역시 칼리굴라로 불린 가이우스 황제를 다룬 저서의 이름을 《가이우스》로 했다. 수에토니우스 역시 자신의 기록에서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적고 있고, 관보, 회의록, 당대 로마인들의 표기 등을 존중한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 타키투스 역시 살아생전 칼리굴라를 부른 것처럼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따라서 이 황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연대기》에서도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현대 역사가들과 국외내 논문 중에서 이 황제의 외교정책이나 국방정책 등을 언급하는 경우, 로마 공식 관보와 황제 본인 생전의 통칭을 존중해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하면서 칼리굴라라는 이름을 통칭, 별칭으로 각주, 괄호로 언급해 사용하거나 아예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로 표기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람들이 이 황제를 굳이 별명이자 통칭 칼리굴라(Caligula)로 부르거나 이름 뒤에 넣어 언급하는 이유는, 칼리굴라가 대중들에게 유명해진 것과 이 황제의 풀네임이 외삼촌 가이우스 카이사르[16]와 비교하기 어려운 까닭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서에서도 본래 로마 공식 관보, 로마 시민권자로서의 개인 이름, 황제로 사용된 본명인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대신 칼리굴라로 서술됐다.
동시대 정적 세네카, 후세대의 수에토니우스로 대표되는 고대 전승기록에서 "속이 좁고 시기심이 많은 젊은 황제", "말년의 티베리우스가 보여준 통치 방식에 대한 반발로 광기에 휩싸인 사치, 폭력, 쾌락"으로 서술됐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타키투스의 저서 중 가이우스 카이사르 편을 다룬 7권, 8권은 분실됨에도 간접적으로 그의 통치시대가 티베리우스 시대와 비슷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세네카와 수에토니우스의 주장과 광기로 알려진 주장 모두를 오늘날 문자 그대로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고대 기록의 작성자들인 원로원과 재위 내내 갈등을 빚다가 일부 근위대에게 암살된 황제라서 오늘날 대중들에게 네로, 도미티아누스, 콤모두스, 카라칼라 등과 함께 로마 제국의 폭군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고, 고대 전승기록을 토대로 한 영화까지 만들어져 구제 불능의 미치광이 폭군으로 유명해지게 됐다.
이 황제의 짧은 4여년간의 재위기간은 실패로 끝났지만 권력강화와 애매모호했던 로마 황제 권력의 절대화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17] 그래서 그의 시대는 초기 원수정 시대[18]임에도 플라비우스 왕조 이후 권력강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원수정과 비슷했고, 본인은 지중해 동부 헬레니즘식 전제군주를 지향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기대했다가 후기 티베리우스때와 비슷했던 젊은 황제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원로원 입장에서는 질릴대로 질린 티베리우스 시즌 2 내지 광기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 이후에는 과거와 달리 의외로 자신의 직책에 대한 이해도와 통치철학이 확고한 군주로 재평가되고 있다. 현대 서양 학계에서는 그가 짦은 재위 기간동안 했던 공공건축과 인프라 입안 및 건설, 화폐발행권 일원화 등 행정 개혁과 내정 정책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행정적 측면에서는 이미지와 달리 상당히 괜찮았다"고 평가해주고 있고, 칼리굴라가 죽기 전 추진한 로마와 이탈리아 건설 프로젝트는 후임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오스티아 인공항구를 제외한 대부분 건설 프로젝트에서 계속 이어졌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 등으로 스카레와 같은 현대학자들은 칼리굴라가 변덕스럽고 잔인한데다 불안정하며 흥분을 잘하는 젊은 황제여도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원로원의 악의에 찬 평가를 그대로 반영해야 하는 지에 대해 의문을 분명히 드러냈다. 즉, 현대 학자들에게 로마제국의 세번째 황제인 가이우스라는 인물은 "위험하고 불쾌한데다 과대망상 환자에 가까운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 사람의 정보 출처에는 끔찍한 농담과 공허한 허풍과 과장이 담긴 소문들이 많은 탓에 무작정적으로 미치광이로 치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칼리굴라가 즉위할 당시 로마는 초기 원수정 상황상 이런 그의 통치스타일은 상당한 정치력과 자기통제가 필요한 프린켑스 상황에서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19] 그래서 학자들은 이런 그의 행동이 광기, 불안, 과대망상으로 인식됐고 마크로 숙청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를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해 황제의 암살이라는 비극적 결과로 치닫게 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 그의 암살 사건은 선대 티베리우스 말년 시기부터 집약된 불만이 폭주한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 등으로 칼리굴라는 현대 연구 등을 통해 중병을 앓게 된 이후 얻게 된 후유증으로 통치에 어려움을 겪은 암군 내지 프린켑스 권한 강화 도중 근위대에게 암살된 실패한 황제로 재조명받고 있다.
