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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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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 | 티베리우스 | 가이우스(칼리굴라) | 클라우디우스 | 네로
네 황제의 해 갈바 |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 비텔리우스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 티투스 | 도미티아누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네르바 | 트라야누스 | 하드리아누스 | 안토니누스 피우스 | 공동 즉위 루키우스 베루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콤모두스
비정통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다섯 황제의 해 페르티낙스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세베루스 왕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공동 즉위 게타 · 카라칼라
- 마크리누스 · 디아두메니아누스
세베루스 왕조 엘라가발루스 |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군인 황제 시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 공동 즉위 고르디아누스 1세 · 고르디아누스 2세 | 공동 즉위 푸피에누스(막시무스) · 발비누스 | 고르디아누스 3세 | 필리푸스 아라부스 · 필리푸스 2세 | 데키우스 | 공동 통치 데키우스 ·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 공동 즉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 호스틸리아누스 · 볼루시아누스 | 아이밀리아누스 | 공동 즉위 발레리아누스 · 갈리에누스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 퀸틸루스 | 아우렐리아누스 | 타키투스 | 플로리아누스 | 프로부스 | 카루스 | 공동 즉위 누메리아누스 · 카리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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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 카리누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서방 동방
양두정치 막시미아누스 양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사두정치
막시미아누스 | 콘스탄티우스 1세 |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 막센티우스 | 2차 재위 막시미아누스 | 콘스탄티누스 1세 사두정치 디오클레티아누스 | 갈레리우스 | 리키니우스 | 막시미누스 다이아 | 발레리우스 발렌스 | 마르티니아누스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누스 1세
서방 동방
콘스탄티누스 왕조 공동 즉위 콘스탄티누스 2세 · 콘스탄스
비정통 마그넨티우스 · 율리우스 네포티아누스 · 베트라니오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통일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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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 1세 | 그라티아누스 | 발렌티니아누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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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레오 왕조 2차 재위 제노 | 아나스타시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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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브리아 왕조 레온 3세 | 콘스탄티노스 5세 | 아르타바스도스 · 니키포로스 | 2차 재위 콘스탄티노스 5세 | 레온 4세 | 콘스탄티노스 6세 | 이리니
니키포로스 왕조 니키포로스 1세 | 스타브라키오스 | 미하일 1세 랑가베스 · 테오필락토스 · 스타브라키오스
- 레온 5세 · 콘스탄티노스
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미하일 3세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
- 미하일 6세
콤니노스 왕조 이사키오스 1세
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 | 미하일 7세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로마노스 4세 · 레온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3세
콤니노스 왕조 알렉시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요안니스 2세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 마누일 1세 | 알렉시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
앙겔로스 왕조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3세 | 2차 재위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4세 | 알렉시오스 5세
니케아
라스카리스 왕조 테오도로스 1세 | 요안니스 3세 | 테오도로스 2세 | 요안니스 4세 | 미하일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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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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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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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겸 집정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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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비니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발레리아누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3년 보결 4년 4년 보결 5년 5년 보결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카투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볼레수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클로디우스 리키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 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
6년 6년 보결 7년 7년 보결 8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실라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킬리우스 롱구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8년 보결 9년 9년 보결 10년 10년 보결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파피우스 무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
아울루스 비비우스 하비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퀸투스 포파이우스 세쿤두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11년 11년 보결 12년 12년 보결 13년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실리우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가이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13년 보결 14년 15년 15년 보결 16년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센나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16년 보결 17년 17년 보결 18년 18년 보결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투베로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그라이키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볼루세이우스 프로쿨루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리비네이우스 레굴루스
18년 보결 19년 19년 보결 20년 21년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빕스타누스 갈루스 루키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21년 보결 22년 22년 보결 23년 23년 보결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그나이우스 트레멜리우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피누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가이우스 스테르티니우스 막시무스
24년 24년 보결 25년 25년 보결 26년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아비올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루키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26년 보결 27년 27년 보결 28년 28년 보결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벨라이우스 투토르
29년 29년 보결 30년 30년 보결 31년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수르디누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루벨리우스 게미누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31년 보결 31년 보결 31년 보결 32년 32년 보결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섹스투스 테디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33년 33년 보결 34년 34년 보결 35년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라이나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티투스 루스티우스 눔미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노니아누스
35년 보결 36년 36년 보결 37년 37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섹스투스 파피니우스 알레니우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케로니우스 프로쿨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플라우티우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폰티우스 니그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37년 보결 38년 38년 보결 39년 39년 보결
아울루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아퀼라 율리아누스 세르비우스 아시니우스 켈레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퀸투스 산퀴니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푸블리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칼푸르니우스 세라누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카이시아누스
39년 보결 39년 보결 40년 40년 보결 41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ignotus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sine collega 퀸투스 테렌티우스 쿨레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41년 보결 41년 보결 41년 보결 42년 42년 보결
퀸투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푸티우스 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이우스 바라누스 푸블리우스 수일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42년 보결 43년 43년 보결 43년 보결 43년 보결
코르넬리우스 루푸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섹스투스 팔펠리우스 히스테르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ignotus 스푸리우스 오피우스
