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2:39:33

순교

파일:마지막 기도.jpg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1]
장-레옹 제롬(Jean-Léon Gérôme, 1824~1904)作

1. 개요2. 종교적 관점
2.1. 그리스도교2.2. 이슬람2.3. 불교
3. 세속적 관점

[clearfix]

1. 개요

폭군의 지배는 죽음으로 끝나지만, 순교자의 지배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쇠렌 키르케고르
순교자의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순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타살당하거나 처벌, 옥고 등 여러 수난을 치른 경우 그 원인이 되는 외부의 탄압을 '박해'라고 칭한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의 표기가 대표적이다.

원론적으로는 1) 자신의 의지로 행해져야 하며, 2) 그 의지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발휘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즉, 신앙을 포기하면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순교도 분류상 자살의 한 종류라고 규정할 수 있으나 일반적인 종교에서 금기시되는 자살과 달리 순교는 추앙받고 권장하는 행태를 보인다. 결국은 해당 집단에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가 의로운 죽음인지를 가르는 기준일 뿐이다.

현대에는 여기서 더 확장되어 특정 '주의'나 '사상'을 위해 죽는 경우에도 관용적으로 쓰이고 있다.

2. 종교적 관점

2.1. 그리스도교

나는 또 "'이제부터는 주님을 섬기다가 죽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서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옳은 말이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묵시록 14장 13절 (공동번역성서)
그리스도교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는데 당장 12사도 중에 자연사사도 요한과 배신자인 유다 이스카리옷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온갖 고생을 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다. 순교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순교한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불교처럼 어떤 추상적인 신념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직접 체험했다고 주장했고[2] 본인들이 주장하는 바의 진위 여부를 본인들이 확실하게 알 수 밖에 없으므로 사도들의 순교는 다른 종교들의 순교가 그 종교가 진리인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는 자살한 사람들을 좋지 않게 바라보며 심지어 종교를 지키기 위해 자살한 경우에도[3] 좋게 보지 않기 때문에 배교를 강요당하면 거부하고 탄압하는 측이 가하는 형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 한국 사회가 크게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서구의 역사적 맥락에서 '순교'라는 용어가 주로 쓰이는 쪽은 그리스도교 계열 종교다.[4] 그리스도교에서는 초기 선교의 과정에서 기성 유대교, 이어서 로마 제국에 의한 탄압에 의해 순교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종교를 지키다가 죽은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 제국에서는 체포된 그리스도인이 로마 신전에 경배, 즉 배교하지 않으면 맨손이나 단검 한 자루를 쥐여주고 맹수들과 싸우다 죽게 하거나 십자가에 못박고 참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교부들의 기록은 때로 매우 자극적이기도 한데 그리스도교를 믿는다고 하면 찢어죽이거나 기름에 튀겨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과장된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네로 시기인데 이 시기 그리스도인들을 네로가 치하 콜로세움에서 박해했다고 전해지지만 콜로세움은 네로 사후에 지어졌다. 다만 여기서 더 나아가 "네로의 기독교 탄압은 전설에 가깝다.", "네로 황제의 로마 대화재 관련 탄압 기사는 사실 고작 1-2년에 걸쳐 로마 시 중심부에서만 이루어진 산발적 사건이었다."고 하는 것도 비슷한 급의 과장, 왜곡이다. 콜로세움이 아닐 뿐 네로의 기독교 탄압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ergo abolendo rumori Nero subdidit reos et quaesitissimis poenis adfecit quos per flagitia invisos vulgus Christianos appellabat. auctor nominis eius Christus Tiberio imperitante per procuratorem Pontium Pilatum supplicio adfectus erat; repressaque in praesens exitiabilis superstitio rursum erumpebat, non modo per Iudaeam, originem eius mali, sed per urbem etiam quo cuncta undique atrocia aut pudenda confluunt celebranturque
그래서 네로는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수치스런 행동 때문에 미움을 받고 있던 자들을 범죄자로 몰아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 군중은 그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os이라 불렀다. 이 명칭의 기원이 되는 '그리스도'christus는 티베리우스 재임 때 재정 대리인procurator 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us에 의해 극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이 치명적인 미신exitiabilis superstitio은 얼마간 잠잠해졌지만, 그 악의 근원지인 유다에서뿐만이 아니라, 온갖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들이 몰려들어 유행하는 로마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es) 15.44[5]
타키투스는 위에 서술하였다시피 기독교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으며 그의 기록은 비록 그가 네로가 속한 율리우스-클라디우스 왕조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음에도 자료조사를 통한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기에 동시대에 대해 다룬 다른 기록들보다 상당히 자세하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타키투스는 네로 시기를 직접 산 인물이기 때문에 네로 시기에 대한 서술은 이전의 황제들에 비해서 더욱 자세한 기록이라고 평가받는다.