4. 생애
자세한 내용은 칼리굴라/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5. 평가
자세한 내용은 칼리굴라/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대중문화에서
자세한 내용은 칼리굴라/대중문화 문서 참고하십시오.7. 여담
- 로마 제정 초기의 다섯 황제 중 유일하게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기독교 역사를 다룬 3~4세기의 교부 에우세비오가 교회 전승에 따라 저술한 교회사에서는 그가 로마인에게 불린 이름인 가이우스라는 이름으로 직접 나온다. 에우세비오에 따르면 본시오 빌라도로 유명한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유대 장관 시절 벌인 불법 행위, 뇌물 수수 등을 알고 기소해 자살을 명해 죽인 황제가 칼리굴라라고 한다. 개역개정판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아구스도라는 이름으로, 티베리우스는 디베료라는 이름으로, 클라우디우스 1세는 글라우디오라는 이름으로 표기되며[20], 네로는 직접 이름이 나오지는 않으나, 바울의 재판 때 로마 황제에서 직접 재판을 받겠다고 상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로마 황제가 네로다.
- 재위 3년 10개월만에 암살됐지만, 로마 서민들에게는 이름이 계속 회자되면서 나쁘지 않게 언급됐다. 로마 귀족, 서민들은 전차 경주 경기를 좋아했는데, 이때 모두 좋아한 전차 경주 중 스릴 있고 박진감 넘친 방법이 "가이우스의 전차 경기"로 불리면서 사랑을 받았다. 그가 지은 경기장 이름은 가이우스와 네로의 키르쿠스 경기장으로 멸망 전까지 불렸는데, 칼리굴라는 함께 언급된 네로와 달리 전차 경주 대회를 흥미롭게 하고 룰도 재밌게 만든 황제로 회자됐다. 이와 함께 그가 이집트에서 값싸게 곡물을 들여 오면서 이탈리아와 갈리아 일대 기근에 기여한 까닭에 이 지역에서는 호평을 받았다.
- 그가 살아생전 장어 요리를 진짜 좋아해 중독된 것처럼 먹었다는 말이 돌면서, 사람들에게 유럽 바다 장어 이름이 Coluber caligulensis라고 붙여졌다.
- 로마인들의 일관된 기록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암살된 후, 에스퀼리누스 언덕 내 개인정원에서 시신이 급히 화장된 뒤 가매장되었다가, 숙부 클라우디우스 즉위 후 여동생들의 장례식 참석 아래 정식으로 유해가 화장되어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있는 부모 곁에 매장됐다고 한다. 이후 칼리굴라를 비롯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 황후, 황자, 황녀 등의 유골 항아리는 로마를 침공한 서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었고 유골들이 곳곳에 분산됐다는 것이 오늘날 정설이다. 그런데 2011년 1월 17일 이탈리아 로마 남부 라치오주의 도시 네미에 위치한 호수에서 2.5미터짜리 칼리굴라 동상을 훔치려던 도둑이 경찰에게 체포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놀랍게도 칼리굴라의 유골 중 일부가 발견됐다는 발표가 났다. 이때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메리 비어드 교수는 이 발표에 대해 자신이 이 소식을 아침뉴스로 듣고 흥분해 모든 라틴 기록을 다시 읽었다고 한 뒤, 네미 호수에 있는 동상은 그의 매장지도 아니고 그렇게 화려하게 매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아울러 다른 서구권 학자들 역시 비슷한 의견을 냈는데, 이들의 의견도 가매장 후 아우구스투스 영묘 안에 칼리굴라가 영면했다는 기존 정설의 재확인이었으며, 내셔널 지오그래픽 역시 비슷한 의견을 내며 한때 괴물로 묘사된 로마 황제가 묻혔다는 네미와 네미 호수 일대는 칼리굴라의 매장지가 아니라고 밝혔다.