44년 44년 보결 45년 45년 보결 45년 보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 아울루스 안토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코르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46년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카메리누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툴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47년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세다투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마르쿠스 호르데오니우스 플라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바겔리우스 가이우스 볼라센나 세베루스
48년 48년 보결 49년 49년 보결 50년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퀸투스 베라니우스 루키우스 맘미우스 폴리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 빕스타누스 갈루스 가이우스 폼페이우스 롱구스 갈루스 퀸투스 알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수일리우스 네룰리누스
51년 51년 보결 51년 보결 52년 52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디에누스 오르피투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베투스 카르미니우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52년 보결 53년 53년 보결 53년 보결 54년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푸블리우스 트레보니우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살비아누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 퀸투스 카이키나 프리무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마르켈루스
54년 보결 55년 55년 보결 55년 보결 55년 보결
마르쿠스 아이풀라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누메리우스 케스티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트레벨리우스 막시무스
ignotus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55년 보결 55년 보결 56년 56년 보결 56년 보결
푸블리우스 팔푸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 안나이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쿠르틸리우스 만키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티투스 쿠티우스 킬투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프로쿨루스
56년 보결 57년 57년 보결 58년 58년 보결
루키우스 두비우스 아비투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아그리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트라세아 파이투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카이시우스 마르티알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58년 보결 59년 59년 보결 60년 60년 보결
아울루스 페트로니우스 루르코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티투스 섹스티우스 아프리카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아울루스 파코니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마닐리우스 보피스쿠스
61년 61년 보결 62년 62년 보결 62년 보결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 그나이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 푸블리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만리우스 타르퀴티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마룰루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루키우스 아피니우스 갈루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63년 64년 64년 보결 65년 65년 보결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안토니우스 마케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 푸블리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65년 보결 66년 66년 보결 66년 보결 67년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아프리누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루키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아니키우스 케리알리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가이우스 파키우스 아프리카누스 마르쿠스 베티우스 볼라누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67년 보결 67년 보결 68년 68년 보결 68년 보결
아피우스 안니우스 갈루스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아스코니우스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베룰라누스 세베루스 푸블리우스 갈레리우스 트라칼루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69년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세르비우스 갈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오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룰레누스 카일루스 사비누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티투스 비니우스 (루피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아울루스 마리우스 켈수스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70년 70년 보결
파비우스 발렌스 그나이우스 카이킬리우스 심플렉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알리에누스 로시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퀸크티우스 아티쿠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70년 보결 70년 보결 71년 71년 보결 71년 보결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ignotus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그나이우스 페디우스 카스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퀴리날리스 발레리우스 페스투스
71년 보결 71년 보결 72년 72년 보결 72년 보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바르바루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두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72년 보결 73년 73년 보결 73년 보결 73년 보결
섹스투스 마르키우스 프리스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오쿨라투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퀸투스 가비우스 아티쿠스 […]m[…] ignotus
74년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퀸투스 비비우스 크리스푸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ignotus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on[…]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74년 보결 74년 보결 75년 75년 보결 75년 보결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파트루이누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76년 76년 보결 76년 보결 76년 보결 7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탐피우스 플라비아누스 갈레오 테티에누스 페트로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길로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77년 보결 77년 보결 77년 보결 78년 78년 보결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가이우스 아룬티우스 카텔리우스 켈레르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데키무스 유니우스 노비우스 프리스쿠스 (루푸스) 퀸투스 코렐리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ignotus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키우스 푸니술라누스 베토니아누스
78년 보결 78년 보결 79년 79년 보결 79년 보결
섹스투스 비툴라시우스 네포스 퀸투스 아르티쿨레이우스 파이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ignotus ignotus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79년 보결 80년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티투스 루브리우스 아일리우스 네포스 임페라토르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파브리키우스 베이엔토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팍투메이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켈루스 옥타비우스 푸블리우스 클루비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리우스 플라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플라우티우스 아일리아누스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81년 81년 보결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포스투무스 브라두아 섹스투스 네라니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티티우스 프루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 노니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로스키우스 코엘리우스
퀸투스 폼페이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킬리우스 스트라보 티투스 비니키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베루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유베날리스
81년 보결 81년 보결 81년 보결 82년 82년 보결
루키우스 베티우스 파울루스 가이우스 스코에디우스 나타 피나리우스 루키우스 카르미니우스 루시타니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세르바이우스 In]noc(ens)
티투스 유니우스 몬타누스 티투스 테티에누스 세레누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움브리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3년
[…]an(us) [가이우스 아리니우스 Mo]dest(us)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파트루니우스 마르쿠스 라르키우스 마그누스 폼페이우스 실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ignotus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퀴에투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
83년 보결 83년 보결 83년 보결 84년 84년 보결
마르쿠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테티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섹스투스 카르미니우스 베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가이우스 피시우스 사비누스 테렌티우스 스트라보 에루키우스 호물루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니그리누스 쿠리아티우스 마테르누스 가이우스 오피우스 사비누스 ignotus
84년 보결 84년 보결 85년 85년 보결 85년 보결
가이우스 툴리우스 카피토 폼포니아누스 플로티우스 피르무스 ignot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리카누스 (마르쿠스 라이키우스 또는 푸블리우스 글리티우스) 갈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호노라투스
85년 보결 85년 보결 85년 보결 86년 86년 보결
푸블리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데키무스 아부리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살비우스 리베랄리스 노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퀸투스 율리우스 발부스 [코르넬리우스] 오레스테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페트로니아누스
