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6 22:29:24

오드뤼사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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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뤼사이 왕국
Одриско Царство
파일:오드뤼사이 왕국 상징.png
상징
파일:1938003.png
기원전 5세기 시탈케스 치세의 영토
<colbgcolor=#000><colcolor=#fff> 기원전 480년 ~ 서기 46년
성립 이전 최종 분할
아케메네스 제국 마케도니아 왕국
로마 제국
위치 발칸 반도 동부
수도 오그류사(B. C. 480~B. C. 323)
세우토폴리스(B. C. 323~B. C. 279)
플로브디프(B. C. 279~46)
언어 트라키아어, 고전 그리스어
종교 트라키아 다신교
민족 트라키아 부족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국왕 테레스 1세(BC 480~BC 445)
코티스 1세(BC 384~BC 360)
세우테스 3세(BC 324~?)
로메탈케스 3세, 피토도리스 2세(38~46)
현재 국가 불가리아, 그리스, 튀르키예, 루마니아

1. 개요2. 역사
2.1. 배경2.2. 초기의 팽창2.3. 일시적인 분열과 코티스 1세2.4. 3개로 분열된 왕국과 마케도니아의 침략2.5. 세우테스 3세의 봉기와 왕국의 부활2.6. 이후의 오드뤼사이 왕국
3. 역대 군주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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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에 위치했던 국가.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하다가, 사트라프 마르도니오스가 패퇴하고 테레스 1세가 트라키아와 발칸의 부족들을 규합하며 생겨난 왕국이다. 전성기에는 트라키아 전역을 지배하고, 마케도니아를 큰 위기에 몰아넣었지만, 결속력이 약한 연맹 왕국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접경의 부족과 왕국들이 차례로 로마에게 복속당하다 최종적으로 46년고대 로마에 합병되었다.

2. 역사

2.1. 배경

트라키아인들은 흑해 북쪽에서 다키아인과 함께 남하한 민족이다. 그들이 거주한 트라키아는 북부와 남부로 나뉘며, 하이모스 산맥 또는 북쪽으로 약간 더 떨어진 다뉴브 강이 자연적 경계를 형성했다. 트라키아 남부는 하이모스 강과 로도페스 강, 포로폰티스 강, 에게 해와 흑해 사이의 비옥한 평지를 형성했으며, 서쪽 경계는 스트라몬 강과 모라바 강 상류에 의해 형성되었다. 트라키아 북부는 다뉴브 강에서 카르파티아 강, 폰토스-카스피해 스텝의 서쪽 가장자리까지 미치는 영역으로 정의되었다.

그들은 이 광활한 영역의 내륙 지대에서 40개 이상의 부족을 형성했다. 반면 트라키아 해안 지대는 기원전 7세기부터 6세기까지 타소스, 비잔티움, 오데소스 등 여러 도시 국가들이 그리스인들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 도시국가들과 인접한 부족들은 그리스인들과 때로는 전쟁을 벌이면서도 때로는 경제, 문화 교류를 활발히 했지만, 내륙에 더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부족들은 고유의 전통을 고수하며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였다.

그러던 기원전 516년, 아케메네스 왕조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 원정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트라키아에 대군을 보냈다. 트라키아인들은 월등한 무장과 전투력을 갖춘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항복했다.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오스가 다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여러 부족으로부터 공물을 받아냈다. 이후 트라키아는 페르시아 육군의 그리스 공략을 준비하기 위한 군사 기지로 활용되었고, 그리스 국경지대에 여러 요새가 설립되었다. 사트라프가 트라키아를 다스렸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지만, 이 시기에 페르시아에서 사용되던 동전이 트라키아에서 대량 유입된 사실이 고고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졌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대군이 그리스로 쳐들어갔다. 원정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레오니다스 1세가 이끄는 적군을 사흘간의 격전 끝에 섬멸한 뒤 아테네를 파괴했지만, 뒤이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참패했다. 그 후 겨울이 다가오자. 크세르크세스 1세는 마르도니오스에게 상당한 병력을 맡기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마르도니오스는 이듬해인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페르시아군은 막심한 손실을 입고 본국으로 쫓겨났다. 이후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일대를 포함한 에게 해 전체를 공격하고 뒤이어 이집트까지 노리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공세에 고전했고, 자연히 머나먼 트라키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페르시아군이 전면 철수하면서 힘의 공백이 발생하면서, 트라키아는 수년간 혼란에 휩싸였다. 이 시기 헤브로스 강 유역의 드넓은 계곡을 지배하고 있던 오드뤼사이 부족이 테레스 1세의 지휘하에 세력을 급격하게 확장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470년대에 중부 트라키아 일대를 지배하고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이리하여 오드뤼사이 왕국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2.2. 초기의 팽창

