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라틴어: Publius Cornelius Dolabella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제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미상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아버지?) 술피키아 갈빌라(아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아들)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10년 |
전임 | 마르쿠스 파피우스 무틸루스 퀸투스 포파이우스 세쿤두스 |
동기 |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
후임 |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씨족인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의 누이인 퀸크틸리아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와 결혼해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낳았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35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서기 10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의 아버지라고 추정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서기 10년 1월부터 6월까지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으며, 집정관을 맡은 동안 고대 로마 사제단에 속한 에플로네스와 티텐시스에 합류했다.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후 달마티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티베리우스는 그의 임기 종료를 19년 또는 20년으로 연기했다.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귀환한 그는 타키투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에게 아첨하는 발언을 2차례 했다. 21년, 가이우스 실리우스가 율리우스 플로루스와 하이두이족 출신의 율리우스 사크로비르가 이끈 갈리아 채무자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그는 티베리우스가 이 승리를 귀한해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하라고 제안했다. 당시 캄파니아에 있던 티베리우스는 이 소식을 접하자 즉각 원로원에 서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로마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는 무의미한 영예를 탐할 만큼 자신에게 명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22년에 지난날 돌라벨라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실라누스가 황제의 위엄을 손상하게 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였다. 돌라벨라는 티베리우스를 판사로 셍우고, 지방 행정관의 도덕성에 대한 조사를 일괄적으로 시행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자신은 행정관들이 실제로 범죄를 저질러야만 처벌할 거라며, 이번 제안 역시 거부했다. 그 후 돌라벨라는 서기 23년 또는 24년 아프리카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의 주요 임무는 로마군에서 탈영한 뒤 10년간 로마를 상대로 저항한 베르베르인 타크파리누스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이전 총독인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1]는 22년 타크파리나스의 동생을 체포했다. 티베리우스는 이를 전쟁의 종식으로 받아들이고 블라이수스에게 개선 훈장을 수여했으며, 9군단 히스파나를 아프리카에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티크파리나스는 여전히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채 은거했고, 로마군이 물러난 틈을 타 사막 부족들 사이에서 약탈단을 재차 모집했다. 그러면서 로마 제국이 다른 지역에서 토착민들의 반란으로 혼란에 빠져서 아프리카에서 병력을 철수했다며, 모든 베르베르인이 힘을 합치면 남은 수비대를 물리치고 누미디아의 해방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설득된 전사들이 대거 가담했고, 가난한 농민들도 밭을 버리고 반군에 가담했다.
24년, 타크파리나스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로마의 거점인 투부스쿰(현재 알제리 카미사 또는 튀니지 테부르수크)를 포위했다. 돌라벨라는 아프리카에 잔존한 로마군을 서둘러 규합한 뒤 투부스쿰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했다. 반란군은 로마군 보병대의 첫번째 돌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패주했고, 마우레타니아 왕국으로 도주했다. 마우레타니아 국왕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들을 토벌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돌라벨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돌라벨라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마우레타니아로 진군해 프톨레마이오스가 파견한 마우리 기병대를 지원받았다. 이후 가능한 한 넓은 영토를 통제하기 위해 평행으로 진군하는 4개 부대로 병력을 나누었고, 연합군 기병대는 정찰병 역할을 하며 주요 부대 사이를 가로질러 이동했다.
얼마 후, 타크파리나스가 아우제아(Auzea)의 반쯤 파괴된 요새 인근에 숙영지를 세웠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곳은 광활한 숲으로 둘러 싸여 있었는데, 돌라벨라는 즉시 경무장 보병과 누미디아 기병으로 구성된 타격대를 숲쪽으로 파견해 적군을 급습하도록 했다. 그들은 야간 행군한 끝에 새벽에 적진 근처에 이르렀고, 해가 떠오르자마자 숙영지를 기습 공격했다. 적이 들이닥칠 줄은 몰랐던 반란군은 순식간에 와해했고, 지난 10여년간 요리조리 빠져나갔던 타크파리나스를 기필코 죽이라는 지시를 받은 백인대장들은 부하들을 타크파리나스 쪽으로 투입했다. 타크파리나스와 호위병들은 곧 엄청난 수의 로마 장병들에게 포위당했고, 이후의 격전에서 호위병들이 모두 죽고 아들이 생포되었으며, 탈출할 가능성이 없자 로마 장병들의 밀집된 창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리하여 타크파리나스를 최종적으로 처단한 뒤, 돌라벨라는 타크파리나스가 속한 베르베르 종족인 무슬라미족(Musulamii)이 차지하던 고원의 세금 등록을 시작했으며, 29년 또는 30년에 완료했다. 이는 로마 측량사가 세운 돌 표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돌 표식은 튀니지 남부의 엘제리드호까지 이른다. 무슬라미족을 비롯해 이곳에 살던 종족들은 다른 곳으로 추방되었고, 해당 고원은 방목지에서 곡물 생산지로 바뀌었다.
그 후 돌라벨라는 원로원에 개선 훈장을 수여받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권고에 따라 거부했다. 이에 대해 타키투스는 세야누스가 자기 삼촌이 타크파리나스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개선 훈장을 받았는데, 돌라벨라가 또다시 같은 공적으로 개선 훈장을 받으면 삼촌의 영광이 훼손되는 걸 꺼렸고, 티베리우스를 설득해 돌라벨라의 공적을 없던 일로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티베리우스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한 후에 전쟁이 다시 불붙은 것에 대해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돌라벨라는 사촌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의 기소에 합류했다. 바루스가 무슨 혐의로 기소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사건 결과 역시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 바루스와 그의 가족이 역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걸 보면 유죄 판결을 받았거나 판결이 내리기 전에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서기 22년 집정관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의 딸인 술피키아 갈빌라와 결혼해 서기 55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