"네로 황제의 로마 화재 관련 탄압 기사는 사실 고작 1-2년에 걸쳐 로마 시 중심부에서만 이루어진 산발적 사건이었다."는 주장에는 큰 문제가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후 내용을 죄다 빼먹은 서술이다. 로마 제국 초기에 황제의 통치는 사실 현재 생각하는것만큼 막강하지는 않아 네로 시기 이후의 황제들이 작정하고 밀어붙인 기록말살형도 로마시 바깥에서 철저히 실행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지적하는 '중심 내의 산발적'이라는 건 그 전후의 황제들과 연관된 대다수 사건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사건 자체에 대한 축소다.

'1~2년간의 사건'이라는 것도 이후 사건들에 대한 설명이 빠진 주장이다. 64년 로마 대화재로부터 고작 1년 후인 65년에 네로 몰락의 결정타인 피소 음모가 벌어졌으며 네로가 사망하는 68년까지 유대 반란, 코르불로 숙청, 빈덱스 반란 등등 혼란스러운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이 모든 사건들은 기독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형사건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기독교 탄압 관련 내용이 보인다는 것 자체가 박해가 꾸준히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기독교 탄압은 지속되었다. 트라야누스 시기 1세기의 로마 총독 소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관할지역인 비티니아-폰투스 속주에서 그리스도인이 기소당하자 그리스도교라는 컬트(cult) 자체를 낯설어한 데다 법적으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익숙하지 않아서 트라야누스에게 질의했는데 트라야누스는 110년 플리니우스에게 기독교도들의 행방을 굳이 밝히지도 캐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그리스도인의 마구잡이식 처형에는 반대했으나 일단 잡히면 처형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아 이 시기에도 꾸준히 박해는 이어졌다. 그리스도화된 후대 로마인들에게 착한 이교도 황제라고 불린 황제의 시기에도 이랬으니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게릴라처럼 지하교회나 가정교회 등에서 몰래 신앙생활을 하는 등 생존의 투쟁에 가까웠다.

그래서 A.D. 200년대부터 박해에 의한 개종이나 배교는 나중에 회개한다면 어느정도 참작해 주기도 했는데[6]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에 박해 시대에 배교했던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받아들일지 말지를 가지고 4세기~5세기에 도나투스파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슬람에 비해 온건한 태도를 취하기에 배교하여 살 수 있음에도 순교를 택하는 것은 성인 시성에서 기적 심사의 요건 중 하나로 여겨질 정도여서 동아시아에서의 가톨릭 전래 시기 대규모 가톨릭 순교자들은 상당히 높게 쳐주는 편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된 후에도 순교자들은 존재했다. 십자군 전쟁에서 희생당한 군인들은 순교한 것으로 여겨졌고 서구 세계의 확장 과정에서 종교를 이유로 타지에서 살해당한 선교사 및 신자들을 순교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순교의 개념 자체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서구세계 확장의 과정은 타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제국주의적 확장일 수 있지만 서구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제국주의적 확장이더라도 오지에 가서 선교하다가 믿음을 지켰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이므로 순교로 간주되는 것이다. 서구의 '순교' 판정의 입장에서는 흥선대원군과 아마존의 추장 사이에 차이가 없다.

