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루스 안토니우스 |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
신상 정보 | |
휘 | Iullus Antonius 율루스 안토니우스 |
출생 | 기원전 43년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 | 기원전 2년(항년 41세)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
배우자 |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1] |
자녀 | 율루스 안토니우스, 율라 안토니아,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대 빕사니아 마르켈라(수양딸)[2], 소 빕사니아 마르켈라(수양딸)[3] |
아버지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어머니 | 풀비아(친모) |
소 옥타비아(양모) | |
형제 | 안토니아 프리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 대 안토니아, 소 안토니아(율리아 안토니아),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 |
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황족, 원로원 의원, 집정관, 속주 총독이자 시인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의 차남으로, 일찍이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에게 입양돼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로 인정받아 제정 수립 직후 황족이 됐다.아우구스투스의 총애 속에 양모 소 옥타비아의 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했으나, 아우구스투스의 친딸 대 율리아의 연인 중 한명으로 몰려 간통죄로 기소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기원전 43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이름인 율루스는 아버지를 후원한 이에게서 따왔다고 한다.어머니 풀비아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양자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해, 삼두파의 한축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등을 적으로 돌려 로마 상류 사회 안에서 문제 인물 내지 위험 인물로 인식됐고, 아버지 안토니우스 역시 평판의 호불호가 크게 갈려 혼란한 로마 상황 속에서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어머니 풀비아가 삼촌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기원전 42년 법무관을 지낸 카이사르파의 일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등과 카푸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거의 방치되듯 로마에 머물며 자랐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 풀비아가 기원전 41년 말 혹은 기원전 40년 초 겨울, 옥타비아누스 군을 이끈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투항한 뒤, 추방 후 병사한 뒤에도 안토니우스 아들답지 않게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어머니 풀비아와 큰 유대관계 없이 자랐던 터라, 어머니가 사망한 그해에 아버지와 정략혼으로 결혼한 계모 소 옥타비아를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이는 계모 옥타비아가 착하고 남편 안토니우스와 풀비아의 자녀들에게도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을 베푼 영향도 컸는데, 분명한 것은 옥타비아 역시 율루스를 아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율루스는 기원전 40년부터 옥타비아를 따라 그리스 아테네로 건너가 그곳에서 이복동생 대 안토니아, 소 안토니아와 함께 살았고, 계모와 함께 그리스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식견을 쌓았다.
기원전 36년, 아버지 안토니우스가 계모 옥타비아, 두 여동생 대 안토니아, 소 안토니아를 버리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가버린 뒤에도 옥타비아 밑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하는데, 율루스는 형 안틸루스와 달리 옥타비아와 두 여동생을 따라 함께 로마로 건너가, 그곳에서 옥타비아의 동생 옥타비아누스 보호 아래 성장했다.
2.2. 청년기와 결혼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7세 연합함대가 옥타비아누스 군을 이끈 아그리파의 지휘 아래 무참히 패배했다. 이후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이집트 병합을 위해 침공하는데, 지지기반을 완전히 잃은 아버지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었다. 이 당시,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형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 역시 죽었는데,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이 당시 계모 옥타비아의 양자로 입적돼 친아들처럼 자라고 있던 터라 신변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존호를 받고 두 번의 조정 헌법 발표 이후 프린키파투스(원수정)를 열자 양모 옥타비아의 친아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들로 리비아 드루실라 황후의 두 친아들 티베리우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함께 황족 대우와 지위를 선사받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남성황족이 됐다.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내전의 패배자인 안토니우스의 아들 중 유일한 생존자임에도 아우구스투스에게 황족 대우와 지위를 받은 것은 양모 소 옥타비아의 적극적인 후원과 사랑 덕분이었다. 옥타비아는 율루스를 친아들로 생각했고, 아우구스투스 역시 누나가 입양해 키운 안토니우스의 둘째 아들을 수년간 키우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친딸 율리아를 재혼시키는 과정에서, 누나 옥타비아의 동의 아래 아그리파와 결혼해 딸 2명을 두고 있던 조카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를 이혼시킨 뒤,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새 남편으로 율루스 안토니우스를 직접 선정했다. 이는 이상해보일 수 있는 결정이나, 아우구스투스가 내보인 호의였고 출신 문제로 황족임에도 처지와 지위가 애매한 율루스 안토니우스에게 큰 힘이 될 결정이었다. 그래서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양모 옥타비아의 도움 아래, 양모의 큰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기원전 21년 결혼해 아그리파와 아내가 낳은 두 딸을 거뒀다. 이 결혼에서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장남 율루스 안토니우스, 딸 율라 안토니아와 차남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얻었다.
2.3. 집정관 경력과 아시아 속주 총독 경험
양모 옥타비아의 맏사위가 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카사위가 된 이후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요절한 마르켈루스,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두 아들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들인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처럼 본격적으로 로마 정계에 이름을 날린다. 그래서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원로원 의원이 된 이후, 명예로운 경력을 거친 뒤 기원전 13년 보결 집정관을 거쳐, 기원전 10년 집정관에 선출됐다. 이후 기원전 7년과 기원전 6년 아시아 속주 총독에 임명됐다.이 경력 사이,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일가 남성황족들만 파견된 갈리아 행정요직까지 경험하는데 이 시기 손수 아우구스투스를 찬사하는 서사시 등을 남겨 아우구스투스 명성을 높였다. 그 결과, 아우구스투스는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재능을 높이 사면서 좋은 평가를 내렸고, 이는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평판이 더 좋아진 비결이 됐다.