파일:Teres_I_of_Odrysian.jpg
불가리아 중부 카잔루크 지역의 '왕들의 계곡'에서 발견된, 테레스 1세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박 마스크.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오드뤼사이 왕국의 최초의 군주는 테레스 1세라고 한다. 그는 기원전 480년경부터 오드뤼사이 부족을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이끄는 오드뤼사이 부족은 수 년간 여러 부족을 제압한 끝에 북쪽의 다뉴브 강에서 에게 해의 압데라 외곽까지 이르는 트라키아 중부 일대를 지배했다. 여기에 북동쪽의 스키타이족의 왕 아리아페이테스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그들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그는 트리키아 역사상 최초로 바실레프스를 칭하고 나름의 통치 기구도 설립했다. 수도는 딱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테레스 1세가 거점으로 삼은 오그류사가 사실상 수도 역할을 수행했고, 왕국에 예속된 부족들은 정해진 공물을 바치는 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한편 기원전 438년 스파르토코스라는 트라키아인이 흑해 크림 반도타만 반도 일대에서 보스포로스 왕국을 세웠다. 이 인물이 테레스 1세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은 높지 않다.

기원전 445년경 군사 작전 도중 사망한 테레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시탈케스는 확장 정책을 이어가 남쪽의 압데라에서 북쪽의 다뉴브 강 어귀, 동쪽의 흑해에서 서쪽의 스트라이몬 강의 발원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용병대를 지원해줬다고 한다. 기원전 429년 디오스, 파오니안, 아그리안, 레오스 등 독립 트라키아 부족들을 포함하는 대병력을 이끌고 페르디카스 2세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그가 이끄는 병력은 15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보병 12만 명에 기병 5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명백한 과장이지만, 마케도니아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월한 건 분명하다. 이 침공은 아테네의 사주로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군대는 악시아 강을 돌아 마케도니아 각지를 돌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미그도니아, 안테문트, 그리고 크레스토니아를 약탈했으며, 다수의 정착촌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안가서 식량난에 시달렸고, 아테네가 함대를 보내주지 않은데다, 마케도니아군의 거센 반격에 시달리다 1개월여 만에 본국으로 퇴각했다. 이후 페르디카스 2세가 누이 스트라토니케를 그에게 시집보내면서, 양국은 화해했다.

기원전 424년, 시탈케스는 북마케도니아 북부와 불가리아 서부의 평야를 지배했던 트리발리 족을 침공했지만 전투에서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시탈케스의 조카 세우테스 1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트리발리 족과 화해하고 삼촌에게 시집갔다가 미망인이 된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했으며, 마케도니아 왕국으로부터 매년 400여 달란트의 공물을 받으면서 군비를 확충했다. 기원전 425년에서 기원전 423년까지 암피폴리스의 소유권을 놓고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격돌했을 때, 그는 선왕 때 동맹을 맺었던 아테네를 돕기를 거부했다. 또한 기원전 418년부터 기원전 415년까지 암피폴리스를 상대로 침공한 페르디카스 2세와 이에 맞선 아테네 중 어느 쪽도 돕지 않았다. 이것이 평화를 선호했기 때문인지, 피지배 민족에 대한 통제력 약화로 인해 외부에 신경쓰기 힘들었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2.3. 일시적인 분열과 코티스 1세

세우테스 1세는 기원전 411년 갈리폴리 반도를 공략하려 했다가 아테네군에 격퇴당한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투키디데스의 역사에는 그의 죽음이나 후계자의 등장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 때 아테네 해군에 접근한 알키비아데스가 "나는 트라키아 왕 메도쿠스와 세우테스를 친구로 두고 있다"라고 자랑한 걸 봤을 때, 이 시기에 왕국이 메도쿠스(또는 아마도코스 1세)와 세우테스 2세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메도쿠스 또는 아마도코스 1세는 트라키아 내륙 지역을 다스렸던 것으로 보이며, 세우테스 2세는 아폴로티아 폰티카에서 스트란차 강 너머 북부 프로폰티스 해안 일부까지 이르는 트라키아 동부 일대를 다스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00년, 세우테스 2세는 그리스 용병들을 고용하여 테레스의 후예를 자칭한 트라키아인이 이끄는 부족 연합을 격파하고 지배권을 확장했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그는 메도쿠스 또는 아마도코스 1세를 주군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우테스 2세는 몇년 후 메도쿠스 또는 아마도코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의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단지 기원전 389년 아테네 장군 트라시볼로스가 둘을 중재해 세우테스 2세가 아마도코스 1세의 권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트라키아 해안 지대의 지배를 인정받았다는 사실만 알려졌다.