86년 보결 86년 보결 86년 보결 87년 87년 보결
incertus 섹스투스 옥타비우스 프론토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퀸투스 비비우스 세쿤두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칸디두스 마리우스 켈수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티디우스 토시아누스 루키우스 야볼레누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87년 보결 87년 보결 88년 88년 보결 88년 보결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가비디우스 테바니아누스 가이우스 킬니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Ⅳ 데키무스 플로티우스 그리푸스 퀸투스 닌니우스 하스타
가이우스 두케니우스 프로쿨루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미니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88년 보결 89년 89년 보결 89년 보결 90년
마르쿠스 오타킬리우스 카툴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푸블리우스 살루스티우스 블라이수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Ⅴ
섹스투스 율리우스 스파르수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사이니아누스 마니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푸시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아카이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바이비우스 이탈리쿠스 루키우스 알비우스 풀라이에누스 폴리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 가이우스 카리스타니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프로쿨루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폼페이우스 롱기누스
90년 보결 91년 91년 보결 91년 보결 92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케리알리스 (또는 마르쿠스 투키우스 케리알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데키무스 미니키우스 파우스티누스 퀸투스 발레리우스 베게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Ⅵ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카툴리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마리누스 푸블리우스 메틸리우스 사비누스 네포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92년 보결 92년 보결 92년 보결 93년 93년 보결
루키우스 베눌레이우스 몬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 아비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실라누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티투스 아비디우스 퀴에투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아룰레누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페두카이우스 프리스키누스 섹스투스 루시아누스 프로쿨루스
93년 보결 94년 94년 보결 94년 보결 95년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라루스 섹스티우스 Na(so) 루키우스 노니우스 칼푸르니우스 토르콰투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실리우스 데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Ⅶ
[투키우스 Ceria]lis 티투스 섹스티우스 마기우스 라테라누스 가이우스 안티우스 아울루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95년 보결 95년 보결 95년 보결 96년 96년 보결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만리우스 발렌스 퀸투스 파비우스 포스투미누스
푸블리우스 두케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툴루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티투스 프리페르니우스 [파이투스]
96년 보결 97년 97년 보결 97년 보결 97년 보결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카이시우스 프론토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폴리나리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icus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섹스투스 헤르멘티디우스 캄파누스
97년 보결 97년 보결 98년 98년 보결 98년 보결
퀸투스 글리티우스 아틸리우스 아그리콜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쿠르비우스 툴루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마테르누스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티투스 베스트리키우스 스푸린나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마르티알리스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아킬리우스 [Pri]scus 코엘리우스 스파르수스
루키우스 마이키우스 포스투무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페록스 리키니아누스
98년 보결 99년 99년 보결 99년 보결 99년 보결
퀸투스 풀비우스 길로 비티우스 프로쿨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팔마 프론토니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크레티우스 바르바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발레리우스 마그누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페록스
푸블리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퀸투스 소시우스 세네키오 세네키오 멤미우스 아페르 아울루스 카이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ignotus
100년 100년 보결 100년 보결 100년 보결 100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마르쿠스 마르키우스 마케르 루키우스 헤렌니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아쿠티우스 네르바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가이우스 킬니우스 프로쿨루스 폼포니우스 마밀리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투스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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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파피리우스 무길라누스 가이우스 푸리우스 파쿨루스 푸수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 (불명)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마르쿠스 게가니우스 마케리누스 푸블리우스 피나리우스 (마메르키누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무길라누스 마르쿠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레길렌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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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마르쿠스 푸리우스 푸수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레길렌시스 스푸리우스 세르빌리우스 프리스쿠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페티쿠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율루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무길라누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퀸투스 클로엘리우스 시쿨루스 (포스투미우스 레길렌시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말루기넨시스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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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임페리오수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
루키우스 푸리우스 메둘리누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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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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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파피리우스 프라이텍스타투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 가이우스 두일리우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페라
기원전 252년 기원전 247년 기원전 241년 기원전 236년 기원전 234년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
기원전 231년 기원전 230년 기원전 225년 기원전 220년 기원전 214년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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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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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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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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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빌라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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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게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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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불명)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루키우스 겔리우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기원전 61년 기원전 55년 기원전 50년 기원전 42년 기원전 28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기원전 22년 기원전 8년 14년 46년 73년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
로마 제국 제10대 황제
티투스
Titus
파일:티투스고화질.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Titus Flavius Vespasianus
출생 39년 12월 30일
로마 제국 로마
사망 81년 9월 13일 (향년 41세)
로마 제국 로마
재위 기간 로마 황제
79년 6월 24일 ~ 81년 9월 13일 (2년 82일)
전임자 베스파시아누스
후임자 도미티아누스
부모 아버지 : 베스파시아누스
어머니 : 도미틸라
배우자 아레키나 테르트라
마르시아 푸르밀라
베레니케
자녀 율리아 플라비아
종교 로마 다신교
1. 개요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2.2. 제1차 유대-로마 전쟁2.3. 후계자 시절2.4. 황제
3. 외모와 사생활4. 평가5.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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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10대 황제이자 두 번째 세습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 황제로서 풀네임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Titus Flavius Caesar Vespasianus Augustus).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장남이자 도미티아누스의 친형. 그의 재위기간 2년 동안에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 완공되었고, 로마 시대 대참사 중 하나인 베수비오 화산 폭발이 있었다.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