한국 가톨릭은 초기 전파 당시 엄청나게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절두산을 비롯해 성지도 많고 순교 성인들도 많다. 현재 한국 가톨릭에는 103위 순교성인124위 순교복자가 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행해졌고 부산광역시에 있는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도 1868년에 부산에서 순교자가 발생한 것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이 부분이 순교와 자살의 경계가 애매한 부분인데 박해 당시 신부에게 배교와 상관 없이 그냥 곱게 출국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거부하고 사형을 선택한 경우가 있다. 일단은 이 경우도 순교로 치는 듯하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도 막부 시대에 가혹한 가톨릭 탄압이 이어졌기 때문에 현지인 중에서도 가톨릭 신앙인이었다는 이유로 대거 처형당하고 시복, 시성된 사람들이 많다.[7]

다만 종교적 의미의 순교자가 맞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황사영 같은 경우다. 천주교계로 보면 분명한 순교자이지만 그 목적이 모국에 대한 배신, 침략 사주[8]에 해당되어 줄곧 순교성인에서 제외되고 있으며 외부에게 호불호가 갈려도 순교로 여기는 토머스 목사 같은 이의 경우도 있다. 토머스 목사는 1866년 평양 대동강으로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발포하여 주민들을 살상한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 호에 탄 통역 담당 목사였다. 상선이지만 대포와 총기로 무장한 명백한 침략 행위였다. 조선 측은 관대하게도 고기와 쌀까지 주면서 정중히 나갈 것을 요구했지만 보답이라곤 포격과 같이 조선군관 납치 및 금품 요구였다.[9] 그래서 목숨을 잃은 평양 주민들의 증오와 반발로 제너럴 셔먼 호는 화공으로 불태워졌고 겨우 탈출하여 뭍으로 올라온 몇 명은 그 자리에서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토머스 목사도 올라와서 이렇게 맞아죽었는데[10] 훗날 개신교계에서는 단지 한국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개신교 목사 1호라는 명목으로 교회도 세우고 있고 토머스 목사 교회까지 세웠다.[11]

물론 토마스 개인의 경우에 정당성을 부여하자면 엄밀히 그는 선교사의 신분이지 장교 신분은 아니다. 그가 직접 조선인 약탈을 지시했을 리도 없고 도리어 만행에 항의하려 했다 해도 높은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닌 이상 셔먼호 선원들이 그의 말을 들을 리도 없으니... 그러나 당시 기록에 의하면 토마스는 단순 통역이 아닌 교섭창구의 역할을 했고 박규수가 쓴 환재집에는 토마스가 조선 관헌의 말을 끊고 무시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그리고 토마스와 셔먼호 선원들이 죽은 이유는 해적질이 컸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계에서도 토마스의 죽음에 대해 몇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평양 주민들에게 죽은 것은 맞지만 성경을 뿌리다가 죽었다는 설, 그리고 배에 불이 붙여진 후에 탈출을 못한 토마스 목사가 배 위에서 성경을 뿌리며 죽었다는 설 등이 있다. 성경을 뿌렸다는 설은 대부분의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개신교에선 순교자가 되었다.# 하지만 당대의 실록, 평양지, 환재록 등의 기록에는 성경을 뿌렸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고 1928년 오문환의 주장에서나 나오는데 당시 정황상 토마스가 죽기 전에 성경을 뿌렸다는 구전은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한국어 위키백과 문서에도 토마스 목사의 순교자 논란에 대한 서술이 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역사적으로 논란이 있음에도 개신교계에서 일단 순교자로 인정하고는 있다.

일제강점기의 순교자로는 주기철 목사[12]를 예로 들 수 있다. 6.25 전쟁 시기에도 순교자가 많이 나왔는데 손양원 목사, 전덕기 목사, 김응락 장로 등이 해당된다.

가톨릭 신자는 순교하면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교리상 틀린 건 아니다. 순교는 혈세라고 해서 피로 받는 세례로 치므로 보통이라면 연옥에 가야 할 영혼까지도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신약에도 예수와 그 복음을 위해 죽는 것은 유익하다고까지 나와 있다.[13]

예수의 가르침 중 하나인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에 따르면 순교자를 죽이는 박해자도 교리상으론 사랑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서의 뜻은 그 박해자가 저지르는 악행까지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그 사람 개개인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그 사람의 올바른 회개를 위해 축복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가상칠언의 첫 번째 유언인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루카 복음서 23, 34)를 생각해 보자. C.S.루이스도 그의 저서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계명을 이렇게 해석했다. 신약성경의 유다서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1장 23절)라고 나와있다. 최초의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 부제도 죽으면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했다고 사도행전에 나온다.