메도쿠스 또는 아마도코스 1세는 평화 협약을 맺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헤브리젤미스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다. 반면에 세우테스 2세는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얼마 후 세우테스 2세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번에는 거의 모든 영토를 잃고 축출되었다. 그러다 아테네 장군 이피크라테스가 이끄는 용병대가 트라키아 해안지대를 점령하고 세우테스 2세에게 넘겨줬고, 세우테스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들 코티스 1세의 딸을 이피크라테스에게 시집보냈다. 기원전 384년 세우테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코티스 1세는 이피크라테스의 도움으로 기원전 383년에 사망한 헤브리젤미스의 후계자로서 왕국을 통합하고 아마도코스 2세와 사라토코스를 포함한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이후 에게 해와 체르소네스 방면으로 왕국을 확장하려 하자, 이 지역에 세력권을 갖추고 있던 아테네는 위협을 느끼고 체르소네스 일대의 여러 도시와 섬들을 끌여들여 연방을 결성해 그와 맞섰다. 코티스 1세는 아테네 연방과 일진일퇴를 벌인 끝에 기원전 360년 체르소네스 반도의 거의 모든 지역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원전 360년 9월, 체르소네스 반도의 마지막 아테네 연방 도시인 세피소토스를 공격하던 중 파이톤과 헤라클레이데스에게 암살당했다.

2.4. 3개로 분열된 왕국과 마케도니아의 침략

코티스 1세의 아들 케르소블렙테스는 아버지가 피살된 후 왕위에 올랐지만, 아마도코스 1세의 아들 아마도코스 2세베리사데스를 비롯한 여러 정적들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고, 결국 왕국은 3개로 분열되었다. 케르소블렙테스는 헤브로스와 톤조스 강 하류 너머의 동부 트라키아를 통치했으며, 아마도코스 2세는 마로네이아와 메리차 사이의 중부 트라키아를 다스렸다. 베리사데스는 서쪽의 스트리몬 강에서 동쪽의 마로니아에 이르는 서부 트라키아를 다스렸다. 케르소블렙테스는 세 군주 중 가장 야심찬 인물이었다. 그는 체르소네스 반도를 둘러싼 아테네와의 전쟁을 지속하는 한편 왕국을 재통합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아마도코스 2세와 베리사데스가 아테네의 지원을 받고 케르소블렙테스의 침공을 모조리 격퇴했고, 결국 케르소블렙테스는 기원전 357년 체르소네스 반도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다른 두 왕과 화평을 맺으며, 아테네와 공동으로 동맹을 맺고, 에게 해와 헬레스폰트를 따라 개척된 식민도시의 공물을 공유하며, 그리스의 속국 식민도시가 반란을 일으킬 때 군사적 지원을 주기로 약속하는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케르소블렙테스는 오드뤼사이 왕국을 통합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러던 기원전 357/356년,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2세가 베리사데스의 영역에 속했던 암피폴리스와 크레니데스를 정복했다. 베리사데스는 기원전 352년경 사망했고, 아들인 케트리포리스가 뒤를 이었다. 그는 필리포스 2세의 침략에 맞서 파이오니아와 일리리아의 왕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필리포스 2세는 그들을 하나씩 격파했다. 이리하여 케트리포리스의 힘이 약화되자, 케르소블렙테스는 이를 기회로 여기고 마케도니아 왕국과 동맹을 논의했다. 그가 케트리포리스를 공략하는 걸 마케도니아가 돕는다면, 자신은 마케도니아가 아테네 영역을 치는 걸 돕겠다고 했다. 아테네는 필리포스 2세와 케르소블렙테스가 동맹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 세스토스를 기습 공략한 뒤 주민들을 학살해 위협을 가했다. 이에 케르소블렙테스는 체르소네스 반도의 많은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아테네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필리포스 2세는 즉각 아마도코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케르소블렙테스를 향해 진격했다. 케르소블렙테스는 마케도니아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한 끝에 기원전 351년 자기 아들을 마케도니아에 인질로 보냈다. 이후 필리포스 2세는 키트리포리스의 왕국을 멸망시키고 아마도코스 2세 마저 기원전 351년 폐위시키고 아마도코스 2세의 아들 테레스 2세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이후 마케도니아의 봉신이 되었던 케르소블렙테스는 기원전 347년 또는 346년 초 아테네군을 끌여들어 에게 해 연안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군은 곧바로 공세를 가해 아테네 수비대를 물리치고 에게 해 연안을 직할 통치했다. 몇년 후, 케르소블렙테스는 테레스 2세와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의 보호를 받고 있던 케르소네시아를 침공했다. 그러자 필리포스 2세는 페르시아 샤한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와 협상해 케르소블렙테스에 대한 이오니아 도시국가들의 지원을 중단하게 한 뒤 기원전 342년 오드뤼시아 왕국을 향한 최종 공세를 개시했다. 이후 치열한 전쟁을 벌인 끝에,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41년 하반기 또는 기원전 340년 케르소블렙테스와 테레스 2세를 처치하거나 예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오드뤼사이 왕국은 마케도니아에게 복속했다. 비록 완전 병합되지는 않고 왕국의 체계는 유지되었지만, 필리포스 2세가 세운 스트라테고스의 간섭을 받아야 했으며, 마케도니아 궁정에 공물을 매년 제공하고 보조병을 제공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오드뤼사이인'으로 불리는 이 부대는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의 발칸 반도 제압과 뒤이은 동방 원정 때 함께 했다. 또한 필리포스 2세는 트라키아에 여러 요새와 도시를 세워 트라키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트라키아 부족민들은 강력했던 오드뤼사이 왕국을 그리워했고, 마케도니아의 압제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항상 노렸다.

