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nia
1. 서양 여성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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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Antonia)는 이탈리아의 고대 로마 시대 안토니우스 가문에서 기원한 여성 이름이다. 남성형 이름은 안토니오(Antonio).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등에서 여성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이 이름은 “찬미(讚美)”, “아름다움”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2. 고대 로마의 여성 황족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 장군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매의 이름이다. 이름이 모두 안토니아라서 자매 중 첫째는 대(大) 안토니아, 둘째는 소(小) 안토니아라고 구분해 부른다.2.1. 대(大) 안토니아(BC 39 ~ AD 32)
영어로는 '안토니아 더 엘더(Antonia the Elder)', '안토니아 메이저(Antonia Major)'라고 불리며 풀네임은 율리아 안토니아(Julia Antonia)이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소 옥타비아의 장녀로 옥타비아누스의 외조카다. 로마 내전 당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의 상호 우호 등을 위해 그의 친누나 소 옥타비아와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중 장녀가 대 안토니아다. 친여동생 소 안토니아의 젊은 시절 조각상들이 대 안토니아의 초상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지만 정식 초상화는 없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동복 자매 소 안토니아와 달리 아테네에서 언제 태어났는지 모른다. 다만 기원전 36년까지 아테네에서 살다가 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면서 일방적으로 이혼당한 어머니 소 옥타비아, 이부 오빠 마르켈루스, 이복 오빠 율루스 안토니우스 등과 함께 외삼촌 옥타비아누스의 보호를 받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로 귀국해 옥타비아누스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아버지 안토니우스가 외삼촌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고 자살한 이후 어머니 소 옥타비아와 이복 오빠 율루스 안토니우스, 동복여동생 소 안토니아와 함께 외삼촌 부부에게 거두워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일원이 되었다. 이때 외삼촌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에서 자살한 아버지 안토니우스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키지 않고, 누나 옥타비아의 두 딸에게 모두 상속시켰고 두 조카를 친딸처럼 대우하면서 각종 특권을 내렸다고 한다. 덕분에 대 안토니아는 아우구스투스의 보호를 받으며 황족으로 대우받았다.
엄청난 미녀이면서도 풍부한 교양과 여장부다운 성격, 뛰어난 자제심을 보인 소 안토니아보다 부족해도 보통 이상의 미모를 가진데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친딸과 같은 조카라서 일찌감치 여러 귀족 가문들이 아우구스투스 일가와의 연합을 위해 며느리감으로 노렸다고 한다. 비슷한 나이 대로는 외삼촌의 양자로 외숙모 리비아 드루실라의 두 아들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가 있었는데, 대 안토니아는 BC 22년경 명문 귀족 가문의 자제이자 장군이며 전차 기수[1]로도 상당히 유명했던, 젊은 귀족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혼인했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얻었는데, 딸 도미티아는 결혼하기 전에 요절했고 장남 루키우스 역시 결혼 전 요절해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1남 2녀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요절한 장남 루키우스와 네로의 아버지인 차남 그나이우스가 막장들이 많은 로마 귀족 상류층 내에서도 최악 수준의 망나니로 유명했다.
- 도미티아(요절)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요절한 장남으로 남편과 동명이인이다. 남동생 그나이우스와 함께 어릴적부터 과격한 행동으로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훌륭한 장군이자 로마 제국 동방 최고 전문가로 유명한 아버지가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따라 동방에 갔을 당시, 수행원으로 따라 갔다. 헌데 시리아 속주에서 살인을 저질러 이름이 같은 아버지가 악명을 얻게 했다. 그래서 동명이인인 아버지는 아들이 요절한 뒤, 이야기가 와전되면서 원로원에게 죽을 때까지 난폭하다고 욕을 먹었다. 따라서 요절하지 않았다면 폭력적이고 잔혹한 성격과 품행 때문에 동생 그나이우스, 조카 네로와 함께 로마인들에게 막장 귀족으로 악명을 떨쳤을 것이라는 평까지 듣고 있다. 로버트 사임의 연구에 따르면, 술을 마시고 속주민을 죽을 때까지 때려 죽인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이 사람이라고 한다. 성년식을 올리기 전 사망했는데, 바로 아래인 대 도미티아 레피다가 기원전 8년생이고,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동방에 간 시점이 기원전 1년인 것을 생각해보면 사망 당시 1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사임과 같은 로마사 권위자들은 네로 아버지의 출생일로 알려진 기원전 17년이 여러 증거상 이 사람의 출생일이라고 말한다. 그가 죽은 뒤 가문의 후계자는 기원전 2년생인 동생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된다.
