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라틴어: Paullus Aemilius Lepid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조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아버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삼촌)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첫번째 아내)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두번째 아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장남)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차남) 아이밀리아(딸)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4년 |
전임 |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
동기 | 가이우스 멤미우스→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
후임 | 옥타비아누스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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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명문 귀족 집안인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휘하에서 내전에 참여했고, 술라가 독재관을 역임하던 시기인 기원전 78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대표적인 포풀라레스 호민관이었던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딸 아풀레이아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는 등 은연중에 민중파의 입장에 공감했다.[1] 결국 기원전 77년 술라 정권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에트루리아를 진압하라는 원로원의 명령을 무시하고 오히려 반란군에 가담해 로마로 진격했다가, 폼페이우스에게 패한 뒤 사르디니아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는 동생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민중파의 거두로 떠오르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손잡았으며, 카이사르의 지원에 힘입어 기원전 50년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동생과 함께 카이사르를 지지했지만, 카이사르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약한 동생과는 달리 로마에 남아있을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로마 정계가 카이사르파와 카이사르를 암살한 '해방자파'간의 대립으로 들끓을 때도 중립을 지켰다. 그러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동생이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자 안토니우스와 더불어 '로마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찬성했다. 이로 인해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로부터 숙청 대상으로 낙인찍혔지만 동생이 눈감아준 덕분에 이탈리아를 무사히 탈출하여 그리스 이오니아의 도시인 밀레투스로 망명한 뒤 로마에 복귀하길 거부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기원전 50년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의 아들인 그는 아버지가 삼두로부터 숙청 대상에 올랐을 때 동쪽으로 탈출한 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해방자파에 가담해 크레타에서 해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필리피 전투에서 삼두파가 승리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기원전 36년 시칠리아 내전에 참가했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패배한 뒤 칼라브리아 해안으로 도주한 옥타비아누스를 따라갔다. 이때 그는 중도에 길을 잃어 옥타비아누스와 헤어졌고, 삼두파의 숙청 때 아버지를 잃었던 그의 노예가 해안가를 정처없이 걸어가고 있는 옥타비아누스를 죽이려 했지만 지역 주민들이 옥타비아누스를 비호해서 실패했다. 이 일로 옥타비아누스에게 미운털이 박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4년 7월 1일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의 뒤를 이어 가이우스 멤미우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집정관 자격으로 아버지에 의해 건설이 시작된 아이밀리아 바실리카를 봉헌했다. 이후 고위 사제단인 아우구르(Augur)의 일원이 되었고, 총독의 권한으로 모종의 지역을 통치했다. 기원전 22년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임기는 재앙 수준이었다고 한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파울루스가 능력 부족이었다면 플란쿠스는 소심해서 감찰관의 직무인 규탄과 처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고 하며, 두 사람의 의견이 자주 충돌했기에 임기가 대실패로 끝나고 명예가 떨어졌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서 아프리카 원정에서 활약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토와 옥타비아누스의 아내이자 대 율리아의 어머니이기도 한 스크리보니아의 딸인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와 결혼해 두 아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딸 아이밀리아를 낳았다. 장남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서기 6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는 서기 1년 집정관을 맡았고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소 율리아와 결혼했지만 아우구스투스 암살 모의 혐의로 처형당했다. 딸 아이밀리아는 서기 13년 집정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와 결혼했다.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가 사망한 뒤에는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소 옥타비아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인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해 서기 15년 재무관을 맡아 히스파니아 타라코니아 속주에서 활동한 아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길루스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