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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42년 |
재임기간 | 로마 제국 집정관 |
32년 | |
직위 | 집정관, 달마티아 총독 |
반란 대상 | 클라우디우스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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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반란자.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 집권 직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2. 생애
부친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는 로마 공화정 초기 위기에 빠진 로마를 구원하여 '제2의 건국자'라는 영광스런 별명이 붙은 명장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의 후손이다. 그러나 푸리우스 가문은 이후엔 이렇다할 뛰어난 인물이 등장하지 않아서 서기 1세기경에는 위상이 쇠락했다. 그러다 카밀루스가 서기 8년 집정관이 되면서 300년만에 처음으로 푸리우스 카밀루스 가문 출신 집정관이 나왔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옛 파트리키 가문을 후원한 정책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카밀루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구이기도 했다. 서기 17년 아프리카의 총독으로서 베르베르인 지도자 타크파리나스를 격파하고 티베리우스로부터 승리의 휘장을 수여받으면서, 푸리우스 가문은 300년 만에 처음으로 군사적 명성을 얻었다.카밀루스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었고, 둘째 아들이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이며, 딸 아룬티아 카밀라는 비문을 통해 알려졌다. 스크리보니아누스는 어렸을 때 루키우스 아룬티우스에게 입양되었고, 로마의 관습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따랐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발탁한 평민 출신 장수로 악티움 해전 승리에 공헌한 루키우스 아룬티우스의 아들이며, 타키투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를 대신해서 황제가 될 만한 능력도, 야망도 갖춘 유능한 귀족이었다.
스크리보니아누스는 성년이 된 후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서기 32년 네로의 아버지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 일당을 모조리 잡아죽이고 있었는데, 원로원 의원들이 그와 결탁하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왕족들을 말살하려 했다고 의심했다. 스크리보니아누스 역시 세야누스와의 관계를 의심받았고, 결국 6개월만에 보결 집정관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로 교체되었다. 그 후 티베리우스가 임종을 눈앞에 두고 칼리굴라가 후계를 이을 가능성이 높아진 시점에서, 양아버지 루키우스 아룬티우스가 두 차례 고발당했다. 아룬티우스는 당시 근위대장 마크로와 원한 관계였는데, 마크로가 칼리굴라의 집권에 방해되는 위험인물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그 역시 걸려들었다. 그는 가족까지 피해를 입기 전에 죽기로 작정하고 자결하려 했다. 친구가 좀더 두고보고, 정 안 되면 도피하자며 자결을 만류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어린애에서 갓 벗어나 아무것도 모르고 해독 속에서 자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세야누스보다 한층 더 나쁜 자인 마크로의 지도를 받으며 통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결국 혈관을 잘라 스스로 죽었다. 양아버지의 이같은 최후를 지켜본 스크리보니아누스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깊은 원한을 품었을 것이다. 4년 후인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가 암살당했을 때, 그는 달마티아 총독을 맡았다. 하지만 그가 소식을 접하고 군사 행동을 벌이기도 전에, 근위대가 선수를 쳐 클라우디우스 1세를 옹립했다. 스크리보니아누스는 원로원이 어쩔 수 없이 클라우디우스의 집권을 용인했지만, 내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복구하고 싶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거병하면 원로원이 적극적으로 지지할 거라 믿고, 무력으로 클라우디우스를 타도할 음모를 꾸몄다.
42년, 스크리보니아누스는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 등 동지들을 끌어모으고 많은 군단에게 막대한 뇌물을 줘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달마티아에서 거병하여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이때 원로원의 일부 의원들도 호응했지만, 왕조에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던 게르마니아, 일리리쿰, 달마티아 일대의 많은 군단병들은 반란에 불참했다. 불참했던 군단 지휘자들이 미신을 이용해 반란에 호응한 이들까지 돌아서게 만들었다.[1] 결국 반란은 5일만에 별다른 전투도 없이 무산되었고, 스크리보니아누스는 이사 섬으로 도망친 뒤 자살했다.
스크리보니아누스에겐 어린 아들 카밀루스가 있었는데, 연좌제가 적용되지 않은 덕분에 아버지의 반란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는 훗날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맡아 로마의 치안을 담당했다. 그러나 서기 52년 점성가들에게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사망 날짜를 예측하도록 요청한 혐의로 이탈리아에서 추방되었고, 얼마 안가 사망했다고 한다.
[1]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하던 장병들이 독수리 군기 깃대에 몰래 시멘트를 발라놓아 반란군의 출정 의식 때 군기가 뽑히지 않게 만든 후 당황한 반란군 장병들에게 신들이 반란을 막는 징조라고 설득해 투항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