39년에 로마에서 기사계급 출신의 직업군인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와 페렌티움 출신 기사계급의 딸이었던 도미틸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고난 이름(본명)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1]였으며, 형제로는 아우 도미티아누스, 여자형제로는 소 도미틸라가 있다.

티투스는 팔라티노 황궁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후계자들과 함께 학문을 배웠다. 특히 그는 동갑내기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와 사이가 돈독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프였던 브리타니쿠스가 네로에 의해 억울하게 독살되었을 때, 티투스는 브리타니쿠스와 음식을 나눠먹었기 때문에 자신도 가볍게 중독되어 죽어가는 브리타니쿠스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친구를 보며 오랫동안 마루에 쓰러져 있었다. 이 일은 티투스의 인생에서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었고, 후에 그가 황제가 되자, 티투스는 젊은 나이에 죽은 옛 친구 브리타니쿠스의 상을 건립해서 죽은 친구를 기렸다.

성년식 이후, 61년부터 63년에 걸쳐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취임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에서 군인장교로 복무했다. 64년에 로마로 돌아와 아레키나 테르트라와 결혼했으나 곧 사별하고 다시 65년에 마르키아 프루니라[2]와 재혼했다. 새 아내였던 마르키아 프루니라는 생가가 제위 후계자였던 네로의 반대 세력에 속했기에 그는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고, 거기다 그해 원로원 의원 피소가 주도한 네로 암살 의혹 사건으로 반강제적으로 아내와 이혼해야 했다. 이들 사이에서는 딸 율리아가 있었는데 티투스는 마르키아 프루니라와 강제적으로 이혼한 이후에는 평생토록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2.2.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이제야 고향의 재난에 두손을 들었느냐? 너희들은 우리가 얼마나 강력한지, 그리고 너희들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가늠해보지도 않은 채 오로지 광기에 사로잡혀 동족과 예루살렘성전을 멸망으로 몰아넣었으니, 이제 너희들도 죽임당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일찍이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되고 지금까지 너희는 끊임없이 반란을 도모해왔고, 마침내 아주 노골적으로 로마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그토록 자신만만해 했던 이유가 과연 너희들의 많은 인원수 때문이었느냐? 허나, 실상은 로마군의 극소수 병력만으로도 너희를 상대하기엔 충분했다. 아니면, 너희가 믿었던 것은 동맹국들이었느냐? 허나, 우리 제국 밖에 있는 어떤 종족이 로마 편이 아닌 유대인의 편에 섰겠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너희들의 신체가 강인하다고 믿었던 것인가? 하지만, 저 게르만인들조차 우리 로마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강력한 성벽을 믿었는가? 그렇다면, 저 거대한 대양(大洋)보다도 큰 장벽이 있을련지 생각해보라. 대양에 둘러싸인 브리타니아인들도 로마군에게 정복되었다. 뛰어난 전략과 영리한 지도자를 믿었는가? 너희들도 잘 알다시피 지략이 뛰어난 카르타고인마저 우리에게 굴복했다. 그렇다면, 결국 너희들은 우리 로마의 관용을 빌미삼아 감히 전쟁을 시작했다고밖엔 볼 수 없다.

우리는 너희가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도록 배려했고, 동족 가운데 왕을 뽑아 세워주었다. 그리고, 너희 조상들이 율법을 준수할 수 있도록 존중했으며, 너희 동족만이 아닌 이방인과 함께 살면서도 너희가 바라는대로 율법에 따라 살도록 허락했다. 너희들한테 베푼 가장 커다란 관용은 너희들의 신(神)에게 제물을 바치고, 예물을 수집하는 것을 허락해 준 것이다. 덕분에 너희들은 부유해졌고, 그 돈으로 우리와 전쟁을 벌일 군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특권을 누리던 너희가 그것을 허락한 우리에게 오만방자하게 등을 돌리고, 친절을 베푼 우리에게 마치 독사처럼 독을 뿜어댄 것이다. 너희는 아마 네로를 무능하다며 경멸했을 것이다. 마치 몸 속에 잠복해있다가 병이 악화된 후에나 뚜렷이 드러나는 금이 가고, 찢어진 상처처럼 여태껏 잠잠히 지내다가 이런 상황에 이르러서야 본성을 드러내어, 감히 어림도 없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는 욕심을 부렸다.

나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이 땅에 온 이유는 너희를 징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만약, 나의 아버지가 너희 유대인들을 모조리 파멸시킬 계획이었다면, 즉시 이곳 예루살렘으로 와서 여기부터 초토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는 갈릴리와 근방 지역부터 먼저 공략하며 너희에게 다시금 숙고할 여유를 허락하셨다. 그런데, 너희는 우리가 약해서 호의를 베푼 것이라 착각하고, 우리들의 관대함을 핑계삼아 무모한 짓을 계속 벌였을 뿐이다. 네로가 죽자, 너희는 가장 비열한 악당이나 할 만한 짓을 저질렀다. 우리 제국이 혼란한 상황을 틈타서, 나와 내 아버지가 이집트로 떠난 상황을 이용해서, 너희들은 전쟁 준비를 했다.

우리 부자(父子)가 전쟁 지휘관이었을 때, 너희들에게 큰 아량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이제 (로마 제국의) 통치자의 반열에 오른 우리에게 염치없게도 반역을 꾀하며 오만하게 굴었다. 나와 내 아버지가 제국을 위기로부터 구해내고, 안정을 회복하자 다른 종족들은 축하 사절을 보내왔건만, 너희 유대인들은 또다시 우리를 적대시하였다. 너희는 유프라테스 건너편에 있는 자들에게 반역을 선동하고, 요새 성벽을 새롭게 구축했으며, 소요를 조장시키고, 명예욕에 사로잡힌 폭도들끼리 서로 내란을 일삼고는 마침내 모든 유대 땅에서 전쟁을 도발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극악한 자들이나 저지를 법한 일이다. 나는 내 아버지가 마지못해 내리신 막중한 명령을 수행하고자, 몸소 이 도시로 왔다.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이 평화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선, 나는 매우 기뻤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나는 너희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설득했다. 또한, 너희가 전쟁을 시작하자 일부러 장기전을 계획하며 관용을 베풀고자 했다. 도망쳐나온 자들에겐 자비를, 나한테 피신해온 자들에겐 내 이름으로 안전을 보장했다.