간혹 가다 예수의 죽음을 순교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적절한 단어 선택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모두)에선 예수의 죽음의 목적이 순교의 정의와는 맞지 않고 인류의 죄로 인해 '스스로 선택한 고난을 당함' 정도로 칭하는 것이 적절하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맥락에서 예수 사건은 단일적인(유별난) 사건이므로 그리스도교의 순교라는 범주에 묶이기 어렵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그리스도교에서는 대속론 하에서 간혹 원죄개념을 이용하기도 하여, 죄가 없는 예수가 인류의 종교적 죄를 없애기 위한 희생제물로 죽임당했다고 인식하는 반면 자유주의(전기, 후기 모두) 개신교에서는 '인류의 죄'의 개념을 다르게 잡아 (사회적) 불의 및 후기선지자 시대에 비판된 (사회적) 부정의를 죄로 보며 예수의 죽음이 이로 인해 수없이 살해당한 억울한 생명의 모범으로 삼아졌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보수적 관점에서 예수의 죽음은 순교가 아니라 구속사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대속의 결과이고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예수의 죽음은 (마치 사법살인을 순교라고 하지 않듯이) 순교가 아니라 불의한 체제, 종교, 사회, 혹은 이념 등에 의한 타살일 따름이다. 따라서 순교의 정의에 부합하기는 어렵다.

한편 가톨릭에서 순교는 기적으로 취급되므로 교황청에서 시복, 시성을 조사할 때도 순교자에 대해서는 기적심사를 면제한다.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던지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것 자체를 '인간의 의지로는 하기 어려운 엄청난 일'로 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시복 과정에서 기적심사를 하지 않는 것이고 시성에는 원래 최소 두 번 이상의 기적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순교는 그 자체로 1회의 기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한국의 성인들이 최초로 시성되었을 때는 바로 그 두 번째 기적에 대한 심사를 교황의 명령으로 권면받은 경우다.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등 참고.

현재도 이슬람 문화권 일부 등 그리스도교에 매우 적대적인 세력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들이 많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 탄압으로는 최악으로 악명이 높은 북한에서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는데 그야말로 그냥 주체사상을 택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데도 그리스도교를 지키다가 죽거나 정치범수용소으로 끌려가 고문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2.2. 이슬람