2.4. 몰락과 자살
아우구스투스와 스크리보니아의 딸 대 율리아와 언제부터 연인관계인지는 불확실하나,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12년 아그리파가 죽은 뒤 율리아의 화려한 남성편력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율루스 안토니우스와 율리아의 관계가 매우 깊었는지 아니면 통상적인 불륜 관계 정도였는지는 알려진게 없으며, 이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도 제각각이다. 분명한 것은 둘의 관계가 떠들썩하게 알려진 시점이 티베리우스가 은퇴를 선언한 뒤 그 배경이 들통난 시점이었다는 것, 율리아가 자신의 두 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위해 율루스 안토니우스를 유혹했다는 것, 율리아의 세번째 결혼이 파탄나면서 둘의 관계가 알려졌다는 것 정도다.
율리아의 세번째 결혼 상대는 그녀의 의붓오빠 티베리우스였는데, 이 결혼은 당사자 티베리우스가 연애결혼으로 맞이한 아내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의 이혼이 아우구스투스 명령으로 강압적으로 집행됐다는 점에서 정치적 이유가 명확했다. 그래서 율리아와 티베리우스의 결혼은 곧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선정과 다름없었고, 율리아의 결혼 실패 원인의 대부분은 율리아 쪽의 문제가 원인인 터라 그 후폭풍이 심각했다. 이는 현대 연구가들의 발표도 비슷한데, 여기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화를 돋군 것은 참다못한 티베리우스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스스로 은퇴 선언 후 로도스 섬으로 도피한 일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양자이자 사위 티베리우스에게 호민관 특권까지 내려준 상태였고, 아그리파, 드루수스의 연이은 사망 이후 그를 버팀목처럼 의지한 터라 티베리우스의 은퇴에 큰 충격을 받았다. 더욱이 그는 티베리우스와 율리아가 사이에서 요절한 티베릴루스를 낳았음에도 여전히 자녀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 처음에는 티베리우스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아내 리비아의 설득, 측근들의 만류, 이어진 조사 결과 등에 따라 티베리우스를 용서한 뒤 그에게 황제 대리인 자격을 내리고 적당한 시기를 노려 그를 로마로 복귀시키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율리아가 여러 남성들과 추문을 일으켰고 난잡한 성생활과 불륜으로도 모자라 본인의 사촌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4]의 남편 율루스 안토니우스를 유혹해 연인관계를 맺었다는 것까지 알게 되자 노황제는 격분한다. 이때가 기원전 2년의 일인데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관용에도 율루스 안토니우스가 죽은 누나와 자신 모두를 배신했다고 여겨 딸 율리아와 간통한 여러 남성들을 고발할 때 그 역시 고발했다.
기원전 2년,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체제 전복, 아내를 배신하고 양모의 유지를 어긴 죄 등으로 기소됐다. 현대 학자들의 분석처럼 율리아가 율루스 안토니우스에게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를 도울 섭정직을 제안하면서 그 대가로 연인관계를 맺도록 한 조치가 반역죄로 엮인 배경이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세한 내막은 모르며 아우구스투스는 율루스 안토니우스를 기소 한 뒤 이례적으로 빠른 사형 선고를 내린다.
이는 율리아와 바람을 피우고 공개된 신전에서 난교를 벌인 남성들이 추방된 것과 다른 혐의였고, 다른 선고였는데,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반역죄 기소 후 사형을 선고받자 변명 없이 곧바로 자살했다.
그가 자살한 뒤, 아우구스투스는 어쨌든 누나의 외손자인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아들 율루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딸 율라 안토니아의 재산을 뺏지도, 목숨을 거두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두 아들 중 당시 살아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혹시 모를 궁중 음모에서 떨어트릴 목적으로 오늘날의 프랑스 마르세유인 그리스 식민도시 마실리아로 유학보내고 율라 안토니아에 대한 공식 의견을 밝히지 않고 처분에 대해 언급도 못 내게 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결혼해 잘 살고 있던 율라 안토니아를 배려해, 그녀에 대한 공격을 입도 못 떼게 하고 안토니우스 가문을 잇게 된 루키우스를 보호하기 위해 "나이가 어려 추방형에 처해야 하나, 본인 잘못도 없고 아이의 미래도 중요하니 유학보내는 것으로 참작하겠다"고 밝혔다. 그래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마실리아로 건너가 로마법, 수사학을 공부해 학자로 살다가 죽었는데, 타키투스에 따르면 서기 25년 안토니우스의 손자 루키우스가 향년 45세에 죽었을 때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소 옥타비아의 손자이고 황족이므로 로마에서 묻혀야 된다며 그 시신을 아우구스투스 본가인 옥타비우스 가문 묘지에 묻힐 수 있게 배려해줬다고 한다.
3. 여담
- 현대 학자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만들어진 평화의 제단 부조 중 북쪽에 조각된 월계관을 쓴 남성 중, 황족, 집정관 복식의 젊은 사내 중 한명이 율루스 안토니우스가 분명하다고 한다.
- 그의 손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즉위의 일등공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