우리는 사로잡힌 포로들에게 온정을 베풀었고, 포로를 학대하는 로마 병사에겐 엄한 조치와 벌을 내렸다. 너희들의 성벽을 부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성무기를 사용했지만, 너희들을 학살려는 살기(殺氣)로 가득찬 내 부하들을 자제시켜야 했고, 승리를 거둘 때마다 내가 패배했는 것 마냥 먼저 너희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성전 가까이 접근한 후에도 전쟁 법칙을 무시하면서까지 나는 너희 성소(聖所)와 성전을 보존해야 한다며, 거듭 너희에게 호소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자유로이 성지(聖地)를 떠날 기회를 주며 목숨을 보장했고, 너희가 원한다면 다른 곳에서 전투를 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 모든 제안을 무시한 채, 너희 손으로 직접 성전에 불을 질렀다. 이렇게까지 파렴치한 짓들을 저지른 너희가 이제와서 나와 협상을 하겠다? 이미, 무너져버린 것 이외에 구할 만한 건덕지가 과연 남아있단 말인가? 성전은 벌써 무너져버렸거늘, 너희들 스스로를 위해 지킬 것이 무엇이 남아있다는 것인가? 그래, 불행을 자초하는 자들아! 너희들은 지금도 여전히 무기를 움켜쥐고, 극한 상황속에서도 전혀 뉘우침 없이 선처를 바라고 있구나! 대체, 무엇을 믿고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냐?! 너희 동족은 살해당했고, 너희 성전은 무너졌으며, 너희 도시는 나한테 정복당했고, 너희 목숨은 내 손에 달려있지 않은가!

죽음을 자초하는 것영웅적인 행동이라 생각하는가? 나는 그런 너희들의 광기에 맞장구쳐줄 생각이 전혀 없다![3]
《유대전쟁사》,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티투스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 유대 전쟁일 것이다. 네로 시대에 유대의 민족주의자 집단인 열심당[4]이 일으킨 이 전쟁은 가장 큰 반란 사건 중 하나였다. 이때 아버지였던 베스파시아누스가 67년 유대 반란을 진압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될 당시 형제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티투스의 직책은 중무장 보병 지휘관이었으며, 재무관으로서도 병영에서 활동했다.

68년, 네로의 자살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끝나고 새로이 갈바가 황제에 오르자, 유대인들과의 전쟁을 지휘 중인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갈바에 대한 충성서약을 위해 로마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오토가 황제가 되었고, 다시 비텔리우스가 오토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오토가 자살하며 로마군의 피냄새가 향기롭다고 한 돼지 비텔리우스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티투스는 로마제국 서방지역이 혼란에 빠져 있으므로 상황을 봐서 충성여부를 판단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귀환한다. 그리고 다시 군단장으로 복귀한다. 같은 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시리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자, 티투스 역시 아버지를 지지했고, 무키아누스가 비텔리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고 난뒤, 아버지마저 로마로 진군하자 유대 전쟁 총사령관으로 새로이 취임해서 유대 전쟁을 총지휘하게 된다.[5]

70년에는 유대 전쟁의 최고 지휘자로서 끝끝내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결사항쟁하던 열심당의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통곡의 벽 부분만 남기고 부숴버렸다.[6]

73년, 여전히 항복하지 않는 열심당 최후의 보루 마사다 요새를 제외한 팔레스타인의 유대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티투스는 항복한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지만, 항복하지 않다가 잡힌 포로들에 대해서는 하루에 약 500명씩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공격을 몹시 주저했다고 진술하고 있다.[7]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다. 이 한 가지 사건으로 유대교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고,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8] 왜냐하면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때에는 유대인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다 같이 이 곳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둘 사이를 묶어 줄 가시적 공통 제도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2.3. 후계자 시절

71년 개선하여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성대한 유대 전쟁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의 개선식 모습은 로마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티투스 개선문에 남아 있다. 이후, 그는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후, 아버지와 공동 통치를 하며 호민관 권한을 부여받았고, 2년 뒤인 73년에는 감찰관을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몇 차례에 걸쳐서 집정관을 지냈다. 이처럼 티투스는 제위 계승자이자 아버지의 러닝메이트로 정치가 겸 행정가로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이때 일화도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양모 가공업자들에게 매긴 오줌세에 관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양모는 특유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암모니아로 세척하는데, 지금이야 정제 암모니아를 쓰지만 당시에는 암모니아가 포함된 오줌을 사용했다. 로마의 양모 가공업자들은 공공화장실의 오줌을 공짜로 이용했고, 이런 양모업자들의 무임승차에 대해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감하게 오줌세를 거뒀다. 이에 양모업자들은 크게 반발했고, 티투스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아버지에게 이를 따졌는데 이때 베스파시아누스가 은화 한 줌을 아들 코앞에 쥐어 주며 "자 맡아봐라. 오줌 냄새가 나느냐?" 라고 촌철살인급의 대답을 하며 해프닝으로 반발을 수습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 사후 이 오줌세 때문에 희극에서 고인드립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령 베스파시아누스의 장례식에 막대한 돈이 든다고 하자 죽어 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 돈 일부는 나한테 미리 주고 내 시체는 그냥 티베레 강에 던져 버리지 그랬어?'라고 말한다는 식.[9] 아버지 본인부터가 생전에 저런 개그[10]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이에 익숙했던 티투스는 그냥 웃고 넘어갔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일화 못지 않게, 어두운 면이 많았던 후계자가 바로 티투스였다. 그는 잔인했고, 비열한데다 폭력적인 테러 행위를 대놓고 벌였다.

서기 79년, 티투스는 아울루스 카이키나 알리에누스, 에피우스 마르켈루스가 베스파시아누스와 자신을 폐위시킨다는 음모를 꾸몄다면서, 알리에누스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 다음 들어오자마자 자신 앞에서 칼로 찔러 죽이게 했다. 이때 티투스는 이들이 했다는 혐의를 조작해 유죄 증거로 만들어 놓고, 알리에누스의 연설문이라는 것을 위조해 만들어 자신의 테러 행위를 정당화 했다.