이슬람에서는 초창기인 무함마드 예언자의 시대에서부터 메카군에 대항해 분투했던 역사로 순교를 매우 영예로운 행위로 여긴다. 가령 메디나에서 계시된 구절인 제3장 이므란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169. 하나님의 길에서 순교한 자가 죽었다고 생각치 말라 그들은 하나님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 곁에서 살아있노라.
170.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기뻐하며 그들과 함께 하지 못 하고 뒤에 올 순교자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곳에는 두려움도 슬픔도 없노라.
수라트 알 이므란 3:169-170
이외에도 메디나 시기에 계시된 구절 가운데 무려 109절이나 순교의 영광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들을 특히 '칼의 구절'이라고 부르는데 본디 당대에 박해받는 무슬림들이 성전(지하드)에 임해 그들을 박해하는 불신자들을 물리치는 가운데에서 전사한 이들을 위한 구절이지만 오늘날 알카에다 같은 원리주의자들이 요상하게 곡해해서 그들의 테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기도 한다. 무함마드 시대의 성전 이외에도 이슬람에서는 십자군 전쟁과 같은 이교도의 침략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에 대해서도 순교자라고 대우하는데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그리스군과 프랑스군 등에 항전하다 죽음을 맞은 튀르키예 병사들도 순교자(튀르키예어로는 Şehit)라고 부르머 6.25 전쟁 및 현재진행형인 반PKK 진압작전 및 PKK에 의한 테러로 사망한 이들도 순교자라고 지칭한다. 따지고 보면 튀르키예어에서 순교란 '나라를 위해 죽은 이'라는 의미가 추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무슬림들이 그들을 박해하는 불신자들을 물리치기 위한 구절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벌인 전쟁은 방어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무함마드와 대적하던 메카는 다양한 다신교와 일신교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였고 특히 메카의 주 수입원 중 하나는 다른 지방에서 오는 종교 활동을 위한 다양한 종교를 가진 순례객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가기전 메카에서 살 적에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를 포교하였다. 물론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14] 포교의 효과는 별로 없없지만... 그 후 무함마드는 메카를 오가는 상단을 약탈하고 도시를 봉쇄하고 메카와 전쟁을 벌였다.[15] 이후에도 그는 종교적 명분 아래 아라비아 반도 곳곳의 크고 작은 부족들을 정복하여 통일을 이루고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내새우는 그들의 반인륜적인 행위에 대한 명분도 이러한 무함마드의 행적을 따르는 방법으로 쿠란을 해석하고 이를 도덕적 기준으로삼는 데에서 비롯된다. 전쟁을 통한 약탈의 허용[16][17] 전쟁포로를 성노예로 삼기[18], 대량학살[19], 이교도를 대하는 방식[20], 사형 집행 방법으로서 참수[21] 등 이 모든 악행들의 근거를 무함마드가 제공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의 주석을 보면 꼭 무함마드가 다신교도들을 학살하거나 이교도를 성노예로 취하거나 한것은 아니다. 후세의 종교인에게 악용될 여지를 남기고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는 비판을 할 수는 있겠다.

사실 전술한 구절들은 전쟁 상태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구절이고 의외지만 여성이나 노약자, 장애인은 살해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걸 엉뚱하게 극단적으로 해석하는게 문제지.
무아트 알 카사스베 요르단 조종사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의해 화형을 당했을 때 요르단 당국은 그를 순교자로 표현했다. 다만 이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IS를 규탄하기 위해 당국에 의해 순교자로 칭송된 것이다.[22]

라마단이나 할랄을 지키느라 죽는 것은 자살이며 잘못이라는 것이 정설임을 감안했을 때 단순히 교리를 지키기 위해 죽는 게 순교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특히 타끼야시아파에는 있는 것을 보면 명확하다.

2.3. 불교

불교에서도 순교자들은 제법 있었다. 석가모니의 제자로서 타 교단 사람들에게 린치당해 사망한 목갈라나도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고 중국에서는 달마의 뒤를 이어 중국 선종의 2대조가 된 '혜가'도 박해를 받아 순교했다. 한국에서는 신라에 불교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순교한 이차돈이 유명하다. 목이 베어지자 하얀 피가 나오고 연꽃이 내렸다는 것은 제법 유명한 일화다.

3. 세속적 관점

순교는 능력 없이 유명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조지 버나드 쇼
이슬람 근본주의의 자폭 테러, 한국 내에서 물의를 빚고 있는 일부 개신교인들의 개념없는 행태로 인해 무교인들 일부에서는 점점 개죽음 내지는 광신적 행위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늘고 있다. 어떤 의미냐면 무교인 입장에서는 '공감할 수 없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므로 광신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 그리고 그 죽음을 숭고한 죽음으로 여기는 일은 무교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벌어지고 받아들여지는 일이다. 자기 손으로 죽는 게 아닐 뿐 사실상 자살이나 마찬가지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있다. 특히 순교가 발생했을 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오직 자기 조직의 내부불만을 제거하고 결속력을 강요하거나 가해자에 대한 적대감을 몰고 가려는 종교 지도자가 있으면 어느 순간 순교자에 대한 추모와 신념의 존중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 신념이 과연 희생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다. 문제는 무교인들 입장에선 당연히 종교적 신념에 큰 가치를 두기 힘들다는 것이다. 안 그랬으면 이미 무교인이 아닐 가능성이 클 테니 말이다.[23] 다만 종교적 가치와 세속적 가치가 일치하는 경우에는 예외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에 반대한 주기철 목사의 순교나 응오딘지엠의 독재와 친가톨릭/반불교 탄압에 반대하기 위해 분신틱꽝득 스님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의미 이외에 정치적, 사회적인 이유로 벌어지는 순교도 있다.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사형을 집행하였고 미네르바 사건 당시 그에게 면회하여 자살을 종용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반대로 김충식 교무를 원불교에서 순교자로 본 것도 해변에서 물에 빠진 연수생을 구한 뒤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세속적으로도 이 사람은 대한민국 보건복지부에 의해 의사자로 선정되었다.