[1] 로마 관보, 원로원 회의록 등을 통해 황제를 명기한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표기에 의거 표기 중, 당대 로마인이 그를 줄여 부른 이름.[2] 로마 관보, 원로원 회의록 등을 통해 황제를 명기한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표기에 의거한, 프린켑스이자 임페라토르로서의 정식 이름.[3] 약칭으로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으며, 로마인들에게는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불렸다.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티베리우스와 본인, 황실 일가를 비롯해 원로원, 군대에서 사용해 부른 이름이기도 하다.[4] 카이사르는 황제 제호가 아닌 성씨로 사용됐다.[5] 태어날 당시 본명. 게르마니쿠스는 할아버지 이래로 대 드루수스 일가 후손들이 성씨 뒤에 붙인 존칭 성씨이다.[6] 네로 시대의 명장 코르불로의 여동생이다. 칼리굴라와 39년 애인관계가 되었고, 임신 중 결혼한 탓에 이런 부분에서 원로원과 로마인들에게 결혼 후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7] 유니아 클라우딜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산욕으로 사망. 이 아이도 이름을 지어줄 8일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8] 후술하지만 대부분의 거짓참칭자처럼 사생아를 주장했던 사람이다. 네로의 근위대장이지만, 제위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칼리굴라의 사생아를 주장하면서 네로 사후 황제를 칭했던 사람이다. 네로 몰락 당시 원로원 편에 붙었다가 제위에 욕심이 생겨 느닷없이 자신이 칼리굴라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워낙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서 휘하 병사들은 당연하고 호사가들조차 이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주장을 하며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호응도 크게 얻지 못하고 살해당했다.[9] 풀네임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의 셋째 형으로 유년기때 병으로 요절했다.[10] 동명이인의 친형이라는 의견도 있다. 남자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8일 전 사망해 가이우스 칼리굴라와 동명이인인지조차 알 수 없다.[11] 칼리굴라가 자주 했던 말로 유명한 이 말은, 수에토니우스 『황제들의 삶 De vita Caesarum』, 칼리굴라편 30.1에 나온다. 원래 고대의 시인 루시우스 아키우스(170 BC)의 희곡 『아트레우스』에서 극중인물 아트레우스의 대사이다. 키케로도 필리포스 연설(1.34)에서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문장이며, 칼리굴라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세네카도 『분노에 관하여』(1.20)에서 이 말이 술라 시대에 쓰여졌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세네카는 키케로를 참조한 듯 보인다. 키케로는 술라 시대의 인물이다.) 그리고 이런 유명한 말을 수에토니우스가 『황제들의 삶』에서 칼리굴라가 가장 좋아한 문구라고 기록한 것.[12] 이는 그를 종종 칼리굴라로 혼용표기 했다고 알려진 수에토니우스도 마찬가지인데, 그 역시 칼리굴라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가이우스 황제를 다룬 저서의 이름을 '가이우스'로 적고 가이우스로 기록했다. 따라서 서양 학자들 역시 논문에서 가이우스로 표기 후 괄호 또는 주석을 넣어 칼리굴라로 소개하며 이런 경향은 갈수록 늘고 있다.[13] 비슷한 사례로는 3세기 군인황제시대의 황제인 푸피에누스가 있다. 헤로디아누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조시무스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 황제는 통칭인 푸피에누스 대신 막시무스로 나와 있다. 그래서 이를 반영해 기술한 서양인들은 푸피에누스 대신 막시무스로 그를 적으면서 푸피에누스를 통칭화하여 부르고 있다.[14] 여기서 말하는 군화란 당연히 현대적인 전투화가 아니라, 당시 로마군이 사용하던 샌달 형태에 내구도를 높이기 위해 밑창에 쇠징을 박은 로마식 군화 칼리가이(Caligae)를 의미한다.[15] 완전히 끊겨진 것은 직계혈연적으로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브리타니쿠스가 네로에게 살해당한 시점이며, 역사상 멸문 시점은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가문의 양자 네로가 실각하고 자살한 이후이다.[16] 현대 이탈리아 표기로는 '가이오 체사레'라고 부른다.[17] 칼리굴라는 짧은 재위기간동안 총 4번의 집정관 경력을 경험했고, 이중 단독 집정관 취임도 있었다.[18] 과도기적 상태의 제정 시대[19]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프린켑스 체제는 기존의 원로원 체제를 존중하는 듯하면서도 교묘하게 활용하고 율리우스 간통법을 활용하여 원로원을 견제해야 하는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하는 체제였다.[20] 다른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일반적인 표기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