2.5. 세우테스 3세의 봉기와 왕국의 부활

파일:세우테스 3세.png
2004년 불가리아 시프카 인근 골랴마타 코스마카 봉분에서 발견된 세우테스 3세의 청동 두상.

기원전 325년, 트라키아의 스트라테고이 조피리온이 오드뤼사이 왕국의 북동쪽에 건국된 게타이 왕국을 향한 원정을 감행했다가 전사했다. 이로 인해 마케도니아의 트라키아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자, 세우테스 3세가 이 때를 틈타 반란을 일으켜 수년 사이에 트라키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한 후, 그의 근위대원이었던 리시마코스가 트라키아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다.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로 향한 뒤 세우테스 3세와 맞붙었다. 양자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트라키아 내륙은 세우테스 3세의 것이 되었고 에게 해와 흑해 연한 지대는 리시마코스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기원전 320년, 세우테스 3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세우토폴리스(오늘날 불가리아의 카잔루크 근처)를 건설하고 수도로 삼았다. 이 도시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를 모델로 삼고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반영했다. 기원전 313년 흑해 서쪽 해안에서 리시마코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리시마코스에게 패배했다. 이후 리시마코스의 딸 베레니케와 결혼해 양자간의 적대 관계를 종식했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 사망했는지도 알 수 없다. 세우토폴리스에서 출토된 비문에는 그의 아내 베레니케가 통치를 행사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으며, 필리포스 2세가 과거에 세웠던 마을인 카빌레의 참주 스파르타코스와의 협상이 기재되었다. 스파르타코스는 기원전 281년 이후에 주조된 여러 동전들에서 자신을 바실레프스로 치켜세우는 등 위세를 떨쳤다.

세우테스 3세 사후 그의 아들로 알려진 로이고스가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인물은 카잔루크의 '왕들의 계곡'에서 출토된 동전 몇 개와 비문에서만 간략하게 명시되어 있을 뿐이며, 행적은 전혀 알 수 없다. 세우테스 3세가 부활시킨 왕조의 운명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세우토폴리스가 대대적인 파괴를 당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270년대에 발칸 반도 각지를 초토화시킨 켈트족이 세우토폴리스 역시 파괴했으며, 왕조도 그때 무너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2.6. 이후의 오드뤼사이 왕국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세우테스 3세의 왕국이 무너진 후에도 오드뤼사이 왕국은 어떤 형태로든 잔존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이래로 트라키아의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이 시기의 왕국에 대한 문헌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켈트족은 트라키아에 정착한 뒤 틸리스 왕국을 세워 60여 년간 트라키아인들을 상대로 공물을 받으며 존속했지만 기원전 220년 무렵 트라키아인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결국 전복되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트라키아 해안지대를 연이어 지배했지만, 내륙 일대에는 세력이 미치지 않았고, 트라키아 내륙에서는 여러 부족들이 세력 다툼을 벌였다.