이런 행동은 이후에도 계속 됐는데, 여기에는 후일 황제가 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할머니(트라야누스 누나의 외손녀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집안 어른들인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피소의 후손 등 오래된 귀족과 옛 오토, 비텔리우스 지지자, 베스파시아누스를 도운 인사들이 숙청 대상에 올라, 큰 고초를 겪었다. 이중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극소수의 파트리키, 노빌레스 출신 원로원 의원들은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 그 재산이 현저히 줄고, 명맥만 유지해 "돈도 없고 가난함만이 남은 이들"이라고 놀림감이 된 경우가 많았음에도, 티투스의 이런 행동으로 추방형, 재판 회부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럼에도 티투스는 이를 역이용해, 네 황제의 해 동안 벌어진 사건들까지 끄집어 낸 다음 피해 입은 귀족들의 복수를 도와주고 이를 통해 지지를 얻는 영악함까지 선보였다.

2.4. 황제

79년 6월 24일에 황제로 취임했다. 이때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인들이 티투스가 "제2의 네로"가 될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이유는 그가 유대전쟁을 치르던 과정에서 만난 유대 공주 베레니케에게 홀딱 빠져 그녀와 정식 결혼하려고 한 일화 때문이었다고 한다.[11] 베레니케는 로마 시민들에게도 악명 높은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의 딸인데다 이미 두 차례 결혼했다가 과부가 된 적이 있고, 남동생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와도 근친상간 관계였다고 알려져 로마 시민들의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티투스가 베레니케와 정식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티투스의 즉위는 아무 소란도, 걱정도 없었다.

티투스가 베레니케와의 사랑을 포기했다는 소식은 로마 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로마인들은 티투스가 성격이 소탈한 데다가 국가를 위해 사랑까지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를 열렬히 사랑해줬다.[12] 하지만 티투스는 죽기 전까지 오래 살지도 못했지만 끝내 결혼하지 않았다.[13]

더해서 검투사 시합을 빈번히 개최하거나 선제 베스파시아누스를 야유하는 희극이 상연되어도 어떤 심한 책망을 하지 않았기에, 인기는 높아졌다. 관대한 황제 이는 시민과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티투스는 원로원과의 관계도 양호했다.[14] 실제로 티투스는 짧은 제위기간이긴 했지만 어떤 죄를 묻더라도 '반역죄'로서는 처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이를 죽기 전까지 지켰다. 더해서 티투스는 남을 돕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경우에는 주변인들에게 '하루를 잃어버렸다'고 한탄까지 했다.

이처럼 티투스는 선정으로 국민, 원로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온갖 대사건들이 잭팟 터지듯이 줄줄이 일어나는 바람에 재해대책을 세우고 사태를 수습하느라 쉴 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폼페이의 참사가 그의 재위 2달 만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하나만 터진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연달아 줄줄이 대사건들[15]이었다.

그의 치세 중 가장 큰 대사건으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인한 폼페이시(市)의 매몰 등이 있었다. 이때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 등의 도시들도 멸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산에 초토화되었다. 따라서 그는 베수비오 화산에 피해를 입은 캄파니아 지방에 지원을 보냈으며 신속한 대처로 위기를 수습했다.

80년에는 로마에서 대화재,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 등이 잇달았다. 4일간 벌어진 대화재는 티투스에게 강제적으로 로마 재건 및 리모델링을 하도록 했다. 더군다나 페스트까지 돌아서 질병퇴치 및 구제사업에 진력해야만 했다. 따라서 티투스는 황제로서 여가를 즐길 시간도 없이 재해대책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직접 재해현장에 나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진두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로마 시민들은 그를 '인류의 총아'로 경모했다.

같은 해, 오늘날 우리에게 콜로세움으로 더 잘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설 사업이 마무리되었다. 따라서 티투스는 준공 기념으로 100일이 넘도록 검투사들과 맹수, 죄수들에겐 지옥이었던 축하행사를 벌였다. 이후 콜로세움은 티투스에 이어서 즉위한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1개 층이 증축되었고, 총 4개 층을 갖춘 형태로 82년에 완공된다.

한편, 테렌티우스 막시무스라는 인물이 네로 황제를 사칭하여 파르티아의 힘을 빌려 반란을 꾀했다. 파르티아는 처음엔 이 인물이 진짜 네로라고 여기고 적극 협력했으나, 나중에 가짜인 게 밝혀지자 처형했다

하지만 열성적으로 재해지 구호에 힘쓰던 티투스는 축하행사 와중에도 재해대책에 몰두해야만 했고, 치세 2년 만에 열병으로 쓰려져 죽고 말았다.(81년 9월 13일)[16]

3. 외모와 사생활

그는 기품과 위엄이 있는 준수한 용모를 지녔고, 드물게 건강한 체질이었지만, 키는 크지 않았고 배가 나온 편이다.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중 '티투스 편', 3

동생 도미티아누스처럼 금발머리였지만 이마가 매우 넓고 매우 건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력적이고 잘생겼다는 이야기와 달리 실제 티투스는 키가 컸던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키는 작고 배가 나왔으며 얼굴은 네모형에 미간이 좁은데다, 플라비우스 가문 특유의 이마가 넓은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황실 내 황제 초상을 관리하는 관료와 예술가들은 티투스의 결점을 가리기 위해 최대한 배가 안 나오도록 신경썼다고 하며, 이는 그의 전신상에서도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티투스의 성격은 즉위 이후에는 관대함과 온화함으로 유명하지만, 즉위 전까지의 모습은 로마인들에게 냉정, 잔인함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또 그의 사생활 중 기록된 이야기들에 따르면 티투스는 매일 저녁 미소년이나 환관 무리에 들러싸여 밤 늦도록 놀고 마시는 것을 즐기고, 이런 술잔치의 끝은 늘 폭음과 폭식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혹자들은 이런 사생활적 습관이 그가 즉위 후 있던 일련의 과로와 엮여 돌연한 죽음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4. 평가