- 대(大) 도미티아 레피다 : 기원전 8년생이다.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와 결혼해 퀸투스 하테시우스 안토니누스를 낳았다. 첫번째 남편과 사별 후, 아시아 총독을 지냈던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와 재혼했다. 대 안토니아 부부의 자녀 중 소 도미티아 레피다와 함께 인격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평가받았다. 첫 남편이 세야누스가 입양간 가문과는 친척이라서, 세야누스라면 이를 갈았던, 혈연상으로는 조카뻘인 남동생의 아내 소 아그리피나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소 아그리피나가 칼리굴라 시대때 칼리굴라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가 추방될 당시, 남동생이 남긴 유일한 혈육인 조카 네로를 친어머니처럼 보살폈다. 이후 소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르면서 로마로 돌아왔는데, 이후에도 두 사람은 견원지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이가 최악이었다. 조카 네로에게 있어서는 따뜻한 고모였기 때문에, 네로가 클라우디우스의 사위가 됐을 당시부터 소 아그리피나가 크게 경계해 견제했다고 한다. 후일 네로가 즉위한 뒤, 네로에 의해 조작된 근친상간 루머와 주술 등을 이용해 저주를 사주했다는 이유로 먼 친척인 실라누스 부자와 함께 반역죄로 고발됐다. 이때 그녀는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조카의 명령에 따라 강제로 자살당하는 방식으로 처형됐다. 야사에 따르면 심한 변비를 앓아 네로가 걱정하면서 보낸 약을 먹고 독살됐다고 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낭설로 평가받는다.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32년 집정관을 지냈으며, 게르마니쿠스의 장녀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5대 황제 네로를 낳았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덕에 안 좋은 평판을 듣고, 죽을 때까지 각종 비방성 소문에 시달렸다면, 이 사람은 진짜 막장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문의 권세와 어머니 대 안토니아가 황족이라는 점을 믿고, 국고 횡령, 폭행, 협박, 여러 여성들과의 불륜, 도박, 검투사 경기와 전차 경기 중독, 고리대금업 등을 저지르고, 여동생 소 도미티아 레피다와 불륜을 맺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품행이 대단히 나빴다. 더욱이 요절한 형 루키우스처럼 매우 폭력적이라서 부종이 심해져 임종 직전이 되었을 때에도 제 기분에 따라 노예들을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티베리우스 시대 내내 문제가 많았던 사람이라서, 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아들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유언장을 조작했다는 뜬소문에 시달려 마음고생을 했을 정도로 이미지도 최악이었다. 이런 까닭에 결국 이모 소(小) 안토니아의 시아주버니이자 외종조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 몰락 이후, 국가 기강 잡기에 나서면서 이 사람을 국고 횡령, 간통, 강간, 폭행, 협박, 문서 위조 등 각종 범죄 혐의로 기소해, 재판을 열고 사형판결을 손수 내리고 죽이라고 서한장까지 보냈다.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기 전, 티베리우스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아내의 오빠인 칼리굴라가 즉위하면서 죄인들을 사면시켜줄 때 석방됐다. 그는 아들 네로가 2살이 되던 40년에 사망했다.
- 소(小) 도미티아 레피다 : 대 안토니아의 세 딸 중 성인 이후에도 살아남은 두 딸 중 한명이다. 기원전 4년생이라는 말도 있고, 오빠 그나이우스보다 1살 어리다는 말도 있다. 외할머니 소 옥타비아를 닮아 상당한 미녀로 유명했다고 하며, 이모 소 안토니아처럼 평생동안 별 일을 다 겪은 귀부인이다. 남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에 엄청난 규모의 영지를 가지고 있던 여인으로 당대부터 유명했다. 망나니인 오빠의 악명 때문에 오빠 그나이우스와 근친상간한다는 소문에 시달렸고, 이후에는 속 썩이는 딸 메살리나와 언제라도 그녀를 죽이려고 이를 가는 새언니 소 아그리피나와 조카 네로 때문에 고통받았다. 서기 16년 모계 친척이자 발레리우스 가문 출신의 명문귀족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와 결혼해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황후 발레리아 메살리나를 낳았다. 이후 그녀는 대략 서기 20년경 종신독재관 술라의 후손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쿨루스와 재혼해 아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맏사위)를 낳았다. 이후 사위인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한 직후인 서기 41년 명문가인 유니우스 가문 출신의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세번째 결혼을 하고, 이 사이에서 막내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낳았다. 네 아이 중 첫째인 메살리나가 중혼을 저지른 뒤, 루쿨루스의 정원이 있는 별장에 강금될 당시 함께 있다가 눈 앞에서 딸이 살해되는 것을 봤고, 그 자리에서 근위대에게 죽은 딸의 시신을 인도받아 매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기 54년 죽었는데, 죽을 때까지 소 아그리피나, 네로 모자에게 "노예들로 폭력단을 조직했다"고 모함받아 고생을 했다고 한다.
2.2. 소(小) 안토니아(BC 36 ~ AD 37)
* 자세한 인물 정보는 소 안토니아 항목 참고.이름 | 율리아 안토니아 (Julia Antonia) |
출생 | 기원전 36년 1월 31일 그리스 아테네 |
사망 | 37년 5월 1일 (72세) 로마 |
배우자 |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
자녀 |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 |
아버지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어머니 | 소 옥타비아 |
형제 | 대 안토니아 |
3. 가톨릭의 성녀
축일은 4월 29일. 히스파니아의 주교 성 아가피투스(Agapitus)와 성 세쿤디누스(Secundinus)가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동안에 누미디아(Numidia,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지역)의 키르타(Cirta)로 추방된 후 순교할 때, 함께 순교한 동정녀이다. 이때 성녀 테르툴라(Tertulla)와 쌍둥이 자녀를 둔 한 여인도 함께 순교했다고 한다. 성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순교자도 로마 순교록에 언급되고 있으며, 행전에는 포함되지 않았다.4. 오드뤼사이 왕국의 여왕
안토니아 트뤼파이나 문서 참고.[1] 전차기수의 인기와 명성, 벌어들이는 수입은 오늘날로 따지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프로 인기 스포츠 스타와 똑같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