기원전 3세기 말,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는 트라키아에 관심을 보이고 지속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기원전 184년 또는 183년에 헤브로스 강 상류의 평야로 진격하여 오드뤼사이인들과 다른 지역 부족들을 물리치고 필리포폴리스를 정복했다. 이후 그는 트라키아의 지배자를 자처했지만, 기원전 179년 그가 사망한 뒤 트라키아인들은 마케도니아로부터 독립했다. 기원전 171년부터 로마 공화국과 맞서 싸운 마케도니아 군주 페르세우스는 트라키아 왕 코티스와 동맹을 맺었다. 폴리비오스는 이 코티스 왕을 오드뤼사이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인물이 정말로 오드뤼사이 국왕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피드나 전투에 참가해 마케도니아를 도왔지만, 결국 마케도니아가 로마에게 무너지자 로마의 동맹자가 되었다.

그 후 로마인들은 트라키아 해안 지대를 직접 지배했지만 트라키아 내륙 지역은 트라키아 부족들이 로마에 일정한 공물을 바치는 대신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족으로 취급된 이들은 사파이족과 아스티족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2세기 말과 1세기 초에 트라키아 부족들간의 분쟁이 연이어 벌어졌고, 로마 공화국은 이를 중재하는 과정에서 점차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직후, 아우구스투스는 트라키아 내륙 지역을 사파이 족이 주도하는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시켜 로마의 속국으로 삼기로 했다. 이 왕국은 오드뤼사이 왕국의 후예를 자처했기에, '오드뤼사이-사파이 왕국'으로도 불린다. 많은 트라키아 부족들은 이에 불복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지만 로마군의 지원을 받은 사파이족이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나중에는 다뉴브 강을 따라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던 서기 12년, 사파이 왕국의 통치자 로메탈케스 1세가 사망했다. 이에 로마는 왕국을 2개로 나누었다. 하나는 그의 아들 코티스 3세가 다스렸고, 다른 하나는 그의 형제 레스쿠포리스 2세가 다스렸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여파로 로마가 다른 곳에 신경쓰지 못하자, 레스쿠포리스 2세는 이 때를 틈타 코티스 3세의 영토를 빼앗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연이어 실패했고, 양자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서기 18년, 티베리우스 황제가 두 사람에게 화해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레스쿠포리스 2세는 화해 차원에서 코티스 3세를 연회에 초대했다가 순식간에 체포해 감옥에 가둔 뒤 왕국 전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후 코티스 3세는 옥중에서 살해되었고, 코티스 3세의 아내 안토니아 트뤼파이나와 아이들은 트라키아를 떠나 키지코스로 망명했다. 서기 19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코티스 3세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티베리우스는 레스쿠포리스 2세를 로마 원로원의 재판에 회부하고 안토니아 트뤼파이나를 증인으로 호출했다. 트뤼파이나가 레스쿠포리스 2세를 남편 살해자로 비난하자, 티베리우스는 이를 받아들여 레스쿠포리스 2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유배보냈다. 레스쿠포리스 2세는 유배되던 중 탈출을 시도하다가 로마군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왕국 전체를 안토니아 트뤼파이나에게 양도하면서, 코티스 3세와 트뤼파이나의 장남 로메탈케스 2세가 어머니와 함께 통치하도록 했다. 서기 21년 트라키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메탈케스 2세를 포위하자, 로마군이 개입하여 반란을 진압해줬다. 로메탈케스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로마군이 26년 남부 트라키아 산악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걸 도와줬다. 서기 38년 로메탈케스 2세가 사망한 뒤, 안토니아 트뤼파이나는 칼리굴라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왕위를 레스쿠포리스 2세의 아들 로메탈케스 3세에게 양위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딸 피토도리스 2세를 로메탈케스 3세와 결혼시켜 과거의 앙금을 매듭지으려 했다.

그러나 서기 46년, 로메탈케스 3세는 피토도리스 2세의 사주를 받은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트라키아인들의 연이은 반란에 시달리고 왕족들끼리 왕위다툼을 일삼는 사파이 왕국에 염증을 느끼고 트라키아 전역을 로마의 속주로 삼기로 했다. 이리하여 오드뤼사이 왕국의 건국으로 시작된 트라키아인들의 독자적인 역사는 막을 내렸고, 로마는 이후로 천여 년간 트라키아를 지배했다.

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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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오드뤼사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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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스 1세 시탈케스 세우테스 1세 아마도코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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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테스 2세 헤브리젤미스 코티스 1세
서부 오드뤼사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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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오드뤼사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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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소블렙테스
오드뤼사이 왕국의 부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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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뤼사이-사파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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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티스 1세 레스쿠포리스 1세 코티스 2세 로메탈케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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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쿠포리스 2세 안토니아 트뤼파이나 로메탈케스 3세
코티스 3세 로메탈케스 2세 피토도리스 2세 }}}}}}}}}

4. 여담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토탈 워: 로마2에서 플레이어블 팩션으로 등장한다.