동시대 로마인들의 황제로서 티투스에 대한 평가를 한 마디로 정리해 말하면 치세 2년 내내 고생만 하다가 2년 만에 죽었던 황제. 거기에다 나이도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꽃다운 41세였다. 특히 황제로서의 능력은 아버지처럼 뛰어나기에 고작 2년의 재위 기간에도 제국을 문제 없이 잘 통치했다. 사실 제국 황제의 업무량은 굉장히 무겁다보니 건강을 갉아먹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골골거리며 장수한 아우구스투스가 괜히 대단한 게 아니다.

즉위 이후의 티투스는 평판이 좋은 황제였고, 티투스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면서 아부를 한 수에토니우스는 대놓고 그에게 찬사를 덧붙였다. 하지만 티투스는 즉위 전까지는 한때 민심을 잃은 후계자인 데다, 본래 성격도 따뜻하면서도 냉정하고 잔인했고, 비열함과 냉혹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굉장히 입체적인 사람으로 당대부터 평가받았다.

즉위 전까지 티투스가 이런 평을 받은 이유는, 아버지 생전 근위대장에 취임해 아버지와 플라비우스 가문의 위협이 될 사람들을 제거하고, 혐의를 날조하는 공작활동을 벌이는 구린 행동을 전담했기 때문이다. 이는 도미티아누스와 비교돼 티투스가 훌륭한 황제로 찬사받은 뒤에도 계속됐다. 왜냐하면 티투스의 비밀 공작, 협박, 고문과 납치 등으로 피해를 입은 이 중에는, 조카 딸의 작은할아버지, 숙부들이 피해를 입은 트라야누스, 할머니의 일가 친척들이 거진 누명을 쓰고 추방됐던 경험이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일가 등도 포함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들, 용서를 했다고 하지만 가족들이 큰 고생을 했던 황제와 귀족들은 온화함과 타고난 청렴이라는 가면을 쓰고 추악한 행동을 벌이는 위선자라고 그를 평했다. 여기에 더해 티투스는 헬레니즘 귀족이나 왕족들처럼 미소년, 환관 무리에 둘러싸여 밤 늦게까지 음주가무를 즐긴 탓에 방탕자였고, 여자 문제 역시 복잡하고 난잡하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동시대 로마인들 중 빈정대기 좋아하는 사람은 이렇게 평했다.
치세가 짧으면 누구라도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다.
네로 황제 사후 난립한 단명 황제들이 어떤 통치들을 했는지 살펴보면 그야말로 자기 나라 역사도 모르는 어불성설에 불과한 말이지만, 실제로 워낙 입체적이고 황제 즉위 전후로 달라진 탓에 이렇게 평했다(...)

그럼에도 티투스는 비교 대상이 동생 도미티아누스였고, 살아생전 도미티아누스와 오묘한 대립 속에서 도미티아누스를 증오한 이들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한 황제였다. 따라서 로마의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는 티투스를 가리켜 잘생기고 교양도 있으며,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지극히 티투스를 좋아한 그의 이런 평가 달리 티투스는 소위 사랑스러운 부류의 인간이라고 평가받음에도 사실 즉위 이전까지는 로마인들에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로마판이라고 찬사를 받은 게르마니쿠스와 달랐다고 한다. 상술했듯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생전, 티투스는 능력은 있으나 혹독하고 인기 없던 후계자였고, 성격 역시 냉정함과 따뜻함이 적절히 공존한 탓에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어진 행동을 하는 후계자"로 평가를 받았다. 즉, 황제가 되기 전까지 인기 없던 티투스는 후세 로마인들과 현대 연구자들의 일관된 말처럼 즉위 전후를 기점으로 평가 자체가 180도 바뀐 부분은 아직도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평과는 별개로 티투스의 개인적 역량과 성격적 매력, 그리고 자제력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또 티투스는 아버지 생전 아버지, 본인과 가문을 위한 권력강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쁜 역할을 담당하긴 했어도 개인의 천성은 상당히 매력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티투스가 평가받는다고 하더라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아래에서 티투스의 이런 입체적이고, 플라비우스 왕조 안정 작업으로 벌인 정치 공작과 숙청 작업은 그에게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증오를 샀다. 그렇지만 대개의 티투스는 인간적인 면이 많이 부각됐다. 어린 시절 베프였던 브리타니쿠스의 억울한 죽음을 아쉬워하고, 그를 그리워해서 황제가 된 이후 친구의 살아생전 모습을 조각한 동상을 금으로 제작할 정도로 천성적으로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사실 등이 도미티아누스 치세 이래 원로원 안에서 찬사를 받은 것도 이런 부분이 컸다.

따라서 민심을 잃은 황태자였어도, 또 음주가무를 헬레니즘 귀족들처럼 즐긴다고 까였어도 원로원과 민중들을 마구잡이로 보복하기 보다는 관대함으로 일관해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능력도 있고 책임감도 강해서 즉위 후 그의 진면목을 본 로마인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일관되게 받은 것은 당연했다. 아울러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당대 로마 상류층 전체에게 일관되게 악평을 받았고, 티투스 생전 그가 사적인 이유로 동생 도미티아누스의 특권을 제한하고 동생을 올바르게 통제한 부분 탓에 짧은 재위 기간에도 그의 평판은 모든 로마인들에게 좋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마키아벨리가《군주론》에서 그려내었던 이상적인 통치자에 부합하는 인물.