[1]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콜로세움에 모아 놓은 뒤 맹수들을 풀어 뜯어 먹히게 하는 장면이다.[2]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코린토 1서 15장 3-8절)

사도 바울로가 쓴 이 성경구절을 볼 때 사도들이 부활을 직접 체험했다고 주장했던 것은 확실하다.
[3] 어느 계파를 보던 간에 자살을 중한 죄로 여기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종교를 지키는 과정에서 자살을 택하지 않고 탄압하는 측이 가하는 사형을 받았음을 고려한다면 자살을 좋게 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4] 이는 세계 3대 종교 중 불교는 한국에 들어와 공인된 지 워낙 오래되어 초창기의 이차돈 등을 제외하고는 순교자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슬람도 순교자 수는 만만치 않지만 이슬람 문화는 한국에서 존재감이 적기 때문이다.[5] 라틴어 원문: #(=Cornelius Tacitus, Annales (Latin), C.D. Fisher 〈ed〉, 〈Oxford 1906〉); 한국어 번역: #[6] 심지어 초대 교황도 예수를 모른다고 3번 부정하고 도망친 전력이 있을 정도다.[7] 대표적으로 성인으로 추대된 바오로 미키 신부 등 일본 26위 성인.[8] 조선에 프랑스군을 보내 조선을 정복하여 천주교 신앙을 인정하게 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내려다가 적발되었다. 지금 기준으로도 명백한 반민족 행위이거니와 당시 이 편지를 근거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혹해져서 황사영 자신도 산채로 거열당했고 3대 남정네들은 모조리 효수 당할 정도로 대역죄인 취급을 받았다. 박노자는 "이것을 현대로 치환하자면 UN에 도와달라고 한 것과 똑같다"면서 황사영을 두둔했지만 이는 사실관계가 맞지 않다. 우선 프랑스는 UN과 같은 국제기구가 아닌 여러 국가들 중 하나에 불과하므로 조선의 정세에 개입할 명분이 없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서구 강대국이 선교를 명목으로 영향력을 퍼트리다 그게 좌절되면 종교 탄압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하여 비서구권 세계에 침략을 하는 경우가 제법 많았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교 선교사/신자=유럽 열강 앞잡이"라고 하여 비그리스도교 국가에서 그리스도교 박해가 더 심하게 일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현대 한국 천주교 내부에서도 황사영에 대한 입장은 미묘한데 일단 공식적으로 순교자로 인정하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려 한 인물이니 드러내 놓고 존경을 표하긴 어렵다는 신자들도 꽤 있어서 마찬가지로 시복시성을 기다리는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달리 가급적 외부에 홍보하는 걸 삼가는 편이다.[9] 쌀 1,000석과 , , 인삼이었다.[10] 한국 개신교계에선 그가 거창하게 조선군의 손에 효수되었다면서 순교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조선군은 이들을 포로로 잡으려고 되려 막으려다가 분노한 평양 주민들에게 겁먹고 물러났다. 더불어 현장을 지휘던 인물도 개혁파인 박규수였다.[11] 하지만 장로회 신자였던 토머스 목사의 직속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장로회 측은 제너럴 셔먼호가 파괴당한 것을 물론 제너럴 셔먼호가 먼저 약탈을 자행했다는 정보는 묻어두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러 이역만리 타국에서 온 선교사를 보수적인 조상들이 복음을 거부해서 죽여버렸다."고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12]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다 순교한 목사. 일제의 압제에 항거한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에 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다.