반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유대인 사이에서 로마와 티투스는 아돌프 히틀러 급으로 증오받고 있다.[17] 이런 이유로 로마에 티투스의 문이라는 건물과 이름이 들어간 다리를 지날 때, 자칭 정통파 이스라엘인, 즉 하레디들은 여길 지나는 것조차도 금기시한다고 한다. 하지만 유대인들도 각자 생각이 다르다고 한다. 개인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티투스는 이스라엘인을 마구 학살하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 멸망 이후 분열된 이스라엘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점도 있으니 히틀러 급으로 보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하면서 조금은 좋게 보는 시각도 꽤 된다.

5. 창작물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의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에서 자비롭고 어진 모범적인 군주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안토니오 칼다라, 요한 아돌프 하세, 발다사레 갈루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등이 곡을 붙였다.

설민석의 세계사 대모험 4권 '로마에서 생긴 일'에서도 자비롭고 어질며,베수비오 화산 대분화 등 국가적 재난에 대해 마음아파하는 훌륭한 황제로 묘사된다.
[1] 참고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하고 동일하다.[2] 트라야누스 황제의 이모[3] 하지만 요세푸스가 쓴 유대전쟁사를 보면, 로마군이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온갖 잔인한 학살들이 자세히 언급된다. 반란과 전혀 관련이 없는 유대인 1200명을 로마군이 경기장에 모아놓고 모조리 죽이는 내용과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로마군이 성벽 아래로 내던져 죽이는 내용들도 기록되어 있다(...)#[4] 젤롯, 혁명당[5] 여러 가지로 필요한 결정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일단 맡고 있는 유대 전쟁을 확실히 끝장내야 했으며, 티투스에게 유대 전쟁을 맏긴 것은 후계자로서 티투스의 인지도를 올리고[18] 민중의 지지를 받게 하는 데 필요한 전략이었다.[6]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가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붕괴될거라 예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약 30여년 전의 예언.[7] 유대인들의 성전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라고 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요세푸스의 진술에는 과장이 섞여 있다. 그러나 티투스는 로마 역사가들에게도 사려 깊은 통치자로 기억되고 있고, 전후처리 과정에서 항복한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공격을 주저한 이유는 예루살렘을 공격해 성전을 파괴할 경우 반로마파 유대인들과는 더 이상 화친할 여지 자체를 날리게 되는 것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8]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티투스의 성전 파괴는 그를 아직까지 증오하는 원인이 되었다. 더해서 유대교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손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하나의 징벌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특히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9] 참고로 티베레 강에 시신을 던지는 것은 로마에선 부관참시를 의미했다.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패배한 비텔리우스가 대표적인 예로 도나우강 군단병과 시민들에 의해 목이 잘린 후 온갖 훼손을 당하고 티베레 강에 던져졌다. 참고로 티베리우스 역시 사망하고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티베리우스를 티베레 강에 던져버리자'라며 환호했지만 이는 말년에 섬에 들어가 은둔 정치를 펼친 황제에 대한 반감이었지 진심으로 역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로마인들이 베스파시아누스의 털털하면서 짠돌이적 성격을 다소 불경스럽게 풍자한 것이지 불타는 적대감과 반감으로 쓴 것이 아니었다.[10] 베스파시아누스 본인도 유머 감각이 상당한 편이었고, 이런 짠돌이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스스로 관련 유머를 자주 활용했었다.[11] 티투스는 황태자가 된 후 돌싱이었으므로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장에서 둘이 함께 있는 걸 본 시민들은 그들에게 야유를 보냈고, 티투스는 끝내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이 커플에 대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대체로 외국인에게 관대했음에도 이런 전력과 함께 외국인이 로마의 정치에 관계하는 것에는 선을 그었기에 야유가 쏟아졌다고 한다. 실제로 티투스는 로마에 방문한 베레니케를 일부러 멀리하며 노력했지만, 매년 공주 생일에 선물도 보내고 관심을 가지며 사랑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다.[12] 이것은 친동생인 도미티아누스와는 대조되는 부분인데 도미티아누스는 거만하고 의심많고 사치스럽다고 엄청 까였다.[13] 사실 후계문제에 대한 걱정은 없었는데 어차피 티투스에게는 12살 차이가 나는 형제 도미티아누스가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플랜 아래에서 그가 죽으면 도미티아누스에게 자리를 물려주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형제가 성숙되기도 전에 티투스가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는 거지만...[14] 이 부분 역시 친형제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수많은 고소 등으로 원로원과의 사이가 극악이었다.[15] 2011년 3월에 일어난 도호쿠 대지진 같은 사건이 연달아 계속 터진다고 생각해보자. 끔찍하다. 그리고 이때 에다노 관방장관이 나흘간 잠도 못 자면서 사태수습을 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됐던 걸 생각해보자. 이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이를 수습해야 했던 티투스의 건강에도 끔찍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역대 로마 황제의 재위 기간이 20년을 넘긴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관료 체계가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로마 황제는 모든 인사와 중요 서류 결재를 맡아야 했는데, 이것은 당연히 엄청난 격무이고 신체적으로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제정을 슬금슬금 구축해가는 대사업을 진행하면서 44년간 황제 자리를 맡은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가 대신 과로로 빨리 죽었다[16]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사인을 말라리아, 또는 빨리 황위를 얻고 싶었던 도미티아누스에 의한 독살 가능성이 있다고도 기록하였다. 독살시켜 달라고 한 거 아니야? 얼마나 피곤했으면[17]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데에는 유대인들이 자초한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