[13] 필립비서 1:21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공동번역성서), 마태오 복음서 10: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공동번역성서)[14] 이 사람들은 훗날 무함마드에게 살해당한다.[15] 다만 이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이슬람 포교 이후 메카는 다신교에 위협이 되자 무함마드를 살해하려고 했다. 따라서 위의 서술은 메카의 자유를 강조하려고 하였지만 메카도 이슬람 포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간과하고 있다. 메카의 위협으로 인하여 무함마드와 그의 동료들은 메디나로 이동하게 된다. 헤지라의 기원이 결국 메카의 무함마드에 대한 위협인 것은 사실이다. 차라리 지적할 거라면 후이다비야 조약을 위반했다고 지적하는게 옳은 사실이였다. 적어도 먼저 전쟁을 시작했던 것은 아니며 조약위반은 무함마드가 벌인 것이 사실이다.[16] 쿠란 8장의 명칭은 안 안팔, 즉 전리품의 장이다.[17] 하지만 쿠란 9장 1~11을 보면 전쟁을 먼저 선빵치라는 게 아니라 침략을 하면 그에 대해 대항하라는 것이다. 약탈하기 위해서 전쟁을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18] 쿠란 24:2장이나 17:32장을 보면 지나(zina), 즉 혼전 성관계는 불법이며 4:3에서 을 허용은 하지만 4:129를 보면 여자 한명으로 만족할 것을 권장하고 있는 측면은 고려해야 한다. 참고로 지나의 처벌은 가죽채찍 100대이며 샤리아에선 기혼자에겐 투석형후두드의 기본이다. 역사적으로는 이슬람권에서 노예를 많이 거느렸지만 노예를 해방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하디스 등을 보면 성노예가 이슬람적이지 않다는 것은 명확하다. 물론 그와 별개로 무슬림들은 슬라브나 흑인 여성들을 성노예로 써먹었다.[19] 쿠란 9장을 보더라도 그들이 용서를 구하면 그들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슬람을 믿지 않는다고 대량학살을 하라는 것은 이슬람의 명령이 아니다. 실제로 IS조차도 일단은 그리스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9:9절은 메카의 다신교도들과의 싸움이였음에도, 일단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줬다. 이는 명확해서 훗날 무함마드가 메카를 점령했음에도 그들을 대량학살하지는 않고 이슬람으로 개종 후 메카 잔류 아니면 추방이라는 형식을 거쳤다. 이것은 스페인의 무어인에 대한 태도와 비슷한 것을 보면 무함마드가 대량학살을 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보여짐.[20] 앞서 언급했듯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이교도를 대하는 방식은 이슬람적이지 못하다. 무함마드조차도 다신교도들을 학살하지 않았으며 꼭 본다면 유대인 학살이 있겠으나 이것도 반유대주의나 히틀러마냥 유대인을 공격했다기보다는 유대인들이 메카와 내통하고 후이다비야 조약을 위반했던 사실이 존재한다. 모든 유대인 부족을 학살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방적인 다에시식 증오에 입각한 학살은 아니다. 학살이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초기 이슬람에서도 아프간 등 불교나 힌두교도들에게도 지즈야를 거두었던 것을 보면 초기 이슬람보다도 못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는 퇴보적인 사이비 종교일 뿐이다. 7세기 기준으로 본다면 이교도를 대하는 방식이 동로마나 유럽 세계와 비슷하기는 했다. 다만 현대에도 그러는 게 문제일 뿐.[21] 사우디아라비아에도 참수형이 남아 있기도. 한것을 보면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기는 하다.[22] 알 카사스베 중위의 사망은 군인으로서 임무를 행하다 죽은 것이니 엄밀히 말해 순교보다는 전사, 순국이 좀 더 적합하겠지만 IS가 같은 수니파 무슬림조차 죽이는 것도 모자라 분살이라는 끔찍하고 심지어 이슬람 율법에도 위배되는(이슬람 율법에서 화형이나 화장은 엄금하는 사항이다. 불로써 죄인을 심판하는 것을 알라의 권능이라 여기기 때문.) 방법을 써서 죽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23] 다만 종교 혹은 포교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종교의 자유는 무교인이나 무신론자들도 공감하는 주제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